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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03 22:07
“종주.”
강징은 언뜻 정신이 돌아온 듯 수하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기다리며 눈길을 주었던 아이들이 꺄르륵거리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아직 세상도 모르고 괴로움도 두려움도 모르는 아이들을 보면서 무슨 생각에 잠겨 있었던지는 강징 본인도 잘 알 수가 없었다.
*
그날 밤 강징은 꿈을 꾸었다.
어느덧 자신은 자로 대고 그은 듯 일정한 거리를 두고 줄지어 앉은 사람들 사이에 끼어 있었다.
먼지 한 가닥 보이지 않게 반질반질한 마루바닥. 그리고 저마다 똑같은 서안 뒤에 똑같은 하얀 옷을 입고 앉은 사람들.
크흠, 하고 주의를 환기시키는 소리를 듣고서야 근엄하게 수염을 쓰다듬는 남계인에게 눈길이 갔다.
아, 그래. 수업시간이었지. 강징은 저도 모르게 등허리를 꼿꼿하게 펴며 긴장을 탔다.
창으로 쏟아지는 햇살이 화사했으나 공부방 안은 수십명의 젊은이들이 앉았음에도 불구, 마치 절간처럼 조용하고 답답했다. 그래도 강징은 체면을 지키려고 애를 써 견뎠다.
단조롭게 이어지는 목소리는 내용에 귀를 기울여도 안 기울여도 좀이 쑤시게 만들었다.
강징의 앞쪽에 앉은 소년들의 뒷모습에도 같은 느낌이 드러나 있었다.
문득, 그 중 하나가 선명하게 눈에 띄었다.
뒷모습만 보아도 알 수 있는 훤칠하고 올곧은 모습.
그리고 그가 마치 강징의 시선을 느낀 듯 돌아보자 강징은 얼굴이 화틋 달아올랐다.
택무군 남희신.
...남희신?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것은 곧장 흐릿하게 사라져버렸다.
남공자도 함께 수업을 듣는구나.
다만 그렇게 생각하며 남몰래 두근거렸다.
운심부지처 수학은 정말 장난 아냐.
소년들은 모였다 하면 그 얘기로 불평불만이었지만, 강징은 같은 내용을 혼자 속으로만 씹어 삼켰다.
강징은 사교적이지 못한데다 5개의 우두머리 세가 중 하나의 자제인지라 친한 사람이라곤 없었다.
오늘도 실내 수업이 끝나고 자리에 가만히 앉아만 있던 강징은 이윽고 다음 수업 시간이 되어 학생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뒤에야 연무장으로 향했다.
너무 느리게 걸었을까. 어느새 앞서 가던 한 떼의 무리들이 다 사라지고 없었다. 벌써 수업이 시작한 건 아닌지, 강징은 가규에 벗어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때였다.
일순 옆 건물 사이에서 나타난 사람을 보고 주춤했다.
“강공자.”
“택무군.”
“어딜 그렇게 급히 가시는 겁니까?”
강징은 느긋하게 던지는 질문에 어리둥절해졌다.
“그야, 수업에... 택무군께서도 가셔야 하잖아요?”
그러자 남희신이 웃었다. 강징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는 그의 눈빛에 가슴이 찔린 듯 시큰시큰했다.
“전 땡땡이를 치려고요.”
그의 말을 들은 강징은 가볍게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택무군... 택무군이 땡땡이를 친다고??? 아니 그가 땡땡이란 단어는 어떻게 아는 건데?......
“그렇지만... 택무군께서는. 그런 분이 아니시잖아요...”
“그래요? 제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아시는 모양입니다?”
강징은 잠시 정신이 흐트러져서 내뱉은 실언에 남희신이 날카롭게 파고들자 뺨이 확 달아올랐다. 소문으로는 산더미처럼 많은 이야기를 들었고, 실제로는 말 한 마디 섞어본 적 없으니. 안다고도 모른다고도 할 수 없는 애매한 처지였다.
강징은 무안함을 느끼자마자 당장에 도망을 치고 싶어졌다. 그런데, 고개를 숙이며 말없이 빠져나가려는 그를 남희신이 붙잡았다.
강징은 깜짝 놀라 쳐다보았다.
남희신은 소맷자락을 잡은 것도, 팔뚝이나 손목을 잡은 것도 아니었다. 떠나려던 강징의 손바닥 사이로 교묘하게 손을 흘려넣고는 파득 떨리는 네 개의 손가락을 꽉 쥐고 놓지 않았다.
“이리 와요!”
남희신이 짤막한 한마디를 뱉은 뒤로 강징은 정신없이 끌려갔다.
운심부지처의 지리를 모르는 강징은 이내 몇 채의 낯선 건물을 지나고, 오솔길로 접어들며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건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무질서하게 심긴 나무와 덤불을 스쳐지나는 속도가 너무 빨라 강징은 다리에 내력까지 실어서 힘을 써야 했다.
“아름답지요?”
쉼없이 잡아당기는 걸 따라가느라 휙휙 지나는 주변도 제대로 보지 못한 강징의 앞에 갑자기 거대한 폭포가 나타났다.
키 큰 나무들이 번갈이 앞을 가리다가 갑자기 환해지며 위압적인 풍경이 드러나자 강징은 놀라서 입을 벌렸다.
고개를 젖히고 보니 폭포가 시작되는 지점이야말로 이 산의 꼭대기인 것 같았다.
높은 곳에서부터 떨어져내리는 물은 착시를 일으켜서 느지막하게 날아 내리는 듯 보였다. 중간중간 튀어나온 지형이 그 물의 일부를 받아 머금고 있었고, 가장 아래에는 중앙으로 갈수록 시꺼멓게 깊어지는 커다란 담이 패여 있었다.
운심부지처에, 이런 폭포가 있었던가?
강징의 마음 속에 또 한차례 이상스런 느낌이 지나갔다. 하지만 아직도 제 손이 남희신에게 잡혀 있음을 깨닫자 다른 생각은 금세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강징은 숨이 찼고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더불어 남희신에게 잡힌 손에서도 땀이 배어나온 것이 느껴지자 얼른 잡아빼려고 했다.
그러나 남희신은 강징의 손끝에 불온한 힘이 느껴지자마자 세게 움켜쥐며 오히려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강징은 표정이 일그러졌으나 감히 손을 놓아 달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왜 그렇게 겁을 내시지요? 제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아신다면서.”
“모... 몰라요...”
“몰라요? 그럼 가르쳐 드려야겠군.”
가볍게 웃는 남희신의 얼굴은 황홀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몰랐다면 유혹을 한다고 착각했을지 모를 느낌이었다. 하마터면 강징은 홀린듯 그를 따라 웃을 뻔했다. 그러나 그 얼굴이 그대로 가까워지자 급속도로 얼어붙으며 눈을 크게 치떴다.
얇고 뜨거운 입술이 망설임도 없이 와 닿았다. 사선으로 부드럽게 강징에게 포개었다가, 살며시 비틀며 부드럽게 문질렀다. 동시에 허리를 지그시 안아 받치는 팔을 느끼고 강징은 참을 수가 없어 속눈썹을 바르르 떨며 눈을 감았다.
“왜... 왜...”
입술이 떨어지고 난 뒤에도 남희신의 팔은 강징을 놓아주지 않았다. 강징은 두 손을 그의 가슴 위에 옹송그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아직도 남희신의 얼굴이 너무도 가까이 있었다.
이어서 남희신이 미소를 지으며 속삭이는 말을 듣자 강징은 아직 첫 입맞춤의 여운도 가시기 전에 하체가 저릿저릿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당신이 좋으니까요.”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남공자...”
남희신은 대화를 거듭할수록 무방비해지는 강징을 지그시 들여다보다가 또 가볍게 입맞추었다. 그리고는 거북이처럼 움츠러드는 몸에 두른 팔에 힘을 주었다.
“그러지 말고. 이름을 불러줘요.”
“안돼요, 그건...”
“왜 안 돼요? 우리 동갑인데.”
“우리가... 동갑...?”
그랬었나......???
“강징.”
남희신은 잠시도 기다려주지 않았다. 열기가 느껴지는 귓불에 대고 재촉하듯 속삭였다. 강징은 그에게 꼭 감싸여 쿵쾅거리는 진동이 고스란히 전해질 것만 같아 초조했다.
“나... 남희신...”
“남환.”
“......”
답이 없자 남희신이 훅 몸을 뗐다. 그가 이번에는 양 어깨를 잡고 가차없이 밀어붙이자, 강징은 강렬한 시선에 노출되는 것만으로도 궁지에 몰리는 느낌이었다.
“나....... 남환...”
햇살을 그대로 받고 있던 남희신의 새하얗고 매끈한 얼굴이 더욱 환해지며 웃었다. 시원한 웃음이 무척 장난스러운 것을 깨달은 강징도 따라 웃게 되었다.
무척 외로운 수학이었건만, 갑자기 집에 있을 때보다도 더욱 포근하게 마음이 꽉 차는 것 같았다.
남희신과 강징은 곧잘 사고를 치고 땡땡이를 쳤다.
소종주답게 처신하지 못한다는 남계인의 노발대발하는 목소리도 먼 하늘에서 우르릉거리는 천둥 소리처럼 스쳐지나갈 뿐이었다.
두 사람은 연일 서안을 맞대고 장서각에서 가규 필사를 했고, 공부방 밖에서 벌을 서기도 했다.
그래도 남희신은 지치지도 않고 강징을 꾀어내었다. 어느날 밤에는 몰래 빠져나와 냉천을 구경시켜주었고 심지어는 가문 사람들도 함부로 들어갈 수 없다는 금서실까지 보여주었다.
가끔은 한실에서 재미있는 서책을 함께 보다가 그대로 같은 침상에서 잠이 들 때도 있었다.
그리고 깨어나면 언제나 남희신이 한쪽 팔을 벌려 강징의 머리를 끌어안고 있었다.
강징은 어느새 그와 함께 있을 때면 여느 소년들이 짓까불고 노는 것처럼 웃고 지껄이게 되었다.
어느 날, 남희신은 명랑하게 집 이야기를 하는 강징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학을 오지 않았다면 지금 이때쯤에는 연화호에서 온종일 물에서 나오지도 않고 헤엄을 치고 있을 거라고 사뭇 즐겁게 수다를 떠는 강징을 남희신은 무척 흐뭇한 얼굴로 주시했다.
“내년에 네가 놀러 오면, 남환! 같이 호수에서 수영하자! 내가 연밥도 따 줄게!”
어느새 강징은 말투도 전혀 스스럼이 없었다.
남희신은 마치 음악처럼 강징의 목소리를 듣는 것 같았다. 내용은 들은 건지 만 건지, 한참만에 입을 연 그는 영 딴소리를 내뱉았다.
“강징. 너랑 가장 친한 친구는 누구지?”
일반적으로는 별 것 아닌 질문이었지만, 강징은 즉각 입을 다물며 무척 복잡한 생각에 빠져들었다.
강징은 까탈스러운 소년이었다. 성질도 잘 부리는데다 예민해서 비위를 맞추기도 힘들었다. 수련 수준도 낮지 않아 금세 난폭해지면 아무도 손댈 수 없었다. 그래서 연화오로 돌아가면 수많은 사제들은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지금 남희신에게 그러는 것처럼 허물없이 대하며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강징은 남희신을 친구라 말하지 못했다.
잠시 스쳐 지나갔지만, 강징은 그가 자신에게 입맞추었던 일을 잊은 적이 없었다. 남희신은 두 번 다시 그러지 않았고, 내내 같은 배를 탄 사고뭉치처럼 모험적이고 흥미진진한 하루하루만 보낼 뿐이었지만.
강징은 답을 하기보다는 그렇게 묻는 남희신의 의도가 오히려 궁금했다.
“친구라고 할 만한 애는... 없어.”
마침내 강징이 자신없는 듯 대답하자, 남희신이 의미심장한 눈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네 친구가 아닌가?”
강징은 그가 하는 말에 마음 한구석이 시려지며 조금 원망스러운 눈빛이 되었다.
“그렇지만, 남환. 너는...”
“나는?”
남희신이 어깨를 기울이며 한층 가까이 다가왔다. 강징은 너무 가까워진 그의 얼굴을 차마 쳐다볼 수 없었다.
남희신은 수줍게 구는 강징의 턱을 잡아 억지로 세웠다. 그리고는 입술을 가져갔다.
이번에는 일부러 턱만 받친 채로, 안아주지도 않고 품에 기대게 하지도 않는 채 입술만 닿게 하고, 하지만 무척이나 끈적하게 탐했다.
일부러 애를 태우듯 얕은 숨을 흘리고, 그리고 살짝 벌어진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리고 입술을 짓이길 듯 깊게 문지르며 혀를 밀어넣자 순진하게 급해지는 호흡이 느껴졌다.
흘긋, 아래로 눈짓을 했을 때 조금 흐트러진 옷깃 사이로 보이는 쇄골에 남희신은 욕망이 더럭 차오르는 것을 느꼈지만 인내했다.
그는 다만 강징이 숨을 참을 수 없을 때까지 입술을 빨고, 혀를 놀려 흥분하게 만들고, 그리고는 물러나 발개진 강징과 시선을 맞추며 고양이처럼 그의 턱을 간지럽혔다.
“이런 건... 친구가 아니잖아.”
마침내 억울한 느낌이 든 강징이 울상으로 중얼거리자, 남희신은 얄미운 얼굴로 웃었다.
“친구랑 연인. 둘 다 하면 되지.”
강징은 제 위로 서서히 그늘을 드리우며 넘어뜨리는 남희신을 쳐다보며 가슴이 마구 뛰었다.
바닥에 쓰러진 강징을 굽어보는 남희신의 머리카락이 우수수 흘러내려 얼굴을 간지럽혔다.
남희신의 커다란 손이 허리를 어루만졌지만 강징은 흠칫거리고 떨기만 할 뿐 거부하지 않았다.
그와 웃고 이야기하고, 갖가지 사건으로 재미있어하는 중에도 내내 이 손길을 기다려왔다는 걸 부인할 수 없었다.
"둘 다 할래."
눈을 감아도 짙어지는 그림자가 느껴지는 듯했고, 매혹적인 저음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강징은 마침내 떨리는 손을 내밀어 한가득 덮쳐오는 행복을 끌어안았다.
*
남희신은 말갛게 새벽 동이 터 올 때쯤 잠에서 깨어났다.
옆을 보니 강징은 미간이 풀어진 순한 얼굴로 자고 있었다. 마치 꿈 속의 수학 시절인 것처럼 앳되어 보였다.
남희신은 그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팔을 빼고 침상 밖으로 나와 향로를 숨겼다.
망기와 위공자는 이것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눈치챘을까? 아무튼 당분간은 돌려줄 수 없었다.
다시 침상으로 돌아온 남희신은 한층 조심하며 강징을 안았다.
강징은 잠시 허전했던 걸 느꼈는지 몸을 돌리며 남희신의 벗은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그런 무의식적인 행동을 남희신은 무척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누렸다.
그를 사랑하게 된 이래로 강징의 모든 것을 다 가졌다. 먼저 마음을 빼앗았고, 그 다음에는 몸을 빼앗았고. 그의 옆자리를 빼앗고 심지어 자신의 아이까지 낳게 했다. 이제는 사소한 습관 하나하나까지도 자력처럼 남희신을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도 손에 넣을 수 없었던 것이 바로 그의 어린 시절이었다.
남희신은 가끔 위무선과 툭탁거리며 거침없는 우애를 표하는 강징을 보면 질투심을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끝내 마지막 한 조각까지 다 가지려는 공작을 펼쳤다.
그가 잠든 강징의 이마에 살며시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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