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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21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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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아침이에요, 레오. 오늘 추천은 뭔가요?"
"어서 와요, 제이크. 마침 이번주에 새 원두를 들여와서 블렌드를 해 봤는데, 어때요? 조합은 이쪽에 써 뒀어요."
"좋네요. 그걸로 한 잔 주세요."
커피값을 받아 든 사장, 레오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그라인더를 향해 다가갔다.
미국 근교의 어느 한적한 골목길 작은 카페 주인인 그는 벌써 8년도 넘게 이곳에서 커피를 내리고 있다.
번화한 도시는 아니지만 사람의 왕래가 드물지 않은 마을에서 이만큼 장사를 하고 있으면 단골도 꽤 생기는 법이다.
몇 년째 홀로 가게를 운영하는 젊고 잘생긴 동양인 사장에게 관심을 보이는 손님도 종종 있었지만 그는 사적인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그 신비스러운 느낌에 끌려 접근했던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깔끔하게 선을 긋는 태도에 지쳐 떨어져 나가고, 남은 것은 이제 가게의 일부처럼 느껴지는 사장의 차분한 분위기를 즐기며 그가 내려 주는 커피를 마시기 위해 찾아오는 몇몇 단골들 정도다.
능숙한 손길로 커피를 종이컵에 담아 홀더를 끼우고 손님에게 내밀자 가볍게 인사를 건넨 그가 문을 열고 나간다.
"또 봐요."
짤랑, 소리를 내며 문이 닫히자 레오는 다시 그라인더를 향해 눈길을 돌렸다.
특별한 관광지도, 번화가도 아닌 이곳에서 변두리 골목길의 카페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늘 비슷하다.
평소 이 시간대에는 제이크가 다녀간 뒤 30분에서 1시간 정도 손님이 없는 편이다.
잠깐의 휴식 시간이 생긴 그는 자기 몫의 커피를 만들기 위해 그라인더를 작동시켰다.
스테인리스 날이 세차게 돌아가며 원두를 부수는 시끄러운 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언제인지도 기억나지 않는 때부터 그는 커피를 즐겼다.
이제는 기호조차도 흐려져 버린 오랜 삶에 유일하게 붙들고 있는 취미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꽤나 오랜 세월동안 몸담고 있던 나라를 떠나와 이런 곳에서 커피 장사를 하고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일지 모른다.
접객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친교활동도 그렇다.
하지만 하릴없이 푹신한 의자에 앉아 흥미도 재미도 없는 종이쪼가리만 쳐다보고 있거나 쓸데없이 커다란 집 안에 처박혀 손가락 몇 개로 사람을 부리는 것도 지긋지긋한 건 마찬가지다. 더는 권위를 세우며 살고 싶지도,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무언가를 하고 싶지도 않았다.
할 일도 없어진 차에 이것저것 고민한 결과, 어째서인지 고즈넉한 분위기의 가게에서 적당히 사람을 만나며 합리적인 만큼만의 관계를 맺는 지금의 생활이 된 것이다.
물론 이것도 썩 나쁘지는 않다.
어차피 쌓아 둔 자금이야 많으니 굳이 열심히 일해 돈을 벌 필요도 없고, 무슨 돌멩이처럼 인적 드문 산 속에 틀어박혀 수십년간 사람과 대화를 나누지 않은 끝에 말을 잊어 백치가 되어 버릴 일도 없다.
직업 만족도로 따지면 적어도 어느 보습학원 원장보다는 나을지도 모른다.
신경 쓸 일도 더 적고, 또...
그 때 가게 문에 달린 도어벨이 짤랑 소리를 내며 상념에 빠져들고 있던 그의 정신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이 시간에 손님이 오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어서 오세요."
처음 보는 금발의 여학생이었다.
"커피 두 잔, 라떼 세 잔 주시겠어요? 하나는 두유로, 테이크아웃이요."
카운터 옆에 세워 둔 메뉴판을 대충 훑어보고 빠르게 주문한 그녀는 조금 초조한 듯 연신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며 시간을 확인했다.
"급한 일이 있나요?"
"아, 모임에 커피를 사 가기로 약속했는데 벌써 20분이나 늦어서요... 괜찮다면 좀 빨리 만들어 주실 수 있나요?"
레오는 머쓱하다는 듯 웃는 그녀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익숙한 손길로 포터필터를 머신에 끼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종이컵 다섯 잔에 커피를 채우고 뚜껑을 덮어 커피 캐리어에 넣은 그는 여학생에게 손잡이를 건넸다.
"손이 정말 빠르시네요. 고마워요!"
서둘러 캐리어를 받아 든 그녀는 구석에 있던 테이블 모서리에 옷이 걸린 줄도 모르고 뒤돌아 나가려다 크게 휘청거렸고, 그 바람에 오른손에 든 커피 한 잔이 그녀의 재킷에 죄다 쏟아지고 말았다.
"아!"
당황하는 그녀에게 서둘러 다가간 레오가 물었다.
"괜찮아요?"
"네. 이걸 어쩌죠..."
레오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안절부절 못하는 그녀에게 건넸다.
"다시 만들어 줄 테니 걱정 마세요. 이걸로 닦고 있어요."
그가 다시 작업대 안쪽으로 들어가 커피를 만드는 동안 엉거주춤한 자세로 초조하게 서 있던 여학생은 커피 한 잔을 새로 받아들자마자 연신 감사인사를 외치며 빠르게 가게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레오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쏟아진 커피를 닦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손님이 방문하는 것도, 바닥이 더러워지는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인데 오늘은 괜시리 어딘가 찜찜한 느낌이 들었다.
자기 몫의 커피를 내리려 포트에 담아 둔 물은 이미 식어 가고 있었다.

"아더, 이제 일어나. 라일리가 커피 사 왔어."
까무잡잡한 피부의 남학생이 테이블에 엎드려 있는 친구를 팔꿈치로 툭툭 쳐서 깨우자 아더라 불린 그는 죽은 듯 미동도 않고 있던 몸을 부스스 일으켜 세웠다.
"흔들지 마, 머리 어지러워..."
"어젯밤에도 제대로 못 잤어?"
잔뜩 눌린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끙, 하는 소리를 내는 모습을 보며 짧게 한숨을 쉰 남학생이 그에게 커피를 건넸다.
"이거라도 마시고 정신 좀 차려 봐.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커피를 받아 한 모금 들이키자 묵직한 쓴맛이 입 안 가득 퍼지며 이유 모를 안정감이 들었다.
"...맛있네."
"그래? 별일이네. 평소엔 맛있단 말 잘 안 하면서."
아더는 제 옆의 친구에게서 시선을 돌려 맞은편에 앉아 젖은 재킷을 말리고 있는 금발의 여학생, 라일리를 쳐다보았다.
"무슨 일 있었어?"
"아, 아까 커피 사다가 서두르는 바람에 옷에 다 흘렸거든. 그러고 보니 카페 사장님이 빌려준 손수건도 그대로 들고 와 버렸네."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 보이는 라일리를 시큰둥하게 바라보던 아더의 눈빛이 그녀가 펼쳐 보인 낡은 손수건에 닿은 순간 미묘하게 변했다.
"근데 요즘 세상에 손수건이라니, 좀 특이하지 않아?"
"그거 잠깐 보여 줘."
그때까지도 카페라떼를 마시고 있던 옆자리의 남학생은 손수건을 받아들고 자세히 살펴 보던 아더의 표정이 어딘가 이상해진 것을 눈치채고 물었다.
"왜 그래?"
"라일리."
아더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그 카페, 어디 있어?"

개수대에서 컵을 정리하고 있던 레오는 문가에서 들려오는 도어벨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어서 오세요."
문 손잡이를 잡고 서 있는 청년과 눈을 마주친 순간, 그는 벼랑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충격에 손에 들고 있던 컵을 놓칠 뻔했다.
갈색으로 얼룩덜룩한 손수건을 목숨보다 소중한 물건처럼 손에 꼭 쥐고 있는 청년의 얼굴에서 절박하게 울음을 터뜨리던 어린 소년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기억을 되새길 필요조차 없었다. 한 번도 잊은 적 없었으니까.
"선생님...?"
형편없이 떨리는 목소리를 들은 순간, 그는 돌이킬 수 없는 멍청한 실수를 해 버렸다는 사실을 통감했다.
수년 전 어둠 속 깊은 곳으로 사라져야 했던 초만녕의 흔적이 떨어지지 않는 그림자가 되어 그의 발목을 잡아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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