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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06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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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 안에 남의 지갑을 넣고 있다는 찜찜한 마음을 애써 누르고 집을 나섰다. 그냥 병원에 두고 올 걸 그랬나, 라는 말을 중얼 거리며 등 뒤로 문 닫히는 소리를 들었다. 비가 올 것 같았다. 병원에 도착하기도 전에 비가 쏟아지면 어쩌나 하는 잡생각을 한번에 물리쳐준 건 별안간 눈앞에 나타난 그 남자였다. 어제 한 번 병원에서 봤을 뿐이니 안다고 하기도 모른다고 하기도 애매한 사람. 지갑 때문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무슨 말이 나오기 전에 얼른 서류 가방을 뒤적여 지갑부터 꺼냈다.

"지갑 두고 가셔서 제가 챙겼어요."

지갑 주인은 난감한듯한 미소를 지으며 이마를 긁었다.

"병원에 둘까 하다가 괜히 다른 사람 손 탈까봐 제가 어제 가지고 퇴근했어요."

참 이상한 일이었다. 지갑에 위치추척기를 달아놓지 않은 이상 어떻게 집을 찾아낸걸까. 혹시 어젯밤 미행이라도 한 건가. 왜? 지갑 흘린 걸 깨닫고 병원쪽으로 되돌아 왔다가 집으로 걸어가던 날 따라온 거야? 그럼 바로 날 불렀어야지 응큼하게 집만 알아내고 다음날 찾아온 거라고?

"그런데 제 집은 어떻게 알았어요?"

남자는 못참겠다는듯 실소를 터뜨렸다.

"지갑 보면 당연히 알아볼 줄 알았는데. 설마 열어보지도 않은 거야?"

"네...?"

"병원에서 내 이름 듣고도 모르고 말야."

스즈키였던가. 어제 내원한 유일한 환자. 이름은 생각나지 않고 성만 떠올랐다.

"스즈키상... 뭔가 착각하신 것 같은데요. 제가 아는 사람 중에 스즈키라는 성을 쓰는 사람이..."

남자의 얼굴에선 점점 웃음기가 사라져갔고 서운한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스즈키 노부유키... 모른다고? 전혀 기억에 없어?"

기분 나쁜 장난에 놀아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즈음, 남자는 마치다의 손에서 자기 지갑을 빼앗아 그것을 열어 보였다. 투명 포켓에 끼워진 사진 한 장. 그 안엔 마치다의 어릴적 사진이 들어있었고 어린 마치다 옆엔 자기 보다 한 뼘 정도 키가 작은 꼬마애가 있었다. 그 사진을 보니 어렴풋이 그날이 떠올랐다. 동네 아이들과 어른들이 모여 유카타를 입고 축제를 즐기던 날이었다. 불꽃놀이와 솜사탕, 떡꼬치, 엄마가 못 먹게 했던 형형색색의 음료들. 스즈키 노부유키. 동네에서 가장 어려 내가 늘 챙겨야 했던 아이.

"사진 속 이 애가... 당신이라고요?"

"케이."

버릇없이 마음대로 이름을 줄여 부른다며 화냈던 장면이 불현듯 떠올랐다. 22년 전의 일이었다. 따끔하게 한마디 하고 돌아서다가 돌뿌리에 그만 발이 걸려 꽈당 넘어지고 말았다. 무릎에서 피가 나는 걸 본 순간 눈물이 터져나왔고 두 살 어린 꼬맹이가 자신을 달래줬었다. 심지어 키도 더 작으면서 자신을 등에 업고 집에 데려다주기까지. 새록새록 옛날 기억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완전히 잊고 살았다.

"미안해. 전혀 못 알아봤어. 너... 키가 너무 커버려서."

"그러게. 이젠 내가 훨씬 더 크네."

"훨씬은 아니고... 저기, 내 집은 어떻게 알았어? 병원도."

"나 이 동네에 산 지 10년 됐어. 스무 살 되자마자 여기로 왔거든. 그리고 오해하지 마. 나도 이 골목에 살아."

병원 개원 한 달 전부터 길거리에 현수막을 걸고 자기 사진과 이름을 대문짝만하게 실었으니, 누구든 아는 사람이라면 와볼만 했다.

"반가워. 어떻게 이렇게 만나냐. 신기하다."

"응. 지갑 안 열어볼 줄 알았으면 그냥 어제 바로 아는척 할 걸 그랬네. 남의 물건에 손 안 대는 착한 어른이 됐구나."

"그러게... 바로 아는 척 하지 그럤어. 아무튼 나 늦으면 안 돼서 일단 가볼게."

"응."

마치다는 걸어서 10분 거리인 병원에 얼른 도착해 환자 맞을 준비를 했다. 유독 어린 아이가 없는 동네에 병원을 차린 건가 싶을 만큼 환자가 없어 병원이 조용했다. 개원한 다른 동기들에게 물어보면 진료 시간 훨씬 전부터 엄마들이 애 안고 줄줄이 기다린다던데. 이러다 병원이 망할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마치다 선생님. 환자 있습니다."

"아, 들어오라고 하세요."

넥타이를 제대로 고쳐 매고 환한 미소를 유지한 채 맞이한 오늘의 첫 환자는, 또 스즈키 노부유키였다.

"넌... 직업이 없니?"

"컨디션이 너무 안 좋아. 나 비타민 처방 좀 해줘. 병원 처방전 있어야만 살 수 있는 좋은 것들 있다던데."

"너 어제 장염 때문에 왔잖아. 그냥 물 많이 마시고 푹 자. 내일이면 괜찮아질 거야."

"주사라도 맞을까봐."

"소아과에 네가 맞을만 한 주사 없거든."

"저건?"

면연력을 높여준다는 주사 광고가 작은 화면에서 무한 재생되고 있었다.

"너 하루라도, 아무 약이라도 몸에 넣지 않으면 안 되는 이상한 의존증이라도 있는 거야?"

"그런거 아니야. 사거리 병원은 너무 멀고 대기도 길어. 여기서 저거 맞고 좀 쉴게."

결국 그는 또는 회복실의 좁은 침대에 누워 팔을 걷었다. 그렇게 점심 시간이 될 때까지 누워만 있다가 간호사들이 밥 먹으러 간다는 소리에 벌떡 일어나 진료실 문을 두드렸다.

"네."

"케이, 밥 먹으러 가자."

"뭐야... 너였어? 왜 아직도 안 갔어."

"나 아직 장염 다 안 나았으니까 순한 거 먹자."

달리 거절할 말도 생각나지 않고, 바쁘다는 핑계는 애초에 통하지도 않을 만큼 환자가 없었다. 마치다는 22년만에 만난 꼬맹이와 함께 점심을 먹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시 훌쩍 커버린 키는 적응이 되지 않았다. 내가 쟤를 올려다 봐야 한다니.

"두 시간 정도 시간 뺄 수 있어?"

"의사가 그렇게 한가한 줄 알아?"

"나 주사 맞고 누워있는 동안 환자 한 명도 안 오던데."

"시끄러워."

병원 밖으로 나오니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둘 다 걸어왔기에 별다른 이동 수단이 없어 길건너 식당까지 뛰기로 했다. 겨우 식당에 들어가 앉았고 메뉴판부터 뚫어지게 쳐다보는 마치다의 머리카락을 그가 툭툭 털어줬다. 빗물이 테이블과 바닥으로 튀었다. 어째서인지 내 머리에 손 대지 말라거나, 그냥 두라거나 하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저 언제 저렇게 커버린 거야, 라는 싱거운 생각만 계속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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