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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24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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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지고 보면 다 누명인데... 이릉노조 입장에선 억울할 법도 하지."
"하지만 운몽의 강 종주도 모르고 한 일이잖아."
"이제 와서 화해할 순 없는 거겠지?"
"자네 같으면 자넬 죽인 사람이랑 화해할 수 있겠어? 당장에 멱살을 잡아도 시원치 않을 판에..."
"나였다면 똑같이 갚아줬을 거야. 이릉노조는 정말 대인배네..."
채의진에서 수애와 머리장식을 고르던 사윤은 비단 머리끈을 보며 한참이나 고민하더니 붉은색 머리끈을 골라집었다. 제 모친에게 선물하면 분명 기뻐할 거라 기대하며 옆에 있던 산호 장식을 집어들어 수애의 땋은 머리에 꽂아준 사윤은 주인에게 값을 치르고는 몰래 천자소도 가지고 들어갈 생각으로 주점으로 향하다 사람들이 무선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는 걸 듣고 말았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모친이 살아돌아왔지, 제 정인과 화해하여 꿀이 뚝뚝 떨어지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으니 사윤은 제 어미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선문에 이릉노조를 운몽의 강 종주가 죽였음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사악한 마귀 이릉노조의 심장에 삼독성수를 꽂아넣고 불야천 절벽 밑으로 떨어뜨린 영웅담의 주인공이 바로 강징이었고 그 이릉노조가 어미인줄 몰랐을 때 어린 마음에 사윤은 이야기 속 주인공을 동경하였었다. 하지만 이릉노조가 제 모친이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었음을 다 알고 있는 지금 사윤에게 강징은 그저 불구대천의 원수였다.
"이만 돌아가자."
"갈 곳이 있어. 먼저 돌아가."
"어딜?"
"운몽."
사람들이 떠드는 얘기 귀담아 듣지 말라며 사윤을 잡아끌던 수애는 그가 제 손을 거세게 뿌리치자 불길한 예감이 엄습해왔다.
"운몽엔 왜?"
"내가 그간 단꿈에 젖어 잊고 있었어. 모친이 어떻게 죽었는지."
"그래서? 복수라도 하겠다는 거야?"
"그래. 모친은 마음이 약해 없던 일로 치부하시는 것 같지만 난 그럴 수 없어. 그러기엔 모친이 너무 불쌍하잖아."
"강 종주님은 선문의 명수사야. 네가 상대하기엔..."
"상대가 강하면 부모의 원수라도 참으라는 거야? 상관 없어, 그 사람이 얼마나 강하든."
"네가 다칠까봐 걱정하는 거잖아! 싫어. 네가 다치는 거. 그러니까..."
"그러니 따라오지마. 나도 네게 그런 모습 보이기 싫어."
"남사윤!"
수애가 말려보아도 사윤의 뜻은 완고했다. 어검하여 운몽으로 향하는 사윤을 바라보며 그를 뒤따라가야 할지 이를 어른들에게 알려야할지 고민하던 수애는 이내 운심부지처로 향했다.
"위 선배! 위 선배!"
운심부지처의 수사들은 함부로 영죽당에 발을 들여놓아선 안된다는 금기를 깨고 수애는 대문을 부술 기세로 뛰어들어와 무선을 찾았다. 한낮의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망기가 영죽당 연못에 심어준 연꽃이 싹을 낸 것을 구경하던 무선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뛰어들어오는 수애를 보며 본능적으로 사윤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알아챘다.
"아윤에게 무슨 변고라도 생긴 것이야?"
"남사윤이 지금 운몽으로 갔어요."
"운몽? 운몽엔 왜?"
"위 선배의 복수를 하겠다고..."
수애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무선은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였다. 망기가 무선의 누명을 풀어주어 그가 무고함을 선문 사람들이 전부 알게 되었으나 무선이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선 여전히 망기와 무선 그리고 강징만이 알고 있었다. 강징이 사윤을 해치지 않을 거라 믿고 있었지만 행여나 사윤이 경거망동하여 다치기라도 할까 걱정이 된 무선은 곧장 망기의 서재로 달려갔다.
"남잠!"
"위영!"
무선이 금방이라도 울 것같은 표정으로 품에 안겨오자 깜짝 놀란 망기는 자초지종을 물었다. 사윤이 제 죽음에 오해가 있어 강징에게 복수를 하겠다며 연화오로 향했다는 무선의 얘기에 망기는 아이를 데려와 잘 타이르면 될 일이라며 무선을 진정시켰다. 망기와 무선 그리고 수애가 사윤을 데려오기 위해 연화오로 향하는 사이 사윤은 이미 그곳에서 소란을 부리고 있었다. 남가의 도련님께서 종주를 만나뵙겠다며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부사의 말에 강징은 오늘과 같은 날이 올 것이라 예상했다는 듯 덤덤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사윤이 기다리는 연무장으로 향했다. 선문의 자제라면 다른 가문의 선부를 방문할 시에 함부로 검을 빼어들지 않는 것이 예의임을 걸음마 뗄 적에 배우니 사윤도 이를 잘 알고 있었지만 눈앞에 부모의 원수를 두고 있는 와중에 그가 예의범절 같은 걸 따질 리가 없었다.
"이게 무슨 소란이냐?"
강징을 발견한 사윤이 제 고금을 소환해 무작정 현살술을 날렸으나 강징은 별것도 아니라는 듯 자전으로 그의 공격을 막아냈다. 고소 남씨의 현살술이 얼마나 강한 살상력을 가지고 있음을 모르는 바가 아닌 강씨 수사들은 그가 진심으로 강징을 죽이려 함을 알고 사윤을 애워쌌다.
"그냥 두거라. 내가 이깟 애송이 하나 감당하지 못할 것 같으냐?"
"하지만 종주님 이 녀석은..."
"이릉노조의 아들이지."
"예, 그 이릉노조의 아들이지 않습니까. 만약 이 아이도 사도를 쓸 줄 안다면 이곳에 있는 저희 모두 무사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 녀석은 사도를 쓸 줄 모르니 걱정할 것 없다."
"고소 남씨에서 숨겼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지난 십육 년간 이릉노조의 자식인 것도 숨겨왔는데 무슨 비밀이 또 있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설령 이 녀석이 사도를 쓸 줄 안다고 해도 내 상대가 되는 것은 아니다."
부사의 만류에도 강징은 사윤을 애워싼 수사들을 물리고 그의 앞에 섰다.
"무슨 일로 온 것이냐?"
"제가 무슨 일로 왔는지는 강 종주님께서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제와 네 어미의 복수라도 하겠다는 것이야?"
"아무것도 모르고 강 종주님께서 이릉노조를 척결하였음을 동경하였던 제가 끔찍하게 싫습니다. 저를 낳아준 이가 누군지 몰랐을 때 그저 모친께서 운몽 강씨의 사람이었다는 부친의 말을 듣고 막연히 강 종주님을 좋아하던 때를 떠올리면 제 뺨을 내리치고 싶은 심정입니다. 억울하게 누명을 쓴 모친을 사지로 몰아내고, 그 심장에 칼을 꽂고, 절벽 아래로 떨어뜨려 죽인 이를 지금껏 웃는 낯으로 대했다 생각하니 치가 떨릴 지경입니다."
"네 아비와 어미가 그리 말하더냐? 내가 이릉노조를 죽였다고?"
"선문에 강 종주께서 이릉노조를 죽였음을 모르는 이가 있습니까? 오해가 풀렸음에도 모친에게 속죄조차 하지 않으니 제가 대신해서 원수를 갚을 것입니다."
속죄조차 하지 않는다는 사윤의 말에 강징은 얼굴에 조소를 띠었다. 속죄도 기회를 주어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가. 무선은 과거의 일은 말 그대로 지나간 일이라며 모두 덮어둔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가버렸다. 저만 과거의 고통 속에 가둬둔 채로 떠나가버린 무선이 원망스러워 미워하고 싶어도 미워할 수 없는 강징은 차라리 그가 제게 화를 내고 예전일을 들먹이며 욕이라도 실컷 하길 바랐기에 무선을 대신한 사윤의 분노가 쏟아지자 되레 마음이 편해졌다.
"원수를 어찌 갚을 것이냐? 날 죽이기라도 할 것이야?"
"못할 것도 없습니다."
"그럼 어디 한 번 해보거라."
타고난 자질이 훌륭하고 실력이 출중하다 한들 노련한 수사의 연륜을 뛰어넘기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사윤이 기를 쓰고 달려들어도 그의 검날은 강징의 옷깃 한 번 스치질 못하니 악에 받친 사윤은 다시 한 번 고금을 소환해 제 영력을 모두 실어 현살술을 날렸다. 젊고 어린데다 선문의 명수사인 아비와 어미를 닮아 영력이 차고 넘치는 사윤이 그 힘을 모두 실어 날린 일격이었으니 이번만큼은 강징도 감당해내기 어려웠다. 사윤의 현살술을 막기 위해 강징은 있는 힘껏 자전을 내리쳤고 덕분에 공격은 피했으나 자전은 기세가 꺾이지 않아 무시무시한 속도로 사윤을 향해 날아갔다. 방금 전의 일격으로 제 영력의 대부분을 소비한 사윤이 자전을 맞았다간 자칫 목숨을 잃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전의 흉흉한 기세에 피할 생각도 못하고 얼어붙은 사윤은 그대로 죽는 줄로만 알고 눈을 질끈 감았으나 푸른 검광이 날아와 사윤의 목전에서 자전을 튕겨냈다.
"아윤! 괜찮은 것이냐?"
피진을 검집에 집어넣은 망기는 제일 먼저 사윤이 무사한지부터 살폈다. 강징이 공격을 막아내기만 할 뿐 진심으로 상대할 생각이 없었기에 제 아들이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음을 알고 있는 망기는 이 일에 대해 강징을 책망하지 않았다.
"아윤, 어째서 이런 일을 벌여? 다치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다시는... 다시는 이러지 마. 알았지? 다시는 이리 무모하게 굴지 않겠다고 나와 약조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사윤이 다치기라도 할까봐 무선은 걱정스런 마음에 아이를 다그쳐봤지만 사윤은 그저 분하다는 듯이 소리를 내질렀다.
"아윤!"
망기의 호통에도 사윤은 제 잘못을 인정하긴 커녕 억울함을 호소했다.
"저 자가 모친을 죽였잖아요! 모친이 대체 무슨 잘못을 했기에 그렇게 죽어야 했는데요? 그리고 저는 무슨 잘못을 하여 어미 없는 자식이라 손가락질 받으며 자라야 했는데요? 모친의 억울함을 풀어주려 한 것이 그리 잘못한 것입니까? 지난 십육년간 부친과 제가 받은 고통을 되갚아주는 것이 그리 잘못된 것입니까?"
"아윤, 그만해!"
무선의 만류에도 사윤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제게서 어머니를 빼앗아갔어요. 그때 저는 고작 갓난아기였을 뿐인데... 이는 모친을 위한 복수이자 제 원한을 갚는 것입니다. 말리지 마세요."
사윤이 다시 제 검을 쥐고 강징에게 향하려 하자 무선은 그의 앞을 막아섰다.
"날 죽인건 강징이 아니야."
"그리 말하신다해도 믿지 않아요. 세상 사람 모두가 운몽의 강종주가 이릉노조를 죽였다한 걸요."
"그 날 내 죽음에 대해 아는 것은 오로지 남잠과 나 그리고 강징 뿐이야. 내 죽음을 본 것은 남잠과 강징 두 사람이 전부고 다른 이들은 본 적도 없는 일을 지어내 맘대로 떠드는 거야."
"저 자가 아니면 대체 누가 모친을 죽였다는 건데요?"
사윤의 물음에 무선은 대답을 망설였다. 사윤의 등 너머로 망기는 고개를 내저으며 진실을 묻어둘 것을 청했으나 언제까지고 비밀로 할수도 없는 일이었다.
"위무선, 무슨 얘길 하는 거지? 그날 널 죽인건 나다. 나 때문에 네가..."
"입다물어. 네가 언제 날 죽였다는 거야?"
그날 무선의 죽은 것이 자신 때문이라 여겨왔기에 강징이 스스로의 책임을 묻자 무선이 그의 말을 막았다. 결과가 어찌 되든 무선은 이 일을 제 손으로 매듭지어야 했다.
"그날 날 죽인 건 나야."
"모친...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내가 스스로 절벽에서 몸을 던졌어. 내 손을 붙잡은 남잠의 손을 내가 뿌리쳤어. 오롯이 내 뜻이었고 내 의지였어. 날 죽인 건 강징이 아니야. 십육년 전에... 불야천에서 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거야."
무선의 말에 사윤은 믿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등 뒤의 망기를 바라보았다. 망기가 비통하다는 듯이 두 눈을 감고 아무 말이 없자 무선이 한 얘기가 전부 사실임을 깨달은 사윤은 한 걸음씩 무선에게서 멀어졌다.
"아윤..."
"왜 그랬어요?"
"미안해... 아윤..."
무선이 제게 다가오자 사윤은 검을 들어 무선이 더는 제게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막아섰다.
"어떻게 그래요? 어떻게 그럴수가 있어요?"
"그땐 내가 제정신이 아니어서... 너무 슬프고 원통해서 내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어..."
"세상 어느 부모가 자식을 버리고 목숨을 끊어요? 절벽에서 뛰어내리겠다 마음 먹기 전에 단 한 번이라도 내 생각은 하긴 했어요? 내가 기다리고 있었는데... 내가 기다리는데 어떻게 그래요? 난 대체 모친한테 뭐였어요? 모친이 살아야 할 이유에 난 없었던 거예요?"
"아윤, 내가 잘못 생각해서 돌이킬 수 없는 짓을 벌였어...내가 어리석었어. 다 내 잘못이야."
"부친이 나를 찾지 못했다면, 만약 하루라도 늦었다면 난 죽었을 거예요. 난장강에 버려진 채로 사추 형장도 나도 죽었을 거라고요! 모친이 날 버린 줄도 모르고 모친이 돌아오길 하염없이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죽었겠죠!"
"아니야, 아가. 널 버린 게 아니야..."
"이해할 수 없어요. 이해하고 싶지도 않아요! 모친은 날 버린 거예요. 알겠어요? 모친은 날 버린 거라고요!"
무선이 계속해서 제게 다가오려하자 사윤은 막무가내로 검을 휘둘렀다. 행여나 무선이 다칠까봐 망기가 피진으로 사윤의 검을 쳐내자 그의 패검이 멀리 나가 떨어졌다. 사윤은 자리에 주저앉아 땅바닥을 주먹으로 마구 내리치며 어린 아이마냥 울음을 터트렸다.
"아윤, 돌아가자."
망기가 사윤을 일으켜 세우려했지만 사윤은 그 손길마저 뿌리쳤다. 다 알면서도 지금껏 그 사실을 얘기해주지 않은 제 부친까지 원망스러운 탓이었다.
"돌아가지 않아요. 두 분과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그럼 어디로 갈 생각이냐?"
"어디든 상관 없어요. 모친이 없는 곳이라면 어디든... 지금은 모친과 함께 있고 싶지 않아요."
무선은 서럽게 울어대는 사윤을 보며 그를 끌어안고 달래주고 싶었으나 원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사윤이 저를 바라보자 감히 다가가지 못하고 애를 태웠다. 망기가 억지로 사윤을 데리고가려 하니 이번엔 강징이 망기를 사윤에게서 떼어냈다.
"두고 가."
"강만음."
"연화오에 머무르게 할테니 일단은 돌아가."
"신경 꺼."
"억지로 데려가려다 찾지도 못하는 곳으로 도망쳐버리면? 예전에도 넌 네 자식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찾지 못했잖아."
강징의 말대로 억지로 끌고가려다 사윤이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도망치기라도 한다면 더 큰 일로 번질지 몰랐다. 하루 아침에 해결할 일도 아닌데다 무선과 사윤 모두 감정이 격해져 당장에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라 망기는 강징의 말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제가 곁에서 지켜볼게요. 걱정말고 일단 돌아가세요. 마음을 추스리고 나서... 그때 얘기해도 늦지 않아요."
"부탁하마."
그나마 수애가 곁에 있겠다는 말에 안심이 된 망기는 무선을 데리고 검에 올랐다. 무선은 사윤을 두고 가지 않겠다 버텨보았지만 사윤은 무선이 저를 불러도 돌아보지도 않고 무작정 어릴적 강씨 제자들과 뛰어놀던 들판으로 뛰어갔다. 행여나 사윤이 나쁜 마음을 먹기라도 할까봐 걱정이 된 수애가 그 뒤를 따르고 망기는 무선을 잠시 기절 시키고는 그를 품에 안고 운심부지처로 돌아갔다. 한바탕 소란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남겨진 강징은 부사에게 사윤과 수애가 머무를 전각을 내어주라 명하고는 지끈 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서재로 돌아갔다.
"남잠... 아윤은?"
잠에서 깨어난 무선은 제일 먼저 사윤을 찾았다. 망기가 고개를 내젓자 무선은 그의 품에 안겨 설운 눈물을 뚝뚝 흘려댔다.
"남잠, 아윤이 영영 나를 보지 않겠다하면 어떡해?"
"아윤도 놀라고 경황이 없어 그랬을 거야."
"내가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어..."
"위영."
"아무리 슬프고 괴로워도 그러지 말았어야 했어. 아윤의 말대로 네가 하루라도 늦었으면 아원도 아윤도 무사하지 못했을 거야. 나 때문에 아윤까지 죽을뻔 했어. 내가 지켜주겠다고 했는데... 무슨 일이 있어도 아윤은 나처럼 자라지 않게 하겠다 맹세 했는데 내가 그 맹세를 어겼어. 내가 내 손으로 내 아이를 버렸어. 그러면서 뻔뻔하게 아윤에게 어미 소리를 들으려했으니 이제야 벌을 받는 거야."
"위영! 어찌 그런 말을 해?"
"아윤이 얼마나 슬플지 감히 상상도 못하겠어... 가서 안아주고 싶어, 눈물을 닦아주고 싶어... 그런데 아윤이 원치 않을테니 그리 할수도 없어..."
"수애가 곁에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마. 강만음이 아윤을 돌봐주겠다하였으니 허튼 짓은 하지 못할 것이야."
무선이 어찌나 구슬피 울던지 영죽당 담장 너머까지 그 소리가 들려와 고소 남씨의 어린 제자들은 걱정스런 마음에 담장을 떠나지 못했다. 한참이 지나 망기가 정실에서 나오자 다른 아이들은 전부 눈치가 보여 이리저리로 흩어지고 사추만이 홀로 자리를 지키고 서서 단정하게 망기에게 인사를 올렸다. 사추가 무선을 걱정하는 마음을 모르지 않기에 망기는 사추에게 가까이 오라 손짓하였다.
"함광군."
"음."
"위 선배는..."
"이제 울 기운도 없는 모양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게도 말씀해주세요. 어찌 저리 서럽게 우신단 말입니까?"
"아윤이 십육년 전 불야천에서의 일을 알게 되었다."
"무슨 일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제 어미가 저를 두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음을 알고 말았어."
세간에 이릉노조는 강 종주의 손에 죽었다 알려졌으니 사추 또한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음을 몰랐던 터라 더는 말을 잇지 못하였다.
"아윤이 크게 상심하여 제 어미를 보고 싶지 않다하더구나. 하는 수 없이 운몽에 두고 왔다."
"이제 어찌하실 작정이십니까?"
"나도 모르겠다... 어찌해야 할지..."
이제 겨우 기력을 되찾은 무선이 하루종일 울기만 하다 다시 쇠약해 지기라도 할까봐 망기의 근심은 갈수록 깊어져만 갔다. 무선이 매일 밤낮을 눈물로 지새우는 동안 사윤은 강징이 내어준 전각에서 머물며 어쩔 땐 연무장에서 마구잡이로 검을 휘두르고 또 어쩔 땐 손에 피가 나도록 활을 쏘다 제 풀에 지쳐 돌아오곤 했다. 그럴 때마다 수애가 상처에 약을 발라주었으나 먼저 난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새로운 상처가 생기니 그의 손은 성할 날이 없었다.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더니 연화오에서의 소란은 수선계에 곳곳에 퍼져나가고 뒤늦게 그 소식을 전해들은 금릉은 사윤을 만나기 위해 운몽을 찾았다.
"한심하기 짝이 없네."
"시비를 걸려고 온 것이라면 꺼져."
"영영 검을 들지 않을 생각이야? 상처가 곪아 손을 쓰지 못하는 지경이 되길 바라기라도 하는 건가?"
"꺼져! 꺼지라는데도!"
사윤이 거세게 금릉을 문밖으로 밀쳐냈지만 금릉은 아랑곳 않고 다시 그의 침소에 발을 들여놓았다.
"벌써 난릉까지 소문이 난 모양이지? 이릉노조가 제 자식을 버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내 꼴을 구경이라도 하러 온 거야?"
"그래, 얼마나 우스운 꼴을 하고 있는지 보러 왔어. 멍청하긴..."
"누구더러 멍청하다는 거야?"
"죽은 모친이 다시 살아돌아오는 다신 없을 기회를 얻었으면서 제 발로 그 기회를 차버렸으니 멍청하단 소리가 안나오겠어?"
"필요 없어, 날 버린 사람 따위... 다신 보고 싶지 않아."
사윤의 대답에 금릉은 미간을 잔뜩 구기더니 사윤의 멱살을 잡고는 있는 힘껏 그의 뺨을 내리쳤다.
"정신 차려, 남안지. 배부른 소리 좀 그만해. 그날 불야천에서 모친을 잃은 건 너나 나나 똑같은데 넌 적어도 모친이 다시 돌아왔잖아. 넌 적어도 네 모친의 품에 다시 안길 기회를 얻었잖아. 나라면... 나였다면 절대 너처럼 굴지 않아. 절대 모친을 슬프게 하지 않았을 거야."
금릉이 털어놓은 속마음에 사윤은 누군가 제 머리를 망치로 세게 내리친 기분이 들었다. 그저 모친이 살아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누군가에겐 자신이 부러움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도 수없이 생각했어. 왜 모친께서 위무선을 만나겠다고 그 위험한 곳에 뛰어들었는지. 왜 그 혼란 속에 자처해서 걸어들어가 억울한 죽음을 맞이했는지. 고작 만월을 넘긴 내가 기다리고 있는데 어째서 끝내 돌아오지 못할 곳에 뛰어들었는지.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그러다가 미워하고 원망했어. 나를 버릴만큼 그 사람이 중요했던 건지 이해할 수 없었어. 여전히 그 질문에 완벽한 답을 찾진 못했지만... 조금은 알 것도 같아. 내가 모친의 소중한 가족인 것과 같이 위무선도 모친의 가족이니까. 위험한 걸 알면서도 만나야했던 거야. 피로 이어져 있진 않아도 소중한 아우니까. 위무선도 마찬가지였을 거야. 그때 그 사람은... 정도의 길을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어. 때문에 운몽 강씨에서 파면 당하고 네 부친과도 어쩔 수 없이 떨어져 지내야만 했지. 선문 모두의 적이었고 억울한 누명까지 썼어. 그를 평생 돌봐준 내 외조부와 외조모가 돌아가셨고 내 모친마저 눈앞에서 명을 달리했는데 그가 어떻게 버틸 수 있겠어. 너라면... 네가 그 상황이라면 견딜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어? 그의 선택이 옳았다는 게 아니야. 하지만 그 사람도 어쩔 수 없었다는 것쯤은 헤아려줄 수 있잖아. 아마 그도 후회하고 있을 거야. 서운해 할만한 일이라는 거 알아. 그렇다고 멍청하게 여기서 이러고 있을 일도 아니잖아. 너 스스로를 다치게 해서 뭐하겠다는 건데? 사실 너도 알고 있잖아. 네가 다치면 누가 제일 슬퍼 할지. 알고 있으니까 이러는 거 아니야? 그만큼 그가 널 많이 사랑한다는 거 알잖아."
"금여란..."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우리 외숙 귀찮게 하지 말고 돌아가라는 거다. 울고 불고 난리를 피우든 말든 운심부지처에서 하라고."
"아릉!"
사윤의 앞에서 모처럼만에 어른스럽게 굴 기회가 생겨 우쭐대던 금릉은 강징이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혼비백산하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얼마 못가 강징에게 붙잡힌 금릉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철부지 아씨가 되어 제 외숙에게 바락바락 대들기 바빴다.
"금릉이 왔던데."
"응."
연화오의 약방에서 사윤의 손에 바를 연고를 직접 만들어온 수애는 오는 길에 강징과 금릉이 언성을 높이며 다투는 모습을 본 터라 금릉이 사윤을 만나기 위해 일부러 찾아왔음을 곧장 알아챘다.
"금씨 방계의 늙은 영감들이 호시탐탐 금릉의 자리를 노리는 모양이야. 그런 와중에 금린대를 비우고 여기까지 왔다고 강 종주님이 경을 치시던 걸."
"응..."
"그만큼 네게 꼭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나봐?"
수애는 사윤의 손에 감아놓은 붕대를 풀어내곤 깨끗한 물에 상처를 닦아낸 뒤에 그 위에 연고를 펴발랐다. 요며칠 매일 아침 저녁으로 거르지 않고 사윤의 상처를 돌본 덕에 수애는 능숙하게 치료를 마무리했다.
"금릉과 무슨 얘길 하였어?"
"자기 모친 얘길 했어. 십육년 전, 불야천에서 금릉의 모친께서도 돌아가셨으니까..."
"응... 그렇구나."
"수애야."
"응?"
"네 어머니와 아버지 전장에 나섰다 전사하셨다고 하셨지?"
"응. 내가 다섯살 때 투기대륙에 큰 전쟁이 있었어. 두 분 다 전장에 나섰다가 영영 돌아오지 못하셨지."
"원망스럽지 않아?"
사윤의 물음에 수애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와 눈을 맞췄다.
"어떻게 원망스럽지 않겠어. 예전엔 아주 미워했어. 하지만 짧은 순간이었다해도 난 두 분에게 정말 많이 사랑 받았어. 아낌없이 사랑해주고 떠나셨어. 사랑하는 마음이 미워하는 마음보다 큰데 어떻게 계속 미워할 수 있겠어."
사윤의 머리를 쓸어넘겨준 수애는 사윤을 끌어안았다. 수애의 품에 고갤 파묻은 사윤은 이 순간만큼은 세상 근심과 걱정이 전부 씻겨져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네가 무슨 마음일지 모르지 않아. 용서를 강요할수도 없고. 다만 어떤 선택을 하든 너 스스로를 아프게 하지만 마. 너를 아끼고 사랑해서 걱정하는 사람이 아주 많으니까."
"수애야."
"응."
"네가 내 곁에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금릉과 수애의 충고를 들은 이후로 사윤의 분노는 눈에 띄게 누그러들었다. 더는 스스로 화를 주체하지 못해 날뛰지 않았고 대신 혼자 사색에 잠기는 일이 잦아졌다. 사윤은 자신이 그 당시의 무선이었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지 몇 번이고 머릿속에서 같은 상황을 그려봤지만 아무리 머릴 굴려보아도 만족스러운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남사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불러도 대답이 없고."
"미안, 나 불렀어?"
"응. 갈데가 있어."
"어디?"
"따라오면 알아."
사윤을 불러낸 수애는 그를 데리고 연화오 근처의 부둣가로 향했다. 부둣가 근처엔 커다란 시장이 있어 낮이고 밤이고 사람이 가득했고 활기찬 시장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사윤의 얼굴에도 간만에 생기가 넘쳐났다. 머리장식을 파는 좌판 앞에 자연스럽게 걸음을 멈춘 사윤은 수애에게 선물할 것을 고르다 비단 머리끈을 보곤 무선에게 전해주지 못한 머리끈을 떠올렸다. 무선에게 참으로 잘 어울릴 것 같아 골랐던 것인데 결국 주인을 찾아가지 못하고 연화오 처소 어딘가에 쳐박혀있는 머리끈을 생각하자 사윤은 다시금 마음이 심란해져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아윤."
"형장? 귀장군?"
수애가 사윤을 이끌고 간 객잔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건 사추와 온녕이었다.
"부친이 보내서 온 거야?"
"아니, 그저 네가 보고 싶어 온 거야. 온 숙부도 네가 보고 싶다 하여서."
사추의 말에 온녕은 사윤을 향해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사추를 통해 사윤이 무선의 죽음에 대해 알게 되어 운심부지처로 돌아오지 않고 연화오에서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온녕은 그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가 있어 운몽까지 어려운 걸음을 하였다.
"아윤, 그간 경황이 없어 제대로 인사조차 나누지 못했네."
"귀장ㄱ... 아니 온 숙부는 잘 지내셨어요?"
"온 숙부?"
예상치도 못한 호칭에 온녕이 당황하자 사윤은 뭐가 잘못됐냐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제가 어릴 때 난장강에서 함께 지냈잖아요. 그리고 사추 형장에게 숙부이면 제게도 숙부에요."
"그래, 아윤. 네가 편할대로 부르도록 해."
"정말 그냥 절 보러 오신 거예요?"
"할 얘기가 있어서. 난장강에서 우리가 같이 살 때의 얘기야. 그때 넌 아주 작은 아이였지. 정말 작았는데... 지금은 훌쩍 자라버렸구나. 함광군의 어릴적을 그대로 빼다박았고."
무선의 영혼이 십육년간 잠들어있었던 것처럼 온녕 역시 그 긴 세월동안 의식이 봉인되어있었으니 제 무릎까지 밖에 오질 않던 사추와 갓난아이였던 사윤이 어엿한 청년으로 자란 것만으로도 격세지감이 느껴졌다.
"위 공자가 네 어릴 적에 대해 얼마나 얘기해주었을지 모르겠지만 본인이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것에 대해서는 아마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을 거야. 그런 사람이니까."
"온 숙부도 모친의 편을 들어주러 온 거예요?"
"그냥 얘기하러 왔다니까."
사윤이 입술을 삐죽 내밀며 서운한 티를 내자 그 모습이 무선과 닮아 온녕의 입가엔 미소가 절로 걸렸다.
"아윤, 금단을 빼낸다는 게 어떤 건지 알고 있어?"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겪어본 적도 없는데다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흔치 않잖아요."
"흔치 않은 정도가 아니지. 세상에 그런 일을 할 사람은 위 공자뿐이야. 누가 자기 금단을 빼서 다른 사람에게 주겠어. 차라리 처음부터 금단이 없었던 몸이라면 모를까 원래 있었던 걸 빼내는 건 서서히 죽어가는 것과 마찬가지야. 자신의 몸에 넘칠만큼 흐르던 영력이 서서히 꺼져가는 걸, 없어지는 걸 온몸으로 느낀다고 생각해봐. 그것도 수사로서 재능과 자질이 부족함 하나 없었던 사람이. 그리고 그런 몸으로 널 낳았지. 우리 누님께선 그 몸으론 아이를 낳지 못할 거라고, 아이를 낳다가 죽을지도 모른다 충고했지만 위 공자는 목숨을 걸고 널 낳았어. 죽음까지 각오하고 널 낳은 거야. 아윤, 너도 난장강이 어떤 곳인지 봐서 알잖아. 어른도 살기 힘든 곳에서 갓난아기가 어떻게 버틸 수 있었겠어. 그런데도 넌 그곳에서 어디 하나 크게 아픈 곳 없이 자랐어. 위 공자가 자신의 피와 살을 내어주고 키웠으니까. 넌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옆에서 지켜본 나는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기억해. 위 공자가 얼마나 널 사랑으로 키웠는지. 본인이 매일 밤마다 피를 토하는 건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네가 조금이라도 아프면 너보다 더 아파하였어. 너만큼은 배 곯게 하지 않으려 제 입으로 들어갈 걸 전부 네게 주었지. 죽음으로 한 발자국씩 걸어 들어가면서도 너만은 끝까지 지키려던 사람이야. 단 한 순간 실수로 네 손을 놓아버렸다고 평생 그 손을 잡아주지 않기엔 네 마음도 괴로울 것 같아 꼭 얘기해주고 싶었어. 아윤, 위 공자는 언제고 네게 손을 뻗고 있을테니 네가 준비가 되면 다시 잡아주면 돼. 그게 얼마나 오래 걸리든 너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기다려 줄 거야."
어느새 눈시울이 촉촉하게 젖어든 사윤을 보고 온녕은 그의 어깨를 다정스럽게 도닥여주었다. 그 순간 온녕의 마음엔 제 손이 보통의 사람들처럼 따뜻했다면 좋았을텐데라는 아쉬움이 스쳐지나갔다.
"금릉은 잘 지내고 있어요..."
"응?"
"온 숙부가 궁금해 할 것 같아서요. 갑자기 종주가 되어 바빠보이긴 하지만 아주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 말아요."
"그렇구나... 고마워, 아윤."
온녕과 사윤이 얘기를 나누는 동안 수애와 함께 한 발 물러나 그들을 지켜보던 사추는 사윤이 자신을 돌아보자 얘기가 다 끝난 것 같아 그에게 다가갔다.
"아윤, 네가 없으니 다들 심심하다고 아우성이야."
"숙조부님은 내가 없으니 운심부지처가 조용해서 좋다고 하시겠네."
"말은 않지만 남 선생님도 널 많이 걱정하고 계셔."
"모친은...?"
사윤이 무선에 대해 물어보자 사추는 솔직하게 말을 해야할지 말아야할지 대답을 망설였다.
"형장은 거짓말 하면 얼굴에 다 티나는 거 알지? 숨기지 말고 얘기해줘."
"위 선배 우는 소리가 매일 영죽당 담장을 넘어 선부에 울려퍼지니 다들 걱정을 안하고 베길수가 있겠어... 며칠 전에도 의원이 다녀갔어. 끼니는 거르고 울기만 하니 기력이 다시 쇠하신 모양이야. 그러면서도 매일같이 연화오에 보낼 서신을 쓰고 계셔. 강 종주님께 네가 잘 지내고 있는지, 어디 아픈 곳은 없는지 묻고 싶은 게 많아서겠지... 아윤."
"응?"
"돌아올거지? 네가 어디 있든, 네 마음이 어딜 떠돌든 네 집은 운심부지처잖아. 기다리고 있을게. 너무 늦지만 말아."
"응..."
사윤과 수애는 늦기 전에 고소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추와 온녕을 배웅하고 조용히 연화오로 돌아왔다. 사윤이 괜한 짓을 할까봐 걱정이 돼 사람을 붙여놓은터라 그가 누굴 만나고 왔는지 알고 있음에도 강징은 이를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온녕이 자신과 금릉의 목숨을 구해줬으니 이젠 서로 빚진 게 없다 여겼기 때문이었다. 방 한구석에 쳐박아놓았던 붉은색 비단 머리끈을 꺼내든 사윤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그것을 하염없이 만지작거렸다.
"뭘 그리 고민해? 이미 답은 정해놓았으면서."
"다들 모친의 편이지? 내 편 들어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
"네 편 여기 있잖아. 돌아가고 싶지 않으면 말아. 이김에 우리 투기대륙으로 떠날까? 거기로 가서 영영 돌아오지 않는 거야."
사윤이 생각지도 못했단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자 수애는 깔깔 거리며 사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거봐, 떠나자는 말에 이리 반응할 거면서..."
"난 아직 너만큼 용감하지 못하나봐. 떠날 자신이 없는 걸 보니까."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돌아갈 집이 있어 떠나지 못하는 거지. 너한텐 돌아갈 집이 있잖아. 기다리는 가족이 있고... 난 아무것도 남지 않아 미련없이 이곳에 온 거야."
"이젠 내가 있잖아."
"응?"
"이젠 내 곁에 내가 있으니까 너한테도 운심부지처가 네 집처럼 느껴졌으면 좋겠어..."
"그럼 우리... 집으로 돌아갈까?"
"그래. 우리 집으로 돌아가자."
다음날 운심부지처로 돌아갈 채비를 마친 사윤은 요란 떨지말고 조용히 돌아가라는 강징의 말에도 자신의 무례함을 사과하고 그간 돌봐준 것에 감사함을 표하기 위해 그를 찾았다.
"그간 여러모로 폐를 끼쳤습니다, 사숙."
"내가 언제 그리 불러도 된다 하였느냐?"
"제가 이리 부르지 않는다 하여도 사숙은 제 사숙이시잖아요."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네 모친과 절연하였는데 내가 어찌 네 사숙이야."
"비록 피로 이어져있진 않지만 모친과 사숙이 가족이 된 것은 분명 하늘의 뜻이고 이는 천륜이지 않습니까? 천륜을 어찌 사람의 힘으로 끊어내겠어요."
"시끄럽다. 그만 떠들고 돌아가."
"시간이 되시거든 운심부지처에 놀러오세요."
"내가 왜?"
"평생 화해하지 않을 작정이에요?"
"그가 먼저 원하지 않은 일이다."
"모친이 싫다하여도 몇 번이고 다시 청하셔야죠."
"그러니까 내가 왜?"
"가족이니까요."
당연하다는 듯 내뱉는 사윤의 말에 강징은 말을 돌리며 해지기 전에 돌아가라 그의 등을 떠밀었다.
"네 백부께 곧 찾아뵙겠다고나 전하거라."
"백부님은 왜요?"
"긴히 할 얘기가 있다고만 전해."
"그 말은 운심부지처에 놀러오신다는 뜻이죠?"
"내가 언제 놀러간다 하였느냐?"
"그게 그거죠. 여튼 이만 물러나보겠습니다, 사숙."
끝까지 저를 사숙이라 칭하며 장난스럽게 웃어보이는 사윤의 얼굴이 무선을 그대로 빼다박아 강징은 결국 작게 웃을 수 밖에 없었다.
덧창 너머 영죽당 정원의 활짝 핀 연꽃을 무선은 죽상인 얼굴로 바라보았다. 연화오로 서신을 보낼 때마다 사윤은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말라는 강징의 답신을 받았지만 직접 볼 수 없으니 걱정만 늘어갈 따름이었다. 한숨만 푹푹 내쉬던 무선의 주위로 반짝이는 금빛의 나비가 날아들고 나비는 사뿐히 무선의 손등에 앉았다.
'사방에 꽃이 만개하였는데 모친께선 어찌 웃지 않으셔요?'
전신지접이 전해주는 사윤의 목소리에 깜짝 놀란 무선은 버선발로 뛰쳐나가고 무선이 갑작스레 정실을 뛰어나가자 당황한 망기가 그 뒤를 따라나섰다. 때맞춰 사윤이 영죽당 문을 넘어 들어오자 무선은 달려가 제 아이를 끌어안았다.
"아윤!"
어렵게 다시 만난 아들이 영영 저를 보지 않겠다고 할까봐 매일 같이 애간장을 태웠던 무선은 사윤과 눈을 마주치자마자 아이마냥 서럽게도 눈물을 터트렸다.
"누가 들으면 초상이라도 난 줄 알겠어요... 어찌 이리 우셔요?"
"며칠만에... 며칠만에 얼굴을 보여준 것인지 알고는 있어?"
떨어져있던 시간 동안 사윤이 어디 다치거나 아프기라도 했을까봐 샅샅이 살피던 무선은 사윤의 손에 남은 상처들을 보곤 제가 다친 것마냥 어쩔 줄을 모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손은 어쩌다 이리 되었어? 치료는? 치료는 한 거야? 약방에서 상처에 잘 듣는 연고를 가져올테니 기다리거라."
이미 아물어 딱지가 진 상처마저도 행여나 사윤이 아플까봐 건드리지도 못하고 애타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무선을 보며 사윤은 괜찮다는 듯 손을 쥐었다 펴보았다.
"수애가 매일 같이 상처를 씻기고 약을 발라주었어요. 사숙께서 좋은 약을 주셔서 다 아물고 나면 흉터도 남지 않을 것이라 했으니 걱정 마세요."
"마음이 상하거든 차라리 나를 때리고 욕해. 네 몸을 상하게 하지 말고."
"어떻게 그리해요. 모친께선 죽을 각오를 하고 저를 낳아주셨는데... 제가 어찌 그리 하겠어요?"
"아윤, 나는... 나는 염치 없이 용서를 바라지 않아. 이리 돌아와준 것만으로 충분해."
"솔직하게 말하면 전 아직도 모친이 미워요. 제가 이해하기엔 너무 어려운 일이고 용서를 하기에도 쉽지 않아요... 하지만 미운 것보다 사랑하는 마음이 더 크니 어찌하겠어요? 돌아올 수 밖에요. 평생동안 모친과 함께 사는 것을 꿈꿨는데 이리 시간을 허비할 순 없잖아요. 그러니 함께하지 못한 날만큼 배로 저를 더 아끼고 사랑해주셔야 해요. 나쁜 기억일랑 전부 잊어버릴만큼요."
사윤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하는 얘기에 무선은 소매로 눈물을 훔치고는 활짝 웃어보이며 사윤의 콧잔등을 툭툭쳤다.
“당연한 소릴 뭐하러 장황하게 해?”
모자가 다시 다정한 한 때로 돌아가니 망기도 그제야 한 시름 놓을 수 있었다. 사윤이 괜찮다는데도 무선은 사윤을 데리고 정실로 들어가 손에 남은 상처에 정성스레 약을 발라주었다. 사윤의 마음에 남은 상처에도 이리 약을 발라 흉터 하나 없이 낫게 해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란 생각을 하던 무선은 이내 남부럽지 않게 사랑으로 키우는 것이 마음의 상처를 낫게 할 최고의 약이라는 걸 알기에 말없이 사윤의 머리를 몇 번이나 쓰다듬었다.
남의 얘길 떠들어대는 걸 좋아하는 수선계 답게 근래엔 고소 남씨 말썽쟁이 도련님의 가출 소동에 사람들의 관심이 쏠려있던 참이었다. 특히 남의 불행을 떠벌리는 것을 좋아하는 이들이나 질투심이 많은 이들은 이 김에 무선과 사윤이 완전히 틀어지길 내심 바라기도 하였다. 전자야 선독 집안의 불행이라면 두고두고 씹을 수 있는 이야기니 신이 난 것이고 후자는 순전히 사윤을 질투하는 마음에 그의 불행을 바라는 것이었다. 고소 남씨의 하나뿐인 도련님, 그 유명한 함광군의 아들인 사윤에게 유일한 흠이라곤 어미가 누군지 모른다는 것이었는데 그 어미가 이릉노조 위무선이라는 게 밝혀졌으니 이제 수선계엔 사윤과 견줄만한 배경을 가진 공자는 없었다. 그 옛날 무선이 그랬듯 잘난 이에겐 늘 시기와 질투가 따르길 마련이라 알게 모르게 사윤을 투기하는 이들이 수선계에 제법 있었다. 허나 그들의 기대와 바람과 달리 운심부지처의 정실엔 매일 같이 웃음꽃이 피어난단 소식이 전해들고 더불어 선독이 혼례일을 뽑아 선문에 공표하니 아마 내색은 안해도 많은 자들이 배앓이를 꽤나 할 터였다.
불꽃효자 남사윤...
망기무선 망선 사윤수애
"따지고 보면 다 누명인데... 이릉노조 입장에선 억울할 법도 하지."
"하지만 운몽의 강 종주도 모르고 한 일이잖아."
"이제 와서 화해할 순 없는 거겠지?"
"자네 같으면 자넬 죽인 사람이랑 화해할 수 있겠어? 당장에 멱살을 잡아도 시원치 않을 판에..."
"나였다면 똑같이 갚아줬을 거야. 이릉노조는 정말 대인배네..."
채의진에서 수애와 머리장식을 고르던 사윤은 비단 머리끈을 보며 한참이나 고민하더니 붉은색 머리끈을 골라집었다. 제 모친에게 선물하면 분명 기뻐할 거라 기대하며 옆에 있던 산호 장식을 집어들어 수애의 땋은 머리에 꽂아준 사윤은 주인에게 값을 치르고는 몰래 천자소도 가지고 들어갈 생각으로 주점으로 향하다 사람들이 무선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는 걸 듣고 말았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모친이 살아돌아왔지, 제 정인과 화해하여 꿀이 뚝뚝 떨어지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으니 사윤은 제 어미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선문에 이릉노조를 운몽의 강 종주가 죽였음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사악한 마귀 이릉노조의 심장에 삼독성수를 꽂아넣고 불야천 절벽 밑으로 떨어뜨린 영웅담의 주인공이 바로 강징이었고 그 이릉노조가 어미인줄 몰랐을 때 어린 마음에 사윤은 이야기 속 주인공을 동경하였었다. 하지만 이릉노조가 제 모친이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었음을 다 알고 있는 지금 사윤에게 강징은 그저 불구대천의 원수였다.
"이만 돌아가자."
"갈 곳이 있어. 먼저 돌아가."
"어딜?"
"운몽."
사람들이 떠드는 얘기 귀담아 듣지 말라며 사윤을 잡아끌던 수애는 그가 제 손을 거세게 뿌리치자 불길한 예감이 엄습해왔다.
"운몽엔 왜?"
"내가 그간 단꿈에 젖어 잊고 있었어. 모친이 어떻게 죽었는지."
"그래서? 복수라도 하겠다는 거야?"
"그래. 모친은 마음이 약해 없던 일로 치부하시는 것 같지만 난 그럴 수 없어. 그러기엔 모친이 너무 불쌍하잖아."
"강 종주님은 선문의 명수사야. 네가 상대하기엔..."
"상대가 강하면 부모의 원수라도 참으라는 거야? 상관 없어, 그 사람이 얼마나 강하든."
"네가 다칠까봐 걱정하는 거잖아! 싫어. 네가 다치는 거. 그러니까..."
"그러니 따라오지마. 나도 네게 그런 모습 보이기 싫어."
"남사윤!"
수애가 말려보아도 사윤의 뜻은 완고했다. 어검하여 운몽으로 향하는 사윤을 바라보며 그를 뒤따라가야 할지 이를 어른들에게 알려야할지 고민하던 수애는 이내 운심부지처로 향했다.
"위 선배! 위 선배!"
운심부지처의 수사들은 함부로 영죽당에 발을 들여놓아선 안된다는 금기를 깨고 수애는 대문을 부술 기세로 뛰어들어와 무선을 찾았다. 한낮의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망기가 영죽당 연못에 심어준 연꽃이 싹을 낸 것을 구경하던 무선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뛰어들어오는 수애를 보며 본능적으로 사윤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알아챘다.
"아윤에게 무슨 변고라도 생긴 것이야?"
"남사윤이 지금 운몽으로 갔어요."
"운몽? 운몽엔 왜?"
"위 선배의 복수를 하겠다고..."
수애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무선은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였다. 망기가 무선의 누명을 풀어주어 그가 무고함을 선문 사람들이 전부 알게 되었으나 무선이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선 여전히 망기와 무선 그리고 강징만이 알고 있었다. 강징이 사윤을 해치지 않을 거라 믿고 있었지만 행여나 사윤이 경거망동하여 다치기라도 할까 걱정이 된 무선은 곧장 망기의 서재로 달려갔다.
"남잠!"
"위영!"
무선이 금방이라도 울 것같은 표정으로 품에 안겨오자 깜짝 놀란 망기는 자초지종을 물었다. 사윤이 제 죽음에 오해가 있어 강징에게 복수를 하겠다며 연화오로 향했다는 무선의 얘기에 망기는 아이를 데려와 잘 타이르면 될 일이라며 무선을 진정시켰다. 망기와 무선 그리고 수애가 사윤을 데려오기 위해 연화오로 향하는 사이 사윤은 이미 그곳에서 소란을 부리고 있었다. 남가의 도련님께서 종주를 만나뵙겠다며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부사의 말에 강징은 오늘과 같은 날이 올 것이라 예상했다는 듯 덤덤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사윤이 기다리는 연무장으로 향했다. 선문의 자제라면 다른 가문의 선부를 방문할 시에 함부로 검을 빼어들지 않는 것이 예의임을 걸음마 뗄 적에 배우니 사윤도 이를 잘 알고 있었지만 눈앞에 부모의 원수를 두고 있는 와중에 그가 예의범절 같은 걸 따질 리가 없었다.
"이게 무슨 소란이냐?"
강징을 발견한 사윤이 제 고금을 소환해 무작정 현살술을 날렸으나 강징은 별것도 아니라는 듯 자전으로 그의 공격을 막아냈다. 고소 남씨의 현살술이 얼마나 강한 살상력을 가지고 있음을 모르는 바가 아닌 강씨 수사들은 그가 진심으로 강징을 죽이려 함을 알고 사윤을 애워쌌다.
"그냥 두거라. 내가 이깟 애송이 하나 감당하지 못할 것 같으냐?"
"하지만 종주님 이 녀석은..."
"이릉노조의 아들이지."
"예, 그 이릉노조의 아들이지 않습니까. 만약 이 아이도 사도를 쓸 줄 안다면 이곳에 있는 저희 모두 무사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 녀석은 사도를 쓸 줄 모르니 걱정할 것 없다."
"고소 남씨에서 숨겼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지난 십육 년간 이릉노조의 자식인 것도 숨겨왔는데 무슨 비밀이 또 있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설령 이 녀석이 사도를 쓸 줄 안다고 해도 내 상대가 되는 것은 아니다."
부사의 만류에도 강징은 사윤을 애워싼 수사들을 물리고 그의 앞에 섰다.
"무슨 일로 온 것이냐?"
"제가 무슨 일로 왔는지는 강 종주님께서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제와 네 어미의 복수라도 하겠다는 것이야?"
"아무것도 모르고 강 종주님께서 이릉노조를 척결하였음을 동경하였던 제가 끔찍하게 싫습니다. 저를 낳아준 이가 누군지 몰랐을 때 그저 모친께서 운몽 강씨의 사람이었다는 부친의 말을 듣고 막연히 강 종주님을 좋아하던 때를 떠올리면 제 뺨을 내리치고 싶은 심정입니다. 억울하게 누명을 쓴 모친을 사지로 몰아내고, 그 심장에 칼을 꽂고, 절벽 아래로 떨어뜨려 죽인 이를 지금껏 웃는 낯으로 대했다 생각하니 치가 떨릴 지경입니다."
"네 아비와 어미가 그리 말하더냐? 내가 이릉노조를 죽였다고?"
"선문에 강 종주께서 이릉노조를 죽였음을 모르는 이가 있습니까? 오해가 풀렸음에도 모친에게 속죄조차 하지 않으니 제가 대신해서 원수를 갚을 것입니다."
속죄조차 하지 않는다는 사윤의 말에 강징은 얼굴에 조소를 띠었다. 속죄도 기회를 주어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가. 무선은 과거의 일은 말 그대로 지나간 일이라며 모두 덮어둔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가버렸다. 저만 과거의 고통 속에 가둬둔 채로 떠나가버린 무선이 원망스러워 미워하고 싶어도 미워할 수 없는 강징은 차라리 그가 제게 화를 내고 예전일을 들먹이며 욕이라도 실컷 하길 바랐기에 무선을 대신한 사윤의 분노가 쏟아지자 되레 마음이 편해졌다.
"원수를 어찌 갚을 것이냐? 날 죽이기라도 할 것이야?"
"못할 것도 없습니다."
"그럼 어디 한 번 해보거라."
타고난 자질이 훌륭하고 실력이 출중하다 한들 노련한 수사의 연륜을 뛰어넘기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사윤이 기를 쓰고 달려들어도 그의 검날은 강징의 옷깃 한 번 스치질 못하니 악에 받친 사윤은 다시 한 번 고금을 소환해 제 영력을 모두 실어 현살술을 날렸다. 젊고 어린데다 선문의 명수사인 아비와 어미를 닮아 영력이 차고 넘치는 사윤이 그 힘을 모두 실어 날린 일격이었으니 이번만큼은 강징도 감당해내기 어려웠다. 사윤의 현살술을 막기 위해 강징은 있는 힘껏 자전을 내리쳤고 덕분에 공격은 피했으나 자전은 기세가 꺾이지 않아 무시무시한 속도로 사윤을 향해 날아갔다. 방금 전의 일격으로 제 영력의 대부분을 소비한 사윤이 자전을 맞았다간 자칫 목숨을 잃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전의 흉흉한 기세에 피할 생각도 못하고 얼어붙은 사윤은 그대로 죽는 줄로만 알고 눈을 질끈 감았으나 푸른 검광이 날아와 사윤의 목전에서 자전을 튕겨냈다.
"아윤! 괜찮은 것이냐?"
피진을 검집에 집어넣은 망기는 제일 먼저 사윤이 무사한지부터 살폈다. 강징이 공격을 막아내기만 할 뿐 진심으로 상대할 생각이 없었기에 제 아들이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음을 알고 있는 망기는 이 일에 대해 강징을 책망하지 않았다.
"아윤, 어째서 이런 일을 벌여? 다치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다시는... 다시는 이러지 마. 알았지? 다시는 이리 무모하게 굴지 않겠다고 나와 약조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사윤이 다치기라도 할까봐 무선은 걱정스런 마음에 아이를 다그쳐봤지만 사윤은 그저 분하다는 듯이 소리를 내질렀다.
"아윤!"
망기의 호통에도 사윤은 제 잘못을 인정하긴 커녕 억울함을 호소했다.
"저 자가 모친을 죽였잖아요! 모친이 대체 무슨 잘못을 했기에 그렇게 죽어야 했는데요? 그리고 저는 무슨 잘못을 하여 어미 없는 자식이라 손가락질 받으며 자라야 했는데요? 모친의 억울함을 풀어주려 한 것이 그리 잘못한 것입니까? 지난 십육년간 부친과 제가 받은 고통을 되갚아주는 것이 그리 잘못된 것입니까?"
"아윤, 그만해!"
무선의 만류에도 사윤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제게서 어머니를 빼앗아갔어요. 그때 저는 고작 갓난아기였을 뿐인데... 이는 모친을 위한 복수이자 제 원한을 갚는 것입니다. 말리지 마세요."
사윤이 다시 제 검을 쥐고 강징에게 향하려 하자 무선은 그의 앞을 막아섰다.
"날 죽인건 강징이 아니야."
"그리 말하신다해도 믿지 않아요. 세상 사람 모두가 운몽의 강종주가 이릉노조를 죽였다한 걸요."
"그 날 내 죽음에 대해 아는 것은 오로지 남잠과 나 그리고 강징 뿐이야. 내 죽음을 본 것은 남잠과 강징 두 사람이 전부고 다른 이들은 본 적도 없는 일을 지어내 맘대로 떠드는 거야."
"저 자가 아니면 대체 누가 모친을 죽였다는 건데요?"
사윤의 물음에 무선은 대답을 망설였다. 사윤의 등 너머로 망기는 고개를 내저으며 진실을 묻어둘 것을 청했으나 언제까지고 비밀로 할수도 없는 일이었다.
"위무선, 무슨 얘길 하는 거지? 그날 널 죽인건 나다. 나 때문에 네가..."
"입다물어. 네가 언제 날 죽였다는 거야?"
그날 무선의 죽은 것이 자신 때문이라 여겨왔기에 강징이 스스로의 책임을 묻자 무선이 그의 말을 막았다. 결과가 어찌 되든 무선은 이 일을 제 손으로 매듭지어야 했다.
"그날 날 죽인 건 나야."
"모친...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내가 스스로 절벽에서 몸을 던졌어. 내 손을 붙잡은 남잠의 손을 내가 뿌리쳤어. 오롯이 내 뜻이었고 내 의지였어. 날 죽인 건 강징이 아니야. 십육년 전에... 불야천에서 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거야."
무선의 말에 사윤은 믿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등 뒤의 망기를 바라보았다. 망기가 비통하다는 듯이 두 눈을 감고 아무 말이 없자 무선이 한 얘기가 전부 사실임을 깨달은 사윤은 한 걸음씩 무선에게서 멀어졌다.
"아윤..."
"왜 그랬어요?"
"미안해... 아윤..."
무선이 제게 다가오자 사윤은 검을 들어 무선이 더는 제게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막아섰다.
"어떻게 그래요? 어떻게 그럴수가 있어요?"
"그땐 내가 제정신이 아니어서... 너무 슬프고 원통해서 내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어..."
"세상 어느 부모가 자식을 버리고 목숨을 끊어요? 절벽에서 뛰어내리겠다 마음 먹기 전에 단 한 번이라도 내 생각은 하긴 했어요? 내가 기다리고 있었는데... 내가 기다리는데 어떻게 그래요? 난 대체 모친한테 뭐였어요? 모친이 살아야 할 이유에 난 없었던 거예요?"
"아윤, 내가 잘못 생각해서 돌이킬 수 없는 짓을 벌였어...내가 어리석었어. 다 내 잘못이야."
"부친이 나를 찾지 못했다면, 만약 하루라도 늦었다면 난 죽었을 거예요. 난장강에 버려진 채로 사추 형장도 나도 죽었을 거라고요! 모친이 날 버린 줄도 모르고 모친이 돌아오길 하염없이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죽었겠죠!"
"아니야, 아가. 널 버린 게 아니야..."
"이해할 수 없어요. 이해하고 싶지도 않아요! 모친은 날 버린 거예요. 알겠어요? 모친은 날 버린 거라고요!"
무선이 계속해서 제게 다가오려하자 사윤은 막무가내로 검을 휘둘렀다. 행여나 무선이 다칠까봐 망기가 피진으로 사윤의 검을 쳐내자 그의 패검이 멀리 나가 떨어졌다. 사윤은 자리에 주저앉아 땅바닥을 주먹으로 마구 내리치며 어린 아이마냥 울음을 터트렸다.
"아윤, 돌아가자."
망기가 사윤을 일으켜 세우려했지만 사윤은 그 손길마저 뿌리쳤다. 다 알면서도 지금껏 그 사실을 얘기해주지 않은 제 부친까지 원망스러운 탓이었다.
"돌아가지 않아요. 두 분과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그럼 어디로 갈 생각이냐?"
"어디든 상관 없어요. 모친이 없는 곳이라면 어디든... 지금은 모친과 함께 있고 싶지 않아요."
무선은 서럽게 울어대는 사윤을 보며 그를 끌어안고 달래주고 싶었으나 원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사윤이 저를 바라보자 감히 다가가지 못하고 애를 태웠다. 망기가 억지로 사윤을 데리고가려 하니 이번엔 강징이 망기를 사윤에게서 떼어냈다.
"두고 가."
"강만음."
"연화오에 머무르게 할테니 일단은 돌아가."
"신경 꺼."
"억지로 데려가려다 찾지도 못하는 곳으로 도망쳐버리면? 예전에도 넌 네 자식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찾지 못했잖아."
강징의 말대로 억지로 끌고가려다 사윤이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도망치기라도 한다면 더 큰 일로 번질지 몰랐다. 하루 아침에 해결할 일도 아닌데다 무선과 사윤 모두 감정이 격해져 당장에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라 망기는 강징의 말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제가 곁에서 지켜볼게요. 걱정말고 일단 돌아가세요. 마음을 추스리고 나서... 그때 얘기해도 늦지 않아요."
"부탁하마."
그나마 수애가 곁에 있겠다는 말에 안심이 된 망기는 무선을 데리고 검에 올랐다. 무선은 사윤을 두고 가지 않겠다 버텨보았지만 사윤은 무선이 저를 불러도 돌아보지도 않고 무작정 어릴적 강씨 제자들과 뛰어놀던 들판으로 뛰어갔다. 행여나 사윤이 나쁜 마음을 먹기라도 할까봐 걱정이 된 수애가 그 뒤를 따르고 망기는 무선을 잠시 기절 시키고는 그를 품에 안고 운심부지처로 돌아갔다. 한바탕 소란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남겨진 강징은 부사에게 사윤과 수애가 머무를 전각을 내어주라 명하고는 지끈 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서재로 돌아갔다.
"남잠... 아윤은?"
잠에서 깨어난 무선은 제일 먼저 사윤을 찾았다. 망기가 고개를 내젓자 무선은 그의 품에 안겨 설운 눈물을 뚝뚝 흘려댔다.
"남잠, 아윤이 영영 나를 보지 않겠다하면 어떡해?"
"아윤도 놀라고 경황이 없어 그랬을 거야."
"내가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어..."
"위영."
"아무리 슬프고 괴로워도 그러지 말았어야 했어. 아윤의 말대로 네가 하루라도 늦었으면 아원도 아윤도 무사하지 못했을 거야. 나 때문에 아윤까지 죽을뻔 했어. 내가 지켜주겠다고 했는데... 무슨 일이 있어도 아윤은 나처럼 자라지 않게 하겠다 맹세 했는데 내가 그 맹세를 어겼어. 내가 내 손으로 내 아이를 버렸어. 그러면서 뻔뻔하게 아윤에게 어미 소리를 들으려했으니 이제야 벌을 받는 거야."
"위영! 어찌 그런 말을 해?"
"아윤이 얼마나 슬플지 감히 상상도 못하겠어... 가서 안아주고 싶어, 눈물을 닦아주고 싶어... 그런데 아윤이 원치 않을테니 그리 할수도 없어..."
"수애가 곁에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마. 강만음이 아윤을 돌봐주겠다하였으니 허튼 짓은 하지 못할 것이야."
무선이 어찌나 구슬피 울던지 영죽당 담장 너머까지 그 소리가 들려와 고소 남씨의 어린 제자들은 걱정스런 마음에 담장을 떠나지 못했다. 한참이 지나 망기가 정실에서 나오자 다른 아이들은 전부 눈치가 보여 이리저리로 흩어지고 사추만이 홀로 자리를 지키고 서서 단정하게 망기에게 인사를 올렸다. 사추가 무선을 걱정하는 마음을 모르지 않기에 망기는 사추에게 가까이 오라 손짓하였다.
"함광군."
"음."
"위 선배는..."
"이제 울 기운도 없는 모양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게도 말씀해주세요. 어찌 저리 서럽게 우신단 말입니까?"
"아윤이 십육년 전 불야천에서의 일을 알게 되었다."
"무슨 일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제 어미가 저를 두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음을 알고 말았어."
세간에 이릉노조는 강 종주의 손에 죽었다 알려졌으니 사추 또한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음을 몰랐던 터라 더는 말을 잇지 못하였다.
"아윤이 크게 상심하여 제 어미를 보고 싶지 않다하더구나. 하는 수 없이 운몽에 두고 왔다."
"이제 어찌하실 작정이십니까?"
"나도 모르겠다... 어찌해야 할지..."
이제 겨우 기력을 되찾은 무선이 하루종일 울기만 하다 다시 쇠약해 지기라도 할까봐 망기의 근심은 갈수록 깊어져만 갔다. 무선이 매일 밤낮을 눈물로 지새우는 동안 사윤은 강징이 내어준 전각에서 머물며 어쩔 땐 연무장에서 마구잡이로 검을 휘두르고 또 어쩔 땐 손에 피가 나도록 활을 쏘다 제 풀에 지쳐 돌아오곤 했다. 그럴 때마다 수애가 상처에 약을 발라주었으나 먼저 난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새로운 상처가 생기니 그의 손은 성할 날이 없었다.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더니 연화오에서의 소란은 수선계에 곳곳에 퍼져나가고 뒤늦게 그 소식을 전해들은 금릉은 사윤을 만나기 위해 운몽을 찾았다.
"한심하기 짝이 없네."
"시비를 걸려고 온 것이라면 꺼져."
"영영 검을 들지 않을 생각이야? 상처가 곪아 손을 쓰지 못하는 지경이 되길 바라기라도 하는 건가?"
"꺼져! 꺼지라는데도!"
사윤이 거세게 금릉을 문밖으로 밀쳐냈지만 금릉은 아랑곳 않고 다시 그의 침소에 발을 들여놓았다.
"벌써 난릉까지 소문이 난 모양이지? 이릉노조가 제 자식을 버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내 꼴을 구경이라도 하러 온 거야?"
"그래, 얼마나 우스운 꼴을 하고 있는지 보러 왔어. 멍청하긴..."
"누구더러 멍청하다는 거야?"
"죽은 모친이 다시 살아돌아오는 다신 없을 기회를 얻었으면서 제 발로 그 기회를 차버렸으니 멍청하단 소리가 안나오겠어?"
"필요 없어, 날 버린 사람 따위... 다신 보고 싶지 않아."
사윤의 대답에 금릉은 미간을 잔뜩 구기더니 사윤의 멱살을 잡고는 있는 힘껏 그의 뺨을 내리쳤다.
"정신 차려, 남안지. 배부른 소리 좀 그만해. 그날 불야천에서 모친을 잃은 건 너나 나나 똑같은데 넌 적어도 모친이 다시 돌아왔잖아. 넌 적어도 네 모친의 품에 다시 안길 기회를 얻었잖아. 나라면... 나였다면 절대 너처럼 굴지 않아. 절대 모친을 슬프게 하지 않았을 거야."
금릉이 털어놓은 속마음에 사윤은 누군가 제 머리를 망치로 세게 내리친 기분이 들었다. 그저 모친이 살아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누군가에겐 자신이 부러움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도 수없이 생각했어. 왜 모친께서 위무선을 만나겠다고 그 위험한 곳에 뛰어들었는지. 왜 그 혼란 속에 자처해서 걸어들어가 억울한 죽음을 맞이했는지. 고작 만월을 넘긴 내가 기다리고 있는데 어째서 끝내 돌아오지 못할 곳에 뛰어들었는지.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그러다가 미워하고 원망했어. 나를 버릴만큼 그 사람이 중요했던 건지 이해할 수 없었어. 여전히 그 질문에 완벽한 답을 찾진 못했지만... 조금은 알 것도 같아. 내가 모친의 소중한 가족인 것과 같이 위무선도 모친의 가족이니까. 위험한 걸 알면서도 만나야했던 거야. 피로 이어져 있진 않아도 소중한 아우니까. 위무선도 마찬가지였을 거야. 그때 그 사람은... 정도의 길을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어. 때문에 운몽 강씨에서 파면 당하고 네 부친과도 어쩔 수 없이 떨어져 지내야만 했지. 선문 모두의 적이었고 억울한 누명까지 썼어. 그를 평생 돌봐준 내 외조부와 외조모가 돌아가셨고 내 모친마저 눈앞에서 명을 달리했는데 그가 어떻게 버틸 수 있겠어. 너라면... 네가 그 상황이라면 견딜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어? 그의 선택이 옳았다는 게 아니야. 하지만 그 사람도 어쩔 수 없었다는 것쯤은 헤아려줄 수 있잖아. 아마 그도 후회하고 있을 거야. 서운해 할만한 일이라는 거 알아. 그렇다고 멍청하게 여기서 이러고 있을 일도 아니잖아. 너 스스로를 다치게 해서 뭐하겠다는 건데? 사실 너도 알고 있잖아. 네가 다치면 누가 제일 슬퍼 할지. 알고 있으니까 이러는 거 아니야? 그만큼 그가 널 많이 사랑한다는 거 알잖아."
"금여란..."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우리 외숙 귀찮게 하지 말고 돌아가라는 거다. 울고 불고 난리를 피우든 말든 운심부지처에서 하라고."
"아릉!"
사윤의 앞에서 모처럼만에 어른스럽게 굴 기회가 생겨 우쭐대던 금릉은 강징이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혼비백산하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얼마 못가 강징에게 붙잡힌 금릉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철부지 아씨가 되어 제 외숙에게 바락바락 대들기 바빴다.
"금릉이 왔던데."
"응."
연화오의 약방에서 사윤의 손에 바를 연고를 직접 만들어온 수애는 오는 길에 강징과 금릉이 언성을 높이며 다투는 모습을 본 터라 금릉이 사윤을 만나기 위해 일부러 찾아왔음을 곧장 알아챘다.
"금씨 방계의 늙은 영감들이 호시탐탐 금릉의 자리를 노리는 모양이야. 그런 와중에 금린대를 비우고 여기까지 왔다고 강 종주님이 경을 치시던 걸."
"응..."
"그만큼 네게 꼭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나봐?"
수애는 사윤의 손에 감아놓은 붕대를 풀어내곤 깨끗한 물에 상처를 닦아낸 뒤에 그 위에 연고를 펴발랐다. 요며칠 매일 아침 저녁으로 거르지 않고 사윤의 상처를 돌본 덕에 수애는 능숙하게 치료를 마무리했다.
"금릉과 무슨 얘길 하였어?"
"자기 모친 얘길 했어. 십육년 전, 불야천에서 금릉의 모친께서도 돌아가셨으니까..."
"응... 그렇구나."
"수애야."
"응?"
"네 어머니와 아버지 전장에 나섰다 전사하셨다고 하셨지?"
"응. 내가 다섯살 때 투기대륙에 큰 전쟁이 있었어. 두 분 다 전장에 나섰다가 영영 돌아오지 못하셨지."
"원망스럽지 않아?"
사윤의 물음에 수애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와 눈을 맞췄다.
"어떻게 원망스럽지 않겠어. 예전엔 아주 미워했어. 하지만 짧은 순간이었다해도 난 두 분에게 정말 많이 사랑 받았어. 아낌없이 사랑해주고 떠나셨어. 사랑하는 마음이 미워하는 마음보다 큰데 어떻게 계속 미워할 수 있겠어."
사윤의 머리를 쓸어넘겨준 수애는 사윤을 끌어안았다. 수애의 품에 고갤 파묻은 사윤은 이 순간만큼은 세상 근심과 걱정이 전부 씻겨져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네가 무슨 마음일지 모르지 않아. 용서를 강요할수도 없고. 다만 어떤 선택을 하든 너 스스로를 아프게 하지만 마. 너를 아끼고 사랑해서 걱정하는 사람이 아주 많으니까."
"수애야."
"응."
"네가 내 곁에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금릉과 수애의 충고를 들은 이후로 사윤의 분노는 눈에 띄게 누그러들었다. 더는 스스로 화를 주체하지 못해 날뛰지 않았고 대신 혼자 사색에 잠기는 일이 잦아졌다. 사윤은 자신이 그 당시의 무선이었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지 몇 번이고 머릿속에서 같은 상황을 그려봤지만 아무리 머릴 굴려보아도 만족스러운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남사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불러도 대답이 없고."
"미안, 나 불렀어?"
"응. 갈데가 있어."
"어디?"
"따라오면 알아."
사윤을 불러낸 수애는 그를 데리고 연화오 근처의 부둣가로 향했다. 부둣가 근처엔 커다란 시장이 있어 낮이고 밤이고 사람이 가득했고 활기찬 시장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사윤의 얼굴에도 간만에 생기가 넘쳐났다. 머리장식을 파는 좌판 앞에 자연스럽게 걸음을 멈춘 사윤은 수애에게 선물할 것을 고르다 비단 머리끈을 보곤 무선에게 전해주지 못한 머리끈을 떠올렸다. 무선에게 참으로 잘 어울릴 것 같아 골랐던 것인데 결국 주인을 찾아가지 못하고 연화오 처소 어딘가에 쳐박혀있는 머리끈을 생각하자 사윤은 다시금 마음이 심란해져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아윤."
"형장? 귀장군?"
수애가 사윤을 이끌고 간 객잔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건 사추와 온녕이었다.
"부친이 보내서 온 거야?"
"아니, 그저 네가 보고 싶어 온 거야. 온 숙부도 네가 보고 싶다 하여서."
사추의 말에 온녕은 사윤을 향해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사추를 통해 사윤이 무선의 죽음에 대해 알게 되어 운심부지처로 돌아오지 않고 연화오에서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온녕은 그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가 있어 운몽까지 어려운 걸음을 하였다.
"아윤, 그간 경황이 없어 제대로 인사조차 나누지 못했네."
"귀장ㄱ... 아니 온 숙부는 잘 지내셨어요?"
"온 숙부?"
예상치도 못한 호칭에 온녕이 당황하자 사윤은 뭐가 잘못됐냐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제가 어릴 때 난장강에서 함께 지냈잖아요. 그리고 사추 형장에게 숙부이면 제게도 숙부에요."
"그래, 아윤. 네가 편할대로 부르도록 해."
"정말 그냥 절 보러 오신 거예요?"
"할 얘기가 있어서. 난장강에서 우리가 같이 살 때의 얘기야. 그때 넌 아주 작은 아이였지. 정말 작았는데... 지금은 훌쩍 자라버렸구나. 함광군의 어릴적을 그대로 빼다박았고."
무선의 영혼이 십육년간 잠들어있었던 것처럼 온녕 역시 그 긴 세월동안 의식이 봉인되어있었으니 제 무릎까지 밖에 오질 않던 사추와 갓난아이였던 사윤이 어엿한 청년으로 자란 것만으로도 격세지감이 느껴졌다.
"위 공자가 네 어릴 적에 대해 얼마나 얘기해주었을지 모르겠지만 본인이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것에 대해서는 아마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을 거야. 그런 사람이니까."
"온 숙부도 모친의 편을 들어주러 온 거예요?"
"그냥 얘기하러 왔다니까."
사윤이 입술을 삐죽 내밀며 서운한 티를 내자 그 모습이 무선과 닮아 온녕의 입가엔 미소가 절로 걸렸다.
"아윤, 금단을 빼낸다는 게 어떤 건지 알고 있어?"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겪어본 적도 없는데다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흔치 않잖아요."
"흔치 않은 정도가 아니지. 세상에 그런 일을 할 사람은 위 공자뿐이야. 누가 자기 금단을 빼서 다른 사람에게 주겠어. 차라리 처음부터 금단이 없었던 몸이라면 모를까 원래 있었던 걸 빼내는 건 서서히 죽어가는 것과 마찬가지야. 자신의 몸에 넘칠만큼 흐르던 영력이 서서히 꺼져가는 걸, 없어지는 걸 온몸으로 느낀다고 생각해봐. 그것도 수사로서 재능과 자질이 부족함 하나 없었던 사람이. 그리고 그런 몸으로 널 낳았지. 우리 누님께선 그 몸으론 아이를 낳지 못할 거라고, 아이를 낳다가 죽을지도 모른다 충고했지만 위 공자는 목숨을 걸고 널 낳았어. 죽음까지 각오하고 널 낳은 거야. 아윤, 너도 난장강이 어떤 곳인지 봐서 알잖아. 어른도 살기 힘든 곳에서 갓난아기가 어떻게 버틸 수 있었겠어. 그런데도 넌 그곳에서 어디 하나 크게 아픈 곳 없이 자랐어. 위 공자가 자신의 피와 살을 내어주고 키웠으니까. 넌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옆에서 지켜본 나는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기억해. 위 공자가 얼마나 널 사랑으로 키웠는지. 본인이 매일 밤마다 피를 토하는 건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네가 조금이라도 아프면 너보다 더 아파하였어. 너만큼은 배 곯게 하지 않으려 제 입으로 들어갈 걸 전부 네게 주었지. 죽음으로 한 발자국씩 걸어 들어가면서도 너만은 끝까지 지키려던 사람이야. 단 한 순간 실수로 네 손을 놓아버렸다고 평생 그 손을 잡아주지 않기엔 네 마음도 괴로울 것 같아 꼭 얘기해주고 싶었어. 아윤, 위 공자는 언제고 네게 손을 뻗고 있을테니 네가 준비가 되면 다시 잡아주면 돼. 그게 얼마나 오래 걸리든 너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기다려 줄 거야."
어느새 눈시울이 촉촉하게 젖어든 사윤을 보고 온녕은 그의 어깨를 다정스럽게 도닥여주었다. 그 순간 온녕의 마음엔 제 손이 보통의 사람들처럼 따뜻했다면 좋았을텐데라는 아쉬움이 스쳐지나갔다.
"금릉은 잘 지내고 있어요..."
"응?"
"온 숙부가 궁금해 할 것 같아서요. 갑자기 종주가 되어 바빠보이긴 하지만 아주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 말아요."
"그렇구나... 고마워, 아윤."
온녕과 사윤이 얘기를 나누는 동안 수애와 함께 한 발 물러나 그들을 지켜보던 사추는 사윤이 자신을 돌아보자 얘기가 다 끝난 것 같아 그에게 다가갔다.
"아윤, 네가 없으니 다들 심심하다고 아우성이야."
"숙조부님은 내가 없으니 운심부지처가 조용해서 좋다고 하시겠네."
"말은 않지만 남 선생님도 널 많이 걱정하고 계셔."
"모친은...?"
사윤이 무선에 대해 물어보자 사추는 솔직하게 말을 해야할지 말아야할지 대답을 망설였다.
"형장은 거짓말 하면 얼굴에 다 티나는 거 알지? 숨기지 말고 얘기해줘."
"위 선배 우는 소리가 매일 영죽당 담장을 넘어 선부에 울려퍼지니 다들 걱정을 안하고 베길수가 있겠어... 며칠 전에도 의원이 다녀갔어. 끼니는 거르고 울기만 하니 기력이 다시 쇠하신 모양이야. 그러면서도 매일같이 연화오에 보낼 서신을 쓰고 계셔. 강 종주님께 네가 잘 지내고 있는지, 어디 아픈 곳은 없는지 묻고 싶은 게 많아서겠지... 아윤."
"응?"
"돌아올거지? 네가 어디 있든, 네 마음이 어딜 떠돌든 네 집은 운심부지처잖아. 기다리고 있을게. 너무 늦지만 말아."
"응..."
사윤과 수애는 늦기 전에 고소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추와 온녕을 배웅하고 조용히 연화오로 돌아왔다. 사윤이 괜한 짓을 할까봐 걱정이 돼 사람을 붙여놓은터라 그가 누굴 만나고 왔는지 알고 있음에도 강징은 이를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온녕이 자신과 금릉의 목숨을 구해줬으니 이젠 서로 빚진 게 없다 여겼기 때문이었다. 방 한구석에 쳐박아놓았던 붉은색 비단 머리끈을 꺼내든 사윤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그것을 하염없이 만지작거렸다.
"뭘 그리 고민해? 이미 답은 정해놓았으면서."
"다들 모친의 편이지? 내 편 들어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
"네 편 여기 있잖아. 돌아가고 싶지 않으면 말아. 이김에 우리 투기대륙으로 떠날까? 거기로 가서 영영 돌아오지 않는 거야."
사윤이 생각지도 못했단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자 수애는 깔깔 거리며 사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거봐, 떠나자는 말에 이리 반응할 거면서..."
"난 아직 너만큼 용감하지 못하나봐. 떠날 자신이 없는 걸 보니까."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돌아갈 집이 있어 떠나지 못하는 거지. 너한텐 돌아갈 집이 있잖아. 기다리는 가족이 있고... 난 아무것도 남지 않아 미련없이 이곳에 온 거야."
"이젠 내가 있잖아."
"응?"
"이젠 내 곁에 내가 있으니까 너한테도 운심부지처가 네 집처럼 느껴졌으면 좋겠어..."
"그럼 우리... 집으로 돌아갈까?"
"그래. 우리 집으로 돌아가자."
다음날 운심부지처로 돌아갈 채비를 마친 사윤은 요란 떨지말고 조용히 돌아가라는 강징의 말에도 자신의 무례함을 사과하고 그간 돌봐준 것에 감사함을 표하기 위해 그를 찾았다.
"그간 여러모로 폐를 끼쳤습니다, 사숙."
"내가 언제 그리 불러도 된다 하였느냐?"
"제가 이리 부르지 않는다 하여도 사숙은 제 사숙이시잖아요."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네 모친과 절연하였는데 내가 어찌 네 사숙이야."
"비록 피로 이어져있진 않지만 모친과 사숙이 가족이 된 것은 분명 하늘의 뜻이고 이는 천륜이지 않습니까? 천륜을 어찌 사람의 힘으로 끊어내겠어요."
"시끄럽다. 그만 떠들고 돌아가."
"시간이 되시거든 운심부지처에 놀러오세요."
"내가 왜?"
"평생 화해하지 않을 작정이에요?"
"그가 먼저 원하지 않은 일이다."
"모친이 싫다하여도 몇 번이고 다시 청하셔야죠."
"그러니까 내가 왜?"
"가족이니까요."
당연하다는 듯 내뱉는 사윤의 말에 강징은 말을 돌리며 해지기 전에 돌아가라 그의 등을 떠밀었다.
"네 백부께 곧 찾아뵙겠다고나 전하거라."
"백부님은 왜요?"
"긴히 할 얘기가 있다고만 전해."
"그 말은 운심부지처에 놀러오신다는 뜻이죠?"
"내가 언제 놀러간다 하였느냐?"
"그게 그거죠. 여튼 이만 물러나보겠습니다, 사숙."
끝까지 저를 사숙이라 칭하며 장난스럽게 웃어보이는 사윤의 얼굴이 무선을 그대로 빼다박아 강징은 결국 작게 웃을 수 밖에 없었다.
덧창 너머 영죽당 정원의 활짝 핀 연꽃을 무선은 죽상인 얼굴로 바라보았다. 연화오로 서신을 보낼 때마다 사윤은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말라는 강징의 답신을 받았지만 직접 볼 수 없으니 걱정만 늘어갈 따름이었다. 한숨만 푹푹 내쉬던 무선의 주위로 반짝이는 금빛의 나비가 날아들고 나비는 사뿐히 무선의 손등에 앉았다.
'사방에 꽃이 만개하였는데 모친께선 어찌 웃지 않으셔요?'
전신지접이 전해주는 사윤의 목소리에 깜짝 놀란 무선은 버선발로 뛰쳐나가고 무선이 갑작스레 정실을 뛰어나가자 당황한 망기가 그 뒤를 따라나섰다. 때맞춰 사윤이 영죽당 문을 넘어 들어오자 무선은 달려가 제 아이를 끌어안았다.
"아윤!"
어렵게 다시 만난 아들이 영영 저를 보지 않겠다고 할까봐 매일 같이 애간장을 태웠던 무선은 사윤과 눈을 마주치자마자 아이마냥 서럽게도 눈물을 터트렸다.
"누가 들으면 초상이라도 난 줄 알겠어요... 어찌 이리 우셔요?"
"며칠만에... 며칠만에 얼굴을 보여준 것인지 알고는 있어?"
떨어져있던 시간 동안 사윤이 어디 다치거나 아프기라도 했을까봐 샅샅이 살피던 무선은 사윤의 손에 남은 상처들을 보곤 제가 다친 것마냥 어쩔 줄을 모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손은 어쩌다 이리 되었어? 치료는? 치료는 한 거야? 약방에서 상처에 잘 듣는 연고를 가져올테니 기다리거라."
이미 아물어 딱지가 진 상처마저도 행여나 사윤이 아플까봐 건드리지도 못하고 애타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무선을 보며 사윤은 괜찮다는 듯 손을 쥐었다 펴보았다.
"수애가 매일 같이 상처를 씻기고 약을 발라주었어요. 사숙께서 좋은 약을 주셔서 다 아물고 나면 흉터도 남지 않을 것이라 했으니 걱정 마세요."
"마음이 상하거든 차라리 나를 때리고 욕해. 네 몸을 상하게 하지 말고."
"어떻게 그리해요. 모친께선 죽을 각오를 하고 저를 낳아주셨는데... 제가 어찌 그리 하겠어요?"
"아윤, 나는... 나는 염치 없이 용서를 바라지 않아. 이리 돌아와준 것만으로 충분해."
"솔직하게 말하면 전 아직도 모친이 미워요. 제가 이해하기엔 너무 어려운 일이고 용서를 하기에도 쉽지 않아요... 하지만 미운 것보다 사랑하는 마음이 더 크니 어찌하겠어요? 돌아올 수 밖에요. 평생동안 모친과 함께 사는 것을 꿈꿨는데 이리 시간을 허비할 순 없잖아요. 그러니 함께하지 못한 날만큼 배로 저를 더 아끼고 사랑해주셔야 해요. 나쁜 기억일랑 전부 잊어버릴만큼요."
사윤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하는 얘기에 무선은 소매로 눈물을 훔치고는 활짝 웃어보이며 사윤의 콧잔등을 툭툭쳤다.
“당연한 소릴 뭐하러 장황하게 해?”
모자가 다시 다정한 한 때로 돌아가니 망기도 그제야 한 시름 놓을 수 있었다. 사윤이 괜찮다는데도 무선은 사윤을 데리고 정실로 들어가 손에 남은 상처에 정성스레 약을 발라주었다. 사윤의 마음에 남은 상처에도 이리 약을 발라 흉터 하나 없이 낫게 해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란 생각을 하던 무선은 이내 남부럽지 않게 사랑으로 키우는 것이 마음의 상처를 낫게 할 최고의 약이라는 걸 알기에 말없이 사윤의 머리를 몇 번이나 쓰다듬었다.
남의 얘길 떠들어대는 걸 좋아하는 수선계 답게 근래엔 고소 남씨 말썽쟁이 도련님의 가출 소동에 사람들의 관심이 쏠려있던 참이었다. 특히 남의 불행을 떠벌리는 것을 좋아하는 이들이나 질투심이 많은 이들은 이 김에 무선과 사윤이 완전히 틀어지길 내심 바라기도 하였다. 전자야 선독 집안의 불행이라면 두고두고 씹을 수 있는 이야기니 신이 난 것이고 후자는 순전히 사윤을 질투하는 마음에 그의 불행을 바라는 것이었다. 고소 남씨의 하나뿐인 도련님, 그 유명한 함광군의 아들인 사윤에게 유일한 흠이라곤 어미가 누군지 모른다는 것이었는데 그 어미가 이릉노조 위무선이라는 게 밝혀졌으니 이제 수선계엔 사윤과 견줄만한 배경을 가진 공자는 없었다. 그 옛날 무선이 그랬듯 잘난 이에겐 늘 시기와 질투가 따르길 마련이라 알게 모르게 사윤을 투기하는 이들이 수선계에 제법 있었다. 허나 그들의 기대와 바람과 달리 운심부지처의 정실엔 매일 같이 웃음꽃이 피어난단 소식이 전해들고 더불어 선독이 혼례일을 뽑아 선문에 공표하니 아마 내색은 안해도 많은 자들이 배앓이를 꽤나 할 터였다.
불꽃효자 남사윤...
망기무선 망선 사윤수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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