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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16 20:19
모든 것에 알못ㅈㅇ 미자무강 짤ㅅㅍㅈ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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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나가요. 내가 나가게 해줄게요.
허니는 장안에게 안긴 채 그를 바라봤다.
- 그건...
당혹스러워하는 얼굴에 장안은 긴장해 마른침을 삼켰다.
- ... 내가 할 말이었는데.
시작은
허니와 지살 후보 때부터 친하게 지낸
미살원의 전 주인이었다.
허니의 그림자와 정을 통한 그녀는
궤획성에서는 그들 둘이 함께 할 길이 없다는 것을 알아
허니와 형 당주에게 부탁해
거짓 죽음을 위장해 정인인 그림자 먼저 성 밖으로 내보내고
자신은 그네에서 뛰어내렸다.
허니는 다른 방법이 있을 거라고 설득도 해봤지만
하찮게 여겨 감시가 소홀한 그림자면 모를까
살수인 제가 여기를 무사히 빠져나갈 방법은 없다며
스스로 불구가 된 것이다.
그리고 허니는 그 진짜 의도를 숨기는 걸 돕기 위해
그네를 망가뜨린 게 자신인 양 행동했다.
성주는 동료를 매몰차게 짓밟은 허니를 자랑스러워 했고
경쟁에서 진 데다 쓸모 없어진 미살원의 주인을 쉬이 내쳤다.
그 뒤로
허니는 형 당주와 함께
어쩔 수 없이 여기까지 오게 됐으나
연인이나 처자식을 잊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그림자들을
죽음이나 사고 혹은 병사한 것으로 위장해
아무도 모르게 궤획성 밖으로 내보내주었다.
제 그림자들을 누구보다 바쁘게 만든 것도
그들이 궤획성 안에서 무얼 하든
주인의 심부름 중이겠거니 하고 의심의 눈을 피하려 한 것이었다.
- 당주의 일이 팔 할이고 나는 그냥 눈속임 정도나 돕는 거지만.
허니는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으나
이 일이 발각되면 차라는 형 당주는 살려주더라도
허니까지 살려주진 않을 게 분명했다.
허니를 주인으로 두 해 가까이 모시며
지난 그림자들을 의도적으로 해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이렇게 위험한 일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 그럼 관상을 볼 줄 안다는 것도 거짓말이었네요.
- 얼굴을 읽긴 읽었거든!
지금껏 허니의 그림자 모두가 무사히 빠져나간 것은 아니고
임무 중에 죽거나 다친 이도,
실연 소식에 희망을 잃고 시름시름 앓다 죽은 이도 있었지만
그래도 잃은 사람보다 구한 사람이 더 많은 건
허니와 형 당주에게 위안이 되곤 했다.
그림자는 매번 누구로 할 지
형 당주가 조사한 내용을 바탕으로 미리 정해두었고
그림자 후보들과 대면했을 때 바뀐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사전에 조사한 내용과
직접 대면하여 본 선량한 이들의 눈빛에 담긴 삶에 대한 의지는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장안을 제외하고는.
장안이 자신의 신분을 위조한 탓이기도 했지만
어쨌든 열한 번째 그림자로 선점해뒀던 사람은 장안이 아니었다.
- 특히 너는 얼굴에 아주 커다랗게 쓰여 있었지.
- ... 뭐라고 써있었는데요.
허니는 장안의 얼굴 위에 정말로 글씨가 써있어
그것을 손으로 읽어내는 사람처럼
그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더듬으며 말했다.
- 아주 중요한 사람이라고.
반드시 살려야 되는 사람이라고 써있었어.
- 궤획성에 오기 전에 저는 마부였어요.
지살원의 거처로 돌아와
제가 더 아픈 얼굴로 허니의 등에 약을 바르던 장안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다섯 살에 부친을 잃고
도처를 떠돌며 살던 굶주린 어린애를
강남 주검 명가의 가주가
자신의 신까지 벗어준 것도 모자라
그의 집으로 데려가
새 옷도 주고
사씨 성과 새 이름도 주고
큰아가씨의 마부라는 직책도 주고
가문의 무공과 심법도 가르쳐주었는데
막내 도련님의 일곱 살 생일이 이틀 남았던 날에
궤획성의 성주 차라가 가주와 사씨 가문의 식솔 모두를 참살해
큰아가씨와 단둘이 겨우 살아남은 장안이
맨손으로 그들 모두를 묻어준 후에
차라에게 반드시 복수할 것이라 맹세했다는 이야기를.
- 큰아가씨는 너무 위험하다고 반대하셨고요.
장안은 귀한 아가씨까지
자신과 뜻을 같이 할 필요는 없다며
큰아가씨를 그녀의 외조부모께 데려다 드리고
홀로 궤획성으로 왔다.
복수에 대한 맹세는 진심이었지만
아가씨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장안이 밖에서 더 힘을 키우지 않고 무작정 이 곳으로 온 건
사실 큰아가씨와 하루라도 빨리 떨어지기 위해서였다.
- 부디 살아계셨으면 했거든요. 살아서 행복하시길 바랐어요.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모친도
선량했던 부친도
상냥했던 어르신도
장안이 사랑했던 사람들은 늘 그의 곁에 오래 머물지를 않았다.
그는 그 상실감을 다시 겪을 자신이 없었고
그래서 이번에는 잃어버리기 전에 그가 먼저
유일한 가족이나 다름 없는 아가씨를 떠났다.
- 당신도 살아서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왜냐하면 당신은 제게...
- ...... 중요한 사람이니까요.
복수를 끝내기 전까지는
누구에게도 곁을 내줄 생각이 없던 그였다.
그러나 누군가 마음 속에 자리잡는 건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없는 거라는 걸
그 때의 장안은 몰랐다.
제 손을 잡으며 살아달라고 말하는 장안을
먹먹한 얼굴로 바라보던 허니가
그의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 혼자서는 안 가.
- 같이 가. 나랑 같이 떠나자. 응?
그가 사씨 가문에 입은 은혜를 얼마나 크게 생각하는지
방금 들어 알았음에도
허니는 장안을 두고 떠날 수 없었다.
그 없이는 행복해질 수 없을 거라서.
하지만 강요할 수 없다는 것 역시 허니는 잘 알았다.
그 때 장안을 놓아주려던 허니의 손을 그가 붙잡았다.
- 좋아요.
다음날
장안은 허니를 버려진 사당 뒤편의 절벽으로 데려간 뒤
돌무더기 틈에 숨겨둔 가죽 주머니를 꺼내 보여주었다.
주머니 안에는 알약이 든 병이 있었다.
- 이걸 먹으면 물 속에서 숨을 오래 참을 수 있어요.
절벽에서 뛰어내려 호수 안에 들어간 뒤에
다른 물살이 느껴질 때까지 호수 바닥까지 내려가
그 물살을 따라 가다보면 더는 헤엄을 칠 수 없을만큼
수면이 얕아지는 개울가가 나올 거고
개울가에는 오래 전에 홍수 때 떠내려온
거대한 나무 밑둥이 있을 거라고 했다.
그 밑둥 안에 새 옷과 돈을 넣은 주머니가 있으니
옷을 갈아입고
하루에 한 번씩 궤획성을 들렀다 나가는
식량 및 물품 수송용 우차에 숨어 나가는 계획이었는데
한 사람은 남아 궤획성에 크게 혼란을 일으켜
성주와 살수들의 이목을 다른 곳에 향하게 한 후에
뒤늦게 빠져나와야만 해서
허니와 장안은 이를 두고
서로 제가 하겠다며 며칠을 다퉜다.
짝- 하고 뺨을 때리는 제법 큰 마찰음과 함께
- 네가 갈 수록 버릇이 없구나!
잔뜩 역정을 내는 허니의 목소리가 이어져
대전 앞을 지나던 모두의 시선이 그들에게로 쏠렸다.
- 그래도 아닌 걸 맞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 아직도..! 그래 그럼 오늘 하루종일 여기서 한 번 생각해봐.
-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아직 정오도 지나지 않은 오전이라
하루가 절반도 넘게 남아있었다.
그럼에도 허니는
어지간히 화가 난듯
장안을 돌바닥에 꿇려두고서 혼자 처소로 돌아가버렸다.
그림자들은 저희들끼리,
무상귀에게 대들다니 장안은 정말 겁이 없다고 쑥덕거리다
각자 주인들을 따라 흩어졌다.
장안은 해가 져 어두워진 후에도
한참을 더 묵묵히 무릎 꿇고 있다가
문을 닫아 걸어야 하는 통금 시간 종이 울렸을 때서야
스스로 일어난 뒤 주인의 거처로 돌아가
평소처럼 대문을 닫고 자물쇠를 잠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마자
허니가 밖으로 뛰어나왔다.
- 장안..!
새하얀 침의 옷자락을 나풀거리며 달려와
그에게 와락 안기는 제 주인을 장안은 어렵지 않게 받아냈다.
팔은 허니의 허리를 단단히 받친 채로
그리고 또 입가에도 미소가 어린 채로
장안은 나지막히 허니를 타이르는 말을 했다.
- 이러면 저희가 하루종일 연극한 게 소용없어지잖아요.
이 곳에서 도망칠 계획을 세우던 허니와 장안은
지난 번 심부름에 장안을 동행시킨 성주가
아무래도 저희 둘의 사이를 의심하는듯 해
성주가 지살 열 둘을 모두 취행루로 불러 전리품을 나눠준 오늘
나오는 길에 부러 보란듯이 불화를 연기했다.
차라의 눈 앞에서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분명 곧바로 그녀의 귀에 들어갔을 게 뻔했다.
- 문도 닫혔는데 뭐 어때.
허니는 낮에 자신이 때렸던 얼굴을 살피며
내내 밖에 있느라 차갑게 식은 뺨을 어루만졌다.
- 역시 궤획성을 교란시키는 일은 내가 해야겠어.
장안은 동의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허니를 바라봤다.
- 어째서요?
- 너는 나를 못 때렸지만 나는 너를 때렸잖아. 역시 내 배포가 더 큰 것 같아.
함께 두 번째로 임무를 수행하러 나갔을 때의 일을 언급하는 것에
장안은 쓰게 웃으며
허니를 안아든 채로 처소를 향해 천천히 걸었다.
- 주인님의 말씀이 백 번 옳지만 그 일에는 배포보다는 무공이 필요할 거라서 동의할 수 없습니다.
- 나도 무공 있어.
- 예, 하지만 형고 한 마리는 저희 둘이서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아서요. 아쉽네요.
놀리는 말에 허니가 주먹으로 장안의 어깨를 때리자
장안은 일부러 휘청거리며 아픈 척 엄살을 부렸고
이에 하루종일 꿇고 있었던 탓에 그의 무릎이 상했다 생각한 허니가
어서 저를 내려놓으라 하는데도
장안은 밤새 들 수도 있다면서 주인의 명령에 불복했다.
티격태격 하면서도 서로에게 꼭 붙어있는 둘의 모습은
여느 평범한 연인들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중추절 밤에
성주가 야외 연회를 열어
궤획성의 살수들을 모두 초대했다.
속으로는 저마다의 은원으로 들끓어도
겉으로는 화기애애하게 음식을 먹고 달 구경을 하며
하나같이 성주의 은혜를 칭송하던 때였다.
- 궤획성의 성주 차라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수없이 무고한 목숨을 취하여 인륜을 저버렸으니 우리가 수천의 원혼들을 대신하여 단죄하러 왔다!
갑자기 대전 지붕 위에 복면 쓴 강호의 무사들 수십이 나타나
상석에 앉아있는 차라를 향해 달려들었다.
절살 유광과 형 당주가 가장 먼저 그들을 막아냈고
천살들과 그림자들도 맞서 싸웠다.
허니는 무공을 하지 못하니
장안은 복면 무사들에 맞서 싸우기보다는
주인을 보호하는데만 주력했다.
연회장이 엉망이 된 와중에
차라가 나서지 않았는데도
복면 무사들이 점점 열세에 처하자
휘파람 소리와 함께 이번에는 지붕 위에서 화살비가 쏟아졌다.
화살들은 모두 차라를 향해 겨눠졌지만
성주의 옷자락 하나 상하게 하지 못했다.
갑자기 그 앞으로 뛰어든 하인 하나가
그 화살을 모두 대신 맞아낸 덕분이었다.
허나 용맹한 행동과는 다르게
그는 피눈물을 흘리며 괴로워했다.
자신을 희생하여 성주를 구한 것이 그의 의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천살인 연금 낭자는
흰독말풀의 화밀로 만든 고를 즐겨 썼다.
이 고는 사람의 몸에 들어가면
온몸의 경락과 오장육부에 침투해 실을 토해내고
숙주를 지각과 감각을 잃은 채 살아있는 허수아비로 만든다 했다.
그리고 그가 바로 연금이 만든 '살아있는 허수아비'였다.
그는 연금이 나서 남은 적들을 모두 참살할 때까지
총 서른 아홉 대의 화살을 홀로 막아냈다.
적들 뿐 아니라
궤획성의 사람들과
장안마저 그 참혹한 모습을 넋을 놓고 바라봤는데
문득 품 안에서 떨림이 느껴졌다.
장안이 허니에게 괜찮냐고 물으려던 찰나
연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허니, 안색이 창백하구나. 혹시 내가 네 비위를 상하게 했니?
- ... 그럴리가요. 어서 저도 천살이 되어 선배들처럼 무공을 연마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 그래 이렇게 쓸모가 없어서야 어느 세월에 성주께 은혜를 갚겠어. 분발하렴.
- 역시 저를 생각해주시는 건 연금 낭자 밖에 없네요. 감사합니다.
대놓고 긁는 말에도
허니가 평소처럼 미소를 잃지 않고서 태연히 대답하자
연금은 질렸다는 얼굴로 가버렸고
허니 역시 그대로 몸을 돌려 그 자리를 떠나다
얼마 못가 다시 장안의 품 안으로 무너졌다.
처소에 돌아와
주인을 의자에 앉힌 장안이
그녀가 내내 긴 소매 속에 숨기고 있던 손을 꺼내자
두 손 다 손마디가 하얘지도록 있는 힘껏 쥐고 있었다.
여전히 정신이 어디 딴 데 가 있는 듯한 주인을 대신해
장안은 제 손으로 천천히 허니의 손을 풀어주었다.
얼마나 꽉 쥐고 있었는지
길지도 않은 손톱에 패여
양 손바닥에 상처가 나 있었다.
약 상자를 가져온 장안이 상처에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아주자
허니가 그제서야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 예전에 몸종일 적에 내가 잘못을 하면..
큰마님께서 커다란 목함에 가두시고는 했어
그 때 나는 지금보다도 더 몸집이 작았는데
그 목함은 내가 들어가기에도 빠듯해서
들어가면 웅크린 그대로 몸을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지
게다가 빛이 들어오지 못하게 위에 두꺼운 천을 덮어서
그 안에 들어가면 1각이 지났는지 1시진이 지났는지 분간이 안 되니
어떤 때는 1주향도 안 되게 짧았고
때로는 반나절만큼 길었는데
내게는 짧든 길든 똑같았어 늘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지
가끔 그 때 꿈을 꾸는데
잠에서 깨어나도 무서운 마음이 가시지는 않아
지금 이 삶이 꿈이고
나는 사실 아직도 거기 갇혀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 ... 장안.
- 예.
- 나는 그렇게는 안 죽을 거야.
- ......
- 그렇게는 싫어.
지난 번에 제가 먹인
몸을 마비시키는 환약에 어째서 그렇게 화를 냈는지
비로소 그 이유를 알게 된 장안이
여전히 떨고 있는 허니를 제 품에 끌어안았다.
살수가 자신의 가장 큰 두려움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그 의미를 장안은 모르지 않았다.
-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은 제가 반드시 지킬 겁니다.
중추절의 일로
한동안 궤획성 안팎으로 경계가 심해
두 사람은 서두르지 않고 신중히 탈출 날짜를 정했다.
그리고 계획도 변경했다.
아무리 내공이 있고 무공을 하는 장안이어도
단순히 교란하는 것만으로는
성주와 살수와 그림자들 전부를 따돌리고
탈출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란 판단에
차라가 절살 유광을 대동하고
태부를 만나기 위해 성밖으로 나가 부재한 날에
궤획성 곳곳과 살수들 처소에 폭약을 터뜨려 혼란을 만들고
저희는 폭사한 것으로 위장한 후 뒷수습은 형 당주에게 맡기고서
함께 궤획성을 빠져나가기로 했다.
탈출일을 닷새밖에 남겨놓지 않았던 날에
차라가 허니에게 특별 임무를 내리면서
늘 가던 심부름이 아닌데도 그림자의 동행을 불허했다.
- 내일 있을 천살 결투를 감독하래. 연금을 시켜 차무를 죽일 건가봐.
- 절살 시절에 자신과 형풍의 사이를 당시 성주에게 알린 걸 차무라 생각해 차라의 원망이 깊다고 들었어요.
그보다는 당신을 혼자 보내는 게 걸려요. 제가 숨어서 따라갈게요.
허니는 고개를 저었다.
- 우리 사이를 의심한 함정일 수도 있어. 닷새 남겨놓고 들킬 순 없지.
- ......
- 괜찮아. 아무리 나이가 들었대도 차무는 노련한 천살이니 연금도 분명 멀쩡할 순 없을 거야.
- 그래서 다친 연금이 당신을 공격하면 싸우게요?
- 아니? 당연히 도망쳐야지!
허니는 장안에게 웃어 보였다.
그런 허니를 장안은 불안한듯 끌어안았다.
- 조심해요.
- 응. 난 아주 중요한 사람이니까.
- 맞아요.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이에요.
허니는 떠날 시간이 될 때까지
장안의 잠을 재워주겠다며
자신의 침상보다 훨씬 딱딱하고 비좁은
그림자의 침상에 그와 함께 누워
궤획성을 나가서 하고 싶은 일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 우선 여기서 아주 먼 곳으로 가자.
- ......
- 너무 멀어서 성주가 걸음조차 하지 않을 만큼 먼 곳으로.
- 그리고요?
- 그리고 작은 집에 살면서 마당에는 살구나무 한 그루를 심을래.
- 왜 작은 집이에요?
- 큰 집은 청소하기 힘들잖아.
게으른 주인다운 말에 장안이 낮게 웃었다.
- 나무도 그래서 한 그루 뿐이에요?
- 우리 둘이 먹고, 남는 건 술 담그기에 한 그루면 충분해.
- 식구가 늘어나면요?
- 식구가 늘어나면 그 때 하나 더 심지 뭐.
제 질문에 담긴 진짜 의미를 알아채지 못한
눈치 없는 주인 때문에 장안은 작게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 큰 집에 살아요. 당신은 아무 것도 안 해도 돼요. 내가 다 할게요.
- 뭐든?
- 뭐든요.
- 손에 물도 안 묻히게?
- 네.
- 발이 땅에 닿을 새도 없게?
- 네.
- 그럼 아이도 네가 대신 낳아줄 거야?
허니의 질문에 장안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무래도 조금 전 그가 했던 질문의 의미를 허니도 알았던 모양이다.
본심을 들킨데다 제가 생각한 반응과도 달라
허니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장안의 두 눈을 쫓아
그의 앞으로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며 허니가 놀리듯이 재차 물었다.
- 그건 싫어?
얼굴에 짓궂은 웃음기를 남긴 채
대답이 없는 그에게서 허니가 물러나주려고 하자
장안의 팔이 허니를 잡아 제게서 멀어지지 못하게 했다.
- 당신이 제게 바라는 일 중에 싫은 건 한 가지도 없어요.
허니는 몇 번을 입술만 달싹이다 겨우 입을 열었고
겨우 나온 목소리는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우는 것 같기도 했다.
- 나도 널 위해 하는 일 중에 싫은 건 하나도 없어.
허니는 장안을 향해 미소 지었지만
어쩐지 그 미소는 그녀를 더 슬퍼보이게 만들었다.
- 그리고 그건 지금도...
- 마찬가지야..
두 사람의 얼굴이 숨이 닿을듯 가까워졌고
장안은 그대로 허니에게 입맞추고 싶은 것을 참아내느라
등 뒤로 둔 두 손에 힘을 주었다.
더 가까이 다가오지 않는 장안 대신
허니가 그에게 좀 더 다가섰을 때
장안은 허니의 눈에 맺힌 눈물을 보았다.
그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장안이 손을 들어올린 순간
허니의 두 눈이 보랏빛으로 빛나며
장안의 시야가 칠흑같이 어두워졌다.
마치 성주 차라의 '최면환술'에 걸려들었을 때처럼.
하루 전.
차라의 부름을 받고 돌아오는 길에
형 당주께서 급히 찾으신다는 말을 듣고
허니는 제 처소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려 쇄골자헌으로 향했다.
- 네게 면목이 없다.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임무를 나갔던 지살 하나가
그들이 죽음을 위장해 몰래 내보내준 허니의 전 그림자를 알아보고
성주에게 보고를 올린 것이었다.
차라는 허니를 불러 진위를 확인하지 않았다.
이미 배신으로 간주하여 처분을 결정했다는 의미였다.
분명 형 당주의 개입 역시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차라는 허니를 죽일 게 분명했다.
뜬금없이 천살들의 결투를 감독하라는 임무의 진위를
허니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제가 그 곳에서 죽게 될 거라는 것을.
- 장안은 살려야 해요.
그게 허니의 입에서 가장 먼저 나온 말이었다.
장안은 분명 허니를 살리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하겠지만
저희가 차라를, 궤획성 모두를 이길 가능성은 없으니
달라질 건 없을 거였다.
그저 왕생지 아래로 던져질 시체 두 구가 늘어난다는 것 외에는.
- 장안을 무사히 내보낸다 해도 네 소식을 알고 나면 분명 복수하러 돌아올텐데 무슨 수로? 차라리 탈출 날짜를 앞당겨서..
허니는 고개를 저었다.
- 분명 붙잡힐 거예요. 장안의 목숨을 담보로 도박을 할 수는 없어요.
단호한 대답에 형 당주는 입을 다물었다.
사랑하는 이의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할 수 없는 심정은
그가 누구보다 더 잘 알았으므로.
그리고 한참을 침묵한 끝에 어렵게 말을 꺼냈다.
- 네 그림자를 살릴 방법이 딱 하나 있긴 하다. 다만...
이것은 사실 그가 한 때 차라를 위해 떠올렸던 방편이었다.
이 방법을 쓰지 않았던 것이
저희들의 불행인지 행운인지 그는 아직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오래 전의 자신과 차라 같아서
꼭 살려 보내고 싶던 이 두 사람에게
이 방법을 권해야 한다는 사실이 절망스러웠다.
- ... 네가 원치 않을 거야.
- 말씀해주세요.
차라는 오래 전
죽어가던 허니에게 혈고를 주어 살렸을 때
재미삼아 최면환술을 가르쳤었다.
어차피 그 때의 한없이 부족한 내공과 무공으로는
차라의 흉내조차 낼 수 없었고
행여 나중에라도 배울 수 있게 되었을 때
아주 작은 초석이 되어줄 기본적인 초식만을 알려준 것이었다.
허니가 생을 포기하지 않고 살수를 선망하여 기꺼이 궤획성에 남도록.
- 최면환술로 장안의 기억을 지우는 것이다.
- ... 장안.
장안은 허니의 환술에 의해 잠든 채
침상 위에 누워 있었다.
- 너는 네 첫주인과 가까웠던 적이 한 번도 없었어.
우리는 서로에게 전부였고
- 단순히 주종관계일 뿐이라 늘 서로를 소 닭보듯 했지.
내게 두 번째 삶을 준 건 궤획성이 아니라 너였어
- 우리 둘 사이에는 한 순간도 추억할 것이 없고
내가 널 기억할게
- 그래서 주인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너는 아무렇지도 않을 거야.
네가 내게 준 마음은 내가 가장 잘 아니까
- 모르는 사람이나 다름없으니까.
마지막 순간까지
- 넌 혹독한 주인 밑에서 2년간 고되게 일만 했으니...
네 얼굴을, 네 목소리를, 네 손을..
- 그런 주인은 금방 다 잊을 거야. 얼굴도, 목소리도. 전부 다.
늘 나를 오롯이 봐주던 네 눈을 죽어도 잊지 않을게
- 안녕, 장안...
분명 환술에 빠져있을 장안의 감은 눈에서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내렸지만
허니는 보지 못했다.
허니는 당주가 준 혈고를 먹고 내공을 높여
최면환술에 자신의 모든 공력을 담아
정인에게 남아있는 자신에 대한 모든 기억을 지웠다.
소중한 이를 잃게 될까 두려워
갖는 것도 포기하고 살았다는 그가
절망해 다시는 누구도 사랑하지 못 할까봐
고작 저때문에 그의 귀한 삶을 함부로 버릴까봐서.
사실 허니는 장안이 정말로 귀한 신분이라 짐작했다.
짐작뿐이라 그에게는 말하지 못했지만
그를 거두었다는 어르신이 그에게 가르친 무공과 심법은
결코 가볍지 않았고
큰아가씨가 주었다는 검 역시 그랬다.
그러니 장안은 살아야 했다.
하지만 이러한 짐작이 없었다 해도
허니는 여전히 그를 살렸을 것이다.
잠든 장안의 이마 위로
처음이자 마지막인 입맞춤을 남긴 후에
허니는 몸을 일으켜 홀로 자신의 처소를 나섰다.
그녀를 배웅한 것은
장안과 허니가 처음 만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그들 곁을 떠난 적이 없는
창백한 달 하나 뿐이었다.
그림자 장안은
임무에 실패한 주인의 시신을 수습한 뒤
처분을 기다리도록 하라
그의 주인은
성주의 명으로 천살들의 결투를 감독하다가 그 싸움에 휘말려
천살 연금의 허수아비로 쓰이다 죽었다고 들었다.
막상 천살들의 결투는 무승부로 끝나
주인의 죽음은 실로 무용한 것이 되었다.
장안은 피안전의 왕생지 앞에 주인의 시신을 내려놓았다.
생명이 빠져나간 몸에는 실도 더는 남아있지 않고
처참한 몸의 상처들도 수의에 가려진데다
눈을 감은 얼굴이 잠든 사람처럼 평온해
산송장으로 쓰이다 내버려진 이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런 주인의 얼굴이 낯설어
장안은 더는 온기가 남아있지 않은 손을 조심스레 쥐어도 봤으나
망자의 앞에서 마땅히 느껴야 할
슬픔이나 동정심 같은 감정은 들지 않았다.
왕생지의 어두운 수면 아래로 잠겨가는 옛 주인을 뒤로 한 채
셀 수 없이 많은 선대 살수들의 홍마산들 사이로
그녀의 핏빛 우산 역시 공중에 띄워 올리고서
피안전을 나서던 장안은
"안녕, 장안..."
귓가에 맴도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봤지만
그 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밤하늘의 별처럼 조용히 빛을 내는 형고들만이 떠다니며
어두운 피안전 안을 밝히고 있을 뿐.
그림자 장안은 칠 일 내로 새 주인을 찾지 못하면
전 주인의 뒤를 따르게 될 것이다
엿새째 되던 밤,
잠을 이루지 못해
생전 주인의 처소를 찾았던 장안은
텅 빈 침상 위에서 깊은 잠에 빠졌다.
장안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
잠결에 꾼 꿈의 내용은 조금도 기억나는 것이 없었고
얼굴에 자신이 흘린 눈물이 남아있었지만
그마저도 손등으로 훔쳐내자
곧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새 주인을 맞이할 기회가
한 번 밖에 남지 않았던 장안은
만미를 만났고
수많은 고난을 함께 겪으며
상대를 위해 목숨을 걸기를 여러 번 거쳐
잠시 그러나 서로에게는 한없이 길었던 시간을 지나
마침내 다시 만났다.
두 사람이 재회 했을 때
서로에 기대어 앉은 작은 뜰에는 살구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 왜 한 그루 뿐이야? 손님도 많이 찾아오면서.
장안은 그 이유를 한 번도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잠시 고민한 후에
제가 듣기에도 볼품 없는 대답을 했다.
- 그게 보기 좋은 것 같아서요.
다행히 만미는 네 말이 맞다며 장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유월의 밤공기에 익어가는 살구 내음이 섞여
장안의 머릿속에 순간 그리운 무엇이 떠오르는 듯 했지만
그것은 봄바람처럼 곧 허공으로 흩어졌다.
"혹시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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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나가요. 내가 나가게 해줄게요.
허니는 장안에게 안긴 채 그를 바라봤다.
- 그건...
당혹스러워하는 얼굴에 장안은 긴장해 마른침을 삼켰다.
- ... 내가 할 말이었는데.
시작은
허니와 지살 후보 때부터 친하게 지낸
미살원의 전 주인이었다.
허니의 그림자와 정을 통한 그녀는
궤획성에서는 그들 둘이 함께 할 길이 없다는 것을 알아
허니와 형 당주에게 부탁해
거짓 죽음을 위장해 정인인 그림자 먼저 성 밖으로 내보내고
자신은 그네에서 뛰어내렸다.
허니는 다른 방법이 있을 거라고 설득도 해봤지만
하찮게 여겨 감시가 소홀한 그림자면 모를까
살수인 제가 여기를 무사히 빠져나갈 방법은 없다며
스스로 불구가 된 것이다.
그리고 허니는 그 진짜 의도를 숨기는 걸 돕기 위해
그네를 망가뜨린 게 자신인 양 행동했다.
성주는 동료를 매몰차게 짓밟은 허니를 자랑스러워 했고
경쟁에서 진 데다 쓸모 없어진 미살원의 주인을 쉬이 내쳤다.
그 뒤로
허니는 형 당주와 함께
어쩔 수 없이 여기까지 오게 됐으나
연인이나 처자식을 잊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그림자들을
죽음이나 사고 혹은 병사한 것으로 위장해
아무도 모르게 궤획성 밖으로 내보내주었다.
제 그림자들을 누구보다 바쁘게 만든 것도
그들이 궤획성 안에서 무얼 하든
주인의 심부름 중이겠거니 하고 의심의 눈을 피하려 한 것이었다.
- 당주의 일이 팔 할이고 나는 그냥 눈속임 정도나 돕는 거지만.
허니는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으나
이 일이 발각되면 차라는 형 당주는 살려주더라도
허니까지 살려주진 않을 게 분명했다.
허니를 주인으로 두 해 가까이 모시며
지난 그림자들을 의도적으로 해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이렇게 위험한 일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 그럼 관상을 볼 줄 안다는 것도 거짓말이었네요.
- 얼굴을 읽긴 읽었거든!
지금껏 허니의 그림자 모두가 무사히 빠져나간 것은 아니고
임무 중에 죽거나 다친 이도,
실연 소식에 희망을 잃고 시름시름 앓다 죽은 이도 있었지만
그래도 잃은 사람보다 구한 사람이 더 많은 건
허니와 형 당주에게 위안이 되곤 했다.
그림자는 매번 누구로 할 지
형 당주가 조사한 내용을 바탕으로 미리 정해두었고
그림자 후보들과 대면했을 때 바뀐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사전에 조사한 내용과
직접 대면하여 본 선량한 이들의 눈빛에 담긴 삶에 대한 의지는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장안을 제외하고는.
장안이 자신의 신분을 위조한 탓이기도 했지만
어쨌든 열한 번째 그림자로 선점해뒀던 사람은 장안이 아니었다.
- 특히 너는 얼굴에 아주 커다랗게 쓰여 있었지.
- ... 뭐라고 써있었는데요.
허니는 장안의 얼굴 위에 정말로 글씨가 써있어
그것을 손으로 읽어내는 사람처럼
그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더듬으며 말했다.
- 아주 중요한 사람이라고.
반드시 살려야 되는 사람이라고 써있었어.
- 궤획성에 오기 전에 저는 마부였어요.
지살원의 거처로 돌아와
제가 더 아픈 얼굴로 허니의 등에 약을 바르던 장안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다섯 살에 부친을 잃고
도처를 떠돌며 살던 굶주린 어린애를
강남 주검 명가의 가주가
자신의 신까지 벗어준 것도 모자라
그의 집으로 데려가
새 옷도 주고
사씨 성과 새 이름도 주고
큰아가씨의 마부라는 직책도 주고
가문의 무공과 심법도 가르쳐주었는데
막내 도련님의 일곱 살 생일이 이틀 남았던 날에
궤획성의 성주 차라가 가주와 사씨 가문의 식솔 모두를 참살해
큰아가씨와 단둘이 겨우 살아남은 장안이
맨손으로 그들 모두를 묻어준 후에
차라에게 반드시 복수할 것이라 맹세했다는 이야기를.
- 큰아가씨는 너무 위험하다고 반대하셨고요.
장안은 귀한 아가씨까지
자신과 뜻을 같이 할 필요는 없다며
큰아가씨를 그녀의 외조부모께 데려다 드리고
홀로 궤획성으로 왔다.
복수에 대한 맹세는 진심이었지만
아가씨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장안이 밖에서 더 힘을 키우지 않고 무작정 이 곳으로 온 건
사실 큰아가씨와 하루라도 빨리 떨어지기 위해서였다.
- 부디 살아계셨으면 했거든요. 살아서 행복하시길 바랐어요.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모친도
선량했던 부친도
상냥했던 어르신도
장안이 사랑했던 사람들은 늘 그의 곁에 오래 머물지를 않았다.
그는 그 상실감을 다시 겪을 자신이 없었고
그래서 이번에는 잃어버리기 전에 그가 먼저
유일한 가족이나 다름 없는 아가씨를 떠났다.
- 당신도 살아서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왜냐하면 당신은 제게...
- ...... 중요한 사람이니까요.
복수를 끝내기 전까지는
누구에게도 곁을 내줄 생각이 없던 그였다.
그러나 누군가 마음 속에 자리잡는 건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없는 거라는 걸
그 때의 장안은 몰랐다.
제 손을 잡으며 살아달라고 말하는 장안을
먹먹한 얼굴로 바라보던 허니가
그의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 혼자서는 안 가.
- 같이 가. 나랑 같이 떠나자. 응?
그가 사씨 가문에 입은 은혜를 얼마나 크게 생각하는지
방금 들어 알았음에도
허니는 장안을 두고 떠날 수 없었다.
그 없이는 행복해질 수 없을 거라서.
하지만 강요할 수 없다는 것 역시 허니는 잘 알았다.
그 때 장안을 놓아주려던 허니의 손을 그가 붙잡았다.
- 좋아요.
다음날
장안은 허니를 버려진 사당 뒤편의 절벽으로 데려간 뒤
돌무더기 틈에 숨겨둔 가죽 주머니를 꺼내 보여주었다.
주머니 안에는 알약이 든 병이 있었다.
- 이걸 먹으면 물 속에서 숨을 오래 참을 수 있어요.
절벽에서 뛰어내려 호수 안에 들어간 뒤에
다른 물살이 느껴질 때까지 호수 바닥까지 내려가
그 물살을 따라 가다보면 더는 헤엄을 칠 수 없을만큼
수면이 얕아지는 개울가가 나올 거고
개울가에는 오래 전에 홍수 때 떠내려온
거대한 나무 밑둥이 있을 거라고 했다.
그 밑둥 안에 새 옷과 돈을 넣은 주머니가 있으니
옷을 갈아입고
하루에 한 번씩 궤획성을 들렀다 나가는
식량 및 물품 수송용 우차에 숨어 나가는 계획이었는데
한 사람은 남아 궤획성에 크게 혼란을 일으켜
성주와 살수들의 이목을 다른 곳에 향하게 한 후에
뒤늦게 빠져나와야만 해서
허니와 장안은 이를 두고
서로 제가 하겠다며 며칠을 다퉜다.
짝- 하고 뺨을 때리는 제법 큰 마찰음과 함께
- 네가 갈 수록 버릇이 없구나!
잔뜩 역정을 내는 허니의 목소리가 이어져
대전 앞을 지나던 모두의 시선이 그들에게로 쏠렸다.
- 그래도 아닌 걸 맞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 아직도..! 그래 그럼 오늘 하루종일 여기서 한 번 생각해봐.
-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아직 정오도 지나지 않은 오전이라
하루가 절반도 넘게 남아있었다.
그럼에도 허니는
어지간히 화가 난듯
장안을 돌바닥에 꿇려두고서 혼자 처소로 돌아가버렸다.
그림자들은 저희들끼리,
무상귀에게 대들다니 장안은 정말 겁이 없다고 쑥덕거리다
각자 주인들을 따라 흩어졌다.
장안은 해가 져 어두워진 후에도
한참을 더 묵묵히 무릎 꿇고 있다가
문을 닫아 걸어야 하는 통금 시간 종이 울렸을 때서야
스스로 일어난 뒤 주인의 거처로 돌아가
평소처럼 대문을 닫고 자물쇠를 잠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마자
허니가 밖으로 뛰어나왔다.
- 장안..!
새하얀 침의 옷자락을 나풀거리며 달려와
그에게 와락 안기는 제 주인을 장안은 어렵지 않게 받아냈다.
팔은 허니의 허리를 단단히 받친 채로
그리고 또 입가에도 미소가 어린 채로
장안은 나지막히 허니를 타이르는 말을 했다.
- 이러면 저희가 하루종일 연극한 게 소용없어지잖아요.
이 곳에서 도망칠 계획을 세우던 허니와 장안은
지난 번 심부름에 장안을 동행시킨 성주가
아무래도 저희 둘의 사이를 의심하는듯 해
성주가 지살 열 둘을 모두 취행루로 불러 전리품을 나눠준 오늘
나오는 길에 부러 보란듯이 불화를 연기했다.
차라의 눈 앞에서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분명 곧바로 그녀의 귀에 들어갔을 게 뻔했다.
- 문도 닫혔는데 뭐 어때.
허니는 낮에 자신이 때렸던 얼굴을 살피며
내내 밖에 있느라 차갑게 식은 뺨을 어루만졌다.
- 역시 궤획성을 교란시키는 일은 내가 해야겠어.
장안은 동의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허니를 바라봤다.
- 어째서요?
- 너는 나를 못 때렸지만 나는 너를 때렸잖아. 역시 내 배포가 더 큰 것 같아.
함께 두 번째로 임무를 수행하러 나갔을 때의 일을 언급하는 것에
장안은 쓰게 웃으며
허니를 안아든 채로 처소를 향해 천천히 걸었다.
- 주인님의 말씀이 백 번 옳지만 그 일에는 배포보다는 무공이 필요할 거라서 동의할 수 없습니다.
- 나도 무공 있어.
- 예, 하지만 형고 한 마리는 저희 둘이서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아서요. 아쉽네요.
놀리는 말에 허니가 주먹으로 장안의 어깨를 때리자
장안은 일부러 휘청거리며 아픈 척 엄살을 부렸고
이에 하루종일 꿇고 있었던 탓에 그의 무릎이 상했다 생각한 허니가
어서 저를 내려놓으라 하는데도
장안은 밤새 들 수도 있다면서 주인의 명령에 불복했다.
티격태격 하면서도 서로에게 꼭 붙어있는 둘의 모습은
여느 평범한 연인들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중추절 밤에
성주가 야외 연회를 열어
궤획성의 살수들을 모두 초대했다.
속으로는 저마다의 은원으로 들끓어도
겉으로는 화기애애하게 음식을 먹고 달 구경을 하며
하나같이 성주의 은혜를 칭송하던 때였다.
- 궤획성의 성주 차라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수없이 무고한 목숨을 취하여 인륜을 저버렸으니 우리가 수천의 원혼들을 대신하여 단죄하러 왔다!
갑자기 대전 지붕 위에 복면 쓴 강호의 무사들 수십이 나타나
상석에 앉아있는 차라를 향해 달려들었다.
절살 유광과 형 당주가 가장 먼저 그들을 막아냈고
천살들과 그림자들도 맞서 싸웠다.
허니는 무공을 하지 못하니
장안은 복면 무사들에 맞서 싸우기보다는
주인을 보호하는데만 주력했다.
연회장이 엉망이 된 와중에
차라가 나서지 않았는데도
복면 무사들이 점점 열세에 처하자
휘파람 소리와 함께 이번에는 지붕 위에서 화살비가 쏟아졌다.
화살들은 모두 차라를 향해 겨눠졌지만
성주의 옷자락 하나 상하게 하지 못했다.
갑자기 그 앞으로 뛰어든 하인 하나가
그 화살을 모두 대신 맞아낸 덕분이었다.
허나 용맹한 행동과는 다르게
그는 피눈물을 흘리며 괴로워했다.
자신을 희생하여 성주를 구한 것이 그의 의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천살인 연금 낭자는
흰독말풀의 화밀로 만든 고를 즐겨 썼다.
이 고는 사람의 몸에 들어가면
온몸의 경락과 오장육부에 침투해 실을 토해내고
숙주를 지각과 감각을 잃은 채 살아있는 허수아비로 만든다 했다.
그리고 그가 바로 연금이 만든 '살아있는 허수아비'였다.
그는 연금이 나서 남은 적들을 모두 참살할 때까지
총 서른 아홉 대의 화살을 홀로 막아냈다.
적들 뿐 아니라
궤획성의 사람들과
장안마저 그 참혹한 모습을 넋을 놓고 바라봤는데
문득 품 안에서 떨림이 느껴졌다.
장안이 허니에게 괜찮냐고 물으려던 찰나
연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허니, 안색이 창백하구나. 혹시 내가 네 비위를 상하게 했니?
- ... 그럴리가요. 어서 저도 천살이 되어 선배들처럼 무공을 연마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 그래 이렇게 쓸모가 없어서야 어느 세월에 성주께 은혜를 갚겠어. 분발하렴.
- 역시 저를 생각해주시는 건 연금 낭자 밖에 없네요. 감사합니다.
대놓고 긁는 말에도
허니가 평소처럼 미소를 잃지 않고서 태연히 대답하자
연금은 질렸다는 얼굴로 가버렸고
허니 역시 그대로 몸을 돌려 그 자리를 떠나다
얼마 못가 다시 장안의 품 안으로 무너졌다.
처소에 돌아와
주인을 의자에 앉힌 장안이
그녀가 내내 긴 소매 속에 숨기고 있던 손을 꺼내자
두 손 다 손마디가 하얘지도록 있는 힘껏 쥐고 있었다.
여전히 정신이 어디 딴 데 가 있는 듯한 주인을 대신해
장안은 제 손으로 천천히 허니의 손을 풀어주었다.
얼마나 꽉 쥐고 있었는지
길지도 않은 손톱에 패여
양 손바닥에 상처가 나 있었다.
약 상자를 가져온 장안이 상처에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아주자
허니가 그제서야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 예전에 몸종일 적에 내가 잘못을 하면..
큰마님께서 커다란 목함에 가두시고는 했어
그 때 나는 지금보다도 더 몸집이 작았는데
그 목함은 내가 들어가기에도 빠듯해서
들어가면 웅크린 그대로 몸을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지
게다가 빛이 들어오지 못하게 위에 두꺼운 천을 덮어서
그 안에 들어가면 1각이 지났는지 1시진이 지났는지 분간이 안 되니
어떤 때는 1주향도 안 되게 짧았고
때로는 반나절만큼 길었는데
내게는 짧든 길든 똑같았어 늘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지
가끔 그 때 꿈을 꾸는데
잠에서 깨어나도 무서운 마음이 가시지는 않아
지금 이 삶이 꿈이고
나는 사실 아직도 거기 갇혀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 ... 장안.
- 예.
- 나는 그렇게는 안 죽을 거야.
- ......
- 그렇게는 싫어.
지난 번에 제가 먹인
몸을 마비시키는 환약에 어째서 그렇게 화를 냈는지
비로소 그 이유를 알게 된 장안이
여전히 떨고 있는 허니를 제 품에 끌어안았다.
살수가 자신의 가장 큰 두려움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그 의미를 장안은 모르지 않았다.
-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은 제가 반드시 지킬 겁니다.
중추절의 일로
한동안 궤획성 안팎으로 경계가 심해
두 사람은 서두르지 않고 신중히 탈출 날짜를 정했다.
그리고 계획도 변경했다.
아무리 내공이 있고 무공을 하는 장안이어도
단순히 교란하는 것만으로는
성주와 살수와 그림자들 전부를 따돌리고
탈출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란 판단에
차라가 절살 유광을 대동하고
태부를 만나기 위해 성밖으로 나가 부재한 날에
궤획성 곳곳과 살수들 처소에 폭약을 터뜨려 혼란을 만들고
저희는 폭사한 것으로 위장한 후 뒷수습은 형 당주에게 맡기고서
함께 궤획성을 빠져나가기로 했다.
탈출일을 닷새밖에 남겨놓지 않았던 날에
차라가 허니에게 특별 임무를 내리면서
늘 가던 심부름이 아닌데도 그림자의 동행을 불허했다.
- 내일 있을 천살 결투를 감독하래. 연금을 시켜 차무를 죽일 건가봐.
- 절살 시절에 자신과 형풍의 사이를 당시 성주에게 알린 걸 차무라 생각해 차라의 원망이 깊다고 들었어요.
그보다는 당신을 혼자 보내는 게 걸려요. 제가 숨어서 따라갈게요.
허니는 고개를 저었다.
- 우리 사이를 의심한 함정일 수도 있어. 닷새 남겨놓고 들킬 순 없지.
- ......
- 괜찮아. 아무리 나이가 들었대도 차무는 노련한 천살이니 연금도 분명 멀쩡할 순 없을 거야.
- 그래서 다친 연금이 당신을 공격하면 싸우게요?
- 아니? 당연히 도망쳐야지!
허니는 장안에게 웃어 보였다.
그런 허니를 장안은 불안한듯 끌어안았다.
- 조심해요.
- 응. 난 아주 중요한 사람이니까.
- 맞아요.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이에요.
허니는 떠날 시간이 될 때까지
장안의 잠을 재워주겠다며
자신의 침상보다 훨씬 딱딱하고 비좁은
그림자의 침상에 그와 함께 누워
궤획성을 나가서 하고 싶은 일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 우선 여기서 아주 먼 곳으로 가자.
- ......
- 너무 멀어서 성주가 걸음조차 하지 않을 만큼 먼 곳으로.
- 그리고요?
- 그리고 작은 집에 살면서 마당에는 살구나무 한 그루를 심을래.
- 왜 작은 집이에요?
- 큰 집은 청소하기 힘들잖아.
게으른 주인다운 말에 장안이 낮게 웃었다.
- 나무도 그래서 한 그루 뿐이에요?
- 우리 둘이 먹고, 남는 건 술 담그기에 한 그루면 충분해.
- 식구가 늘어나면요?
- 식구가 늘어나면 그 때 하나 더 심지 뭐.
제 질문에 담긴 진짜 의미를 알아채지 못한
눈치 없는 주인 때문에 장안은 작게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 큰 집에 살아요. 당신은 아무 것도 안 해도 돼요. 내가 다 할게요.
- 뭐든?
- 뭐든요.
- 손에 물도 안 묻히게?
- 네.
- 발이 땅에 닿을 새도 없게?
- 네.
- 그럼 아이도 네가 대신 낳아줄 거야?
허니의 질문에 장안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무래도 조금 전 그가 했던 질문의 의미를 허니도 알았던 모양이다.
본심을 들킨데다 제가 생각한 반응과도 달라
허니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장안의 두 눈을 쫓아
그의 앞으로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며 허니가 놀리듯이 재차 물었다.
- 그건 싫어?
얼굴에 짓궂은 웃음기를 남긴 채
대답이 없는 그에게서 허니가 물러나주려고 하자
장안의 팔이 허니를 잡아 제게서 멀어지지 못하게 했다.
- 당신이 제게 바라는 일 중에 싫은 건 한 가지도 없어요.
허니는 몇 번을 입술만 달싹이다 겨우 입을 열었고
겨우 나온 목소리는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우는 것 같기도 했다.
- 나도 널 위해 하는 일 중에 싫은 건 하나도 없어.
허니는 장안을 향해 미소 지었지만
어쩐지 그 미소는 그녀를 더 슬퍼보이게 만들었다.
- 그리고 그건 지금도...
- 마찬가지야..
두 사람의 얼굴이 숨이 닿을듯 가까워졌고
장안은 그대로 허니에게 입맞추고 싶은 것을 참아내느라
등 뒤로 둔 두 손에 힘을 주었다.
더 가까이 다가오지 않는 장안 대신
허니가 그에게 좀 더 다가섰을 때
장안은 허니의 눈에 맺힌 눈물을 보았다.
그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장안이 손을 들어올린 순간
허니의 두 눈이 보랏빛으로 빛나며
장안의 시야가 칠흑같이 어두워졌다.
마치 성주 차라의 '최면환술'에 걸려들었을 때처럼.
하루 전.
차라의 부름을 받고 돌아오는 길에
형 당주께서 급히 찾으신다는 말을 듣고
허니는 제 처소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려 쇄골자헌으로 향했다.
- 네게 면목이 없다.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임무를 나갔던 지살 하나가
그들이 죽음을 위장해 몰래 내보내준 허니의 전 그림자를 알아보고
성주에게 보고를 올린 것이었다.
차라는 허니를 불러 진위를 확인하지 않았다.
이미 배신으로 간주하여 처분을 결정했다는 의미였다.
분명 형 당주의 개입 역시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차라는 허니를 죽일 게 분명했다.
뜬금없이 천살들의 결투를 감독하라는 임무의 진위를
허니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제가 그 곳에서 죽게 될 거라는 것을.
- 장안은 살려야 해요.
그게 허니의 입에서 가장 먼저 나온 말이었다.
장안은 분명 허니를 살리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하겠지만
저희가 차라를, 궤획성 모두를 이길 가능성은 없으니
달라질 건 없을 거였다.
그저 왕생지 아래로 던져질 시체 두 구가 늘어난다는 것 외에는.
- 장안을 무사히 내보낸다 해도 네 소식을 알고 나면 분명 복수하러 돌아올텐데 무슨 수로? 차라리 탈출 날짜를 앞당겨서..
허니는 고개를 저었다.
- 분명 붙잡힐 거예요. 장안의 목숨을 담보로 도박을 할 수는 없어요.
단호한 대답에 형 당주는 입을 다물었다.
사랑하는 이의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할 수 없는 심정은
그가 누구보다 더 잘 알았으므로.
그리고 한참을 침묵한 끝에 어렵게 말을 꺼냈다.
- 네 그림자를 살릴 방법이 딱 하나 있긴 하다. 다만...
이것은 사실 그가 한 때 차라를 위해 떠올렸던 방편이었다.
이 방법을 쓰지 않았던 것이
저희들의 불행인지 행운인지 그는 아직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오래 전의 자신과 차라 같아서
꼭 살려 보내고 싶던 이 두 사람에게
이 방법을 권해야 한다는 사실이 절망스러웠다.
- ... 네가 원치 않을 거야.
- 말씀해주세요.
차라는 오래 전
죽어가던 허니에게 혈고를 주어 살렸을 때
재미삼아 최면환술을 가르쳤었다.
어차피 그 때의 한없이 부족한 내공과 무공으로는
차라의 흉내조차 낼 수 없었고
행여 나중에라도 배울 수 있게 되었을 때
아주 작은 초석이 되어줄 기본적인 초식만을 알려준 것이었다.
허니가 생을 포기하지 않고 살수를 선망하여 기꺼이 궤획성에 남도록.
- 최면환술로 장안의 기억을 지우는 것이다.
- ... 장안.
장안은 허니의 환술에 의해 잠든 채
침상 위에 누워 있었다.
- 너는 네 첫주인과 가까웠던 적이 한 번도 없었어.
우리는 서로에게 전부였고
- 단순히 주종관계일 뿐이라 늘 서로를 소 닭보듯 했지.
내게 두 번째 삶을 준 건 궤획성이 아니라 너였어
- 우리 둘 사이에는 한 순간도 추억할 것이 없고
내가 널 기억할게
- 그래서 주인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너는 아무렇지도 않을 거야.
네가 내게 준 마음은 내가 가장 잘 아니까
- 모르는 사람이나 다름없으니까.
마지막 순간까지
- 넌 혹독한 주인 밑에서 2년간 고되게 일만 했으니...
네 얼굴을, 네 목소리를, 네 손을..
- 그런 주인은 금방 다 잊을 거야. 얼굴도, 목소리도. 전부 다.
늘 나를 오롯이 봐주던 네 눈을 죽어도 잊지 않을게
- 안녕, 장안...
분명 환술에 빠져있을 장안의 감은 눈에서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내렸지만
허니는 보지 못했다.
허니는 당주가 준 혈고를 먹고 내공을 높여
최면환술에 자신의 모든 공력을 담아
정인에게 남아있는 자신에 대한 모든 기억을 지웠다.
소중한 이를 잃게 될까 두려워
갖는 것도 포기하고 살았다는 그가
절망해 다시는 누구도 사랑하지 못 할까봐
고작 저때문에 그의 귀한 삶을 함부로 버릴까봐서.
사실 허니는 장안이 정말로 귀한 신분이라 짐작했다.
짐작뿐이라 그에게는 말하지 못했지만
그를 거두었다는 어르신이 그에게 가르친 무공과 심법은
결코 가볍지 않았고
큰아가씨가 주었다는 검 역시 그랬다.
그러니 장안은 살아야 했다.
하지만 이러한 짐작이 없었다 해도
허니는 여전히 그를 살렸을 것이다.
잠든 장안의 이마 위로
처음이자 마지막인 입맞춤을 남긴 후에
허니는 몸을 일으켜 홀로 자신의 처소를 나섰다.
그녀를 배웅한 것은
장안과 허니가 처음 만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그들 곁을 떠난 적이 없는
창백한 달 하나 뿐이었다.
그림자 장안은
임무에 실패한 주인의 시신을 수습한 뒤
처분을 기다리도록 하라
그의 주인은
성주의 명으로 천살들의 결투를 감독하다가 그 싸움에 휘말려
천살 연금의 허수아비로 쓰이다 죽었다고 들었다.
막상 천살들의 결투는 무승부로 끝나
주인의 죽음은 실로 무용한 것이 되었다.
장안은 피안전의 왕생지 앞에 주인의 시신을 내려놓았다.
생명이 빠져나간 몸에는 실도 더는 남아있지 않고
처참한 몸의 상처들도 수의에 가려진데다
눈을 감은 얼굴이 잠든 사람처럼 평온해
산송장으로 쓰이다 내버려진 이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런 주인의 얼굴이 낯설어
장안은 더는 온기가 남아있지 않은 손을 조심스레 쥐어도 봤으나
망자의 앞에서 마땅히 느껴야 할
슬픔이나 동정심 같은 감정은 들지 않았다.
왕생지의 어두운 수면 아래로 잠겨가는 옛 주인을 뒤로 한 채
셀 수 없이 많은 선대 살수들의 홍마산들 사이로
그녀의 핏빛 우산 역시 공중에 띄워 올리고서
피안전을 나서던 장안은
"안녕, 장안..."
귓가에 맴도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봤지만
그 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밤하늘의 별처럼 조용히 빛을 내는 형고들만이 떠다니며
어두운 피안전 안을 밝히고 있을 뿐.
그림자 장안은 칠 일 내로 새 주인을 찾지 못하면
전 주인의 뒤를 따르게 될 것이다
엿새째 되던 밤,
잠을 이루지 못해
생전 주인의 처소를 찾았던 장안은
텅 빈 침상 위에서 깊은 잠에 빠졌다.
장안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
잠결에 꾼 꿈의 내용은 조금도 기억나는 것이 없었고
얼굴에 자신이 흘린 눈물이 남아있었지만
그마저도 손등으로 훔쳐내자
곧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새 주인을 맞이할 기회가
한 번 밖에 남지 않았던 장안은
만미를 만났고
수많은 고난을 함께 겪으며
상대를 위해 목숨을 걸기를 여러 번 거쳐
잠시 그러나 서로에게는 한없이 길었던 시간을 지나
마침내 다시 만났다.
두 사람이 재회 했을 때
서로에 기대어 앉은 작은 뜰에는 살구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 왜 한 그루 뿐이야? 손님도 많이 찾아오면서.
장안은 그 이유를 한 번도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잠시 고민한 후에
제가 듣기에도 볼품 없는 대답을 했다.
- 그게 보기 좋은 것 같아서요.
다행히 만미는 네 말이 맞다며 장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유월의 밤공기에 익어가는 살구 내음이 섞여
장안의 머릿속에 순간 그리운 무엇이 떠오르는 듯 했지만
그것은 봄바람처럼 곧 허공으로 흩어졌다.
.
.
.
"혹시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지 않아요?"
.
.
.
- 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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