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hygall.com/553179019
view 3652
2023.07.13 04:43


A64935B1-9020-4889-A1DF-39D063BFBA76.jpeg
008fLvvcgy1goy93uczd6j31sz0u0e83.jpg


마치다는 화장실의 거울 속 눈이 발개진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먼 옛날, 가슴이 무너져 버리던 그 시간의 기억을 더듬었다. 

노부가 쓰러졌을 때 노부는 일사병이라고 했고, 다음 날부터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했지만 안색이 계속 좋지 않았기 때문에 몸에 좋다는 음식, 노부가 좋아하는 음식을 해 먹이며 노부의 건강에 신경을 곤두세고 있던 즈음이었다. 노부가 쓰러지고 일주일쯤 지났을 때, 노부의 어머니가 마치다를 찾아왔었다. 

노부와 마치다가 결혼하고 초반에는 몇 번 찾아와 마치다를 모욕하기도 하고 위협하기도 하고 둘이 헤어지게 하려고 몇 번이나 수를 썼었지만 마치다가 내내 무반응으로 일관하며 쫓아내자, 더 이상은 찾아오는 일이 없어서 몇 년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몇 년 전의 그악스럽던 모습보다 훨씬 더 차분해진 분위기로 나타난 노부의 어머니와 마주보고 앉아 있자, 노부의 어머니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아이... 다행히 간 공.여자를 찾았어요.]
[네?]

또 무슨 위협이나 모욕을 가할까 심드렁하게 기다리고 있던 마치다의 머리가 멍해졌다. 간 공.여자라니, 너무나 비일상적인 단어라서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도 못했었다. 그러나 예전처럼 마치다를 욕하지도, 위협하지도 않고, 노부의 어머니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왈칵 쏟아낼 것처럼 절망적이고 슬픈 얼굴로 우리 아이가 그렇게 고생만 하더니, 결국은 젊은 나이에 말도 안 되는 병까지 얻었다고 한탄했다. 

사실일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날 병원에서 노부가 한사코 더위를 먹은 것뿐이라며 의사를 못 만나게 하며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다고 같이 집에 가자고 조르던 걸 떠올리고, 그날 결국 진단서나 처방전 같은 것도 못 봤던 것도 떠올렸다. 며칠째 안색이 돌아오지 않고 계속 핼쑥한 노부의 얼굴도 떠올랐고. 

게다가 노부의 어머니는 병원의 검사 결과지를 내밀었다. 간경.변이라는 노부의 진단서와 노부가 어릴 때부터 집안끼리 약속이 돼 있었던 약혼자의 검사 결과를 함께 내밀었다. 그날 노부가 쓰러졌을 때 실려갔던 바로 그 병원이었다. xx병원. 이 지역에서는 제일 큰 병원이었다. 마치다는 그 검사지를 보면서 간경변이 무슨 말인지 한참을 생각했다. 그리고 마치다는 얼굴을 본 적도 없지만 모 병원장의 아들이라는 약혼자의 검사 결과지에 나와 있는 '적합'이라는 말도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우리 노부유키, 이식받지 않으면 올해를 못 넘길 수도 있어요.] 

숨이 턱 막히는 잔인하고 끔찍한 말을 내뱉는 노부의 어머니를 바라보자, 노부의 어머니는 마찬가지로 심장이 찢어지는 기분을 느끼고 있는 것 같은 참담한 얼굴이었다. 

[그럼 이식받으면...]
[이식 받으면 면.역억제제를 계속 복용해야 하지만 건강하게 살 수 있죠.]
[그럼 당장 해요! 당장!]

마치다가 성급하게 일어나려고 하자, 노부의 어머니는 노부의 약혼자였었다고 하는 이의 검사 결과지를 톡 건드렸다. 

[이쪽에서 간 이.식의 조건으로 우리 노부유키와의 결혼을 걸었어요.]
[... 네?]
[이 아이도 간의 일부를 우리 노부유키에게 주면 간이 재생되는 기간동안 계속 조심해야 하고, 일단 자기 몸의 일부를 내 주는 건데 그냥 내 줄 수는 없지 않겠어요?]

그 사람이 노부를 그렇게 많이 좋아했었다고 들었었다. 어릴 때부터 늘 노부와 결혼할 거라고 했었다고. 그런데 간 이.식에 결혼을 조건으로 걸었다고? 그렇게 좋아했다면서 조건을 들어주지 않으면 노부를 살려주지 않겠다고 했다고? 어떻게 그런? 아니, 좋아하기 때문에 이 기회를 놓치기 싫은 건가. 

[제가 이식할게요. 저 O형이고, 노부는 AB형이니까!]

마치다는 제가 간을 주겠다고 지금 당장 검사를 하자고 일어섰고, 노부의 어머니는 마치다를 xx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노부가 쓰러졌을 때 갔었던 바로 그 병원이었다. 그리고 초조하게 며칠을 기다린 후 병원에서 받은 검사지에는 '부적합'이라는 말과 함께 'B형간.염 보.균자'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그 검사결과지를 놓고 노부의 어머니는 마치다를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봤었다. 

[마치다 상도 건강 관리 잘하셔야겠네.]

마치다가 검사결과지만 한참을 바라보고 있자, 노부의 어머니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마치다를 바라봤다. 

[우리 노부유키, 살릴 수 있게 해 줘요, 마치다 상.]
[...]
[이걸 우리 노부유키에게 말해도, 우리 아이... 이혼하려고 하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마치다 상이 떠나 주세요. 나 그 애가 집을 나가 마치다 상하고 사는 것까지는 참고 봤지만, 내 아이 이렇게 일찍 떠나는 것까지 볼 수는 없어요.] 
[...]
[부탁해요. 마치다 상.] 
[...]
[마치다 상만 떠나면 우리 노부유키는 살 수 있어요.]

발 밑이 훅 꺼지는 것 같았다. 귀가 웅웅거리고 눈 앞이 하얗게 점멸하는 기분이었다. 마치다가 떠나지 않으면 노부가 죽는다고. 생애 마지막까지 함께하자고 약속했던 사람이었지만, 정말로 눈 감는 그 순간까지 노부와 함께하고 싶었지만, 노부가 이렇게 일찍 눈을 감는 걸 보고 싶지는 않았다. 마치다의 옆에 있어주지 않더라도 노부가 계속 살아갈 수 있길 바랐다. 당연한 것 아닌가. 

마치다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자 노부의 어머니는 드라마에서 보던 사모님들과 달리 돈봉투 대신 이혼서류를 내밀었다. 





마치다가 자신이 B형간.염 보균자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 뒤에도, 노부의 어머니에게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된 뒤에도 노부의 몸상태에 대해 들었던 끔찍한 말을 의심하지 않았던 건, 마치다에게도 류세이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류세이가 기침만 해도 가슴이 철렁하고 류세이의 보들보들한 피부에 생채기가 나서 핏방울만 비쳐도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내 아이가 다치거나 아픈 걸 상상만 해도 가슴이 무너지는데 자기 아들의 병과 목숨을 두고 그런 무시무시한 거짓말을 할 수 있는 부모는 없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에 거짓말일 거라고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거짓말이었다고. 약혼자였던 이가 병원장의 아들이라고 했지. 노부는 병원에서 검사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xx병원이었냐고 물었고. 그 병원이 그 집안의 병원이었나. 그 끔찍한 서류들이 전부 조작된 것이었다고. 

마치다는 힘이 풀려서 무너지는 다리에 힘을 주며 세면대를 짚고 몸을 바로 세웠다. 

노부가 재벌 집안의 3세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노부를 처음 만났던 시절 집안의 경제력, 아니, 마치다는 그때 이미 남은 가족이 없었기 때문에 집안이라고 할 것도 없었지만, 서로의 경제력이 너무 차이나서 노부를 거절하던 시기도 있었다. 그리고 노부에게 이복형들이 있고 노부의 어머니가 어떻게든 노부가 회사를 물려받게 하려고 노부를 학대에 가깝게 양육해 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런 거짓말을 한다고? 자식의 목숨을 놓고 그런 무시무시한 거짓말을 할 수 있다고? 

여전히 얼떨떨하지만 노부의 몸에는 정말로 흉터가 하나도 없었다. 마치다가 기억하는 그대로 여전히 아름다운 몸이었다. 게다가 노부와 오래 함께 지냈던 마치다는 노부의 사소한 버릇도 잘 알고 있었고, 노부가 거짓말할 때 노부가 의도치 않게 보이는 버릇도 알고 있었다. 노부는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었다. 노부는 그때도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건강했다. 

"하아..."

그럼 이제 우린 어떻게 해야 하지... 마치다는 셔츠 옷깃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 목걸이로 만들어 걸고 있던 반지를 꺼내 쥐었다. 노부에게 이혼을 강요하면서 노부의 마음를 무너뜨리고 떠나왔지만 이 반지만은 떼놓을 수가 없었다. 별이 쏟아지던 그 밤에 자기와 평생 함께해 달라며 건네준 그 반지를 어떻게 떼어놔. 

게다가... 노부는 6년간 정말로 끔찍한 시간을 보냈을 것이었다. 학대에 가까운 대우를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내고 겨우 마치다를 만나서 이제 행복해지나 했는데, 마치다는 그런 노부를 잔인하게 떼놓고 돌아섰다. 그래서 웃는 게 세상에서 제일 예쁘던 사람이, '유치원에 와서 동화책 읽어 준 아저씨가 밀크세이크 사 줬어!' 했던 류세이가 '되게 잘 생겼고 목소리도 되게 좋은 아저씨인데 웃는 게 이상했어.'라고 할 지경이 됐겠지. 웃을 수 없는 6년을 보낸 탓에. 마치다를 제 목숨보다 사랑했던 노부를 그렇게 괴로운 시간 속으로 밀어넣은 게 너무 한심해서 기껏 씻은 보람도 없이 다시 뺨 위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했지만 많이 놀랐을 류세이의 마음을 달래주는 게 급했기 때문에 서둘러 작업실로 돌아가며 마치다는 류세이가 체하지 않도록 편안하게 먹일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계속 고민하고 있었다. 그리고 막 작업실의 문을 열려고 했을 때였다. 





"우리 엄마 또 울리면 가만히 안 있을 거예요."

류세이의 다부진 협박에 마치다가 미안함과 슬픔,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사랑스러움을 함께 느끼며 문고리를 돌리려고 했을 때. 

"응. 다시 울리지 않을게."
"나도 엄마 한 번 울렸으니까 한 번은 봐 줄게요."
"류세이가 엄마를 울렸어?"
"작년에 너무너무 아파서 병원에서 잤을 때, 자다가 일어나니까 엄마가 막 울고 있었어요."

작년에 류세이는 독감에 걸려서 호되게 앓았고 열이 내리지 않아서 병원에 입원했었다. 라샤또네 브랜드가 한창 커져가던 시절이라 너무 바빴기 때문에 독감예방주사를 맞히는 시기를 놓칫 탓이었다. 일이 뭐가 중요하다고 아이에게 예방주사 맞히는 걸 챙기지 못해서 류세이가 아프다는 생각에 너무 미안해서 류세이가 열에 들떠 잠들었을 때 그 곁에서 아이의 땀을 닦아주며 울었었는데. 류세이가 중간에 깨긴 했지만 여전히 열에 들떠 있는 상태라 우는 걸 봤어도 기억하지 못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이의 조그만 머리에 깊이 새겨진 모양이었다. 마치다는 씁쓸하게 한숨을 삼켰다. 

"엄마가 '노부'를 너무너무 좋아하니까 한 번만 봐 주는 거예요. 잘해야 돼요. 알았죠?"

류세이에게 노부의 이야기를 몇 번 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노부의 생일에 함께 케이크를 먹으면서 노부와 있었던 일 몇 번 이야기해 준 게 전부였던 것 같은데... 아닌가...

마치다가 붉어진 얼굴로 작업실의 문을 열자, 마치다가 가장 사랑하는 남자가 마치다가 가장 사랑하는 아이를 안아주고 있었다. 

"응. 이제 정말 잘할게. 약속할게, 류세이."

세수를 몇 번이나 하며 눈물을 씻어낸 보람도 없이 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노부마치   #이혼한노부마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