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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17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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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2 자오윈란 편

* 양인 음인 차별 없는 세계관

좋건 싫건 토요일 점심으로 예정된 맞선 날짜는 바로 전날까지 다가왔다. 일을 일찍 끝마친 자오윈란은 팔자에도 없는 맞선 때문에 고급 백화점을 어머니인 장 여사와 함께 다니고 있었다. 꾸미는 것을 누구보다 좋아했던 윈란이지만 어머니와 함께하는 쇼핑이 결코 유쾌하지 않은 것은 분명했다. 다행히 미리 말을 맞춰놓은 덕에 짜고 치는 고스톱이 될 수 있었지만 그래도 달갑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정략결혼은 모두가 인정할 정도로 문란한 자오윈란에게 가장 어울리지 않는 단어일 것이다.


윈란의 어머니는 윈란에게 계속해서 클래식하고 고급스런 정장 세트를 권하며 점원들에게 눈짓했다. 확실히 선 자리에 캐주얼을 입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만 정작 본인은 점원들이 사모님의 눈짓 하나에 계속해서 정장들을 꺼내고 또 꺼내는 모습을 보기가 굉장히 불편했다. 

 

몇 번이나 됐다고 고개를 저었지만 어머니는 기어이 계속해서 강행했다. 윈란은 점점 이 상황이 질리는 느낌이 들었다. 가뜩이나 클래식한 정장은 윈란의 취향이 아닌 데다가 여태 무려 다섯 번을 펑크냈고, 바로 전 맞선에서는 일부러 스스로 직장에서 일을 만들어서 펑크를 냈던 터라 어머니는 생각보다 더 자신에게 집요하게 굴고 있었다. 이번에는 무려 계획을 미리 통보한 뒤 아예 스케줄조차 잡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냥 제가 알아서 입을게요."
- 아들, 없어 보이게 입으면 품격이 떨어진다는 거 모르니.
"엄마. 전 이런 정장도 예쁘지만, 좀 더 가벼운 게 좋아서 그래요. 상대분이 부담스러우실 수도 있잖아요?
 

결국 윈란은 더는 이 분위기를 참을 수 없어 생글생글 미소를 지으며 어머니를 구슬렀다. 곧 그는 아예 정석보다는 조금 풀어진 느낌의 캐주얼 정장들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 달라고 직원에게 부탁했다. 어머니의 따가운 시선에도 평소에도 옷을 사 입는 것을 즐기던 그는 어렵지 않게 자신에게 어울리는 옷들을 골랐다. 최대한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 재빨리 옷을 고르면서도 그는 하나의 디테일조차 놓치지 않았다.
 

"이걸로 할게요."
 

드레스룸에 들어가서 자신이 고른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윈란은 본인이 고른 흰 바탕에 네이비 스트라이프 셔츠에 깔끔한 정장 바지를 입고 있었다. 넥타이 없이 위에 걸친 연그레이색 자켓은 깔끔하면서도 섹시해 보였다. 시계는 일부러 안 찼다. 대신 비어 보이지 않게 발렌시아 팔찌를 차고 반질반질한 흑갈색 로퍼를 신은 윈란은 어딜 봐도 나무랄 데 없이 아름다운 미남이었다.
 

"질이 떨어질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는 봐줄 만 하구나. 우리 아들. 잠깐만. 옷 좀 다듬어 주게 가만히 있으렴."
 

정석적인 정장은 아니었지만 파티나 행사에서 단연 돋보일 의상이었다. 옷의 조화보다는 과하지 않게 명품으로 휘감은 모습이 괜찮게 보였던지 장 여사는 그 말과 함께 미리 준비한 듯한 넥타이를 매 주더니 넥타이 핀을 그 위에 꽂았다. 다 됐구나. 어머니의 손아귀를 벗어난 윈란은 자연스럽게 핀을 보았다. 

 

심플한 디자인 안에는 부적이 슬며시 끼워져 있었다. 제법 강력한 주술이 느껴지는 것을 보아하니 분명 용한 무당이라도 찾아갔던 모양이다. 그녀가 아직도 아들을 인정하지 못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윈란은 부적을 보더니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침묵하다 어머니의 얼굴을 보았다. 장 여사는 이제야 좀 마음이 놓인다는 듯 환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그녀가 물었다.
 

- 마음에 드니. 아들?
"네. 예쁘네요. 엄마."
 

윈란이 어머니를 따라 밝게 웃어 보였다. 기억 속의 가족은 발현 이후 자신의 편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 이제는 익숙한 일이다. 다만 결코 그렇다고 어머니에게 끌려다니지는 않았다. 망할 아버지가 자신을 병기 비슷하게 키운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오윈란의 자아 정체감은 태초부터 매우 강했다. 

 

자오싱스는 아들을 전용 노예로 만들기 위해 특조처를 창설했지만 아들은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특조처의 절반을 자신의 사람들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자오싱스의 아들은 비뚤어진 데다가 문란하고 제멋대로이긴 했다만 그래도 강인하게 성장했다. 모두 그의 학창시절에 션웨이가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근데 제 취향이 아닌 것 같아요. 너무 안 보이잖아요. 브로치가 더 좋으니까 그걸로 할래요."
 

그래도 주신 성의가 있으니까 평소에 열심히 하고 다닐 테니 걱정 마시고요.
장 여사의 표정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가 윈란이 꺼내든 절충안에 어느 정도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윈란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자신을 상처입히는 어머니에게 능청스럽게 대응하는 일은 이제 몸에 배어 있었다. 별 타격도 없었지만 이럴 때마다 윈란은 살짝 씁쓸해졌다. 아, 짜증난다. 억지로 성질을 숨기는데 핸드폰에서 진동 소리가 들렸다. 윈란이 휴대폰을 꺼내 확인했다. 맞선 상대였다.
 

[사정이 있어서 내일은 제 친구가 대신 올 겁니다. 죄송하다는 말씀 드리고 싶네요.]
[천만에요. 미리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메시지를 확인하고 답장을 보내던 윈란의 기분이 급격히 좋아졌다. 이런 방법이 있었네. 다른 사람을 대신 보내면 되겠구나. 샤오궈나 린징이면 되려나? 샤오궈는 연애에는 쑥맥이니까 아무래도 린징이 좋으려나. 곰곰히 생각하던 윈란의 계획은 장 여사의 말을 듣고 바로 좌절되었다.
 

- 이번에는 도망갈 생각은 하지도 마. 엄마가 직접 차로 태워줄 테니까.

"그럴 필요 없어요. 제 차도 있는데 뭘..."
- 저번에도 그렇게 해 놓고 꾀병 부리면서 안 나갔잖니. 이번에는 엄마 차 직접 타고 가. 들어가는 것까지 다 보고 갈 거야. 알았니?
"...네."
 

씨발, 망했구나. 좌절된 계획에 그는 뭉크의 절규와 같은 표정을 짓더니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의 고집은 윈란 본인이 제일 잘 알았다.  
 

"저 사슴 모양 브로치 자켓에 달면 되게 예쁘겠다. 저걸로 고를게요."
 

이렇게 된 이상 사고 싶은 거나 사야겠다.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려 순록이 섬세하게 세공된 브로치에 눈길을 옮기던 윈란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기 위해 노력했다. 내일 대충 버티기만 한다면 당분간은 끝이라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서둘러 돌아가고 싶었다. 그는 이 자리가 너무 불편했다.
 

그 뒤에도 줄곧 끌려다니던 윈란은 문득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션웨이랑 결혼하면 이런 상황이 좀 덜 불편했을까. 그러고 보니 과거에, 아직까지 션웨이가 자신의 곁에 있던 시절 농담조로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당시 윈란은 션웨이의 두툼한 손을 두고 자주 놀렸다. 그날도 수영 수업이 끝나고 윈란이 일방적으로 손장난을 치고 있었다.
 

"얼굴은 부정할 수 없는 미인인데 손 마디는 아주 산적이야. 이러다 소도 한 방에 때려잡겠어."
"놀리지 마."
 

션웨이는 귓가를 조금 붉히기는 했지만 그래도 마주 웃어 주었다. 그 얼굴에 윈란의 장난이 발동해 버려서, 또 다시 선을 넘는 말을 하고 말았다.
 

"이런 손이라면 싸대기를 맞아도 짜릿하겠지?"
"...뭐?"
"그냥 네가 의부증 환자라는 가정하에 내가 뺨을 맞으면 생각보다 괜찮겠다 싶어서 말야."
 

아, 내가 음인이니까 의처증인가? 그래도 의부증으로 할래.
그 말을 들은 션웨이의 얼굴은 아주 천천히 굳어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분노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부들거리며 떨리는 손을 보고, 윈란은 사실 그때 션웨이가 진짜 자신을 한 대 때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션웨이는 윈란을 때리지 않았다. 손을 올리기는 커녕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주먹을 꽉 쥔 그는 대신 조용히 한 마디를 뇌까렸을 뿐이었다.
 

"그런 짓은 안 해."
"왜?"
"싫으니까."

"그럼 난 너랑 살아도 되겠다. 때리지도 않고 밥도 차려주고 잠도 재워주니까."
 

다시 현실로 돌아와, 윈란은 생각했다. 그리고 그 마지막 말을 했을 때, 션웨이는 한동안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도 그는 핏기가 질린 얼굴 표정을 풀지 않았다. 윈란이 당황해 션웨이. 하고 불렀을 때, 션웨이는 윈란을 보았다. 두 눈이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착각하지 마."
"왜?"
"난 널 의무적으로 따르는 하인이나 노예가 아니라는 걸 알아둬. 무조건적으로 나한테 기대하지 말라는 소리야."
"...으응."
 

션웨이는 아주 화가 나 보였고, 목소리는 더 없이 차가웠다. 그러면서도 본인의 감정을 다독이는 게 보일 정도였다. 나에게 기대를 하지 말라는 소리야. 그러나 션웨이가 자신에게 그렇게 말했을 때 자오윈란은 갑자기 치솟는 분노를 느꼈다. 맞다. 분명히 맞는 말인데도 화가 치솟았다. 

 

자오윈란은 망상 하나가 떠올랐다. 션웨이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다정하게 말하고, 화를 내면서도 그 존재를 아끼고, 지금처럼 이렇게 말한다면 어떨까? 션웨이가 자신에게처럼 이렇게 화를 낼 수 있는 사람이 생기면 어떨까? 윈란은 결국 치솟는 화를 참지 못하고 지르고 말았다.
 

"그래도 난 너한테 기대하고 싶어."
"......"
"그것도 안 돼?"
 

그리고 그때, 션웨이는 저를 매우 놀란 듯이 바라보다가 귀부터 전신이 벌겋게 물들었다. 윈란은 션웨이가 또 화를 낼 거라고 예상했지만 그는 화를 내지 않았다. 침묵을 지키던 그는 마침내 아주 희미하게 웃었던 것 같다. 그리고, 곧 그렇게 말했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알 듯 모를 듯한 말이었다.
 

"마음대로 해."
- 아들, 무슨 말이니! 빨리 케어 받으러 가야 한다고 몇 번 말했어? 그 피부로 천박하게...
"아니에요. 가야죠. 엄마."
 

마음대로 해. 그래서 션웨이는 마음대로 자신을 떠난 걸까. 어머니의 강압적인 태도를 따르며 룽청 제일의 피부과로 향하던 자오윈란은 생각했다.
만약 정말로 그때 션웨이가 자신의 뺨을 때렸더라면 션웨이가 마음대로 행동하지 못했을 것 같다는 아주 변태적이고 이기적인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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룡백 웨이란 진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