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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06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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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허리를 붙잡고 놔주지 않는 공준의 다부진 팔을 가까스로 떨쳐낸 주자서가 여유롭게 웃으며 물러난 그를 노려보곤 장집사에게 화살을 돌렸어.
"장집사. 왜 이 녀석이 여기 있는 거지?"
"도련님 그, 그게..."
"아, 그건 제가 설명하죠."
난감해 하는 장집사를 뒤로 하고 공준이 제게 물으라는 듯 품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떨떠름한 표정을 한 주자서에게 명함을 내밀었지.
"성령대학병원 의사 공준입니다. 이사장님의 주치의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성령대학병원이라면 장씨 일가가 운영하는 병원이였어. 외국지사에서 근무할 당시 장집사를 통해 받은 그의 보고서에 따르면 공준이 의대 졸업 후 병원에 취직하였다 들었는데 그게 하필 우리 병원이라니. 게다가 장씨 일가 오너들을 위해 출장진료도 맡게 된 듯 했지. 설마 이 아이 일부러...
"준이 너...설마 아직도 나를..."
주자서가 혼란스러운 눈으로 공준을 보자 그가 어깨를 떨며 크게 웃더니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어.
"...이사장님. 죄송하지만 전 그저 지시에 따라 일을 하러 왔을 뿐입니다. 괜한 오해는 하지 말아주셨으면 좋겠네요."
"그럼...왜 하필 우리 병원에..."
"뭔가 대단히 착각하시는 것 같은데...성령대학병원은 국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우수한 병원이고 저는 그저 제 커리어를 위한 선택을 한 겁니다."
막힘없이 대답하는 그의 얼굴엔 정말 지난 날의 그리움이나 미련이 느껴지지 않는...홀가분한 표정이 어렸고, 이에 주자서는 알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이 밀려왔지만 그가 못난 저를 잊고 잘 살아온 것 같아 조금 안심했어.
"정말 그런 거라면...다행이야..."
그리 말하며 주자서가 한결 풀어진 얼굴을 하자,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심술맞은 표정을 지은 공준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지.
"다행?"
"그래. 난 네가 혹여 나 때문에 많이 힘들어 하진 않았을까...많이 걱정했었는데...잘 이겨낸 것 같아 다행이야."
"하."
그 말에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짓던 공준이 싸늘한 얼굴로 주자서를 쳐다봤어.
"당신이 내 걱정을 해?"
"당연한 거 아냐? 너는 내가..."
"거짓말."
당신은 나를 버렸잖아.
상처받은 눈을 하고 공준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주자서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한 감정을 느꼈지.
"준아.."
"됐어요. 어차피 다 지난 과거일 뿐이니까. 이제 더는 그 얘긴 하지 말죠."
언제 그런 얼굴을 했냐는 듯, 그 옛날 상처받은 소년의 얼굴을 지우고 차가운 표정을 한 공준이 주자서의 팔을 거칠게 잡아 침대로 이끌었지. 어쩐지 주자서는 더이상 그의 손길을 매몰차게 뿌리칠 수가 없었어.
"하아..."
억지로 다시 침대에 눕혀진 뒤 주삿바늘이 빠져 피가 흐르는 손목을 지혈받은 주자서는 반대쪽 손목에 연결된 링거의 수액 방울이 떨어지는 걸 멍하니 쳐다보다 아까 공준이 두고 간 약이 놓인 테이블 위로 시선을 옮겼어.
'고집 부리지 말고 오늘은 푹 쉬어요. 이따 다시 올게요.'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리 말한 그는 처방한 약을 꼭 챙겨먹으라며 신신당부하더니 장집사와 함께 방을 나갔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분명 이곳을 떠나기 전 공준에게 고등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본가에서 나가달라 말했고, 외국에서 받은 보고서에 따르면 공준은 약속대로 저택을 나가 장집사가 마련해준 오피스텔에서 생활하며 대학을 다니고, 졸업 후엔 모 병원에서 재직 중이라 들었는데 어느 틈에 그가 장씨 일가의 전담 주치의가 돼버린 건지...장집사는 왜 제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은 건지 의문 투성이였어.
달칵-
"자요?"
한참 골머리를 앓고 있을 무렵,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공준이 문을 열고 얼굴을 빼꼼 들이밀었지. 자는 놈한테 자냐고 물으면 퍽도 대답하겠다...순간 그 옛날 어린 소년에게 잔소리하듯 한소리 할 뻔한 주자서는 이렇게 된 거 그가 저를 귀찮게 하기 전에 진짜 자는 척이나 해야겠다 마음 먹고 눈을 질끈 감았어.
"진짜 자는 거야?"
내친 김에 깊은 잠에 든 것처럼 일정하게 숨을 쉬는 소리까지 내자 잠시 후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고, 방안을 감도는 적막에 안심한 주자서가 눈을 뜨려는 순간. 방을 나간 줄 알았던 공준이 조심스런 발걸음으로 천천히 침대 쪽으로 다가오는게 느껴지는 거야...뭐야...아까 나간 게 아니였어?
다시 눈을 질끈 감은 주자서가 입술을 꽉 깨물자 어느새 침대 위에 엉덩이를 걸쳐 앉은 공준이 테이블 위에 약을 확인했지.
"약 챙겨먹으랬더니 안먹었네..."
정말 말 안들어...
그가 작게 한숨을 포옥 내쉬자 주자서는 그 옛날 바쁜 업무로 틈만 나면 식사를 빼먹던 자신을 걱정하던 소년의 모습이 떠올랐어. 애써 쌀쌀맞게 제게 대할 땐 언제고...넌 여전히 나를 걱정하는 구나...괜시리 뭉클해진 주자서가 자는 척은 관두고 오랜만에 만난 그와 그간의 얘기도 나누며 회포나 풀어볼까..하며 고민하던 찰나 공준이 몸을 제 쪽으로 기울이는게 느껴졌지.
"장철한..."
왜 이 녀석아...하고 소리내 대답할 순 없었지만, 너무나도 아련하게 제 이름을 부르는 그로 인해 주자서는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속으로 대답했어. 응. 준아.
"내가 당신을 얼마나 그리워 했는지 알아...?"
당신이 떠나고 내가 얼마나 아팠는데...당신은 그거 모르지...
모를 거야...하며 혼잣말하는 공준이 안쓰러워진 주자서가 당장이라도 그를 끌어안아 위로해주고 싶었지. 아니야...준아...나도 네가...
"근데 괜찮아요...이제..."
감은 눈에 물기가 차오르기 시작한 주자서가 애써 눈물을 참아보려는데 공준이 한쪽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싸더니 천천히 고개를 숙였어.
"이젠 내가 당신을 놓아주지 않을 거니까..."
그리 말한 그가 버석한 제 입술에 입맞추자 순간 숨쉬는 법을 잊은 주자서가 작은 손으로 침대 시트를 꽉 쥐었지. 저에 대한 마음은 그저 지난 과거에 불과하다던 그는 마치 오랜 갈증에 시달리다 발견한 오아시스를 탐하듯 주자서의 입술을 집요하게 핥고 깨물더니 꾹 다문 주자서의 입술이 마음에 안든다는 듯 굵고 긴 검지손가락으로 억지로 그의 입술을 벌려 한참을 그의 안을 헤집어 괴롭혔어. 그러다 마지막엔 아쉬운 듯 다정하고 부드럽게 입을 맞추고는 천천히 입술을 뗐지. 제 타액으로 젖어버린 주자서의 입술을 엄지로 조심스레 닦아준 공준은 잠시 그렇게 주자서의 얼굴 이곳저곳을 어루만지다 창밖이 칠흙같이 어두운 밤이 되어서야 몸을 일으켜 방을 나갔어.
그제서야 제대로 숨을 쉴 수 있게 된 주자서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눈을 뜨자 미처 흘러내리지 못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지.
"바보 녀석...나를 잊었다더니...이게 뭐야..."
시린 겨울, 창을 통해 들어온 달빛이 유난히 서글픈 12월의 밤이었어.
객행자서 준저 사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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