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hygall.com/563889907
view 4340
2023.09.14 03:58


IMG_20220429_162419.jpg
wlUJHH.jpg


노부가 마치다를 다시 만난 밤은 어둡고 축축했다. 아니, 노부가 느끼기에는 일단은 그랬다. 그때 노부는 배에 칼을 맞은 데다가 오른손은 심각한 부상을 입어서 감각도 없어진 상태였고 여기저기에 번개 공격을 당해서 온몸이 만신창이였다. 게다가 건물에서 떨어지면서 팔과 다리가 부러져서 걸을 수도 없었다. 거기까지 기어간 것이 기적에 가까었다. 당시 노부는 사경을 헤매고 있었기 때문에 주변이 밝았어도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축축한 건 사실이었다. 노부가 쓰러져 있던 곳은 뒷골목이었으니까. 그때 빠르게 옆을 스쳐 달려가는 발자국소리가 희미하게 가까워지다가 다시 멀어졌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가까워졌다. 노부를 한 번 지나갔던 사람은 다시 돌아와 노부의 옆에 쪼그리고 앉아 상처를 확인하더니 쯧 혀를 찼었다. 노부가 기억하는 건 거기까지였다. 

노부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노부는 환자복을 입고 병원 침대 같은 침대 위에 누워 있었고, 침대 옆 책상 앞에는 흰 가운을 입은 남자가 앉아서 뭔가 서류를 작성하고 있었지만 이곳이 병원이 아니라는 건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양 손에 붕대가 두툼하게 감겨 있었고 부러졌던 팔과 다리에는 깁스도 제대로 돼 있는 데다가 소독약 냄새가 진동을 하는 걸 보면 온몸 가득했던 상처 여기저기 성실히 치료를 해 둔 모양이니 노부를 해칠 생각은 아닌 모양인데.

누구지? 누가 데려와 치료한 거지?

그때 머리 위쪽에서 부드러운 느낌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살인미수 용의자. 인적사항. 스즈키 노부유키. 31세. S급 화염의 소환사. 소환수 화염의 피닉스 외 화염 속성 소환수 다수. 화염공격 S급, 화염마법 S급, 화염방어 S급. 사건개요. 소환사 협회 협회장 살인 미수. 협회장 현재 위독. 현재 도주 중 긴급수배. 위험인물이므로 발견 즉시 신고."

노부는 고개를 돌리려고 했지만, 머리에 뇌파를 검사할 때 쓰는 것 같은 띠를 둘러서 침대에 머리를 고정해 놨기 때문에 머리를 돌릴 수도 없었다. 그때 커다란 손이 쥐고 있는 휴대폰 화면이 노부의 눈 앞에 나타났다. 휴대폰에는 남자가 방금 읽어준 대로 소환사 협회 명의로 된 지명수배 공고가 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노부의 머리 위쪽에서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가 계속 살벌한 내용을 읊어대고 있었다. 

"협회장이 약혼자잖아. 약혼자 살해 시도라니, 너무하네. 아무리 협회가 싫다고 해도 그렇지, 협회장이 약혼자인데 죽이려고 하면 돼?"

그 순간, 노부의 뺨을 쓰다듬는 손가락의 체온이 느껴져서 눈을 돌리자, 목소리만큼 상냥해 보이는 인상의 남자가 노부를 내려다보며 눈을 찡긋거렸다. 

"그렇게 멍청해, 스즈키 노부유키? 네가 파혼을 하는 대신 약혼자를 살해하려고 할 정도로 약혼자가 싫었다면 그건 네 사정이고, 파혼 대신 살해를 선택할 정도로 비뚤어지고 파괴적인 인성이라면 그것도 네 사정이라고 해도 말이지. 협회장 살해 시도라니, 소환사 협회가 정부보다 더 강한 권력을 쥐고 있는 이 나라에서? 모든 국가기관이 이제 널 쫓을 텐데."

노부는 그 맑은 눈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난 그 자를 살해하려고 한 적 없어. 그 자가 나를 살해하려 한 것이지. 내 손을 지지고 내 배에 칼을 쑤셔넣은 게 날 사랑한다며 나와 약혼까지 했었던 그 자니까."
"흐응."

굉장히 차가운 느낌의 미인인데 코를 찡긋거리는 작은 표정 하나만으로도 묘하게 귀여운 느낌이 더해졌다. 노부가 기억하고 있는 그대로 여전히 아름다운 남자, 마치다 케이타는 그 표정으로 노부를 내려다보다가 붕대가 감겨 있는 노부의 복부를 슬쩍 찔렀다. 심술궂은 척 일부러 상처를 찌르는 척했지만 붕대가 감긴 곳도 피해서 정말 복부 언저리만 찔러보는 척.

"정치질당한 거라고? 왜? 어쩌다 원한을 산 거야?"

노부가 아무런 말없이 오른손을 들어 보자, 복부보다 더 심각하게 상처를 입었을 오른손이 두터운 붕대로 칭칭 감겨 있는 게 보였다. 노부가 S급 화염의 소환술사인 것은 피닉스를 소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화염의 소환수들의 왕인 피닉스는 단 한 명만이 소환할 수 있고, 지금 피닉스를 소환할 수 있는 건 노부뿐이다. 아니, 노부뿐이었다. 속성을 막론하고 소환수들의 왕을 소환하려면 그 신수와 계약을 맺고 소환사의 손바닥에 소환수의 왕과 맺은 각인을 새겨야 했다. 노부의 오른손 손바닥에는 피닉스와 맺은 화염의 각인이 있.었.다. 





노부의 약혼자는 노부에게 재미있는 걸 해 주겠다며 노부의 양 손목과 발목을 S급 소환사인 노부도 쉽게 끊을 수 없는 번개 밧줄로 묶었다. 노부의 약혼자는 전격의 푸른늑대를 소환할 수 있는 S급 전격의 소환사였고 노부가 평소에 장난처럼 작은 불을 소환해서 밝혀주거나 따뜻하게 해 주는 것처럼 노부의 약혼자도 종종 작은 번개를 소환해서 놀아주곤 했었다. 번개를 줄의 형태로 소환해서 묶는 것도 흔한 일이었다. 흔하지 않은 건 그 다음이었다. 양 손을 꽁꽁 묶어둔 약혼자는 노부의 오른손에 착용한 장갑을 벗기려 했다. 물론 노부는 놀라서 손을 꽉 쥐었다.

[뭐하는 거야?]
[재미있는 일을 하려고 그래. 잠깐만 벗어 봐.]

소환사와 소환수가 계약을 한 후 각인을 맺을 때 소환사들은 보통 자주 쓰는 손에 각인을 새긴다. 계약의 증거인 각인은 소환사들의 힘의 원천이지만 각인이 훼손되는 순간 그 힘의 근원을 잃게 되기 때문에 소환사들은 F급부터 S급까지 전부 전용 장갑을 착용해서 각인을 보호했고 타인에게 각인을 보여주는 일도 없었다. 당연히 노부도 약혼자에게조차 각인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당신도 알잖아. 각인을 보여주는 게 금기라는 거.]
[난 당신이랑 결혼할 사람인데도?]

약혼자는 노부와 신체 접촉이 많지 않은 사람이었다. 둘 다 성인이었고 잠자리를 안 한 것도 아닌데 약혼자는 묘하게 키스를 피했고 평소에 몸이 닿는 걸 꺼리는 편이었다. 본인 말로는 어렸을 때부터 남들과 접촉하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성격이 무뚝뚝해서 애정표현이 낯설어서라고 했었는데. 그런 사람이 노부에게 먼저 키스를 하며 웃었었다. 

[난 당신이랑 결혼할 사람이잖아....]

그래서 노부는 주먹 쥐고 있던 오른손을 펴 주었고, 노부의 각인이 그 약혼자의 앞에 드러났다. 그리고...

약혼자는 노부의 장갑을 벗긴 뒤 전격의 푸른늑대를 소환하더니 노부가 화염의 피닉스와 맺은 각인이 찍혀 있는 오른손 손바닥을 푸른늑대에게 공격하게 했다. 다른 소환수와 소환사의 각인을 공격하면 공격하고 있는 소환수도 끔찍한 고통을 느끼기 때문에 푸른늑대는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지만 소환사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는 종속관계라서 계속 비명을 지르고 온몸을 비틀어댈 정도로 괴로워하면서도 노부의 손바닥에 있는 각인을 번개로 태우고 있었다. 각인이 훼손되면서 노부와 연결돼 있는 피닉스의 비명도 계속 머릿속을 시끄럽게 했다. 당연히 노부도 고통으로 실신할 지경이었다. 손목을 고정하고 있는 번개로 엮어놓은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았고, 소환수를 불러낼 때는 양 손을 다 써야 했기 때문에 노부는 피닉스를 부를 수도 없었다. 그래서 노부는 그저 이를 악물고 비명처럼 물었다.

[왜 이래! 뭐하는 짓이야!]
[각 속성별 S급 소환사는 한 명밖에 존재할 수 없다니 어쩔 수 없잖아. 당신이 죽거나 당신과 피닉스의 각인이 끊어지지 않으면 화염의 S급 소환사가 나올 수 없다니까 널 죽여야지. 그런데 당신도 알지. 스즈키?]

그 S급 전격의 소환사는, 노부가 정말로 사랑했고, 당연히 노부를 사랑할 거라 믿었던 약혼자는 평소처럼 상냥하게 웃으며 노부를 바라봤다. 

[S급 소환사는 각인이 끊어지지 않으면 소환수의 보호를 받기 때문에 죽이는 게 너무 어렵잖아. 그러니까 각인을 먼저 끊을 수밖에 없지. 나도 당신을 이렇게 아프게 하는 게 유감스러워. 그래도 함께 보낸 시간이 있는데 편하게 죽여주고 싶지. 하지만 각인이 끊어지는 과정이 원래 아프다는데 어쩌겠어. 나도 어쩔 수 없어.]
[어째서! 당신은 화염의 소환사도 아니잖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화염의 소환사인데 당신 때문에 A급을 못 벗어나고 있거든. 그 사람이 아파.]
[...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
[응. 내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 불치병이야. 그 사람이 건강을 회복하는 길은 S급 화염의 소환사가 되어서 피닉스의 힘으로 건강해지는 길밖에 없대. 그러니까 어쩔 수 없어.]
[... 처음부터 이걸 노리고 나한테 접근한 거야?]

노부가 사랑했던 사람은 자신의 소환수인 푸른늑대가 피닉스의 각인을 지져대느라 고통으로 끊임없이 비명을 질러대는 것도 신경쓰이지 않는지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진 차가운 얼굴로 노부를 빤히 내려다보며 속삭였다. 

"응."
"... 날 사랑한 적도 없어?"
"응. 난 말이야... 당신이 내게 사랑해사랑해 지껄일 때마다 목을 조르고 싶었어. 이렇게."

S급 전격의 소환사는 정말로 노부의 목을 졸랐다. 그러나 아직 노부의 각인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기에 피닉스의 보호가 발동되고 있었고, 그 보호 결계에 놀란 전격의 소환사의 집중력이 흐트러진 순간, 푸른늑대는 재빨리 사라져 버렸다. 소환수의 집중력이 흐트러진 사이에 소환을 끊고 도망간 것이다. 원래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다른 소환수와 소환사의 각인을 끊으라 하는 명령부터가 원래라면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으니. 분노한 전격의 소환사가 다시 제 오른손의 각인에 손가락을 대고 소환 주문을 외우려는 순간 노부는 번개로 인해 생긴 감전과 화상으로 이젠 감각이 사라질 지경인 오른손을 들어 그대로 전격의 소환사의 손바닥을 눌렀다. 상대는 전격의 소환사인 만큼 자기 소환수가 만들어낸 번개에 다칠 일이 없으므로 방심하고 있었다. 노부는 그걸 노렸다. 그의 손을 붙잡은 오른손을 잡아당겨서 그 자의 장갑을 이빨로 벗겨내고 두 사람의 손바닥이 맞닿는 순간 노부는 끝없이 피를 흘리고 있는 오른손 손바닥에 화염을 만들어냈다. 노부가 스스로 만든 화염이 노부를 해치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라 그 불길은 전격의 소환사만 태웠고, 전격의 소환사는 노부가 오른손을 꽉 쥐고 놔 주지 않자 옆구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노부의 배를 깊게 찔러왔다. 

노부는 두 사람이 정사를 나눌 거라 생각했었기 때문에 상의도 벗고 바지만 입고 있는 상태였다. 당연히 검이나 스태프는 없었다. 그래서 전격의 소환사를 놓치지 않으려 애쓰며 화염을 만들어내기만 할 수밖에 없었고 다양한 무기를 지니고 있던 전격의 소환사는 끝없이 갖은 공격을 퍼부으며 노부를 기어이 떼내고 말았다. 그 직후 노부는 27층에서 창문을 깨고 그대로 뛰어내렸다. 아직 각인이 완전히 끊기지 않았기 때문에 보호결계가 약해졌어도 어느 정도는 작동할 것이다. 그리고 어차피 저 방에 있으면 죽는다.

그런 생각으로 뛰어내렸으나 다리와 팔이 부러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절룩거리며 달아나다가 쓰러진 곳이 이 남자를 만난 그 골목이었다. 





"원한 같은 거 산 적 없는데."

남자는 붕대를 칭칭 감아둔 오른손을 자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너 오른손 상태 어떤지 알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각인은 거의 망가졌다. 그렇지 않았다면 27층에서 떨어졌다고 해도 그렇게 다칠 리 없었을 텐데. 각인이 망가지면서 피닉스의 보호 결계도 약해져 있었다. 

"네 약혼자 짓이야?"
"내 약혼자인 줄 알았던 자의 짓이지."
"이유는?"

이 남자가 누군지는 당연히 노부도 알고 있었다. 남자는 빙결계 소환수들의 왕인 은빛드래곤을 소환할 수 있는 S급 빙결계 소환사 마치다 케이타였다. 하지만 그가 누군지 알고 있는 것과 그를 믿을 수 있는지 여부는 별개의 문제였다. 노부가 가장 믿었고 가장 사랑했던 사람에게 배신당해서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채로 지옥 문 앞까지 갔다온 게 하루도 아니고 고작 몇 시간 전이었다. 아무리 노부가 마치다와 한때 친구라고도 부를 수 있었던 관계,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의 관계였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노부는 이제 아무도 믿을 수 없었다. 

노부가 입을 다물자 마치다는 여전히 머리가 고정된 채 누워 있는 노부의 머리 옆에 손을 대고 고개를 숙여서 노부의 눈을 빤히 바라보면서 물었다. 

"S급 질풍의 소환사가 죽은 거 알아?"
"... 뭐?"
"질풍 속성의 소환수들이 전부 발작을 일으키며 소환하지 않아도 갑자기 튀어나오는 난리가 벌어져서 질풍의 소환사들이 상황을 알아보니, 질풍의 소환수들의 왕인 맥이 소환사를 잃고 울부짖고 있다고 하더군."
"... 정말이야?"
"그래. 맥은 악몽을 먹어치우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꿈길을 쫓을 수 있어. S급 질풍의 소환사가 죽기 전 접촉했던 이들의 꿈을 밟아가다 그 소환사의 시신을 발견했는데, 손 상태가 너와 비슷했어."

노부가 무의식중에 손을 꽉 쥐자, 손에서 끔찍한 아픔이 느껴졌다. 마치다 케이타는 노부가 이를 악무는 걸 아무말없이 보고 있다가 고개를 좀 더 숙여서 눈을 빤히 바라봤다. 

"네 약혼자는 S급 소환사들을 다 죽일 셈인가?"
"..."
"나도 S급이라는 걸 알 텐데? 나도 죽을 준비를 해야 해?"

노부를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저으려고 했다. 머리가 고정돼 있어서 젖지 못하고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이상한데. 내가 들은 이야기와 달라."

마치다는 작게 한숨을 쉬고 노부를 바라봤다. 

"어떻게 다른데?"
"그 자가 날 죽이려 한 건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불치병을 앓는 화염의 소환사인데 S급 화염의 소환사로 만들어서 회복력을 높이기 위해서라고 했어. 나한테는."
"..."
"그 자의 애인이 화염 겸 질풍의 소환사일 리도 없고, 질풍의 소환사와 화염의 소환사를 다 애인으로 두고 있을 리도 없잖아."

그러자 잠깐 고민하던 마치다는 여전히 노부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 화염의 소환사가 누구야?"

노부는 모른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대답은 다른 곳에서 더 빨리 들려왔다. 

"불치병을 앓고 있을 A급 화염의 소환사면 타카하시 료헤이밖에 없는데. 그 사람일 리 없어."

마치다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서 방 한쪽을 바라봤다. 누워 있는 노부에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쪽에도 사람이 있는 모양이었다. 

"왜 그 사람일 리 없어?"
"타카하시 료헤이는 유부남이야."

마치다는 미간을 찌푸리고 다시 물었다. 

"그 배우자가 S급 전격의 소환사야?"
"아니."

그리고 잠시 정적이 이어진 뒤 그 정체모를 남자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타카하시 료헤이의 배우자는 S급..."
"S급?"
"질풍의 소환사야."
"이번에 죽은...?"
"그래."
"장례는 타카하시 료헤이가 치르고 있나?"

다시 정적이 조금 이어진 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타카하시 료헤이는 며칠 전부터 실종 상태야."

마치다 케이타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S급 질풍의 소환사를 죽인 것도 그쪽 관련이었나. S급 소환사를 죽여서 A급 소환사를 S급으로 만들려고 한다고? 그게 될 리가 없잖아."
"왜 안 되지?"

노부는 물론 전 약혼자의 말을 듣고 놀라긴 놀랐지만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했었기 때문에 마치다를 바라보며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마치다는 여전히 잔뜩 구겨진 얼굴로 노부를 내려다보며 한숨과 함께 말했다. 

"너도 알 텐데? S급으로 올라갈 때 전대 S급 소환사한테 소환수를 인도받지 않았어? 네 소환수가 피닉스지?"

노부가 고개를 끄덕이자 마치다는 같이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이어갔다.

"무작정 S급 소환사를 죽인다고 소환수가 다른 A급 소환사와 바로 계약을 해 주는 게 아니야. A급 이하 소환수들도 그렇지만 S급 소환수는 소환사와의 정서적인 유대가 아주 중요해. 충분히 시간을 두고 소환수들이 이해할 수 있고 납득할 수 있게 관계를 맺어가야 해. 이렇게 폭력적으로는 절대로 안 되지. 우리쪽에도 A급 질풍의 소환사가 있기 때문에 맥과 계속 관계 맺기를 시도하고 있지만, 맥은 전대 소환사를 죽인 게 우리가 아닌 걸 아는데도 마음을 열지 못하고 있어. 그렇게 쉽게 될 리가 없잖아."
"... 넌 전대 S급 빙결의 소환사를 몰랐는데도 네 전대 계약자가 죽자 네가 계승했잖아. 그렇게 말했었잖아. 그때."

마치다 케이타는 노부를 빤히 바라보면서 한숨만 내쉬었고 다른 데서, 아까 노부의 전 약혼자가 사랑하는 화염의 소환사가 누군지 알려준 목소리가 대신 답을 들려 주었다. 

"그건 이 자식이 독종이라 그런 거고."
"... 독종?"

마치다는 여전히 말이 없었고 노부에게 낯선 목소리가 다시 말을 이었다. 

"빙결의 은빛 드래곤이 계약을 맺어줄 때까지 한 달이나 소환을 계속 시도했거든."
"... 한 달?"
"기절하듯 잠깐잠깐 눈만 붙이고 프로틴 음료나 과일주스만 마시고 버티면서 한 달이나 소환을 해 대니까 신수도 결국 넘어오더라."

노부가 아연한 얼굴로 마치다를 바라보자, 마치다는 뭐 어쩌라는 거냐는 듯한 냉랭한 얼굴로 노부를 바라봤다. 

전 약혼자가 사랑한다는 사람은 불치병 환자라고 했다. 저렇게 독종 같은 짓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걸 그 사람은 몰랐을까? 아니면 마치다 케이타와 함께하는 질풍의 소환사가 맥을 달래려 애쓰고 있는 것처럼 그쪽도 노부를 죽여놓고 어떻게든 피닉스를 달래서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S급... 아니, 그 사람은 다른 사람과 결혼한 유부남이라며...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노부가 미간을 찌푸리자 마치다 케이타도 미간을 찌푸린 채 내려다보고 있다가 노부의 미간을 쿡 찔렀다. 

"너 많이 다쳐서 한동안 여기 있어야 돼. 여기 의사 선생님이 잘 살펴주실 거야. 츠지무라 슌타로 박사."

흰 가운을 입고 있던 남자가 일어나서 다가오며 고개를 까딱 숙여서 노부도 눈을 깜박거리며 인사했다. 머리는 고정돼 있으니까.

"안녕하세요?"
"네. 반갑습니다. 오늘 밤은 일단 푹 쉬시고요. 건물에서 떨어질 때 머리를 부딪치셨길래 머리도 고정해 뒀습니다. 그래도 어지럽거나 토할 것 같으면 말씀하세요."
"알겠습니다."
"각인이 훼손돼 있어서 치유 스킬을 쓰면 각인이 스킬을 다 빨아들는데 아시다시피 각인을 복구할 때는 치유 스킬이 듣지 않습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죠."
"회복의 소환사십니까?"
"네. 각인이 훼손돼 있을 때는 치유 스킬도 잘 듣지 않는 걸 아십니까?"
"...압니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빨리 회복되는 게 좋으니 복부 상처와 팔, 다리 골절에만 매일 몇 차례 치유 스킬을 써 보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때였다. 가만히 지켜보던 마치다 케이타가 다시 노부의 뺨을 쿡 찔렀다. 

"너, 나 누군지 알지?"

당연히 알았다. 노부가 눈만 깜박거리자, 마치다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다시 노부의 뺨을 콕 찔렀다. 

"그런데 어디서 맞먹으려고 들어? 내가 너보다 2살이나 연상인 거 몰라?"
"..."
"말 까지 마라, 꼬맹아."

마치다 케이타는 그 말만 남기고 휙 나가 버렸다.

몇 년 전, 둘이 나누었던 대화는 아직도 노부의 기억 속에 남아 있었고 따뜻하고 다정했던 마치다의 모습도 노부의 가슴 속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몇 년 만에 다시 만난 마치다 케이타는 그때와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난 좋은 사람도 아니고.]

마치다는 그때 그렇게 말했었지만 정말 좋은 사람이었는데... 외롭고 슬펐던 노부에게 가장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는데.

왜 이렇게 차가워진 거야?




#소환사노부마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