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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29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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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이야기라... 그렇다면 렌 왕자님 이야기를 안 해줄 수가 없지. 옛날, 옛날 먼 옛날. 쟈니 대륙의 동쪽에 위치한 작은 왕국에는 지혜로운 메구로 왕과 아름답고 현명한 메구로 왕비가 살았어. 작은 소왕국이긴 했지만 백성들을 살뜰히 돌보는 왕과 왕비와 그들을 진심으로 존경하는 심성 착한 백성들로 왕국은 언제나 평화로웠지.

그러던 어느 날, 왕국에는 아주 커다란 기적이 일어났어. 바로, 아이를 너무너무 원했지만 좀처럼 아이가 찾아오지않던 메구로 왕가에 드디어 사랑스러운 왕자님이 태어난거였지. 왕자님을 가졌을 때, 꿈 속에서 커다란 연꽃이 왕비님의 품에 안겨왔다고해서 왕자님의 이름은 렌이였어. 메구로 렌. 이름부터 고귀한 렌 왕자님은 왕과 왕비뿐만 아니라 온 백성들의 사랑을 받으며 무럭무럭 자라, 누구라도 뒤를 절로 돌아보게만들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년으로 자라났어.

렌 왕자님은 정치나 무역같은 지루한 책상공부보다는, 탐험과 모험을 더 좋아했어. 왕자님이 13살이 되던 해, 메구로 왕에게 조르고 졸라 받은 돛단배는 왕자님의 보물 1호였지.

14살이 되던 해, 배를 타고 서쪽 바다에 나갔다가 악명 높은 해적단과 마주쳤다가 죽을 위기를 넘기고 왕국으로 돌아온 왕자님은, 기적처럼 돌아온 그 날 바로 돛단배를 압수당하고 외출금지령이 내려졌어. 삶의 전부였던 배도, 바다도 금지당한 왕자님은 하루하루 우울해했지.

처음엔 왕자님이 식음을 전폐한다는 보좌관의 보고에도 단호했던 메구로 왕과 왕비였으나 사랑하는 아들이 하루종일 왕궁에서 바다가 제일 잘보이는 창만 바라보며 시름시름 앓는 모습에 결국은 백기를 들었지. 20살, 성인이 되는 날 다시 배를 돌려주겠다고 말이야. 외출금지령도 풀어주겠다고. 왕자님은 지금 당장 배를 타고 나가고싶었지만, 이 이상으로 양보해주지는 않을 부모님을 아주 잘 알았기 때문에, 어서 성인이 되기만을 손꼽아 기다렸지.

왕자님은 고대하고 고대하던 스무살이 되었어. 어린티를 완연히 벗은 미청년은 스무살 생일날, 꿈속에서도 하염없이 바랐던 자신의 보물을 다시 돌려받았지. 다시 바다로 나가려는 왕자님을 배웅하러 나온 메구로 왕비는 단단히 주의를 주었어.

"렌, 두번 다시는 서쪽 바다에는 가지 않도록 하렴."
"왜요?이제는 해적단들도 전부 소탕되었잖아요."
"그래도 그곳은 절대로 가면 안돼. ...그곳엔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이 살고 있단다."

렌 왕자님은 왕비의 말이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어. 진주빛을 띠는 새하얀 모래알들, 투명한 햇살에 반사되는 에메랄드빛을 띠는 바다, 그 아래를 자유로이 유영하는 물고기들. 그리고...

아무튼 서쪽 바다만큼 아름다운곳은 또 없었거든. 게다가 이제 렌 왕자님은 그때의 연약한 소년따위가 아니야. 해적단들도, 바다괴물도 가볍게 해치울 수 있을 정도로 강해졌는걸. 왕국에서 제일... 아니 쟈니대륙 제일의 검사라는 호칭까지 붙여졌을 정도로 말이지. 아마 어머니는 아직도 저를 그때의 14살, 어린 아이로 보고있는걸꺼야, 괜한 걱정이시지.

어머니의 걱정을 가볍게 무시하고 서쪽 바다로 떠난 렌 왕자님은 6년만에 재회한 바다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어. 좀더 쉬었다가 해가 완전히 져서 어두워기전에 왕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며 모래사장에 누워 선잠을 청하던 렌 왕자님은 아주 작게, 하지만 선명하게 들려오는 아름다운 노랫소리에 천천히 눈을 떴어. 그리고는 멜로디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지. 새파랗던 하늘을 조금씩 물들이는 노을 아래 선이 고운 실루엣이 렌 왕자님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았어. 사람...?

바위 위에 앉아있는 소년의 피부는 석양 아래서 그 어느 조개 속의 진주보다 뽀얗고 반짝거렸어. 별을 박아넣은 듯한 눈동자는 느리게 깜빡이고 있었고 그 아래 오똑한 콧대, 그 아래에 자리한 살짝 벌어진 붉은 입술에서 저를 이곳까지 이끈 멜로디를 만들어낸게 분명했지. 바다에서 미풍이 불어올때마다 검은 머리칼이 살랑일때마다 왕자님의 마음도 함께 흔들렸어.

그리고...마치 북쪽 어느나라에서만 볼수있다는 오로라를 담아놓은듯한 오묘한 분홍색의 비늘이 반짝이는 꼬ㄹ...잠시만...꼬리...?설마...

그때였어. 노랫소리가 멎고 두 눈이 딱 마주친것은. 붉은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은 인어 소년은 렌 왕자님을 놀리듯이 바다속으로 몸을 던졌어. 잠시 뒤, 수면위로 모습을 드러낸 인어 소년이 물 속에서 다시 노래를 불렀어. 왕자님은 천천히 소년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인어 소년은 그런 왕자님을 향해 손짓했어. 그리고 순식간이였어. 소년이 손짓으로 불러온 커다란 파도 속에 왕자님을 가둔것은.

"궁금하지않아? 네가 질리도록 본 이곳의 풍경이 아닌, 저 바다속의 새로운 세상이."

아마, 땅보다 훨씬 즐거울거야. 작은 웃음소리를 마지막으로 파도는 섬뜩한 아가리를 벌려 순식간에 두 사람을 삼키고는 서서히 가라앉았어. 두 사람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바다는 다시 석양 속에서 잔잔한 평화를 꾸며내었지.

소년의 품 안에 온몸을 맡긴채 바다 깊은곳으로 내려갈수록 점점 생명이 꺼져가는 왕자님을 가만히 바라보던 소년은 불현듯 눈을 크게 떴어.

"너는...."

소년은 심해 아래로 향하던 꼬리의 방향을 바꾸었지.

"....하필이면...."

작은 탄식도 함께 덧붙이며 말이지.

렌 왕자님을 데리고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온 인어 소년, 미치에다는 바다 속을 자유자재로 가를수있는 지느러미가 아닌, 렌 왕자님을 닮은 인간의 다리로 모습을 바꾸고는 렌 왕자님을 뭍까지 데리고 나왔어. 그리고는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않는 왕자님을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허리를 숙여 입을 맞췄어.
그것은, 미치에다에게는 일종의 작별인사였지. 인어에게 홀려 인어의 키스를 받는 자는, 인어와 관련된 모든것을 잊어버리게 되니까.

"잊어, 렌. 전부."

나는 널 절대 죽일 수 없어. 그러니 나도, 이 곳도, 이곳에 있던 모든 일들을 다 잊고 네가 살아야하는 세상에서 살아가줘.
안녕, 나의 숨결을 받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또 가장 나약한, 그래서 가장 사랑스러운 존재.
마지막 인사를 끝으로 미치에다는 다시 바다속으로 돌아갔지. 이제 다시는 그의 모습을 보지 못하겠지.

"안녕."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노래를 그친 미치에다는 놀란 눈으로 제게 말을 거는 렌 왕자님을 바라보았어.

"저번엔...바다속에서 구해줘서 고마웠어."

뭐...?


"너와 더 얘기해보고싶었는데 눈을 떠보니까 너가 없어서..."

그 날의 기억을...전혀 잊지 않았어..?하지만 어떻게...? 혼란스러웠지만 렌 왕자님이 저를 붙잡기 전에 재빨리 바다로 돌아가는게 급선무였어.

"이름!"
"...."
"이름이 뭐야? 아, 다른 의미는 없어. 내 생명의 은인인데...이름도 모르면 안되잖아."

바보야, 난 널 구해준게 아니야. 애초에 내가 먼저 널 끌고 들어갔다고. 널 죽이려고.

"이름만...가르쳐주면 안될까?"


이름을 가르쳐주면 안되는데. 그냥 이대로 바다속으로 도망쳐야하는데.

"제발..."

하지만 애절한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는 눈동자를 무시하지 못한 미치에다는 머뭇거리다 또다시 금기를 깨고말지.

"...미치에다."

미치에다야 내 이름.

"미치에다....."

이름도 예쁘다, 미치에다. 환하게 웃는 얼굴을 마주보고 있자니 아주 조금의 후회가 밀려왔지만 그의 미소를 이길수있는 사람...아니 생명체가 몇이나 있겠어? 바다 속에 몸을 던지는 미치에다를 향해 렌 왕자님은 손을 흔들었어.

"또 보자, 밋치-"

그러니까...그렇게 웃으면서 애칭까지 부르는건 반칙이라고.

"밋치, 오늘도 도망갈꺼야?"

오늘도 찾아온 렌 왕자님이 미치에다는 아주 곤란했어.

"도망가지말고 노래 계속 불러주면 안돼? 끝까지 듣고싶은데."

미치에다는 저를 바라보는 렌 왕자님에게 말했어. 틀렸어.

"도망가는게 아니라 놔주는거야"
"응?"

미치에다는 인간을 홀린다는 매혹적인 눈웃음을 지었어.

"너도 알잖아, 서쪽 바다에 사는, 인간들을 잡아먹는 괴물. 그게 나거든. 그러니까...내가 놔줄때 도망쳐."

진짜로 잡아먹히기 전에, 내앞에서 사라져.

"넌 아름다워 밋치."

렌 왕자님이 담담한 표정으로 하는 말에 당황스러운쪽은 미치에다였지. ....또다. 또 홀리지 않았어. 어떻게 된거지. 어떻게 두번이나 인어의 최면술을 피해갈수있는거야? 그러나 렌 왕자님이 미치에다의 복잡한 속을 알리가 만무했지. 미치에다는 당황한것을 들키지않기 위해 렌 왕자님에게서 등을 돌렸어.

"네 목소리도, 날 살려준 네 마음도. 네 꼬리도. 그 무엇 하나 아름답지않은게 없어."

네가 정말 괴물이라면 어떻게 그렇게 아름다운 마음에서 우러난 아름다운 가사로 노래를 부를 수 있겠어. 안그래?

"넌 괴물이 아니야."

그러나 미치에다는 렌 왕자님을 돌아보지 않고는 다시 바다 속으로 들어가버렸어. 어쩐지 지금 뒤를 돌아보면, 달콤한 목소리만큼이나 다정하게 미소 짓고 있을 그 얼굴을 봐버리면 안될것같았거든.

렌 왕자님은 매일같이 서쪽 바다의 미치에다를 찾아왔어. 지치지도않는지, 하루도 빠짐없이 찾아오는 왕자님의 손에는 언제나미치에다를 위한 것들이 쥐어져있었어. 그리고 그것들은 매일같이 바뀌었지. 어느날은 동쪽 왕국에서만 핀다는 꽃을 가져와 바위 위에 놓아주었고, 또 어느날은 왕궁의 궁정요리사가 만들었다는 달콤한 케이크를. 또 어느날은 육지에 사는 인간들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쓰여진 동화책으로.

예쁜 꽃도, 맛있는 음식도 아닌, 미치에다를 움직인것은, 멋진 왕자님과 예쁜 공주님의 삽화가 그려진 동화책이였지. 미치에다는 글을 읽을줄 몰랐거든. 간혹 난파선에서 주운 책들 속의 삽화들은 예뻤지만, 인간들의 글을 읽을줄 모르는 미치에다는 동화책의 내용이 너무너무 궁금했어.

그래서....

"이거...."
"응?"
"이거...읽어줘."

미치에다는 부끄러워서 죽고싶을 지경이였지만, 렌 왕자님은 미치에다가 동화책을 들고 제 곁에 다가온 순간, 심장이 터질것처럼 기뻐서 죽을것만같았다는 사실을 절대 몰랐을거야.

그때부터였지. 렌 왕자님이 매일 새로운 동화책을 들고 미치에다를 찾아오기 시작한것은. 심지어 비바람이 치는 날도, 렌 왕자님은 위험을 무릅쓰고 미치에다를 찾아왔어.

그런 렌 왕자님을 육지에 묶어두기 위해, 메구로 왕과 왕비는 렌 왕자님과 이웃나라 공주님의 결혼을 일사천리로 추진했지. 결혼을 거부하는 렌 왕자님의 의견은 철저히 무시당했고, 기어이는 왕성에 감금당하다시피 이웃나라 공주님과의 결혼을 준비하게 되었어.

결혼식 준비로 바빠진 왕자님은 더이상 서쪽 바다를, 미치에다를 찾아오지 못했어. 바위 위에 앉아 몇날 몇일을 저를 찾아올 렌 왕자님을 기다리고 있던 미치에다는 내일 거행된다는 렌 왕자님의 결혼식 소식을 듣고나서야 옅게 미소를 지었어.

렌 왕자님이 제게 읽어준 동화책의 끝도 항상 그랬어. 멋진 왕자님은, 나쁜 악당들을 물리쳐 아름다운 공주님을 구해내고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고 말이야. 뭐 렌 왕자님도 마찬가지겠지. 인간들을 괴롭히는 괴물보다는 이웃나라 공주님이랑 사는게 행복할테니까. 그래도...역시 조금 서글퍼지는건 어쩔수없는걸까. 달나라 토끼 이야기도 끝까지 듣고싶었는데...

미치에다는 배 아래로 뻗은 지느러미가 아닌, 렌 왕자님과 똑같은 모양을 한 다리를 내려다보았어. 왕국에서 산책을 좋아했다는 렌 왕자님의 이야기를 듣고, 인간 다리로 걸을수있는 연습도 했는데. 이제, 제가 다시 바다 속에서 나올 일은 없겠지. 라고 생각하며 발장난을 치던 다리를 거두고 바다로 향하던 미치에다는.

"...밋치...!밋치! 어디있어?!"

지금 이 순간, 꿈을 꾸고 있는거라고 생각했어. 그렇지 않고서야, 렌 왕자님의 목소리가 지금 여기서 들려올리가 없잖아.

"밋치."

저를 안는 손길도, 체온도 느껴질리가 없는데.

"보고싶어서...너무 보고싶어서 왔어."

이상하다...인어의 눈동자는, 천지를 창조한 신이 아닌 이상,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것들을 홀리지 못할 수가 없는데. 너는 왜 그때도, 지금도 내게 홀리지 않는걸까.

"너는...정말...이상해..."

오히려 내가 너에게 홀려가고 있는것같아. 온통 이상한것 투성이야. 미치에다는 렌 왕자님의 품에 안긴 채, 눈을 감았어. 언제나처럼 풀내음과 바람냄새가 났지. 비릿한 바다내음이 나는 저와는 정반대의, 하지만 제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주던 향기가.

보드랍고 하얀 백사장에 나란히 누운 렌 왕자님과 미치에다는 말없이 눈을 감고 있기만 했어. 미치에다는 렌 왕자님에게 그동안의 부재도, 공주님과의 결혼식도 그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렌 왕자님도 미치에다가 묻지 않았기에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어. 둘은 지금 이 순간이 충분히 행복했으니까.

"밋치, 네가 사는곳은 어디야?"
"바다 속."
"바다 속 어디?"

렌 왕자님의 물음에 미치에다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어. 그리고는 달빛을 받아 섬뜩할 정도로 새파란 바다를 손가락으로 가리켰지. 저기...

"바다 속에서도...제일 깊은곳."
"가보고싶다. 너랑 같이."
"엄청 깊은데, 괜찮겠어?"
"얼마나 깊은데?"
"가늠도 안될 정도로."

그래도 가고싶어?미치에다가 속삭이듯이 묻자 렌 왕자님 역시 누워있던 몸을 일으켜 미치에다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지.

"너와 함께 있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고싶어."

고개를 끄덕인 미치에다의 손이 잔잔했던 바다에 파도를 불러일으켰어. 파도는 순식간에 두 그림자의 주변을 둘러쌌지.

"무서워?"

렌 왕자님은 고개를 저었어. 미치에다는 고개를 갸웃했지.

"정말 안 무서워? 땅과는 달라. 숨쉬기 어려울거야. 우리는 태양빛이 닿지않는 곳까지 갈거야. 그곳은 네 생각보다 더 깊고 차갑고 어두워."

밋치 나는...

"내가 너를 만나러 오지 못하는 동안, 네가 완전히 사라질까봐, 그게 제일 무서웠어."

정 그렇다면...노래 불러줘 밋치. 그러면 하나도 안 무서울 것같아.

"슌스케."

내 이름은 슌스케야. 렌.

그 한마디와 함께, 거대한 파도는 입을 크게 벌리고는 순식간에 두 인영을 삼켰어. 파도가 가라앉은 잔잔한 바다 위로는 수면 위로 반사되는 하늘과 구름말고는 그 어떤것도 보이지 않았지.

다시는 왕국으로 돌아오지않는 렌 왕자님을 찾으러 온 동쪽 왕국 사람들의 눈에도.




메메밋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