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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나게 놀고 왔더니 숙소 앞에 에어컨 설치 기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노부는 능숙하게 기사를 안으로 들여 에어컨 위치를 정했고 마치다는 불편한 표정으로 비켜 서있었다. 이 상황이 불편한 이유는 한 가지가 아니었다. 우선 기숙사 건물에 뭔가 설치할 때는 예산를 따져 봐야 하고, 결재도 올려야 한다. 그리고 방 주인인 본인은 더위를 별로 타지 않기 때문에 에어컨이 필요 없었다. 그리고 또 하나. 가장 큰 문제는 에어컨 설치가 40분은 걸리는데 5분 뒤면 다큐가 시작한다는 것이다. 펭귄의 사회. 노부는 설치 기사가 있어도 편하게 보라고 하지만, 일단 불을 끌 수도 없고 벽을 타공하는 소음 때문에 당장 노부의 말 소리도 제대로 안 들렸다.

-그럼 내 방에 가있을래요? TV는 없지만 적어도 시끄럽진 않을 테니까.
-됐어.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떡해.

결국엔 109호로 내려가는 걸 선택했다. 노부는 사감 숙소에 남아 설치 과정을 살폈다. 딱히 넉살이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마치다의 방을 활짝 열어두고 내려갈 수는 없었다.

당연히 노부의 권유로 들어온 거지만, 남의 물건에 둘러싸여 있으니 뻘쭘했다. 창 밖은 어둑했다. 바로 내려다보이는 쓰레기장 앞에서 학생 몇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고 여자 기숙사 뒤편에선 커플로 보이는 남녀가 공놀이를 하고 있었다. 창문이 있으면 이렇게 남들 뭐하는지 맨날 구경해도 재밌겠네. 하지만 내 방은 창문이 없어서 좋아. 맨날 이렇게 바깥만 내다 보면 할 일을 못 하잖아. 사무실에서 퇴근하면 오후 5시 부터는 딱히 할 일이랄 게 없긴 해도.

똑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 마치다는 의심 없이 문을 열었다. 하지만 문 밖에 서있는 건 노부가 아니라 어떤 여자였다. 아, 그때 그 동생.

-여기 109호 아니에요? 맞는데...
-노부유키는 잠깐 위층에 있어요. 들어와요. 아, 근데 사실은 여자 출입 금지거든요... 어쩔 수 없지. 그냥 들어 와요.

오빠 방에서 오빠가 아닌 사람이 자신을 맞이하는 게 어색한지 동생은 쭈볏쭈뼛 핸드폰을 꺼냈다.

[오빠 어디야?? 방에 어떤 아저씨 있는데??]
[너 왜 왔어 연락도 없이. 잠깐 기다려.]
[오빠가 집에도 안 오고 전화도 안 받으니까 자꾸 엄마가 가보라고 하잖아. 누군 오고 싶어서 오는 줄 알아? 쉰내 나는 남자들 기숙사 같은 거 나도 싫다고.]
[아저씨 아니야. 나랑 두 살밖에 차이 안 나.]
[그러니까 아저씨지. 오빠가 나랑 열 살 차이인데. 아 빨리 오기나 해.]

괜히 옷으로 안경 알을 닦으며 아무 생각 안 하는 척 해보지만 머리 속이 복잡했다. 저 여자애는 자기 오빠가 남자랑 사귀는 거 알까? 만약 안다면 지금 내가 자기 오빠랑 사귀는 사람이란 것도 눈치 챘겠지? 혹시 그 열 명의 전 애인들도 다 봤으려나. 내가 자기 오빠한테 어울리는 사람인지 아닌지 점수 매기고 있을까. 되게 어려 보이는데 늦둥이인가. 혹시 동생이 일곱 명쯤 있는 건 아니겠지. 잠시 뒤 노부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동생은 서서 심술 가득한 얼굴로 자길 쏘아 보고, 기숙사 사감이자 남자친구인 마치다는 의자에 앉아 느릿느릿 안경알을 닦고 있었다. 정말 조화롭지 않은 장면이었다.

-여기 여자 오면 안 된다니까.
-아 아는데 오빠가 라인을 씹으니까 그렇지.
-너 케이한테 인사 했어?
-뭐. 이 아저씨?

아, 아저씨구나. 마치다는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했어. 오빠는 방에 안 있고 어디 있다 오는 거야?
-여기 기숙사 사감님이셔.

아, 남자친구 아니고 사감이구나. 또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저번에 나가라고 뭐라고 했잖아.
-케이 미안해요. 얘가 어려서 뭘 몰라 그런 게 아니고 정말 버릇이 없는 애라 그래요. 어리기도 하지만. 그래도 열아홉이면 다 컸는데 이렇게 싸가지가 없어요. 케이가 참아요.

참지 않으면 내가 뭘 어째. 마치다는 남매 사이에 끼어 어떤 포지션을 취해야할지 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올라가 볼게. 동생이랑 얘기해.
-나도 곧 올라갈게요.
-안녕히 가세요.
-아 예...

제 3자가 나간 뒤 동생은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저 아저씨 뭐야?부터 시작해 전화 좀 씹지 말던가 집에 한 번 오던가 엄마한테 답장이라도 하라고 비눗방울 불듯 마구마구 잔소리를 쏟아냈다.

-아빠가 빨리 결정하래.
-아니, 그게 내가 지금 정한다고 바로 되는 것도 아니고 시간이 걸리는데 뭐가 그렇게 급해.
-시간이 걸리니까 지금 확답을 달라는 거지! 어차피 이사장 자리야 다 돈으로 먹는 거니까 삼촌 다음에 오빠가 이어도 이상할 거 없다잖아.
-나 이제 1학년이다.
-그러게 누가 늙어서 대학 가래?
-애초에 일단 다녀보고 안 맞으면 관두기로 하고 온 거야. 이제 1학년 1학기인데. 이게 나한테 맞는지 아닌지도 모르는데 이사장을 할지 말지까지 어떻게 아냐?
-그럼 이 생각을 엄마 아빠한테 말 하라고.
-네가 가서 전하면 되잖아.
-언제까지 내가 비둘기 역할 해줄 것 같아? 나도 몇 달 뒤면 유학 가고 여기에 없어. 그 전에 제발 화해 좀 해. 중간에서 나만 들들 볶지 말고.

화해랄 게 있나. 아들이 호모 새끼라 겸상도 하기 싫다는 분이랑. 노부는 동생에게 택시비를 쥐어주고 방 밖으로 밀어냈다. 경영 대학 4년 졸업, 비지니스 심화 코스 2년 수료. 서른 다섯이나 돼야 이사장 자리에 앉을 수 있다는 건데, 그 전에 관둘 확률이 더 크다. 이렇게 복잡한 일을 어떻게 지금 당장 정하라는 건지. 아버지는 이렇게 고리타분한 사람이다. 예스 아니면 노. 둘 중 하나만 있다고 믿는 사람. 그러니 여자랑도 사귀고 남자랑도 사귄다는 말에 재떨이를 던졌지.

-케이... 아직 다큐 하죠?
-다 끝났어. 펭귄 사회 진짜 재밌었대.
-누가요?
-다큐...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트 있어.
-다큐 오타쿠 커뮤니티 하는구나.
-내가 정말 싫어하는 말을 그렇게 순수한 얼굴로 하면 내가 널 욕할 수가 없잖아? 동생은... 갔어?
-네.
-데려다 주지. 어두워졌는데.
-걔가 싫어해요. 이제 고등학교 막 졸업해서 날 아저씨 취급하거든요. 케이한테도 아저씨라고 한 거 봤잖아요.
-난 아저씨 맞지 뭐. 30대인데.

노부는 자연스럽게 리모컨을 들어 에어컨을 켰다.

-추운데...
-내가 안 춥게 해줄게요.
-미, 미친 소리 하지 마...
-아... 그냥 이불 주려고 한 건데.
-내가 연애 경험 없다고 했지? 그러니까 나한테 욕 먹을만한 짓 하지 마. 오해하게 하지 말라고. 놀리지도 말고 놀라게 하지도 마. 알았어? 특히 말장난 하지 마. 바보 취급 받는 거 진짜 싫으니까.

이불을 끌어다가 마치다 어깨에 둘러주며 노부는 뭐가 그리 좋은지 깔깔대고 웃었다.

-케이가 말 많이 하니까 너무 좋아요.
-나 유튜브 볼 거니까 너 TV 보고 싶은 거 봐.
-유튜브로 뭐 보게요?
-펭귄 사회 편집본...
-와...
-한 시간짜리 영상을 18분으로 압축한 건데 뭐가 와야! 너 때문에 못 본 건데.
-알겠어요. 앞으로는 7시 절대 사수할게요...

톡 튀어나온 입술을 한참이나 쳐다 보던 노부는, 핸드폰 화면만 들여다 보고 있는 마치다의 턱을 잡고 자기 쪽으로 돌렸다. 

-뽀뽀해도 돼요?
-뭐?
-놀라게 하지 말래서 먼저 물어보는 거예요.
-......

대답이 없길래, 노부는 그냥 입술을 포갰다. 마치다는 언제 입술을 떼야할지 몰라 쭉 대고만 있다가 갑자기 몸을 요란하게 떨었다.

-왜, 왜 그래요.
-춥다고 했잖아...! 에어컨 꺼.
-아 아직 안 시원해졌는데..
-네 방에 가. 
-알았어요. 끌게요. 이제 여기에서 살 거니까 가라고 하지 마요. 나 여기에 눌러 앉으려고 에어컨 설치한거라고요.

마치다는 침대에 풀썩 엎드려 핸드폰에 거의 얼굴을 묻었다. 하아, 뽀뽀 한 번에 서버렸다. 들키면 진짜 변태 아다 호모 사감으로 볼 테니까 가라앉을 때가지 엎드려 있어야지. 노부도 옆으로 와 비좁은 틈에 함께 엎드리며 마치다의 마른 어깨에 뺨을 기댔다.

-섰죠.
-......
-귀여워요 진짜.
-말 걸지 마.

언제 만지게 해줄까. 노부는 속으로 아쉽게 입맛을 다셨다. 






노부마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