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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05 0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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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눈치가 빠른 편이라 생각했지만 레나가 자신에게 반했다는 사실은 까맣게 몰랐다. 말이 잘 통하고, 같은 포인트에 웃을 수 있는 유일한 상대여서 그저 기쁠 뿐이었다. 다른 고용인들은 남편에게 홀려 얼굴을 붉히고 말을 더듬는데 레나는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어 공과 사를 제대로 구분하는 단호한 사람이란 이미지도 박혔다. 자신을 보고 얼굴을 붉히거나 목욕 시중을 들 때 아래가 젖는다는 것은 알 리 없었다.

"사모님. 오늘 저랑 산책하러 가지 않으실래요?" 노부가 아침 일찍 친척 어른을 만나러 다른 마을에 간 날이었다. 꽤 중요한 집안 행사였지만 마치다는 만난 적도 없는 사람들이라 굳이 가지 않아도 됐다. 사실 노부가 다른 사람들에게 제 부인을 보이기 싫어 혼자 간 거지만. "알잖아. 나 밖에 나간 거 그 사람이 알게 되면 진짜 큰일 나." "그러니까 오늘이 기회죠. 사람 많지 않은 곳으로 가요. 뒷산에 진짜 예쁜 계곡이 있는 거 아세요? 주변에 꽃도 많이 피어있고 운 좋으면 다람쥐도 볼 수 있어요. 아무도 모르게 저랑 둘이 다녀와요." 마치다는 심장이 뛰었다. 그냥 체념하고 살던 일을 누군가 나서서 같이 하자고 하니 신이 났다. "다른 애들이 이르면 어떡해?" 레나가 활짝 웃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사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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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하고 첫 집안 행사인데 부인도 없이 혼자 나타난 노부를 어른들이 못마땅하게 봤다. "어릴 때부터 청개구리 짓만 하더니 결혼하고도 달라진 게 없구나." 집안 어른들에게 알리지도 않고 혼인을 할 때부터 알아봤다고, 아버지가 물려주신 온천을 멋대로 리모델링해 요즘 식으로 바꿔둔 게 웃기지도 않는다고, 혼잣말처럼 허공을 보고 중얼대는 말들이 노부의 귀에 쏙쏙 들어왔다. 그렇다고 대들 수는 없었다. 그럴 필요도 없고. 그냥 정해진 자리에 앉아 적당한 시간이 흐르기만 기다렸다. 임신한 사촌 형수가 노부 앞에 과일 접시를 내려놓으며 신혼 생활이 즐겁냐고 물어왔다. 두 번 정도 대화를 나눠 본 게 전부였지만 살가운 사람이었다. "예... 뭐 그냥..." 혹시라도 아이를 갖게 되면 자신에게 꼭 알려달라는 말을 남기고 형수는 다시 부엌으로 사라졌다. 이 사람들도 분명 다 가족인데 어서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집에 있는 고양이 두 마리는 꼭 찌그러진 것처럼 못생겼더라고 케이에게 말해 줄 생각에 바보같이 혼자 웃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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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뒤로 발라당 누웠다. 높게 달린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눈부셨지만 눈을 감고 싶지 않았다. 레나는 예쁜 돌멩이를 주워다가 마치다 배 위에 하나씩 올려뒀다. "더우세요?"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손부채질로 식혀주며 레나가 물었다. "그래도 물이 시원해서 괜찮아. 넌 여기 자주 와? 혼자?" "가끔 와요. 혼자 올 때도 있고 시간 맞는 애랑 올 때도 있고." 마치다는 고용인들에 대해 잘 몰랐다. 가장 가깝게 지내는 레나 외에는 사실 이름도 모르는 고용인이 다수였다. "남자들 중에 마음에 드는 사람 없어? 저번에 보니까 정원 관리 하는 남자애랑 친해 보이던데." 레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을 저었다. "네? 전혀요! 걘 오히려 사치코랑 친하죠. 둘이 남몰래 사귀고 있을지도 모르고. 동갑이거든요." 사치코. 부엌에서 일하는 어린 여자애였다. 이름을 기억하고 있던 건 아니지만 오며가며 들었던 것 같다. "사치코... 내 남편 좋아하는 것 같던데." "사모님 정말!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세요! 그리고 그 애가 가당키나 해요? 솔직히 말하면... 워낙 인물이 좋으시니까 어린 마음에 반할 수는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사모님이 신경 쓰실 거 하나도 없으세요." 그런 어린애 따위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쯤은 알았지만 레나가 직접 말해주니 더 마음이 놓였다. "사모님은 발도 예쁘세요. 제가 주물러드릴까요? 저 마사지 잘하는데." 마치다는 물 밖으로 발을 꺼냈다. 야무진 손이 발등과 발바닥을 주무르고, 살짝 내리깐 속눈썹은 떨리고 있고, 아랫입술을 꽉 깨무는 얼굴은 뭔가 묘해 보였다. "레나, 난 네가 우리 집에서 오래 일했으면 좋겠어. 네가 온 뒤로 너무 즐거워." 활짝 웃으며 고맙다고 말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고개를 숙여 당황했다. 귀 끝이 새빨갛게 익어가는 게 육안으로 보였다. 갑자기 계곡물에 얼굴을 담그고 요란하게 세수를 하는 바람에 레나의 눈물을 보지는 못했다. "너도 엉뚱한 구석이 있구나." 마치다는 그냥 순진하게 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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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가 집에 돌아왔을 때 마치다는 소금이를 안고 자고 있었다. 소파에서 웅크린 채로. "케이, 저녁 먹었어요? 과일 좀 사 왔는데." 겨우 눈을 뜨고 기지개 켜는 모습에 노부가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 뒤에서 레나도 몰래 미소 지었다. "종일 뭐했어요. 난 당신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는데." 소금이가 괜히 노부의 손등을 밟고 발톱을 내놨다. "이놈이. 왜 나한테만 이래." 마치다는 아직도 소금이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남편이 안쓰럽기도, 귀엽기도 해서 작은 고양이를 장난스럽게 나무랐다. "오늘 당신 기분이 좋아 보이네요. 좋은 일 있었어요?" 옷 속으로 손을 넣으며 소파 위에 포개 눕는 모습을 레나가 빤히 쳐다봤다. 저 손이 내 손이라면, 내가 사모님의 몸을 더 친밀하게 만질 수 있다면, 흉물스러운 남자 성기 따위가 아니라 부드럽고 촉촉한 내 아랫입을 사모님의 것과 맞댈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레나가 이런 생각을 하는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부부는 좁은 소파에서 사랑을 나눴다. 마루 바닥으로 노부가 사온 자두 몇 알이 굴러떨어졌다.

사모님의 아래는, 저 자두보다 물이 많지. 내가 봐서 알아. 매일 밤 소리로 들어서 알아. 레나는 눈을 감고 마치다에게서 나는 모든 소리와 향기를 남몰래 느꼈다.






노부마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