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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30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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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인물
ㅅㄱㅈㅇ
연회의 마지막 날, 강징은 손님들이 돌아가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이럴 때에는 개인적인 친분으로 더 묵겠다는 사람이 없는 주변머리가 고마웠다.
날이 어두워지자 뒤처리도 하는 둥 마는 둥 아랫사람에게 죄다 맡겨버리고 연화오를 빠져나왔다.
어제보다 조금 흐려진 달이 계곡을 비추었다.
그대로 달이 기울어지도록 기다렸지만 늑대는 다시 오지 않았다.
강징은 그럴 줄 알았다고 한숨을 쉬며 돌아섰지만, 이후부터는 더욱 자주 폭포를 찾았다.
그리고 몇 주가 지났을까.
터벅터벅 산을 오르던 강징은 멀리서부터 보이는 희끄무레한 그림자에 가슴이 심하게 뛰었다.
늘 앉아 있던 바위에, 달빛 아래에서도 눈부시게 빛나는 늑대가 앉아 있었다.
강징은 너무도 반가워 날듯이 달려갔다. 그리고는 위험하게도 와락 뒤에서 끌어안았다.
늑대는 역시 소침한 듯 미적거리며 머리를 움츠렸다. 하지만 강징은 아랑곳없이 꼭 안고 얼굴을 비벼대었다. 길다란 주둥이를 억지로 붙들고는 체통없이 쪽쪽 입도 맞추었다.
강징은 개를 엄청나게 좋아했지만 무엇이든 마음대로 가질 수 있게 된 후에도 연화오에 들여놓는 일은 없었다.
위무선과, 가족들과의 여러 가지 추억에 가슴이 시려져서. 금릉의 선자를 보게 되어도 강징은 얼굴이 굳어지며 좀체 쓰다듬어 주지도 않았다.
위무선이 돌아온 후에도 이유는 달라졌지만 역시 들이지 못했다.
언젠가 그가 연화오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가냘픈 희망 때문에.
하지만 그는 오지 않았다. 현재의 위무선은 어떤 가문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이니, 명문가의 모임이나 사냥회에 나오지 않는 것이 강징을 피하는 거라곤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진실이 어떤지도 알 수 없긴 마찬가지라, 마냥 먹먹한 심정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개를 멀리하던 강징의 앞에 불쑥 나타난 늑대는 기습적으로 빈틈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한 올의 흠도 없는 순백색의 털가죽에, 새파란 눈. 그리고 일찌기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커다란 덩치의 늑대는 그 당당한 모습만으로도 강징을 홀리기에 손색이 없었다.
그런데다 어쩐지 조심스럽게 얌전한 태도가 마음을 끌었다.
참 이상했다.
무척 반갑고 기쁘긴 했지만, 왜 계속 여기서 서성이는 건지 모르겠다. 연화호 근방은 이런 포식 동물이 돌아다닐만한 지역이 아니었다.
늑대는 강징이 일방적으로 반가움과 애정을 표현하자 얌전하게 견디는 듯하다가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경계심도 공격성도 느껴지지 않았고 배가 고픈 것 같지도 않았다. 도통 속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강징이 손을 내밀자, 늑대는 길이라도 든 것처럼 주둥이를 얹었다. 신중하게 혀로 손바닥을 핥는 것이 마치 고민이라도 한 끝에 나온 듯 겸연쩍은 느낌이라 강징은 또다시 소리를 내어 웃고 말았다.
강징은 저도 모르게, 그 누구에게도 해 본 적 없는 살가운 말이 튀어나왔다.
-혹시 날 만나러 온 거냐?
그러자 가만히 듣고 있던 늑대가 마치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머리를 들이밀었다.
강징은 미소를 지으며 기분 좋게 늑대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손을 깊숙이 쑤셔넣으면 안쪽의 털은 폭신폭신 부드러웠다. 최고급의 붓털처럼 사르르 간지럽히는 감촉에 기분이 좋아진 강징은 머리를 기대고는 하염없이 쓰다듬었다.
-멍멍아.
강징은 그가 늑대라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짓궂게 불렀다.
늑대는 이런 불명예스런 이름만은 못 알아듣는 듯 반응이 없었다. 하지만 강징은 제풀에 웃음이 터져버렸다.
-아니야. 이름 같은 건 붙이지 않을게. 사람들은 내가 이름을 정말 못 짓는대.
사실은 사람들이 아니라 위무선 혼자 한 소리였지만.
늑대는 강징이 뭐라고 지껄이며 만지든 웃든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치 그 자리에 솟아오른 채 굳어버린 태산과도 같이 의젓하게 앉아 있었다.
이윽고 강징은 늑대의 옆에 앉아 단단한 몸체에 기대었다. 그대로 손을 위로 뻗어 늑대의 머리를 더듬어 만지면서 무척 만족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기분이 좋다는 게 이런 감정이었던가. 낡아서 썩어버린 듯한 속을 뒤지며 강징은 한숨을 쉬었다.
이런 자그마한 위안이라도 절실했다는 걸 강징은 뒤늦게 깨달았다.
자신이 매일매일을 무의식적으로 죽고 싶다는 위험한 충동에 빠져 지내왔다는 것을.
그리고 불쑥 나타난 짐승 한 마리가 맘대로 쓰다듬게 해주고 우두커니 참고 말을 들어주는 것이 놀라울 정도로 위로가 된다는 걸.
별 것 아닌 일에 지나치게 감동하는 느낌이 위험스럽다 싶으면서도 어쩔 수가 없다는 걸, 다 알면서도 새하얀 털가죽 깊숙이 팔을 둘러 껴안고는 마약과 같은 순간의 안식 속으로 빠져들었다.
***
몇 개의 계절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강징은 세 번째로 늑대가 나타났을 때 그가 일정한 주기로 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약 6주의 주기였다.
늑대는 한 번 모습을 나타내면 사나흘 정도 숲에 머물렀다.
그러면 강징은 매일 산에 올랐다.
아무래도 그렇게 큰 늑대를 상대로 뼈다귀를 던져주며 놀 수는 없었지만, 시도해 본댔자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기만 할 것 같았다.
몇 날을 함께하며 강징은 늑대의 성질을 빠르게 파악했다. 늑대는 매우 얌전했지만 겁이 많아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늑대가 묵묵히 앉아서 전방에 시선을 주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잘 벼려진 검과 같은 노련함과 여유가 느껴졌다. 아마 내가 웃기는 짓을 하니까 도저히 장단을 맞출 수가 없어서 어리버리하는가보다고, 강징은 혼자 있을 때면 그런 생각으로 피식거렸다.
폭넓은 공간을 가득 메운 물 앞에서, 강징은 늑대를 폭 끌어안은 채 마냥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너무나 따뜻했고 평화로웠다. 늑대는 강징이 아무리 오랫동안 기대어 있어도 꼿꼿하게 고개를 세우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강징이 손바닥을 내밀면 상냥하게 핥아주는 행위에도 익숙해져가는 듯했다.
그래서 얼마 안 가 강징은 봇물이 터지듯 말문이 터지면서, 내내 마음속에 담아두고만 있던 것들을 줄줄이 쏟아놓기 시작했다.
말없이 가만히 들어주기만 하는 늑대에게는 무슨 말이든 할 수가 있었다.
처음에는 제 속의 이야기를 외부로 꺼낸다는 행위가 어색하여 뜸직뜸직 말을 끊던 강징이었지만, 나중에는 늑대의 목덜미에 매달려서 쉼없이 지껄여대었다.
요즘은 아릉이 오는 것도 뜸해졌다.
종주가 되었으니 바쁘기도 할 것이며. 제 입으로 자주 오지 말라고도 했던 것이지만. 이따금씩 어딘가에서 남가 자제들과 어울리고 있는 그를 봤다는 얘기가 들리면 허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위무선은.
그 이름을 입 밖에 내는 것만으로도 강징은 그만 눈물이 흘러 넘치고 말았다.
그러자 가만 있던 늑대가 할짝, 짧게 혀를 내어 눈물을 핥아 주었다. 강징은 속을 모르게 빤히 내려다보는 파란 눈을 쳐다보았다. 대수롭지 않아하는 동시에 진지하게 기다리는 듯한 기묘한 눈. 아무런 판단도 하지 않고, 따라서 비난도 하지 않을 눈빛이었다.
그래서 강징은 계속 말했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위무선에 대해서. 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기다리게 되는 자신에 대해서도.
그는 영영 연화오를 찾지 않겠다고 결심이라도 한 걸까.
한 시도 끊이지 않고 배경색처럼 주위를 둘러싼 사박한 물소리 안에서, 강징은 띄엄띄엄 마음 속에 든 것들을 다 털어놓았다. 미안한 마음, 그리운 마음.
끝내는 원망스러운 마음까지.
늑대는 이제까지 어떠한 소리도 낸 적이 없었다. 낑낑거리는 소리도, 으르렁대는 소리도, 울부짖는 소리도. 다만 강징이 심하게 놀리면 살짝 입을 벌리며 사람이 한숨을 짓는 것 같은 바람 소리를 토할 뿐이었다.
그렇듯 고요하게 들어주기만 하는 늑대의 앞에서는, 어린애가 투정하듯 마음대로 말할 수 있었고 자신에게 금단까지 준 사람을 원망할 수도 있었다.
아무도 듣지 않으니까.
멍멍이가 들어주고 있으니까.
한참 동안 늑대의 몸에 기대어 흐느껴 울던 강징은 차츰 가라앉아갔다.
-고마워... 착하구나.
실컷 울고 난 뒤에는 무척 슬퍼졌지만 마음 한구석이 후련한 느낌도 들었다. 후련하다기보다는 비어버린 것에 가까울지도 모르지만.
사방에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따뜻한 털가죽에 가득히 감싸인 동안에는 두려움도 다가오지 못할 것 같았다.
***
“외숙, 어디 아파요?”
금릉이 참다 못해 물었지만, 강징은 그의 모습을 훑어보느라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잠깐 보지 않으면 쑥쑥 크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충격이었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조카를 보았던 것이 무려 다섯 달이나 전의 청담회였다. 얼마 전에 열렸던 야렵회에 금릉이 사정이 있다고 불참을 했기 때문이었다.
약관을 넘어가면서도 좀체 소년의 느낌을 벗어나지 못하던 금여란이었는데, 무거운 자리가 사람을 만든 것일까. 갑자기 턱선에 다부진 느낌이 강해졌고 눈썹은 짙어졌으며, 허리를 곧게 펴고 당당하게 선 풍채에서는 언뜻 지아비가 되었던 금자헌의 그림자마저 엿보이는 듯했다.
강징은 어지러운 느낌을 털어내듯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뭐라고 했느냐?
-어디 아프냐고요. 정말...
그렇게 캐물으며 눈치를 보고, 수상한 듯 살피는 모습에서는 익히 아는 금릉다운 건방진 애정이 묻어났다. 그에 강징은 일순 마음이 놓이며 핀잔을 주었다.
-금단을 지닌 사람이 아프기는? 보자마자 실없는 소린.
강징에게는 가까운 이가 아무도 없었으므로, 기묘한 변화를 알아차리고 의심을 가질만한 사람은 이 조카 하나 뿐이었다.
이 아이가 알아볼 만큼 내가 이상해 보이는 건가. 늑대에게 숨기지 못했던 것처럼 꼭꼭 감춰뒀던 감정들이 외부로 흘러나오고 있는 건 아닌지 꺼림칙했다.
한편으론 잠시간 못 보았던 진한 그리움과 애정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혼자 틀어박혀 있을 때에는 쉽게도 죽어버리자, 죽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이 실물의 혈육과 대면하자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는지 깨달았다.
복잡한 심정이 뒤섞여 한숨을 쉬는 강징을 보면서 금릉은 역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늘상 긴장이 팽팽하고 빈틈이라고는 없던 외숙이었는데, 기습을 하면 옆구리를 찔러버릴 수도 있을 것 같은 이 허술함은 대체 뭐란 말인가. 아픈 게 아닌지 의심할 만도 했다.
외숙은 역시 관음묘 사건 이후로 충격을 받은 마음이 회복되질 못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사건들이 어린 금릉에게는 대부분 한세대 전의 일이었고, 손윗어른인 강징에게 무얼 어떻게 해주어야 할지 갈피도 잡히지 않았다.
외숙이 다시는 위무선을 찾지 않고 만나지도 않고, 위무선 역시 그를 보려 하지 않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그것 역시 제가 어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외숙.... 청하에 볼일이 있어서 바로 떠날 텐데요. 그렇게 한가하면 같이 가실래요?
강징은 건방지게 내뱉는 소리에 꿀밤을 때릴까, 아니면 웃을까 입가가 실룩거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늑대가 돌아올 날이 임박했기 때문이었다.
온 천지에 기댈 데라고는 어디서 오는지도 모르고 언제 발길을 끊을지도 모르는 개 한마리라니.
폭포를 바라보면서 바위 옆에 쭈그려 앉을 때면 늘상 서글픈 느낌이 들었다.
수차례 늑대와 만나면서 강징은 이런 서글픔도 슬픔도, 모든 고통들이 늑대의 모습을 보고 눈을 한 번 들여다보는 것만으로 깨끗하게 다 씻겨져나간다는 사실을 알았다.
알면서도 늑대를 다시 보기 전까지는 병을 앓는 것처럼 속절없이 시달려야 했다.
......어디 아파요?...
머릿속에 금릉이 의아해하며 던졌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강징은 파리한 얼굴로 웃었다. 그래. 이제는 많이 아프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았다.
아프고.
또한 지독하게 고독했다.
영겁같은 시간이 멈춰있는 듯 움직이는 물처럼 흘러가버린 후. 바스락거리며 다가오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마치 몇십년이나 알고 지냈던 것처럼 믿음직스럽고 반가운 모습으로 늑대가 서 있었다. 하지만 오늘의 강징은 어쩐지 늑대를 보아도 고통들이 다 씻겨가기는커녕 더 깊은 곳으로 파고드는 것 같았다.
자신의 목을 껴안고 얼굴을 파묻는 강징을 향해 고개를 숙이는 늑대도 어디인지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강징의 손이 닿는 순간 움찔거리며 피할 듯한 긴장이 근육에 물결치는 것이 느껴졌다. 주둥이를 조금 벌리고 쳐다보는 얼굴이 멍해 보였다.
혹시 어딜 다친 건 아닌가, 강징은 더럭 걱정이 되어 양 손으로 건장한 몸체를 더듬었다. 그러다 생각지도 못한 이물감에 닿고는 화들짝 움츠러들고 말았다.
번개같이 회수한 손을 불에라도 덴 듯이 다른 손으로 쓰다듬으며, 저도 모르게 얼굴이 발긋하게 물들었다.
금방 늑대의 배 아래 짙은 털에 가려 보이지 않는 지점에서 느꼈던 뜨겁고 단단한 감촉이 그대로 달라붙어버린 것 같았다.
-너... 혹시, 짝짓기철인 게...?
그렇게 말을 하며 강징은 멀리 밀어두려 했던 현실이 성큼 다가오는 것 같은 위화감을 느꼈다.
강징은 어색하게 늑대의 곁에 앉아, 한참을 망설였지만 결국은 천천히 몸을 기대었다.
늑대는 꼼짝도 하지 않았고, 여느때와 같이 무거운 마음을 버텨주는 상냥한 인내심도 변함이 없었다.
-그럼 한동안은 보지 못하겠구나.
강징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과연 다음날에는 늑대가 오지 않았다.
강징은 밤이 다 가고 달이 저물어질 때까지 폭포 옆에 머무르며 그동안 생각지 않으려 했던 의문을 떠올렸다.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몇 살이나 되었을까.
이런 곳에 찾아오며 허송세월을 하는 걸 보니 짝은 없는 것 같다.
아니, 짝을 찾기 위해 이상한 곳에서 헤메고 있는 건지도 모를 일이었다.
만약 그렇다면, 그래서 암컷을 찾게 된다면.
그때야말로 오지 않게 될까.
아니야, 아니야. 어쩌면 벌써 발걸음을 끊어버린 건지도 모른다.
단 며칠의 기다림도 너무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게 된 강징은 아예 빠르게 포기하고 체념해 버리는 쪽을 택했다.
그래도 뒷산을 찾는 발길은 끊이지 않고 더욱 잦아지기만 했다.
수인물
ㅅㄱㅈㅇ
연회의 마지막 날, 강징은 손님들이 돌아가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이럴 때에는 개인적인 친분으로 더 묵겠다는 사람이 없는 주변머리가 고마웠다.
날이 어두워지자 뒤처리도 하는 둥 마는 둥 아랫사람에게 죄다 맡겨버리고 연화오를 빠져나왔다.
어제보다 조금 흐려진 달이 계곡을 비추었다.
그대로 달이 기울어지도록 기다렸지만 늑대는 다시 오지 않았다.
강징은 그럴 줄 알았다고 한숨을 쉬며 돌아섰지만, 이후부터는 더욱 자주 폭포를 찾았다.
그리고 몇 주가 지났을까.
터벅터벅 산을 오르던 강징은 멀리서부터 보이는 희끄무레한 그림자에 가슴이 심하게 뛰었다.
늘 앉아 있던 바위에, 달빛 아래에서도 눈부시게 빛나는 늑대가 앉아 있었다.
강징은 너무도 반가워 날듯이 달려갔다. 그리고는 위험하게도 와락 뒤에서 끌어안았다.
늑대는 역시 소침한 듯 미적거리며 머리를 움츠렸다. 하지만 강징은 아랑곳없이 꼭 안고 얼굴을 비벼대었다. 길다란 주둥이를 억지로 붙들고는 체통없이 쪽쪽 입도 맞추었다.
강징은 개를 엄청나게 좋아했지만 무엇이든 마음대로 가질 수 있게 된 후에도 연화오에 들여놓는 일은 없었다.
위무선과, 가족들과의 여러 가지 추억에 가슴이 시려져서. 금릉의 선자를 보게 되어도 강징은 얼굴이 굳어지며 좀체 쓰다듬어 주지도 않았다.
위무선이 돌아온 후에도 이유는 달라졌지만 역시 들이지 못했다.
언젠가 그가 연화오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가냘픈 희망 때문에.
하지만 그는 오지 않았다. 현재의 위무선은 어떤 가문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이니, 명문가의 모임이나 사냥회에 나오지 않는 것이 강징을 피하는 거라곤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진실이 어떤지도 알 수 없긴 마찬가지라, 마냥 먹먹한 심정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개를 멀리하던 강징의 앞에 불쑥 나타난 늑대는 기습적으로 빈틈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한 올의 흠도 없는 순백색의 털가죽에, 새파란 눈. 그리고 일찌기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커다란 덩치의 늑대는 그 당당한 모습만으로도 강징을 홀리기에 손색이 없었다.
그런데다 어쩐지 조심스럽게 얌전한 태도가 마음을 끌었다.
참 이상했다.
무척 반갑고 기쁘긴 했지만, 왜 계속 여기서 서성이는 건지 모르겠다. 연화호 근방은 이런 포식 동물이 돌아다닐만한 지역이 아니었다.
늑대는 강징이 일방적으로 반가움과 애정을 표현하자 얌전하게 견디는 듯하다가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경계심도 공격성도 느껴지지 않았고 배가 고픈 것 같지도 않았다. 도통 속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강징이 손을 내밀자, 늑대는 길이라도 든 것처럼 주둥이를 얹었다. 신중하게 혀로 손바닥을 핥는 것이 마치 고민이라도 한 끝에 나온 듯 겸연쩍은 느낌이라 강징은 또다시 소리를 내어 웃고 말았다.
강징은 저도 모르게, 그 누구에게도 해 본 적 없는 살가운 말이 튀어나왔다.
-혹시 날 만나러 온 거냐?
그러자 가만히 듣고 있던 늑대가 마치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머리를 들이밀었다.
강징은 미소를 지으며 기분 좋게 늑대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손을 깊숙이 쑤셔넣으면 안쪽의 털은 폭신폭신 부드러웠다. 최고급의 붓털처럼 사르르 간지럽히는 감촉에 기분이 좋아진 강징은 머리를 기대고는 하염없이 쓰다듬었다.
-멍멍아.
강징은 그가 늑대라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짓궂게 불렀다.
늑대는 이런 불명예스런 이름만은 못 알아듣는 듯 반응이 없었다. 하지만 강징은 제풀에 웃음이 터져버렸다.
-아니야. 이름 같은 건 붙이지 않을게. 사람들은 내가 이름을 정말 못 짓는대.
사실은 사람들이 아니라 위무선 혼자 한 소리였지만.
늑대는 강징이 뭐라고 지껄이며 만지든 웃든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치 그 자리에 솟아오른 채 굳어버린 태산과도 같이 의젓하게 앉아 있었다.
이윽고 강징은 늑대의 옆에 앉아 단단한 몸체에 기대었다. 그대로 손을 위로 뻗어 늑대의 머리를 더듬어 만지면서 무척 만족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기분이 좋다는 게 이런 감정이었던가. 낡아서 썩어버린 듯한 속을 뒤지며 강징은 한숨을 쉬었다.
이런 자그마한 위안이라도 절실했다는 걸 강징은 뒤늦게 깨달았다.
자신이 매일매일을 무의식적으로 죽고 싶다는 위험한 충동에 빠져 지내왔다는 것을.
그리고 불쑥 나타난 짐승 한 마리가 맘대로 쓰다듬게 해주고 우두커니 참고 말을 들어주는 것이 놀라울 정도로 위로가 된다는 걸.
별 것 아닌 일에 지나치게 감동하는 느낌이 위험스럽다 싶으면서도 어쩔 수가 없다는 걸, 다 알면서도 새하얀 털가죽 깊숙이 팔을 둘러 껴안고는 마약과 같은 순간의 안식 속으로 빠져들었다.
***
몇 개의 계절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강징은 세 번째로 늑대가 나타났을 때 그가 일정한 주기로 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약 6주의 주기였다.
늑대는 한 번 모습을 나타내면 사나흘 정도 숲에 머물렀다.
그러면 강징은 매일 산에 올랐다.
아무래도 그렇게 큰 늑대를 상대로 뼈다귀를 던져주며 놀 수는 없었지만, 시도해 본댔자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기만 할 것 같았다.
몇 날을 함께하며 강징은 늑대의 성질을 빠르게 파악했다. 늑대는 매우 얌전했지만 겁이 많아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늑대가 묵묵히 앉아서 전방에 시선을 주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잘 벼려진 검과 같은 노련함과 여유가 느껴졌다. 아마 내가 웃기는 짓을 하니까 도저히 장단을 맞출 수가 없어서 어리버리하는가보다고, 강징은 혼자 있을 때면 그런 생각으로 피식거렸다.
폭넓은 공간을 가득 메운 물 앞에서, 강징은 늑대를 폭 끌어안은 채 마냥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너무나 따뜻했고 평화로웠다. 늑대는 강징이 아무리 오랫동안 기대어 있어도 꼿꼿하게 고개를 세우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강징이 손바닥을 내밀면 상냥하게 핥아주는 행위에도 익숙해져가는 듯했다.
그래서 얼마 안 가 강징은 봇물이 터지듯 말문이 터지면서, 내내 마음속에 담아두고만 있던 것들을 줄줄이 쏟아놓기 시작했다.
말없이 가만히 들어주기만 하는 늑대에게는 무슨 말이든 할 수가 있었다.
처음에는 제 속의 이야기를 외부로 꺼낸다는 행위가 어색하여 뜸직뜸직 말을 끊던 강징이었지만, 나중에는 늑대의 목덜미에 매달려서 쉼없이 지껄여대었다.
요즘은 아릉이 오는 것도 뜸해졌다.
종주가 되었으니 바쁘기도 할 것이며. 제 입으로 자주 오지 말라고도 했던 것이지만. 이따금씩 어딘가에서 남가 자제들과 어울리고 있는 그를 봤다는 얘기가 들리면 허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위무선은.
그 이름을 입 밖에 내는 것만으로도 강징은 그만 눈물이 흘러 넘치고 말았다.
그러자 가만 있던 늑대가 할짝, 짧게 혀를 내어 눈물을 핥아 주었다. 강징은 속을 모르게 빤히 내려다보는 파란 눈을 쳐다보았다. 대수롭지 않아하는 동시에 진지하게 기다리는 듯한 기묘한 눈. 아무런 판단도 하지 않고, 따라서 비난도 하지 않을 눈빛이었다.
그래서 강징은 계속 말했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위무선에 대해서. 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기다리게 되는 자신에 대해서도.
그는 영영 연화오를 찾지 않겠다고 결심이라도 한 걸까.
한 시도 끊이지 않고 배경색처럼 주위를 둘러싼 사박한 물소리 안에서, 강징은 띄엄띄엄 마음 속에 든 것들을 다 털어놓았다. 미안한 마음, 그리운 마음.
끝내는 원망스러운 마음까지.
늑대는 이제까지 어떠한 소리도 낸 적이 없었다. 낑낑거리는 소리도, 으르렁대는 소리도, 울부짖는 소리도. 다만 강징이 심하게 놀리면 살짝 입을 벌리며 사람이 한숨을 짓는 것 같은 바람 소리를 토할 뿐이었다.
그렇듯 고요하게 들어주기만 하는 늑대의 앞에서는, 어린애가 투정하듯 마음대로 말할 수 있었고 자신에게 금단까지 준 사람을 원망할 수도 있었다.
아무도 듣지 않으니까.
멍멍이가 들어주고 있으니까.
한참 동안 늑대의 몸에 기대어 흐느껴 울던 강징은 차츰 가라앉아갔다.
-고마워... 착하구나.
실컷 울고 난 뒤에는 무척 슬퍼졌지만 마음 한구석이 후련한 느낌도 들었다. 후련하다기보다는 비어버린 것에 가까울지도 모르지만.
사방에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따뜻한 털가죽에 가득히 감싸인 동안에는 두려움도 다가오지 못할 것 같았다.
***
“외숙, 어디 아파요?”
금릉이 참다 못해 물었지만, 강징은 그의 모습을 훑어보느라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잠깐 보지 않으면 쑥쑥 크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충격이었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조카를 보았던 것이 무려 다섯 달이나 전의 청담회였다. 얼마 전에 열렸던 야렵회에 금릉이 사정이 있다고 불참을 했기 때문이었다.
약관을 넘어가면서도 좀체 소년의 느낌을 벗어나지 못하던 금여란이었는데, 무거운 자리가 사람을 만든 것일까. 갑자기 턱선에 다부진 느낌이 강해졌고 눈썹은 짙어졌으며, 허리를 곧게 펴고 당당하게 선 풍채에서는 언뜻 지아비가 되었던 금자헌의 그림자마저 엿보이는 듯했다.
강징은 어지러운 느낌을 털어내듯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뭐라고 했느냐?
-어디 아프냐고요. 정말...
그렇게 캐물으며 눈치를 보고, 수상한 듯 살피는 모습에서는 익히 아는 금릉다운 건방진 애정이 묻어났다. 그에 강징은 일순 마음이 놓이며 핀잔을 주었다.
-금단을 지닌 사람이 아프기는? 보자마자 실없는 소린.
강징에게는 가까운 이가 아무도 없었으므로, 기묘한 변화를 알아차리고 의심을 가질만한 사람은 이 조카 하나 뿐이었다.
이 아이가 알아볼 만큼 내가 이상해 보이는 건가. 늑대에게 숨기지 못했던 것처럼 꼭꼭 감춰뒀던 감정들이 외부로 흘러나오고 있는 건 아닌지 꺼림칙했다.
한편으론 잠시간 못 보았던 진한 그리움과 애정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혼자 틀어박혀 있을 때에는 쉽게도 죽어버리자, 죽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이 실물의 혈육과 대면하자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는지 깨달았다.
복잡한 심정이 뒤섞여 한숨을 쉬는 강징을 보면서 금릉은 역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늘상 긴장이 팽팽하고 빈틈이라고는 없던 외숙이었는데, 기습을 하면 옆구리를 찔러버릴 수도 있을 것 같은 이 허술함은 대체 뭐란 말인가. 아픈 게 아닌지 의심할 만도 했다.
외숙은 역시 관음묘 사건 이후로 충격을 받은 마음이 회복되질 못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사건들이 어린 금릉에게는 대부분 한세대 전의 일이었고, 손윗어른인 강징에게 무얼 어떻게 해주어야 할지 갈피도 잡히지 않았다.
외숙이 다시는 위무선을 찾지 않고 만나지도 않고, 위무선 역시 그를 보려 하지 않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그것 역시 제가 어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외숙.... 청하에 볼일이 있어서 바로 떠날 텐데요. 그렇게 한가하면 같이 가실래요?
강징은 건방지게 내뱉는 소리에 꿀밤을 때릴까, 아니면 웃을까 입가가 실룩거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늑대가 돌아올 날이 임박했기 때문이었다.
온 천지에 기댈 데라고는 어디서 오는지도 모르고 언제 발길을 끊을지도 모르는 개 한마리라니.
폭포를 바라보면서 바위 옆에 쭈그려 앉을 때면 늘상 서글픈 느낌이 들었다.
수차례 늑대와 만나면서 강징은 이런 서글픔도 슬픔도, 모든 고통들이 늑대의 모습을 보고 눈을 한 번 들여다보는 것만으로 깨끗하게 다 씻겨져나간다는 사실을 알았다.
알면서도 늑대를 다시 보기 전까지는 병을 앓는 것처럼 속절없이 시달려야 했다.
......어디 아파요?...
머릿속에 금릉이 의아해하며 던졌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강징은 파리한 얼굴로 웃었다. 그래. 이제는 많이 아프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았다.
아프고.
또한 지독하게 고독했다.
영겁같은 시간이 멈춰있는 듯 움직이는 물처럼 흘러가버린 후. 바스락거리며 다가오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마치 몇십년이나 알고 지냈던 것처럼 믿음직스럽고 반가운 모습으로 늑대가 서 있었다. 하지만 오늘의 강징은 어쩐지 늑대를 보아도 고통들이 다 씻겨가기는커녕 더 깊은 곳으로 파고드는 것 같았다.
자신의 목을 껴안고 얼굴을 파묻는 강징을 향해 고개를 숙이는 늑대도 어디인지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강징의 손이 닿는 순간 움찔거리며 피할 듯한 긴장이 근육에 물결치는 것이 느껴졌다. 주둥이를 조금 벌리고 쳐다보는 얼굴이 멍해 보였다.
혹시 어딜 다친 건 아닌가, 강징은 더럭 걱정이 되어 양 손으로 건장한 몸체를 더듬었다. 그러다 생각지도 못한 이물감에 닿고는 화들짝 움츠러들고 말았다.
번개같이 회수한 손을 불에라도 덴 듯이 다른 손으로 쓰다듬으며, 저도 모르게 얼굴이 발긋하게 물들었다.
금방 늑대의 배 아래 짙은 털에 가려 보이지 않는 지점에서 느꼈던 뜨겁고 단단한 감촉이 그대로 달라붙어버린 것 같았다.
-너... 혹시, 짝짓기철인 게...?
그렇게 말을 하며 강징은 멀리 밀어두려 했던 현실이 성큼 다가오는 것 같은 위화감을 느꼈다.
강징은 어색하게 늑대의 곁에 앉아, 한참을 망설였지만 결국은 천천히 몸을 기대었다.
늑대는 꼼짝도 하지 않았고, 여느때와 같이 무거운 마음을 버텨주는 상냥한 인내심도 변함이 없었다.
-그럼 한동안은 보지 못하겠구나.
강징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과연 다음날에는 늑대가 오지 않았다.
강징은 밤이 다 가고 달이 저물어질 때까지 폭포 옆에 머무르며 그동안 생각지 않으려 했던 의문을 떠올렸다.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몇 살이나 되었을까.
이런 곳에 찾아오며 허송세월을 하는 걸 보니 짝은 없는 것 같다.
아니, 짝을 찾기 위해 이상한 곳에서 헤메고 있는 건지도 모를 일이었다.
만약 그렇다면, 그래서 암컷을 찾게 된다면.
그때야말로 오지 않게 될까.
아니야, 아니야. 어쩌면 벌써 발걸음을 끊어버린 건지도 모른다.
단 며칠의 기다림도 너무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게 된 강징은 아예 빠르게 포기하고 체념해 버리는 쪽을 택했다.
그래도 뒷산을 찾는 발길은 끊이지 않고 더욱 잦아지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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