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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09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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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게 경염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북연의 황제 류연성에게는 전리품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었음. 각지에서 노획한 물품들을 감미로운 화주와 함께 감상하고 때때로 측근들을 불러 품평회를 열기도 하는 고상한 취미였지. 그중에서 가장 기꺼워하는 것은 각국에서 볼모로 보내온 현예들중에 용모가 아름다운 이를 자신의 측비로 취하는 것이었어. 황제가 아직 태자이던 시절 측비로 책봉되어 줄곧 그의 성총을 독차지하고 있는 귀비 소씨도 그런 취미의 연장선으로 맞아들인 사람이었음. 다만 이전에 들인 측비들과 한가지 다른 것이 있다면 그가 십여년 전 세상을 떠난 선대의 황후와 동부의 연을 타고났다는 점이었음.



유목민족이 세운 국가인 북연에서는 혼인시 자매를 함께 부인으로 맞이하거나 신부의 질녀를 잉첩으로 들이는 것은 무척이나 흔한 일이었거든. 그런데 그런 북연에서도 부자가 오누이를 각각 자신들의 처첩으로 들이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음. 사사로이 따지자면 소씨는 황제의 처남이었고 태자는 죽은 황후의 양자였으니 부군이 될 이와는 숙질 관계라고 할 수가 있었으니까. 제 아무리 정치적인 목적에 의해 맺어진 혼맥이 거미줄보다 복잡하게 엮인 것이 황실이라고 하여도 죽은 양모의 손윗 형제를 제 측비로 들이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북연이 북방의 보잘것없는 유목민이던 시절에는 부친이 죽으면 생모를 제외한 처첩들을 후계자가 자신의 처첩을 맞이하는 수계혼과 같은 야만적인 풍속이 있었지만 그것은 기백년도 전에 있었던 옛풍속에 지나지 않았음.



그 사실이 처음 알려졌을때 변방의 오랑캐에게서나 있을법한 풍습이라 하여 대신들의 반발이 매우 거셌지만 선대의 황제가 태자의 측비가 될 소씨가 우성 음인이라는 사실을 밝히며 대신들의 반발을 잠재웠음. 우성 양인인 류연성이 열락기마다 넘치는 양기를 해소하지 못하여 극심한 고통을 겪는다는 것을 대신들도 익히 알고 있었기에 더 이상 반대를 하지 않았어. 우여곡절 끝에 태자의 측비로 소씨가 책봉되고 남다른 신분 덕분인지 대혼에 준하는 예로 태자와 혼례를 치뤘음. 



태자의 측비 소씨는 수년전 류연성이 피의 중원축록을 벌이는 과정에서 일어난 전란에서 패망한 양이 북연으로 보낸 질자에 지나지 않았지만 타고난 형질이 음인인 까닭에 북연 태자의 측비가 될수 있었어. 태자의 측비가 된 이상 한때 양의 칠황자였고 정왕이라는 봉호를 받은 군왕으로 전장을 호령했던 소경염은 이제 죽고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음. 사실 말이 측비이지 패망한 속국의 기인 출신이라 태자의 욕구를 해소하는 침노나 다름없는 신세라 사람들이 떠들어댔던 것이 겨우 서너해전의 일이었지. 태자의 수 많은 후궁중 하나에 불과했던 소씨가 황제의 등극 이후 삼궁육원에서 가장 품계가 높은 후궁이 된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음은 분명했음.

 
❁ ❁ ❁


곤녕궁의 귀비 소경염은 황제가 자신의 침궁에 방문한다는 전갈을 받고 궁인들의 도움을 받아 치장을 하기 시작했음. 구름처럼 풍성하고 탐스러운 운환에 보요 장식을 하고 금박을 입힌 적색의 장유와 청색의 치마를 착의한 채로 자기의 덮개를 열어 검지에 연지를 묻히며 면경을 바라보았지. 면경에 비친 얼굴은 가히 천하절색이라 할수가 있었으나 어찌된 연유인지 낯빛에는 음울한 기색이 가득했음. 그런 기색을 억지로 지우려는듯 붉은색의 입술 연지를 짙게 발랐음. 장유 안에는 사내의 음욕을 부채질한다는 사향이 든 향낭을 묶어 매듭을 짓고 나니 황제를 맞이할 채비가 겨우 끝이 났어.


북풍한설을 몰고 다닌다는 북연의 황제는 차가운 바람 대신에 단향 냄새를 잔뜩 묻힌채 곤녕궁의 문간을 넘어섰음. 황제의 행차에 궁인들이 급히 물러가고 호화롭기 짝이 없는 침궁안에는 황제와 경염 두 사람만 남아있었어. 황제가 예고없이 들이닥친것도 아닌데 경염은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인채 궁혜의 코끝만 바라보았음. 짧은 시간동안 무거운 정적이 흘렀고 그 정적을 깨뜨린것은 다름아닌 황제였음.


"그대의 누이의 영전에 술을 올리고 오느라 시간이 이리 늦은줄도 몰랐구려. 그곳에 그대가 올까하여 기다렸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더군. 무슨 일이 있었던게요?"
"폐하, 송구하옵니다. 신첩 오늘이 돌아가신 황후마마의 기일인것을 잠시 잊고 있었습니다. 황후께 효를 다하지 못하였으니 폐하께서 벌을 내려주십시오."


경염은 차가운 바닥에 납작 엎드려 죄를 고하고 벌을 내려주십사 청했어. 황제는 아무런 감흥이 없는 눈으로 귀비의 복색을 살피다가 그의 말에 거짓됨이 없음을 알고 말없이 손을 내밀었음. 경염은 그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고 천천히 몸을 일으켜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바로 하고 또 다시 침묵을 지켰어. 기껏 시간과 정성을 들여 치장을 하면 무엇을 하나. 마치 절간에 있는 석불처럼 딱딱하게 굳어 자리만 지키고 있는 것을. 경염을 치장하는데 공을 들였던 궁인들이 본다면 답답하여 가슴을 치고도 남을만한 행동이었음. 황제가 망부석과 같은 모양새로 멀거니 먼산만 보고 서 있는 경염을 지나쳐 나한상에 앉아 몸을 기대며 말했음.


"오늘은 그대와 같이 술이나 한잔할까 하는데 그대의 생각은 어떠하오?"
"예. 마침 내무부에서 올린 화주가 있으니 궁인들에게 일러 주안상을 들이라 하겠사옵니다."


경염은 평소에는 술을 가까이하지 않던 황제가 그리 말하자 조금 놀라긴 했어도 같이 대작을 할 생각에 흔쾌히 수락을 했음. 궁인들에게 일러서 주안상을 들이라고 하고 일렀음. 경염은 궁인들이 주안상을 마련하는 동안에 상궁과 함께 황제의 의복 수발을 들었어. 그가 허리를 숙여 요대를 끌러내고 황제의 청포를 조심스럽게 벗겨내어 상궁에게 맡기자 경염이 하는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황제가 입을 열었음. 평소와 별반 다를것 없는 말투로 지나가듯 툭 던지는 말이었지만 그대에게서 좋은 향기가 난다 그리 말하기에 경염은 괜시리 민망하여 얼굴을 붉혔어. 경염의 붉어진 얼굴을 본 황제는 시립하고 있던 상궁을 침전 밖으로 물리고 주안상 또한 들일것 없다고 명했음. 침전의 문이 닫히게 무섭게 경염의 손목을 붙잡더니 침상으로 이끌었음. 마지막으로 황제의 시침을 든것이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아 궁인이 건네준 향낭을 몸에 지니긴 하였어도 효과를 기대를 하진 않았는데 효과가 있긴 한 모양이었지.


"입술에 연지를 발랐군."
"보기 싫으십니까? 역시 나이 든 사내에겐 어울리지가 않지요?"
"아니 보기가 좋소. 그대에게 잘 어울려."


경염은 오랜만에 침상에 마주 앉은것이 부끄러워서 옷자락만 만지작거리다가 황제가 입술을 만지며 하는 소리에 고개를 푹 숙였어. 나이 많은 음인이 바르기엔 지나치게 붉기는 했지. 괜한 짓을 했구나 싶어서 보기 싫으시냐 그리 말했다가 들리는 말에 놀라서 헛숨을 들이킴. 워낙 숫기가 없어서 다른 비빈들처럼 아양을 떨거나 교태를 부리는 법도 모르고 내세울것은 타국 황족 출신의 비라는 신분 하나뿐이었는데다 혼인한지 사년이 넘었는데 아직 태기가 없어서 크게 낙심하였음. 요즘 들어선 처소에도 거의 아니오시기에 하루종일 궁어에 틀어박혀 소일거리만 하고 있었어. 오랜만에 제 궁에 든단 말에 이전보다 더 화려하게 치장하면서도 혹시 우스운 꼴이 될까 걱정이 컸는데 어여쁘게 봐주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음.



황제는 어서 침수에 들자며 경염의 옷고름을 풀었음. 옷이 한겹 한겹 바닥에 떨어질때마다 얼굴에 열이 오름. 함께 밤을 보내는게 처음도 아닌데 동침을 할때마다 왜 이리 긴장이 되는지 모를 일임. 어느새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알몸이 된 경염이 침상에 눕혀지고 황제가 그의 몸 위에 올라탔을때 경염은 그의 얼굴을 마주볼 자신이 없어 눈을 질끈 감음. 황제의 입술이 닿은곳마다 마치 불에 데인듯 뜨거웠고 얼마후에 몸을 완전히 겹쳤을때 저도 모르게 교성을 질렀음. 너무 당황한 나머지 입을 틀어막으려고 했다가 황제가 제 팔을 붙잡는 통에 그러지 못했음. 음인은 항상 정숙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자란터라 침상에서도 목석처럼 굴었으나 합방을 할때마다 느끼는 쾌락과 희열은 참기 힘든것이었음. 경염을 밀려드는 쾌감에 숨을 헐떡이다가 금침을 움켜쥐고 버텼음. 뇌가 녹아버릴것한 쾌감에 차라리 이 행위가 빨리 끝났으면 하고 바람. 잠시후에 얼마동안 진퇴가 계속되다가 복부에 사정을 한것을 보고 당황스러움을 느낌. 경염은 피곤하다며 침의를 갖춰 입고 몸을 돌려누운 황제를 말없이 지켜보다가 영견으로 몸에 묻은것을 닦아내고 침의를 걸쳤음.

"경녕...."


경염은 이불을 덮어주려고 하다가 잠든 황제가 웅얼거리는 소리에 크게 놀람. 죽은 누이의 이름을 부르는 황제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이리 애틋하게 이름을 부를만큼 아직도 그 아이를 마음속에 품고 있는걸까. 경녕은 제 누이이기전에 황제의 양모이고 선대 황제의 계후였음. 함부로 입에 담아선 안되는 이름이었어. 아직도 진하게 나는 단향 냄새를 맡으며 경염은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참을수 없는 괴로움에 침전을 나감. 흐트러진 차림으로 달려간곳은 서편에 있는 불당이었음. 황제에게 아뢴 말은 거짓말이었음. 소경염은 자신의 누이가 죽고 난후로 한번도 그녀의 기일을 챙기지 않은적이 없었음. 매년 기일때 침전의 불당앞에서 하루종일 무릎을 꿇고 앉아 누이와 누이와 함께 죽은 황손의 극락왕생을 빌고 또 빌었어. 이역만리 타국에서 늙은 황제의 아이를 낳다가 죽은 가여운 누이. 비록 배다른 누이긴 하였어도 친동기처럼 아끼고 사랑했었음. 사랑하는 누이의 간곡한 부탁을 들어줄수 밖에 없어 사내로서의 자존심도 버리고 우스꽝스러운 복식을 한 채 오랑캐라고 멸시받는 북연의 황자와 연을 맺었고 우여곡절 끝에 그의 측비가 되었지만 그로인해 모든게 어긋나버렸음. 누이는 이제 세상에 없고 제가 연모하는 이는 누이를 연모하니 이를 어찌해야 할까. 경염은 누이의 위패를 만지다가 긴 한숨을 내쉼.





북연태자정왕
류연성소경염
북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