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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16 0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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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다를 처음 만난 건 전대 S급 화염의 소환사가 부상으로 사망했을 때였다. 노부의 스승이기도 했던 그 전대 소환사는 나이가 그리 많지도 않았는데 어렴풋이 자신의 마지막을 예감하고 있었던 건지 어째서였는지 피닉스를 소환해서 노부와 자주 어울리게 해 주었고 틈틈이 정성을 들여서 붉은 보석을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노부가 몬스터 토벌에 나갔다 오니 다른 곳으로 토벌전을 나갔던 스승이 크게 부상을 입었다는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경황없이 소환사 센터에 있는 병원으로 달려가자 전격계 몬스터에게 당했는지 온몸에 심각한 화상을 입고 크고작은 상처로 완전히 뒤덮여서 간신히 알아볼 수 있는 상태의 스승이 누워 있었다. 

스승은 심각한 화상으로 이미 손 전체가 새까맣게 죽어 있는 손을 힘겹게 들어서 오열하는 노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넌 잘 할 수 있을 거다. 그 말이 끝이었다. 스승의 유언은 짧았다. 스승은 가족이 없었고 괴팍한 성격 탓에 친하게 지내는 소환사들도 얼마 없었다. 거의 텅 비어 있는 장례식장에서 노부 혼자 세상이 무너진 듯한 기분으로 멍하게 앉아 있을 때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가 여러 명의 소환사를 데리고 장례식장에 찾아왔었다. 남자는 데리고 온 소환사들을 데리고 고인에게 인사를 했고 미성년자 둘을 먼저 돌려 보낸 후 며칠 동안 장례식장을 지켜 주었다. 그 남자가 마치다 케이타였다. 그때는 몰랐지만 마치다가 그때 데리고 온 사람들이 마치다가 지금 '우리 쪽'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겠지. 고토가 그 두 명의 미성년자들 중 하나였을 테고. 마치다는 장례가 진행되는 동안 끼니 때가 되면 그저 멍한 노부를 끌고 와서 젓가락을 쥐어 주었고 밥을 영 못 넘기자 죽을 사 와서 숟가락을 들려 주었다. 

스승이 사망하고 난 후 스승의 변호사가 유언장을 공개했다. 스승이 노부에게 남긴 것은 작은 상자 하나였다. 그 상자에는 스승이 공들여 만들었던 붉은 보석과 노트 하나가 들어 있었다. 노트에는 피닉스의 성격과 특징, 소환하는 법, 달래는 법, 함께 전투를 하는 법 등이 꼼꼼하게 적혀 있었다. 이미 생전에 수도 없이 들었던 이야기였는데 그래도 걱정됐는지 편지처럼 남겨 두었던 모양이었다. 피닉스는 소환사의 죽음에 한동안 괴로워했지만 스승이 아끼던 제자였고, 자주 어울렸던 노부에게 금세 마음을 열어 주었다. 그렇게 S급 화염의 소환사가 되고 첫 S급 소환사들의 회의에 나갔을 때 마치다가 그 자리에 있었다. 

마치다는 장례식에 와 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노부를 유심히 보다가 애도를 표하고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마치다는 처음부터 노부에게 호감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노부를 원래 알던 것처럼. 분명히 스승의 장례식에서 처음 만났는데. 그 이후로도 마치다는 노부에게 친절했고 S급은 처음이라 종종 헤매는 노부를 잘 이끌어 주었다. 스승의 장례식에 혼자 있던 노부를 보고 가족이 없다는 걸 눈치챘는지 회의가 끝나고 종종 밥을 먹으러 가자고 권해줬었고 노부가 토벌전에 갔다오면 늘 괜찮은지 확인전화를 줬었다. 몬스터 출몰이 없어서 며칠씩 회의가 없으면 잘 지내고 있는지 종종 전화를 하거나 만나자고 권해주기도 했었다.

그리고... 부모님과도 같았던 스승이 사망한 후 허전함과 외로움에 시달리던 노부가 끈질기게 대시하는 S급 전격의 소환사에게 마음을 주고 두 사람이 사귀게 된 이후. 그래, 그러고보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마치다가 노부에게 냉랭해졌던 게.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았다. 노부의 애인이 된 S급 전격의 소환사가 소환사 협회를 구성하고 초대 협회장이 되면서 S급 소환사들의 회의는 없어졌고 마치다와 다시 만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확실히 그 직전부터 마치다가 노부에게 냉랭해졌던 것 같은데. 마지막 회의를 했을 때였다. 여느 때처럼 마치다가 노부에게 다가와서 잘 지냈는지 그동안 별일 없었는지 묻고 있을 때, 노부의 애인이 다가왔다. 

[스즈키. 오늘 저녁 같이 먹을 거지?]

노부와 마치다가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다가온 전격의 소환사가 노부의 팔짱을 끼고 웃으며 그렇게 이야기하고 간 이후, 마치다가 의아한 눈으로 노부를 바라봐서 노부는 어쩐지 불편한 마음으로 어색하게 대답했었다. 

[아... 제 애인이에요. 우리 사귀기로 했거든요.]

맞아. 그때 얼굴이 확 굳지 않았었나?

어째서?





마치다의 말이 거짓말이 아니었던 듯 노부의 치료를 전담하는 의사 겸 치유의 소환사라는 츠지무라 슌타로 역시 각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으면 붉은 보석도 만들 수 없고, 그때까지는 노부의 치유력도 일반인 수준일 것이기 때문에 순전히 외부의 힘만으로 회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노부는 침상에 누운 채 회복에만 전념했다. 어차피 일어나서 돌아다닐 상태도 아니었고. 마치다는 노부가 이곳에 온 이틀째에 고토라는 사람이 주려던 루비를 다시 빼앗아 돌려주고 죽을 먹여 준 이후 다시 노부를 찾아오지 않았다. 아니, 낮에는 오지 않았다. 낮에는 A급 치유의 소환사라는 미야무라 소라나 S급 치유의 소환사 츠지무라 슌타로가 옆에 머무르며 복부와 팔, 다리에 치유스킬을 써 주거나 노부를 돌봐 주었다. 때때로 고토 타다오미가 찾아와서 옆에서 대화를 걸거나 루비를 몰래 노부의 손에 쥐어 주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어떻게 왔는지 첫날의 그 남자가 고토를 잡으러 왔다. 알고 보니 이 남자도 A급 화염의 소환사였고 야오토메 류세이라는 이름이라고 했다.

노부는 고토의 이름은 처음 들었지만 류세이의 이름은 들어 봤었다. 만약 노부에게 무슨 일이 생겨서 죽거나 하면 S급 화염의 소환사가 될 확률이 가장 높은 게 야오토메 류세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현재 A급 화염의 소환사 중 제일 강하다고. 그러나 류세이는 '사고뭉치 꼬맹이' 고토를 잡으러 올 때마다 고토가 몰래 노부의 손 안에 집어넣어 놨던 루비를 뺏아서 고토에게 돌려줬지만 딱히 노부의 회복을 방해하거나 할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고토를 잡으러 왔을 때 노부의 상태가 안 좋아 보이면 즉각 츠지무라를 불러줬고, 츠지무라나 미야무라가 바쁘거나 토벌전에 차출돼서 자리를 비우면 고토와 함께 양 손을 다 쓸 수 없는 노부의 식사도 거들어 주었고. 

그리고 밤에 자다가 여전히 정신은 노부와 연결돼 있는 피닉스가 발광하거나 상처 때문에 힘들어서 깨면 마치다가 옆에 있었다. 은은하게 낮은 조명을 켜고 노부의 가슴을 토닥여주거나 노부의 손을 잡아주거나 괴로워하는 동안 맺힌 식은땀을 닦아주거나 아니면 노부의 침상에 기대서 죽은 것처럼 잠들어 있었다. 마치다의 눈가는 매일매일 더 시커매지고 있었다. 대규모 토벌전이라도 벌어지고 있나 하기에는 고토와 류세이는 한가해 보였는데. 화염의 몬스터들이 날뛰고 있나. 그렇다면 두 사람은 한가한데 빙결의 소환사인 마치다는 날이 갈수록 더 초췌해지는 게 이해가 가긴 했다. 

그렇게 열흘이 지났을 때였다. 





평소보다 일찍 잠에서 깬 건 손바닥 안에서 뜨거운 열감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눈을 뜨고 반사적으로 오른손을 내려다보자 평소에는 손 크기의 세 배쯤 돼 보이도록 붕대를 칭칭 감아놨던 손에 붕대가 두 겹 정도로만 얇게 감겨 있고 손이 꽤 큰 편인 노부의  손바닥 전체를 꽉 채울 정도로 커다란 붉은 보석이 쥐어져 있었다. 놀란 노부가 서둘러 몸을 일으키려 하자, 서늘한 손이 노부의 이마를 꾹 눌러서 다시 눕혔다. 

"누워 있어. 환자 주제에."

그제야 고개를 돌리자 죽은 사람이 걸어다니는 거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창백해진 얼굴에 눈가가 시커먼 마치다가 미간을 찌푸리고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거... 뭡니까?"
"붉은 보석이잖아. 몰라? 너도 썼었을 거 아냐."

노부가 쓰던 붉은 보석은 노부를 자식처럼 여기던 스승님이 만들어주신 것인 만큼 꽤 컸다. 노부의 손바닥 반을 넘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이렇게까지 크고 이렇게까지 선명한 붉은색이거나 이렇게까지 맑지 않았다. 크기만으로도 놀라운데 순도가 너무 높아 보여서 이런 보석이 실존한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는데. 

"이거 누가..."
"S급 소환사가 만들었지. S급밖에 못 만드는 거 알잖아."
"설마... 마치다 상이 만들어주신 겁니까?"

그러나 곧 죽을 사람처럼 창백한 얼굴에 피로를 가득 드러내고 있는 마치다는 못 들은 건지, 못 들은 척을 하려는 건지 대답없이 비틀거리며 더 다가와서 노부의 환자복 단추를 툭툭 풀었다. 노부가 더 묻지 못하고 얌전히 옷을 벗기는 데 협조하고 있자, 속옷만 빼고 옷을 다 벗긴 마치다는 작게 하품을 하고 눈을 비볐다. 정말로 피곤해 보였기 때문에 만류하려고 했지만 마치다는 소독약과 붕대, 뜨거운 김이 풀풀 올라오는 대야와 물수건이 담긴 트레이를 끌고 와서 노부의 온몸을 닦아주고 상처에 소독약을 다시 바른 다음 붕대를 감아준 후에 환자복까지 다시 입혀 주었다. 

그렇게 할 일을 다 마친 마치다는 똑바로 누워 있던 노부를 옆으로 틀어서 눕히고 손을 잘 빼서 눌리지 않게 해 준 다음에 침대 옆 의자에 털썩 내려앉았다. 노부가 여전히 어리둥절하게 바라보고 있는 붉은 보석 위로 노부의 손가락을 접어서 보석을 꽉 쥐게 해 주기도 했다. 보석이 너무 커서 한 손에 쥐기도 버거울 정도였다. 

"쥐고 있어. 각인이 빨리 복구되게 해 줄 거야."
"이런 건 누가 만든 건지도 모르고 그냥 받을 순 없습니다. 인사라도 해야. 여기 다른 S급들도 있습니까?"

기본 속성인 화염, 빙결, 전격은 당연히 노부도 다 알고 있었다. 노부와 전 약혼자, 마치다니까. 하지만 기본 속성 외에도 자잘한 부속 속성들이 있었다. S급 질풍의 소환사는 죽었다고 했고. 츠지무라 슌타로가 그 부속 속성 중 하나인 S급 치유의 소환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츠지무라는 낮에 내내 노부를 돌보고 있었고, 보석을 만드는 낌새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었다. 

"츠지무라 박사 말고 다른 S급들도 있습니까?"
"어, 나 말고 둘 더 있어."
"둘이나 더요? 그럼 마치다 상과 츠지무라 박사까지 네 명이나 여기 있단 말입니까?"

노부는 사실 여기가 어딘지도 몰랐다. 마치다가 구해올 때 이미 정신을 잃었고 눈을 떴을 때부터 계속 이 병실같은 방에만 있었으니까. 그런 어딘지도 모를 곳에 S급 소환사들이 네 명이나 있었다니. 

"쿄스케는 원래 다른 S급들과 같이 안 다니니까 몰랐을 거고, 아몬하고는 한 번도 안 마주쳤다는 게 신기하긴 하네."

마치다는 또 하품을 하고 눈을 문지르며 무성의하게 대답했다. 

"그 사람들은 속성이 뭐길래."
"아몬은 방어, 쿄스케는 매혹."
"...매혹?"
"정신계 공격 쪽이야. 인큐버스와 계약을 했지."
"... 네?"
"몰라도 돼. 속성 특성상 다른 소환사들과 같이 토벌전에 나가는 일은 좀처럼 없으니까."
"... 붉은 보석을 만들어준 건 누굽니까?"

마치다는 노부를 빤히 바라봤다. 정말로 곧 죽을 것 같은 얼굴인데 눈만은 초롱초롱해서 신기했다. 마치다는 그 초롱초롱한 눈으로 노부를 빤히 바라보다가 피곤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제 얼굴을 가리켰다. 얼굴을 가리키는 긴 손가락이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내 얼굴에 내가 그거 만들다 죽을 뻔했다고 안 적혀 있어?"
"..."
"감사인사는 됐고, 빨리 낫기나 해."
"... 이것도 목숨값 때문입니까?"
"..."
"내가 누구를 구했던 겁니까?"
"구한 사람이 너무 많아서 일일이 기억도 못해?"
"네."

마치다는 본인을 바라보도록 돌려 눕혀 둔 노부를 (물론 욕창 방지 조치라는 건 알고 있었다. 다리가 부러진 데다 복부를 크게 다쳐서 계속 누워 있으니까 욕창 생기지 말라고 다른 간병인들 - 츠지무라, 미야무라, 야오토메, 고토-도 종종 노부를 옆으로 틀어서 눕혀 놨으니까) 빤히 바라보고 있어서 노부는 다시 물었다. 

"마치다 상도 그렇지 않습니까?"

몬스터들이 출몰하게 된 이후로 전국에 감지 센서를 설치해서 외진 곳에 나타나면 즉시 토벌대가 출동하지만 극소수의 경우에 도심에 출몰하는 경우도 있고 그럴 때는 민간인 피해자가 생긴다. 그런 사람을 구하는 것이 소환사의 의무는 아니지만 대부분의 소환사들은 민간인부터 구하고 토벌을 했다. 노부도 그랬고 마치다도 당연히 그랬을 텐데. 

"그렇지."
"일일이 기억하기는 어렵죠."
"하지만 다 기억하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사람들 대부분 누군가에게는 결코 잃을 수 없는 사람일 거잖아."
"... 그렇죠."
"네가 내가 잃을 수 없는 사람을 구해 준 것뿐이야."
"..."
"고마워."

노부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가 문득 마치다를 처음 만났던 때, 아니 장례식 말고 S급 소환사들의 회의에서 다시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마치다는 처음부터 눈을 반짝거리며 다가와서 친근하게 굴었고 노부가 전격의 소환사와 사귄다고 말하기 전까지는 내내 상냥하게 대해 주었다. 설마...

"그래서 그때 제게 잘해 줬던 겁니까?"
"그때?"
"예전에 소환사 협회 생기기 전에."
"날 만났던 걸 기억은 하고 있었네?"
"당연하죠."

마치다는 노부를 빤히 바라보다가 휴대폰을 꺼내서 화면을 톡톡 두드리기 시작했다. 병원에서 휴대폰이라니. 뭐, 노부는 외상 치료 중이라 휴대폰에 영향을 받을 만한 의료기기는 안 쓰지만. 그리고 나서 화면을 잠시 보고 있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 열흘 동안 잠도 못 잤다."

당연했다. 잠을 안 잤다고 해도 열흘 만에 저런 걸 만들어냈다는 게 놀라울 정도인데 눈 붙일 틈이 있었을 리가 없지. 

"난 가서 좀 자야겠어. 소라가 올 거야."
"...네."
"푹 쉬고 빨리 나아라."

열흘 동안 이걸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도 기적 같은데 그 사이에 잠을 제대로 잘 수 있었을 리가 없지. 안다. 아는데. 정말로 궁금했다. 그때 생전 처음 본 노부를 왜 그렇게 친절하게 대해 줬었는지. 마치다에게 소중한 누군가의 은인이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제가 마치다상에게 소중한 누군가를 구해줬기 때문에 그때 그렇게 잘해 줬던 겁니까?"

마치다는 휘청거리며 방을 나서던 걸음을 뚝 멈추고 노부를 돌아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그때나 지금이나 정말 눈치가 더럽게 없네."

어?





#소환사노부마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