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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3 04:48



섬뜩한 심정으로 고개를 들자 오늘도 여전히 황후에게 반쯤 기대앉은 황제가 웃고 있는데도 차가워 보이는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등왕비는 생애 첫 기억이 몇 살 때 기억이지?"

뜬금없이 무슨 말인가 싶었지만 황후를 흘긋 바라보자, 황후는 평소처럼 덤덤한 얼굴이었기 때문에 위험한 질문은 아닌 듯해 순순히 기억 속 가장 오래된 시간을 끄집어냈다. 

"6살 때 조부님 댁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새벽에 고기 잡으러 가는 백부님을 따라 나갔다가 강가에 물안개가 낀 걸 봤었는데, 그 광경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잊히지 않았습니다."
"좋은 첫 기억을 가지고 있군."

황제는 묘하게 서글픈 듯한 말투로 말하더니 다시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난 내 생애 첫 번째 기억이 뭐였는지 모르겠거든. 어릴 때도 코타로랑 자주 놀았고 검수련을 받고 공부를 하느라 힘들었던 기억도 나는데 딱히 첫 번째 기억이 뭔지는..."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도 모르겠어서 노부가 조용히 듣고만 있자 황제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이번에는 확실히 노부의 관심을 끄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케이타의 생애 첫 기억이 뭐였는지는 확실히 말할 수 있지."
"... 뭐였습니까?"

황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복잡한 얼굴로 노부를 바라보다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자신의 유모가 눈 앞에서 침략군의 칼에 맞아 죽던 모습."

노부가 놀라서 예도 잊고 벌떡 일어서자 황제가 만류하는 황후를 한 번 토닥이고는 25년 전 황제 부부와 케이타가 얽히게 된 이야기를 시작했다. 

"등왕비는 케이타보다 두 살이 어리다고 하니 여란국에서 화왕국을 침략해 왔던 때의 기억이 없겠군."

그 말과 함께. 





25년 전 화왕국의 왕후는 적장녀이자 첫째자식이고, 왕세녀였던 큰딸과 적장자이자 자신의 둘째 아이인 현 황제, 그리고 쿄스케의 유모였던 아몬의 어머니, 왕후의 호위대장이었던 아몬의 아버지 외 많은 호위와 궁인들을 데리고 별궁으로 향했었다. 그 별궁은 도성에서 하루를 꼬박 가야 닿는 도시에 있었는데 강가에 있어서 풍광이 좋았기 때문에 왕실 가족들에게 인기였다고 했다. 그곳에서 쉬고 있을 때, 서장녀이자 당시 왕의 둘째딸이었던 공주가 별궁을 방문했었다고. 별궁은 도성의 황궁만큼은 아니지만 꽤 컸기 때문에 각자 다른 방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 공주가 왕후 일행을 방문했었다고 했다. 차나 한 잔 하자는 핑계로. 그런데 그 자리에서 차를 마신 적장녀와 서장녀가 모두 쓰러졌다. 동석했던 쿄스케와 아몬도 차를 마시려고 했으나 차 맛이 미묘하게 다르다는 걸 알아챈 왕세녀가 찻잔을 쥔 두 사람의 손을 내리치며 찻잔을 떨어뜨려서 마시지 못하게 했다고. 결국 두 사람은 소량은 마셨다고 했으나 아주 소량이었다고 했다.

서장녀인 공주의 하인들과 시녀들, 호위들은 당장 본궁으로 공주를 옮겨야 한다며 호들갑을 떨었지만 그 공주보다 왕세녀의 증상이 더 심각했기 때문에 왕후 일행은 움직일 수 없었다. 왕세녀의 팔다리가 금세 뻣뻣해지고 얼굴이 새파래지기 시작했기 떄문에 잘못될까 봐 함부로 옮길 수도 없었다. 급히 그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의원들이 줄줄이 불려오고 태의를 보내달라 궁으로 연락을 넣었다. 마을의 의원들이 내놓은 진단은 중독이었다. 

태의는 오지 않았다. 의원들은 몸에 독이 퍼져 있는 상태기 때문에 이동하면 독이 더 빨리 퍼질 수 있다며 이동을 말렸다. 다시 태의를 청하는 사람을 보냈으나 궁에 보낸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고 태의도 오지 않았다. 그렇게 애만 태우고 있을 때, 여란국이 화왕국을 침략했고 여란국의 부대는 순식간에 별궁까지 쳐들어왔다. 왕세녀의 목숨이 오락가락하던 터라 밖의 사정을 신경쓰지 못했던 왕후 일행이 적들에게 둘러싸인 것은 금방이었다. 왕후는 여란국 부대가 별궁의 문을 부수려 한다는 말을 듣자 의식을 잃은 딸을 끌어안고 쿄스케와 아몬을 돌아봤다고 한다. 

잘 들어, 부대장을 따라가면 궁의 뒤쪽 산으로 통하는 비밀 통로로 안내할 거야. 그 길을 통해 궁을 나가라. 
어마마마!
나는 란이를 두고 가지 못한다. 어쩌면 도성에서 우리 부대가 오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나는 남겠다. 하지만 너희는 도망가. 너희는 살아야 해.


너희는 살아야 해. 그 말을 듣고 황제는 어마마마가 죽음을 각오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고 했다. 사실 이미 그때 황제의 동복누이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그때 고작 14살이었던 쿄스케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죽음의 징후가 뚜렷했었다고. 어머니는 누이를 저승길에 혼자 보낼 수 없었던 모양이라고 황제는 말했다. 

어마마마. 안 됩니다. 저도.
가야 된다. 쿄스케. 부대장을 따라서 도성으로 돌아가. 국왕 전하에게 가거라. 가서 이곳의 상황을 알려. 꼭 살아남아야 된다. 어서 가.


황제는 담담하게 모친도 사실 도성에서 그 별궁을 버렸을 거라 생각했을 거라고 전했다. 왕세녀가 죽어가는데도 태의를 보내주지 않은 건 아마도 여란국이 쳐들어온다는 정보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였겠지만, 여란군 부대의 진행 방향에 별궁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 별궁에 왕후와 왕자녀들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소식을 전하지 않은 건 버렸다는 뜻이 아니었겠냐고. 

그렇게 쿄스케와 아몬이 부대장과 몇몇 호위들을 따라서 비밀통로가 있는 전각으로 가자, 그 전각에는 별궁에 있는지도 몰랐던 케이타와 유모가 있었다고 했다. 몇 달 전 케이타의 친모가 별궁으로 피접을 왔을 때 본궁으로 돌아가며 케이타와 유모를 두고 가 버려서 어린 케이타는 영문도 모르고 내내 별궁에서 지내고 있었다고. 평소 왕래가 전혀 없던 사이라 쿄스케는 케이타를 그날 처음 봤지만 묘하게 저와 닮은 얼굴이어서 피붙이란 걸 알 수 있었고, 무엇보다 케이타의 유모가 쿄스케도 익히 아는 이였기 때문에 두 사람도 데리고 비밀통로를 빠져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적군들이 곧 이들을 뒤쫓아왔고 결국 아몬과 쿄스케의 호위대는 전부 죽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이들을 지키려 하던 쿄스케의 유모, 즉 아몬의 어머니와 케이타의 유모까지 쿄스케와 아몬, 케이타의 눈 앞에서 칼을 맞으며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결국 모두가 다 죽고 셋만 겨우 별궁을 빠져 나온 후 뒷산 위에서 별궁을 내려다보자, 아직 쿄스케의 어머니와 누나, 아몬의 아버지가 남아 있을 별궁이 적이 놓은 불로 인해 온통 화염에 휩싸여 있었다고 했다.





쿄스케는 회상을 끝낸 후 여전히 뱀처럼 느껴지는 냉혹한 표정으로 나른하게 말했다. 

"우리가 케이타를 구했다는 걸 생색내려 하는 이야기가 아니야. 그때 우리가 케이타를 구하지 않았으면 케이타도 별궁이 불 탈 때 같이 죽었거나 여란국 군사들에게 죽었을 테니 우리가 구한 건 사실이지만 그걸 빌미로 지금 25년째 이용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니까."
"네?"
"그 아이는 어미에게 버림받았다는 걸 어린 나이에도 알고 있었고, 그런 저를 지켜주는 유일한 사람이 유모라는 것도 알고 있었어. 그런데 그런 유모가 눈 앞에서 죽어 버린 거야. 이제 자기를 지켜줄 이가 아무도 없으니 두렵고 막막했겠지. 유모를 죽인 란유국에 복수도 하고 싶었을 거야. 전쟁의 무서움도 직접 깨달았을 거야. 그렇게 두려움과 복수심과 막막함에 잠식당해 있던 어린아이를 내가 거둬서 복수를 위해, 네가 살기 위해, 널 살려준 날 위해 날 위한 검이 되라 했지."

노부가 시뻘개진 눈으로 벌떡 일어서자, 황후가 발을 세게 구르며 작고 엄한 소리로 외쳤다. 황후가 외친 건 노부의 이름이나, 노부를 저지할 궁인들을 부르는 소리가 아니었다. 황후는 단호하게 황제의 이름을 불렀다. 

"쿄스케!"

그 외침에 정신을 차린 건 쿄스케만이 아니라서 노부가 황후를 노려보자, 황후는 노부가 다시 앉을 때까지 가만히 쳐다보기만 하다가 노부가 마지못해 작은 의자에 앉자 말을 이었다. 

"조금 전 폐하가 말씀하신 대로 그때 일들이 워낙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케이타도 그 일을 잘 기억하고 있을 거예요. 등왕비. 황제 폐하가 이렇게 말을 했지만 그때부터 이미 외척들이 저마다 자신들의 외손자, 외손녀를 다음 왕으로 만들기 위해 싸우고 있던 터라 케이타를 보호하기 위해서 검을 가르쳤고, 케이타를 보호하기 위해서 일부러 검에도 왕위에도 관심이 없이 그저 책만 읽고 있는 왕자로 보이게 한 거예요. 당시 우리도 어렸고 왕후 마마께서 돌아가시면서 우리를 보호해 줄 어른도 없었기 때문에 케이타를 보호할 수단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폐하가 또 말씀하신대로 우리가 케이타를 이용한 건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케이타한테 미안해하고 있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케이타가 없었다면 오늘의 대화제국도 없었을 테니 앞으로 꾸준히 갚겠습니다. 그리고 등왕비. 오늘은 이런 과거 이야기를 하려고 부른 게 아니었는데..."

황후는 황제를 한 번 노려보고 다시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등왕비의 둘째 형수가 다관을 내고 싶어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 그건."

원래 노부의 둘째 형수는 노부 외숙의 차와 자신의 다과를 전문으로 하는 다관을 내고 싶어했다. 하지만 귀족들은 혼례를 치를 때 상대 집안을 아주 면밀히 뜯어보는 이들이었고 황제가 상업을 장려하고 있다고 해도 상대 집안이 장사를 한다고 하면 얕잡아 보며 혼례를 치르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서 둘째 형수는 자신의 욕심이 노부의 혼사를 방해할까 봐 노부가 혼례를 치를 때까지는 기다렸다가 혼인 후에 상대 집안이 양해해 주면 다관을 열겠다고 했었다. 그래서 노부는 케이타에게 둘째 형수가 다관을 열어도 될지 물었고, 케이타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었다. 그러나 신나서 둘째 형수에게 이야기를 하자 이번엔 둘째 형수가 거절했었다. 전하에게 폐가 되고 싶지 않다고. 그런데 아무래도 케이타가 황제와 황후에게도 그 이야기를 해 둔 모양이었다. 

"둘째 형수님께서 등왕 전하께 폐가 될 것 같다고 사양하셨습니다."
"폐가 될 건 없을 거예요. 케이타는 등왕비 가족들이 만드는 다과를 좋아하고, 어차피..."

황후가 황제를 돌아보자, 황제는 노부가 아닌 황후를 돌아보며 말했다. 

"어차피 케이타의 출정은 이번이 마지막이었다."
"... 네?"

노부가 다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자, 황제는 노부를 흘긋 보고 다시 황후를 돌아봤다. 

"아직 대륙재패는 끝난 게 아니지만, 등왕비가 본 대로 케이타는 이미 한계에 가까운 상태, 아니 이미 오래 전에 한계를 지난 상태였으니... 나머지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해야지."

노부가 침을 꿀꺽 삼키며 황제를 보자, 황제는 그제야 노부를 돌아봤다. 

"그러니 등왕에게 해가 될 것 없다고 가족들에게 다점을 열어도 좋다고 전해라. 케이타는 이제 내가 오래 전 내 검으로서, 대화제국의 검으로서의 임무를 다 하면 자유롭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던 대로 여유롭고 자유롭게 살 수 있으니. 케이타도 도성에서 편하게 다니며 느긋하게 차와 다과를 즐길 수 있는 다관이 있으면 좋겠지."
"네. 폐하."
"그리고 네가 6살 때 물안개를 봤다는 그 강가."
"네."
"거기도 케이타를 한 번 데려가. 다른 좋은 데도 많이 데려가고. 케이타를 위해 목숨을 내놓겠다는 호위들도 많으니 안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다. 이제 여기저기 좋은 데 많이 데리고 다녀."
"네, 감사합니다. 폐하."





꿈인가 싶을 정도로, 그리고 황제를 향한 원망이 한 톨은 더 줄어들 정도로 좋았지만 황제가 약속한 건 '이번 전쟁이 끝나면' 자유라는 것이었으니 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마냥 안심할 수 없었다. 노부는 케이타를 기다리며 많은 일을 했다. 케이타가 티내지 않을 뿐 여전히 고통스럽게 느끼고 있는 상처가 있을지도 모르니 큰 형에게 간단한 의술이나 안마 방법 등을 배우고, 황제가 허락했고 등왕을 위한 일이니 다관을 열자고 둘째 형수를 설득해 다관의 개업도 돕느라 하루하루가 바빴다. 그러나 등왕궁에서 케이타를 기다리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밤 늦게까지 다관 개업을 돕고 의술을 익히느라 바빴어도 본가에서 묵지 않고 밤 늦게라도 반드시 등왕궁으로 돌아와 텅 빈 침상에서 혼잠 잠들었다.

케이타가 없는 밤은 너무 길었고, 케이타를 기다리는 날들은 너무 고통스러웠다. 그러다 어느 날 외숙이 보내 준 찻잎을 정리하고 있을 때, 황제의 내관들 중 하나가 개업 준비 중인 다관으로 들어왔다. 

"등왕비 전하. 등왕 전하께서 보내신 서신입니다."

황제에게 보고서를 보낼 때 노부에게 보낼 서신도 함께 보낸 모양이었다. 살펴보니 누군가 봉투를 연 흔적은 없는데 설마 황제가 본 건 아니겠지? 의심스러워하며 서둘러 봉투를 열어보자, 조금 길쭉길쭉한 듯한데 글자만 보고 있어도 웃음이 나올 정도로 귀여운 글자들이 적혀 있었다. 
 
나의 왕비 노부유키. 

그대가 15년 전 팔찌와 함께 내게 채워 준 고맙고 소중한 마음은 이번에도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진국의 저항이 거셌으나 '승전'을 기원한 그대의 마음이 우리를 승리로 이끌어 주었습니다.
전쟁 뒷처리를 할 이들이 들어오면 나는 바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대가 타 주던 차와 그대가 건네 주던 다과가 그립습니다.
그대가 전해주던 따스한 접문, 그대가 내 손을 잡아주던 손길이 그립고 그대가 불러주던 자장가가 그립습니다. 
그대의 품 안에서 잠들던 밤이, 그대와 함께 맞이하던 아침이 그립습니다.
무엇보다 그대가 그립고 그립습니다. 
곧 그대에게 달려가겠습니다. 

그대의 케이타.

글자는 더 이상 귀엽게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전혀. 언제나 노부에게 마음을 있는 그대로 투명하고 적극적으로 보여주는 걸 주저하지 않던 케이타가 또 노부가 그립고 보고 싶은 마음을 숨김없이 드러낸 편지를 보자 오직 케이타를 향한 그리움과 벅찬 애정만이 가슴을 가득 채울 뿐이었다. 노부는 보는 이도 없는데 손을 들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가렸다. 당장 이 사랑스럽고 고운 사람을 품에 안고 그가 그리워하는 접문과 포옹을 마구 쏟아붓고, 전쟁을 치르는 동안 단 것도 제대로 맛보지 못했을 예쁜 입에 달콤한 당과와 깔끔한 차를 넣어 주고 싶었다. 정성스럽게 자장가를 불러 재워주고 싶고, 따뜻한 햇살을 받고 있는 예쁜 이마에 입을 맞추며 깨워주고 싶었다. 

무엇보다... 당장 이 사람을 품에 꼭 끌어안고 싶었다. 

기다림의 시간이 정말로 너무 길었다. 





혐생 ㅅㅂ이라서... 놉맟은 못 만나서 둘 다 애타지만 재회는 며칠 뒤로

#사신마치다사신의반려노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