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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06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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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꿈이었다. 마치다는 어두운 숲을 걷고 있었다. 사위가 어두워 명확치 않은데도, 마치다는 초행길이 아닌 것처럼 거침없이 걸었다. 저 너머에 어슴푸레한 빛이 보였다. 그곳이 아마 목적지인 듯 했다. 누군가가 가르쳐주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마음이 그곳으로 향했다.
 

도착한 곳에는 제 손 만한 수정이 달빛을 받아 빛나며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얼추 보기에도 숲 속에서 우연히 발견할 만한 물건은 아니었다. 마치 마치다가 발견하기만을 기다린 것처럼, 그런 말도 안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마치 말을 거는 것처럼… 마치다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그 순간, 꿈에서 깬 마치다는 정신없이 몸을 일으켰다. 어찌나 깊은 꿈이었는지, 방금 전까지 숲 속에 있었던 것처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미 해가 바짝 들어 온 사방이 환했다.

 

“전하, 이제 일어나셨나요?”

“으, 응…”

“곤히 주무시고 계셔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가벼운 아침을 들일게요.”

 

고토의 부름에 겨우 정신을 차릴 즈음에는 꿈은 이미 희미해진 후였다.
 

조금만 더 하면 만질 수 있었는데. 도대체 뭐였을까. 꿈이라면 마치다의 기억을 기반으로 할텐데, 그 숲은 무엇 하나 익숙하지 않고 생경하기만 했다. 그곳은 어디였을까. 전부 허상인 게 당연한데도, 왜인지 쉽게 잊을 수 없는 꿈이었다. 마치다는 자꾸만 그 순간을 곱씹었다.

 

“아, 오후에 폐하께서 티타임에 초대하셨어요.”

“오후에?”

 

꿈에 빠져있을 시간을 주지 않는 구나. 마치다는 갑작스레 나타난 ‘폐하’의 존재에 얼굴을 굳혔다.
 

그 난리를 피우며 헤어진 게 바로 어제였다. 아직 스즈키의 얼굴을 보기가 어색했다. 그래도 아랫사람이 먼저 사과를 청하는 자리라도 만들어야 하나 생각하던 차였는데, 스즈키가 먼저 부를 줄은 몰랐다.
 

아니, 애초에 스즈키가 부른 건 처음이 아닌가? 이번의 우연한 만남이 아니고서는 전부 마치다가 스스로 청해서 그를 만났다. 스즈키 쪽에서 마치다를 찾은 건 처음이니 어색한 것도 당연했다.
 

정작 황제로부터의 전언은 별 것이 없었다. 황비의 적응이 아직이니, 별다른 준비를 할 필요 없다는 배려까지 함께였다. 벌써부터 어떤 옷을 입고 나가야 할지 고토는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냥 가벼운 옷차림이면…”

“가벼운 옷차림이라뇨! 저한테만 맡기세요!”



고토도 스즈키와 마치다가 단둘이 대면하는 자리는 이번이 처음이라는 걸 아는 것이다. 잘 보이게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을 마치다가 어떻게 모를까. 실은 가장 잘 보이고 싶은건 마치다인데. 그 마음을 알아 마치다도 더 이상 고토를 말리지 않았다.



*

 

동궁의 정원은 매우 아름다웠다. 마치다가 정말로 어떤 준비도 할 필요 없이, 숙련도 높은 하녀장과 적극성 높은 고토의 준비로 정원은 순식간에 낭만적인 분위기를 갖추었다. 달달한 장미향 차와 오랜 시간 편히 앉아있을 수 있도록 준비한 자리는 정말로 황비를 퍽 배려한 자리였다.
 

스즈키는 일찍이 찾아와 자리에 앉아있었다. 주위의 모두가 의외라는 시선을 보냈지만 스즈키는 애써 무시했다. 이게 그렇게 의외인가? 누가 보면 황비를 무시하는 줄로 착각할 모양새였다. 이미 착각한 이들이 많았으나, 스즈키는 그 또한 모른 척 했다.
 

그가 이렇게 일찍 자리한 까닭은 그를 내내 괴롭히던 죄책감 때문이었다. 어제의 일이 있던 후로 황제는 내내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스즈키가 어제 연무장에 들어선 것은 우연이었다. 애초에 유이치에게는 검을 가르치지 않았고, 황비는 유약했다. 걸음을 조금만 재촉해도 발목이 불편해 찡그리는 얼굴을 했으니, 연무장에서 마주칠 리는 만무하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황비가 보인 검법은 의심할 여지 없이 마치다 가의 검법이었다. 그 순간 황제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거의 달리듯 그에게 다가갈 수 밖에 없었다. 황비도 양자이지만 마치다 가의 사람이다. 검법을 그렇게 중시하는 가문이니 그에게 가르쳤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그 편이 당연한데도, 스즈키는 케이와 닮은 얼굴을 마주할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마치다가 스즈키를 바라보았다. 움직이고 있다. 움직이는 그림이다. 영원히 살아있는 채 박제되었던 그림이 다시 움직이고 있었다. 10년 전의 그 모습으로.



“폐하를 뵙습니다.”



황비가 도착했다.


지금의 잘 꾸며진 얼굴도 부드러운 황비의 외양과 잘 어울렸지만, 어제의 훈련복 차림은 지나치게 케이와 닮아있었다. 어제를 떠올려서 그런지 황비의 얼굴에서 케이를 찾기는 훨씬 더 쉬웠다. 스즈키는 황비의 얼굴을 가만 바라보다가 인사할 타이밍을 놓칠 뻔 했다.



“갑작스러운 요청에 놀랐겠군.”

“아닙니다.”



황비는 얌전히 옆에 앉아 고개를 숙였다. 긴 속눈썹이 눈가에 그늘을 만들었다. 어제의 일 때문인지 의기소침한 모습이었다.


케이와 닮은 모습에 놀란 건 사실이었지만, 그의 앞에서 아몬을 혼내려던 건 결단코 의도했던 바가 아니었다. 다만 그 순간 황제는 10년도 더 어린 사내처럼 감정을 주체할 수 가 없었다. 그 순간을 도망치기 위한 구실이 필요했고, 황비의 피로한 발목은 적절한 구실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황비 앞에서 그렇게 하셨어야 했나요?’



아몬의 얼굴을 보고 놀라 집무실에 나타난 미야무라가 결국 한 소리를 했다. 황비를 사랑해줄 것까진 바라지도 않지만-그것만으로도 황비에게 큰 실례였다.-황비를 놀라게 해서야 가엾지도 않느냐고 그랬다. 스즈키는 미야무라의 말에 구태여 변명을 늘어놓을 생각도 없었지만, 그의 말에 마음이 고달픈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제의 일은 내가 사과하지.”



여러 말을 고민하였으나 결국 스즈키의 입에서 나온 건 매우 담백한 어투였다. 그럼에도 황비는 놀라 손사레를 쳤다.



“아닙니다, 폐하.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황비에게 제대로 말하지 않고 다른 이들 앞에서 몰아세웠지 않나. 내 잘못이야.”

“… …”



황비는 눈을 굴리다가 조용히 알겠습니다, 는 말로 사과를 받아들였다. 스즈키는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 …그런데, 태자가 검을 무척 좋아한다는 걸 혹시 아시나요?”



아, 아직 긴장을 풀 때가 아닌가. 스즈키가 황비를 바라보았다. 황비는 조금 긴장한 얼굴이었지만 얼른 말을 뒤이었다.



“연무장에 있는 동안 눈을 반짝이며 기사들을 바라보았답니다.”

“… …”

“그러니, 너무 무섭게 대하지 말아주세요. 태자께서 겁을 먹습니다…”



검을 배울 수 있게 해주시면 더 좋구요... 뒤로 갈 수록 황비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하지만 말끝의 흐림은 전혀 없었다. 겁은 먹었지만 할 말은 해야하는가. 스즈키는 가만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황비는 모른다. 자신이 어떤 마음으로 그의 검을 바라보았는지. 그리고 어떤 마음으로 유이치에게 검을 쥐어주지 않는지.


마치다의 검을 가장 사랑했던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스즈키였다. 마치다의 검을 처음 본 순간부터 그를 자신의 기사로 삼고자 했다. 처음에는 그의 단정하고 곧은 검을 사랑했고, 그를 위해 수도 없이 노력하는 모습을 사랑했고, 끝내는 칼을 쥔 손끝마저도 사랑했다. 황비가 마치다의 검을 보였을 때에 속절없이 심장이 뛰던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마치다가 검을 쥐지 않았다면 많은 것이 달라졌을 것이다.



“대제국의 태자는 칼을 들 필요가 없다.”

“하지만…”

“칼을 들 일이 없도록 할 것이다. 내가.”



황비는 태자를 아껴주었다. 자신의 아이가 아님에도 이토록 아끼고 사랑해주는 일은 고마울 따름이었다. 여태 홀로 자란 태자에게도 필요한 애정을 황비가 채워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황비가 스즈키의 전부를 알 필요는 없었다. 왜 검을 가르치지 못하는지, 이런 이야기는 사실 황비와는 전혀 상관 없었다. 그저 스즈키의 마음에 남은 질긴 고집일 뿐이었다.

그리고 유이치가 칼을 들 필요도 없도록 강력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다짐은 진심이었으므로, 스즈키는 달리 거짓을 말하는 것도 아니었다. 스즈키는 완강한 거절의 어투로 고개를 돌렸다.
 

그때 스즈키 주변의 시선이 느껴졌다. 감히 황가에게 시선을 둔다니 벌을 내려야 마땅하건만, 스즈키는 차마 그러지 못했다. 제대로 보지 않아도 잔뜩 속상해하는 게 느껴지는 황비와, 혼자 왔을 때부터 느껴졌던 그들을 착각하는 이들의 시선이었다.


이래서야 사과하러 와서 황비가 혼났다는 소문만 더 무성해지는 게 아닌가. 스즈키는 목을 가다듬고 다시 황비를 차분히 바라보았다. 이미 잔뜩 풀이 죽어 눈초리가 쳐진 모양새가 잔뜩 혼이 난 여우 같았다.



“… 들지. 이 케이크는 내가 특별히 부탁한 것이니 먹지 않으면 하녀장이 속상해 할거야.”

“폐하께서 직접이요?”



황비의 눈에 다시 총기가 돌았다. 스즈키가 직접 부탁했다는 말이 놀라운지 말을 돌려도 별 말이 없었다.


희고 부드러운 케이크는 포크 끝에 부드럽게 뭉그러졌다. 황비는 아주 작게 한 조각을 떠 입에 밀어넣었다. 반기는 입술이 뾰족해졌다가, 이내 놀란 손 밑으로 숨었다. 황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스즈키를 보았다.



“엄청 맛있습니다!”

“그런가.”

“이런 맛은 처음 먹어봅니다. 정말로요.”



좀전까지만 해도 얌전히 앉아있느라 긴장한 상태였을텐데, 케이크 하나에 사르르 풀린 얼굴로 누구보다 그 단 맛에 열중하고 있었다. 황비는 긴장이 풀리면 마치 오래 만난 친우처럼 편히 말을 했다. 그 모습이 퍽 귀여워 황제는 옅게 웃었다.



“그대도 좋아하는군.”



순간 스즈키는 아차 싶어 황비를 보았다. 영문 모를 말이었을텐데도 황비는 구태여 아무런 말 없이 웃었다. 마치 다 안다는 것처럼, 누구를 떠올리는 것이냐 물음도 없었다. 대신 다시 한 입 단 맛을 삼키며 맛있다고 웅얼였다. 말도 함께 삼켜준 것이 고마울 일인가.


물어보았다 해도 답하지 않았겠지만 스즈키는 구태여 스스로에게 부정하지도 않았다. 황비가 처음 먹어봤을 저 달콤한 평화의 맛을, 케이도 먹어보지 못했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칼을 쥐지 않았다면, 자신의 앞에서 이렇게 즐겁게 웃는 이가 케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그렇게도 생각했다. 황비를 앞에 앉혀두고 수도 없이 케이 생각을 했다. 그에게 해주지 못한 것들이 수도 없이 많이 생각나서, 그 모든 걸 황비에게라도 해주고 싶다고, 저 닮은 얼굴로 기뻐하는 얼굴이라도 보고싶다고 계속해서 생각했다.
 

역시 마치다도 가엾고, 황비도 가엾다. 스즈키의 마음 속엔 여전히 죄책감이 사라지지 않았다.




짧다 ;( 그래도 예전 분량 거의 다 나온듯
노부마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