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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03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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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오카, 나오토상?”

얄팍한 셔츠 위로 배를 문지르던 나오토가 마주 오던 여자의 부름에 고개를 들었어. 숱이 많고 윤이 나는 새까만 긴 머리카락. 일자로 반듯하니 자른 앞머리 아래로 얼굴을 반쯤 가리는 커다란 선글라스. 색이 진한 립스틱이 발린 입술 아래로 몸에 꼭 맞는 원피스 차림의 여자였지. 

얼굴을 가렸음에도 드러나는 화려한 이목구비와 고급스러운 차림새. 자기가 알고 있는 카테고리의 사람이 아니야. 소화가 되지 않아 답답한 명치를 손바닥으로 꾹 누르고 있던 나오토는 자기 아이디 카드가 포켓에 들어있는 것조차도 잊어버린 채였음. 그러니까 여자는 아이디 카드에 써진 나오토의 이름을 보고 부른 것이 아니라는 말. 여자는 선글라스를 조금 내리더니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의 화면을 잠시. 그리고 나오토의 창백한 낯을 다시금 쳐다보았음. 

“실물이 더 낫네요.”
“...네?”

어젯밤부터 상태가 좋진 않았지. 정확하게 말하자면 쭉 안 좋았던 것들이 정점을 찍은 거. 내내 울었고, 온몸이 아파 깊은 잠을 이루지 못했어. 간신히 잠이 들었다가 일어났을 땐 늘 그렇듯 침대 옆자리는 차갑게 식어있었지. 부서진 몸과 마음을 모두 추스르고 출근했을 땐. 저를 아끼던 상사가 요즈음 들어 살이 너무 내린 거 같다며 점심을 함께하자는 걸 거절할 명분이 없었어. 불편한 자리에서의 밥이 제대로 넘어갈 리 없었고, 모든 면에서 예민해진 위가 점심 메뉴를 거부했지.

“아, 죄송해요. 안내를 좀 부탁할 수 있을까요?”

나오토는 느릿하게 안내대를 한번 쳐다봤어. 직원이 상주하고 있는데도 굳이 자기를 불러 세운 이유가 뭘까.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아 이마를 손등으로 누른 나오토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지. 뭘 도와드릴까요. 

“여기 대표이사실이 어디죠? 방문은 처음이라.”

이사실이라는 말에 도둑이 제 발 저린 기분. 나오토는 얼른 표정을 갈무리하고 안내대를 다시 한번 돌아봤음. 외부 방문자가 아무 때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아니라. 나오토의 뜻을 읽은 건지 여자가 입술을 당겨 웃으며 왼손을 내밀었어. 나오토는 떨떠름한 얼굴을 지우지 못하고 여자의 손을 쳐다보았어. 악수를 청하는 것 같은데 인사를 할라치면 오른손을 내밀어야 하는 게 맞는 거 아닌가? 

하얗고 가느다란, 고생을 모르는 손. 기다란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가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어. 

나오토는 저도 모르게 멍이 든 오른손을 뒤로 숨기며 고개를 들었지. 왜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 걸까. 

“인사가 늦었네요. 하나에요, 코바야시 하나.”

너무 놀라 기절할 것 같다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걸까. 짧은 숨을 삼킨 나오토가 그 자리서 엉덩방아를 찧고 넘어졌음. 앞에 선 여자도, 로비를 지나가던 사람들의 이목도 모두 집중됐지. 

“어머, 놀라게 했어요? 미안해요.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구둣발 소리를 내며 여자가 한걸음 다가왔을 때 나오토는 넘어진 채 일어서지도 못하고 뒤로 물러나 앉았어. 헐떡거리는 숨소리가 귓가에 들릴 지경이라 여자가 천천히 선글라스를 벗어 머리 위로 올렸지. 

“이봐요.”

토할 것 같아. 나오토는 몇 번이나 기다시피 자리에서 뭉갠 후에야 뒤돌아 달아났음. 웅성거리는 소음. 여자의 부르는 소리가 목덜미를 붙잡는 것 같아서 무서워. 화장실로 도망친 나오토가 변기를 붙들자마자 요란하게 속을 게워내야 했지. 고꾸라질 것처럼 수그러진 몸. 셔츠 포켓에 꽂아둔 아이디 카드가 흘러내렸고 나오토는 그제야 알아차렸지. 여자는 이미 자기를 알고 있었다는 걸. 핸드폰을 보고 자기 얼굴을 쳐다봤던 것 역시. 그 안에 자기 사진이 있었던 거고. 이사실로 안내해달라는 말은 그야말로 결정타였던 거야. 

네가 누군지 알아. 그리고 내 남편과 붙어먹는 것도 알고 있지.

“웁..”

더 나올 게 없는대도 계속해서 헛구역질하느라 기진맥진해진 나오토가 땀이며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더듬었음. 차갑게 식은 손가락은 덜덜 떨리고 있었지. 어떻게 해. 어떻게 하지? 이젠 이가 딱딱 부딪칠 정도로 긴장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음. 시간이 얼마나 지난 지도 모르겠고, 이 화장실에서 나가면 여자가 지키고 서 있을 것만 같아서 두려웠지. 그러면서도 우스웠어. 잘못한 사람은 자기고, 피해자는 여잔데 뭐가 무서워?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나오토는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의 진동에 입을 틀어막으며 비명을 삼켰어. 끄으-신음을 낮게 신음하며 덜덜. 간신히 전원을 끄고 떨리는 몸을 끌어안았어. 한참이 지나 떨림이 사그라들 때까지. 그리곤 도망치듯 화장실을 나와 택시를 잡아타고서도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아야 했음. 누군가 제 머리채를 잡을 것만 같아서. 

집에 돌아와서 단단히 문을 걸어 잠그고도 나오토는 내내 두려움에 떨어야 했지. 결국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으면서도 끈을 놓지 못한 건 자기 자신이라. 옷을 벗지도 못하고 샤워기 아래 서서도 내내 스스로에 대해 역겨움에 토악질을 멈추지 못한 나오토였음.

두려움과 자기혐오로 밤새 앓아야 했어. 그래도 어제 무단으로 이탈했으니까 회사엔 나가봐야 해. 사표를 쓸 때 쓰더라도 이런 식으로는 안 되지. 나오토는 하룻밤 사이 다른 사람처럼 변해버린 거울 속 자기 얼굴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뒷걸음질 쳤음. 상간자의 말로인 거 같아서 스스로 얼굴을 쳐다볼 수조차 없었음. 울렁거리는 속을 다스리며 간신히 회사 앞에 도착해서가 문제였지. 지나가는 동료들이 모두 자기를 쳐다보는 것 같아. 다 알고 있는 것 같고, 눈빛으로 욕을 쏟아붓는 것 같아서 걸음을 뗄 수조차 없는 거. 

처음이 어떻게 시작됐건 간에 자기도 성인이고 제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하는 게 맞아. 그게 술 때문이건, 파워하라였건 간에 용서는 처음에만 가능한거였지. 두 번, 세 번. 그리고 그 전날까지도 이어진 관계는 변명할 거리도 없이 자기 잘못이라. 나오토는 이를 꽉 깨물고 천천히 회사로 들어갔어.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지. 모두 저를 탓하는 것 같아. 불륜이래. 그것도 회사 이사랑.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두 귀를 막고 싶어졌음.

“카타오카상 괜찮아요? 얼굴 좀 봐. 어제 안 그래도 로비에서 안 좋아 보인다는 얘긴 들었는데 핸드폰은 꺼져있고, 연락도 안 되고. 얼마나 걱정했다고.”
“....죄송해요. 몸이..”
“응, 그래 보여요. 지금도 안 좋은거 아니에요? 웬 땀을 이렇게...과장님도 카타오카상 착실한거 아니까 병가처리하라고 하셨는데...”

모르는걸까. 아니면 모르는 척 하는걸까. 나오토는 짧은 숨을 헉헉거리며 자길 부축하는 동료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어. 그러면서도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겠지. 지은 죄가 있으니까. 

“오늘도 병가처리 해두었어요. 그러니까 쉬어요. 몸이 이렇게 안 좋은데 연락하면 되지, 뭣하러 출근이야.”
“죄송합니다...”
“아픈 게 죈가. 아, 맞다. 혹시...이사님이 뭐 따로 지시한 거 있어요?”

벼락을 맞은 것처럼 나오토의 몸이 튀었지.

“...네?”
“아니, 갑자기 자기를 찾아서. 오면 좀 올라오라던데. 접점이 없잖아. 우리 같은 평사원이랑..”

낮게 신음한 나오토가 잠시 비틀거렸고, 동료는 놀란 얼굴로 얼른 부축했지.

“병원 가야 하는 거 아냐? 몸이 불덩인데!”

걱정하는 동료들을 뒤로 하고 화장실에서 찬물로 몇 번이나 세수를 한 나오토가 쓰러지듯 세면대에 기대었음. 헉헉, 짧은 터져 나오는 숨이 뜨거워. 이사실 호출? 올라가야 하나? 이제 어쩔 작정이지? 모르겠어. 정말...모르겠어. 

열이 오른 머리는 정상적인 사고조차 힘들게 해. 도망치는 게 맞다고 생각하면서도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멍청한 몸은 승강기 버튼을 누르게 했지. 파랗게 멍이 든 네 번 째 손가락을 보면서도 바보같이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음. 하지만 내려서도 한참을 망설이느라 들어갈 수가 없었지. 자기를 부른 이유를 모르니까. 

스스로 끊어내는 게 맞음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와버린 자기가 너무 초라해. 어차피 이 얄팍한 인연의 끝은 파국임을 알고 있으면서. 유부남과 만나며 뭘 기대했을까. 그가 아내를 버리고 이혼이라도 할 줄 알았던 거야? 아니 실은 조금 기대한 건지도 모르지. 아주 조그마한 마음에 소리를 듣고서야 입술을 콱 깨물었음. 

멍청하게, 사랑인 줄 알았지. 

머리를 쓸어주는 손길, 다정한 눈빛이라고 생각했어. 그와 저에게 주어진 공간이라곤 몇 평 남짓한 호텔 룸 하나면서. 철저한 상하수직관계면서도 그 방안에서는 저에게 존대하는 그가, 나오토상-부르는 차분한 목소리에 착각했어. 그래봐야 그 방에 먼저 도착하는 건 늘 자기였고, 아침에 눈을 뜨면 늘 혼자 남는 것도 자기였으면서. 

톡, 뺨을 타고 눈물이 떨어졌음. 울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이제야 찬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또렷해져서. 들어갈 이유도, 필요도 없어져 버린 거. 살을 부대꼈다고 사랑이 아닌 것을. 

나오토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다시 승강기 버튼을 눌렀음. 그리고 도착한 엘리베이터. 그 안에 탄 여자에 숨이 멎었지. 코바야시 하나. 창백하게 질린 나오토가 뒷걸음질 쳤고, 여자가 황당해하는 얼굴로 얼른 승강기 밖으로 나왔지.

“카타오카상, 이봐요.”

손이 닿는 순간 귀에 이명이 울렸고 눈앞이 흐려졌어. 여자의 비명이 웅웅 귓가에 울렸지. 지옥에나 떨어져 버렸으면.

+

손가락 안쪽 파랗게 멍이 든 상처를 한참이나 쳐다보고 나서야 병원인 줄 알아차렸음. 왼손에 걸린 링거보다 이쪽이 현실감이 들어서. 

보통은 품에 안는 편이었지. 그 밤에는 왜 그랬는지 몰라. 깍지를 껴 붙든 손이 아파서 손을 빼고 싶었어. 손을 놓고 싶었다는 게 아니라 반지. 그러니까 결혼반지를 끼운 채 자기와 손을 맞붙드는 그가 서글퍼서. 호텔 안에선 그가 유부남인 걸 잊을 때가 더 많았는데. 깍지를 껴 맞붙든 손. 결혼반지가 누르는 뾰족하게 날 선 감각이 자꾸만 현실로 자기를 잡아당기는 거. 

아프다는 말로 벗어나 보려고 했는데 집요하게 몸을 붙여오는 그는 손을 놓을 생각이 없는 것 같아서. 어렵사리 입에 올린 한마디는 고작 반지, 단 한마디. 하지만 빼달라고 말해도 되는 걸까? 이 방안에서만큼은 어느어느 회사의 이사도, 누군가의 남편도 아니라 나오키로 있어 달라하고 싶은데. 과연 자기가 그래도 되는 건지 판단이 서질 않아. 입안에서 뱅뱅 맴돌기만 하는 말을 차마 뱉을 수가 없었지. 반지를 빼고, 나를 안아줘요.

뻔뻔스럽기도 하지. 유부남과 만나며 그 정도도 견디지 못해서 어떡하려고. 하지만 그것보다 무서운 건 어렵게 말을 건넨다고 해도 그가 코웃음이라도 치며 반지를 고수할까 봐. 그게 두려워서 말을 꺼낼 수가 없었지. 그리고 그건 어느 정도 기정사실인 것 같았어. 

반지라는 말 한마디를 입에 올렸을 뿐이었는데. 성급하고 사납게. 안기는 게 아니라 범해지는 것 같았던 밤. 왜인지 모르게 화가 난 그가 두려우면서도 이대로 이 살얼음판 위에 올라앉은 것 같은 관계가 깨어질까 무서워서 울었던 것 같아. 

어쩌다가 이 남자를 좋아하게 되어버렸을까. 귓바퀴를 따라 흐르는 미지근한 액체의 느낌에 울고 있는 걸 알았지. 

“카타오카상, 정신 들었어요?”

용수철처럼 몸이 튀었고, 정신없이 자세를 바로 해 무릎을 꿇고 앉았어. 뺨을 따라 흐른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느라 링거 바늘이 따끔하게 얄팍한 살갗을 찔렀음. 

“일어나지 않아도...뭐, 내 말은 안 듣겠지만요.”

덜덜 떨리는 몸을 추스르는데 말을 듣지 않아. 정신 사나우니까 좀 가만히 있어요-여자의 목소리의 얼음이 되었지. 뭘 잘했다고 울어. 툭툭-이불 위로 눈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조용한 병실 안을 울렸어. 토할 것 같아서 볼 안의 여린 살을 꽉 깨물었지.

“궁금해서 그랬어요. 놀라게 할 생각도 없었고, 당신 만나서 얘기나 할까 싶어서.”
“...죄..죄송.”
“미안하다는 얘기 듣자는 건 더더욱 아니었고. 차라리 고맙다면 모를까. 근데 이렇게...”

하나는 입술을 잠시 물었다가 놓았지. 자그마한 남자긴 했지만 저보다야 컸어. 하지만 포식자 앞에 조그만 짐승처럼 덜덜 떨기만 하는 사람한테 무슨 이야기를 해. 어쩌다 이런 사람을. 하나의 미간이 좁아졌음.

“다른 뜻은 없었어요. 그 자식 이혼할 수 있게 종용해달라 하려고 만나고 싶었거든. 내 얘기 듣고 있어요?”

하나는 답답한 마음에 고개를 떨어뜨린 나오토의 턱을 들어 올렸어. 덜덜 떨리는 몸의 진동이 고스란히 전달됐고, 양심 앞에 흔들리는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졌지. 이래서야 말이 통할 리 없잖아. 어디서 이런 순해 빠진 거한테 엎어져선. 

“아는지 모르겠지만 내 결혼은 철저하게 재고 또 재서 만들어진 거예요. 경영 같은 거 관심 없는 나 엿 먹이려고 우리 아빠랑 저 새끼랑 짜고 벌인 판이라고. 응? 들어요? 햇수가 지날수록 내 유산의 일부가 코바야시한테 넘어간다고. 그러니까! 응? 카타오카상이 해달라고 하려고 했지. 저 결벽증 새끼가 홀딱 빠진 사람이 있다길래 그래서 만나려고 한 거예요. 근데...이것 참. 외통수네요. 뻔뻔하게 굴면서 나한테 소리칠 줄 알았는데...”

소귀에 경 읽기도 이것보단 낫겠네. 어디서 이런 순하고 맹탕같은 사람한테 폭 빠진 걸까, 내 남편은, 하나는 병실인 것도 잊고 조그만 백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지. 본처는 버리고 자기를 선택할 거라고 나오면 어울려 장단이나 조금 맞추다가 이혼하게 될 줄 알았는데. 이래서야 저쪽이 백기를 들고 나자빠지게 생겼으니. 

하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손수건을 꺼내 눈물로 엉망인 나오토의 뺨을 톡톡 두들겼어. 덕분에 나오토의 울음소리가 조금 더 커진 건 덤이었지. 그러거나 말거나 우는 사람을 달래는 재주는 이쪽도 없어서. 몇 번 손수건으로 닦는 시늉을 하던 하나는 짙은 한숨을 내뱉었지. 코바야시 나오키, 이 새끼는 이이한테 믿음조차 주지 않았구나. 물렁물렁하고 순해 빠진 사람을 진창으로 끌어들였으면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라도 줬어야지. 그저 손에 쥐느라 급급해서 사람이 곪아가는 건 보지도 못했겠지, 등신같이.

“하지 않을 것 같지만 내가 당신을 만난 이유는 그거에요. 이혼하게 해줘요, 내 남편. 좋으니까 이렇게 덜덜 떨면서도 붙어있는 거잖아, 카타오카상도. 코바야시한테 말해요, 이혼하라고. 당신이 요구하면 들어줄 사람이야. 물론 약속한 햇수를 채우지 못해서 내 남편이 입는 손해도 만만치 않겠죠. 셈이 밝은 남자라 잃는 건 죽기보다 싫어할테고...듣고 있어요?”

깊은 한숨을 내 쉰 하나는 자리에서 일어섰어. 결국 자기가 진 싸움이 될 것 같았거든. 이래서 경영이고, 사람 나부랭이고 만나서 하는 건 다 싫다는 거야. 사람 보는 눈이 형편없는 거야 진즉 알았지만, 이쪽이 이렇게 나올 줄은 전혀 몰랐어서. 괜한 벌집을 건드려버렸네. 이래서야 이혼은 꿈도 못 꾸게 됐잖아. 이 남자는 스스로 떨어져 나갈 테니까. 코바야시가 목을 매고 먼저 이혼해오자고 할 때까지 기다렸어야 했는데.

“몸조리 잘해요.”

하이힐 소리가 멀어짐과 동시에 나오토 역시 무너졌어. 엉엉 소리 내 우느라 하나가 한 이야기같은 건 떠오르지도 않았지. 초라하고 비참해. 하지만 그게 모두 제 선택으로 인한 결과라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어. 

의사의 이야기를 듣고 돌아오던 나오키는 병실에서 나오는 예상 밖의 인물에 미간을 모았지. 금방 걸음이 빨라졌고, 하나의 팔을 낚아챘음.

“또 무슨 얘길 하려고.”
“아파, 놔! 어디서 힘자랑이야, 무식하게.”

하나는 나오키가 낚아챈 팔을 걷어내며 소리를 질렀음. 화를 누르느라 잔뜩 긴장한 입매와 초조해 보이는 얼굴. 하하-이혼은 못 해도 한가지는 건졌네. 당신은 그 사람을 잃을 테니까. 그동안 손해 본 내 재산 값은 해야지, 암.

“그렇게 좋아하는 돈이나 실컷 벌어.”
“무슨 뜻이야.”
“들어가 봐. 그럼 알 테니까.”

나오키는 하나를 잠시 노려보고 바로 병실의 문을 열었음. 그리고 들려오는 울음소리에 걸음을 멈추었지. 무릎을 꿇고 엎드린 조그마한 사람에게 나오는 소리가 맞나 싶게 커다래서. 멋대로 휘둘러 가졌을 때처럼 다가설 수가 없었어. 두려워서. 

하나가 던진 막연한 이야기의 뜻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겠다. 나오키는 바로 나오토에게 다가서지도 못한 채 주먹을 꾹 쥐었음.

“바람 쐬러 갈래요, 어디 가고 싶은데 없어요?”

편안하게 기대어 있던 작은 몸, 어깨가 바싹 긴장하는 게 눈에 보여. 나오키는 품에 안고 있던 나오토의 목덜미에 엄지손을 세워 문질렀음. 가만히 돌아다보는 말간 얼굴. 그 눈 안에 주렁주렁한 고민은 말을 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아서 알겠다, 하고 말았지. 이야기해도 될까, 말을 해도 되나-망설이는 입술을 알아. 하지만 늘 그뿐. 무리한 걸 요구하지도, 바라지도 않지. 차라리 뻔뻔하게 굴면 좋으련만. 

욕조의 물이 식어가는 게 느껴지니까 감기라도 걸릴까 얼른 안고 있던 나오토를 일으켜 앞세웠지. 가운을 입혀주고, 머리를 말려주는 일도 종종. 믿기지 않을 만큼 손을 타면서도 입을 여는 경우는 별로 없어서 애가 닳는 쪽은 늘 나오키였지. 처음 본 순간부터 갖고 싶다는 생각이 여실하긴 했어. 사람에게 욕심내는 예는 없었던 터라 무리하게 몰아붙여 손에 쥐었지. 튕겨 나가거나 들러붙거나 둘 중 하나일 거라 생각했어.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니까. 

둘 중 하나긴 했지. 나오토는 자기 곁에 남았어. 하지만 딱 거기까지. 

자기를 쥐고 흔드는 것까지 바라지도 않아. 그럴 위인도 못 되는 거야 처음부터 알았지. 하지만 정말 원하는 것 하나 없이 자기가 부르면 이 방안에 머무는 나오토가 미치겠는 거. 위험하지만 좋은 패를 쥐었으니 뭐라도 당연하게 요구하면 좋으련만. 늘 생각이 많은 눈동자. 벌어졌다가 다물고 마는 입술을 보면 나오키가 더 애가 탈 수밖에. 

날이 좋은 날 함께 걷고 싶다가도 걱정을 앞세우는 눈동자를 보면 말조차 꺼낼 수 없게 되는 거지. 그러니까 고작 이 방 안에서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몸을 부대끼는 일밖에. 말이 없는 나오토라도 어디를 만지면 소리를 내는지 누구보다 나오키가 잘 알게 되었으니까. 목소리를 듣는 일은 그거라도 하게 되는 거. 이때만큼은 나오키- 제 이름을 부르며 끊어질 것 같은 숨소리 사이로 말을 건네거든.

“나오토상.”
“...응.”

잠에 취했으면서도 이름을 부르면 대답하는 것도 좋아하는 것 중 하나. 나오토가 잠이 든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느라 제 쪽의 잠이 모자랄 때도 많아.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편안해 보이는 얼굴은 보기 힘드니까. 머리카락을 쓸어줄 때면 슬그머니 찡그리는 눈가가 못 견디게 예쁘겠다. 

여타 사람들과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지. 요구하고, 헤어지길 종용하고. 자기만 바라보라고 할 줄 알았는데. 늘 불안한 자기 처지를 생각하는 어두운 낯빛과 양심이 호소하는 소리를 져버리지 못해 살이 내리는 나오토가 안타까워. 그러면서도 나오토가 그러길 원하면 자기는 모두 내려놓을 수 있을까를 상상하겠지. 바라고, 바라면 못이기는 척 넘어가 줄 용의도 있지만, 자기가 내보이지 않는 건 오만한 자존심.

“...아파, 아파요.”

여느 때처럼 그를 품에 안은 채였지. 깍지를 껴 붙든 자그마한 손이 파르르 떨리더니 고통을 호소해. 나오키는 근래 들어 부쩍 마른 손가락에 반지가 맞닿는 걸 보고 곧 손을 풀려다가 행동을 멈추었음. 아프고 싫다면 직접 이야기할 수 있으니까. 결혼반지를 끼운 게 싫으면 빼달라고 요구해요. 응? 나오키는 깍지를 끼운 손에 다시금 힘을 주며 눈을 마주쳤음. 나한테 욕심을 좀 부려봐요. 순한 눈매가 통증을 참지 못하고 잔뜩 찡그려지더니 나오키-조그맣게 이름을 불러.

“말해요.”

아프다는 소리를 아이들처럼 칭얼대더니 잔뜩 망설인 입술이 반지-하고는 말을 줄였지. 나오키는 재촉하듯 다시 손에 힘을 주었고, 나오토는 아프다는 소리를 끝으로 입을 다물어 버렸어. 본심을 숨기지 못하는 얼굴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나오키였지. 순진한 사람이었고, 그만큼 읽기도 쉬운 사람. 결혼반지를 끼우고 자기를 안는 게 싫어죽겠으면서도, 자기 처지를 생각하느라 고통을 주는 반지조차 빼달라 요구하지 못하는 그가 답답하고 화가 나. 그러면 안되는 걸 알아. 알면서도 심술을 부리고 마는 밤이었지. 깍지를 껴 움켜쥔 조그마한 손. 부서져라 힘을 주어 붙들고 몸을 겹쳤지. 

처음 그를 가지려 들었던 날을 제외하곤 강압적이었던 적은 없어서 나오토는 금세 울기 시작했음. 울리려던 건 아닌데. 싫으면 싫다고 이야기하면 될 것을. 고집을 부리는 건 나오토라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자기였는지도 몰라. 처음 안았을 때보다 살이 내려 작아진 몸이 자기 아래 깔려 이도 저도 못한 채 버둥거리며 반항해. 커져 버린 울음소리를 들으면서도 나오키는 나오토를 놓아주지 않았음. 아이처럼 울기 시작한 건 콘돔도 없이 깊숙한 곳에 파정한 탓에. 손 타는 걸 거절하지 않으면서도 끔찍해 하는 일 중 하나가 이거라서. 제대로 서지도 못할 정도로 몇 번이고 몸을 겹친 밤. 

울음을 그치지 못하고 흐느적거리는 나오토의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고 욕실로 들어가서 벽을 짚고 서게 해. 자꾸만 미끄러지는 허리를 틀어쥐고 내내 들락거려 말랑해진 아래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벌리자 서러운 소리가 터져 나와. 나오토의 안쪽, 깊숙한 곳에 쏟아 놓았던 액체가 툭툭 욕조 아래로 떨어졌음. 벽을 긁는 조그마한 손. 네 번째 손가락 사이에 새까맣게 멍이 들어버렸어. 평범한 디자인의 반지 테두리엔 음각이 선명했고, 그 모양 그대로 상처를 입은 나오토의 손가락에 나오키가 낮게 신음했어. 자꾸만 힘없이 미끄러지는 나오토를 깨끗하게 씻겨 욕실을 나왔을 때에도 울음을 멈추지 못한 그였겠다. 

“갈래요. 가고 싶어.”

울음소리에 잔뜩 잡아먹혀 제대로 말도 잇지 못하면서 자꾸 집에 가겠다며 옷을 주워 입는 나오토를 억지로 침대에 눕히고 강하게 끌어안았어. 끅끅거리며 서러움을 삼키는 소리가 잠시, 기운이 빠질 대로 빠진 나오토가 정신을 잃듯 잠이 들고 나서야 나오키가 품에 안았던 나오토를 제대로 눕혔겠지. 

퉁퉁 부은 눈두덩이와 붉어진 눈 밑. 자면서도 뭐가 그렇게 속이 상한지 흐느끼는 나오토의 손을 가만히 들어 올렸음. 하얀 손가락 사이에 새까맣게 남은 상처가 꼭 자기의 시꺼먼 속내 같아서 나오키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지. 바라고 요구해야 하는 사람은 자기일지도 모르겠어. 아침에 밝아올 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나오토를 바라보던 나오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어. 나오토가 깨지 않도록 조심하며. 

욕심을 부리자면 함께 이 방을 나서서 아침이라도 먹였으면 좋으련만. 이 방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나서는 순간까지 온통 긴장하는 그를 아니까. 같이 나서기라도 하면 하늘이 두쪽 나는 줄 아는 나오토의 연약한 마음을 알아서 늘 먼저 일어서는 나오키였지. 이마에 깊숙하게 입술을 누른 나오키는 폭력적이었던 어젯밤의 일들을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했음. 오늘 저녁에는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나오토를 만나고 싶어. 자기의 욕심을 버릴 차례이자, 그의 숨통을 틔워줄 참이었지. 

이미 늦었는지도 모르지만.

“나오토상.”

움찔, 떨리는 작은 몸. 천천히 고개를 든 얼굴이 눈물로 엉망진창. 

“무슨 얘길 들었는지 모르...”
“그만요...”
“잠깐, 내 얘기 좀 들어요.”

나오토가 강하게 고갤 좌우로 내저었어. 한 번도 자기 의지를 내보인 적 없던 사람이라 나오키의 가슴이 쿵 소릴 내며 떨어졌지. 

“나오토상.”
“내가...내가-흐...다, 내 잘못이니까. 흐윽..읏. 그만해요. 그만...”
“잠깐만요. 나오토상 지금..”

헤어지자는 소리도 사치 같아서. 나오토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놓으며 그만두자는 이야기를 다시 한번. 울음에 묻혔지만 단호하게 이야기했지.

+

보안업체 직원의 난처한 얼굴이 월패드에 보였어. 벌써 며칠째 자기 집 앞으로 찾아오는 이는 다름 아닌 나오키였지. 처음 도시에 올라왔을 때 좀도둑이 든 적도 있었던 터라. 비싼 세를 내고 보안업체가 상주한 오피스텔을 택한 게 이렇게 훌륭한 선택이 되었을 줄이야. 나오토는 돌려보내 주세요. 죄송합니다. 짧게 이야기하고 월패드 전원을 눌렀어. 

사직서를 내고 두문불출하길 한동안. TV에서 떠들어대던 나오키의 이혼 소식을 듣지 못한 건 아니야. 하지만 만나고 싶진 않아서. 처음엔 깜짝 놀랐지. 누가 찾아왔다고? 몇 번이고 찾아와 기다리는 나오키를 돌려보내길 여러 차례. 바쁜 일도 없는 걸까? 왜 자꾸 여길 찾아와- 생각이 미치자마자 고갤 여러 번 내저었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나, 카타오카. 

끈질기던 그의 방문도 점차 빈도를 줄이던 어느 날. 

에어컨조차 켜지 않고 겨우 손바닥 한 뼘만큼 열리는 창문 열고 잠이 들었던 여름 오후. 숨이 턱 막히는 열기에 잠에서 깨어난 나오토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음. 턱을 따라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대강 닦은 나오토가 냉장고 앞에 섰지. 이젠 정말 나가봐야 해. 마실 물조차 없어서 싱크대에서 대강 목을 축이고 끈적한 얼굴을 닦아 냈음. 

목이 늘어난 티셔츠에 짧은 반바지 차림. 슬리퍼를 꿰찬 나오토가 로비로 내려왔어. 더워-금방 땀에 젖은 이마를 손등으로 문지르던 나오토가 누군가를 보고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음. 덥지도 않은가. 늘 그렇듯 잘 차려입은 수트 차림의 나오키가 건물 바깥에 기대앉아 있는 게 보였거든. 아직 그는 자기를 알아차리지 못했으니 등을 돌려 올라가 버리면 그만인데. 나오토의 발이 뿌리를 뻗은 듯 움직이질 못했지. 

그리고 곧. 어딘가를 멍하니 쳐다보던 나오키의 시선이 건물 안을 향했고, 오도카니 선 나오토를 발견한 건 금방이었음.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나오키를 보고도 나오토는 움직이질 못했을 듯. 건물과 바깥을 구분하는 유리문이 열리며 귀를 때리는 매미 소리에 움찔, 정신이 깨났지. 

겁을 집어먹은, 고작 몇 달 만에 잔뜩 상해버린 나오토가 주춤 뒷걸음질을 치는 게 보이자 나오키가 걸음을 멈추었음. 도망가지 말아요. 바짝 속이 탄 나오키가 이를 꽉 깨물었어. 좋다 싫다 내색조차 하지 않던 순한 사람이 마음먹고 숨어버리니 머리카락 하나 볼 수가 없단 사실이 절망적이었을 거야. 물론 억지를 부려 처음 그를 가졌던 것처럼, 무력을 행사할 수도 있었지만 더는 그러고 싶지 않아서. 내내 기다리고 기다렸을 거다. 다, 설명할 테니까...그러니까 제발 달아나지만 말아요. 나오키가 다시 한 걸음 내디뎠고, 나오토의 마른 어깨가 떨리는 게 눈에 훤히 보이겠지. 

그렇게 천천히 나오토에게 다가서는 나오키 보고싶다.





나오키나오토
오토가 우는게 좋다...오키가 후회하고 오토 해감했으면 좋겠다 병든 취향 이런거 좋아하면 안되는데(˘̩̩̩ε˘̩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