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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08 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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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살에서 아홉 살로 넘어가던 12월의 마지막 날, 동네에서 가장 좋아했던 형이 사라졌다. 학교에서도 놀이터에서도 종일 만날 수 없었던 이유가 온가족이 온다간다 말도 없이 이사를 해버렸기 때문이란 걸 처음엔 믿지 않았다. 엄마는 거짓말쟁이야. 케이가 2월에 같이 로봇 특공대 보러 가자고 했단 말이야. 엄마가 집에 가봐. 전화해봐. ? 내일은 놀이터에 나올 수 있는지 물어봐. 야반도주하듯 사라져버린 이웃의 사정을 엄마라고 알 리가 없었다. 그해의 여름 방학이 시작될 때까지도 계속 기다리다가,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케이는 이제 오지 않아. 이젠 만날 수 없어.

 

여덟 살 꼬맹이가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고, 전교생 중에 가장 큰 키로 졸업하게 되는 모든 순간에 마치다는 없었다. 스무 살이 되던 해에 고향을 떠나 대도시 옆 작은 동네로 이사를 했다. 엄마는 대학 진학을 권유했지만 노부유키는 바로 밴드에 들어갔다. 처음엔 보컬을 구한다고 해서 찾아갔고 오디션 때 노래도 세 곡이나 불렀는데 막상 멤버가 되고 보니 기타 포지션이었다. 작은 지하 공연장에서 몇 번이나 공연을 해봐도 유명세는 쉽게 얻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1, 2년 시간이 흐르고 밴드는 흐지부지 해체되고 말았다. 새로운 밴드에 들어가기도 하고 직접 밴드를 결성하기도 했지만 도대체 얼마나 더 버텨야 지하 공연장을 벗어날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노부유키는 스물아홉 살이 되던 해에 드디어 결단을 내렸다. 배우가 되어야지. 그렇게 1년째 여러 극단을 찾아다니며 오디션 기회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었다. 마치다의 병원이 개원한다는 현수막을 본 건 극단 오디션에서 보기 좋게 탈락한 어느 날의 낮이었다. <원장: 소아과 전문의 마치다 케이타> 이름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고 바로 어린 시절의 그 케이를 떠올렸다. 그리고 대문짝만하게 실린 얼굴을 보니, 어쩌면 진짜 그 케이가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은 점점 더 확신에 가까워졌다.

 

개원 날짜만 목이 빠지게 기다리던 노부유키는 떨리는 마음으로 병원을 찾았다. 예상과 달리 병원 로비는 텅 비어있었고 지나치게 많은 직원과 간호사가 자신을 반겨주었다. 함께 온 어린 아이를 찾는 눈빛이 적나라했다. 성인도 진료 볼 수 있나요? 라고 묻자 직원은 그렇다고 대답하며 어디가 아픈지 물었다. 아픈 곳이 없어 만만한 복통을 핑계로 댔다. 곧 진료실로 들어가라는 직원의 안내를 받고 크게 심호흡한 뒤 진료실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마주친 두 눈은, 짙은 눈썹과 뾰족한 입매는 노부유키가 기억하는 케이의 것이 맞았다. 순간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저쪽은 자신을 전혀 알아보지 못한다는 걸 금방 깨닫고 마음이 가라앉았다. 의미 없는 말을 주고받으며, 겉으론 보기 좋은 웃음을 지으면서 쓰린 속을 삼켜야 했다. 거짓말로 둘러댄 증상에 장염약을 처방받았고 그 약을 호기롭게 삼켰다. 증상도 없는 몸에 약을 밀어 넣으니 속이 울렁거리고 기분이 불쾌해졌다. 결국 회복실에 누워 조금 쉬기로 했다. 아프지도 않으면서 거짓말로 약을 타 먹고 그 약 때문에 탈이 나기 직전이라니, 이렇게 바보 같은 짓을 한 것도 정말 오랜만이었다.

 

정신을 차리니 주변이 캄캄했다. 병원엔 마치다와 단 둘이 남게 됐고, 비몽사몽 한 상태에서 내면에 남은 서운한 감정이 불쑥 튀어나와 덥석 팔뚝을 잡고 집요하게 굴어 버렸다. 필요 이상으로 놀라 버린 그의 얼굴을 보고 노부유키 역시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싱거운 사과와 함께 회복실을 나서면서 주머니에 지갑이 없다는 사실을 바로 깨달았지만 일부러 되돌아가지 않았다. 그 지갑 안에 미리 껴둔 그 사진을 마치다가 봐주길 바랐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단번에 서로를 알아보고, 그 사진을 안주 삼아 맥주 한잔하는 것이었지만. 저 사람 머리에 자기 이름도 얼굴도 남지 않았으니 다 물거품이었다. 너무하네 싶다가도 22년이나 흘렀으니 아주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갑자기 사라졌던 그 날도, 이렇게 갑자기 마주친 오늘도. 그는 차분하고 평온하고 뭐든게 상관없어 보였다. 케이 삶엔 내가 없는 게 익숙하겠지 이미. 아마 처음부터 그랬을지도 모르지. 그러니 인사도 없이 그렇게 떠났겠지. 밤이 길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동네를 산책하다 마주친 그를 보고, 몇 년 전 잃어버린 주인이 날 알아봐 주길 바라는 강아지가 된 기분이었다. 제발 이젠 기억난다고 해줘. 하지만 그는 역시 오늘도 병원 원장일 뿐이었다. 더 숨길 이유도 없고 여유도 없어진 노부유키는 덤덤한 척 연기를 하며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생각 보다 뛸 듯이 기뻐하지 않는 모습에 또 한 번 서운해졌지만 이렇게 다시 만났으니 이걸로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전 헤어진 고향 친구를, 내가 가장 좋아하고 잘 따랐던 형을 22년 만에 만난 것만으로 충분히 소중한 시간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넘겼어야 했다.

 

하지만 노부유키는 또다시 그의 병원을 찾아갔다. 눈에 거슬리고 싶었다. 내가 그동안 못 쳤던 장난들, 수도 없이 놓친 재밌는 이야기들, 이제라도 전부 하고 싶었다. 그리고 갑자기 내린 비에 젖어 버린 마치다의 까만 머리카락은 희한할 만큼 노부유키의 손을 이끌었다. 이런 스킨십, 불쾌하게 느낄 수도 있겠지만 그냥 몸이 가는 대로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딱히 밀어내지 않는 태도에 묘한 감정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따지기 좋아하고 예민하던 그 형 맞아? 남의 손 타는 게 익숙한 사람이 된 거야? 아니면... 나 같은 건 그저 동생일 뿐이라 아무 감정도 안 드는 거야? 노부유키는 케이의 지난 22년이 궁금해졌다.

 

케이, 저녁에 우리 집 놀러와.”

 

메뉴판에서 눈을 뗀 그는 노부유키를 향해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알겠다고 대답했다. 낯선 동네에 마음 붙일 사람 하나 생긴 게 싫지 않은 표정이었다.

 

내일은 주말이니까 병원 안 열지?”
 

. 안 열어.”


잘됐다.”


뭐가?”


밤새 나랑 놀자. 밀린 얘기도 많잖아.”


이제 밤 새는 거 못하는 나이야 나.”


그건 이제 나도 마찬가지지만...”

 

노부유키는 옛 친구를 집에 초대하는 것 이상의 긴장감과 설렘을 느꼈다. 그리고 절대 이 사람을 실망 시키고 싶지 않다는 부담감에 결연한 표정까지 짓고 있었다.

 

금요일은 야간진료도 하는 날이라 좀 늦어.”


. 근데 야간 진료해도 환자가 안 오잖아.”


너 자꾸 그럴래? 우리 병원 환자 없는 거 내가 제일 잘 아니까 그만해.”


알았어. 미안. 이따 꼭 와. 늦어도 돼.”

 

두 사람은 비 내리는 길거리를 내다보며 덮밥 그릇을 싹싹 비워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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