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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21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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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명결은 똑같은 인생을 두번씩이나 사는 입장으로서 고민이 꽤 많았음. 이 답답한 마음을 어디에다가 풀겠습니까? 당연히 야렵 대회 빳다죠! 떴다하면 일등은 무조건 따놓은 당상인데 이게 평생 고개 빳빳히 들고 살던 온욱과 온조의 성질을 안 건드리고 배기겠음? 온욱은 매번 섭명결더러 저 무식한 계집은 또 나왔냐 비웃으면서 정작 만년 대회 이등이었음. 물론 섭명결도 지지 않고 아 조까쇼 온욱을 존나게 싫어함. 전생에서 한쪽은 머리가 뽑히고 한쪽은 머리를 뽑았던 사이답게 두 사람은 맹세컨대 서로를 진심으로 싫어함. 그런데 온욱은 무조건 싫다기보다 이기고 싶다는 마음이 좀 더 컸으면. 번번이 이등 신세니 볼때마다 이를 아득바득 갈면서도 다음 대회에도 나와주지 않으려나 은근히 기대함. 제딴에는 보고 싶다거나 그런 것은 절대 아니고, 그냥... 그냥 이겨야 하니까! 승부를 내야 하니까! (아무렴 그러시겠죠ㅋ) 여기서 온조는 온욱보다 먼저 섭명결을 이기고 싶어서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고 있을듯.

이때 온조가 수작부리다 딱 걸려서 된통 혼나는 거임. 요괴를 이용해 섭명결에게 여인으로서 씻지 못할 상처를 주려는 속셈이었지. 그 도도한 얼굴에 흉이 크게 남으면 저걸 대체 누가 데려가려고 할까? 수준이 저열한 망상을 허접하게도 찌그리면서. 하지만 우리의 섭낭자께서 그깟 요괴 한 마리 못 잡으면 쓰겠습니까... 애당초 얼굴에 흉이 남든 말든 쥐뿔도 상관없는데 말이야. 그건 사내에게는 되려 훈장이라고? 섭명결은 맨손으로 요괴의 허리를 뚝 부러뜨려 죽이고서 그 사체를 겁에 질린 온조 앞에 털썩 내려놓음. 패하 대신 애써 맨손으로 잡은 덕에 잔뜩 가빠진 숨을 느릿하게 몰아쉬며.

“내 앞에서, 감히 뻗대지 마라.”

안타깝게도 도도한 얼굴에 생채기 하나가 그어지기는 했지만, 섭명결에게 이깟 것은 모기 물린 자국만도 못한 상처였음. 모든 일이 벌어지고 난 다음에야 상황을 파악한 온욱이 헐레벌떡 달려와서 정직하게 사과했음. 온욱은 언제나 정정당당히 이기고 싶었지 이따위 식으로 기를 꺾고 싶지 않았으므로. 그런데 섭명결 얼굴에, 도톰한 뺨 위 가로로 그어진 새빨간 줄 하나를 발견하고서 기분이 이상해져야 재밌다.

“저..... 천치가 그랬소?”

천치는 뒤편에 마구잡이로 나뒹굴어진 온조를 말했음. 온욱이 멱살 잡고 한번 내던졌거든. 물론 이제 와서 그런다고 섭명결이 원수같은 온씨에게 고분고분 대답해줄 성정인가. 불편한 침묵이 길어질수록 안 그래도 복잡한 온욱의 마음은 더더욱 복잡해졌음. 스스로에게 화 비슷한 게 난 것 같았어. 가만 곱씹어보니 화라기보다 무언가 침범당해서 불쾌한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니까 누구에게 정확히 무엇을? 비로소 정답에 가까워졌을 쯤, 침묵으로 일관하던 섭낭자는 한참 전에 눈앞에서 사라지고 없음. 그런데 멀지 않은 곳에서 화기애애한 목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하는 거임. 온욱은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분주하게 따라나섬.

“정말 던지셨어요? 온이공자 눈앞으로?”
“그래, 내 속이 다 시원하더라! 빌어먹을 것들. 날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그따위 짓까지 했겠어?”
“하하... 누님은 여전히 대장부 같으시군요. 멋지십니다. 아주 잘하셨어요.”

남희신이 새것인 듯 빳빳한 영견으로 한 여인의 얼굴을 아주 느릿하고 매우 정성스레 닦아주고 있었음. 방금 자기 앞에서는 침묵으로 일관하던 여인이 말라비틀어진 고목같은 남희신의 앞에서는 잘도 재잘재잘 떠들었지. 그 모습은 온욱의 심기를 상당히 뒤틀리게 만들었음. 그때 온욱과 남희신 눈이 딱 하고 마주침. 거기서 온욱은 이마에 핏줄이 빡 올라옴. 남희신이야 뭐, 별 짓 안 함. 다만 피식 웃었을 뿐. 그리고...

“온씨의 술수가 늘 비열하다는 건 누님께서도 잘 아시는 사실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온욱과 남희신 둘 다 동시에 똑같은 생각을 함. 저 역겨운 놈.

한편 그날 야렵 대회에서 돌아온 섭명결 몰골을 보고서 섭회상은 사방팔방 난리쳤음. 우리 누님의 귀한 얼굴이! 얼굴이!!! 물론 상처의 조치는 남희신이 자알 해줬으나, 섭회상은 백옥같은 누님에게 상처가 났다는 것 자체만으로 비상이었음. 섭명결이 이제 스물, 섭회상이 이제 열넷. 어찌된 일인지 아직까지 부친께서 무사하신 지라 섭명결은 섭회상을 몇년씩이나 일찍 고소수학에 보내지 않고도 함께 지낼 수가 있었음. 그간 섭회상은 물밑에서 정말 철저하게 섭명결을 내조했음. 내조...라고 해야 하나? 일종의 쳐내기 작업을. 섭명결 나이도 어느덧 꽃다운 스무살. 하루가 멀다고 선 얘기가 우수수 날아오는데 어째서 섭종주와 섭명결은 아무것도 모를까요? 그러한 서신은 오는 족족 되바라진 남동생이 아주 좍좍 찢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섭회상은 오늘도 서신 몇 개를 갈가리 찢어놓고서 태연하게도 모르는 척하고 있었음. 그런 것은 우리 누님한테 아직 일러. 음음 이르지. 아니다, 우리 누님은 그냥 나랑 평생 살아야겠어. 혼인이 웬 말이야. 누님은 종주 하시고, 나는 책사 하면 딱 맞겠네. 아주 좋아. 하지만 미래의 책사에게도 한계란 게 있었으니, 그건 바로 예고 없이 정문으로 쳐들어오는 손님이었음.

“귀댁의 대낭자에게 직접 사과할 일이 있는데.”

철옹성같이 견고한 부정세 성벽 아래, 이곳에서 존재하는 것만으로 적신호인 온가의 장남이 뻔뻔하게 당도해 있었음. 그런데 무슨 일로 왔는지 훤히 아는 섭명결이 흔쾌히 성문을 열어주라고 허락할까요? 열어주기는 무슨 면상 보자마자 열뻗쳐서 패하 들고 당장 내려갔음. 반대로 온욱은 섭명결이 씩씩대며 내려온 게 청신호가 아니라는 건 당연히 알지만 그래도 흠흠... 직접 얼굴 보러 와주기는 하는 건가, ㅇㅈㄹ 긍정회로 돌리면서 은근하게 흡족해함.

“네놈 온씨들은 원래 수치라는 걸 모르나? 수치뿐 아니야, 분수도 모르고! 여기가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섭가와 온가가 오랜 앙숙 지간이라는 건 땅속의 쥐마저 아는 사실이거늘, 온욱의 난데없는 방문은 그야말로 습격과 다름없는 일이요. 안 그래도 온씨라면 지독하게 혐오하는 섭명결이 눈을 시뻘겋게 뜨며 내려오는 건 당연한 일이었음. 그런데 머리끝까지 개빡친 섭명결에게 온욱이 입으로 툭, 내뱉은 건 폭탄이었음. 제 아둔한 아우가 여인에게는 재산과 마찬가지인 얼굴에 상처를 냈으니, 그에 대해 마땅히 책임을 져 자신이 기꺼이 혼인해 주겠단 쌉소리였음.

“하..... 날 놀리는군.”
“진심인데.”
“그러니까 날 진심으로 놀리는군.”
“뒷말을 바꿔서 생각해 볼 의향은 없는가?”
“닥쳐! 네놈만은 반드시 죽이겠어, 지금 당장!”

온욱의 청혼 아닌 청혼은 당연히도 실패로 돌아갔고,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기 무섭게 우악스런 칼싸움이 벌어졌음. 그 소식을 또 섭명결의 서신으로 전해들은 남희신은 그때서야 세상사가 예의만 차려서 뜻한 대로 흘러가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아야 재밌어짐. 이 무슨 남편찾기도 아니고... 그치만 하하버스는 원래 결혼상대 찾는 재미로 보는 것이 아니겠어요? 남희신은 섭명결이 자신에게 품고 있는 감정이 연모가 아니라 단순한 우정임을 일찍이 알았음. 그래서 더더욱 조심스럽게 다가가려고 했던 건데, 비록 저보다 어린 강공자가 정혼자는 아니어도 비슷한 자리를 벌써 차지한 이상 신중에 신중을 기해 왔던 건데. 온욱 같은 무뢰배가 난입할 줄이야! 물론, 우리 섭낭자께서 과연 온씨를 마음에 들어하실까. 그러나 미운 놈도 계속 보면 정이 든다는 말이 있듯. 섭명결 앞에서 매사 신중하게 행동했던 남희신은 답서를 마저 작성함. 기분도 전환할 겸 고소로 놀러오시는 건 어떻겠냐고. 하지만,

“.....오랜만이네 회상. 어쩐 일로 같이 왔나?”
“간만입니다 희신 형님. 별 건 아니고, 기분 전환이라면 마침 저도 하고 싶어져서 말이에요.”

운심부지처 앞까지 먼길을 행차한 건 섭명결뿐만 아니라 눈치없는 ‘척’ 생글생글 웃어대는 섭회상도 함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