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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18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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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망기는 점점 강징의 일을 도우며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서늘한 얼굴로 침묵을 지키며 강징의 주변을 맴도는 함광군의 모습은 마치 감시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강징은 오래 전부터 그래오기라도 한 것처럼 여상한 태도였으니, 아직도 이 혼인이 정략혼이라고밖에 생각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기이하게 비쳐졌다.
날이 갈수록 깊어지는 두 사람의 관계는 당사자들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작스레 위무선이 돌아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여기.
강징은 흠칫 고개를 들었다.
남망기가 지그시 바라보는 것을 안 강징은 얼른 그가 내민 종잇장에 도장을 찍었다.
돌아앉아 일을 계속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강징은 소리없는 한숨을 쉬었다.
갑자기 찬물을 맞은 것처럼 현실로 돌아온 것 같았다.
남망기의 관심과 비호 아래에서 얼떨떨해하다가, 어느 정도 적응하면서는 편안하고 두근거리고 가끔은 즐겁기까지 했던 행복감에 빠져 다 괜찮아진 줄 알았더니.
몇 달간 완전히 사라져버린 줄 알았던 감정들이 새삼스레 느껴졌다.
거기에는 미미한 고통의 자국에, 불안하고 초조한 감정도 있었다.
하지만 무거운 앙금에 눌리는 것처럼 어둡고 음울한 기분은 아니었다.
두려운 것도 꺼림칙한 것도 아니었다.
사실 강징은 무척 한심한 기분에 빠져 있었다.
위무선을 평온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들어 호기로운 소리를 했었지만, 그것이 강징의 사람됨이 달라졌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는 본래부터 살갑게 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타인에게 먼저 손을 내밀거나, 웃으면서 따뜻하게 환영한다거나 그런 일은 그에게는 완전 불가능했다.
즉, 강징은 현재 너무 멋쩍어서 위무선을 부를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아예 정식으로 초청을 하자고 붓을 들었더니 그만 머릿속이 새하얘져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과거 어느 때보다도 위무선이 보고 싶었다.
지금 만나지 못하면 또 떠나서 언제 돌아올지 몰랐다.
그것이 몇 달이 될지, 몇 년이 될지,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심지어 이제는 운심부지처에서 그를 기다리는 지기조차 없으니, 두 번 다시 되돌아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
강징은 말없이 등을 보이고 앉아 일을 하는 남망기를 험악하게 노려보았다.
만약 남망기가 보았다면 그의 눈에는 차마 소심해서 말을 못하는 사랑스러운 모습이었겠으나, 때마침 창 밖을 지나던 부사의 눈에는 무척 흉악한 장면으로 비쳐졌다.
이 혼사는 역시 흉사가 되는 것이 아닌가.
부사는 못 본 척 황급히 창가를 떠나며 벌렁거리는 가슴을 움켜잡았다.
결국 강징은 남망기에게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냉가슴만 꿍꿍 앓는 채로 해가 저물었다.
저녁도 먹는 둥 마는 둥, 목욕도 하는 둥 마는 둥하고 침소로 돌아온 강징은 늑대의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는 남망기를 보고 그나마 쌓인 체증이 반은 가시는 것 같았다.
침상에 오르자 곧장 늑대가 살갑게 머리를 걸치며 비벼대었다. 남망기는 늑대로 변하고 나면 거침없이 친밀함을 표현했다.
-그... 저...
강징은 뻣뻣한 자세로 누운 채 따스한 감촉을 음미하다가 입을 열었다.
-남망기... 부탁이 있는데...
강징이 쭈뼛쭈뼛 눈짓을 하며 말을 더듬거리자 늑대는 잠시 멈추어 바라보았다.
강징도 늑대 모습인 그는 편했지만, 어쩐지 이 순간만은 그 속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왠지 제 고민을 다 들킨 것 같았고, 급속도로 불안해졌다.
짧은 시간동안 무섭도록 가슴이 조여들며 부끄러워졌고, 사정없이 쿵쾅거렸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한계가 온 듯 왈칵 뒤집어지고 말았다.
-위무선 그 자식은 대체 뭐야!
강징은 벌떡 일어나며 냅다 소리를 질렀다.
-네가 나랑 혼인을 했다는데, 예의상이라도 와야 하는 거 아니냐고!
겨우 답답했던 것들을 터뜨리기 시작하자, 강징은 분통이 터지면서 활발하게 전신의 피가 통하는 듯 기운이 들끓는 것 같았다.
-옛날부터, 정없는 자식! 생판 남들한텐 턱도 없이 살갑게 굴면서, 나한테는 맨날 뭐냐고! 겉으로만 실실거리고 다 봐주는 척 하고, 일이 터지면 매번 나한테서 멀어지는 방법만 택하잖아!
강징은 연이어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대었다.
주먹을 꽉 쥐고, 마치 눈 앞에 덩그라니 앉은 늑대가 욕을 먹는 당사자이기라도 한 양, 오랫동안 참아왔던 소리를 다 토해냈지만 사실 그 말들 안에 박혀 있던 뼈는 다 가신지 오래였다.
욱하는 마음에 억지로 난리를 치고 보니 공기만 몇 배로 싸늘해지는 것 같았고, 금세 난감한 느낌이 들었다.
늑대-남망기는 난리를 치는 강징이 무색하도록 계속해서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만 바람에 촛불이 꺼지는 것처럼 훅 기운이 다해버린 강징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빤히 보는 늑대의 시선이 거북해져 슬슬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얼버무리듯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그러니까... 네가 좀...
갑자기 늑대가 몸 위로 앞발을 턱 걸치자 강징은 깜짝 놀라 뒤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자 늑대는 곧장 머리를 들이밀며 얼굴을 핥아대기 시작했다.
핥고, 또 핥다가.
그리고 계속 핥았다.
강징은 얼굴을 찌푸리며 이리저리 피해도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일이 계속되자 끝내 짜증을 내며 밀어내기 시작했다.
-아니, 왜 이러는 거야?!... 아잇, 남망기, ......그만 좀...!
강징은 커다란 머리를 손바닥으로 밀어내며 뻗대고 불평도 해 보았지만 그러면 말이 없는 짐승은 잠시 쉬었다가 또 핥기 시작했고 무거운 머리로 꾸욱꾸욱 눌러대었다.
이게 무슨 한심한 상황인지, 강징은 정말로 어이가 없었지만 하루종일 긴장한 채로 고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점점 기운이 빠졌다. 거기다 따끈하게 핥아지고 천천히 더운 털가죽 사이로 파묻히자 노곤한 졸음이 밀려왔다.
결국 끈질기게 길어지는 단순한 공격에 함락된 강징은 긴장이 풀리고 설핏 미소까지 지으면서 잠이 들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일어났을 때에도 강징은 그대로 남망기의 품에 안겨 있었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남망기는 강징보다 먼저 일어나지 않았고, 심지어 나체인 상태로 강징을 꼭 안고 있었다.
강징은 그 사실을 깨닫고는 잠이 확 깨면서 얼굴이 달아올랐다. 남망기는 순간 움찔하며 벗어나려던 강징을 꼼짝도 못하게 사지로 죄면서도 의복을 완벽하게 정제하고 있을 때와 다름없는 고상한 눈빛이었다.
그리고 그가 말했다.
-강만음. 그 일로 대체 며칠이나 고민했나.
남망기는 제 목소리를 듣고 움츠러드는 강징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말하기가 그리 어렵다면 글로 적어서 줘도 된다.
서서히, 강징은 굳은 몸을 풀고 그의 품에 안착하며 안도감과 동시에 뜨거운 감정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늑대가 아닌 사람 모습의 남망기에게 그런 감정을 느낄 때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기분이 들었다.
강징이 아는 어떤 사람도 이렇게 세심하지 않았다.
남망기는 강징을 꼭 끌어안고 머리에 입을 맞추었다.
-그런데.
-...?
-부군이라고 불러주지 않을 텐가.
그 말에 강징은 눈을 찡그리며 고개를 들었다.
남망기는 물끄러미 시선을 맞추며, 마치 돌로 만든 것처럼 딱딱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눈빛이 이글거렸다.
혼인한 후로 강징은 절대로 부군이라는 호칭을 내뱉은 적이 없었다.
언제나 남망기, 언짢다 싶으면 함광군이었다.
잠시 동안 강징은 위무선의 일조차 잊어버리고 새빨갛게 익어버렸다.
서책을 읽는 듯 차갑게 끊어 말하는 말투 때문에 여느 사람들은 눈치채지도 못하겠지만.
몇 달간 그와 침식을 함께 했던 강징에게는 완성된 문장이 들렸다.
나를 부군이라 부르면, 부탁을 들어주겠다.
강징은 점점 어깨를 웅크리다가 그만 남망기의 품으로 사라져버리려는 듯 얼굴을 묻어버리고 말았다.
그나마 일방적이던 대화마저 끊겨버리자 방 안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무거운 정적에 눌리는 것 같았다.
강징은 가슴이 마구 쿵쾅거리며 남망기의 품에 숨은 채로 남망기의 눈치를 보느라 숨이 다 졸아드는 것 같았다.
이 순간 남망기가 부끄러워하는 자신을 구경하며 얼마나 사랑스러워하고 있는지 모르고서.
그 때 갑자기 남망기가 침상에서 일어나버리자 강징도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어디 가?!...
남망기는 돌아보지 않는 채로 짤막하게 대답했다.
-운심부지처.
-지금...? 갑자기? 밥도 안 먹고?
-위영이 언제 떠나버릴지 모르잖나.
-그... 그런가...
남망기는 말없이 침상 옆에 걸터앉아 의복과 신발을 끌어왔다.
강징은 흐트러진 이불에 감긴 채 주저앉아서 그의 등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술이 벌어졌다.
몇 번 그와 몸을 섞으면서도 그의 맨등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가끔 그의 등 뒤로 팔을 돌려 끌어안고 긁으며 피부가 거칠다는 느낌을 받긴 했다. 하지만 워낙 어둡고 정신이 없는지라 금세 잊고 말았다.
조금 전까지 얼굴을 물들이던 피가 죄다 눈가로 몰려드는 것 같았다.
원수에게 붙잡혀 고문을 당했던 강징의 몸에 난 상처도 이보다 흉하지는 않았다.
넓고 단단한 등짝에 종횡무진으로 패인 상처들은 마치 그를 갈가리 부숴버리려다 그대로 굳어버린 것 같았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행하고, 자신이 아끼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남망기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감행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의 마음이 온통 자신에게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도 주체 못할 인력에 끌려가는 것처럼, 강징은 무릎걸음으로 날아가듯 그의 등을 끌어안아버리고 말았다.
남망기의 등은 밤새 안겨 있던 늑대의 품처럼 넓고 따뜻했다.
그의 몸을 꼭 끌어안고, 거친 흉터에 뺨을 대고 수치도 없이 비벼대는 동안 알량한 자존심도 수치심도 녹아버렸다. 터무니없이 커 보이던 불안도, 근심도 다 흩어져 사라져버리는 것 같았다.
이윽고 앞으로 겹쳐진 자신의 손을 커다란 손이 덮고 조용하게 잡아주자 내리뜬 강징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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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망기는 점점 강징의 일을 도우며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서늘한 얼굴로 침묵을 지키며 강징의 주변을 맴도는 함광군의 모습은 마치 감시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강징은 오래 전부터 그래오기라도 한 것처럼 여상한 태도였으니, 아직도 이 혼인이 정략혼이라고밖에 생각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기이하게 비쳐졌다.
날이 갈수록 깊어지는 두 사람의 관계는 당사자들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작스레 위무선이 돌아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여기.
강징은 흠칫 고개를 들었다.
남망기가 지그시 바라보는 것을 안 강징은 얼른 그가 내민 종잇장에 도장을 찍었다.
돌아앉아 일을 계속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강징은 소리없는 한숨을 쉬었다.
갑자기 찬물을 맞은 것처럼 현실로 돌아온 것 같았다.
남망기의 관심과 비호 아래에서 얼떨떨해하다가, 어느 정도 적응하면서는 편안하고 두근거리고 가끔은 즐겁기까지 했던 행복감에 빠져 다 괜찮아진 줄 알았더니.
몇 달간 완전히 사라져버린 줄 알았던 감정들이 새삼스레 느껴졌다.
거기에는 미미한 고통의 자국에, 불안하고 초조한 감정도 있었다.
하지만 무거운 앙금에 눌리는 것처럼 어둡고 음울한 기분은 아니었다.
두려운 것도 꺼림칙한 것도 아니었다.
사실 강징은 무척 한심한 기분에 빠져 있었다.
위무선을 평온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들어 호기로운 소리를 했었지만, 그것이 강징의 사람됨이 달라졌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는 본래부터 살갑게 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타인에게 먼저 손을 내밀거나, 웃으면서 따뜻하게 환영한다거나 그런 일은 그에게는 완전 불가능했다.
즉, 강징은 현재 너무 멋쩍어서 위무선을 부를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아예 정식으로 초청을 하자고 붓을 들었더니 그만 머릿속이 새하얘져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과거 어느 때보다도 위무선이 보고 싶었다.
지금 만나지 못하면 또 떠나서 언제 돌아올지 몰랐다.
그것이 몇 달이 될지, 몇 년이 될지,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심지어 이제는 운심부지처에서 그를 기다리는 지기조차 없으니, 두 번 다시 되돌아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
강징은 말없이 등을 보이고 앉아 일을 하는 남망기를 험악하게 노려보았다.
만약 남망기가 보았다면 그의 눈에는 차마 소심해서 말을 못하는 사랑스러운 모습이었겠으나, 때마침 창 밖을 지나던 부사의 눈에는 무척 흉악한 장면으로 비쳐졌다.
이 혼사는 역시 흉사가 되는 것이 아닌가.
부사는 못 본 척 황급히 창가를 떠나며 벌렁거리는 가슴을 움켜잡았다.
결국 강징은 남망기에게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냉가슴만 꿍꿍 앓는 채로 해가 저물었다.
저녁도 먹는 둥 마는 둥, 목욕도 하는 둥 마는 둥하고 침소로 돌아온 강징은 늑대의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는 남망기를 보고 그나마 쌓인 체증이 반은 가시는 것 같았다.
침상에 오르자 곧장 늑대가 살갑게 머리를 걸치며 비벼대었다. 남망기는 늑대로 변하고 나면 거침없이 친밀함을 표현했다.
-그... 저...
강징은 뻣뻣한 자세로 누운 채 따스한 감촉을 음미하다가 입을 열었다.
-남망기... 부탁이 있는데...
강징이 쭈뼛쭈뼛 눈짓을 하며 말을 더듬거리자 늑대는 잠시 멈추어 바라보았다.
강징도 늑대 모습인 그는 편했지만, 어쩐지 이 순간만은 그 속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왠지 제 고민을 다 들킨 것 같았고, 급속도로 불안해졌다.
짧은 시간동안 무섭도록 가슴이 조여들며 부끄러워졌고, 사정없이 쿵쾅거렸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한계가 온 듯 왈칵 뒤집어지고 말았다.
-위무선 그 자식은 대체 뭐야!
강징은 벌떡 일어나며 냅다 소리를 질렀다.
-네가 나랑 혼인을 했다는데, 예의상이라도 와야 하는 거 아니냐고!
겨우 답답했던 것들을 터뜨리기 시작하자, 강징은 분통이 터지면서 활발하게 전신의 피가 통하는 듯 기운이 들끓는 것 같았다.
-옛날부터, 정없는 자식! 생판 남들한텐 턱도 없이 살갑게 굴면서, 나한테는 맨날 뭐냐고! 겉으로만 실실거리고 다 봐주는 척 하고, 일이 터지면 매번 나한테서 멀어지는 방법만 택하잖아!
강징은 연이어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대었다.
주먹을 꽉 쥐고, 마치 눈 앞에 덩그라니 앉은 늑대가 욕을 먹는 당사자이기라도 한 양, 오랫동안 참아왔던 소리를 다 토해냈지만 사실 그 말들 안에 박혀 있던 뼈는 다 가신지 오래였다.
욱하는 마음에 억지로 난리를 치고 보니 공기만 몇 배로 싸늘해지는 것 같았고, 금세 난감한 느낌이 들었다.
늑대-남망기는 난리를 치는 강징이 무색하도록 계속해서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만 바람에 촛불이 꺼지는 것처럼 훅 기운이 다해버린 강징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빤히 보는 늑대의 시선이 거북해져 슬슬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얼버무리듯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그러니까... 네가 좀...
갑자기 늑대가 몸 위로 앞발을 턱 걸치자 강징은 깜짝 놀라 뒤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자 늑대는 곧장 머리를 들이밀며 얼굴을 핥아대기 시작했다.
핥고, 또 핥다가.
그리고 계속 핥았다.
강징은 얼굴을 찌푸리며 이리저리 피해도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일이 계속되자 끝내 짜증을 내며 밀어내기 시작했다.
-아니, 왜 이러는 거야?!... 아잇, 남망기, ......그만 좀...!
강징은 커다란 머리를 손바닥으로 밀어내며 뻗대고 불평도 해 보았지만 그러면 말이 없는 짐승은 잠시 쉬었다가 또 핥기 시작했고 무거운 머리로 꾸욱꾸욱 눌러대었다.
이게 무슨 한심한 상황인지, 강징은 정말로 어이가 없었지만 하루종일 긴장한 채로 고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점점 기운이 빠졌다. 거기다 따끈하게 핥아지고 천천히 더운 털가죽 사이로 파묻히자 노곤한 졸음이 밀려왔다.
결국 끈질기게 길어지는 단순한 공격에 함락된 강징은 긴장이 풀리고 설핏 미소까지 지으면서 잠이 들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일어났을 때에도 강징은 그대로 남망기의 품에 안겨 있었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남망기는 강징보다 먼저 일어나지 않았고, 심지어 나체인 상태로 강징을 꼭 안고 있었다.
강징은 그 사실을 깨닫고는 잠이 확 깨면서 얼굴이 달아올랐다. 남망기는 순간 움찔하며 벗어나려던 강징을 꼼짝도 못하게 사지로 죄면서도 의복을 완벽하게 정제하고 있을 때와 다름없는 고상한 눈빛이었다.
그리고 그가 말했다.
-강만음. 그 일로 대체 며칠이나 고민했나.
남망기는 제 목소리를 듣고 움츠러드는 강징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말하기가 그리 어렵다면 글로 적어서 줘도 된다.
서서히, 강징은 굳은 몸을 풀고 그의 품에 안착하며 안도감과 동시에 뜨거운 감정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늑대가 아닌 사람 모습의 남망기에게 그런 감정을 느낄 때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기분이 들었다.
강징이 아는 어떤 사람도 이렇게 세심하지 않았다.
남망기는 강징을 꼭 끌어안고 머리에 입을 맞추었다.
-그런데.
-...?
-부군이라고 불러주지 않을 텐가.
그 말에 강징은 눈을 찡그리며 고개를 들었다.
남망기는 물끄러미 시선을 맞추며, 마치 돌로 만든 것처럼 딱딱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눈빛이 이글거렸다.
혼인한 후로 강징은 절대로 부군이라는 호칭을 내뱉은 적이 없었다.
언제나 남망기, 언짢다 싶으면 함광군이었다.
잠시 동안 강징은 위무선의 일조차 잊어버리고 새빨갛게 익어버렸다.
서책을 읽는 듯 차갑게 끊어 말하는 말투 때문에 여느 사람들은 눈치채지도 못하겠지만.
몇 달간 그와 침식을 함께 했던 강징에게는 완성된 문장이 들렸다.
나를 부군이라 부르면, 부탁을 들어주겠다.
강징은 점점 어깨를 웅크리다가 그만 남망기의 품으로 사라져버리려는 듯 얼굴을 묻어버리고 말았다.
그나마 일방적이던 대화마저 끊겨버리자 방 안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무거운 정적에 눌리는 것 같았다.
강징은 가슴이 마구 쿵쾅거리며 남망기의 품에 숨은 채로 남망기의 눈치를 보느라 숨이 다 졸아드는 것 같았다.
이 순간 남망기가 부끄러워하는 자신을 구경하며 얼마나 사랑스러워하고 있는지 모르고서.
그 때 갑자기 남망기가 침상에서 일어나버리자 강징도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어디 가?!...
남망기는 돌아보지 않는 채로 짤막하게 대답했다.
-운심부지처.
-지금...? 갑자기? 밥도 안 먹고?
-위영이 언제 떠나버릴지 모르잖나.
-그... 그런가...
남망기는 말없이 침상 옆에 걸터앉아 의복과 신발을 끌어왔다.
강징은 흐트러진 이불에 감긴 채 주저앉아서 그의 등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술이 벌어졌다.
몇 번 그와 몸을 섞으면서도 그의 맨등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가끔 그의 등 뒤로 팔을 돌려 끌어안고 긁으며 피부가 거칠다는 느낌을 받긴 했다. 하지만 워낙 어둡고 정신이 없는지라 금세 잊고 말았다.
조금 전까지 얼굴을 물들이던 피가 죄다 눈가로 몰려드는 것 같았다.
원수에게 붙잡혀 고문을 당했던 강징의 몸에 난 상처도 이보다 흉하지는 않았다.
넓고 단단한 등짝에 종횡무진으로 패인 상처들은 마치 그를 갈가리 부숴버리려다 그대로 굳어버린 것 같았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행하고, 자신이 아끼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남망기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감행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의 마음이 온통 자신에게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도 주체 못할 인력에 끌려가는 것처럼, 강징은 무릎걸음으로 날아가듯 그의 등을 끌어안아버리고 말았다.
남망기의 등은 밤새 안겨 있던 늑대의 품처럼 넓고 따뜻했다.
그의 몸을 꼭 끌어안고, 거친 흉터에 뺨을 대고 수치도 없이 비벼대는 동안 알량한 자존심도 수치심도 녹아버렸다. 터무니없이 커 보이던 불안도, 근심도 다 흩어져 사라져버리는 것 같았다.
이윽고 앞으로 겹쳐진 자신의 손을 커다란 손이 덮고 조용하게 잡아주자 내리뜬 강징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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