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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17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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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인 음인 차별 없는 세계관

윈란에 비해 션웨이는 패션에 별 생각이 없었다. 쇼핑을 아예 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그 본인은 그럭저럭 평범한 패션센스를 갖고 있었기에 굳이 자신이 옷을 살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었다. 옷장 안에 충분히 괜찮은 퀄리티의 정장들이 많기도 했고. 자신의 옷을 빌려 입겠느냐는 양심린의 제안을 거절한 션웨이였다. 수업을 끝내고 집으로 온 그는 그래도 야존에게는 말 정도는 해야 하지 않나 싶어서 그의 방을 찾았다. 동생을 아껴서가 아니었다. 그동안 늘 월급을 받고 회식마다 자신의 대리 기사 노릇을 하던 야존의 돈줄이 끊겼다는 것을 통보하기 위해서였다. 웬수같은 동생의 방에 들어가 그대로 야존을 부르려던 그는 야존의 모습을 보고 오늘도 어김없이 정색하며 비속어를 입에 담았다.

"미친놈..."

옷 벗기기 게임을 하고 있던 야존은 션웨이가 온 것도 모르고 멀티 플레이를 하고 있었다. 션웨이는 별 생각없이 노트북 화면을 보았다. [원하니? 가지렴.] 사이트 이름을 보고 그는 잠깐 굳었다. 윈란이 생각나서였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소설의 대사로 이런 외설적인 사이트를 만들다니. 헛웃음을 흘린 션웨이는 노트북 화면에서 다시 눈을 뗐다. 야존은 아랑곳하지 않고 사이트 칼럼 밑에 첨부된 [쿤룬의 사랑 판매소]에서 눈 가리개와 족갑을 구매했다. 한참 자신의 성적 판타지에 흠뻑 빠진 쌍둥이 동생을 지극히 한심하게 바라보던 션웨이는 이내 그의 허벅지를 퍽 찼다. 악! 야존은 그대로 의자에서 굴렀다.

"엄살은."
- 네가 찬 건 진짜 조온나 아프거든?!
"그럼 아프던가."
- 산통 깨졌잖아... 옷 더 벗겨야 하는데, 왜 왔어?
"너 앞으로 대리기사 일 못 한다고 통보하러."
- 왜? 뭐하러?!

션웨이가 정황사정을 들려주자 야존은 자신의 돈줄이 끊겼다며 양 교수를 미친 듯이 욕하기 시작했다. 저럴 줄 알았지. 션웨이는 무심한 눈으로 야존을 보았다. 야존은 프리랜서였기 때문에 수입이 불규칙했다. 물론 명망높은 집안의 일원이었던 두 사람에게는 자손의 자손까지 써도 모자랄 돈이 있었지만 얼굴을 제외하고 모든 것이 다 다르다고 할 수 있었던 쌍둥이 형제에게는 단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자신이 직접 돈을 벌고 싶어하는 자립심. 그래서 션웨이는 국문학을 전공하는 교수가 되었고 션야존은 자칭 "커플 매니저 겸 파티 플래너 겸 식장 진행자 겸 중매쟁이 겸 장의사"라는 그 나름의 특이한 직업을 가진 채 일하고 있었다.

- 그래서 옷은 정했고?
"어?"

어쨌거나 정황사정을 모두 말한 션웨이는 이에 곧 닥쳐올 동생의 짜증을 무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분명히 공돈이 없어졌으니 자신에게 실컷 짜증을 부리겠지. 하지만 야존의 반응은 자신의 예상과 정확하게 빗나갔다. 무심한 표정을 하고 있던 자신의 얼굴이 생각지도 못한 주제에 무방비하게 풀어졌다. 염두조차 하지 않고 있었던 주제라 더욱 그랬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션웨이의 표정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야존이 혀를 쯧쯧 찼다. 고지식한 인간.

"옷이 왜?"
- 설마 맞선인데 아무거나 꺼내서 입고 가게?
"겉치레인데 뭐하러 그런 걸 신경을 쓰겠어."
- 미쳤어? 야. 션웨이. 그래도 그쪽은 공안이야. 엄청 좋은 직업을 가진 오메가라고. 아무리 네가 자오윈란에 미쳤다고 해도 사리분별은 구별해야지.
"그건 내 쪽에서 해야 할 말 같은데. 네 그 특유의 가벼운 행동들이 사람들을 부끄럽게 한다는 사실을 넌 알 필요가 있..."

윈란의 이름을 언급하자마자 션웨이의 표정이 무섭게 변하는 것을 보고 야존은 슬쩍 형의 눈을 피했다. 션웨이의 성격을 건드리면 피를 보는 쪽은 자신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야존은 헐크같이 변하는 형의 모습을 절대로 보고 싶지 않았다. 그는 결국 빨리 대화 주제를 돌리는 방식을 선택했다. 그는 평소 쌍둥이 형의 스타일을 알고 있었다. 아예 옷을 못 입는 편은 아니었다. 교수답게 무난한 정장을 선호하는 그는 밖에서는 정장을, 집에서는 셔츠에 바지, 혹은 니트와 티셔츠를 입었다. 최악의 디자인을 구매하는 것도 패션 테러리스트도 아니었지만 그건 션웨이 본인이 마네킹에 걸려진 그대로 옷을 사기 때문이었다. 그는 명품에는 영 관심이 없었고 정장도 주로 중저가 위주로 구매했다. 아래 위는 당연히 앞서 말했던 것처럼 맞춤이었다.

"일단 옷장으로 가자. 평범하디 평범한 형 옷은 좀 버려두고."

하지만 야존은 달랐다. 화려한 패션 센스를 자랑하는 그의 스타일은 몇 안 되게 션웨이보다 낫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는 그 뒤로 옷장 안에서 수많은 옷들을 꺼내면서 션웨이의 골을 아프게 만들었다. 마침내 야존이 그에게 건네준 것은 주로 아래 위 정장 세트를 입던 션웨이에게는 사뭇 생경한 옷이었다. 오렌지색 셔츠에 체크 패턴의 와인색 정장 자켓, 그리고 검정색 타이와 블랙 진. 가끔 TV에 나오는 스타들이나 입을 만한 화려한 조합에 션웨이는 아연해졌다.

"이걸 입으라고...?"
- 엄청 괜찮아 보일걸. 요새 트렌드가 이런 믹스매치야.
"이상할 것 같은데."
- 아, 일단 입어 보라고.

야존은 이 옷은 같은 패션 잡지의 경품에 연속 당첨되어 받은 것이라 자신에게 두 벌을 있다는 사실을 일부러 자랑하며 특별히 이 옷을 션웨이에게 하사하겠다며 으스댔다. 션웨이는 어쩔 수 없이 생소한 옷을 받아들었다. 패션에 대해서는 거의 대부분 야존과의 형제관계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던 션웨이였지만 아주 가끔 그의 페이스에 휘말리는 때가 있었는데, 지금이 그때인 것 같았다.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야존은 갈색 워커를 들이댔다.

- 거기다가 이 워커 신으면 되겠다. 션웨이. 경품으로 받은 건데 발 사이즈가 다르더라고.
"도대체 경품으로 받은 게 몇 개냐. 너는...?"
- 이 몸이 번호만 읽으면 얼마든지 받을 수 있는 게 경품이지.

경품은 뭐가 그렇게 많은지. 그날 션웨이는 야존에게 무려 37벌의 옷과 45켤레의 신발을 받아야만 했다. 전부 경품으로 받은 것이라고 했다. 어이없어하면서도 결국 옷을 받은 션웨이에게 야존은 우쭐대며 자신의 스타일링을 자랑했다.
- 교수가 무채색이라는 고리타분함을 버려. 교수도 귀티나게 입고 다녀야지. 그렇게 입고 다니면 천하의 자오윈란도 형을 따라다니게 될 걸.
형의 아픈 기억을 제대로 건드린 야존은 끝까지 매를 벌었다.


그 시각 윈란은 간단한 감기 증세를 느꼈다. 희락기는 아니었지만 하루 종일 쇼핑에 시달린 탓에 전날 있던 목감기와 가벼운 몸살 증세가 있었다. 감기약을 먹은 그는 내일 입을 옷의 바지 주머니에 미리 억제제와 피임약을 챙겨 놓았다. 어차피 예비용이었고 쓸 일도 없어 보였지만 챙기지 않으면 어머니가 강제로라도 자신에게 들이밀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강제적인 것을 가장 싫어하는 윈란은 차라리 자신이 미리 준비하는 편이 더 낫다고 여겼다. 야존에게 션웨이가 패션 문제로 시달리는 동안 그는 다칭에게 어포를 밀어주고 서둘러 잠을 청했다. 빨리 맞선날이 지나고 자유가 찾아왔으면 싶었다. 지금은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절실했다.

그렇게 약속 날짜는 당일로 다가왔다. 윈란은 자신을 픽업하러 온 어머니에게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차가 출발하자 윈란은 말없이 창문 밖만 바라보았다. 괜히 입씨름을 하기도 싫었던 데다가 이미 어제 충분히 고생했던 터라 더 굴려지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윈란은 눈을 감았다. 잠깐 졸았다 싶은 찰나 어머니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도착했단다. 아들.

- 아들. 부디 좋은 시간 보내고 오길 바란다. 희락기가 아니라지만 미리 억제제는 먹어 놓는 게 좋겠구나.
"네. 가세요."

목적지에 도착하자 어머니의 권유로 차 안에서 주머니에 있는 억제제 중 하나를 꺼내먹은 윈란은 어머니의 차에서 내리려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어머니가 윈란에게 전날 빼놓은 넥타이 핀을 건넸다. 부적이 있는 그것 말이다. 윈란은 마지못해 그것을 넥타이 위에 달았다. 윈란의 어머니는 그제서야 만족스러운 듯 아들을 내려주었다. 레스토랑 앞에서 그는 붉은색 아우디가 주차장 밖 도로까지 빠져나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차가 보이지 않게 되자, 그제서야 그는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웨이터에게 [자오윈란]이라는 이름을 대자 곧바로 테이블 이름을 가르쳐 주는 그에게 윈란은 고개를 끄덕인 뒤 번쩍거리며 빛나는 대리석 바닥을 천천히 걸었다. 희락기의 끝자락이라 그런지, 감기도 다 나았건만 이상하게 몸이 살짝 늘어졌다. 왜 그렇지. 어차피 금방 얼굴을 보고 바로 헤어질 예정이었기에 별 걱정은 없었지만. 혹시나 몰랐으니 억제제 한 알을 먹고 간단히 억제제와 피임약을 챙겼으니 별 문제는 없었다. 윈란이 웨이터가 말한 곳으로 걸어갔다. 의외로 상대는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저 멀리서 희미하게 보이는 뒷모습은 깔끔하면서도 세련된 캐주얼 정장 차림의 남자였다. 체크무늬 와인색 자켓에 오렌지색 셔츠. 블랙 진을 입은 그는 자칫하면 없어보일 믹스매치를 깔끔하게 소화하고 있었다. 뒷모습만 봐도 섹시하네. 그래봤자 오늘 보고 말겠지만. 테이블 가까이로 걸어간 윈란이 먼저 말을 걸었다.

"일찍 오셨네요...?"

그렇게 말한 뒤 윈란은 다음 말을 이으려 했다. 피차 어색한데 밥이나 먹고 헤어지자고 말을 이어가려는데 상대가 마치 목각인형과 같이 삐그덕거리는 것처럼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그리고 드러난 정체를 보고 그는 잠시 제 앞의 인영을 보고 자신의 눈이 어디 먼 것은 아닌가 싶어 눈을 비볐다. 비비고 나서도 인영이 똑같아서 눈을 한 번 더 비볐지만 바뀌는 건 없었다.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자 윈란은 말 그대로 경악해 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건 자기가 너무 잘 아는 얼굴이었다. 헉. 윈란은 고상하고 고상한 레스토랑 안에서 놀란 나머지 비명을 지를 뻔 했다. 간신히 비명을 삼킨 뒤에야 그는 마침내 너무나도 익숙한 이름 하나를 뱉을 수가 있었다.

"션웨이..."

남자의 정체는 션웨이였다.



윈란은 말 그대로 경악한 채 션웨이와 두 눈을 마주쳤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의 재회라니. 션웨이 역시 제대로 얼어버린 얼굴이었다. 그 역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 했다. 션웨이에게 한 발을 더 내딛는데 기묘하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미친 거 아냐? 희락기도 아닌데? 윈란은 갑자기 엄청난 어지러움을 느꼈다. 그러나 자신의 지병은 위염이었지 빈혈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몸을 가눌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했을 때 그의 몸은 바닥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윈란은 정말로 자신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왜 이런 거지? 추락하며 이유를 생각하던 윈란의 얼굴이 순간 하얗게 변했다. 젠장. 넥타이 핀! 그의 넥타이 핀에 있는 부적은 음기를 짓누르는 상성의 것이었다. 그러나 어느 부적은 가끔 동일한 성분을 가진 것과 맞물리면 증폭하는 상성을 낸다. 아무래도 어머니가 준 부적이 자신이 먹은 억제제와 겹친 모양이었다.

게다가 아무리 향을 잘 숨기는 션웨이라지만 그가 알파이니 효과는 더욱 증폭됐겠지. 망할, 션웨이를 보자마자 이런 추한 몰골이라니. 그는 자신이 다치는 것보다 재회의 순간이 이토록 쪽팔리는 상황이라는 사실에 더 주목했다. 바닥은 대리석이었고, 윈란의 육신은 잘도 바닥으로 추락했다. 분명 어딘가 멍이 제대로 들거나 운이 나쁘다면 뼈가 한 대 부러질 수도 있겠다고, 아니. 최악의 경우에는 뇌진탕을 일으킬 수도 있겠다 싶던 윈란이 눈을 감았다.

그러나 볼에 닿는 것은 바닥이 아닌 허공이었고, 붕 뜬 자신의 몸을 단단히 붙들고 손길에 윈란은 눈을 떴다. 그는 눈을 떴지만 놀라지는 않았다. 말 그대로 션웨이에게 "안겨 있었다". 션웨이의 굳건한 두 팔과 손이 자신의 허리와 몸을 꽉 붙들고 있었다. 순간 션웨이의 대나무 향이 윈란의 코끝을 간질였다. 그가 향을 제어하지 못할 리가 없을 텐데 분명 일부러 흘린 것이리라. 윈란은 시선을 들어 션웨이를 바라보았다.

"아란, 너..."

션웨이가 억눌린 목소리로 자신을 불렀다. 그 목소리는 짐승의 그것처럼 으르렁대는 것 같기도 했고, 자신을 차마 탓하지 못해 부르르 떨리는 것 같기도 했다. 션웨이와의 관계에서 아란이라는 이름은 처음 듣는 것이었지만, 윈란은 그 호칭을 듣는 순간 그것이 자신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확신했다. 아란. 짐승처럼 낮게 뇌리깐 목소리와 모순되는 지독하게 달콤한 호칭이었다. 그 이름을 듣자 이제 저 뒤에서 호들갑을 떨며 다가오는 웨이터의 목소리 따위는 들리지도 않았다. 윈란의 시선은 여전히 자신을 안고 있는 션웨이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는 금방이라도 얼어죽일 만큼 차가운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었지만 꽉 다물린 입술은 떨리고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두 눈은 흐리멍텅하게 흔들렸다. 풀어질 듯 다듬어진 모순적인 그 표정 안에 든 감정을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매력적이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특유의 그림으로 그린 듯한 아름다운 얼굴은 여전해서 윈란은 제 상황도 잠깐 잊고 탄성을 내질렀다. 곧 그가 입을 열었다. 윈란은 그가 자신에게 어떤 목소리로 무어라 말을 이어갈 지 궁금했지만 션웨이는 자신의 기대와는 정반대의 대답을 내놓았다.

"이 사람에게 가벼운 위염이 있습니다. 실례지만 앉힐 수 있도록 소파를 좀 빼줄 수 있을까요."
- 아, 네!

어느 새 자신들의 곁으로 다가온 웨이터를 향해 조용히 부탁조로 말하는 션웨이는 놀랍도록 이성적이라서 윈란은 조금 아쉽다는 생각을 감출 수가 없었지만 동시에 자신의 향을 감출 수 있도록 더욱 꽉 자신을 끌어안는 션웨이의 모습에 자오윈란은 알 수 있었다.
[션웨이는 여전히 그대로구나.]
단단한 팔도 두툼한 손도, 그리고 자신만을 배려하는 것도 전부 그대로였다. 다행이다. 션웨이가 자신을 잊지 않아서.
결국 윈란은 자기 자신이 누구보다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그대로 소파에 착석할 때까지 션웨이에게 쭉 안겨 있었다. 자신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꽉 안고 있던 션웨이의 힘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옅게나마 발산한 션웨이의 향에 살짝 흥분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음란한 남자였다.



션웨이 역시 아무 생각도, 사고도 하지 못했다. 그는 30분 정도 먼저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피차 인사만 나누고 나가도 상관 없겠지. 따분하게 약속 상대를 기다리고 있던 그는 동생이 골라준 의상이 영 생소해 눈으로 계속 자신의 옷매무새를 살펴보고 있었다. 이상한 거 아닌가. 무심하게 턱을 괸 우아한 분위기의 세련된 미인을 훔쳐보는 다른 이들의 시선 따위는 모두 그에게 관심이 없었다. 션웨이는 식사를 하고 바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교수이니 이상한 옷으로 밉보이면 안 된다는 야존의 어이없는 주장에 휘말려 입기는 입었지만, 윈란의 그것과 별 다를 것이 없었던 것이다.

"일찍 오셨네요...?"

그러나 무방비하게 허공을 보고 있던 그는 윈란의 목소리가 들리자 그대로 완전히 얼어버렸다. 귓가에 들리는 너무 익숙한 목소리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 말도 안 된다. 그러나 자신이 어떻게 저 목소리를 모를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말도 안 되는 확률 중의 하나이지 않은가.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는 가까스로 마음을 가다듬었다. 아닐 수도 있다. 아닐 수 있어. 아닐 거야. 12년 동안 만나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혼자 제멋대로 날뛰는 건 자신답지 않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일말의 기대감을 미처 숨기지 못한 채 그는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고개를 돌리는 그 짧은 시간이 자신에게는 하루보다 더 길게 느껴졌다. 마침내 고개를 들어 상대의 얼굴이 또렷히 시선에 투영되는 순간 그는 미칠 것 같았다.

"션웨이..."

시선에 비친 그 얼굴이, 너무나 그리웠던 그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자신의 이름을 불러오자 션웨이는 그야말로 누가 자신의 온 마음에 기름을 붓고 방화를 한 것 같이 타오르는 고통을 느꼈다. 그는 얼어버린 채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입으로 말하기에는 눈에 담을 시간조차 아까워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윈란이 그대로 걸음을 옮기려다 몸을 휘청거리자 션웨이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좋지 않은 느낌을 직감하자마자 그의 특징인 등나무꽃 향이 확 끼쳤다. 향을 못 감춘다고? 생각하기 무섭게 윈란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션웨이의 브레이크가 그대로 나가 버렸다. 그는 더 이상 사고하는 방법을 포기한 채 몸을 날렸다. 넘어지는 윈란의 몸이 허공에 붕 뜨기 무섭게 션웨이가 순식간에 윈란을 받아들어 그대로 안았다. 

"아란, 너..."

그리고 자신에게 안겨 있는 윈란의 얼굴이 자신을 쳐다보는 순간, 마침내 션웨이는 정신이 혼미해져 금기를 깨고 말았다. 네 개의 눈이 맞물리던 순간 마음 안의 불길이 온 전신으로 옮겨 붙기 시작했다. 아란, 그대로 미쳐 날뛰는 심장을 결국 진정하지 못한 그는 부르르 떨리는 정신 한 가운데서 그를 부르짖었다. 그와 함께했던 3년, 그를 떠났던 12년 동안 감춰왔던 사랑의 이름 하나가 결국 묵직하게 윈란을 후려쳤다. 짐승이 울부짖는 듯이 낮게 깔린 목소리에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이 스며들어 있어 션웨이는 차마 감정을 제어할 수 없었다. 수천 가지의 감정들이 마음 안을 휘몰아치는 그 생경하고도 익숙한 감정에 자신이 그 오랜 세월 동안 깎고 다듬었던 이성들은 이미 전부 허물어졌다. 생각지도 못한 재회에 션웨이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고통을 느꼈지만, 그 고통보다 기쁨이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의 다물린 아랫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이 사람에게 가벼운 위염이 있습니다. 실례지만 앉힐 수 있도록 소파를 좀 빼줄 수 있을까요."

정신이 하나도 없었던 션웨이는 괜찮냐며 달려오는 웨이터를 보고 나서야 자신 안에 있던 마지막 이성을 가까스로 붙잡았다. 윈란의 등꽃 향을 생판 모르는 타인들이 맡는 것을 절대 원하지 않았던 그는 말하기 직전 조절하고 있던 본인의 향을 아예 풀어 버렸다. 윈란은 말이 없었지만 그 대신 자신의 안에 얌전히 안겨 있었다. 션웨이가 그를 조심스럽게 고쳐 안았다. 그는 웨이터가 소파를 빼고 자신이 윈란을 그 위에 무사히 앉힐 때까지 꽉 안은 팔을 절대 풀지 않았다.

윈란을 무사히 앉히고 나서야 그는 자신이 말도 안 되는 짓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꺼내서는 안 되는 이름까지 꺼냈다는뒤늦게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한 그가 고개를 숙인 채로 부들부들 떨었다. 귀끝부터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션웨이는 가까스로 향을 다시 억제하면서 윈란의 앞에서는 무용지물이 되는 자신의 이성에게 다시 한 번 분노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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좆된 션웨이... 자기도 모르게 아란해버린 션웨이... 이제 본격 사랑시작...


룡백 웨이란 진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