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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06 04:45



200년 전 대성제국이 쌓이고 쌓인 사치향락과 부패로 결국 무너지면서 대륙은 수십 개의 작은 나라로 쪼개졌다. 당시만 해도 화국 역시 수십개 나라 중 하나, 대륙의 중앙에 자리를 잡고 있고 큰 강을 끼고 있어서 농사와 무역을 하기에 좋고 그래서 또 수없이 많은 나라의 표적이 되는 것만이 장점이자 단점인 그런 평범한 나라일 뿐이었다. 화국의 마지막 왕은 궁에 들어온 음인이라면 왕의 침궁으로 끌려가지 않은 이가 없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색에 미친 자였으나 색에 몰두한 만큼 권력과 명예를 향한 욕구도 충만한 인간이었다. 그가 왕위에 앉는 순간 대륙은 전화에 휩싸였고 정복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렇게 대륙을 재패한 정복황제가 되고자 했던 왕은 그러나 본인이 대륙재패를 위한 검으로 선택했던 친아들의 압박에 강제로 양위를 해야 했다. 세자가 아비인 왕에게 검을 들이밀고 양위를 강요했다는 소문도 있었고 약물을 써서 왕을 폐인으로 만들었다는 소문도 돌았으나 진실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확실한 건 선왕은 현 황제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는 이유로 작은 궁에 유폐돼 있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아비를 밀어내고 왕위에 앉은 이는, 왕자 시절 아비의 검으로 선택돼 수년간 수없이 많은 나라를 멸망시킸던 그 자는 왕위에 오르며 스스로 제국임을, 그리고 황제임을 선언했다. 이 황제는 세자 시절에도 수없이 많은 나라를 멸망시키고 수없이 많은 전쟁을 치렀지만, 이 황제가 황위에 오른 이후에는 대화제국이 전쟁을 하는 날이 전쟁을 하지 않는 날보다 더 많다고 할 정도였다. 그 정도로 전쟁에 미친 인간이고 황위를 찬탈하고자 하던 이복형제들과 누이들의 목을 몇이나 딴 폭군임에도 백성들의 지지가 높았다. 화왕국의 건국에 기여한 건국공신들인 5대 가문은 재산이 반으로 줄었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황실의 압박을 받아 이런저런 국가 중대사를 위해 재산을 토해내야 했고 30대 가문으로 꼽히는 가문들도 황제가 거둬들이는 가혹한 세금에 사업을 팔고 땅을 팔아야 했으나 백성들은 달랐다. 황제는 백성들이 탐관오리들을 고발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었고 지식과 실력을 갖춘 의원들을 더 많이 길러낼 수 있는 체계를 만들어냈다. 또한 황제는 각 지방 관리들이 백성들을 징발해 무급으로 이런저런 일들을 시키는 것을 금지시켰다. 이제 현령이나 성주들은 백성들을 동원해 노동을 시키려면 마을에 필요한 길을 까는 것이나 우물을 파는 것이라고 해도 반드시 하루치 일당을 지급해야 했다. 

이렇게 대륙의 많은 나라와 대화제국의 고관대작들에게는 피에 미친 폭군, 아비와 형제들의 피로 물든 권좌에 앉은 패륜아라고 불리는 현 황제는 백성들에게는 하늘이 낳은 성군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리고 대화제국의 수도, 그러나 휘황찬란한 저택들이 즐비한 대로가 아니라 수수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수도 변두리 거리에 자리를 잡고 있는 한 소박한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저녁을 먹던 스즈키 노부유키는 아버지에게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들었다. 

"등왕과 혼인하라는 교지가 내려왔다."

노부는 아버지의 말을 꿈꾸는 기분으로 듣고 있었다. 꿈인 것 같을 정도로 좋았다는 게 아니라 그만큼 현실감이 없었다는 말이었다. 노부의 집안은 정말로 아무런 힘도 없는 한미한 집안이었다. 노부의 부친은 병사들의 안정적인 수급을 위해 인구조사와 관리를 담당하는 관청의 말단 관리를 맡고 있었고, 세금을 걷고 관리하는 일을 하는 조직에 속한 노부와 작은 형 역시 말단 관리였다. 제국오가, 제국십가는커녕 제국삼십가에도 들지 못하고 제국백가 끄트머리에 가까스로 이름을 올리고 있는 명색만 귀족인 가문이었는데 어째서. 

"잘못 들은 것 같습니다?"

노부가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말라는 듯 되묻자 아버지는 밥맛도 없는지 거의 뜨지도 않은 밥그릇과 젓가락을 내려놨다. 입을 다문 아버지 대신 어머니가 아버지와 비슷한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설명을 했다. 

"네가 집에 오기 조금 전에 궁에서 내관이 다녀갔다."

아버지는 가장자리가 금실로 장식돼 있는 붉은 비단 두루마리를 가져와서 내밀었다. 

"황제 폐하의 교지입니까?"
"그래."
"이걸 제 눈으로 직접 보게 되는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요."
"나라고 그런 생각을 해 봤겠냐."

노부가 얼떨떨한 기분으로 두루마리를 펼쳐보자 스즈키 가문의 삼남 노부유키와 황제의 동생 마치다 케이타와의 혼인을 명령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아니, 잠깐만요. 마치다 케이타라고요?"

아버지는 한숨을 푹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등왕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 마치다 케이타면 '사랑하는 나의 아우'... 아닙니까?"

아버지는 대답 대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대화제국에는 황제 다음으로 유명한 사람이 있었다.

'사랑하는 나의 아우'

아직 현 황제가 황좌에 앉기 전, 명목상으로는 선왕이 있을 때였으나 당시 세자였던 현 황제가 왕을 가둬놓고 대리청정을 하고 있을 때였다. 대화제국이 화왕국이던 시절. 그때부터 현 황제는 전장에서도 수도에서도 악명을 떨치고 있는 무시무시한 인간이었다. 그래서였을지도 모르겠다. 선왕은 색에 미친 인간이었던 만큼 현 황제는 배다른 형제와 누이들이 잔뜩 있었는데 이들이 현 황제가 정말로 황위에 오르면 목숨이 위태롭다고 여겼는지 왕자의 난이 3차까지, 그리고 공주의 난이 5차까지 기록돼 있을 정도로 왕위 쟁탈전이 치열했다. 마치다 케이타는 단 한 번도 그 싸움에 끼어든 적이 없었다. 늘 조용히 난을 치고 서책을 읽으며 있는 듯 없는 듯 살고 있었다. 

사건이 벌어진 건 마치다 케이타의 친모인 후궁이 마치다 케이타의 동복동생 노보루를 황위에 올리고자 했을 때였다. 그 야욕이 수포로 돌아가 제국십가에 속하던 후궁의 친정이 구족을 멸하는 처벌을 받았고, 당시 세자였던 현 황제는 같이 끌려온 마치다 케이타가 지켜보는 앞에서 그 어미의 목에 날카로운 검을 들이민 채 화사하게 웃었다.

네가 어리석어 네 두 아들이 목숨을 잃게 되지 않았느냐
살려... 살려 주십시오.
네 아들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는 건 아직 기억하고 있느냐.
제발 살려 주십시오. 신첩은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정말로 아무것도 몰랐던 네 첫째 아들은 그저 조용히 난을 치다 붓도 제대로 내려놓지 못하고 끌려왔는데 그건 알고 있느냐.


그 후궁은 포승줄에 묶여 무릎을 꿇고 있는 동안 살려달라 빌었다고 하지만 단 한 번도 난이나 치고 서책이나 읽으며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같이 끌려나와 대전에 무릎이 꿇려진 마치다 케이타나 너무 어려 대전에 끌고 오지도 못했던 둘째 아들의 구명을 빌지는 않았다고 한다. 일찍이 제 어미에게서도 외가에서도 내쳐진 데다가 본인이 워낙 권력에 대한 욕심이 없어서 궁에서도 여기저기서 천덕꾸러기 취급이나 받고 있었다는 마치다 케이타 대신 그 후궁과 외척 가문이 허수아비 황제로 세우려고 했던 후궁의 둘째 아들 노보루는 당시 고작 4살이었다. 

너와 네 가문의 어리석음 때문에 죄없는 내 동생 둘까지 세상을 떠야 하게 되지 않았느냐. 

그런 말을 듣고도 오직 제 목숨만 살려달라 청하던 후궁이 징그러웠는지 당시 세자는 직접 후궁의 목을 가차없이 치고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들고 마치다 케이타에게 걸어갔다고 한다. 

너는 억울하게 되었구나. 

어미가 죽을 때도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있던 마치다 케이타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이미 제 어미를 죽이고 곧 저와 제 아우를 죽이려 하는 이복형을 올려다봤다고 했다.

형님.
그래, 아우야.
제 아우를 살려주십시오. 그 아이는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제 아우는 아직 글도 모르는 어린아이입니다.
내가 네 아우를 구해주면 너는 내게 무엇을 해 주겠느냐.


마치다 케이타는 한참을 말없이 잔혹한 이복형을 올려다보다가 천천히 입술을 열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형님과 대화국을 위한 검이 되겠습니다. 


그러자 직접 목을 그은 후궁의 피가 튄 폭군의 예쁜 얼굴에 아름다운 미소가 떠올랐었다고 한다. 그 얼굴은, 그리고 그 얼굴에 떠오른 화사한 미소는 주저없이 아비의 후궁 목을 직접 치는 세자의 잔혹한 모습을, 대전에 엎드린 채 직접 보면서 덜덜 떨고 있던 고관대작들도 한순간 홀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아름다웠다고. 그리고 세자는 마치다 케이타를 낳은 친어미의 피가 묻은 손으로 마치다 케이타의 뺨을 요사스럽게 쓰다듬으며 그랬다고. 

사랑하는 나의 아우.
... 형님.
네가 나의 검이 되어 화국과 나의 앞길을 닦아주는 한, 너와 우리의 귀여운 아우는 아무도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 감사합니다, 형님.


그 일이 있고 얼마 후 왕위에 오른 당시 세자, 현 대화제국의 황제 쿄스케는 어떤 의도였는지 그 일을 널리 알렸다. 덕분에 황제가 사랑하는 아우, 마치다 케이타는 대륙 전역에서 현 황제 쿄스케 다음으로 유명한 사람이 됐지만, 현 황제가 왜 난이나 치고 서책이나 읽던 마치다 케이타가 황제의 검이 되겠다는 한 그 말에 그와 그의 동복동생을 살려준다고 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전장에서 죽으라는 말이라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마치다 케이타는 처음 나간 전쟁에서 끝까지 대화국에 항복하지 않고 맞서 싸우던 나라의 군대를 모두 휩쓸어버리고 그 나라를 무너뜨렸다. 

그제야 사람들은 왜 세자가 12왕자가 그의 검이 되어주겠다고 약속하자 12왕자와 21왕자를 살려주었는지 알 수 있었다. 12왕자는 검술에 뛰어났으나 재주가 많을수록 살아남기 힘든 궁에서 끝까지 살아남기 위해서 그 검술 솜씨를 10여 년간 철저히 숨기고 살았던 것이었다. 당시 그 잔혹한 세자가 화왕국에서 아무도 몰랐을 12왕자의 검술 재능을 어떻게 알았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12왕자 마치다 케이타는 처음 전장에 나갔던 14살의 그 봄 이후 15년이 지난 지금까지 계속 전장을 떠돌며 살고 있는데. 





"제가 황제가 사랑하는 그 아우와 혼인해야 한단 말입니까?"

고작 14살이었던 12황자는 세자가 왕위에 오르고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게 된 2년 후, 16살의 나이로 등왕이라는 작위를 받았다. 잔혹한 황제는 마치다 케이타에게 그가 황제에게 충성해야 그가 사랑하는 아우를 지킬 수 있다는 걸 끝없이 되새기게 하고 싶었는지 어린 동생 노보루의 이름에 쓰이는 한자를 딴 '등'을 붙여서 '등왕'이라는 작위를 내렸고, 등왕은 어린 아우를 지키기 위해 전장에서 15년을 보내며 사신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제 대륙에 남은 다른 나라는 얼마 없고 대륙 재패는 정말로 마지막 단계만을 남겨놓고 있었는데 지금 혼인을 시키려는 이유가 뭘까. 황제가 대륙재패를 포기했을 리가 없고, 등왕은 여전히 황제의 검일 텐데. 

아버지는 다시 한숨을 쉬었지만 어차피 대화제국에서 황제의 명령을 거부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게 누군가의 일생을 좌우할 혼인이라고 해도 황제가 하라고 하면 해야 했다. 노부도 그걸 알기 때문에 그저 뺨만 긁적일 뿐이었다. 게다가 노부는 마치다 케이타를, 등왕을 잘 알지도 못했지만, 싫어하지도 않았다. 마치다 케이타는 병사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장수였고, 위험한 전술을 사용할 때는 늘 본인이 제일 앞상섰으며, 병사를 지키기 위해 제 목숨을 거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훌륭한 장수였다. 대화제국에서 가족을 전장에 보내본 백성이나 직접 마치다 케이타와 함께 전장에 나가본 이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두 형이 출정하는 것을 몇 번이나 봤던 노부도 마치다 케이타에 대해 고마워하는 마음이 컸다. 그렇지만 결혼이라니. 

"그런데 등왕은 지금 전장에 있지 않습니까?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은 걸로 아는데."

대화제국은 전쟁이 잦은 나라기 때문에 궁이나 도성의 수비를 담당하는 군 외에도 정규 군이 있었다. 그러나 정규군만으로는 그 수가 부족하고, 1년의 반 이상을 전쟁터에서 보내는 것이 병사들에게 너무 부담이 되어서 비정규 군이 따로 있었다. 평상시에는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하거나, 관청에서 일하는 이들도 일년의 몇 달간은 훈련을 받아야 하고, 또 전쟁터에 나가야 했다. 스즈키 집안에서는 노부의 큰 형이 전쟁에서 큰 부상을 입은 이후 병역 대상에서 면제됐고, 큰아들이 큰 부상을 입은 걸 보고 놀란 부모님이 급히 둘째 아들을 혼인시켰기에 둘 다 병역 면제가 된 터라 전장에 나간 사람이 없었다. 노부는 대화제국의 병역 법령에 정한 기준 때문에 원래도 면제였고. 그래서 집안에 출정한 이가 없어서 전쟁의 일정은 잘 알지 못했다. 그래도 출정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으니까 아직 돌아오지도 안았을 텐데.

그러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 집안에 단 두 명뿐인 하인 중 한 명이 후다닥 달려왔다. 

"어르신, 등왕 전하가 오셨습니다."

뭐야? 전쟁 이미 끝난 거였어? 언제 끝난 거야?

한미한 가문이라 하인도 둘 뿐이지만 그래도 손님을 맞는 방이 하나 있긴 해서 서둘러 의복을 정제하고 달려가자 벽에 걸린 그림을 바라보고 서 있는 크고 늘씬한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발 끝까지 내려오는 긴 장포가 걸쳐져 있는 어깨가 넓고 머리가 작은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방 안으로 들어가자 소리를 들었는지 남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전쟁이 많이 힘들었는지 창백한 얼굴에는 피로감이 드러나 있었고 옆 탁자에 올려놓은 투구와 마른 몸을 감싸고 있는 갑옷에는 미처 닦아내지 못한 피가 군데군데 묻어 있었다. 그야말로 사신이라는 모습이 잘 어울리는 음울하고 어두운 분위기의 남자를 본 노부는 한숨을 삼켰다. 

아직 갑옷을 그대로 입고 있잖아. 전장에서 바로 우리집으로 온 거냐고.

마치다 케이타는 노부의 얼굴을 물끄러미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스즈키 노부유키."
"네, 등왕 전하. 스즈키 노부유키입니다."
"황제 폐하의 교지는 받았소?"
"받았습니다."
"혼인 준비는 궁에서 모두 알아서 할 것이니 그대와 스즈키 가에서 신경쓸 것은 전혀 없소."
"감사합니다."
"다만, 미리 양해를 구할 일들이 있소."

마치다 케이타는 정말로 전장에서 바로 달려왔는지 자세히 보니 검집에 찬 검의 손잡이를 잡고 있는 손의 손등과 뺨 가장자리에도 피가 살짝 묻어 있었다. 이번 전장이 대륙 북부의 산악지대라고 했던가. 아주 추운 지대고 암석지대라서 돌산이기 때문에 산악지역에 익숙하지 않은 대화제국 부대가 많은 어려움을 겪을 거라 예상된 전쟁이었는데. 

노부는 마침 하인이 차를 가지고 온 걸 보며 마치다 케이타에게 다가갔다. 

"전하, 그 전에 이쪽으로 오셔서 앉으시겠습니까? 저희 집안이 다른 건 자랑할 거리가 없습니다만, 외가의 차 농장에서 나는 차가 무척 훌륭해서 차 하나만은 자랑할 만합니다."
"... 그렇소?"
"네, 일단 차를 드시지요."

눈꺼풀도 파들파들 떨리고 팔과 손가락도 덜덜 떨리고 있는데 피곤한 걸 못 느끼나? 아무튼 노부의 외삼촌이 매년 보내주시는 차가 최상급인 건 사실이고 노부 집안의 몇 안 되는 자랑거리 중 하나인 것도 맞아서 하인이 차와 찻잔을 준비해 놓은 탁자 쪽을 가리켰다. 보는 노부가 힘들 정도로 피곤해 보여서 빨리 앉히고 싶어서.

"차를 좀 드시겠습니까."
"아... 고맙소."

마치다 케이타는 차를 대접받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는지 얼떨떨하게 탁자 쪽으로 다가가 앉았고 노부가 차를 따라주자 차를 조금씩 마시며 찻잔을 비우고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맛도 향도 훌륭한 차군. 고맙소."

그때 하인이 다시 들어오자 노부는 아까 차를 가져다줄 때 하인에게 부탁했던 뜨거운 물수건을 받아들었다. 

"전하, 제가 잠시 전하의 손에 손을 대도 되겠습니까?"
"내 손 말이오?"
"네."

노부는 마치다 케이타가 순순히 내민 손을 잡아서 손등과 손가락에 묻은 피를 닦아주었는데 마치다 케이타는 피가 묻어 있는 걸 알고 있었는지 놀라지도 않았고 노부가 갑자기 손을 닦아주고 있어도 놀라지 않았다. 천덕꾸러기로 자랐다고 해도 황자는 황자라 (자랄 때는 왕국이었으니 왕자였겠지만) 남의 시중이 익숙한 모양이었다. 노부는 마치다 케이타의 손이 깨끗해진 걸 확인하고 수건을 치워둔 뒤 다시 차를 따라주었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음."

마치다 케이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 홀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니 도성에 들어오기 전에 병사들과 함께 먹고 들어왔소."
"그러시더라도 이걸 좀 드셔 보십시오. 황실에서 드시는 다과에는 못 미칠지도 모르지만 맛이 꽤 훌륭합니다."

스즈키의 둘째 형수가 종종 만드는 설기였다. 형수의 다과 만드는 솜씨는 정말로 좋았기 때문에 맛있기도 하지만 형수가 여러 모양의 틀로 찍어내는 설기떡은 모양이 예뻐서 스즈키 집안에서는 손님이 오면 자주 이 떡을 다과로 내놓았다. 마치다 케이타는 떡을 하나 먹어 보더니 차로 입을 헹구고 노부를 똑바로 바라봤다. 

"이 떡은 어디서 살 수 있소?"
"둘째 형수님께서 직접 만드신 떡입니다."
"..."
"더 있으니까 더 드셔도 됩니다. 전하."

그러나 마치다 케이타는 떡을 더 집지 않고 차만 마시고 있다가 찻잔을 내려놓더니 품 속에서 작은 상자를 하나 꺼냈다. 상자를 열자 안에는 곱게 차곡차곡 접혀 있는 깨끗한 면포가 있었다. 마치다 케이타는 면포를 펼치며 노부를 바라봤다.

"떡을 한 개만 싸 가도 되겠소?"
"... 가지고 가신단 말씀이십니까?"

설마 궁에서 밥을 안 주나? 감히 물어볼 수 없는 불경한 질문이라 노부가 혼란스러워하고 있자 마치다 케이타는 다시 말을 이었다. 

"동생에게 먹여주고 싶소."

아, 그 동생. 마치다 케이타를 죽일 뻔했고, 마치다 케이타가 살려준 21황자. 노보루. 

노부는 마치다 케이타가 펼치고 있던 깨끗한 면포를 다시 차곡차곡 접어주었다. 갑옷이 온통 피투성이가 되고 얼굴과 손에까지 핏자국이 남은 건 신경도 쓰지 않으면서 동생 먹일 걸 챙기려고 늘 깨끗한 면포를 챙기고 다니고 있는 듯한 모습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그 동생은 형이 1년의 반 이상을 전장에 나가 피웅덩이 속에서 구르는 동안 황궁에서 좋은 걸 먹고 좋은 옷을 입으며 편안하게 살고 있을 텐데. 게다가 하필이면 마치다를 죽일 뻔했고, 마치다가 황제에게 평생을 묶이게 만든 동생이라 더더욱. 

"많이 있으니까 모양이 예쁜 것들로 몇 개 싸 달라고 얘기하겠습니다. 그러니 전하도 더 드십시오."
"아... 고맙소."

마치다 케이타는 노부가 하인을 불러 설기를 예쁜 것들로 골라서 싸 달라고 하는 걸 보고서야 다시 면포를 담은 함의 뚜껑을 닫아 품 속에 집어넣고 설기를 집어먹었다. 밥을 먹었다더니 밥이 부족해서 배가 고팠는지 아니면 내어 온 음식은 다 먹는 게 습관이 된 건지 아주 조금씩 먹는 것 같은데도 접시에 소담하게 담아내놓은 떡을 부지런히 다 먹었다. 황족이라 그런 건지 궁에서 내내 외롭게 자라 그런 건지 떡을 다 먹을 때까지는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아서 노부는 멀뚱멀뚱 마치다 케이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덕분에 황제가 '사랑하는 나의 아우'라고 칭하는 왕야가 굉장히 예쁘고 먹는 모습은 무척이나 귀엽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마치다 케이타는 떡을 다 먹더니 차를 마시고 노부를 바라봤다. 

"아까 말한 대로 양해를 구할 일이 있소."
"말씀하십시오, 전하."
"황제 폐하께서 외척의 발호를 우려하고 계시므로 나와 혼인을 하면 그대와 그대의 아버지와 형제들이 전부 관직에서 물러나야 하오."

노부야 그럴 수 있다쳐도 아버지나 작은 형 모두 어차피 다 말단직인데 그럴 필요까지 있겠냐 싶었지만 대화제국에서는 황제의 뜻은 누구도 반대할 수 없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겠습니다. 그런데 큰 형님은 관직에 계시지 않고 의원 밑에서 수련을 하며 일을 돕고 있는데, 의원에서는 계속 일을 해도 될까요?"

마치다 케이타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의원으로 일해도 되오. 물론 황궁에서 생활비를 지급할 것이니 그런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감사합니다."
"그리고..."

마치다 케이타는 노부의 눈을 빤히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물론 지금은 황실에 황제 폐하의 대를 이을 황자와 황녀들이 많지만, 만약에 그 황자와 황녀들이 전부 황위를 이을 수 없게 되더라도 나나 나중에 우리 사이에서 태어날 아이는 절대로 황제가 되지 못하오. 황제 폐하가 정해두신 부분이오."

마치다 케이타는 사신이라는 별명을 달고 다니는 장수인 주제에 눈이 기이할 정도로 맑았다. 노부는 마치다 케이타의 그 맑은 눈을 빤히 바라보다가 웃었다 

"아... 다행이네요. 아니, 다행이라고 해도 되나... 아무튼 전 좋습니다."

노부의 집안은 황위 같은 것과는 정말로 아무런 연도 없었고 연을 잇고 싶지도 않았다. 왕자들의 난과 공주들의 난이 벌어질 때 노부는 어렸었기 때문에 어른들에게 들은 이야기가 전부였지만 그때 나라 전체가 얼마나 뒤숭숭했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연루돼서 죽어갔는지는 알고 있었다. 노부는 절대로 그런 상황에 끼고 싶지 않았고 나중에 태어날 노부의 아이나 노부의 가족들이 그런 일에 연루되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막말로 황제가 뭐가 좋아. 돈과 권력이 많으면 뭐하나. 그만큼 위험과 책임도 많이 따르는 자리인데. 

노부가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계속 입꼬리를 실룩거리자 마치다 케이타는 안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더 해야 할 말이 있었는지 생각하는 듯 잠깐 눈을 천천히 굴리며 말이 없다가 다시 노부를 바라봤다. 앞으로 같이 살아야 할 사람이니 이 기회에 이야기를 나눠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얼마나 피곤한 건지 사신이라 불리는 이 남자의 눈이 빨갛게 충혈돼 있었다. 

"혼례에 대해서 황실과도 이야기를 나눠봐야 하니까 아버지와 함께 조만간 황궁에 들려고 합니다. 그때 전하를 찾아뵈도 되겠습니까?"

많이 피곤하긴 한 건지 잠시 멍하게 있던 마치다 케이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떡을 먹을 땐 굉장히 귀엽긴 했지만 그 귀엽다는 게 조금씩조금씩 열심히 먹는 게 귀엽다는 말이지 귀엽게 웃거나 했다는 말은 아니라서 마치다 케이타는 내내 무표정한 얼굴이었는데 동생에게 주고 싶다는 떡을 큰 함에 담아주자 입꼬리가 올라가며 정말로 귀여운 표정을 지었다. 참, 그 동생 때문에 죽을 뻔해놓고 어지간히 동생이 예쁜 모양이네. 노부가 마뜩찮음을 감추고 마치다 케이타를 대문까지 배웅하자 따로 차를 대접받으며 쉬고 있던 마치다 케이타의 부관과 호위들도 마치다 케이타가 나온다는 말을 듣고 미리 나와서 대기하고 있었다. 

노부는 말에 올라탄 마치다 케이타의 손을 잡고 손등에 가만히 입술을 댔다. 

"조심히 돌아가시고 편안한 밤 되십시오, 전하."
"그대도 편안한 밤 보내시오."

노부는 양인이 손등에 입을 맞춰도 멀뚱멀뚱 보고 있는 엉뚱하고 귀여운 사람을 배웅하고 말이 멀어질 때까지 보고 있다가 무심코 혼잣말을 내뱉았다.

"신기하네."
"뭐가?"

고개를 돌리자 황제가 공개적으로 '사랑하는 나의 아우'라고 부르는 이를 가족으로 맞게 된 노부의 가족들이 불안한 얼굴로 서 있었다. 

"저렇게 귀여운 사람이 어떻게 대륙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사람일 거라고 회자되는지."

노부의 말에 가족들의 얼굴이 더 어두워졌다. 하지만 말을 하지 않았을 뿐 모두가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마치다 케이타가 전쟁의 신 따위로 불리지 않고 사신으로 불리는 것은 정말로 많은 사람을 죽였기 때문이었다. 황제는 그가 사랑하는 아우를 15년째 쉴 틈 없이 전장으로 내몰고 있었고, 마치다 케이타의 칼날 아래 무너진 나라들은 열 손가락으로도 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마치다 케이타는 14살에 처음으로 전장에 나가고 2년만에 4개의 나라를 무너뜨렸다. 그리고 그 후 13년간 얼마나 더 많은 나라가 그의 칼 아래 무너졌는지.... 그리고 그 전장에서 죽어간 적국의 병사들은 아마도 이미 오래 전에 만 명 단위에 도달했을 것이다. 노부는 전쟁에 나가 본 적이 없지만 마치다 케이타는 전장에서 결코 뒤로 물러나 있는 성격도 아니라고 들었다. 늘 제일 앞에서 병사들을 이끈다고. 그래서 백성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었다. 마치다 케이타가 늘 최전방에서 싸우면서 병사들을 보호해 준 덕분에 자신의 가족들이 무사히 돌아왔고, 자신이 무사히 돌아왔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러나 가족들의 표정이 어두워진 건 다른 이유였던 모양이었다. 형의 목소리가 뒤늦게 들렸다. 

"귀엽다고?"

노부가 첫째 형을 바라보자 첫째 형은 절대 동의할 수 없었는지 다시 물었다. 

"귀엽다고? 저 분이?"
"네. 걱정했는데 귀여운 분이네요. 예쁘고."

가족들은 자기들끼리 귀엽다고? 어디가? 아니, 물론 정말 좋은 분이긴 하지만 귀엽다고? 귀엽? 내내 음울하고 살벌한 분위기만 풍기고 있다가 차만 마시고 갔잖아? 뭐가 귀여운데? 떡 싸 달라고 한 게? 우리 막내 취향이 잘 먹는 음인이었어? 잘 먹는다고 하기도 뭐한 게 진짜 느릿느릿하게 먹던데? 그냥 먹는 걸 밝히는 음인이 취향이었나? 라고 하고 있었다. 

영양가 없는 이야기라 더 듣지 않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사신이라길래 걱정했는데 정말 너무 귀엽잖아? 





#사신마치다사신의반려노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