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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07 22:06
진정령, 난백 ㅅㅍ
통수의 연속...... 근데 이제 제일 큰 통수가 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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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눈을 떴을 때는 완전한 밤이었다. 온몸이 물에 빠진 듯 무거웠다. 그래서 더 견딜 수가 없었다. 붕대가 감긴 손을 바라보다가 나는 흰 천을 풀었다. 그리곤 마치 몽유병에라도 걸린 사람처럼 맨발로 방을 나섰다. 밤의 부정세는 이제 나에게 민낯을 드러내겠다는 듯 평소보다 더 깜깜하고 싸늘했다. 피부에 스며드는 한기를 난 묵묵히 받아들였다.
그러나 마침내 정원에 다다르자 그때는 더 이상 태연할 수가 없었다. 하늘에는 창백한 상현달이 떠 있었고 그 아래 마찬가지 새하얀 옷을 입은 섭회상이 서 있었다.
도망치고 싶다. 그게 내가 가장 먼저 한 생각이었다. 그가 처음 만났던 그때처럼 뒤돌아본다면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도망치는 데에도 절차가 있는 법이다. 나는 아주 천천히 섭회상에게 다가갔다. 섭회상은 나를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 대신, 내가 옆에 다가와 서자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네가 나올 것 같았어. 그래서 기다리고 있었지.
대답 대신 나는 대뜸 눈물부터 흘렸다. 섭회상은 내 눈물이 그칠 때까지 자기 손으로 몇 번이고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러는 동안 그는 말이 없었고, 나는 그 침묵에 기대어 그의 손을 적셨다. 못하겠다는 생각이 든 건 처음이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너무 힘들다고, 괴롭다고 말하고 싶었다. 생각해보면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해본 적 없었다. 그런 말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든 적도 없었다. 처음이었다, 이런 마음이 드는 건. 그걸 깨닫자 가슴이 더 울컥거렸다. 그러나 슬픔이 과해 영원히 눈물 흘리는 바위가 되었다던 전설 속 여인들과 나는 달라서, 내 눈물은 어느 정도 흐르니 그쳤다. 이제 눈물의 이유를 설명해야 할 차례였다.
-또 손 다쳤더라.
-죄송해요.
사과만큼 그 순간 말문을 떼는 데 적격인 게 없었다. 다 갈라진 목소리가 이제 와 부끄러울 이유도 없었다. 나는 눈물이 멎고 초점이 돌아온 눈으로 섭회상을 보았다. 깊게 가라앉은 두 눈을 마주하는데, 그가 마치 스쳐지나가는 바람처럼 입을 뗐다.
-얼마 뒤에 금린대에서 청담성회가 열려. 나는 가기 싫지만 가야 해. 네가 여기 있는 동안엔 별 행사가 없었지?
-그렇네요.
-형님이 종주로 계실 때만 해도 부정세에서 자주 청담회가 열렸는데, 내가 종주가 되면서부터는 객이 줄었어. 싫었거든. 내가 상석에 앉아있는데도 다들 나를 불쌍하게 보고, 업신여기고, 대놓고 속이기도 하고...... 형님과는 눈도 못 마주치던 사람들이 그러는 걸 보면 죄송하더라고, 형님께.
말을 마친 섭회상이 작게 웃었다.
-하지만 부정세 말고 다른 곳에서 청담회가 열리면 내가 빠질 수 없잖아. 초대받아서 가는 건데도, 난 항상 어딜 가든 환영 못 받는다? 입만 열면 타박받고 구박받고...... 왜 왔냐는 눈치야. 나도 가기 싫었는데 말이지. 생각해 보면 나는 어릴 적부터 항상 그랬어. 혼날까봐 무서워서 입 밖에 내본 적은 없지만, 내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하는 생각을 밥 먹듯이 해왔어. 내 인생이 그냥 그런 것 같아. 내가 내 인생의 불청객이야.
이제 섭회상은 거의 혼잣말하듯 말을 하고 있었고, 나는 그 말을 끊을 엄두를 감히 내지 못했다.
-멍청하고 한심하고 모자라. 하지만 그게 나잖아? 일문삼부지 섭회상 말이야. 나처럼 태어난 사람은 계속 이렇게 살 수밖에 없어. 이게 내가 잘하는 일이고 내가 아는 유일한 길이야. 그동안엔 항상 그게 싫었어. 그런데 요즘은 내가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자주 해.
섭회상이 미소를 지어보였다.
-너 때문이야. 너는 내가 그 일문삼부지여서 좋아하는 거잖아. 그런 사람은 아마 세상에 너밖에 없을 거야. 그런데 하필 왜 네가 여기 왔을까? 너를 만나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까?
섭회상의 눈가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눈물이 턱 끝까지 굴러떨어지는 것을 바라보는 게 마치 십 년의 세월처럼 길게 느껴졌다.
-난 정말 네가 무서워, 밀아. 널 보고 있으면 나마저 내 뜻대로 안 된단 말이야. 하지만 너를 만나지 못했을 거라 생각하면 더 무서워.
-종주.
맥없이 자기를 부르기만 하는 나에게, 섭회상이 물었다.
-너는 정말 내가 좋니?
무용한 질문이었기에, 나는 목소리를 낼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섭회상이 다시 물었다.
-나를 사랑해?
목이 턱 막혔다. 나는 아주 잠시 동안 섭회상의 흰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내 인생에서 이미 떠난 가족들을 제외하고 중요한 사람이라곤 단 둘뿐이었다. 금광요와 섭회상. 그 둘은 분명 나에게 있어 서로 달랐다. 그 차이가 바로 금광요가 나에게 물었던, 그리고 섭회상이 지금 묻고 있는 사랑일 것이다. 하지만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까지는 나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입을 열었다.
-사랑합니다. 그래서 더 이상 여기 있을 수 없어요.
멋대로 나왔지만, 언젠간 해야 했던 말이었고 다시 주워담을 수도 없었다. 그러나 내가 각오했던 것과 잘리 섭회상은 침착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알았어. 네가 떠날 사람이란 거. 그러니 나는 괜찮아.
서늘한 손이 내 손을 잡아왔다. 섭회상의 두 눈동자는 달밤 아래 으레 그렇듯 새까맸고, 새까맣다 못해 투명하게 나를 비췄다. 이 세상에 그와 나 단 둘뿐이래도 믿을 정도의 적막이 흘렀다. 그 적막 속에서 나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나 생각했다.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죽지 말라고. 섭명결은 돌아올 수 없다고. 당신이 좋아하는 그 노래, 상냥한 줄로만 아는 당신의 의형이 가르쳐준 그 노래가 당신 형을 죽였고 당신을 죽이고 있다고.
당신이 죽어봐야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고. 나는 당신 곁에 남을 수 없지만, 당신과 한 약속을 지킬 수 없지만, 당신만은 살아남겠다고 내게 했던 약속을 부디 지켜달라고. 그러나 내가 그 모든 생각을 쏟아내기 전에, 섭회상이 말했다.
-따지자면 넌 내 옆에 있겠다는 약속은 달리 한 적 없는걸. 하지만 반드시 다시 만날 거라는 약조는 기대해도 되겠니? 헌아.
생각하기도 전에 행동하는 나쁜 습관이 또 한 번 도져, 나는 즉각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손끝에서부터 차갑게 올라오는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섭회상의 손은 내가 언제든 손을 뺄 수 있도록 아주 느슨하게 나를 잡고 있었지만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죽은 사람처럼 굳은 내 몸과 대조되게 섭회상의 얼굴은 평온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찌할 수 없음을 받아들인, 체념에 가까운 평온이었다. 그가 말했다.
-너는 나에게 미안해할 것 없어. 난 너에게는 단 한 번도 속은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너는 괜찮아? 너를 속인 사람들이 밉지 않니?
나를 속인 사람들.
나를 속인 사람.
차가운 밤바람이 훅 불어와 잎가지를 흔들고 섭회상의 향을 한 번 더 나에게 퍼뜨렸다. 내가 미처 벗기지 못했던 한 겹의 허물이 내 안에서 바스라졌다. 나는 눈 앞의 얼굴을 그저 보았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그를 보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나는 그냥...... 거기 그렇게 있었다. 눈을 몇 번 깜박이자 그가 으스러져라 나를 끌어안고 있었고, 그 압력에 조금 정신이 들었다.
나는 섭회상의 품에서 벗어나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어린애처럼 겁에 질린 채 울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어린 아이가 아니었다. 어린 아이는, 저렇게 다 괜찮은 척 애써 웃으려는 얼굴을 할 수 없다.
-이젠 정말 내가 싫지.
일문삼부지, 바보 같은 섭 종주...... 섭회상.
나는 천천히 두 팔을 뻗어 눈 앞의 그 사람을 끌어안았다. 품 안의 부피감과 코 끝에 스치는 향기를, 뺨에 닿는 차가운 옷감의 감촉을 뼈에 깎듯 새겼다. 그 순간 내 삶은 끝났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뒤를 돌아 걸어나갈 때, 섭회상은 나를 붙잡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계속 따라붙었을 뿐이다.
나는 곧장 방으로 가서 짐을 챙겼다. 사실 짐이랄 것도 없었다. 방 안을 정신 나간 사람처럼 둘러보다가 침대로 성큼성큼 걸어갔을 뿐이다. 곧 그가 내게 주었던 재색 족자가 침대 맡 서랍장에서 끌려나왔다. 나는 사납기까지 한 손길로 족자를 풀렀다. 새하얀 종이가 방 안의 어둠을 그대로 머금은 채로 펼쳐졌다. 밤의 정원에 앉은 얼굴 없는 두 사람을 나는 그저 바라보았다. 그대로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영원한 순간이란 없고 모든 것은 다 제 알아서 끝이 난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족자를 둘둘 말아 품에 안았다. 그게 내 욕심이 허용하는 한계였다. 나는 머리카락에서 비녀를 빼냈다. 땋여있는 머리를 마구잡이로 풀어헤쳤고, 품 안에 늘 넣고 다니던 장죽도 향낭도 모두 털어내 침대 위에 던져놓았다.
오래 전 섭회상이 했던 말을 나는 그 순간 문득 이해했다. 미칠 것만 같았다. 검은 이불 위에 은빛으로 반짝이는 비녀를 보자니 이루 말할 수 없는 충동이 뱃속에서부터 울컥거렸다. 너를 속인 사람이 밉지 않냐던 섭회상의 목소리가 소름끼치게 귓가를 울렸다. 미웠다. 밉다 못해 비녀를 들어 당장이라도 그 목을 찌르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죽으면, 섭회상은? 금광요가 내 죽음을 의심하지 않을 리가 없다. 금광요...... 신음조차 되지 못한 음성이 내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머리에 맥박이 쿵쿵 뛰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머리가 터진대도 나는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섭회상. 그가 대체 언제부터 모든 것을 알았을까? 어떻게 그 오랜 세월을 눈 먼 양 버틸 수 있었으며, 금광요 앞에서, 내 앞에서 연기할 때 그 심정이 대체 어땠을까.
그가 대체 나를 왜 사랑할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나는 더 견디지 못하고 침대 옆에 주저앉았다. 차가운 돌바닥이 내 몸을 끌어당겼다. 방은 어두웠고, 내 거친 숨소리 외엔 아무 소리도 아무 움직임도 없었다. 그 적막이 내 목을 졸라왔다. 나는 손톱을 세워 목을 긁어내렸으나 더 이상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그저 피가 거꾸로 흐르듯 가슴께가, 그리고 머리가 뜨겁게 아플 뿐이었다. 나는 중력을 거스르는 대신 어지러운 머리를 그대로 떨어뜨렸다. 차가운 비단 이불이 바스락거리며 내 이마를 스쳤다. 창가의 달빛이 이불에 반사되는 것을 나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나에게 얼마나 말하고 싶었을까.
겨우 나 따위 때문에 섭회상이 괴로웠을 리는 없다고 믿고 싶었다. 그러나 그게 거짓임을 내 마음이 알았다. 섭회상으로부터 이렇게 도망친다고 해도, 나 자신으로부터는 영영 도망칠 수가 없다. 그 자명한 사실을 어쩌면 섭명결은 알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금광요가 섭명결을 죽이고 나를 자기 옆에 남겨둔 것인지도 모르지. 나 같은 머저리를 달리 어디서 찾을 수 있겠는가. 한참 넋을 놓고 있던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가야지. 그런 생각으로 질질 발을 끌며 걸었다. 오래되고 어두운 복도를 걸으며 나는 이곳 부정세에서 보았던 다른 얼굴들을 생각했다. 그들이 왜 나를 그렇게 대했는지 모든 의문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아마 나를 도무덤에 산 채로 파묻어버리고 싶었겠지, 그동안. 이제 피차 서로 연기할 필요 없으니, 그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응시할 것이다. 그것이 새삼 두려워 발걸음을 재촉하던 나는 문득 느껴지는 한기에, 그대로 멈춰섰다. 정원 쪽으로 트인 통로로부터 찬 바람이 불어왔다. 정원에는 아무도 없었다.
텅 빈 정원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내 가슴 속에 느껴지는 섬찟함이 대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넘길 새도 없이 나는 바삐 발걸음을 옮겼다. 거의 달리듯이 복도를 지나 문을 열었을 때.
섭회상이 침대에 앉은 채로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그가 내 앞에서 한 번도 뽑은 적 없던 그의 도였다. 은빛 칼날로부터 붉은 피가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피로 흠뻑 젖은 그의 손목과 옷소매를 바라보았다.
어둠도, 피도, 흰 얼굴도. 모든 게 선명해서 마치 악몽 같았다.
정말 악몽일지도 몰랐다. 이게 꿈이라면 난 언젠가 깰 거고, 깬다는 건 섭회상을 내 꿈 속에 남겨둔 채 떠나는 것에 다름 아니니까. 파리한 그의 얼굴이 내게 웃어보였을 때에야 나는 주박에서 풀려난 듯 두 눈을 깜박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해서 움직였다. 감정보다 앞서는 건 본능이어서, 나는 그의 손목을 붙잡아 내 눈 앞으로 가져왔다. 깊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미 침대 맡에 놓인 영견이 있었다. 상처 아래를 감싸 지혈대를 만든 뒤, 그의 팔을 붙잡은 채 지혈점을 계속 누르고 있었다. 그러면서, 열린 상처에 나는 계속 시선을 두었다. 울컥거리는 피가 잦아들 때까지.
그러나 도무지 피비린내와 소나무 향이 섞인 이 냄새에 익숙해질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었어.
천천히 고개를 들었을 땐,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파랗게 질린 섭회상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무감각하게 입술을 움직였다.
-살아남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내가 그에게 따질 자격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한 번 터진 감정의 물꼬를 도무지 막을 수가 없었다. 무언가 움켜쥘 것이 필요해 나는 그의 손목을 놓았다. 그리고 빈 주먹을 말아쥐었다.
-종주님 손목을 그으실 게 아니라 제 목을 그으셨어야죠. 지금 그냥 제가 그을까요?
-헌아.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마세요.
나는 더 못 참고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분노인지 절망인지 알 수 없는 감정으로 온몸이 떨리는 나와 대비되게, 섭회상의 몸에는 미동도 없었다. 하루 전만 해도, 이런 광경을 보았다면 나는 섭회상이 자기 몸을 바쳐 형을 되살리려 한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섭회상이 안다는 게 나에게 다행이 될 줄은 몰랐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섭회상이 조용히 입을 뗐다.
-밀아.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그는 자기 손목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물이 그의 턱선을 따라 흘러내렸다.
-자꾸 나더러 너를 죽여달라는데, 너는 내가 죽여달라면 그 부탁 들어줄 거니? 아니잖아? 나도야. 나도...... 나도 너와 같단 말이야.
그러더니 그는 자기 손목을 들어보였다.
-넌 모를 거야, 네가 부정세에 온 뒤로 내가 얼마나 많은 실수를 실수인 줄 알면서도 저질렀는지. 그러니 네가 바보 같은 일문삼부지를 사랑했다면,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반했던 건 절대 아니야. 그리고 이것도...... 별 거 아니야. 너와 내가 어떤 관계인데, 이별 앞에서 멀쩡하면 그게 더 이상하잖아. 안 그래? 너를 붙잡지도 못하는데, 이렇게라도 해야지 안 그러면 어떻게 내 마음을 증명하겠어? 하지만...... 알지, 나 겁 많은 것? 난 죽는 게 싫진 않지만 무섭거든. 그래서 깊게 베지도 못 했어. 하지만 소득은 있었네, 네가 이렇게 돌아왔으니까.
나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한결 편해진 듯한 섭회상을 바라볼 뿐이었다.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는데,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그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갈까. 계속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 부채로 얼굴을 가려야 할 텐데, 어떻게 미치지 않을 수 있을까. 미치지 않으려면 무언가 해야 하겠지.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그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금광요를 상대로?
-제가 뭘 할 수 있나요? 뭘 해야 합니까?
내 질문에, 섭회상은 마치 검에 한 번 찔리기라도 한 듯한 얼굴로 나를 보았고 나는 그 표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괴롭게 웃었고, 웃음을 그친 뒤 아주 천천히 고개를 숙여 내 이마에 자기 이마를 맞댔다.
-언제쯤 네 눈이 뜨이겠니?
따뜻한 숨결을 뺨에 느끼며 난 두 눈을 감았다.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가 끝까지 장님이래도 난 좋아. 네가 떠나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어. 하지만 정말 내가 밉지 않다면, 밤이 가기 전까지만 내 곁에 있어줘. 부탁이야.
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섭회상이 가볍게 내 이마에 입을 맞춘 뒤 멀어졌다. 창가에 기대어 앉는 그를 보며, 나는 지금이 몇 시쯤 되었을까 생각했다. 자시는 훨씬 넘었겠지. 나는 어느 순간 내 손에 쥐여있는 그의 피 묻은 손으로 시선을 내렸다. 피가 묻어 끈적거리고 붉었지만, 이 손은 여전히 내가 세상 그 어디에서든 구별해낼 수 있을 바로 그 손이었다.
그와 나는 말없이 그대로 계속 앉아있었다. 어느 한 명 잠이 들 법도 한데, 그러지 않았다. 나는 그의 손을, 그는 때때로 나를 그리고 창 밖을 바라보며 침묵 속에 깨어있었다. 축시를 알리는 종이 멀리서 아주 희미하게 울릴 때까지. 나는 섭회상의 팔에 묶여있던 영견을 풀어 그의 손 옆에 내려놓았다. 그리곤 일어섰다. 섭회상은 자기 손목을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두 사람의 정 영원하다면, 아침 저녁으로 만나지 못한들 어떠리.
그러면서 그는 나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어서 가. 밀아.
나는 그의 말을 따랐다.
*
삼경이 훨씬 지난 어두운 밤, 부정세의 회벽은 어쩐지 내 눈에 희게 빛이 나는 것만 같았다. 나는 부정세의 쪽문을 열고 차분하게 걸어나왔다. 아까만큼 속에서 감정이 들끓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미칠 것 같았다.
무슨 정신으로 내 집까지 도착했는지 모르겠고, 이곳을 내 집이라고 불러도 될지 또한 알 수가 없었다. 금광요가 얻어준 이곳은 청하와 난릉의 중간쯤에 있었는데, 사실 내가 그 집을 소유하고 있다고 하기도 애매했다. 하지만 내가 그 집에 머물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간간이 내 집안일을 도와주러 오던 중년 여자가 거기 살고 내가 때때로 신세를 지는 기묘한 형국이 이어진 지 벌써 이십 년 째였다. 그러니, 처음에 분명 흰 머리 별로 없던 여자는 이제 백발 성성한 노인이었다. 자식도 없고 친지도 없는 그녀를 보면서 나는 그녀가 내 미래는 아닐까 종종 생각했다.
항상 나는 그녀와 내 관계야말로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녀에게 집과 임금을 지불하고 그녀는 내 집을 봐주고, 서로 존대하고 가끔 식사 같이하고 차 마시고 그게 다였다. 남남은 아니지만 그 이상이라고 하기도 뭐한 사이. 지난 번 동영에 갔다가 거지꼴로 돌아왔더니 내가 죽었을 거라 생각했는지 귀신 본 듯 놀라던 그녀의 얼굴이 아직 눈에 선했다. 이번에도 그녀는 비슷한 얼굴이었다. 나는 대충 마루에 걸터앉아 품 안을 뒤지다가, 부정세에 두고 온 장죽을 생각하며 주먹을 쥐었다.
-저, 수...... 수사님.
겁 먹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여자의 얼굴에 시선을 내리자, 손바닥의 상처가 터져 피가 나고 있었다. 손바닥이 애초에 왜 이러나 생각하다가, 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한 번 웃음이 터지자 도무지 그치지를 않았다. 이제 완전 겁에 질린 시선을 느끼며 나는 웃음을 그치려 노력을 했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길어야 이 주밖에 안 있을 거니까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정처없는 걸음으로 방에 들어선 나는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거기가 아예 귀신 나오는 집이어도 상관 없었는데, 여자가 나름 잘 관리해놓은 모양인지 녹색 이불에서 좋은 향기가 났다. 그게 오히려 토할 것만 같아 나는 몸을 웅크렸다.
그대로 얼마나 잤는지 모른다. 목이 말라 눈을 뜨니 침대 맡에 자리끼가 놓여있었다. 대충 오후의 그 노란 햇빛이 비치는 것으로 보아 몇 시간 잤거나 아니면 하루 하고도 그 시간만큼을 더 잔 모양이었다. 대충 일어나 앉은 나는 땀에 절은 머리카락을 넘기며 이제 뭘 해야 하는지를 생각했다. 그러다가 이제 진물이 나기 직전인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문을 열고 나가자, 식탁에 앉아있던 여자가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좀 괜찮아요?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나를 부축하려는 듯 주춤거리는 걸 보며 다시 고개를 저었지만. 내가 뒷걸음질치다가 비틀거리자, 주름진 얼굴에 분명한 걱정이 서렸다.
-사흘을 꼬박 내리 잤는데, 일단 뭘 좀 먹어야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 예순 넘은 노인한테 밥상이나 뭔가를 부탁하기에는 양심이 찔렸다. 나는 대충 목욕물이나 받으러 갈 심산으로 발걸음을 뗐다. 하지만 여자는 단호했다.
-물은 내가 받을게요.
-아니......
-부탁이니까 제발 그냥 앉아있어요.
자기가 불편해서 그렇다는 듯 간청하는 목소리를 듣자, 할 말이 없었다. 나는 바닥에 그냥 주저앉았다. 여자가 한숨을 푹 쉬더니 멀어졌다. 나는...... 나는 아주 오래 전을 생각했다. 두 손으로 머리를 아무리 헝클어뜨려도 그 때 기억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왜? 왜 모르는데, 항상? 아니. 그게 아니다.
정말 몰랐나? 멍하니 나뭇바닥을 응시하다 보면 내 어깨를 조심스레 짚는 손길이 있었다.
-씻을 수 있겠어요?
그 질문에 그저 헛웃음이 나왔다. 그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아보이나. 나는 힘이 안 들어가는 다리에 힘을 주어 몸을 일으켰다.
-감사합니다.
뚝 던져진 내 감사 인사에, 여자는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욕조가 준비된 부엌 옆 작은 방으로 가서 문을 닫았다.
뜨거운 물 속에 몸을 담그자 다시 그대로 잠이 왔다. 하지만 그랬다간 문 밖의 사람을 더 곤란하게 만들 게 분명했으니 나는 애써 정신줄을 잡았다. 기계적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닦는 것까진 하겠는데, 옷을 갈아입을 생각을 하자 그냥 이대로 죽으면 안 되나 싶었다. 욕조 옆에 놓인 건 내가 일 없을 때 늘 입던 무채색의 평상복이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내가 섭씨 수사 같은 옷을 입고 살았다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이제 와서 보니 회색 옷이 내가 입고 있던 수사복과 그다지 다를 게 없었다.
헛구역질이 나서, 나는 이제 막 식어가는 나무욕조에 머리를 기댔다. 이대로 눈을 감고 떴을 때 백 년이 지나 있으면 좋겠다. 그러면 나는 개운하게 자살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잔인해서, 일 초 일 초 시간이 흐르는 걸 느끼다가 돌아버릴 것 같았다. 나는 욕조에서 벌떡 일어나, 몸의 물기를 닦고 옷을 걸쳤다.
욕조를 처리한 뒤 안으로 들어온 나는 탁상 앞에 주저앉았다. 기다렸다는 듯 놓이는 죽 그릇이 그저 부담스러웠다. 내가 그동안 여기 머물기보다 객잔 이곳 저곳을 전전하던 이유가 여기 있었다. 그러나 사람 성의를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는 감사 인사를 중얼거리며 흰 죽을 입 안에 퍼넣었다. 좀 헛구역질이 나왔지만 참고 입 안에 든 내용물을 다 삼켰다.
불편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침묵 속에서 나는 맛도 거의 안 나는 죽을 그냥 마셨다. 빈 그릇을 바라보다가 내차 입을 열었다.
-전 이제 안 돌아옵니다.
-네?
-멀리 떠날 거거든요. 집이나 세간살이는 그냥 가지시죠. 어차피 그동안 내 집이라고 하기도 우스운 곳이었으니까.
-하지만......
-걱정은 안 해도 돼요. 여기 화 미칠 일은 없을 테니.
-멀리 떠난다는 건, 어디로......
-바다 건너로 갑니다.
그러니 더 묻지 않았으면 좋겠다. 대화를 더 나눌 기력도 없었고, 여유도 없었고, 그리고...... 갑자기 번쩍 정신이 들었다.
놀란 얼굴의 여자를 피해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으로 달려갔다. 방문을 열어젖힌 채 다급히 그 안을 둘러보았다. 반쯤 초점이 나가 있던 내 눈에 허름한 봇짐이 잡혔다. 나는 당장 그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봇짐 안의 족자와, 그 족자 안의 그림까지 확인한 뒤에야 나는 족자를 품 안에 안은 채로 맥이 풀려 주저앉았다. 자꾸만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그 족자를 찢게 될 것만 같아 그러지 못하도록 두 주먹을 말아쥐었다. 피냄새를 맡은 다음에야 손에서 힘이 풀렸다.
이 말도 안 되는 추태를 모두 목격한 여자는 흐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렇게 됐어요?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나는 딱 일주일 더 그 집에 있었다. 주로 머릿속으로 바다 어떻게 건너야 할지 계획을 짜는 게 다였다. 그럴 때면 나는 아주...... 이성적이었다. 돈. 경로. 미래...... 아무 의미 없는.
떠나면서 짐을 챙길 건 거의 없었다. 궤짝 하나에 모든 게 충분히 들어갔으니까. 이제 집의 주인은 정말 내가 아니었지만, 여자는 자기 집을 얻은 것치고 그리 기뻐 보이지는 않았다. 정말 괜찮겠냐는 그녀의 질문에 나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눈 앞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뜨문뜨문이나마 십 년 넘게 함께 해온 사람이다. 분명 더 할 말이 있었고 또 있어야 했겠지만, 입 밖에 내는 대신 나는 뒤를 돌았다.
이제 금광요가 맡겨둔 돈만 찾으면 다였다. 목적지를 향해 기계적으로 걷는데, 어쩐지 거리의 사람들이 다들 웅성거리는 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하지만 나는 어차피 떠날 사람이라 내 일 아니었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다. 익숙한 이름이 들리기 전까지는.
-일문삼부지가 죽었다며? 그래서 청하에 부탁 안 하고 웬 고소 남씨를 불렀나?
이어서 들려온 말이 아니었다면, 나도 내가 뭘 했을지 모른다.
-그게 아니라, 죽겠다고 무슨 소동을 벌였대. 근데 몸은 멀쩡하다던데?
-치정 문제라고 들었네만.
-하여튼. 저번에도 그러더니, 거 죽을 거면 시원하게 죽든지 계속 찔끔찔끔......
혀를 쯧쯧 차는 소리.
-그나저나 어제 그 일은 대체 뭔가? 모현우만 살았다며? 수선계에 망조가 들었는지 일들이 이렇게 줄줄이 터지니, 원.
모현우? 금광선의 사생아. 금광요가 내쫓은...... 오랜만에 듣는 그 이름을 곱씹으며 자리에 굳어있는데, 찻집 앞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남들이 들어도 상관 없는 이야기라 판단했는지 제법 큰 소리로 떠들어댔다. 나는 그들 허리에 걸린 검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천벌 받은 게지. 금린대에서 돌아온 뒤로 미치광이 짓을 일삼긴 했대도, 그래도 자기 조카고 사촌인데.
-그런데 좀 수상하지 않나? 왜 하필 그 집에 그런 일이 생기고 모현우만 살아서 자취를 감췄단 말인가.
-사도를 쓴다고 전부터 말 많았는데, 이번에 고소 남씨에서 정화하려고 데려간 거 아니야?
그들의 대화는 곧 그들이 어제 본 고소 남씨 자제들에 대한 평가로 이어졌고, 나는 가슴 속 묘하게 느껴지는 불안감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통수의 연속...... 근데 이제 제일 큰 통수가 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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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눈을 떴을 때는 완전한 밤이었다. 온몸이 물에 빠진 듯 무거웠다. 그래서 더 견딜 수가 없었다. 붕대가 감긴 손을 바라보다가 나는 흰 천을 풀었다. 그리곤 마치 몽유병에라도 걸린 사람처럼 맨발로 방을 나섰다. 밤의 부정세는 이제 나에게 민낯을 드러내겠다는 듯 평소보다 더 깜깜하고 싸늘했다. 피부에 스며드는 한기를 난 묵묵히 받아들였다.
그러나 마침내 정원에 다다르자 그때는 더 이상 태연할 수가 없었다. 하늘에는 창백한 상현달이 떠 있었고 그 아래 마찬가지 새하얀 옷을 입은 섭회상이 서 있었다.
도망치고 싶다. 그게 내가 가장 먼저 한 생각이었다. 그가 처음 만났던 그때처럼 뒤돌아본다면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도망치는 데에도 절차가 있는 법이다. 나는 아주 천천히 섭회상에게 다가갔다. 섭회상은 나를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 대신, 내가 옆에 다가와 서자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네가 나올 것 같았어. 그래서 기다리고 있었지.
대답 대신 나는 대뜸 눈물부터 흘렸다. 섭회상은 내 눈물이 그칠 때까지 자기 손으로 몇 번이고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러는 동안 그는 말이 없었고, 나는 그 침묵에 기대어 그의 손을 적셨다. 못하겠다는 생각이 든 건 처음이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너무 힘들다고, 괴롭다고 말하고 싶었다. 생각해보면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해본 적 없었다. 그런 말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든 적도 없었다. 처음이었다, 이런 마음이 드는 건. 그걸 깨닫자 가슴이 더 울컥거렸다. 그러나 슬픔이 과해 영원히 눈물 흘리는 바위가 되었다던 전설 속 여인들과 나는 달라서, 내 눈물은 어느 정도 흐르니 그쳤다. 이제 눈물의 이유를 설명해야 할 차례였다.
-또 손 다쳤더라.
-죄송해요.
사과만큼 그 순간 말문을 떼는 데 적격인 게 없었다. 다 갈라진 목소리가 이제 와 부끄러울 이유도 없었다. 나는 눈물이 멎고 초점이 돌아온 눈으로 섭회상을 보았다. 깊게 가라앉은 두 눈을 마주하는데, 그가 마치 스쳐지나가는 바람처럼 입을 뗐다.
-얼마 뒤에 금린대에서 청담성회가 열려. 나는 가기 싫지만 가야 해. 네가 여기 있는 동안엔 별 행사가 없었지?
-그렇네요.
-형님이 종주로 계실 때만 해도 부정세에서 자주 청담회가 열렸는데, 내가 종주가 되면서부터는 객이 줄었어. 싫었거든. 내가 상석에 앉아있는데도 다들 나를 불쌍하게 보고, 업신여기고, 대놓고 속이기도 하고...... 형님과는 눈도 못 마주치던 사람들이 그러는 걸 보면 죄송하더라고, 형님께.
말을 마친 섭회상이 작게 웃었다.
-하지만 부정세 말고 다른 곳에서 청담회가 열리면 내가 빠질 수 없잖아. 초대받아서 가는 건데도, 난 항상 어딜 가든 환영 못 받는다? 입만 열면 타박받고 구박받고...... 왜 왔냐는 눈치야. 나도 가기 싫었는데 말이지. 생각해 보면 나는 어릴 적부터 항상 그랬어. 혼날까봐 무서워서 입 밖에 내본 적은 없지만, 내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하는 생각을 밥 먹듯이 해왔어. 내 인생이 그냥 그런 것 같아. 내가 내 인생의 불청객이야.
이제 섭회상은 거의 혼잣말하듯 말을 하고 있었고, 나는 그 말을 끊을 엄두를 감히 내지 못했다.
-멍청하고 한심하고 모자라. 하지만 그게 나잖아? 일문삼부지 섭회상 말이야. 나처럼 태어난 사람은 계속 이렇게 살 수밖에 없어. 이게 내가 잘하는 일이고 내가 아는 유일한 길이야. 그동안엔 항상 그게 싫었어. 그런데 요즘은 내가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자주 해.
섭회상이 미소를 지어보였다.
-너 때문이야. 너는 내가 그 일문삼부지여서 좋아하는 거잖아. 그런 사람은 아마 세상에 너밖에 없을 거야. 그런데 하필 왜 네가 여기 왔을까? 너를 만나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까?
섭회상의 눈가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눈물이 턱 끝까지 굴러떨어지는 것을 바라보는 게 마치 십 년의 세월처럼 길게 느껴졌다.
-난 정말 네가 무서워, 밀아. 널 보고 있으면 나마저 내 뜻대로 안 된단 말이야. 하지만 너를 만나지 못했을 거라 생각하면 더 무서워.
-종주.
맥없이 자기를 부르기만 하는 나에게, 섭회상이 물었다.
-너는 정말 내가 좋니?
무용한 질문이었기에, 나는 목소리를 낼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섭회상이 다시 물었다.
-나를 사랑해?
목이 턱 막혔다. 나는 아주 잠시 동안 섭회상의 흰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내 인생에서 이미 떠난 가족들을 제외하고 중요한 사람이라곤 단 둘뿐이었다. 금광요와 섭회상. 그 둘은 분명 나에게 있어 서로 달랐다. 그 차이가 바로 금광요가 나에게 물었던, 그리고 섭회상이 지금 묻고 있는 사랑일 것이다. 하지만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까지는 나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입을 열었다.
-사랑합니다. 그래서 더 이상 여기 있을 수 없어요.
멋대로 나왔지만, 언젠간 해야 했던 말이었고 다시 주워담을 수도 없었다. 그러나 내가 각오했던 것과 잘리 섭회상은 침착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알았어. 네가 떠날 사람이란 거. 그러니 나는 괜찮아.
서늘한 손이 내 손을 잡아왔다. 섭회상의 두 눈동자는 달밤 아래 으레 그렇듯 새까맸고, 새까맣다 못해 투명하게 나를 비췄다. 이 세상에 그와 나 단 둘뿐이래도 믿을 정도의 적막이 흘렀다. 그 적막 속에서 나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나 생각했다.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죽지 말라고. 섭명결은 돌아올 수 없다고. 당신이 좋아하는 그 노래, 상냥한 줄로만 아는 당신의 의형이 가르쳐준 그 노래가 당신 형을 죽였고 당신을 죽이고 있다고.
당신이 죽어봐야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고. 나는 당신 곁에 남을 수 없지만, 당신과 한 약속을 지킬 수 없지만, 당신만은 살아남겠다고 내게 했던 약속을 부디 지켜달라고. 그러나 내가 그 모든 생각을 쏟아내기 전에, 섭회상이 말했다.
-따지자면 넌 내 옆에 있겠다는 약속은 달리 한 적 없는걸. 하지만 반드시 다시 만날 거라는 약조는 기대해도 되겠니? 헌아.
생각하기도 전에 행동하는 나쁜 습관이 또 한 번 도져, 나는 즉각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손끝에서부터 차갑게 올라오는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섭회상의 손은 내가 언제든 손을 뺄 수 있도록 아주 느슨하게 나를 잡고 있었지만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죽은 사람처럼 굳은 내 몸과 대조되게 섭회상의 얼굴은 평온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찌할 수 없음을 받아들인, 체념에 가까운 평온이었다. 그가 말했다.
-너는 나에게 미안해할 것 없어. 난 너에게는 단 한 번도 속은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너는 괜찮아? 너를 속인 사람들이 밉지 않니?
나를 속인 사람들.
나를 속인 사람.
차가운 밤바람이 훅 불어와 잎가지를 흔들고 섭회상의 향을 한 번 더 나에게 퍼뜨렸다. 내가 미처 벗기지 못했던 한 겹의 허물이 내 안에서 바스라졌다. 나는 눈 앞의 얼굴을 그저 보았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그를 보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나는 그냥...... 거기 그렇게 있었다. 눈을 몇 번 깜박이자 그가 으스러져라 나를 끌어안고 있었고, 그 압력에 조금 정신이 들었다.
나는 섭회상의 품에서 벗어나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어린애처럼 겁에 질린 채 울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어린 아이가 아니었다. 어린 아이는, 저렇게 다 괜찮은 척 애써 웃으려는 얼굴을 할 수 없다.
-이젠 정말 내가 싫지.
일문삼부지, 바보 같은 섭 종주...... 섭회상.
나는 천천히 두 팔을 뻗어 눈 앞의 그 사람을 끌어안았다. 품 안의 부피감과 코 끝에 스치는 향기를, 뺨에 닿는 차가운 옷감의 감촉을 뼈에 깎듯 새겼다. 그 순간 내 삶은 끝났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뒤를 돌아 걸어나갈 때, 섭회상은 나를 붙잡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계속 따라붙었을 뿐이다.
나는 곧장 방으로 가서 짐을 챙겼다. 사실 짐이랄 것도 없었다. 방 안을 정신 나간 사람처럼 둘러보다가 침대로 성큼성큼 걸어갔을 뿐이다. 곧 그가 내게 주었던 재색 족자가 침대 맡 서랍장에서 끌려나왔다. 나는 사납기까지 한 손길로 족자를 풀렀다. 새하얀 종이가 방 안의 어둠을 그대로 머금은 채로 펼쳐졌다. 밤의 정원에 앉은 얼굴 없는 두 사람을 나는 그저 바라보았다. 그대로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영원한 순간이란 없고 모든 것은 다 제 알아서 끝이 난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족자를 둘둘 말아 품에 안았다. 그게 내 욕심이 허용하는 한계였다. 나는 머리카락에서 비녀를 빼냈다. 땋여있는 머리를 마구잡이로 풀어헤쳤고, 품 안에 늘 넣고 다니던 장죽도 향낭도 모두 털어내 침대 위에 던져놓았다.
오래 전 섭회상이 했던 말을 나는 그 순간 문득 이해했다. 미칠 것만 같았다. 검은 이불 위에 은빛으로 반짝이는 비녀를 보자니 이루 말할 수 없는 충동이 뱃속에서부터 울컥거렸다. 너를 속인 사람이 밉지 않냐던 섭회상의 목소리가 소름끼치게 귓가를 울렸다. 미웠다. 밉다 못해 비녀를 들어 당장이라도 그 목을 찌르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죽으면, 섭회상은? 금광요가 내 죽음을 의심하지 않을 리가 없다. 금광요...... 신음조차 되지 못한 음성이 내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머리에 맥박이 쿵쿵 뛰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머리가 터진대도 나는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섭회상. 그가 대체 언제부터 모든 것을 알았을까? 어떻게 그 오랜 세월을 눈 먼 양 버틸 수 있었으며, 금광요 앞에서, 내 앞에서 연기할 때 그 심정이 대체 어땠을까.
그가 대체 나를 왜 사랑할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나는 더 견디지 못하고 침대 옆에 주저앉았다. 차가운 돌바닥이 내 몸을 끌어당겼다. 방은 어두웠고, 내 거친 숨소리 외엔 아무 소리도 아무 움직임도 없었다. 그 적막이 내 목을 졸라왔다. 나는 손톱을 세워 목을 긁어내렸으나 더 이상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그저 피가 거꾸로 흐르듯 가슴께가, 그리고 머리가 뜨겁게 아플 뿐이었다. 나는 중력을 거스르는 대신 어지러운 머리를 그대로 떨어뜨렸다. 차가운 비단 이불이 바스락거리며 내 이마를 스쳤다. 창가의 달빛이 이불에 반사되는 것을 나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나에게 얼마나 말하고 싶었을까.
겨우 나 따위 때문에 섭회상이 괴로웠을 리는 없다고 믿고 싶었다. 그러나 그게 거짓임을 내 마음이 알았다. 섭회상으로부터 이렇게 도망친다고 해도, 나 자신으로부터는 영영 도망칠 수가 없다. 그 자명한 사실을 어쩌면 섭명결은 알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금광요가 섭명결을 죽이고 나를 자기 옆에 남겨둔 것인지도 모르지. 나 같은 머저리를 달리 어디서 찾을 수 있겠는가. 한참 넋을 놓고 있던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가야지. 그런 생각으로 질질 발을 끌며 걸었다. 오래되고 어두운 복도를 걸으며 나는 이곳 부정세에서 보았던 다른 얼굴들을 생각했다. 그들이 왜 나를 그렇게 대했는지 모든 의문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아마 나를 도무덤에 산 채로 파묻어버리고 싶었겠지, 그동안. 이제 피차 서로 연기할 필요 없으니, 그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응시할 것이다. 그것이 새삼 두려워 발걸음을 재촉하던 나는 문득 느껴지는 한기에, 그대로 멈춰섰다. 정원 쪽으로 트인 통로로부터 찬 바람이 불어왔다. 정원에는 아무도 없었다.
텅 빈 정원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내 가슴 속에 느껴지는 섬찟함이 대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넘길 새도 없이 나는 바삐 발걸음을 옮겼다. 거의 달리듯이 복도를 지나 문을 열었을 때.
섭회상이 침대에 앉은 채로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그가 내 앞에서 한 번도 뽑은 적 없던 그의 도였다. 은빛 칼날로부터 붉은 피가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피로 흠뻑 젖은 그의 손목과 옷소매를 바라보았다.
어둠도, 피도, 흰 얼굴도. 모든 게 선명해서 마치 악몽 같았다.
정말 악몽일지도 몰랐다. 이게 꿈이라면 난 언젠가 깰 거고, 깬다는 건 섭회상을 내 꿈 속에 남겨둔 채 떠나는 것에 다름 아니니까. 파리한 그의 얼굴이 내게 웃어보였을 때에야 나는 주박에서 풀려난 듯 두 눈을 깜박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해서 움직였다. 감정보다 앞서는 건 본능이어서, 나는 그의 손목을 붙잡아 내 눈 앞으로 가져왔다. 깊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미 침대 맡에 놓인 영견이 있었다. 상처 아래를 감싸 지혈대를 만든 뒤, 그의 팔을 붙잡은 채 지혈점을 계속 누르고 있었다. 그러면서, 열린 상처에 나는 계속 시선을 두었다. 울컥거리는 피가 잦아들 때까지.
그러나 도무지 피비린내와 소나무 향이 섞인 이 냄새에 익숙해질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었어.
천천히 고개를 들었을 땐,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파랗게 질린 섭회상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무감각하게 입술을 움직였다.
-살아남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내가 그에게 따질 자격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한 번 터진 감정의 물꼬를 도무지 막을 수가 없었다. 무언가 움켜쥘 것이 필요해 나는 그의 손목을 놓았다. 그리고 빈 주먹을 말아쥐었다.
-종주님 손목을 그으실 게 아니라 제 목을 그으셨어야죠. 지금 그냥 제가 그을까요?
-헌아.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마세요.
나는 더 못 참고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분노인지 절망인지 알 수 없는 감정으로 온몸이 떨리는 나와 대비되게, 섭회상의 몸에는 미동도 없었다. 하루 전만 해도, 이런 광경을 보았다면 나는 섭회상이 자기 몸을 바쳐 형을 되살리려 한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섭회상이 안다는 게 나에게 다행이 될 줄은 몰랐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섭회상이 조용히 입을 뗐다.
-밀아.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그는 자기 손목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물이 그의 턱선을 따라 흘러내렸다.
-자꾸 나더러 너를 죽여달라는데, 너는 내가 죽여달라면 그 부탁 들어줄 거니? 아니잖아? 나도야. 나도...... 나도 너와 같단 말이야.
그러더니 그는 자기 손목을 들어보였다.
-넌 모를 거야, 네가 부정세에 온 뒤로 내가 얼마나 많은 실수를 실수인 줄 알면서도 저질렀는지. 그러니 네가 바보 같은 일문삼부지를 사랑했다면,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반했던 건 절대 아니야. 그리고 이것도...... 별 거 아니야. 너와 내가 어떤 관계인데, 이별 앞에서 멀쩡하면 그게 더 이상하잖아. 안 그래? 너를 붙잡지도 못하는데, 이렇게라도 해야지 안 그러면 어떻게 내 마음을 증명하겠어? 하지만...... 알지, 나 겁 많은 것? 난 죽는 게 싫진 않지만 무섭거든. 그래서 깊게 베지도 못 했어. 하지만 소득은 있었네, 네가 이렇게 돌아왔으니까.
나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한결 편해진 듯한 섭회상을 바라볼 뿐이었다.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는데,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그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갈까. 계속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 부채로 얼굴을 가려야 할 텐데, 어떻게 미치지 않을 수 있을까. 미치지 않으려면 무언가 해야 하겠지.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그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금광요를 상대로?
-제가 뭘 할 수 있나요? 뭘 해야 합니까?
내 질문에, 섭회상은 마치 검에 한 번 찔리기라도 한 듯한 얼굴로 나를 보았고 나는 그 표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괴롭게 웃었고, 웃음을 그친 뒤 아주 천천히 고개를 숙여 내 이마에 자기 이마를 맞댔다.
-언제쯤 네 눈이 뜨이겠니?
따뜻한 숨결을 뺨에 느끼며 난 두 눈을 감았다.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가 끝까지 장님이래도 난 좋아. 네가 떠나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어. 하지만 정말 내가 밉지 않다면, 밤이 가기 전까지만 내 곁에 있어줘. 부탁이야.
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섭회상이 가볍게 내 이마에 입을 맞춘 뒤 멀어졌다. 창가에 기대어 앉는 그를 보며, 나는 지금이 몇 시쯤 되었을까 생각했다. 자시는 훨씬 넘었겠지. 나는 어느 순간 내 손에 쥐여있는 그의 피 묻은 손으로 시선을 내렸다. 피가 묻어 끈적거리고 붉었지만, 이 손은 여전히 내가 세상 그 어디에서든 구별해낼 수 있을 바로 그 손이었다.
그와 나는 말없이 그대로 계속 앉아있었다. 어느 한 명 잠이 들 법도 한데, 그러지 않았다. 나는 그의 손을, 그는 때때로 나를 그리고 창 밖을 바라보며 침묵 속에 깨어있었다. 축시를 알리는 종이 멀리서 아주 희미하게 울릴 때까지. 나는 섭회상의 팔에 묶여있던 영견을 풀어 그의 손 옆에 내려놓았다. 그리곤 일어섰다. 섭회상은 자기 손목을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두 사람의 정 영원하다면, 아침 저녁으로 만나지 못한들 어떠리.
그러면서 그는 나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어서 가. 밀아.
나는 그의 말을 따랐다.
*
삼경이 훨씬 지난 어두운 밤, 부정세의 회벽은 어쩐지 내 눈에 희게 빛이 나는 것만 같았다. 나는 부정세의 쪽문을 열고 차분하게 걸어나왔다. 아까만큼 속에서 감정이 들끓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미칠 것 같았다.
무슨 정신으로 내 집까지 도착했는지 모르겠고, 이곳을 내 집이라고 불러도 될지 또한 알 수가 없었다. 금광요가 얻어준 이곳은 청하와 난릉의 중간쯤에 있었는데, 사실 내가 그 집을 소유하고 있다고 하기도 애매했다. 하지만 내가 그 집에 머물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간간이 내 집안일을 도와주러 오던 중년 여자가 거기 살고 내가 때때로 신세를 지는 기묘한 형국이 이어진 지 벌써 이십 년 째였다. 그러니, 처음에 분명 흰 머리 별로 없던 여자는 이제 백발 성성한 노인이었다. 자식도 없고 친지도 없는 그녀를 보면서 나는 그녀가 내 미래는 아닐까 종종 생각했다.
항상 나는 그녀와 내 관계야말로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녀에게 집과 임금을 지불하고 그녀는 내 집을 봐주고, 서로 존대하고 가끔 식사 같이하고 차 마시고 그게 다였다. 남남은 아니지만 그 이상이라고 하기도 뭐한 사이. 지난 번 동영에 갔다가 거지꼴로 돌아왔더니 내가 죽었을 거라 생각했는지 귀신 본 듯 놀라던 그녀의 얼굴이 아직 눈에 선했다. 이번에도 그녀는 비슷한 얼굴이었다. 나는 대충 마루에 걸터앉아 품 안을 뒤지다가, 부정세에 두고 온 장죽을 생각하며 주먹을 쥐었다.
-저, 수...... 수사님.
겁 먹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여자의 얼굴에 시선을 내리자, 손바닥의 상처가 터져 피가 나고 있었다. 손바닥이 애초에 왜 이러나 생각하다가, 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한 번 웃음이 터지자 도무지 그치지를 않았다. 이제 완전 겁에 질린 시선을 느끼며 나는 웃음을 그치려 노력을 했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길어야 이 주밖에 안 있을 거니까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정처없는 걸음으로 방에 들어선 나는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거기가 아예 귀신 나오는 집이어도 상관 없었는데, 여자가 나름 잘 관리해놓은 모양인지 녹색 이불에서 좋은 향기가 났다. 그게 오히려 토할 것만 같아 나는 몸을 웅크렸다.
그대로 얼마나 잤는지 모른다. 목이 말라 눈을 뜨니 침대 맡에 자리끼가 놓여있었다. 대충 오후의 그 노란 햇빛이 비치는 것으로 보아 몇 시간 잤거나 아니면 하루 하고도 그 시간만큼을 더 잔 모양이었다. 대충 일어나 앉은 나는 땀에 절은 머리카락을 넘기며 이제 뭘 해야 하는지를 생각했다. 그러다가 이제 진물이 나기 직전인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문을 열고 나가자, 식탁에 앉아있던 여자가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좀 괜찮아요?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나를 부축하려는 듯 주춤거리는 걸 보며 다시 고개를 저었지만. 내가 뒷걸음질치다가 비틀거리자, 주름진 얼굴에 분명한 걱정이 서렸다.
-사흘을 꼬박 내리 잤는데, 일단 뭘 좀 먹어야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 예순 넘은 노인한테 밥상이나 뭔가를 부탁하기에는 양심이 찔렸다. 나는 대충 목욕물이나 받으러 갈 심산으로 발걸음을 뗐다. 하지만 여자는 단호했다.
-물은 내가 받을게요.
-아니......
-부탁이니까 제발 그냥 앉아있어요.
자기가 불편해서 그렇다는 듯 간청하는 목소리를 듣자, 할 말이 없었다. 나는 바닥에 그냥 주저앉았다. 여자가 한숨을 푹 쉬더니 멀어졌다. 나는...... 나는 아주 오래 전을 생각했다. 두 손으로 머리를 아무리 헝클어뜨려도 그 때 기억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왜? 왜 모르는데, 항상? 아니. 그게 아니다.
정말 몰랐나? 멍하니 나뭇바닥을 응시하다 보면 내 어깨를 조심스레 짚는 손길이 있었다.
-씻을 수 있겠어요?
그 질문에 그저 헛웃음이 나왔다. 그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아보이나. 나는 힘이 안 들어가는 다리에 힘을 주어 몸을 일으켰다.
-감사합니다.
뚝 던져진 내 감사 인사에, 여자는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욕조가 준비된 부엌 옆 작은 방으로 가서 문을 닫았다.
뜨거운 물 속에 몸을 담그자 다시 그대로 잠이 왔다. 하지만 그랬다간 문 밖의 사람을 더 곤란하게 만들 게 분명했으니 나는 애써 정신줄을 잡았다. 기계적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닦는 것까진 하겠는데, 옷을 갈아입을 생각을 하자 그냥 이대로 죽으면 안 되나 싶었다. 욕조 옆에 놓인 건 내가 일 없을 때 늘 입던 무채색의 평상복이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내가 섭씨 수사 같은 옷을 입고 살았다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이제 와서 보니 회색 옷이 내가 입고 있던 수사복과 그다지 다를 게 없었다.
헛구역질이 나서, 나는 이제 막 식어가는 나무욕조에 머리를 기댔다. 이대로 눈을 감고 떴을 때 백 년이 지나 있으면 좋겠다. 그러면 나는 개운하게 자살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잔인해서, 일 초 일 초 시간이 흐르는 걸 느끼다가 돌아버릴 것 같았다. 나는 욕조에서 벌떡 일어나, 몸의 물기를 닦고 옷을 걸쳤다.
욕조를 처리한 뒤 안으로 들어온 나는 탁상 앞에 주저앉았다. 기다렸다는 듯 놓이는 죽 그릇이 그저 부담스러웠다. 내가 그동안 여기 머물기보다 객잔 이곳 저곳을 전전하던 이유가 여기 있었다. 그러나 사람 성의를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는 감사 인사를 중얼거리며 흰 죽을 입 안에 퍼넣었다. 좀 헛구역질이 나왔지만 참고 입 안에 든 내용물을 다 삼켰다.
불편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침묵 속에서 나는 맛도 거의 안 나는 죽을 그냥 마셨다. 빈 그릇을 바라보다가 내차 입을 열었다.
-전 이제 안 돌아옵니다.
-네?
-멀리 떠날 거거든요. 집이나 세간살이는 그냥 가지시죠. 어차피 그동안 내 집이라고 하기도 우스운 곳이었으니까.
-하지만......
-걱정은 안 해도 돼요. 여기 화 미칠 일은 없을 테니.
-멀리 떠난다는 건, 어디로......
-바다 건너로 갑니다.
그러니 더 묻지 않았으면 좋겠다. 대화를 더 나눌 기력도 없었고, 여유도 없었고, 그리고...... 갑자기 번쩍 정신이 들었다.
놀란 얼굴의 여자를 피해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으로 달려갔다. 방문을 열어젖힌 채 다급히 그 안을 둘러보았다. 반쯤 초점이 나가 있던 내 눈에 허름한 봇짐이 잡혔다. 나는 당장 그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봇짐 안의 족자와, 그 족자 안의 그림까지 확인한 뒤에야 나는 족자를 품 안에 안은 채로 맥이 풀려 주저앉았다. 자꾸만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그 족자를 찢게 될 것만 같아 그러지 못하도록 두 주먹을 말아쥐었다. 피냄새를 맡은 다음에야 손에서 힘이 풀렸다.
이 말도 안 되는 추태를 모두 목격한 여자는 흐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렇게 됐어요?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나는 딱 일주일 더 그 집에 있었다. 주로 머릿속으로 바다 어떻게 건너야 할지 계획을 짜는 게 다였다. 그럴 때면 나는 아주...... 이성적이었다. 돈. 경로. 미래...... 아무 의미 없는.
떠나면서 짐을 챙길 건 거의 없었다. 궤짝 하나에 모든 게 충분히 들어갔으니까. 이제 집의 주인은 정말 내가 아니었지만, 여자는 자기 집을 얻은 것치고 그리 기뻐 보이지는 않았다. 정말 괜찮겠냐는 그녀의 질문에 나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눈 앞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뜨문뜨문이나마 십 년 넘게 함께 해온 사람이다. 분명 더 할 말이 있었고 또 있어야 했겠지만, 입 밖에 내는 대신 나는 뒤를 돌았다.
이제 금광요가 맡겨둔 돈만 찾으면 다였다. 목적지를 향해 기계적으로 걷는데, 어쩐지 거리의 사람들이 다들 웅성거리는 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하지만 나는 어차피 떠날 사람이라 내 일 아니었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다. 익숙한 이름이 들리기 전까지는.
-일문삼부지가 죽었다며? 그래서 청하에 부탁 안 하고 웬 고소 남씨를 불렀나?
이어서 들려온 말이 아니었다면, 나도 내가 뭘 했을지 모른다.
-그게 아니라, 죽겠다고 무슨 소동을 벌였대. 근데 몸은 멀쩡하다던데?
-치정 문제라고 들었네만.
-하여튼. 저번에도 그러더니, 거 죽을 거면 시원하게 죽든지 계속 찔끔찔끔......
혀를 쯧쯧 차는 소리.
-그나저나 어제 그 일은 대체 뭔가? 모현우만 살았다며? 수선계에 망조가 들었는지 일들이 이렇게 줄줄이 터지니, 원.
모현우? 금광선의 사생아. 금광요가 내쫓은...... 오랜만에 듣는 그 이름을 곱씹으며 자리에 굳어있는데, 찻집 앞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남들이 들어도 상관 없는 이야기라 판단했는지 제법 큰 소리로 떠들어댔다. 나는 그들 허리에 걸린 검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천벌 받은 게지. 금린대에서 돌아온 뒤로 미치광이 짓을 일삼긴 했대도, 그래도 자기 조카고 사촌인데.
-그런데 좀 수상하지 않나? 왜 하필 그 집에 그런 일이 생기고 모현우만 살아서 자취를 감췄단 말인가.
-사도를 쓴다고 전부터 말 많았는데, 이번에 고소 남씨에서 정화하려고 데려간 거 아니야?
그들의 대화는 곧 그들이 어제 본 고소 남씨 자제들에 대한 평가로 이어졌고, 나는 가슴 속 묘하게 느껴지는 불안감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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