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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2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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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 떨어진 오메가 신세처럼 가혹한 것은 또 없지.
조실부모한 고아, 어디도 기댈곳 없는 신세, 게다가 오메가. 키요이는 만약 불행의 신이 존재한다면 틀림없이 제 손을 움켜쥔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신이 딱 한가지 자비를 베풀어준게 있지. 바로 아름다운 외모. 늘씬한 신체. 그리고 꿈결같이 속삭이는 목소리. 마치 불행의 신이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듯 아름답게 빚어준것 같았지.
그러나 키요이는 그 외모가 자신을 더 불행하게 만드는 원천이라 굳게 여겼을거임. 아름다운 오메가로 살기엔 세상이 너무 험했고 항상 그 음험한 시선을 경계했어야 하니까.


그래서 이번 입주 사용인 모집은 키요이에게 절호의 기회였어. 힘들고 고된 일이라도 뭐 어때. 이것마저 놓친다면 이제 정말 자신을 놓아버리고 나락으로 떨어질길 밖에 없었으니. 길거리를 전전하며 자신을 파는 처지로 전락하는건 죽어도 사양이었기에 키요이는 온 힘을 다해 부딪혔지.
필수조건인 조항 중 <베타> 부분이 마음에 걸렸으나 사실 키요이는 히트싸이클도 맞이하지 않은, 그야말로 베타에 가까운 열성이었음. 게다가 좋지 않은 형편에 영양실조까지. 몸이 망가지는건 무리도 아니라 어떻게든 페로몬을 갈무리하고 또 갈무리하였음. 원래부터 향도 지극히 옅었기에 억제제를 쏟아부은 결과, 이번엔 다행히 행운의 신이 키요이의 손을 들어주었어.

"다음주에 바로 입주해서 일 시작하도록해요."

나긋하고 겸손한 태도를 보인 키요이가 마음에 들었는지 나이 지긋한 베타 시녀장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간단하게 설명해주었어. 저택의 관리라는, 기본적인 일들. 허나 아무리 청소, 빨래같은 잡일이라도 이곳은 유서깊은 귀족 집안이기에 단정한 용모도 중요하다고 귓뜸을 해주었음. 그때문에 경쟁이 치열했던 이 자리에 키요이가 당당히 뽑힐 수 있게 되었던 거였지.
하루 빨리 허름한 단칸방을 등지고 싶었던 키요이는 바로 내일부터 입주하겠다고 열의를 보였고 다행히 시녀장도 허락하였어. 이제 앞으로 할 일은 철저히 향을 없애 베타로써 살아가는 방법이야. 이대로 향이 사라져버리면 좋으련만.
사실 억제제로 인하여 반푼이같은 오메가 형질이 망가진대도 상관없었지. 차라리 저주스러운 오메가가 아니라 베타로 살고 싶을 만큼 궁지에 몰린 상태였거든.




키요이가 지내게 될 히라 가는 교외에 위치한 위풍당당한 저택이었음.
널따란 정원과 분수가 딸린, 고풍스러운 본관과 서양식 별채가 혼합된 곳. 알고보니 이 집은 대대로 정계에서도 손꼽힐정도로 막강한 힘을 가진 귀족 집안이라서 어린 나이에 산전수전 다 겪은 키요이도 긴장할만했음. 첫날 유니폼과 사용인들이 쓰는 방을 배정받은 후 시녀장을 따라 가주에게 인사를 드리러 갈 참이었어.

"가주 부부께서는 여행으로 몇개월간 해외에 계신터라.. 지금은 도련님께서 임시 가주셔."

도련님은, 하고 한박자 늦게 말을 꺼낸 시녀장이 커다란 문 앞에 잠시 숨을 골랐음.

"소란스러운걸 싫어하시니 주의하도록."

당연히, 사용인들은 있는듯 없는듯 조용히 지내야한다는걸 알아. 분수를 안다는 뜻이지. 키요이도 이 곳에 들어오면서 각오해둔 일인데 시녀장은 한번 더 못을 박았어. 왜일까?

시녀장이 열어준 문이 열리고 고풍스럽고 커다란 서양식 방안을 들어가자 키요이는 그제야 시녀장이 말한 의미를 깨달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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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눈에도 그가 늠름한 우성 알파인것을 알았어. 평균을 윗도는 큰 키에 약간 마른듯한, 알파라고 하기엔 말갛고 청순한 인상. 하지만 어딘가 음울한 인상이라 키요이는 그것이 오싹하게 느껴졌어.

"도련님, 새 사용인이 오늘부터 입주하게 되었어요."

"아..."

시녀장이 살갑게 소개하는 동안, 키요이는 그를 보자마자 이 저택에 들어온걸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예감에 몸을 부르르 떨었음. 차라리 그가 알파 특유의 허세를 부렸다면 이제까지 봐왔던 알파들과 다르지 않구나 안도했을거야.

"..키요이 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하지만 그 눈빛. 저를 집요하게 응시하는, 까맣고 모든걸 흡수해버릴것 같은 눈. 아니, 모든걸 다 삼켜 철저히 녹여버릴것 같은 그 눈.
키요이는 마치 커다란 뱀이 제 몸을 칭칭 감아 옥죄고 있는것 같다고 느꼈어. 몸부림치면 몸부림칠수록 꽁꽁 옭아매는 뱀.

키,키 키요이...

방을 나가자 조그맣게 속삭이는 목소리를, 키요이는 모른척 문을 닫고는 잠시 소름끼침을 견뎠어. 아마 한발 앞서 나간 시녀장은 못 들었을테지.




거처가 별채 쪽이라 아주 다행이었어. 본관의 가주 식구들과 부딪힐 일은 별로 없을터. 집사와 시녀장, 요리장들을 포함하여 경력이 긴 사용인들은 본관에 머무르고, 자신같이 신참은 별채의 거처를 쓰게 되어 내심 안심했지. 더구나 별채에서 머무는 사용인들의 수는 많지 않았고 각자 독방을 쓸 수 있어서 억제제를 숨기기에도 충분한 환경이었어.
그러니 제발 그 도련님이라는, 기분 나쁜 남자와 마주치지 않기를. 일이 고되도 상관없으니 그 소름끼치는 남자를 피할수 있게 해주세요. 키요이는 신께 빌고 또 빌었음.


본관과 달리 별채의 빈 방들은 서양식 가구와 커튼이 많아서 청소할거리가 많았지만 키요이는 차라리 그게 마음 편했어. 정신없이 바삐 일하다가 때가 되면 식사를 하고 또 남은 일들을 해치우다가 지쳐 잠드는 날들. 사람들은 모두 자기 역할에 충실하고 쓸데없는 말을 얹는 이들이 아니어서 키요이도 곧 조용한 히라 가에 적응하게 되었음. 그리 친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차갑지도 않은, 키요이가 딱 바래온 분위기.
힘들지만 착실히 일해서 필요한 만큼의 돈을 모아 남은 여생을 평화롭게 보낼수 있는 곳을 찾는거지. 그곳에서 키요이는 아무 방해받지 않고 살아가는거야. 물론 조금 외롭겠지만 귀여운 동물을 기른다면 그럭저럭 지낼수있지 않을까 하는 아주 소박한 꿈이 지친 키요이를 버티게했어.

그러니까 이 빌어먹게 긴 커튼 따위, 어떻게든 다시 걸어야 돈을 모을수 있지. 키요이가 접이식 사다리 위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는데 별안간 현기증이 일어나 잠시 휘청했어. 아, 이렇게 떨어지면 안되는데.. 바닥에 떨어질 충격을 예상하고 두 눈을 감자 누군가 자신을 꽉 붙들어 안아주었음.

"키, 키요이, 키요이...."

그다. 기분 나쁜 남자. 히라 카즈나리.

"괘, 괜찮아요? 역시 이런 힘든일을 하면 안되는데, 어떡하지, 키요이 몸 상할텐데,"

의미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걱정스레 내려다보는 히라의 얼굴에 키요이는 화들짝 놀라서 내려달라는 제스처를 취했음. 혹시 모르니 향도 한번 더 갈무리한 후 빠르게 그 옆을 벗어나 고개를 숙였어. 오늘 아침에도 억제제를 들이켰으나 우성 앞에서는 더욱 더 조심할 필요가 있지.

"실례를 끼쳤네요.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느새 구겨져버린 커튼을 들고 빨리 자리를 피하는 방법밖에 없어. 불행히도 오늘 별채 담당은 저밖에 없으니까. 주객전도된 양 안절부절하는 남자를 뒤로하고 키요이는 커튼을 양 품에 꼭 안아 다시 고개를 숙였지.
이상하게도 이 남자를 보면 자꾸 등허리가 찌릿한 느낌과 뒷골이 싸해지는 이상한 충동에 사로잡힐것만 같았어.

"키요이. 너무 무, 무리하지 말고-"

"아닙니다. 지금 나아졌어요."

다른 사용인이 보면 기함할정도로 불손하고 버릇없는 태도였을거임. 아무리 제 처지가 급박하고 돈이 궁했어도 키요이는 이 소름끼치는 알파와 한시라도 단둘이 있고 싶지 않았어. 떨리는 손을 커튼 사이로 숨긴채 말을 자르고는 급히 뒤를 돌았지.

"그 그러면 몸이 못 버틸거에요 키요이."

".. 무슨 뜻이죠?"

키요이가 급하게 늘린 거리를 메꾸듯 알파가 좀 더 가까이 다가왔어. 자꾸 조바심이 나는 키요이의 마음을 아는듯 모르는듯 이 남자는 방금 전과 달리 꽤 느긋한 모양이야.

"몸이 힘들수록 한계치에 가까워진다, 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무슨 뜻이죠?"

의미없는 의문. 키요이는 제 목소리가 떨리는걸 느낄 수 있었지. 곧바로 레이더에 빨간불이 켜졌어. 비상사태. 그것도 아주 위험할정도로. 지지 않겠다는듯 그 까만 눈을 응시했지만 이건 키요이도 본능적으로도 느낄 수 있었어. 왜 자신이 처음 그를 보자마자 소름끼쳐했는지를.
그리고 이제까지의 전세가 역전되는 순간을.

키요이, 난 알 수 있어요.

"당신은 오메가잖아요."

유약한 얼굴 속, 숨겨왔던 뱀의 눈빛이 키요이를 옥죄기 시작했어.






히라키요이 맇쿠유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