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hygall.com/568125926
view 5502
2023.10.12 01:30

https://hygall.com/567073593



동궁은 햇살이 아름답게 비치는, 정원이 아름다운 궁전이었다. 원래라면 서궁을 사용했어야 했겠지만, 스즈키가 머무는 황금궁에서 훨씬 더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궁의 크기도 아담하고 작았으며, 근무하는 하인들의 수도 적었다.
 

마치다가 궁에 들어오는 날, 하인들은 조용히 그들의 주인을 맞이했다. 예의에 어긋남이 없었지만, 환대도 없었다. 모두가 마치다와 눈 하나 마주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마치다는 그들을 가만 훑어보다가 시선을 거두었다.
 

급하게, 그것도 북부의 사라져가는 마치다 가에 입양된 평민 오메가. 축하연 하나 없이 갑작스레 나타난 황비. 아무도 곁에 두지 않다가 돌연 그를 황비의 자리에 앉히고선, 또 다시 전혀 나타나지 않는 황제. 누가 봐도 마치다는 보여주기식 황비였다. 이로서 한동안 황제를 혼인으로 귀찮게 하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그 정도의 인물이니 그 이상의 충성을 바칠 필요도 없다. 마치다는 스스로의 상황을 진단내리고 쓰게 웃었다.
 

입궁하였다고는 하나, 궁은 사람 하나가 들어왔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에게 많은 책임을 요하는 이도 없었다. 며칠간 황제는 마치다를 보러 오지 않았다. 마치다는 많은 시간을 하인들의 이름을 외우거나, 황궁의 지리를 익히기 위해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그래도 전속 시종으로 배정된 고토 덕에 아주 쓸쓸하지는 않았다. 고토는 아직 나이가 어렸고, 궁에 들어온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경력이 많지 않은 시종이 황비에게 배정되었다는 것 또한, 마치다가 이곳에서 환영받고 있지 못함을 뜻했다.

그래도 마치다는 엄숙한 시녀장보다는 제 또래의 고토가 훨씬 더 편했다. 게다가 고토는 얼마 되지도 않았으면서 얼마나 발이 넓고 싹싹한지, 금방 궁의 사정을 듣고 마치다에게 알려주기도 하였다.

 

“글쎄, 황제 폐하께서는 식사도 주로 집무실에서 하신다고 해요.”

“집무실에서?”

“네! 여간 바쁘신 게 아닌 모양이더라구요.”

 

식사 중 고토는 뜬금없이 황제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만큼 바쁘니 자신을 홀대하는 게 아니다. 고토는 아마 그렇게 말하고 싶었겠지. 마치다는 고토의 친절에 못내 웃었다. 넓은 식당에서 홀로 식사하는 모습이 많이 외로워보였던 모양이다.
 

그러는 한편, 마치다는 미야무라의 말을 떠올렸다. 이별할 수 있는 과거. 처음 들었을 때엔 많이 놀랐지만,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마치다가 이곳에 다시 돌아온 이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이별은 너무나 급했다. 이루지 못한 약속이 많았고, 하지 못한 말들이 많았다. 과거의 약속을 지키고 나면, 모든 것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마치다는 여전히 스즈키를 돕고 싶었다.

 

“그래,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는 없겠구나.”

“네?”

“고토, 옷을 같이 골라주겠니?”

“어디를 가시려구요?”

 

환영받지 못한다 해도 좋았다. 이미 한 번 죽어보기까지 했는데, 무엇이 무서울까. 마치다는 식기를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폐하를 뵈어야겠구나.”



*


“폐하, 황비 전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황비가?”
 

황비라는 익숙치 않은 단어를 시종장이 아무렇지 않게 입에 담았다. 마치 황비를 어색해하는 건 스즈키뿐이라는 듯이. 스즈키는 내내 바라보던 서류를 천천히 내려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황비와의 만남이 편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무 죄 없는 황비를 이대로 보낼 수도 없었다.
 

문이 열리고 황비가 집무실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푸른 정장을 입고 당당히 걸어오는 모습이 평민이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 태도였다. 분명 축하연에서는 자신과 눈도 마주치지 못했던 것 같은데, 그 사이 성격이 변한 걸까. 스즈키는 덕분에 황비의 얼굴을 좀더 찬찬히 살펴볼 수 있었다.
 

아무리 미야무라라 하여도 처음엔 거짓인 줄 알았다. 초상화를 그리는 이가 과장하여 그린 줄로만 알았다. 평민 황비는 그의 단 하나 뿐인 반려, 마치다 케이타를 지독하게 연상시켰다.
 

자세히 뜯어보면 다른 점도 있었다. 흑단같이 짙은 검은 머리를 했던 케이와 달리, 황비의 머리는 햇빛 아래에서 옅은 갈색을 띄었다.일평생 북부의 기사로 살아왔던 케이는 흰 피부에, 단단한 뼈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남부에서 온 황비는 살짝 그을린 피부빛에 주근깨가 두드러졌고, 뭘 먹고 지내기는 하는지 작고 말랐다.
 

분명 마치다이지만, 케이가 아니다. 스즈키는 생각했다.

 

“무슨 일이지.”

 

지독하게 사무적인 말투였다. 무슨 일이 없으면 찾아볼 수 없는 사이도 아니면서. 하지만 마치다는 조심히 예를 차렸다.

 

“궁에 들어온 기간이 짧지만, 그 사이 폐하에 대해 들려온 소식에 걱정이 되어 찾아뵈었습니다. 정무로 바빠 식사를 제대로 못하신다기에.”

“내가 그대를 걱정시켰군. 나를 찾는 이가 많으니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부족한 몸이지만 황비의 자리입니다. 제가 어쩔 수 없다고 넘어갈 수는 없지요.”

 

스즈키는 대답 대신 눈썹을 으쓱였다. 마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본래 황후의 책임이라고 하나 지금은 황후되실 분이 계시지 않으니, 그 책임을 제가 조금이나마 다해 황제 폐하의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내궁을 관리할 권한을 달라. 황비는 그렇게 청하고 있었다.

 

황비의 말이 틀린 점은 없었다. 황후가 없으니 황비가 그 일을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다만 평민이었던 황비가 섣불리 도전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도-자신의 차지가 어떤지 알면서도-굳이 저를 찾아와 이 말을 했다.

 

“입궁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면서 내궁을 관리하겠다. 황비는 일욕심이 있나.”

 

아니면 권력욕이 있나. 소심해보이던 얼굴 뒤로 한 자리 꿰차 보겠다는 야망이 있었나. 스즈키는 황비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짙은 눈동자는 한치 흐트러짐이 없었다. 황비라기엔 충성스러운 기사의 얼굴을 하고 있다.

 

“폐하의 보필을 하고 싶습니다. 그것도 욕심이라면, 욕심이겠지만요.”

 

허락, 해주시겠어요? 반듯이 선 자세가 긴장으로 굳어있다. 말아쥔 주먹에는 제법 힘이 들어가 있다. 스즈키는 황비를 보다가 고개를 다시 숙였다. 괜찮겠지.

 

“집사장을 통해 여태 처리하던 일들을 전달하지. 궁금한 점이 있다면 그에게 물어보면 돼.”

“감사합니다!”

 

그제야 황비의 얼굴에 웃음이 폈다. 일전의 얼굴은 어디가고, 어린 나이대의 청년 같다. 스즈키는 저도 모르게 함께 웃었다.

 

“바빠질 일밖에 남지 않았는데 황비는 기뻐하기만 하는군.”

“그야, 폐하와 함께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종종 논의드리러 올게요.”

 

스즈키는 헛기침했다. 혼례 뿐 아니라 입궁 후 어떤 함께하는 자리도 마련하지 않았던 스즈키였다. 황비의 말이 자연스레 책망처럼 느껴질 수 밖에 없었다.
 

스즈키의 불편한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황비는 연신 감사를 표하며 한결 가벼워진 걸음걸이로 집무실을 나섰다. 볼일은 그것 뿐이었나. 식사자리라도 청하는 줄 알았더니, 그런 말도 없이. 바라는 일은 오직 그것 하나 뿐이었다는 듯, 별 숨김이 없이 솔직하고 심지어는 단순했다.
 

그리고 그마저 누군가를 떠오르게 한다. 스즈키는 황비가 떠난 문을 한참을 바라보았다가, 종을 흔들어 집사장을 불렀다.


*

 

집사장은 스즈키가 황제로 즉위한 이래로 궁의 전반을 전부 관리해왔다고 한다. 10년의 경력을 생각해도 여전히 젊은 나이로 보였으나, 그의 엄청난 일의 처리량에 마치다는 숨이 막힐 뻔 했다. 덕분에 한동안 시간은 엄청 빠르게 흘렀다. 더이상 방에만 처박혀있을 시간이 없었다.

사용인들도 점차 하나 둘, 마치다를 황궁의 사람으로 대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태도가 딱히 달라지지는 않았다. 사실 달라진건 마치다의 마음일지도 모른다. 여태 누군가에 의해 상황에 떨어지기만 했었는데, 이제서야 자신이 찾은 일을 직접 해나갈 수 있게 되었다. 마치다는 다시 돌아온 이래로 전에 없이 뿌듯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마치다는 여유시간을 조금 더 당당하게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아, 황비 전하!”

“유이치…!”



태자. 마치다가 반가움에 이름을 불렀다. 몇 번 만나지 않은 사이에 지나치게 살가운 태도였을지 걱정이 되었다. 다행히 태자는 크게 개의치 않는지, 오히려 즐거운 듯 웃어보이며 인사를 올렸다.



“먼저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제가 먼저 찾아뵈었어야지요.”

“말씀 편하게 해주세요, 전하.”

“그…그럴까…”

 

마치다와 함께 식사를 하고 싶다는, 황태자의 귀여운 초대였다. 전언을 받은 마치다는 황궁에 온 이후로 가장 즐거운 마음으로 홀을 걸어갈 수 있었다. 황궁에 온지 얼마 안된 마치다를 위하는 황태자의 상냥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스즈키에게 마치다가 이별할 수 있는 과거라면, 유이치에게 마치다는 채워주고픈 과거가 있었다. 갓난 아기를 많이 안아주지도 못한 채 헤어졌다. 갑작스럽게 이별을 겪은 건 유이치도 마찬가지였다. 마치다는 비어버린 공백의 과거를 조금이라도 채워주고 싶었다.


그런 생각으로 왔지만서도, 오히려 마치다가 식사 자리 내내 더 들떴다. 유이치가 의젓하게 식사하는 모습이 이렇게 즐거울 줄 몰랐다. 갑자기 쑥 커버린 아이는 여전히 낯설었지만, 아기였을 때부터 자리했던 입가의 점이라든지, 마치다를 닮아 유독 크고 검은 눈이라든지, 조금씩 자신이 알던 유이치의 모습을 찾아낼 때마다 마치다는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황비의 앞에서이기 때문인지 의젓하게 앉아있는 모습과 달리, 음식을 입 안에 넣고 오물거릴 때마다 뾰족하게 나오는 입술은 아이의 태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태자께서는 폐하와 자주 식사를 하…하니?”

“아… 폐하께서는 바쁘셔서요… 저도 식당에서 뵌 적은 많지 않아요.”



그런 아이의 목소리가 쓸쓸하게 느껴져, 마치다는 이런 화제를 꺼낸 자신의 입을 퍽 치고 싶었다. 바빠서 밥도 집무실에서 먹는다던데, 당연히 그렇겠지. 당황해하는 마치다의 기색을 눈치챈 아이는 뒤늦게 덧붙였다.



“그렇지만, 평소엔 학업이라든지, 많이 살펴봐주시고 계셔요.”

“아…! 그렇구나!”



마치다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뱉었다. 스즈키는 여전히 아이를 위해 많은 시간을 쓰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이의 교육에 직접 관여하고 있다는 건 분명 마음을 많이 쓰고 있다는 뜻일 터이다.


문득 마치다는 이전에 스즈키와 했던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둘은 자주 훈련장에서 겨루기를 하였다. 어느 날 아이를 낳으면, 누가 아이에게 검을 가르쳐야 할지 두고 둘은 열띤 논쟁을 벌였다.


마치다는 기사인 자신이 당연히 검술 선생을 하겠다 하였지만, 스즈키는 마치다는 엄한 선생님일 것 같다며 자신이 훨씬 더 잘 가르칠 수 있다고 자부했었다. 마치다가 스즈키에게 엄했던 건 사실이지만, 만일 유이치라면, 마치다는 이 귀여운 아이에게 절대 엄히 대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마치다가 혼자 조용히 웃자, 유이치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마치다를 바라보았다.



“아, 미안해. 폐하께서 네게 검을 가르치는 상상을 했거든.”



태자의 눈이 더욱 반짝였다.



“황비 전하께서는 검을 다루시나요?”

“흐음…”



물론 노보루의 몸으로는 한 번도 검을 쥐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춤 추던 때를 생각하면, 몸을 사용하는 건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비록 한쪽 다리가 불편하긴 해도 못 봐줄 정도는 아니리라. 마치다는 시원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는. 나중에 꼭 보여줄게.”



태자는 나이 때에 걸맞은 설레는 얼굴을 하였다. 하지만 아이는 쉽게 응하지 못하고 조금 망설였다.



“… … 폐하께서 아시면 별로 안 좋아하실 것 같아요.”

“응? 어째서?”

“제가 검을 잡는 걸 허락해주지 않으셨거든요.”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마치다는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스즈키는 이전부터 검에 능했다. 뛰기 시작할 때부터 장난감 검을 쥐고 놀지 않았나. 그러니 필수 소양처럼 가르치리라 생각하였는데, 여지껏 미뤄둔 모양이었다.


어쩌면 아직 성에 차는 선생님을 찾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스즈키만큼 빼어난 이를 주위에서 찾기는 쉽지 않을테니 말이다. … … 바로 앞의 마치다를 제외하면.


이제 막 내궁을 관리하는 일을 배우고 있는 중이었지만, 아주 바쁜 것까진 아니었다. 아직 익히는 단계였기에, 할 수 있는 분야가 적은 탓도 있었다. 그러니 잠깐이라면, 유이치의 임시 선생 노릇을 해도 괜찮으리라 여겼다. 마치다는 잔뜩 자신감이 차 있는 상태였고, 일을 벌리기에 좋은 기분이었다.

 

“어쩌면 아직 좋은 선생님을 찾지 못해서 그런 걸지도 몰라.”

“그런…걸까요?”

“그럼. 폐하께서 네게 검을 가르치지 않으실 리가 없으니까. 그리고, 검을 배우는 것 만큼 중요한 게 검을 보는 일이거든.”



유이치의 눈이 다시금 반짝였다. 마치다는 유이치의 볼을 쓰다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럼 훈련장에서 볼까요, 태자?”

“네!”





노부마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