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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05 15:32

공포 ㅈㅇ

스압 ㅈㅇ

 

 

키사라기 역에 대해 알고 계신가요?
존재하지 않는 역에서의 행동 안내


 



 

 

 

 

 

‘이곳은 상식적인 곳이 아닙니다.’

 

아다치가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수첩의 내용은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이상한 괴변으로 치부당하기 딱 좋은 것들이었다. 쿠로사와 역시도 5년 전의 일이 아니었다면 이러한 경고와 안내를 무시했을지도 모르는 일. 

쿠로사와는 기나긴 밤 동안 앞으로 다가올 막연한 미래와 근거를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받아들이며 아다치의 수첩에 적힌 내용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정성스레 문장을 적어 내려가는 아다치의 모습을 상상하며 그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에 미소를 짓기도 했고.

 

 

쿠로사와가 다시 한 번 눈을 떴을 때는 짙은 밤하늘이 걷히고 어느덧 밝아진 풍경이 그를 맞이하고 있었다.

 

아침이구나…. 

평소였다면 집에서 감흥없이 맞이했을 다음 날이었을 터. 사람이 아무도 없는 적막하고 고요한 무인역에서 다음 날의 해를 맞는 건 쿠로사와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경험하는 일이었다. 물론, 5년만에 찾아온 유의미한 아침이기도 했다.

 

 

 

별다른 장애물 없이 역의 바깥으로 나온 쿠로사와는 모험심 따윈 접어두고 아다치가 지시했던 내용대로 앞으로만 쭉 향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보였던 풍경들 중에는 아다치가 인터넷에 첨부했던 사진과 똑같은 것들도 있었고, 그 사실은 쿠로사와가 정말로 아다치와 같은 곳에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기엔 충분했다.

 

겉으로만 보기엔 그저 평화로워 보이기만 하는 평범한 모습. 아다치는 이곳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 건지, 어떤 일을 겪고 수첩에 여러 가지 경고 사항을 남긴 건지, 이곳에 대체 무엇이 존재하는지 등등 많은 것이 궁금해졌으나 쿠로사와는 애써 의식하지 않고 예의 파출소를 찾는 것에 집중했다.

 

경찰관에게 선물할 음료수 3개를 구매하는 것도 잊지 않고.

아, 당연히 체리맛은 무시했다.

 

아다치의 경고가 너무나도 무색하게 쿠로사와가 이동하는 동안 그를 긴장하게 할 만한 다른 보행자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점이 무인역이라는 사실에 더욱 현실감을 부여하는 것 같은데, 그와는 상반되게 역을 나올 때까지만 해도 마음을 어지럽히던 두려움은 점점 희석되어갔다.

약 30분 가량의 이동, 도보를 이동하는 거리로 따지면 꽤 적지 않은 걸음 수인데도 아다치는 용케도 왕복 1시간을 걸었구나 싶은 생각이 머릿속을 차지한다.

수첩에는 밤에 돌아다니는 건 위험하다고 적혀 있는데도 게시글 초반의 아다치는 잘만 돌아다녔었던 모양.

 

얼마나 걸었을까, 여타 보던 것들과 비슷비슷하게 생긴 주택이 늘어선 도로를 지나 편의점이 시야에 들어오자 마침내 파출소에 방문할 수 있다는 걸 깨달은 쿠로사와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진다.

 

 

 

 

 

 

 

***

 

 

 

 

 

 

 

이름: 쿠로사와 유이치

성별: 남성

직업: 영업사원

연령: 35

유입: 전철 탑승 후 키사라기역으로의 진입

비고: 신체 결손, 감각 장애, 정신 오염 등의 이상 증세 없음

 

특이사항:

  • 현재 이 근방에 거주 중인 것으로 추정되는 이와 인연이 있으며, 그를 찾는 수색 작업이 필요.
  • 수색 대상자의 정보(이름 등의 개인 정보, 대상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물건) 입수 및 확인 완료
  • 이전 거주지는 일본의 도쿄 부근

 

 

“더 추가가 필요한 내용이 있습니까?”

 

“… 아뇨, 괜찮습니다. 바쁘실 텐데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기꺼이 고개를 숙이며 예의 바르게 감사를 표하는 쿠로사와를 대면 중인 경찰관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드리워졌다.

그들의 반응에 쿠로사와는 자신의 가방을 열어 미리 준비해 둔 음료수를 건넸고, 경찰관들은 사양하지 않고 흔쾌히 받아들이며 만족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 그래, 이곳이 아닌 일반적인 도시에서라면 크게 이상할 것 없는 광경이 맞겠지. 

여태까지 큰 이상 징후를 경험하지 않았고, 또는 느끼지 못했던 쿠로사와는 파출소에 발을 들이자마자 아다치가 강조했던 사실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깨달았다.

‘상식적인 곳이 아니다.’ 근무 중이던 경찰관들의 얼굴은 특별한 점이 없는 평범한 사람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으나 어디까지나 신체적 조건이 그랬을뿐이었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그들을 보자마자 디테일한 부분에서 상당히 불쾌하거나 두렵게 생각되는 이질감을 느낄 것이고, 그건 쿠로사와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쿠로사와는 예의 바른 남자였다. 그들의 생김새에 관해 굳이 깊게 생각하지 않고 침착하게 공손한 인사와 함께 도움이 필요하다는 요청을 했을뿐.

 

그렇게 쿠로사와는 자신의 앞에 앉아 어떤 문서를 작성하는 경찰관의 질문에 거짓 없이 대답하며 인터뷰에 협조했고, 다소 갑작스럽게 생각되는 일련의 조사를 단순하게 끝마칠 수 있었다.

기묘한 불쾌감을 주는 외모와는 달리 경찰관들은 생각보다 붙임성이 좋은 듯한 구석이 있었다. 마치 쿠로사와를 안심시키려는 것처럼, 일반적인 공무원처럼 친절하게 양해를 구해 오는 등의 부드러운 태도를 보이는 것도 그렇지만 분위기를 가볍게 유지한다고 할까.

 

 

“저어, 실례합니다만…. 몇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것들이 있습니다. 괜찮을까요?”

 

“뭐, 대답해 드릴 수 있는 거라면요. 외지에서 오신 분들은 항상 궁금한 게 많으시죠. 가끔은 곤란한 질문도 있고요.”

 

“주의하겠습니다. 보시다시피 이곳에 오게 된 건 처음이라서요. 걱정되는 부분도, 낯설고 불안한 부분도 있고요.“

 

 

쿠로사와의 심정을 전해들은 경찰관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본 쿠로사와가 애써 침착하게 머릿속을 가다듬으며 아다치가 겪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수첩의 내용과 이러한 주의가 필요한 이유, 이외에도 외지인이 다수 존재하는지에 대한 여부를 질문했다.

경찰관의 즉답은 없었다. 다만, 상대의 감정 변화에 민감한 쿠로사와가 느끼기에는 그들이 불쾌한 기색을 보이는 것 같지는 않았기에 대답을 재촉하지 않고 인내심을 들여 그저 가만히 기다린다. 그러자 무언가 생각을 한 듯한 경찰관이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여긴 원래 당신 같은 사람들이 올 만한 곳이 아닙니다. 정확히 대답을 해 드리기엔… 직접 경험해 보는 쪽이 이해하긴 더 쉬울 거예요.“

 

”네, 그렇군요.“

 

”그럼에도 어째서 흘러들어오게 되는지는 이유를 모릅니다. 그렇기에 막을 수도 없고요. 하지만 저희를 포함한 이곳의 주민들은 당신과 같은 이들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습니다.“

 

 

쿠로사와의 말문이 막혔다. 본능적으로 등줄기에 돋는 소름, 전신을 덮는 긴장감. 

경찰관은 자신의 대답을 차분하게 경청하는 쿠로사와를 똑바로 응시하며 대답을 마무리지었다.

 

 

“… 외지인 중 저희와 접촉하기 전까지 생존하는 이들은 극히 일부입니다. 쿠로사와 씨가 입수하신 이 수첩도, 그것을 남긴 아다치 씨도 상당히 운이 따르는 중이라는 걸 기억해 주세요.”

 

“운… 이라니.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말씀인가요?”

 

“앞으로 언제나 그런 위험에 노출되실 겁니다. 이건… 제가 쿠로사와 씨에 대해 좋은 인상을 받아서 멋대로 드리는 충고입니다만.“

 

”네.“

 

”조심하세요. 제가 당신의 유해를 수습하게 되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원래 사시던 곳으로 무사히 생환해 주십시오.“

 

 

쿠로사와가 할 수 있는 것은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억지로 짜내 대답과 감사를 표하는 것밖에 없었다.

짧은 질답 후에 경찰관은 별다른 대가를 요구하지는 않았다. 그의 말마따나 쿠로사와의 인상이 좋게 작용한 덕분인 것인지, 이 정도의 융통성은 갖추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쿠로사와에게 있어서 나쁜 일은 아니었다.

 

결국 이곳의 정확한 정체, 자신을 비롯한 사람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존재들이 당최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명쾌한 대답을 요할 순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강한 직감이 들었던 탓이 크겠지만….

분명한 것은 아다치도, 자신도 터무니없이 위험한 곳에 떨어져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경찰관은 쿠로사와를 이끌고 이곳저곳을 다니며 필수 시설에 대한 안내를 들려 주었다.

시설은 일반적인 도시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으나 외지인들에 한해 이용 시간이 제한된다는 점, 거래 시 지불하는 수단에 간혹 이상이 있을 수 있다는 점, 섭취 가능한 식재료를 잘 구별해야 한다는 점 등등 안내가 계속될수록 느껴지는 이질감에 쿠로사와는 앞서 있었던 질답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직접 경험해 보는 것이 이해가 빠를 거라던 대답이 적절했다는 것도.

 

그리고 아다치가 특별히 방문 시 주의를 요했던 편의점.

경찰관과 동행하여 내부를 구경하던 쿠로사와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갈 뻔했다. 아니, 좀 더 정확히는 그 자리에서 기절할 뻔했다.

생필품은 기존에 늘 이용했던 편의점과 별반 차이는 없었으나 인스턴트 스낵류에 있는 것들은 도저히 평범한 음식이라 볼 수 없었던 것이 이유였다.

냉장 처리되어 있는 소시지바는 틀림없는 발기된 상태의 사람 음경이었고, 그 옆의 비엔나소시지는 그렇지 않은 상태의 동일한 부위, 샌드위치의 빵은 인간의 양손이었으며 디저트 젤리로 보이는 것엔 안구가 들어 있었다.

그 외에도 사람의 것으로 추정되는 내장과 온갖 신체 부위들로 구성된 먹을거리들은 쿠로사와의 비위를 대단히 상하게 만들었으나 밀려드는 토악질을 겨우 참아내며 애써 내색하지 않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가울여야만 했다.

 

편의점에 들어가기 전, 경찰관의 충고 때문이었다.

절대로 소란을 일으키지 말라는.

 

그제서야 쿠로사와는 자신이 어떤 곳에 흘러들어왔는지 제대로 깨달았고, 이런 곳에서 아다치가 5년이 지나도록 생존 중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미칠듯이 쿵쾅거리는 심장과 거칠어지는 호흡을 삼키듯 진정시키던 쿠로사와는 어떤 문구를 기억해냈다.

 

 

‘경찰에게 도움을 받을 땐 ••• 늘 대가를 지불하세요.‘

 

’음료나 ••• 인스턴트 음식 등을 요구합니다.‘

 

 

이들은 적어도 식인을 한다. 앞으로 쿠로사와가 경찰의 도움을 받게 된다면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이 신체 부위들을 제 손으로 바쳐야 한다는 뜻이었다. 혹은 그보다 더한 것도.

이곳은 상식적인 곳이 아니었다.

 

 

“혹시, 구매하셔야 하는 물건이 있습니까?”

 

“… 예?”

 

“필요한 게 있다면 지금 구입하셔도 됩니다. 아직 낮이고, 가지고 계신 금전으로 지불해도 되거든요.”

 

“아, 걱정은 감사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상당한 충격에 빠져 있던 쿠로사와가 겨우 제정신을 되찾고 거절의 의사를 표시하려던 순간, 자석처럼 그의 눈길을 이끄는 상품이 있었다.

지나치듯 보았던 디저트 젤리. 사람의 안구 두 개가 담겨 있는…. 

굳이 신경 쓸 어떤 이유도 없는 역겨운 물건이지만 그 안에 담긴 눈동자를 제대로 바라보자 문득 떠오르는 존재가 있었기에 쿠로사와는 차분하게 행동을 멈추고 계속해서 응시했다. 그리고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어째서 아다치의 얼굴이, 그의 맑은 눈동자가 생각나는 것인지 도무지 연유를 알 수 없었지만 쿠로사와는 이내 그 젤리를 덥썩 집어들었다. 아다치의 눈동자를 닮았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어찌나 깔끔하게 뽑았는지 시신경까지 제대로 존재하고 있는 두 개의 안구가 마치 새카만 구슬같이 예쁘게 빛나던 아다치의 것과 너무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는 건 쿠로사와 스스로도 오싹한 소름이 돋을 만한 일이었다.

제 손으로 사람의 신체 부위를 구입하게 되다니, 살면서 경험해 볼 것이라 생각조차 한 적 없는데.

하지만 지나치면 돌이킬 수 없어질 것 같다는 강한 불안감이 그를 덮쳤고, 쿠로사와는 자신의 고가 명품 지갑과 그 속에 든 모든 금전에 더불어 자신의 비싼 시계까지 점원에게 내 주고 나서야 거래에 성공할 수 있었다. 

지갑과 시계 모두 하나같이 천문학적인 고가의 제품들이었지만 쿠로사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지불했다. 사람의 일부를 금전적으로 값을 매긴다면 아무리 비싸도 모자라니까.

 

쿠로사와가 구매한 디저트 젤리는 경찰들의 몫으로 넘어갔다. 물론 인계 목적이 보상이나 지불 요금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경찰에게 넘긴 이유도 존재했다.

경찰은 이와 같은 분류의 물건을 “분실물”이라 칭했다. 간혹 외지인 중 어디선가 타인의 신체 부위를 구매하여 경찰에게 맡기는 일들이 있었기 때문. 

그렇게 경찰이 입수한 분실물은 빠르게 원래 소유자에게 돌아간다고 한다. 소유자는 그것을 돌려받고 치료를 통해 훼손된 신체 부위를 복구한다고 하는데….

 

 

“쿠로사와 씨, 혹시… 소유자가 돌려받기를 거부하면 저희가 처리해도 됩니까?”

 

“네? 거부라뇨?”

 

“아, 자주 있거든요. 저희도 이게 엄연히 업무의 일부고, 치료에 필요한 대가도 있으니…. 그 비용을 지불하기 부담스러운 경우에는 돌려받길 포기하는 경우가 많아서요.”

 

“아, 금전의 문제인가요?”

 

“교환이죠. 잃어버린 신체를 수복하는 값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제공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신체를 되찾아 준 데에 대한 수고 비용과…. 말은 안 되지만 모종의 사유로 결손된 신체를 다시 연결하는 것에 대한 병원비를 말하는 거겠지.

쿠로사와는 슬슬 자신의 머리가 이상해지고 있는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상식적으로….

그러나 이내 생각하기 포기하는 쪽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아다치도 대놓고 표현하지 않았는가, 상식적이지 않은 곳이라고.

수많은 의문을 깔끔하게 접어두고 납득하기로 한 쿠로사와는 차라리 정확한 비용을 물어보는 게 낫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모든 과정을 마치면…. 최종적으로 지불하게 되는 비용이 정확히 얼마입니까?”

 

“음, 정확히는 아니지만 남은 수명 중 10년 정도면 충분할걸요.”

 

 

비싸다. 그것도 말도 안 되게.

만약 남은 수명이 딱 10년이거나 그 이하인 사람이라면 신체를 복구하기 무섭게 바로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는 의미 아닌가. 물론 어떻게 수명을 빼앗는다는 건진 몰라도.

말 그대로 도박이나 다름없는 셈이었다. 누군가에게는 목숨값이 될 정도의 엄청난 대가를 내는 꼴.

 

쿠로사와는 대답을 망설였다. 안구의 주인이 정확히 누군지도 모르는데…. 만약 원래 소유자가 자신의 수명이 걱정되어 돌려받길 포기한다면 경찰관이 먹어치울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그는 영영 두 눈을 잃은 채 남은 삶을 살아가는 수밖에 없을 거고, 되찾아 주길 요청한 쿠로사와의 입장에서도 좋은 일은 아니었다. 

어떻게 할까, 이제 와서 돌려달라고 하기엔 쿠로사와 자신도 저것을 적당하게 처리할 방법이 없다.

그리고 자꾸만 아다치가 떠오르는 것이 마음에 걸리기도 하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아다치라면 이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했을까?

아니, 스스로 자신의 신체 일부를 영영 포기해야만 하는 비이성적인 결말을 “아님 말고.” 식으로 넘기는 것이 과연 맞는 선택지일까?

 

 

“… 그 10년의 수명, 혹시 대신 지불할 수도 있나요?”

 

“예?”

 

“원래 주인이 아니라… 제 수명으로 대신하고 싶습니다.”

 

 

결국 쿠로사와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정신 나간 선택을 하고 말았다. 남은 수명이 10년도 채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자신에게도 통용되는 말이며, 기껏 아다치를 다시 만날 가능성이 생겼는데 이루지 못하고 죽어 버린다면 적어도 곱게 성불하지는 못하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로사와는 처음으로 도박을 걸었다. 누군지도 모르는 상대의 남은 삶이 걱정되었기에.

비합리와 이타심의 끝을 동시에 달리는 쿠로사와의 요청을 들은 경찰관이 잠시 침묵을 지킨다.

 

 

“괜찮겠습니까? 후회하실 텐데요.”

 

“기껏 두 눈을 찾았는데… 스스로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니까요. 졸지에 남은 삶 중 일부를 잃어야 한다는 것도 두려울 것이고요.”

 

“… 그건 쿠로사와 씨도 마찬가지…. 음, 저희야 상관없지만요? 동의서에 서명만 하시면 됩니다.”

 

“그럼 그렇게 해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쿠로사의 수명 중 10년이 너무나도 간단하게 날아갔다. 다행히도 10년도 못 살 정도로 단명할 팔자는 아니었는지 쿠로사와는 멀쩡하게 살아 있었고, 그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정말로 수명이 줄었을지 의구심을 동반한 찜찜함을 함께 느끼기도 했다.

 

 

 

일련의 모든 사건이 지난 이후, 어느덧 해가 저물어 저녁이 찾아왔지만 쿠로사와가 거취할 수 있는 곳은 정해지지 않았다. 쿠로사와의 문제라기보단…. 외지인은 예고를 하고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보니 지낼 수 있는 장소가 늘 넉넉할 순 없다는 게 유감스러운 일이었지만.

하지만 밤은 위험하다는 아다치의 조언은 과장이 아니었는지 경찰 측에서 쿠로사와에게 보호를 제안했다.

물론 보호에 대한 대가는 지불해야겠지만 그건 나중 일이고, 당장 위험이 찾아오는 것보단 나으니까 쿠로사와 입장에서도 거부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외지인을 위한 임시 보호소, 경찰들이 모두 퇴근한 후에도 이곳은 안전하다. 업무를 위한 공간에만 얼씬하지 않는다면 신변에 이상이 생길 일은 없고, 변변찮지만 위생이나 숙식 등에 대한 시설도 존재는 했다.

그런 것들에 대해 불평하거나 실망할 여유 같은 건 없었다. 역에서의 쓸쓸한 노숙보다는 훨씬 나았고, 정체 모를 위협에서도 보호받을 수 있다는 것도비교도 안 될 장점이었으니. 

사소하게는… 하루 동안 내내 들고 다녔던 케이크를 냉장고에 보관할 수 있게 됐다는 점.

 

날씨는 종일 쌀쌀한 편이었으니 아무래도 상하진 않았을 것이다. 어찌나 애지중지 들고 다녔는지 크림이 흐트러진 기색조차 없는 것을 보며 쿠로사와는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만약… 아다치와의 재회가 더욱 늦어진다면 아마도 케이크는 혼자 먹거나 버려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기다리는 이유는 개인적인 욕심, 그러니까 소망이었다.

이미 지나 버렸지만 올해는 제대로 아다치의 생일을 축하해 주며 둘이서 먹고 싶다는 소망.

그러한 소망을 품으며 쿠로사와는 불편한 이부자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편하게 잠들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비정상이며 위험한 공간에서.

 

 

 

 

 

 

 

 

***

 

 

 

 

 

 

 

다음 날, 쿠로사와가 눈을 뜬 건 자신을 깨우는 경찰관의 손길에 의해서였다.

잠이 덜 깨 몽롱한 정신인 탓에 역시나 불쾌한 골짜기를 유발하는 외모를 보고 하마터면 심장마비가 올 뻔했지만 수 년간 쌓은 영업 스킬은 그보다 빠른 위기 대응 능력을 갖추게끔 만들었기에 그러한 불상사는 생기지 않았다. 

쿠로사와를 깨운 경찰관은 보지 못했다. 자신의 뒤에서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쿠로사와를….

 

간단하게 씻고서 재대로 의복을 갖추고 보호소를 나와 보니 들어서기 전부터 들려오는 대화 소리가 있었다.

대충 들리는 내용으로는 자신과 같은 외지인과 경찰관의 대화인 듯한데, 외지인?

정신이 번쩍 든 쿠로사와가 파출로 사무실로 급하게 튀어나오자 그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뜨는 사람이 있었다.

경찰도, 다른 존재도 아닌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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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시, 쿠로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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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다치….?“

 

 

그토록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아다치가 실종된 날로부터 오래도록 꿈 속에서나 그릴 수 있던 그리운 얼굴이 드디어 쿠로사와의 눈앞에 있었다.

누구도 먼저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가기에는 힘들었다. 오랜 시간 동안 쌓이고 쌓여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도 많았던 탓인지도 몰랐지만 쿠로사와는 자신의 머릿속이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음을 확실히 느꼈다.

 

 

“쿠로사와, 네가 왜 여기서 나와?”

 

 

아다치는 대답을 듣지 못했다. 다짜고짜 성큼성큼 다가온 쿠로사와가 갑작스럽게 자신을 끌어안았기 때문이었는데, 당황스러운 것도 있었지만 이곳에서 아는 사람을 만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기에 잠시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물론, 쿠로사와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주절주절 기쁨의 소감을 털어놓기에 바빴지만.

 

 

“아다치, 역시 살아 있었구나. 무사해서 다행이야. 보고 싶었어. 갑자기 실종됐을 때도 정말 충격적이어서… 5년 동안 계속 기다리고 있었어. 물론 힘들었….”

 

“잠깐만. 잠깐, 쿠로사와. 진정해. 오랜만이라서 나도 당연히 반갑지만…. 아니, 반가우면 안 되지. 어떻게 된 거야?”

 

 

쿠로사와의 폭주를 저지한 아다치가 가까스로 그를 떼어놓으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제서야 진정할 수 있었던 쿠로사와는 아다치의 앞에서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지만…. 둘이 대화를 나눌 시간과 장소가 적절하지 않았기에 경찰관이 급하게 끼어들어 둘의 입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용건이 있어서 파출소에 방문하게 된 아다치, 그리고 새로운 거주 장소를 정해야 하는 예정인 쿠로사와.

이어서 두 사람이 가장 놀랐던 사실은 쿠로사와가 되찾아 준 안구의 주인이 바로 아다치였다는 것이었다. 갑작스레 두 눈을 돌려받게 된 것도 평범한 일이 아닌데, 찾아 준 사람이 모든 대가를 대신 지불했다는 것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라서 아침부터 파출소를 방문하게 된 것.

자신의 수명을 10년이나 깎아먹으며 눈을 찾아 준 주인공이 바로 쿠로사와였다는 사실에 아다치는 할 말을 잃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쿠로사와는 얼이 빠진 아다치에게 따스한 미소와 함께 소감을 전할뿐이었다.

 

 

“… 다행이야. 그게 아다치의 눈동자였다니. 아다치에게 도움이 돼서 기뻐.”

 

“쿠로사와, 어째서 그렇게까지…. 나 때문에….“

 

”아다치, 눈동자의 주인이 너라는 걸 알고 한 일은 아니었어. 그렇지만… 결과적으로는 어제의 일이 계기가 돼서 다시 만날 수 있게 됐으니까 전혀 아깝지 않아. 게다가 네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그건 옳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해. 어쩌면 10년 이상을 시각 없이 살아가야 할 수도 있고, 그건 괴로우니까.”

 

 

잔잔하게 자신을 달래는 쿠로사와의 목소리를 들으며 아다치의 눈빛이 수없이 떨려왔다. 

이렇게까지 무한한 이타심이라니…. 자신이었다면 이런 선택을 할 수는 없었을 거라는 생각에 아다치의 머릿속이 복잡해졌고, 스스로 인격적인 부끄러움을 느낀 아다치는 정중하게 머리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전하기 시작했다.

그것에 깜짝 놀란 쿠로사와가 허둥지둥 말리긴 했지만. 더불어, 아다치가 은혜를 운운하긴 했으나 쿠로사와는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보상 같은 걸 받을 생각 따윈 없었다. 특히나 아다치에게는 더더욱.

그저 자신이 행한 선의가 마치 선물로 돌아온 것 같아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뻤고, 그동안 아다치는 두 눈을 잃은 채 생고생을 하며 고통을 겪었을 걸 생각하니 오히려 안도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적어도 그에게는.

 

고마워, 미안해… 아니야, 괜찮아…. 두 가지의 대화를 쩔쩔매며 반복하던 둘을 다시 한번 떼어놓는 건 경찰관의 몫이었다. 어쨌든 아다치야 자신의 은인을 찾는 용건을 해결했고, 쿠로사와는 아직 문제가 남아 있었으니까.

제대로 된 거주지를 찾지 못한다면 곤란해진다. 말 그대로 임시 보호소는 임시일뿐, 장기 투숙은 불가능한데다 파출소를 찾는 존재는 외지인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아다치는 쿠로사와를 외면할 수 없었다.

 

 

“저기, 혹시… 쿠로사와만 괜찮다면 둘이 사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2인 거주도 가능할까요?”

 

“… 둘이? 같이? 나는 당연히… 좋아! 괜찮아.”

 

 

그토록 꿈꿔왔던 둘만의 스위트 라이프! 

상상이 현실로 이루어질지도 모르는 멋진 순간에 쿠로사와의 가슴이 미친듯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설마 아다치가 먼저 같이 살자고 제안할 줄은 몰랐는데…. 행여나 마음 바뀔까 덥썩 미끼를 물은 쿠로사와가 빠르게 동의하자 둘을 지켜보던 경찰관은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서류 더미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꺼낸 A4 용지 한 장, 깨알같은 글씨로 무언가가 적힌 문서를 집중해서 읽던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뭐…. 2인 이상 투숙이 안 된다는 내용은 없네요. 관리소장과 협의를 해 보죠. 아마 거절하지는 않을 겁니다. 조건은 조금 까다로워질 순 있겠지만요.“

 

 

경찰관의 대답을 들은 둘이 서로를 마주보았고, 그와 동시에 얼굴에 미소가 피어났다.

쿠로사와는 잠시 잊고 있는 것 같았지만 이곳에서 이전에 아는 사람을 만나 함께한다는 건 생각보다 큰 의미를 지닌다는 걸 아다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아주 끔찍한 일들을 여러 번 겪었던 만큼 그 공포와 후유증에 짓눌리며 보냈던 긴 나날, 그것들이 쌓여가면서 아다치는 스스로 느끼기에도 많은 변화를 겪었다.

자신처럼 영문도 모른 채 이곳에 끌려온 쿠로사와, 이미 생각지도 못한 은혜를 입었지만 만약 아무 일이 없었더라도 그의 존재는 그 자체로 아다치에게 또 다른 삶의 의지를 줄 수 있었다. 아다치는 직감적으로 그것을 알고 결심했다.

 

쿠로사와는…. 자신과 같은 고통을 겪도록 두지 않을 것이다.

 

 

 

 

 

 

 

 

마치아카 쿠로아다 동정마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