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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14 04:24
그런데 그게 경염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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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염은 서책을 읽고 있다가 유빈의 궁녀가 왔다는 말에 서책을 덮었어. 유빈의 궁녀가 곤녕궁에는 왜? 안으로 들이라는 말을 하자마자 안면이 있는 궁인 하나가 안으로 들었음. 경염은 나붓하게 절을 올리는 궁인을 보고 들릴듯 말듯한 작은 소리로 한숨을 쉬었음. 유빈이 무슨 생각으로 제 측근인 궁녀를 보낸것일까. 유빈의 의중을 알수가 없어서 마음이 불편했음. 그렇지만 그런 내색은 전혀 하지 않고 웃는 낯으로 궁인을 대했어.
"승건궁의 궁인이 이곳에는 무슨 일이냐."
"유빈께서 마마께 드리는 서신과 선물이 있어 왔사옵니다. 받아주십시오."
"이 안에 든게 무엇이냐?"
"유빈께서 열어보면 무엇인지 아실거라 했습니다."
경염은 유빈의 궁녀가 건네준 서신과 자개함을 받아들고는 생각에 잠겼음. 유빈이 저를 적대시하는 것을 모르지 않는데 갑자기 선물은 왜 보낸 것인지 알수가 없었지. 무슨 꿍꿍인가 하여 안에 든것이 무엇이냐 물었더니 열어보면 알거라고 하기에 일단 궁녀를 내보내고 서신을 살폈음. 서신을 펼쳐보니 궁인의 실수로 상한 다식을 대접하여 무척 죄송스럽고 다식을 만든 궁인에게는 중벌을 내렸으니 노여움을 풀어주십사라는 내용이 적혀있었음. 경염은 황당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음. 직접 와서 사죄를 해도 모자랄 판에 서신을 보낸다? 서신을 다탁 옆에 놔두고 자개함을 열어보았는데 안에는 약재와 처방전이 들어 있었음. 그리고는 또 다른 서신에는 전담 태의가 아닌 다른 태의에게 이 약재를 보여주면 회임이 안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게 될거라고 적혀 있었음. 서신의 내용을 확인한 경염은 상궁에게 다른 태의를 불러오라고 일렀음.
"유태의. 이 약재는 어디에 쓰는 것이냐."
"아뢰옵니다. 회임을 막는데 쓰는 약재입니다. 기루의 기녀들이 원치 않는 회임을 막기 위해서 쓰는 것으로 장기 복용하면 불임이 될 가능성이 적지 않아 기녀가 아닌 여인들은 쓰지 않습니다."
"..회임을 막는다고? 유태의. 이 처방전도 한번 살펴보게."
경염은 태의에게 자개함에 든 약재를 내보이고 그것이 회임을 막는 약재임을 알고 어지러움을 느낌. 유빈이 불임을 유발할수도 있다는 약재를 왜 제게 보낸거지? 생각하다가 회임을 못하는 이유를 알수가 있을거라던 말이 떠올라서 처방전을 내밀었음. 태의는 처방전을 살펴보고 보양을 위한 탕약에 들어가는 약재에 회임을 막는 약재를 추가한것이라고 말함. 경염은 그 말을 듣고 정신이 아득해져서 한동안 아무런 말도 못하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태의를 물렸음.
"당신이 내게 어찌 이럴수 있단 말입니까. 류연성..!!"
경염은 황제가 하사한 물품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곤 바닥에 주저앉아서 소리없이 눈물만 흘렸음. 제가 아이를 간절히 원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탕약에 회임을 막는 약재를 넣어서 먹이다니 배신감에 미칠것만 같았어. 어떻게 이럴수가 있지? 역시 패전국 출신의 음인에게선 자식을 보기 싫었던걸까. 그저 침상을 데우는 용도로 쓰려고 후궁으로 삼은것이었나. 내가 당신에게 그런 하찮은 존재였습니까. 비참함에 경염은 바닥에 엎드려서 한참을 숨죽여 울었음.
❁ ❁ ❁
경염은 황제가 방문할거라는 태감의 전언에 양에서 가져온 함을 꺼내어서 어린 소녀들이나 입을만한 의복을 꺼냈음. 십수년전에 북연의 6황자였던 류연성을 처음 만났을때 입은 옷이었어. 볼모로 오면서도 챙겨올만큼 소중히 여긴것이었지. 황제가 첫눈에 반했다던 경녕이 경녕인척 꾸몄던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았을때 황제를 위해 진실을 묻어두려고 했었음. 경녕이 본인을 오랑캐라 부르며 멸시했다는 사실을 알면 충격이 클것 같아서였으나 이젠 숨기고 싶지 않아졌음. 경염은 궁인의 도움없이 입고 있던 옷을 벗고 함에 있던 옷으로 갈아입고 같이 있던 장신구까지 착용했음. 그리고 황제가 납셨다는 말이 들리고 문이 열리자마자 절을 올렸음.
"귀비. 그 옷차림은 뭐지? 죽은 사람의 옷은 왜 입고 있는게요?"
"경녕의 것이 아니라 제 옷입니다. 열일곱살때 경녕이 제게 선물해준 옷이지요. 폐하, 이 옷을 기억하십니까?"
연성은 경염을 본 순간 아연실색했음. 죽은 황후가 살아돌아온줄 알고 하마터면 달려가서 품에 안을뻔했어. 자주 빛깔 비단에 모란문 금박이 수놓인 옷은 14년전에 경녕을 처음 만났을때 그녀가 입고 있었던 옷이었음.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고 왜 죽은 이의 옷을 입고 있냐고 물었더니 놀라운 대답이 돌아왔음. 연성은 경염을 일으켜 세우고 이리저리 살폈어. 그리고 한참후에야 그때 자신이 만난 공주가 경녕이 아니라 경염이란것을 깨달음.
"그대가 짐을 속였구려. 내가 얼마나 우스웠으면 오누이가 짜고 그런 말도 안되는 짓을 한단 말이오!"
"폐하께서 그토록 연모했던 제 누이가 오랑캐와 혼인하는것이 죽기보다 싫다고 하더이다. 그래서 제가 대신 나갔습니다. 어떠십니까. 폐하께서 지난 십수년간 마음에 품었던 이가 경녕이 아니라 신첩이라는 사실을 아신 기분이...!"
"그 입 닥치시오. 닥치란 말이야!!"
경염은 하얗게 질린 연성의 얼굴을 보곤 눈을 감았다 떴음. 그때 누이의 부탁을 거절했다면 지금 귀비의 자리에 있는것이 누이일까. 그 아이도 죽지 않고 자신도 이리 고통스러워하지 않았겠지라는 생각이 들어 철없던 어린 시절의 행동을 깊이 후회했음. 경염은 일부러 비아냥대며 연성을 조롱했지만 금방이라도 쓰러질것 같은 얼굴을 한 그를 보고 말을 더 잇지 못했음. 격분하여 소리를 지르는 황제를 보고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어.
"폐하. 군주를 기망한 것은 대죄이오니 저를 폐하여 양을 돌려보내주십시오. 어차피 저는 황손을 낳지 못하여 비빈으로서의 의무와 도리를 다하지 못한 죄인이 아닙니까."
"그 입 다무시오! 그대의 거취는 짐이 정할 일이거늘 어찌 입을 함부로 여는게요! 지금껏 비빈이 아이를 낳지 못하였다고 폐비한 전례는 없었소."
"전례가 없으면 만들면 되는것이 아닙니까. 신첩이 아이를 낳지 못하는게 신첩이 부덕한 탓이 아니라 폐하께서 손을 쓰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압니다. 제게 일말의 죄책감이 남아 있어서 그러시는 것입니까?"
연성은 경염의 말을 듣고 눈을 가늘게 떴음. 경염이 어찌 알았을까. 유빈의 짓임이 분명했어. 당질녀라 그저 오냐오냐하였더니 분수를 모르고 설치는 꼴이라니 하는 짓을 보니 더이상 눈을 감아줄수가 없었음. 경염은 황제가 부정을 하지 않자 날이 선 검으로 가슴을 마구 찌르는것 같아 고통스럽기만 했음.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받는 꼴이 우습지 아니한가.
"신첩이 패전국 출신이기 때문에 그리 하셨습니까? 그래서 제게서 후사를 보지 않으시려고 탕약에 손을 쓰신겁니까?"
"그대가 패전국 출신인것은 아무 상관없소! 짐이 그동안 그대를 박대한적이 있소? 출신을 따졌으면 귀비로 책봉하지도 않았을거요."
"그럼 왜 그러셨습니까. 도대체 왜요!"
"그대의 누이처럼 그리 허망하게 죽을까봐! 그대도 아이를 낳다가 죽을까봐 그리했소. 그대마저 잃을수는 없었기에 그리한거요!!!"
경염은 누이의 이야기가 나오자 헛웃음을 터뜨림. 고작 그런 이유였다고? 누이가 아이를 낳다가 죽었기 때문에 저도 그리 될까봐 회임을 못하게 손을 쓴것이라고? 경염은 허탈하게 웃다가 머리 장식을 빼내서 입고 있는 치맛자락을 찢어냈음. 당황한 연성이 말리려들자 뒷걸음치며 고개를 도리질침. 그날 당신을 만난것을 후회합니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줄곧 폐하를 연모했기 때문에 치욕을 감내하며 살았지만 이젠 더 이상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언제까지 죽은 이를 끌어안고 사실겁니까. 그거 아십니까. 경녕은 당신을 끔찍하게 여기고 말을 섞는것조차 싫어했습니다. 선대의 황제도 뱃속의 아이도 모두 다 싫어했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 아이는 스스로 죽음을 택한겁니다! 경염이 그리 소리치자 연성이 다가와 경염의 뺨을 세게 후려침.
북연태자정왕
류연성소경염
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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