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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2 00:26
어느 날 점심 즈음, 사람의 왕래가 드물던 연화루에 뜬금없이 방다병과 적비성이 찾아왔음. 앞치마를 매고 요리를 하고 있던 이연화는 날을 잡고 짜기라도 했는지 연달아 들이닥치는 먹성좋은 사내들때문에 대놓고 불편한 표정을 지었어. 오랜만에 고기가 당겨 좋은 닭으로 닭찜을 하고 있던 참인데 어디 소문이라도 났나...여튼간 연화는 점심 전에 이놈들의 볼일을 전부 해결해주고 모두 쫓아낸 뒤 여유롭게 식사를 하려고 했을거야. 근데 그게 뭐 되겠어? 요즘 야심차게 연구한 새 기관을 이연화한테 자랑하려고 가지고 왔던 방다병인데 적비성을 보자마자 목적따윈 홀딱 까먹고 자리를 잡고 앉아(?) 티격태격해대기 시작했겠지. 그렇게 시간은 흘러가고 솔솔 나는 고소한 닭찜냄새에 은근히 밥은 언제 먹을거냐고 눈치를 주는데...이연화는 본래 삼일에 걸쳐 나눠먹으려고 했던 먹음직스런 닭찜을 한끼에 축내야한다는 사실을 아쉽지만 받아들이기로 했겠지

결국 닭이고 뭐고 포기한 연화가 몇가지 산채요리와(방다병: ...?생각보다 먹을만) 닭을 퍼서 식탁으로 가져왔어. 방다병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큼직한 닭다리를 보고 식욕이 솟았지. 그래서 냉큼 닭찜접시 위 닭다리로 손을 뻗으려고 했는데 이연화가 파리라도 잡듯이 냅다 방다병의 손등을 찰싹 내리쳐 방다병이 닭다리를 집어가는 걸 막았어. 방다병이 놀라고 당황해서 억울하게 혼나는 강아지처럼 이연화를 바라보고.. 이연화는 방다병에게 버릇없이 굴지 말라고 한소리 하면서도 닭찜접시를 적비성의 앞으로 스윽 밀어줬음. 적비성은 둘의 모습을, 아니 정확히는 제 앞에 닭접시를 밀어주는 이연화를 흥미롭게 바라보다가 방다병이 너무너무너무너무 한입 가득 물어뜯고 싶었던 닭다리를 집어 식사를 시작했고...

으아!! 치사해!! 왜 나는..!!
뭐? 먹기 싫어? 불만있음 먹지 마.

방다병은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어이가 없어 쒸익쒸익거리며 이연화를 노려봤겠지. 젓가락을 집어든 연화는 방다병의 불손한 시선에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얼굴로 철판을 깔고 응수했을거고. 그치만 연화의 그런 반응 때문에 방다병은 더더욱 적비성과 이연화 둘 사이에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있다고 굳게 확신했음 어쩐지, 지난번에도 둘의 분위기가 이상하다 했지..! 분명..분명 이 방다병님을 쏙 빼고 둘만 비밀스런 모종의 거래를..!






...이연화는 방다병이 적비성과 저를 두고 말도 안되는 상상의 나래를 펴건 말건 조용히 식사를 하다 물끄러미 적비성을 바라봤음. 젓가락을 집은 적비성의 힘줄 돋은 손이나, 곧게 벌어진 어깨가 찬찬히 다시 뜯어 봐도 어느하나 나쁘지 않아서 그간 몰래 고민해왔던 생각을 구체적으로 가닥을 잡아야 하나 싶어. 연화는 사람을 눈앞에 두고 음흉한 생각을 하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 얼굴표정에 신경쓰면서 호로록 차를 마셨음.

양인에서 음인으로 변해 산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 일들이 많았음. 일단 근골의 힘에 한계가 있어 검술을 펼칠 때나 생활 전반에 옛날 생각만 하고 움직일 수 없었음. 그리고 무신경한 양인들 틈바구니에서 눈에 튀지 않기 위해 강박적으로 향을 가리고 제어해야만 했지. 이연화 본인도 양인이었던 젊은시절, 사고문의 문주로 사람들을 만나고 호령할 때 필요하다면 과시하듯 은근히 향을 흘리고 다녔던 기억이 있으니 뭐라 할 말은 없었지만... 그게 호감도 뭣도 없는 경우 얼마나 짜증나는 짓인지 음인으로 형질이 바뀌고 나서야 똑똑히 알 수 있었을거야. 때마다 지겹도록 찾아오는 귀찮은 달거리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성가시고 최악이었고.. 아무튼 이연화는 10년동안 엉망진창이 된 몸을 이끌고 온갖 일들을 홀로 터득해내야만 했음. 그치만 그중에서도 제일 힘든 건 바로 예고없이 찾아오는 망할 희락기였는데 연화의 골머리를 썩이던 지긋지긋한 희락기를 한방에 끝날 수 있게 만들어 준 건 다름아닌 눈 앞의 적비성이었지

그때 무슨 바람이 불어서 적비성이 저를 도와줬던 건지 모르겠으나 연화에겐 그렇게 강렬했던 경험이 없었을거야. 연화는 그날 같은 음인이 아닌 적비성으로부터 제 몸을 배우는 것 같았음.이연화는 기분나쁘기만 했던 진득한 음욕이 미련조차 남지 않고 사라져 상쾌했던 순간을 떠올렸음. 물론 걷지도 못할 정도로 싸질러댄 건 용서할 수 없었지만 자기도 미안했는지 하루 내도록 곁에 붙어 공력을 나눠주고 수발을 드는데 그만한 정성이면 재수없긴 해도 눈감아줘야지 뭐. 교활한 늙은 여우의 계산기가 적비성에게 먹인 닭다리까지 얹어 치밀하게 돌아가기 시작했음











어느 늦은 밤 적비성은 금원맹 거처에 얼씬거리는 낯선 전서구 한마리를 잡아냈음. 처음엔 금원맹에 침투한 정체모를 세작을 의심하면서 새의 발목에 달렸던 쪽지를 열어보게 됐겠지. 쪽지 안에는 그저 날짜와 장소, 시간만 간단히 적혀있었는데 눈썰미 좋은 적비성은 자신이 알고있는 누군가의 익숙한 필체를 확인하고선 긴장을 풀며 작게 웃어버렸음

하. 그러니까 때에 맞춰 만나러 오라는 거잖아.

이걸 대체 무슨 표정으로 적었을지 직접 가서 확인해보지 않을 수 없게. 적비성은 쪽지에 옅게 배여있는 연화의 음인향을 음미하다가 조금 아쉬워하며 쪽지를 태워버렸음. 그리고 부하들에게 한동안 자리를 비우겠다고 말하고 어디론가 훌쩍 사라졌겠지



연화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