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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03 22:01
망천화처럼 이연화 해독할 수 있는 약초가 있는데, 형질을 바꾸는 부작용이 있어서 떨떠름해하던 이연화와 그런 게 뭐가 중하냐 하던 주변사람들이 우당탕하는 게 보고싶다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이연화는 당황했다. 희귀한 일이었으나 그럴 수밖에 없었다.
새벽에 잠깐 눈을 떴을 때, 이연화는 조금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 어딘가에서 희미한 체취가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낯선 듯 낯익은 냄새였다. 이연화가 몸을 일으켰다. 적의 기척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는데, 어쩐지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어둠에 익숙한 눈으로 문을 바라보자, 그 너머로 방다병의 그림자가 보였다. 청년은 문앞의 기둥에 기댄 채 앉아 있었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자세와 똑같았다. "방소보?" 이연화가 살짝 잠긴 목소리로 부르며 발을 옮겼다. 문 너머에서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잠이 들었나? 그럼 이 체취는 뭐지? 한 소매로 입과 코를 가린 채, 이연화가 문을 열었다.
희미하게 느껴지던 냄새가 확 진해졌다. 이연화가 자기도 모르게 반 발짝쯤 물러섰다. "방소보." 이연화가 놀라 부르며 얼른 그 모습을 살폈다. 방다병은 잠든 듯이 눈을 감고 있었는데, 그 얼굴이 고통을 참듯이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이연화는 이 상황이 무엇인지 깨닫고 눈을 크게 떴다.
"방다병. 방다병! 너 왜 갑자기 희락기가-정신 차려. 약 어디 있어?"
이연화가 차마 상대를 건드리지 못하고 물었다. 하지만 방다병은 끙끙거릴 뿐 입을 열어 말하지 못했다. 이연화는 매우 낭패스러운 기분에 휩싸여 주변을 둘러보았다. 희락기는 음인이든 양인이든 꽤 취약해지는 시기였기에, 대부분의 무림인은 난감한 상황에 대비하여 꼭 상비약을 들고 다니곤 했다. 방다병도 물론 약을 지니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문제는, 약을 찾기 위해 청년의 품을 뒤져야 한다는 점이었다. 나가서 다른 사람을 불러와야 하나? 내가 지금 얘를 만져도 되는 건가? 고민하던 이연화는, 방다병이 아픈 강아지처럼 신음을 흘렸을 때 혀를 차며 청년의 몸을 붙들었다.
"일단 안에 좀 누워 있어, 가서 사람을 불러올 테니까."
냄새만 안 풀면 되겠지. 이연화는 다짐하듯 생각하며 방다병을 부축했다. 또렷한 의식을 유지하고자 애썼으나 상대의 체취가 과히 자극적이었다. 전에도 상대의 냄새를 맡은 적이 있었지만, 당시의 방다병은 희락기도 아니었을 뿐더러 최대한 스스로를 통제하고자 애쓰고 있었다. 이만큼 성적인 함의가 가득 담긴 체취를 마구 뿜어낸 적은 없었다. 이연화의 얼굴이 생리적인 반응으로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몸의 어딘가가 달콤하게 저려오는 듯했으나 그 기분에 몸을 내맡길 수야 없었다.
자신의 침상에 방다병을 눕혔을 때, 이연화는 조금 실수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침상에는 어쨌든 자신의 체취가 엷게라도 배어 있었다. 그 냄새를 느꼈는지, 방다병이 눈을 살짝 떴다. 또렷한 빛이 없이, 열기에 들뜬 눈동자였다. 붉은 입술 사이로 새던 숨결이 한층 거칠어졌다. 아직 앳된 구석이 모두 사라지지 않은 인상의 청년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신음을 흘리며 이연화의 베개에 뺨을 부볐다. 이연화는 어쩐지 보아서는 안 되는 광경을 마주한 사람처럼 당혹하다가, 곧 자리를 뜨려 몸을 일으켰다. 의원을 부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방문을 향하기 전, 강한 손길이 팔목을 잡아당겼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행동에, 이연화는 반격할 시기를 한 박자 놓치고 말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이미 자리에 누워 있었고, 방다병의 얼굴이 지척이었다. 긴 머리칼이 침상 위로 흩어졌다. 지금 이 녀석이 날 거꾸러뜨린 거야? 이연화가 어이없는 얼굴로 청년을 올려다보았다. 한 손으로 얼른 그 몸을 밀어내려는데, 방다병이 양팔로 이연화를 꽉 끌어안으며 목덜미에 이마를 묻었다. 반듯한 이마에 알알이 배었던 땀이 목에 닿았다. "방다병!" 이연화가 기겁해 부르며 그 어깨를 잡았다. 여차하면 상대의 혈도를 찍어 제압해야 할 판이었다.
"이연화...."
이연화의 목에 입술을 붙인 채, 방다병이 잠에 취한 것 같은 목소리로 낮게 불렀다. 뜨거운 숨결과 목울림에 등으로 소름이 돋았다.
"또 아프지 마...."
방다병이 웅얼거렸다. 이연화의 눈이 커졌다. 희락기에 들어선 이들이 느끼는 감정과 생각은 거의 동일했다. 하지만 방다병은 지금 걱정 어린 소리를 흘리고 있었다. 단순한 번식 욕구보다는 조금 더 복잡한 색채를 띤 음성이었다.
"내가 지켜줄게...."
얘 지금 날 생각하면서 잠꼬대를 하는 거야? 대체 무슨 꿈을 꾸는 중이길래 날 지킨다는 소릴 하는 거야? 대체 날 보호한다는 게 얼마나 본능에 가까운 생각이면 희락기에 이런 말을 하는 건데? 잠깐만-왜 몸이 대뜸 반응하려고 하지? 이연화는 끝없이 쏟아지는 물음표에 잠시 압도당한 채 방다병의 어깨를 밀어냈다. 어느새 숨이 약간 가빠져 있었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맹목적인 애정을 여과 없이 마주하자, 기이한 편안함에 그야말로 질식할 지경이었다. 놀라움과 경계심이 순간적으로 내려가면서, 방다병에게 옮은 것처럼 피부가 은은히 달아올랐다.
"방다병...방소보. 비켜 봐."
이연화는 차마 내력을 섞어 장을 날리지 못하고, 방다병의 어깨를 탁탁 두드리며 건넸다. 하지만 그 숨결에 오히려 자극을 받았는지, 방다병은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를 웅얼웅얼 흘리며 이연화의 몸을 더 꼭 끌어안았다. 갈비뼈가 눌리면서 숨통이 막혔다. 빈틈 없이 덮쳐 오는 묵직한 체열과 체취에 정신이 아득했다. 심지어 방다병이 다리를 얽어 오는 하반신의 사정은 더욱 낭패였다. 상대의 다리 사이에서 단단한 질감을 느낀 순간, 이연화는 정말 제정신을 잠깐 놓아버릴 뻔했다. 평소 원하는 만큼 능청스럽고도 뻔뻔해질 수 있었지만, 그는 정말 드물게도 온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 만큼 당황했다. 짜르르한 열기가 아랫배에 고이면서 발끝이 움찔거렸다.
머릿속에 지진이 일어난 듯했다. 어쨌든, 이연화의 머릿속에서 상대는 아직 어린아이에 조금 더 가까웠다. 현재의 방다병은 비록 살아온 날에 비해 단단하고 매우 심지가 굳은 청년이었으나, 난 이상이의 제자라며 빽빽거리던 신참 형탐의 첫인상을 지우기란 쉽지 않았다. 상대가 어엿한 무인이라는 사실을 머리로 아는 것과, 몸으로 부대끼다 못해 직접 맞대는 것은 매우 다른 문제였다. 언제 이렇게 큰 거야? 이연화가 이를 악문 채 생각하며 몸을 뒤집으려 했다. 어쨌든 이 자세에서 빠져나가야 했다.
하지만 방다병은 이연화가 벗어나도록 놔두지 않았다. 심통이 난 꼬마처럼 팔에 힘을 주면서, 청년은 이마를 묻었던 목덜미에 입술을 대고는 이를 세웠다. 이연화의 입에서 헉 소리가 새어나갔다. 자기도 모르게 머리가 뒤로 젖혀지면서, 가까스로 누르고 있던 체취가 목에서부터 흐르듯이 번져나왔다. 꽤 만족스러웠는지, 방다병이 낮은 콧소리와 함께 목줄기를 살짝 빨아들였다. 이연화의 흉곽이 얕고 빠르게 오르내렸다. 허덕이는 숨으로 더 진한 연꽃 냄새가 섞였다. 머릿속에서 붉은 경고문이 번뜩이는 듯했다.
"방소보...."
이연화가 베개에 뺨을 누르며 낮게 긁히는 목소리로 불렀다. 으응. 방다병이 답인지 뭔지 모를 음성을 흘렸다. 상대가 맞닿은 하반신을 본능적으로 두어 번 흔들었다. 다리 사이가 옷 너머로 대놓고 부벼지는 느낌에, 이연화는 소리없는 비명을 참으며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등과 얼굴은 물론이고 정수리까지 뜨겁게 화끈거렸다. 상대의 손이 목 아래의 빗장뼈와 가슴팍을 더듬었다. 이연화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 손끝이 맨 피부를 스칠 때마다, 열기를 품은 소름이 등줄기를 타다닥 훑고 지나갔다.
가늘어지는 한 줄기 이성을 그러모아, 이연화는 후들후들 떨리는 손끝에 약간의 내력을 실어 상대의 혈을 찍었다. 방다병이 눈을 깜박였다. 그 눈동자에 잠깐 이성이 돌아온 듯했다. 이연화는 가쁜 숨을 고르며 상대를 애써 쏘아보았다. 몸싸움 아닌 몸싸움을 벌이느라, 침의가 반쯤 풀려 있었다. "이연화...?" 방다병이 멍하게 불렀다.
이연화가 너 약 어디 있느냐고 물으려던 순간, 갑자기 바람이 한 줄기 불어오나 싶더니 우악스러운 손이 방다병의 뒷덜미를 꽉 붙들었다. 방다병은 곧 종잇장처럼 벽으로 날아가 부딪치고는 바닥을 굴렀다. 이연화가 기겁해 일어섰다.
"뭐하는 거야!"
적비성은 전에 없이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대체 어디 있다가 불쑥 나타난 거야? 그렇게 물을 틈도 없이, 이연화는 방다병이 내상을 입지 않았는지 확인하기 위해 그편으로 다가가려 했다. 하지만 방다병의 위치는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바뀌었다. 적비성이 다시 그 몸을 들어 다른편 벽으로 내던진 탓이었다. 희락기에도 무인의 버릇을 잃지 않은 방다병이 낙법을 구사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몸 어딘가가 부러졌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연화가 대놓고 화를 내며 방다병의 앞으로 끼어들었다.
"적 맹주, 미쳤어? 그만해!"
"희락기에는 원래 이 정도 맞아야 좀 정신을 차린다."
적비성이 당당하게 이야기했다. 그 얼굴에 생리적인 불쾌감이 가득했다. 이연화가 날카롭게 성질을 냈다.
"약을 먹여야지 다짜고짜 때리면 어떡해! 됐으니 넌 가서 관 협의나 불러와, 아무리 희락기라도 얘 열이 너무 높아."
"네가 다녀와라. 너희 둘을 남겨놓을 수는 없으니."
"뭐, 내가 정신 잃고 얘한테 달려들기라도 할까봐? 그럴 일 없어, 혈을 눌러둘 테니까 얼른 가서 사람이나 좀 불러와."
이연화가 닭을 쫓듯이 훠이 손짓했다. 적비성의 눈썹이 꿈틀했다. 남자는 이연화의 말대로 자리를 떠나는 대신, 척척 걸어와 방다병의 몸을 자루처럼 둘러멨다. "그냥 내가 의원에게 바로 데려가겠다." 이연화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남자는 찬바람이 들어오는 문을 나가 훌쩍 사라져버렸다. 이연화는 밤바람이 불어닥치는 방에 엉망이 된 옷차림으로 멍청히 서 있다가, 곧 신경질적인 한숨과 함께 흐트러진 머리며 옷을 대충 정리했다.
관하몽은 자다가 난데없이 불려나온 사람답지 않게, 매우 침착하고 깔끔한 태도로 방다병을 보아주었다. 방다병은 다행히 약에 빠르게 반응해, 헐떡이며 몸부림치는 대신 단순한 열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누워 끙끙거리게 되었다. 눈을 감은 방다병을 바라보며, 이연화는 억울한 보호자처럼 이야기했다. 방다병의 희락기는 매우 규칙적이었으며 늘 전조 증상이 있었기에 갑작스레 낭패를 보지 않았다, 설령 조금 이르게 오더라도 이런 식으로 발작을 겪은 적은 없었다. 방다병에 몸에 꽂혔던 침을 회수하고, 관하몽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드물지만...이런 일이 있기는 합니다."
관하몽이 매우 신중하게 말했다. 의원의 신중함은 보통 불길한 징조였으므로, 이연화는 나쁜 소식에 대비하며 관하몽을 바라보았다. 관하몽은 자신이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다는 듯 방다병을 잠시 보았다가 천천히 이었다.
"자신이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음인을 누군가에게 빼앗기거나, 그 음인이 위험에 처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그 불안과 심화로 갑작스레 희락기를 맞기도 합니다."
이연화가 망연히 관하몽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두통이 밀려왔다. 이마를 꾹꾹 누르면서, 이연화는 매우 건조하고 피로하게 말했다.
"관 형. 나는 저 녀석이랑 각인한 게 아닌데요."
"반드시 각인 상대여야만 생기는 일은 아닙니다."
관하몽이 차분히 단언했다. 이연화는 끙 소리를 삼키며 잠시 눈을 감았다. 잠깐 독을 먹었을 때보다도 훨씬 골치가 아팠다. 대체 뭐가 불안하단 거지? 그깟 독 조금 먹고 피를 토한 것 때문인가? 아니면, 수십의 후보들을 백천원으로 끌어들여 이런 계획을 진행하는 것 때문인가? 어이없이 생각하다가, 이연화는 조금 마음을 고쳐먹었다. 가만히 돌이켜보니, 불안하기에는 꽤 괜찮은 조건들이었다. 내가 양인일 때에도 피 한 번 토할라치면 기함하는 아이였으니, 그럴 법도 하지. 이연화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문주에게도 약을 미리 드려 두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관하몽은 침을 챙겨 방을 나갔다. "아이고야." 이연화가 넋두리처럼 중얼거리며 뒷목을 문질렀다. 방다병이 깨어나면 이 일을 기억하려나? 그러면 나는 이 녀석보다 어른으로서 어떻게 응대해야 좋을까? 고민하면서, 이연화는 방다병의 방에 있던 찻주전자를 기울였다. 이미 식어버린 차가 잔을 채웠다. 이연화가 그 잔을 잡으려 할 때, 마주앉았던 적비성이 잔을 채어 갔다. 이연화는 차가운 차를 술처럼 넘기는 남자를 어이없이 보다가, 곧 고개를 저어버리고는 새 잔을 채웠다. 어쨌든 적비성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상황이 훨씬 꼬였을지도 몰랐다.
"너는 어떻게 알고 도중에 들어온 거야?"
"이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놈이 없는지, 백천원 지붕을 돌며 순시 중이었어. 그러다 네 처소 쪽이 눈에 들어왔지. 문이 열려 있기에 확인한 것뿐이다."
"뭐, 신세 졌네. 고마워."
고개를 까딱한 이연화가 자신의 잔을 적비성의 잔에 대충 부딪치고는 차를 마셨다. 물끄러미 이연화를 보다가, 적비성이 묘하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불렀다. "이연화." 찻잔에 입을 댄 채, 이연화가 묻는 시선을 던졌다. 적비성이 미간을 팍 찌푸리고는 말했다.
"만일 네가 시답잖은 놈과 각인하면, 나는 그 각인을 깰 거다. 필요하다면 그놈을 없애거나, 차라리 내가 너와 각인해서라도."
난데없이 해괴한 말을 들은 사람답게, 이연화는 차를 뿜었다. 적비성은 별로 놀라지도 않은 얼굴로 이연화를 응시하고 있었다. 입가를 대충 닦고, 이연화는 미친 사람을 보듯이 적비성을 향했다.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될지도 모르겠네. 왜 갑자기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너는 내가 호적수라고 부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야. 네가 변변찮은 놈에게 덜미가 붙들린다면, 그건 내 명예와도 연관이 있는 일이지."
"너 말이야, 나를 너무 너와 깊이 연결지어 생각하는 거 아니야? 내가 누구랑 무슨 사이가 되든 네 명예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어. 너와 나는 별개의 인간이야, 적 맹주. 그런 태도는 건강하지 않다고."
이연화가 상대와 자신을 번갈아 가리키며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질책했다. 적비성이 코웃음을 쳤다.
"난 네게 쓸데없는 약점이 생기길 원치 않는다. 차라리 영웅놀이가 낫지, 변변찮은 놈이 네 발목을 잡아끄는 꼴은 보아넘길 수 없어."
"아비. 내가 무결한 인간은 아니지만, 지금 네가 말하는 종류의 약점이 생길 일은 없어. 이 공개 혼사는 다 연극이야, 알잖아?"
어이없게 건넸으나, 적비성의 얼굴은 전혀 펴지지 않았다. 그 시선이 침상 위의 방다병에 힐끗 닿았다가 떨어졌다. 어쩐지 오한을 느낀 이연화가 급히 미간을 좁히고는 말했다. 그 눈동자가 오랜만에 차가운 빛을 띠었다.
"내가 방소보랑 그럴 일은 없지만, 적비성. 만일 무슨 일이 생기든, 방다병을 건드리면 반드시 후회하게 될 줄 알아."
"그건 나와 진심으로 싸우겠다는 뜻인가?"
"아니, 평생! 내가 몇 살까지 살든! 죽어도 너랑 안 싸운다는 뜻이야. 적어도 무공으로는."
이연화가 한 마디 한 마디 꾹꾹 눌러담듯이 끊어 말하며 탁상을 가볍게 쳤다. 잠깐 눈을 빛냈던 적비성이 못마땅하게 팔짱을 끼었다. 진심으로 고심하는 듯, 그 손등으로 핏줄이 불거졌다. 적비성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으나, 어쩔 수 없이 선처를 베풀겠다는 투로 천천히 말했다.
"시끄럽고 귀찮은 꼬마지만, 도움을 받은 적도 많았지. 무공에도 천부적인 소질이 있어. 무엇보다 화봉초를 찾은 공도 있고 하니, 알았다. 설령 사고가 일어나더라도 방다병만은 죽이지 않도록 하지."
이걸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나? 아, 모르겠다. 피곤해 죽겠네...이연화가 내심 탄식하며 미간을 눌렀다. 적의 음모를 간파하려 고민할 때에는 일말의 재미라도 있었는데, 이런 상황은 전혀 재미있지 않았다. 어쨌든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나아질 것이라 했으니, 방다병에 대해서는 한시름 놓아도 될 듯했다. 이연화가 경고하는 눈으로 적비성을 바라보았다.
"미리 말해두는데, 내일 방다병을 괜히 들쑤시지 마."
"본인이 한 짓을 조금이라도 기억한다면 내가 들쑤실 필요도 없다. 죽고 싶을 테니."
적비성이 비웃듯이 말했다. 이연화가 다시 험한 눈길을 던졌다.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이연화는 당황했다. 희귀한 일이었으나 그럴 수밖에 없었다.
새벽에 잠깐 눈을 떴을 때, 이연화는 조금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 어딘가에서 희미한 체취가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낯선 듯 낯익은 냄새였다. 이연화가 몸을 일으켰다. 적의 기척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는데, 어쩐지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어둠에 익숙한 눈으로 문을 바라보자, 그 너머로 방다병의 그림자가 보였다. 청년은 문앞의 기둥에 기댄 채 앉아 있었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자세와 똑같았다. "방소보?" 이연화가 살짝 잠긴 목소리로 부르며 발을 옮겼다. 문 너머에서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잠이 들었나? 그럼 이 체취는 뭐지? 한 소매로 입과 코를 가린 채, 이연화가 문을 열었다.
희미하게 느껴지던 냄새가 확 진해졌다. 이연화가 자기도 모르게 반 발짝쯤 물러섰다. "방소보." 이연화가 놀라 부르며 얼른 그 모습을 살폈다. 방다병은 잠든 듯이 눈을 감고 있었는데, 그 얼굴이 고통을 참듯이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이연화는 이 상황이 무엇인지 깨닫고 눈을 크게 떴다.
"방다병. 방다병! 너 왜 갑자기 희락기가-정신 차려. 약 어디 있어?"
이연화가 차마 상대를 건드리지 못하고 물었다. 하지만 방다병은 끙끙거릴 뿐 입을 열어 말하지 못했다. 이연화는 매우 낭패스러운 기분에 휩싸여 주변을 둘러보았다. 희락기는 음인이든 양인이든 꽤 취약해지는 시기였기에, 대부분의 무림인은 난감한 상황에 대비하여 꼭 상비약을 들고 다니곤 했다. 방다병도 물론 약을 지니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문제는, 약을 찾기 위해 청년의 품을 뒤져야 한다는 점이었다. 나가서 다른 사람을 불러와야 하나? 내가 지금 얘를 만져도 되는 건가? 고민하던 이연화는, 방다병이 아픈 강아지처럼 신음을 흘렸을 때 혀를 차며 청년의 몸을 붙들었다.
"일단 안에 좀 누워 있어, 가서 사람을 불러올 테니까."
냄새만 안 풀면 되겠지. 이연화는 다짐하듯 생각하며 방다병을 부축했다. 또렷한 의식을 유지하고자 애썼으나 상대의 체취가 과히 자극적이었다. 전에도 상대의 냄새를 맡은 적이 있었지만, 당시의 방다병은 희락기도 아니었을 뿐더러 최대한 스스로를 통제하고자 애쓰고 있었다. 이만큼 성적인 함의가 가득 담긴 체취를 마구 뿜어낸 적은 없었다. 이연화의 얼굴이 생리적인 반응으로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몸의 어딘가가 달콤하게 저려오는 듯했으나 그 기분에 몸을 내맡길 수야 없었다.
자신의 침상에 방다병을 눕혔을 때, 이연화는 조금 실수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침상에는 어쨌든 자신의 체취가 엷게라도 배어 있었다. 그 냄새를 느꼈는지, 방다병이 눈을 살짝 떴다. 또렷한 빛이 없이, 열기에 들뜬 눈동자였다. 붉은 입술 사이로 새던 숨결이 한층 거칠어졌다. 아직 앳된 구석이 모두 사라지지 않은 인상의 청년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신음을 흘리며 이연화의 베개에 뺨을 부볐다. 이연화는 어쩐지 보아서는 안 되는 광경을 마주한 사람처럼 당혹하다가, 곧 자리를 뜨려 몸을 일으켰다. 의원을 부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방문을 향하기 전, 강한 손길이 팔목을 잡아당겼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행동에, 이연화는 반격할 시기를 한 박자 놓치고 말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이미 자리에 누워 있었고, 방다병의 얼굴이 지척이었다. 긴 머리칼이 침상 위로 흩어졌다. 지금 이 녀석이 날 거꾸러뜨린 거야? 이연화가 어이없는 얼굴로 청년을 올려다보았다. 한 손으로 얼른 그 몸을 밀어내려는데, 방다병이 양팔로 이연화를 꽉 끌어안으며 목덜미에 이마를 묻었다. 반듯한 이마에 알알이 배었던 땀이 목에 닿았다. "방다병!" 이연화가 기겁해 부르며 그 어깨를 잡았다. 여차하면 상대의 혈도를 찍어 제압해야 할 판이었다.
"이연화...."
이연화의 목에 입술을 붙인 채, 방다병이 잠에 취한 것 같은 목소리로 낮게 불렀다. 뜨거운 숨결과 목울림에 등으로 소름이 돋았다.
"또 아프지 마...."
방다병이 웅얼거렸다. 이연화의 눈이 커졌다. 희락기에 들어선 이들이 느끼는 감정과 생각은 거의 동일했다. 하지만 방다병은 지금 걱정 어린 소리를 흘리고 있었다. 단순한 번식 욕구보다는 조금 더 복잡한 색채를 띤 음성이었다.
"내가 지켜줄게...."
얘 지금 날 생각하면서 잠꼬대를 하는 거야? 대체 무슨 꿈을 꾸는 중이길래 날 지킨다는 소릴 하는 거야? 대체 날 보호한다는 게 얼마나 본능에 가까운 생각이면 희락기에 이런 말을 하는 건데? 잠깐만-왜 몸이 대뜸 반응하려고 하지? 이연화는 끝없이 쏟아지는 물음표에 잠시 압도당한 채 방다병의 어깨를 밀어냈다. 어느새 숨이 약간 가빠져 있었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맹목적인 애정을 여과 없이 마주하자, 기이한 편안함에 그야말로 질식할 지경이었다. 놀라움과 경계심이 순간적으로 내려가면서, 방다병에게 옮은 것처럼 피부가 은은히 달아올랐다.
"방다병...방소보. 비켜 봐."
이연화는 차마 내력을 섞어 장을 날리지 못하고, 방다병의 어깨를 탁탁 두드리며 건넸다. 하지만 그 숨결에 오히려 자극을 받았는지, 방다병은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를 웅얼웅얼 흘리며 이연화의 몸을 더 꼭 끌어안았다. 갈비뼈가 눌리면서 숨통이 막혔다. 빈틈 없이 덮쳐 오는 묵직한 체열과 체취에 정신이 아득했다. 심지어 방다병이 다리를 얽어 오는 하반신의 사정은 더욱 낭패였다. 상대의 다리 사이에서 단단한 질감을 느낀 순간, 이연화는 정말 제정신을 잠깐 놓아버릴 뻔했다. 평소 원하는 만큼 능청스럽고도 뻔뻔해질 수 있었지만, 그는 정말 드물게도 온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 만큼 당황했다. 짜르르한 열기가 아랫배에 고이면서 발끝이 움찔거렸다.
머릿속에 지진이 일어난 듯했다. 어쨌든, 이연화의 머릿속에서 상대는 아직 어린아이에 조금 더 가까웠다. 현재의 방다병은 비록 살아온 날에 비해 단단하고 매우 심지가 굳은 청년이었으나, 난 이상이의 제자라며 빽빽거리던 신참 형탐의 첫인상을 지우기란 쉽지 않았다. 상대가 어엿한 무인이라는 사실을 머리로 아는 것과, 몸으로 부대끼다 못해 직접 맞대는 것은 매우 다른 문제였다. 언제 이렇게 큰 거야? 이연화가 이를 악문 채 생각하며 몸을 뒤집으려 했다. 어쨌든 이 자세에서 빠져나가야 했다.
하지만 방다병은 이연화가 벗어나도록 놔두지 않았다. 심통이 난 꼬마처럼 팔에 힘을 주면서, 청년은 이마를 묻었던 목덜미에 입술을 대고는 이를 세웠다. 이연화의 입에서 헉 소리가 새어나갔다. 자기도 모르게 머리가 뒤로 젖혀지면서, 가까스로 누르고 있던 체취가 목에서부터 흐르듯이 번져나왔다. 꽤 만족스러웠는지, 방다병이 낮은 콧소리와 함께 목줄기를 살짝 빨아들였다. 이연화의 흉곽이 얕고 빠르게 오르내렸다. 허덕이는 숨으로 더 진한 연꽃 냄새가 섞였다. 머릿속에서 붉은 경고문이 번뜩이는 듯했다.
"방소보...."
이연화가 베개에 뺨을 누르며 낮게 긁히는 목소리로 불렀다. 으응. 방다병이 답인지 뭔지 모를 음성을 흘렸다. 상대가 맞닿은 하반신을 본능적으로 두어 번 흔들었다. 다리 사이가 옷 너머로 대놓고 부벼지는 느낌에, 이연화는 소리없는 비명을 참으며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등과 얼굴은 물론이고 정수리까지 뜨겁게 화끈거렸다. 상대의 손이 목 아래의 빗장뼈와 가슴팍을 더듬었다. 이연화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 손끝이 맨 피부를 스칠 때마다, 열기를 품은 소름이 등줄기를 타다닥 훑고 지나갔다.
가늘어지는 한 줄기 이성을 그러모아, 이연화는 후들후들 떨리는 손끝에 약간의 내력을 실어 상대의 혈을 찍었다. 방다병이 눈을 깜박였다. 그 눈동자에 잠깐 이성이 돌아온 듯했다. 이연화는 가쁜 숨을 고르며 상대를 애써 쏘아보았다. 몸싸움 아닌 몸싸움을 벌이느라, 침의가 반쯤 풀려 있었다. "이연화...?" 방다병이 멍하게 불렀다.
이연화가 너 약 어디 있느냐고 물으려던 순간, 갑자기 바람이 한 줄기 불어오나 싶더니 우악스러운 손이 방다병의 뒷덜미를 꽉 붙들었다. 방다병은 곧 종잇장처럼 벽으로 날아가 부딪치고는 바닥을 굴렀다. 이연화가 기겁해 일어섰다.
"뭐하는 거야!"
적비성은 전에 없이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대체 어디 있다가 불쑥 나타난 거야? 그렇게 물을 틈도 없이, 이연화는 방다병이 내상을 입지 않았는지 확인하기 위해 그편으로 다가가려 했다. 하지만 방다병의 위치는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바뀌었다. 적비성이 다시 그 몸을 들어 다른편 벽으로 내던진 탓이었다. 희락기에도 무인의 버릇을 잃지 않은 방다병이 낙법을 구사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몸 어딘가가 부러졌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연화가 대놓고 화를 내며 방다병의 앞으로 끼어들었다.
"적 맹주, 미쳤어? 그만해!"
"희락기에는 원래 이 정도 맞아야 좀 정신을 차린다."
적비성이 당당하게 이야기했다. 그 얼굴에 생리적인 불쾌감이 가득했다. 이연화가 날카롭게 성질을 냈다.
"약을 먹여야지 다짜고짜 때리면 어떡해! 됐으니 넌 가서 관 협의나 불러와, 아무리 희락기라도 얘 열이 너무 높아."
"네가 다녀와라. 너희 둘을 남겨놓을 수는 없으니."
"뭐, 내가 정신 잃고 얘한테 달려들기라도 할까봐? 그럴 일 없어, 혈을 눌러둘 테니까 얼른 가서 사람이나 좀 불러와."
이연화가 닭을 쫓듯이 훠이 손짓했다. 적비성의 눈썹이 꿈틀했다. 남자는 이연화의 말대로 자리를 떠나는 대신, 척척 걸어와 방다병의 몸을 자루처럼 둘러멨다. "그냥 내가 의원에게 바로 데려가겠다." 이연화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남자는 찬바람이 들어오는 문을 나가 훌쩍 사라져버렸다. 이연화는 밤바람이 불어닥치는 방에 엉망이 된 옷차림으로 멍청히 서 있다가, 곧 신경질적인 한숨과 함께 흐트러진 머리며 옷을 대충 정리했다.
관하몽은 자다가 난데없이 불려나온 사람답지 않게, 매우 침착하고 깔끔한 태도로 방다병을 보아주었다. 방다병은 다행히 약에 빠르게 반응해, 헐떡이며 몸부림치는 대신 단순한 열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누워 끙끙거리게 되었다. 눈을 감은 방다병을 바라보며, 이연화는 억울한 보호자처럼 이야기했다. 방다병의 희락기는 매우 규칙적이었으며 늘 전조 증상이 있었기에 갑작스레 낭패를 보지 않았다, 설령 조금 이르게 오더라도 이런 식으로 발작을 겪은 적은 없었다. 방다병에 몸에 꽂혔던 침을 회수하고, 관하몽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드물지만...이런 일이 있기는 합니다."
관하몽이 매우 신중하게 말했다. 의원의 신중함은 보통 불길한 징조였으므로, 이연화는 나쁜 소식에 대비하며 관하몽을 바라보았다. 관하몽은 자신이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다는 듯 방다병을 잠시 보았다가 천천히 이었다.
"자신이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음인을 누군가에게 빼앗기거나, 그 음인이 위험에 처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그 불안과 심화로 갑작스레 희락기를 맞기도 합니다."
이연화가 망연히 관하몽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두통이 밀려왔다. 이마를 꾹꾹 누르면서, 이연화는 매우 건조하고 피로하게 말했다.
"관 형. 나는 저 녀석이랑 각인한 게 아닌데요."
"반드시 각인 상대여야만 생기는 일은 아닙니다."
관하몽이 차분히 단언했다. 이연화는 끙 소리를 삼키며 잠시 눈을 감았다. 잠깐 독을 먹었을 때보다도 훨씬 골치가 아팠다. 대체 뭐가 불안하단 거지? 그깟 독 조금 먹고 피를 토한 것 때문인가? 아니면, 수십의 후보들을 백천원으로 끌어들여 이런 계획을 진행하는 것 때문인가? 어이없이 생각하다가, 이연화는 조금 마음을 고쳐먹었다. 가만히 돌이켜보니, 불안하기에는 꽤 괜찮은 조건들이었다. 내가 양인일 때에도 피 한 번 토할라치면 기함하는 아이였으니, 그럴 법도 하지. 이연화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문주에게도 약을 미리 드려 두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관하몽은 침을 챙겨 방을 나갔다. "아이고야." 이연화가 넋두리처럼 중얼거리며 뒷목을 문질렀다. 방다병이 깨어나면 이 일을 기억하려나? 그러면 나는 이 녀석보다 어른으로서 어떻게 응대해야 좋을까? 고민하면서, 이연화는 방다병의 방에 있던 찻주전자를 기울였다. 이미 식어버린 차가 잔을 채웠다. 이연화가 그 잔을 잡으려 할 때, 마주앉았던 적비성이 잔을 채어 갔다. 이연화는 차가운 차를 술처럼 넘기는 남자를 어이없이 보다가, 곧 고개를 저어버리고는 새 잔을 채웠다. 어쨌든 적비성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상황이 훨씬 꼬였을지도 몰랐다.
"너는 어떻게 알고 도중에 들어온 거야?"
"이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놈이 없는지, 백천원 지붕을 돌며 순시 중이었어. 그러다 네 처소 쪽이 눈에 들어왔지. 문이 열려 있기에 확인한 것뿐이다."
"뭐, 신세 졌네. 고마워."
고개를 까딱한 이연화가 자신의 잔을 적비성의 잔에 대충 부딪치고는 차를 마셨다. 물끄러미 이연화를 보다가, 적비성이 묘하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불렀다. "이연화." 찻잔에 입을 댄 채, 이연화가 묻는 시선을 던졌다. 적비성이 미간을 팍 찌푸리고는 말했다.
"만일 네가 시답잖은 놈과 각인하면, 나는 그 각인을 깰 거다. 필요하다면 그놈을 없애거나, 차라리 내가 너와 각인해서라도."
난데없이 해괴한 말을 들은 사람답게, 이연화는 차를 뿜었다. 적비성은 별로 놀라지도 않은 얼굴로 이연화를 응시하고 있었다. 입가를 대충 닦고, 이연화는 미친 사람을 보듯이 적비성을 향했다.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될지도 모르겠네. 왜 갑자기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너는 내가 호적수라고 부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야. 네가 변변찮은 놈에게 덜미가 붙들린다면, 그건 내 명예와도 연관이 있는 일이지."
"너 말이야, 나를 너무 너와 깊이 연결지어 생각하는 거 아니야? 내가 누구랑 무슨 사이가 되든 네 명예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어. 너와 나는 별개의 인간이야, 적 맹주. 그런 태도는 건강하지 않다고."
이연화가 상대와 자신을 번갈아 가리키며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질책했다. 적비성이 코웃음을 쳤다.
"난 네게 쓸데없는 약점이 생기길 원치 않는다. 차라리 영웅놀이가 낫지, 변변찮은 놈이 네 발목을 잡아끄는 꼴은 보아넘길 수 없어."
"아비. 내가 무결한 인간은 아니지만, 지금 네가 말하는 종류의 약점이 생길 일은 없어. 이 공개 혼사는 다 연극이야, 알잖아?"
어이없게 건넸으나, 적비성의 얼굴은 전혀 펴지지 않았다. 그 시선이 침상 위의 방다병에 힐끗 닿았다가 떨어졌다. 어쩐지 오한을 느낀 이연화가 급히 미간을 좁히고는 말했다. 그 눈동자가 오랜만에 차가운 빛을 띠었다.
"내가 방소보랑 그럴 일은 없지만, 적비성. 만일 무슨 일이 생기든, 방다병을 건드리면 반드시 후회하게 될 줄 알아."
"그건 나와 진심으로 싸우겠다는 뜻인가?"
"아니, 평생! 내가 몇 살까지 살든! 죽어도 너랑 안 싸운다는 뜻이야. 적어도 무공으로는."
이연화가 한 마디 한 마디 꾹꾹 눌러담듯이 끊어 말하며 탁상을 가볍게 쳤다. 잠깐 눈을 빛냈던 적비성이 못마땅하게 팔짱을 끼었다. 진심으로 고심하는 듯, 그 손등으로 핏줄이 불거졌다. 적비성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으나, 어쩔 수 없이 선처를 베풀겠다는 투로 천천히 말했다.
"시끄럽고 귀찮은 꼬마지만, 도움을 받은 적도 많았지. 무공에도 천부적인 소질이 있어. 무엇보다 화봉초를 찾은 공도 있고 하니, 알았다. 설령 사고가 일어나더라도 방다병만은 죽이지 않도록 하지."
이걸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나? 아, 모르겠다. 피곤해 죽겠네...이연화가 내심 탄식하며 미간을 눌렀다. 적의 음모를 간파하려 고민할 때에는 일말의 재미라도 있었는데, 이런 상황은 전혀 재미있지 않았다. 어쨌든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나아질 것이라 했으니, 방다병에 대해서는 한시름 놓아도 될 듯했다. 이연화가 경고하는 눈으로 적비성을 바라보았다.
"미리 말해두는데, 내일 방다병을 괜히 들쑤시지 마."
"본인이 한 짓을 조금이라도 기억한다면 내가 들쑤실 필요도 없다. 죽고 싶을 테니."
적비성이 비웃듯이 말했다. 이연화가 다시 험한 눈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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