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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17 22:16
회사에서 연극을 하게해주는 대신 인기용 드라마도 찍기로 했으니까, 여느때처럼 들어온 새 대본들 중에서 할 만한 것들을 추려보는데 왜인지 몰라도 벨드 대본 하나가 끼어있었으면 좋겠다. 분명 자신의 성적 취향이 소문이 났을리는 없고, 헤테로 쪽으로 인기세를 얻던 유세이 였기에 자신에게 이런 역할이 들어왔다는 것에 조금 신기해서 바로 대본 읽어봤겠지.

근데 생각보다 잘 짜여진 시나리오에 키요이는 곧바로 사장에게 가서 이 대본 상대역 누구냐고 물어봤는데 그동안 키요이가 연기 쪽으로 몇번 언급했던 아역출신 배우 였던거, 그래서 이미 이 대본에 꽂혔는데 그래도 이런 로맨스 연기는 아무래도..,



히라에게 물어봐야겠지. 아니 어차피 그녀석 다 좋다고 할 게 뻔하지만, 그래도 남자친구라면...,



까지 생각했다가 그동안 키요이의 남자친구라니 당치도 않아, 키요이를 이해하고 싶지않아, 등등 같은 발언 떠올렸다가 순간 또 울컥한 키요이 들고있던 대본 막무가내로 가방에 집어넣고서 집으로 가겠지.



- 다녀왔어,

- 어서와 키요이.



집에 간다는 문자를 보내두었더니 딱 맞춰 저녁 준비를 끝냈는지 상에 반찬들을 차려두고 있는 히라에게 가볍게 인사하고는 자연스럽게 소파에 앉아 들고온 대본을 올려두었다. 현재 하고 있는 드라마와 확정된 연극 대본을 꺼내고, 그 옆으로 완전 새것인 대본까지. 차곡히 쌓아두자, 귀신같이 새로운 대본임을 발견한 히라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 그, 그, 그거 설마,

- 맞아, 새 대본. 읽어볼래?

- 아, 아니. 나, 나는 괜찮아.



미리 보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거니까, 응, 나는 티비로 볼게. 따위의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는 히라를 가볍게 무시하고 빳빳한 대본을 집어들었다.




- 나한테 잘 맞을 것 같다고 들어온 대본인데 아직 고민중이야.

- 왜?

- 비엘드라마인데.

- 응. ...... 에?

- 상대역이 - 씨라더라. 게다가 수위도 좀 있고.

- 어떻게 생각해?




제가 나온 인터뷰라면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스크랩해두는 히라라면 분명 상대역이 제게 어떤 사람인지 히라도 분명 이해했을 것이다. 제 말을 들으면 들을 수록 점점 얼굴이 새하얘지더니 도대체 무슨 상상을 하는 건지 이젠 얼어붙은 채 움직이질 않았다.



- 어이, 히라. 듣고있는거야?

- 아, 어, 어어,

- 그래서

- 그, 래서..?

- 넌 어떻게 생각해?




어떻게, 생각하냐니...,

이미 머릿속을 한바탕 훑고 지나간 다양한 씬들에 - 주로 히라가 침대 위에서 보았을 키요이의 얼굴이라던가, 반응이라던가,- 이미 생각이 전부 리셋된 히라는 리액션이 고장난 기계처럼 버퍼링이 걸린 듯 자꾸만 멈춰버렸다. 그에 키요이가 살짝 짜증난듯이 톡 쏘아 붙이자, 잠시 생각하던 히라는 아까부터 들고있던 쟁반을 꼭 끌어안은 채 속삭였다.




- 나, 나는... 상관 없어,




어차피 그걸 정하는 건 키요이의 선택이고 앞으로 키요이가 걸어가는 길의 새로운 발판이 되어줄 작품이었다. 그러니 감히 내 의견 따위는 들어가서는 안된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 역시, 넌 그렇게 말 할 줄 알았어.




이미 히라는 키요이한테 그 말을 들은 이후부터 키요이의 말도 제대로 못듣고 멍 때려서 밥 먹는 내내 정줄 놓고 있다가 요새 바빠서 못했으니까 오랜만에 섹텐 올라서 하자고 했더니 그마저도 못 세워서 기분 나쁘다고 키요이한테 한대 얻어맞았을 듯 그렇게 괜찮다고 해놓고 혼자 충격받아서 골골 대던 히라,

어쩌다 키요이 화보 찍게 됐는데 그 담당으로 히라됐으면 좋겠다. 근데 상대가 전에 언급한 그 선배인데다가 제법 다정한 그림으로 찍게 되는데 그 남배우가 키요이 몸 자연스럽게 터치 할 때마다 카메라 너머에 있는 히라 입 꾹 깨물고, 조용히 셔터만 누르겠지.



- 노구치상, 원래 촬영이 이렇게 조용한 거예요?

- 제가 원래 말이 좀 없는 스타일이어서요. 죄송합니다,

- 별로 디렉팅 할 게 없을 정도로 완벽해서 그런 거니까 너무 그러지 말라고~



이미 시작할 때부터 기분 다운된 제자 단박에 파악하고 날세우고 있는 히라 대신 현장 분위기 풀어주고 있는 노구치겠지. 결국 이대로 가다간 누구하나 질식해서 죽을 것 같은 분위기에 잠시 스탑 시키는 노구치, 히라한테 다가가서 너왜그러냐고 묻는데 이미 안광 다 꺼져서 답도 안하고 쉬는 시간인데도 키요이 옆에 붙어서 안 떨어지는 그 남배우만 졸라 노려보고 있어서 노구치도 이마 탁 짚을 듯.



- 그러고 보니까 키요이 군도 그 대본 받았다면서?

- 아, 네.

- 어때? 할 거야?

- ... 글쎄요, 아직 고민중이어서.



키요이도 대답은 하고 있지만, 아까부터 누가봐도 상태 안좋은 자기 남친한테 온 신경 쏠려있느라 대답도 건성으로 하면서 히라쪽만 힐끔힐끔 쳐다보겠지. 그런 키요이를 빤히 쳐다보던 선배는 아역때부터 이 바닥에서 굴렀던 짬밥으로 저 카메라맨이랑 키요이랑 뭔가 있는 거 바로 눈치채고 슬쩍 키요이한테 다가가서는,




- 사실 남자랑 베드신이라니, 조금 무리일거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키요이군을 보니까 아무래도 키요이 군이라면 가능할 것 같은데, 키요이 군은 어때?

- 네?

- 유명해지고 싶지 않아?




히라한테 한눈팔려있다가 갑자기 훅 들어오는 선배에 당황한 키요이가 벗어날 생각도 못하고 가만히 얼어붙어있자, 뭐라도 할 것 처럼 점점 가까워지는 거리에 그대로 굳어버린 키요이를 구해낸건 당연히 히라였겠지.



- 키요이!



저 눈빛, 토마토 주스를 뒤집어 썼을 때라던가, 안나의 사생팬에게 납치를 당했을 때라던가. 그 때 보았던 바로 그 눈빛이었다. 까맣게 내려앉은 안광에 나는 이번에도 속수무책으로 끌려갔다.




- 어이, 히라!!




뒤에서 노구치상이 히라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지금의 나는 히라를 말릴 수 없었다. 홀린듯이 히라의 세계로 빨려들어가버린 나는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먼지가 가득 쌓인 창고 안에서 히라에게 정신없이 키스 당하고 있었다.




- 히, 히라, 읏,

- 키요이, 키요이,




뭐에 씌인 사람처럼 정신없이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고선 어깨에 걸친 옷을 끌어내렸다. 이대로 있다가는 정말로 당할 것 같은 느낌에 간신히 정신을 붙잡고 히라를 멈춰세웠다.




- 히라!

- ... 키요이,




제게 달라붙는 히라를 간신히 떼어내서야 점점 제정신이 돌아오는 모양인지 눈에 서서히 빛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그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는 듯 다시 원래의 히라로 돌아왔다.



- 키, 키, 키요이, 옷이,

- 나는 괜찮아.

- .. 미안,

- 뭐가?

- ... 나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



키요이의 옷을 다시 올려준 히라는 마치 죄인이 된 듯 고개를 파묻은 채로 웅얼거렸다.




- 키요이... 저 사람이랑 드라마 안 찍지마.




히라는 죽을 죄를 지은 사람처럼 키요이의 어깨에 머리를 떨군 채로 이야기 한 탓에 키요이의 얼굴은 못봤지만, 처음으로 자신에게 남자친구의 입장으로 하지말라고 이야기하는 히라에 설레버린 키요이 표정관리 안되고 있었겠지. 그렇게 한바탕 하고 나서 나온 두 사람은 방금까지 박력넘쳤던 히라는 죄인이 되서 나오고 시크 컨셉이던 키요이는 남친한테 말랑해져서 필사적으로 표정 관리는 하고 있지만 주변에 하트가 떠다니는 것 같은 분위기에 대충 눈치채고 재밌다는 듯 웃는 선배랑 아이고 두야 어쩌다 저런 녀석을 제자로 두어서,, 하고 머리 부여잡는 노구치겠지




앎그 히라키요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