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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13 21:44
망천화처럼 이연화 해독할 수 있는 약초가 있는데, 형질을 바꾸는 부작용이 있어서 떨떠름해하던 이연화와 그런 게 뭐가 중하냐 하던 주변사람들이 우당탕하는 게 보고싶다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적비성은 약간의 복수심에 휩싸여 있었다.
배신자 아닌 이를 향해 그런 심정을 느끼기는 참 오랜만이었으나, 상대는 이연화였다.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여러모로 다른 존재. 해괴한 냄새를 풍기며 아무렇지도 않은 낯짝으로 남의 속을 뒤집어놓더니, 이제는 그런 채로 온갖 어중이떠중이들을 한 자리에 끌어모으겠다고 선언하여 남의 복장을 터뜨려 놓았다. 너도 좀 당해봐라, 이상이. 상대를 심술궂게 바라보며, 적비성은 평소 잘 갈무리하고 있던 체취를 쏟아붓듯이 흘려버렸다. 저 얄밉고도 태연한 얼굴이 일그러지는 꼴을 보고 싶었다.
이연화의 눈이 둥그레졌다. 상대는 갑자기 무형의 힘에 떠밀린 것처럼 반 발짝쯤 물러났다. 그 입가로 약간 긴장한 듯한 미소가 흘렀다. 적비성이 이죽거렸다.
"넌 절대 냄새를 풀지 않겠다고 했지. 한번 견뎌봐라."
"으음. 네 냄새에는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확실히 다르네."
이연화가 찬물을 맞은 듯 고개를 짧게 털며 말했다. 아직 멀쩡히 말할 기운이 있나 보지? 눈을 살짝 가늘게 뜬 적비성이, 상대를 더욱 압박하며 그에게로 한 발짝씩 다가섰다. 이연화가 눈살을 찌푸리며 조금씩 물러섰다.
"너 내가 양인일 때도 장난 아니더니, 지금은 더하잖아. 독해서 숨쉬기도 힘들어. 그 사이에 형질을 강화하는 보약이라도 찾아 먹은 거야?"
이연화가 약마의 약을 억지로 마시고 써서 죽겠다 불평할 때처럼 투덜거렸다. 얼굴 앞에 손으로 부채질을 하면서 방구석까지 후퇴하는 모양새가 정말 불편해 보였다. 하지만 적비성은 아직 어느 정도 여유로워 보이는 낯빛에 만족하지 못하고, 미간을 좁히며 물러나는 상대를 바짝 따라붙었다. 이연화의 몸으로 그늘이 졌다. 뒷걸음질에도 한계가 있었기에, 그 등에는 곧 모퉁이 벽이 와 닿았다. 막다른 길에 몰린 여우처럼, 이연화는 어깨너머를 힐끗 보고는 혀를 찼다.
"이제 됐어, 적 맹주. 알았으니까 그만해."
"원하던 정보는 얻었나, 이상이?"
"그래, 그래."
이연화가 대충 이야기하며 한 손을 훠이 소리내듯 저었다. 가까이서 보니, 영 뻔뻔해 보이던 상대의 목 아래편과 귓불 부근이 불그스름했다. 상대에게서 느껴지는 압박감을 견디고자 애쓴 듯했다. 이제 제놈을 볼 때 내 심정이 어땠는지 알겠군. 복수심이 묘하게 충족되는 것을 느끼며, 적비성은 오른손을 뻗어 그 귀를 살짝 만졌다. 무의식중에 취한, 반쯤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이연화의 눈이 순간 커졌다. "아, 잠깐만-." 이연화가 다급히 경고했지만 이미 늦어 있었다.
갑작스레 터져 나온 연꽃 냄새에, 적비성은 그만 망부석처럼 얼어붙었다.
사고가 마비된 것처럼 일시적으로 멈추었다. 의식이 독에 당했을 때보다 어찔하게 흔들렸다. 자신이 평소처럼 제어의 끈을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면 모르겠으나, 지금은 상대의 요구에 따라 체취를 온통 발산하던 참이었다. 비탈을 천천히 내려가던 도중, 누군가에게 등을 확 떠밀린 기분이었다. 원초적인 체취가 뒤섞이자 목이 마르다 못해 혀가 굳어졌다. 적비성이 볼 안쪽을 씹어 겨우 제정신을 붙들고는 상대를 쏘아보았다.
"냄새 안 풀겠다고 했잖나!"
"네가 너무 다가오니까 그렇지-잠깐 기다려봐. 젠장, 너부터 냄새 좀 집어넣어!"
이연화가 평소답지 않게 험한 얼굴로 씹어 뱉었다. 자신이 당초 목표했던 여유 없는 모습에도, 적비성은 만족감보다 당혹감을 훨씬 크게 느꼈다. 이제는 목과 귀뿐 아니라 전체적으로 붉어진 그 살갗에 입술을 대고 싶단 욕구가 강렬하게 치민 탓이었다. 그저 상대를 압박하기 위해 풀던 체취로, 부지불식간에 성적인 함의가 섞이기 시작했다. 이연화의 눈이 조금 더 커졌다. 그 호흡이 약간 흐트러지면서, 숨결에서 더 진한 연꽃 냄새가 났다.
잠깐, 숨결? 적비성이 퍼뜩 눈을 깜박였다. 어느새 상대의 얼굴이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 적비성의 속눈썹이 위태롭게 떨렸다. 늘 남의 속을 살살 긁으며 잡힐 듯 잡히지 않던 남자가, 매우 난처한 눈으로 적비성을 바라보았다.
"진짜...낭패네. 이봐, 적 맹주. 정신 차려."
"말하지 마."
적비성이 자기도 모르게 이를 악물고는 쏘아붙였다. 상대가 말할수록 그 숨결이 닿은 탓이었다. 까딱하는 순간 손가락 한 뼘 정도의 거리가 사라져버릴 것 같았다. 이연화가 아랫입술을 깨무는 모습도 별로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누군가가 머릿속에 뇌화탄을 터뜨린 듯했다. 괴상한 일이었다. 불과 조금 전까지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지금은 마치 희락기에 접어든 것처럼 피가 끓었다. 초가 지날수록 무엇 때문에 참는지도 정확히 알 수가 없어졌다.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상대의 어깨나 뺨을 쥐고 싶었다. 그런다고 도망칠 것 같지도 않은데, 괜찮지 않을까? 어두운 목소리가 속살거렸다. 도망치려 들면 혈도를 짚어서 찍어누르면 되지. 양인일 때도 그랬는데 지금이라고 못할까. 적비성의 턱으로 힘이 들어갔다. 가만히 적비성을 노려보던 이연화가 방구석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몸을 움찔했을 때, 금원맹주는 실제로 상대의 목을 조르거나 혈도를 짚기 일보직전이었다.
"너 뭐하는 거야!"
우렁찬 외침과 함께, 바깥바람이 훅 느껴지더니 곧 누군가의 검집이 날아왔다. 적비성의 몸이 위기감에 우선적으로 반응했다. 이연화에게서 두어 발짝 떨어지자, 뜨겁게 얼크러져 있던 머릿속이 조금이나마 맑아졌다. 방을 꽉 채웠던 체취가 바람을 타고 흐려졌다. 난입한 청년은 놀랍지 않게도 방다병이었다. 청년은 천하의 무도한 대악당을 보듯이 적비성에게 경멸의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이연화랑 다시 겨뤄볼 거라고 그리 노래를 부르더니, 이렇게라도 이기고 싶었어?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가 있어!"
당연하게도, 적비성은 억울해졌다.
"저놈이 먼저 부탁한 일이다!"
"말이 되는 소릴 해! 이연화, 괜찮아?"
빽 매도한 방다병이 얼른 이연화를 살폈다. 속이 안 좋은 사람처럼 벽을 짚고 잠시 자신을 추스르던 이연화는, 조금 지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등을 폈다.
"괜찮아, 방소보. 그리고 아비 말이 맞아, 내가 부탁한 거야. 내가 공격적인 체취에 어느 정도로 반응할지 알아야 했거든."
"뭐...그걸 옆에서 지켜봐 줄 사람도 없이 했다고? 너 미쳤어? 내가 조금만 늦게 들어왔으면, 너희, 너희-."
차마 말을 맺지 못한 방다병의 얼굴이 불타올랐다. 이연화가 옷자락을 탁 정리하며 약간 짜증스러운 눈으로 적비성을 흘겨보았다.
"적 맹주께서 그렇게 심술을 부리실 줄은 몰랐지 뭐야. 하긴, 화봉초를 먹었을 때도 네가 힘 조절을 못해서 피를 토했었지. 너 말이야, 나한테 억하심정이 있으면 말로 하고 성질 좀 죽여. 언제까지 그렇게 앞뒤 없이 살 거야?"
이연화가 혀를 차며 타박하는 말에도, 적비성은 평소처럼 무시무시한 시선을 쏘아붙이지 못했다. 아랫배에 아직 은근히 남은 열기를 다스리느라, 이연화를 비난할 여력이 없었다. 방다병이 눈썹을 휙 올리고는 이연화를 향했다.
"아비가 앞뒤 없는 거 하루이틀 봐? 하지만 넌 아니잖아, 왜 그렇게 무모한 짓을 했어?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서 다른 사람을 근처에 대기시켰어야지. 그리고, 왜 하필 아비야? 다른 사람들도 많은데-."
"다른 사람이라니, 누구? 이런 일에 동참하면서 민망함으로 명 깎이지 않을 사람이 거의 없잖아. 아무나 부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너나 원주들을 부를 수도 없고. 아비의 철면피를 믿고 부탁한 거야. 형질이 강한 양인이니까 실험 대상으로 적합하기도 하고. 이봐, 적 맹주. 다음에는 대처법을 좀 실험해 보자. 관하몽이 준 비상약이 몇 개 있거든."
이연화가 방다병 너머의 적비성을 향해 아무렇지 않게 건넸다. 적비성은 잠깐 혀를 깨물 뻔했다. 다음이라는 말에 치열한 내적 갈등이 치민 탓이었다. 방금 전과 같은 상황은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았으나, 자신의 자리에 다른 '실험 대상'이 있는 것도 원치 않았다. 참으로 모순적인 마음이었으며 그 이유조차 명료하지 않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방다병이 대경실색하여 높이 소리쳤다.
"이 짓을 또 한다고?!"
이연화가 어깨를 으쓱했다. 곤란한 상황이 지나가자마자, 남자는 평소처럼 뻔뻔한 낯을 하고 있었다.
"응, 진짜 위험한 상황이 생기는 건 막고 싶으니까. 기껏 위험한 놈들을 색출해놓고 만에 하나 내가 휘말려버리면 안 되지 않겠어. 걱정 마, 한 번 겪어봤으니까 두 번은 안 그래. 또 이상해질 조짐이 보이면, 내가 아비 혈도를 짚어서 제압할게. 충분히 조심하면-."
"싫어!"
방다병이 양손을 꽉 주먹 쥔 채 원초적으로 외친 말에, 이연화가 눈썹을 살짝 올렸다. 지나치게 어린아이 같은 반응을 마주하자 오히려 말문이 막혔는지, 이연화는 정말 그답지 않게도 눈을 깜박이며 조금 더듬거렸다. "시...싫어?" 방다병이 입을 삐죽거렸다. 이연화가 음인이 된 이후 통 웃는 일이 없었던 청년은, 부릅뜬 눈으로 이연화와 적비성을 번갈아 보다가 결연히 말했다.
"실험 대상이 필요하면, 차라리 내가 해줄게! 형질이라면 나도 꽤 강한 편이라고. 너도 알잖아."
이연화가 눈을 깜박였다. 고양이로 변신하겠다 선언하는 강아지를 발견한 사람처럼 방다병을 바라보다가, 이연화는 곧 한쪽 눈썹을 찌푸렸다.
"네가? 방소보, 진심이야?"
"당연하지. 왜 아비는 되는데 나는 하면 안 돼?"
방다병이 턱을 약간 든 채 허세를 부리듯 말했다(아마 실제로도 허세일 터였다). 적비성은 반사적으로 반대하고픈 마음을 품었지만, 도대체 그럴 근거가 마땅치 않아 목소리를 삼켰다. 머릿속의 톱니바퀴가 자꾸만 헛도는 느낌이었다. 이연화가 살짝 곤란할 때의 버릇대로 눈밑을 두어 번 긁적였다.
"넌 내 제자 비슷한 거잖아. 양심에 거리낄 일은 아니지만, 네 성정상 그게 되겠어?"
"오히려 제자니까 더 도울 수 있는 거지! 다음에 필요하면 꼭 나한테 말해, 나 조절 잘할 수 있으니까."
방다병이 적비성을 흘겨보며 맺었다. 적비성은 조금 전보다 더욱 불쾌해졌다. 한참 어린 애송이가, 감히 적비성을 충동 조절도 제대로 못하는 꼬마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적비성이 팔짱을 끼며 빈정거렸다.
"아직 제대로 음인과 섞여본 적도 없을 어린아이 주제에, 그런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겠군."
"나도 강호 초출이 옛말이거든? 그 사이 이런저런 일이 많았다고, 음인 고수와 싸워본 적도 여러 번 있어. 알아야 할 만큼은 알아."
방다병이 어린아이처럼 입을 내밀고는 툴툴거렸다. 영 회의적이고도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 모습을 응시하던 이연화는, 곧 체념조의 한숨을 툭 내쉬며 한 손을 내저었다.
"그래, 그래. 네가 언제 말린다고 말을 듣기나 했어? 알았으니 다음엔 네가 도와줘. 하지만 못하겠으면, 하기 전이든 중이든 반드시 얘기해."
"진심이냐? 이런 꼬맹이가 무슨 도움이 된다고."
"조금 전까진 너도 도움 안 됐거든? 아, 다음에 넌 옆방에 좀 있어줘. 오늘 겪어보니 만일의 상황에 대비하긴 해야겠어. 혹시라도 이상한 일이 벌어지면 날 때리든 얠 때리든 해서 멈춰."
이연화가 자신과 방다병을 대충 손짓했다. '이상한 일'이라는 대목에서, 방다병은 움찔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럴 일 없어!" 힘주어 외치는 꼴이 별로 미덥지 않았다. 적비성이 눈썹을 꿈틀했다.
"사람을 아주 멋대로 부려먹으려 작정했군, 이상이."
"싫으면 금원맹으로 돌아가든지."
이연화가 특유의 뻔뻔하면서도 미워하기 어려운 얼굴로 대꾸했다. 적비성이 입술을 꾹 다물며 고개를 돌렸다. 방다병은 짐짓 의기양양하게 팔짱을 끼었으나, 적비성은 그 눈동자가 조금 흔들리는 꼴을 가소롭게 바라보았다. 다음 '실험 대상'에서 배제되었다는 사실이 한편으로 다행스러웠지만, 동시에 아주 불만족스러웠다. 그렇다고 소리 높여 자신이 하겠노라 자원하는 것도 모양새가 이상했다. 이연화의 정신 나간 발상을 들었을 때부터 상해 있던 심기가 조금 더 나빠졌다.
적비성이 미간을 찌푸렸다. 금원맹주는 뒤엉킨 감정을 다루는 데에 별 조예가 없었다(애초에 복잡한 감정을 느끼는 일도 별로 없었다). 모든 건 내 하나뿐인 호적수가 웬 미친 짓을 꾸미면서, 나에 비해 격도 맞지 않는 애송이들과 부대끼기 때문이다! 적비성은 자신의 불쾌감을 그렇게 정리하며, 조금 전 충동적으로 받아낸 옥패를 만지작거렸다. 이연화의 말대로 아주 좋은 옥이었지만, 마음 같아선 당장 분질러버리고 싶었다.
적비성의 불쾌감은, 그로부터 보름 후 백천원에 516통의 구혼서가 모였을 때 더욱 증폭되었다.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적비성은 약간의 복수심에 휩싸여 있었다.
배신자 아닌 이를 향해 그런 심정을 느끼기는 참 오랜만이었으나, 상대는 이연화였다.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여러모로 다른 존재. 해괴한 냄새를 풍기며 아무렇지도 않은 낯짝으로 남의 속을 뒤집어놓더니, 이제는 그런 채로 온갖 어중이떠중이들을 한 자리에 끌어모으겠다고 선언하여 남의 복장을 터뜨려 놓았다. 너도 좀 당해봐라, 이상이. 상대를 심술궂게 바라보며, 적비성은 평소 잘 갈무리하고 있던 체취를 쏟아붓듯이 흘려버렸다. 저 얄밉고도 태연한 얼굴이 일그러지는 꼴을 보고 싶었다.
이연화의 눈이 둥그레졌다. 상대는 갑자기 무형의 힘에 떠밀린 것처럼 반 발짝쯤 물러났다. 그 입가로 약간 긴장한 듯한 미소가 흘렀다. 적비성이 이죽거렸다.
"넌 절대 냄새를 풀지 않겠다고 했지. 한번 견뎌봐라."
"으음. 네 냄새에는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확실히 다르네."
이연화가 찬물을 맞은 듯 고개를 짧게 털며 말했다. 아직 멀쩡히 말할 기운이 있나 보지? 눈을 살짝 가늘게 뜬 적비성이, 상대를 더욱 압박하며 그에게로 한 발짝씩 다가섰다. 이연화가 눈살을 찌푸리며 조금씩 물러섰다.
"너 내가 양인일 때도 장난 아니더니, 지금은 더하잖아. 독해서 숨쉬기도 힘들어. 그 사이에 형질을 강화하는 보약이라도 찾아 먹은 거야?"
이연화가 약마의 약을 억지로 마시고 써서 죽겠다 불평할 때처럼 투덜거렸다. 얼굴 앞에 손으로 부채질을 하면서 방구석까지 후퇴하는 모양새가 정말 불편해 보였다. 하지만 적비성은 아직 어느 정도 여유로워 보이는 낯빛에 만족하지 못하고, 미간을 좁히며 물러나는 상대를 바짝 따라붙었다. 이연화의 몸으로 그늘이 졌다. 뒷걸음질에도 한계가 있었기에, 그 등에는 곧 모퉁이 벽이 와 닿았다. 막다른 길에 몰린 여우처럼, 이연화는 어깨너머를 힐끗 보고는 혀를 찼다.
"이제 됐어, 적 맹주. 알았으니까 그만해."
"원하던 정보는 얻었나, 이상이?"
"그래, 그래."
이연화가 대충 이야기하며 한 손을 훠이 소리내듯 저었다. 가까이서 보니, 영 뻔뻔해 보이던 상대의 목 아래편과 귓불 부근이 불그스름했다. 상대에게서 느껴지는 압박감을 견디고자 애쓴 듯했다. 이제 제놈을 볼 때 내 심정이 어땠는지 알겠군. 복수심이 묘하게 충족되는 것을 느끼며, 적비성은 오른손을 뻗어 그 귀를 살짝 만졌다. 무의식중에 취한, 반쯤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이연화의 눈이 순간 커졌다. "아, 잠깐만-." 이연화가 다급히 경고했지만 이미 늦어 있었다.
갑작스레 터져 나온 연꽃 냄새에, 적비성은 그만 망부석처럼 얼어붙었다.
사고가 마비된 것처럼 일시적으로 멈추었다. 의식이 독에 당했을 때보다 어찔하게 흔들렸다. 자신이 평소처럼 제어의 끈을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면 모르겠으나, 지금은 상대의 요구에 따라 체취를 온통 발산하던 참이었다. 비탈을 천천히 내려가던 도중, 누군가에게 등을 확 떠밀린 기분이었다. 원초적인 체취가 뒤섞이자 목이 마르다 못해 혀가 굳어졌다. 적비성이 볼 안쪽을 씹어 겨우 제정신을 붙들고는 상대를 쏘아보았다.
"냄새 안 풀겠다고 했잖나!"
"네가 너무 다가오니까 그렇지-잠깐 기다려봐. 젠장, 너부터 냄새 좀 집어넣어!"
이연화가 평소답지 않게 험한 얼굴로 씹어 뱉었다. 자신이 당초 목표했던 여유 없는 모습에도, 적비성은 만족감보다 당혹감을 훨씬 크게 느꼈다. 이제는 목과 귀뿐 아니라 전체적으로 붉어진 그 살갗에 입술을 대고 싶단 욕구가 강렬하게 치민 탓이었다. 그저 상대를 압박하기 위해 풀던 체취로, 부지불식간에 성적인 함의가 섞이기 시작했다. 이연화의 눈이 조금 더 커졌다. 그 호흡이 약간 흐트러지면서, 숨결에서 더 진한 연꽃 냄새가 났다.
잠깐, 숨결? 적비성이 퍼뜩 눈을 깜박였다. 어느새 상대의 얼굴이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 적비성의 속눈썹이 위태롭게 떨렸다. 늘 남의 속을 살살 긁으며 잡힐 듯 잡히지 않던 남자가, 매우 난처한 눈으로 적비성을 바라보았다.
"진짜...낭패네. 이봐, 적 맹주. 정신 차려."
"말하지 마."
적비성이 자기도 모르게 이를 악물고는 쏘아붙였다. 상대가 말할수록 그 숨결이 닿은 탓이었다. 까딱하는 순간 손가락 한 뼘 정도의 거리가 사라져버릴 것 같았다. 이연화가 아랫입술을 깨무는 모습도 별로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누군가가 머릿속에 뇌화탄을 터뜨린 듯했다. 괴상한 일이었다. 불과 조금 전까지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지금은 마치 희락기에 접어든 것처럼 피가 끓었다. 초가 지날수록 무엇 때문에 참는지도 정확히 알 수가 없어졌다.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상대의 어깨나 뺨을 쥐고 싶었다. 그런다고 도망칠 것 같지도 않은데, 괜찮지 않을까? 어두운 목소리가 속살거렸다. 도망치려 들면 혈도를 짚어서 찍어누르면 되지. 양인일 때도 그랬는데 지금이라고 못할까. 적비성의 턱으로 힘이 들어갔다. 가만히 적비성을 노려보던 이연화가 방구석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몸을 움찔했을 때, 금원맹주는 실제로 상대의 목을 조르거나 혈도를 짚기 일보직전이었다.
"너 뭐하는 거야!"
우렁찬 외침과 함께, 바깥바람이 훅 느껴지더니 곧 누군가의 검집이 날아왔다. 적비성의 몸이 위기감에 우선적으로 반응했다. 이연화에게서 두어 발짝 떨어지자, 뜨겁게 얼크러져 있던 머릿속이 조금이나마 맑아졌다. 방을 꽉 채웠던 체취가 바람을 타고 흐려졌다. 난입한 청년은 놀랍지 않게도 방다병이었다. 청년은 천하의 무도한 대악당을 보듯이 적비성에게 경멸의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이연화랑 다시 겨뤄볼 거라고 그리 노래를 부르더니, 이렇게라도 이기고 싶었어?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가 있어!"
당연하게도, 적비성은 억울해졌다.
"저놈이 먼저 부탁한 일이다!"
"말이 되는 소릴 해! 이연화, 괜찮아?"
빽 매도한 방다병이 얼른 이연화를 살폈다. 속이 안 좋은 사람처럼 벽을 짚고 잠시 자신을 추스르던 이연화는, 조금 지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등을 폈다.
"괜찮아, 방소보. 그리고 아비 말이 맞아, 내가 부탁한 거야. 내가 공격적인 체취에 어느 정도로 반응할지 알아야 했거든."
"뭐...그걸 옆에서 지켜봐 줄 사람도 없이 했다고? 너 미쳤어? 내가 조금만 늦게 들어왔으면, 너희, 너희-."
차마 말을 맺지 못한 방다병의 얼굴이 불타올랐다. 이연화가 옷자락을 탁 정리하며 약간 짜증스러운 눈으로 적비성을 흘겨보았다.
"적 맹주께서 그렇게 심술을 부리실 줄은 몰랐지 뭐야. 하긴, 화봉초를 먹었을 때도 네가 힘 조절을 못해서 피를 토했었지. 너 말이야, 나한테 억하심정이 있으면 말로 하고 성질 좀 죽여. 언제까지 그렇게 앞뒤 없이 살 거야?"
이연화가 혀를 차며 타박하는 말에도, 적비성은 평소처럼 무시무시한 시선을 쏘아붙이지 못했다. 아랫배에 아직 은근히 남은 열기를 다스리느라, 이연화를 비난할 여력이 없었다. 방다병이 눈썹을 휙 올리고는 이연화를 향했다.
"아비가 앞뒤 없는 거 하루이틀 봐? 하지만 넌 아니잖아, 왜 그렇게 무모한 짓을 했어?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서 다른 사람을 근처에 대기시켰어야지. 그리고, 왜 하필 아비야? 다른 사람들도 많은데-."
"다른 사람이라니, 누구? 이런 일에 동참하면서 민망함으로 명 깎이지 않을 사람이 거의 없잖아. 아무나 부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너나 원주들을 부를 수도 없고. 아비의 철면피를 믿고 부탁한 거야. 형질이 강한 양인이니까 실험 대상으로 적합하기도 하고. 이봐, 적 맹주. 다음에는 대처법을 좀 실험해 보자. 관하몽이 준 비상약이 몇 개 있거든."
이연화가 방다병 너머의 적비성을 향해 아무렇지 않게 건넸다. 적비성은 잠깐 혀를 깨물 뻔했다. 다음이라는 말에 치열한 내적 갈등이 치민 탓이었다. 방금 전과 같은 상황은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았으나, 자신의 자리에 다른 '실험 대상'이 있는 것도 원치 않았다. 참으로 모순적인 마음이었으며 그 이유조차 명료하지 않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방다병이 대경실색하여 높이 소리쳤다.
"이 짓을 또 한다고?!"
이연화가 어깨를 으쓱했다. 곤란한 상황이 지나가자마자, 남자는 평소처럼 뻔뻔한 낯을 하고 있었다.
"응, 진짜 위험한 상황이 생기는 건 막고 싶으니까. 기껏 위험한 놈들을 색출해놓고 만에 하나 내가 휘말려버리면 안 되지 않겠어. 걱정 마, 한 번 겪어봤으니까 두 번은 안 그래. 또 이상해질 조짐이 보이면, 내가 아비 혈도를 짚어서 제압할게. 충분히 조심하면-."
"싫어!"
방다병이 양손을 꽉 주먹 쥔 채 원초적으로 외친 말에, 이연화가 눈썹을 살짝 올렸다. 지나치게 어린아이 같은 반응을 마주하자 오히려 말문이 막혔는지, 이연화는 정말 그답지 않게도 눈을 깜박이며 조금 더듬거렸다. "시...싫어?" 방다병이 입을 삐죽거렸다. 이연화가 음인이 된 이후 통 웃는 일이 없었던 청년은, 부릅뜬 눈으로 이연화와 적비성을 번갈아 보다가 결연히 말했다.
"실험 대상이 필요하면, 차라리 내가 해줄게! 형질이라면 나도 꽤 강한 편이라고. 너도 알잖아."
이연화가 눈을 깜박였다. 고양이로 변신하겠다 선언하는 강아지를 발견한 사람처럼 방다병을 바라보다가, 이연화는 곧 한쪽 눈썹을 찌푸렸다.
"네가? 방소보, 진심이야?"
"당연하지. 왜 아비는 되는데 나는 하면 안 돼?"
방다병이 턱을 약간 든 채 허세를 부리듯 말했다(아마 실제로도 허세일 터였다). 적비성은 반사적으로 반대하고픈 마음을 품었지만, 도대체 그럴 근거가 마땅치 않아 목소리를 삼켰다. 머릿속의 톱니바퀴가 자꾸만 헛도는 느낌이었다. 이연화가 살짝 곤란할 때의 버릇대로 눈밑을 두어 번 긁적였다.
"넌 내 제자 비슷한 거잖아. 양심에 거리낄 일은 아니지만, 네 성정상 그게 되겠어?"
"오히려 제자니까 더 도울 수 있는 거지! 다음에 필요하면 꼭 나한테 말해, 나 조절 잘할 수 있으니까."
방다병이 적비성을 흘겨보며 맺었다. 적비성은 조금 전보다 더욱 불쾌해졌다. 한참 어린 애송이가, 감히 적비성을 충동 조절도 제대로 못하는 꼬마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적비성이 팔짱을 끼며 빈정거렸다.
"아직 제대로 음인과 섞여본 적도 없을 어린아이 주제에, 그런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겠군."
"나도 강호 초출이 옛말이거든? 그 사이 이런저런 일이 많았다고, 음인 고수와 싸워본 적도 여러 번 있어. 알아야 할 만큼은 알아."
방다병이 어린아이처럼 입을 내밀고는 툴툴거렸다. 영 회의적이고도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 모습을 응시하던 이연화는, 곧 체념조의 한숨을 툭 내쉬며 한 손을 내저었다.
"그래, 그래. 네가 언제 말린다고 말을 듣기나 했어? 알았으니 다음엔 네가 도와줘. 하지만 못하겠으면, 하기 전이든 중이든 반드시 얘기해."
"진심이냐? 이런 꼬맹이가 무슨 도움이 된다고."
"조금 전까진 너도 도움 안 됐거든? 아, 다음에 넌 옆방에 좀 있어줘. 오늘 겪어보니 만일의 상황에 대비하긴 해야겠어. 혹시라도 이상한 일이 벌어지면 날 때리든 얠 때리든 해서 멈춰."
이연화가 자신과 방다병을 대충 손짓했다. '이상한 일'이라는 대목에서, 방다병은 움찔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럴 일 없어!" 힘주어 외치는 꼴이 별로 미덥지 않았다. 적비성이 눈썹을 꿈틀했다.
"사람을 아주 멋대로 부려먹으려 작정했군, 이상이."
"싫으면 금원맹으로 돌아가든지."
이연화가 특유의 뻔뻔하면서도 미워하기 어려운 얼굴로 대꾸했다. 적비성이 입술을 꾹 다물며 고개를 돌렸다. 방다병은 짐짓 의기양양하게 팔짱을 끼었으나, 적비성은 그 눈동자가 조금 흔들리는 꼴을 가소롭게 바라보았다. 다음 '실험 대상'에서 배제되었다는 사실이 한편으로 다행스러웠지만, 동시에 아주 불만족스러웠다. 그렇다고 소리 높여 자신이 하겠노라 자원하는 것도 모양새가 이상했다. 이연화의 정신 나간 발상을 들었을 때부터 상해 있던 심기가 조금 더 나빠졌다.
적비성이 미간을 찌푸렸다. 금원맹주는 뒤엉킨 감정을 다루는 데에 별 조예가 없었다(애초에 복잡한 감정을 느끼는 일도 별로 없었다). 모든 건 내 하나뿐인 호적수가 웬 미친 짓을 꾸미면서, 나에 비해 격도 맞지 않는 애송이들과 부대끼기 때문이다! 적비성은 자신의 불쾌감을 그렇게 정리하며, 조금 전 충동적으로 받아낸 옥패를 만지작거렸다. 이연화의 말대로 아주 좋은 옥이었지만, 마음 같아선 당장 분질러버리고 싶었다.
적비성의 불쾌감은, 그로부터 보름 후 백천원에 516통의 구혼서가 모였을 때 더욱 증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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