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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07 21:38

인생이 과하다 못해 지독하게 되는 거 없이 불행하다면 전생에 내가 도대체 뭔 짓을 했는지 의심하게 된다. 강징의 인생은 늘 그랬다. 이 정도면 신이 자신을 미워하는 게 분명할 정도로 되는 게 없는 인생이었다. 그래서 강징은 모든 걸 버리고 도망치기로 결심했다.

 

 

 

해가 중천에 뜨고 볕이 뜨거운 오후 1시는 강징이 운영하는 동물 병원의 점심시간임. 늘 그랬든 강징은 원장실 바로 옆 작은 방에서 간단하게 싸 온 도시락을 먹고 다시 책상에 앉아 차트를 살피면서 남은 일과를 정리했음. 간단한 예방접종과 검진만 남아 있었기에 여유로운 하루였지. 시간도 여유롭고 마침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 가방 사이로 보여 가져와 읽었음. 시골에 있는 작은 도서관이라 새로운 책보다는 옛날 책들이 많았기에 책은 표지가 많이 헐어 있고 속지도 변색이 심했어. 쉽게 손이 가지 않을 책이지만, 강징은 고서를 읽는 취미가 있어 낡고 오래된 책에 정감이 갔어. 지금은 잘 쓰지 않는 고어로 적힌 고서임에도 강징은 어려움 없이 술술 읽혔어. 들어본 적 없는 어려운 용어도 사전을 찾아보지 않고 뜻을 알 수 있었어. , 소싯적 문학 수업 때 고전소설 읽는 법을 배웠기에 그런 것이라 여겼지. 책은 고소, 난릉, 운몽, 기산 등 여러 지역의 설화를 기록한 책이었음. 천천히 넘기던 책은 순간 창문 사이로 불어온 바람에 의해 수십 장이 한 번에 넘겨졌어. 강징은 짧게 혀를 찼지만, 막무가내로 펼쳐진 책 속에 뱀이 그려진 삽화가 눈길을 끌었음.

 

뱀 삽화가 그려진 설화는 새롭지도 놀랍지도 않은 어디선가 들어본 이야기였음. 촉망받던 수사가 알고 보니 커다란 구렁이였고, 이를 알게 된 한 세가의 종주가 비밀을 가지고 협박하여 수사를 데릴사위로 들였음. 악독하기로 소문난 종주와 아정하다 촉망받는 수사의 혼례였기에 아무도 축하해주지 않았음. 심지어 하나 뿐인 종주의 사형은 크게 역정내고 세가를 아예 떠났어. 게다가 구렁이는 사랑하는 다른 사람이 있었기에 시름시름 앓았어. 세가의 종주는 이를 알고도 탐이 나서 구렁이를 가로챈 것이었지. 남의 연인을 가로챈 종주는 과한 탐욕을 부렸기에 하늘의 벌을 받은 것일까? 종주는 오래 살지 못하고 금방 죽었어. 우습게도 종주가 죽은 날 호수가 범람해 홍수가 날 정도로의 많은 양의 비가 내렸음. 그리고 구렁이도 다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

뭔가 찝찝하게 해결되지 않은 내용이 많았음에도 설화는 거기서 끝이 났음. 별거 없는 오래된 설화일 뿐인데 강징은 기분이 가라앉고 속이 상해 책을 치웠음. 강징은 울렁이는 찝찝한 마음에 잠시 잊고 있던 옛 기억이 떠올랐어. 대학생 때였어. 같은 과는 아니었지만,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위무선의 부탁으로 유령회원으로만 잠깐 가입했던 동아리가 있었어. 학교 뒤의 작은 텃밭에서 상추랑 무를 키우는 동아리였음. 위무선의 부탁으로 이른 아침에 상추에 물을 주고 있던 강징은 텃밭 사이로 저를 빤히 바라보던 커다란 흰 구렁이를 본 적이 있었어. 그 이후에 텃밭에서 기절해 있던걸 위무선이 깨웠지. 강징이 엄청나게 큰 구렁이를 봤다는 얘기를 하니깐 위무선이 뭐라 했더라? 묘한 표정을 짓더니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라는 말을 하고 말았던 거 같았음. 뭐 딱히 중요한 일도 아니고 강징은 노곤하게 몰려오는 졸음에 잠깐만 눈을 붙이려 쓰고 있던 안경을 벗고 책상에 팔을 베고 누웠음. 창틀 사이로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면서 잠에 빠졌어. 이네 깊게 잠들어 급히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와 강징을 부르는 것도 듣지 못했음.

 

강 선생님

.......

강 선생님?

 

애타게 부르는 간호사의 목소리에 책상에 엎어져서 자고 있던 강징은 급하게 일어났음.

 

.... 제가 좀 졸았네요. 죄송합니다. 벌써 시간이 점심시간이 다 끝났나요?

 

슬쩍 손목에 찬 시계를 봤지만, 아직 점심 시간은 끝나지 않았어. 의아한 강징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무슨 일 있냐고 물었음. 간호사는 우물쭈물하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음. 개업 때부터 강징과 꽤 오랫동안 일해온 간호사로 웬만한 일에는 쉽게 당황하지 않는데 이렇게까지 어쩔줄 몰라하는 게 여간 일이 아닌 게 분명했어.

 

그게, 선생님이 한번 나와보셔야 할 것 같아요. 병원 문 앞에 커다란 구렁이가 있는데 저희가 뭘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요.

구렁이요?

, 구렁이가 문 앞에서 동체 움직이지 않고 병원 안을 빤히 바라보고 있어요. 엄청 커서 차마 저희는 문을 열지도 못하겠어요. 이제 곧 점심시간이 끝나는데 보호자분들이 오시면 상황이 더 난감해질 것 같아서 주무시는 선생님을 깨웠네요. 죄송해요.

아닙니다. 바로 나가보겠습니다.

 

시골의 하나뿐인 작은 동물 병원이기에 별별 동물들을 다 접해봤지만, 강징은 구렁이를 상대해본 적은 없었음. 그래도 가끔 산에서 실뱀과 방울뱀 정도는 본 적이 있어 그 정도 크기의 구렁이를 생각했어. 독이 없는 뱀이라면 포획해 산에 다시 보내주려고 고무장갑을 끼고 커다란 집게와 그물망을 가져왔어. 하지만, 막상 병원 문 앞에 통유리 너머로 보이는 살벌하게 커다란 흰 구렁이를 보자 강징은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음. 그럴 리 없겠지만, 대학생 때 봤었던 구렁이가 생각났지. 강징은 천천히 통유리 앞으로 다가가 자세를 굽혀 구렁이를 바라보았음. 햇살이 반사되어 반짝이는 데다 윤기까지 흐르는 새하얀 비늘을 가진 뱀은 동체 무슨 종인지 가늠 잡히지도 않았고 신기하기만 했음. 똬리를 틀고 가만히 있던 구렁이는 강징이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머리를 들어 올려 강징과 눈을 마주했음. 쉭쉭 혀를 내밀며 강징을 빤히 바라보던 뱀은 몸을 배배 꼬면서 통유리에 몸을 더욱 가까이 밀착했음. 딱히 위협을 가하는 것 같지 않고 되게 흥분한 거 같아 보였어. 강징은 구렁이를 보면 볼수록 꺼림직한 느낌과 동시에 동체 알 수 없는 저릿함이 들었어. 강징은 일단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닌 거 같아 119에 전화하려 핸드폰을 꺼냈음. 그러나, 통화 버튼을 누르기 직전, 반려견과 함께 병원에 오는 어린아이가 근처에서 보였음. 만에 하나 구렁이가 아이에게 해를 가하게 둘 수는 없었기에 강징은 문을 열고 빠르게 집게로 구렁이를 잡아 그물망 안에 넣었음. 다행히 뱀은 순순히 그물망에 들어갔음. 강징은 급한 대로 원장실 옆 작은 방에 박스 안에 그물망을 가져다 놓았음. 그물망을 꽉 찰 정도로 커다란 구렁이는 온순하게 조용히 꽈리를 틀고 강징을 빤히 바라보았음. 아무리 온순하게 굴고 신기하다고 한들, 무슨 종인지, 독이 있는지 조차 알지 못하는 커다란 구렁이였기에 당장 119에 신고해 구렁이를 잡아가라고 해야 했음. 하지만, 왜일까 강징은 이 구렁이가 낯설지 않아 구렁이의 은은하게 반짝이는 비닐과 샛노랗게 빛나는 눈만을 빤히 바라보았어. 술렁이는 마음에 핸드폰만 부여잡고 119를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지. 쭈구려 앉아 심란해하는 강징이 한숨만 푹푹 내쉬는데 누군가 강징을 부르며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음.

 

강 선생! 엄청 큰 구렁이가 나타났다면서! 고 놈 어딨나?

 

근처에서 건강원을 하는 황씨가 큰 소리로 강징을 부르며 구렁이를 찾았음. 방문을 닫고 있지 않았기에 황씨는 금방 강징과 구렁이를 찾았지. 몸을 낮추고 낯선이를 경계하는 구렁이를 황씨는 매우 흥미로워하며 겁도 없이 그물망을 들어 올렸어. 구렁이는 정말로 놀란 건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쉭쉭 혀를 내밀었지.

 

어이구야 이놈 봐라? 팔팔한 게 뱀술 해 먹기 딱 좋게 생겼네. 강 선생, 이거 나한테 파는 거 어때? 아주 토실한 게 분명 맛도 좋아 보여.

 

보다 못한 강징이 그물망을 뺏어 다시 박스 안에다 넣었음.

 

황 선생님, 이 아이는 파는 게 아닙니다. 119에 전화해서 회수해가라 할 겁니다.

아니, 그러지 말고 내게 팔라니깐? 비싸게 쳐줄게.

안 됩니다. 야생동물법 위반이에요. 어여 돌아가세요.

 

강징은 아쉬워하며 끝까지 구렁이에 눈길을 떼지 못하는 황씨를 거의 밀다 싶이 방에서 쫓아냈음. 확실히 이 구렁이는 강징이 감당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어. 119에 신고해서 얼른 데려가라 해야 했지. 하지만, 통화 버튼을 누르기 직전에 진료 시간을 알리는 알람이 웅웅하고 울렸어. 바로 진료실에서도 강징을 부르는 호출이 있었기에 강징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자리에서 일어섰음. 사실 강징도 당장 구렁이를 보내주기에는 뭔가 아쉬움이 가득했어. 딱히 몸을 수그리고 가만히 있는 구렁이가 강징에게 해를 가할 거 같지 않았기에 일을 끝내고 조금만 더 관찰하다가 신고하여 보내줘도 되지 않을까 싶었음.

사람 홀리는 재주가 있는 녀석이라며 구렁이의 머리를 가볍게 툭툭 치고 강징은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문을 단단히 잠그고 나왔음. 진료가 다 끝난 늦은 저녁이 돼서야 다시 작은 방 안으로 들어왔지. 그런데 박스 안 그물망에 얌전히 있어야 할 구렁이가 보이지 않아 당황했어. 식겁하여 주변을 둘러보는 와중에 어디선가 나타난 구렁이가 강징의 다리를 타고 올라오고 있었음. 강징은 너무 놀라 꼼짝 움직이지도 못하고 뻣뻣하게 굳었음. 어느새 강징의 어깨까지 타고 올라온 구렁이는 몸을 빙빙 둘러 강징과 눈을 마주했음. 샛노란 눈을 마주했을 때 강징은 진심으로 기절할 거 같았음. 차마 비명을 지르지 못하고 그저 가만히 서 있기만 했음. 구렁이는 한참을 강징을 바라보다가 혀를 내밀어 볼을 할짝이더니 콰득하고 목을 물었어. 구멍이 난 목에 피와 검은 타액이 흘러내렸어. 강징은 몸을 크게 휘청이더니 소파에 쓰러져 정신을 잃었음. 한참 후 소파 위에서 정신을 차린 강징은 목이 바싹 타들어가는 거 같은 통증에 격한 기침을 하였어. 누군가 강징의 옆에 다가와 물잔을 건넸고 등을 두들겼음.

 

저런, 천천히 숨을 고르고 내쉬어 보자.

 

낯설지만, 어딘가 들어본 음성에 강징은 고개를 홱 돌렸음. 눈앞에는 흐릿하지만, 헐벗은 남자가 허리에만 담요를 두르고 강징 옆에 앉아 있었음. 너무 놀란 강징이 물컵을 떨구고 급하게 몸을 일으켰음. 커다란 눈을 비비며 감고 뜨기를 반복했어.

 

...누구시죠? 누구신데 허락도 없이 남의 병원에 이러고 계신 겁니까!

 

강징이 누구냐고 소리치며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하였지만, 남자는 딱히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음.

 

아징, 네가 데리고 왔잖아.

 

아징? 강징의 아명을 부를 수 있는 사람은 강징의 가족밖에 없었고 이 정신 나간 남자는 강징의 가족이 아니었음. 기가 막힌 강징은 어이없어 하며 핸드폰을 켜 112를 입력했어.

 

뭐 이런 미친놈이 다 있나...경찰 부르겠습니다.

 

남자는 대충 두른 담요가 흘러내렸음에도 자리에서 일어나 강징에게 성큼 다가왔음. 강징은 눈앞의 정말로 다 헐벗은 남자의 나신이 남사스러움에도 탄탄히 잡힌 근육과 가랑이 사이의 흉물에 눈을 떼지 못하고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음. 어두운 탓에 다른 건 전부 뿌옇게 보였지만, 흉물만큼은 또렷하게 보였음

,

..? 저기요. 함부로 움직이지 마세요.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남자가 강징을 와락 껴안자 핸드폰이 바닥에 굴러떨어졌어. 액정이 와그작 깨지는 소리가 들렸고, 강징은 더는 참을 수가 없어 남자를 밀치고 빽 소리를 질렀지.

 

야 이 미친놈아! 너 뭔데!

 

액정이 나가 켜지지 않는 폰을 두둘기며 강징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어.

 

미치겠네. 저기요, 단단히 미치신 거 같은데요. 여기 정신병원 아니고 동물병원이거든요. , 여기 꼼작 말고 계세요. 당장 경찰 부를 거니깐.

 

남자는 방을 나가려는 강징을 붙잡고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았음.

 

우리가 정말 오랜만이기는 한데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지 않아? 어두워서 그런가?

 

남자는 강징을 붙잡은 팔을 놓지 않고 다른 한 손으로 방 불을 켰음. 순식간에 밝아진 주위에 강징은 잠깐 인상을 찌푸렸지만, 그제야 남자의 얼굴을 또렷이 볼 수 있었음. 모르는 사람이 아니긴 했어. 그렇지만, 그렇게도 잘 아는 사람도 아니었지.

 

.......희신 선배?

 

남자는 방긋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어.

 

, 오랜만이야.

 

텃밭 동아리 회장이었던 경경대 남신 남희신 선배가 왜 여기에 있는 건지. 학교를 졸업한 지 몇 년이나 지났고, 애초에 강징과 크게 접점이 없던 인물이었어. 강징은 불편해하며 몸을 틀자 남희신은 순순히 손을 놔줬음. 아주 잠깐. 붙잡고 있던 것인데도 불구하고 팔목이 시큰거리고 아팠지.

 

선배 연락도 없이...여긴 어쩐 일이세요? 차림새는 왜 이러신 거고요?

... 그게 나도 잘 모르겠네?

 

남희신은 정말 연유를 모르겠다며 눈썹을 축 늘어트리며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음. 정말 무해해 보이는 표정과는 달리 잘 모르겠다고 무마할 일도 아니고 도대체가 말이 안 되는 상황이기에 강징은 남희신의 말에 믿음이 가지 않았음. 뭣보다 지금 가장 난처한 건 꽤나 자극적인 헐벗은 남희신이었어.

 

선배 뭐라도 걸치세요. 제 여분 옷 드릴게요.

 

강징은 옷을 꺼내려 수랍장에 다가가다 그제야 비어있는 박스가 눈에 들어왔음. 정신없어 잊고 있었는데 강징은 지름 이렇게 태평하게 굴 때가 아니었지. 강징은 곧장 남희신에게 다가갔음.

 

선배! 일단 움직이시지 마세요. 혹시 방에서 엄청 큰 흰 구렁이 못 보셨어요? 분명 제가 쓰러지기 전 까지만 해도 있었거든요...젠장, 독이 있는 거 같은데. 큰일났네.

 

허둥거리는 강징과 달리 남희신은 피식피식 웃기만 했음.

 

징아, 그 구렁이는 독이 없어,

? 보셨어요? 어디에 있어요?

 

남희신은 손가락으로 스스로를 가리키며 활짝 웃었음.
 

여기.

 

강징은 어이없어 하며 짧게 탄식을 흘렸음.

 

미친놈....

 

웃기지도 않는 장난치지 말라며 인상을 팍 쓰고 바닥을 샅샅이 뒤지는 강징은 뒤에서 뭔가 껍질이 벗겨지고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봤음. 그러자 남희신이 있던 자리에 애타게 찾던 흰 구렁이가 있었음. 강징은 쉭쉭 소리를 내는 구렁이에게 천천히 다가갔음. 강징이 몸을 숙이자 구렁이는 똬리를 풀고 강징의 볼에 얼굴을 부비었음. 강징이 구렁이를 품에 안는 척 하면서 확 낚아채려 집게쪽으로 손을 뻗었음. 강징이 집게로 구렁이를 포획하려 하자 순식간에 구렁이는 다시 사람의 모습으로 바뀌었음. 다소 충격받은 듯 섭섭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희신이 강징을 내려다 보았음.

 

징아.....

 

강징은 뒤로 자빠져서 말도 안 된다며 눈을 비비고 입을 다물지 못했음.

 

??? 선배? ? 구렁이는?...?

 

남희신은 바닥에 주저앉아 입을 다물지 못하는 강징을 일으켜 세웠음.

 

옷 좀 빌려줄래?

 

강징은 파들파들 떨리는 손을 진정하지 못하고 서랍장에서 가장 커다란 프리사이즈 옷을 꺼냈음. 남희신하고는 눈도 못 마주쳤지. 빠르게 옷만 건네주고 강징은 소파에 앉아 다리를 덜덜 떨며 남희신을 빤히 바라보았어. 이게 뭔 말도 안 되는 일인가 싶었음. 갑자기 몇 년 만에 만난 선배가 대형 구렁이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것 같았음. 기장과 체구의 차이로 프리사이즈임에도 불구하고 다소 짜리 몽땅해진 옷을 입은 남희신이 강징 옆에 바짝 붙어 앉았음. 강징은 기겁하며 소파 가장자리로 이동했음. 남희신은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된다며 바로 옆자리를 탁탁 쳤지만, 강징은 다가가지 않았음.

 

안 물게. 편히 와서 앉아.

 

강징은 눈을 흘기며 남희신을 째려보았음. 뭐랄까 마치 우리 애는 안 물어요 같은 느낌으로 말하는데 전혀 신빙성이 없었어. 강징은 왠지 쓰라리는 거 같은 목을 쓰다듬으면서 소파 가장자리에 앉았음. 강징은 다소 떨리는 손을 꽉 부여잡고 말을 꺼냈음.

 

갑자기 무슨 일이신가요? 아니, 제게 왜 이러세요? 모르겠다는 말로는 전혀 납득이 안 돼서요. 제가 예전에 선배한테 뭐 잘못했나요? 딱히 돈을 빌렸거나 밑진 기억은 없는데요.

 

남희신은 꽤 재밌는 말을 한다며 피식 웃었음.

 

글쎄, 나도 눈을 떠보니 여기였어.

말이 안 되잖아요. 연유도 없이 이런 외진 시골로 올 이유가 없잖아요. 더군다나 사람도 아닌...구렁이는 또 뭐고요.

 

순간, 남희신이 동공이 세로로 찢어지더니만 밝은 노란색으로 바뀌었음.

 

집안 내력이야. 조상 중에 인간도 구렁이도 아닌 그런 존재가 있었다고 하더라고. 여기까지 온 이유는 나도 정말 모르겠어. 사계절 내내 따뜻한 운몽과 달리 고소는 지금 한겨울이잖아. 어쨌거나 변온동물 습성상 추위를 잘 타서 따뜻한 지방까지 무의식적으로 내려왔나 봐.

 

전혀 납득이 되지는 않지만, 강징은 더 캐묻고 싶지 않아 대충 알겠다며 얼버무렸음. 하지만, 갑자기 목을 문 건 은근히 불쾌하고 아팠기에 참고 넘겨버릴 수 없었음.

 

그럼 목을 문 건 뭐에요? ....없는 거 맞아요?

 

강징은 아직도 저릿한 목을 쓰다듬자 훌쩍 강징 바로 옆까지 다가온 남희신이 강징의 목을 돌려 구멍이 난 곳을 바라보았음.

 

독은 아니고, 최소한의 방어 수단이야. 미안해. 나도 그때는 너무 당황했어.

 

남희신이 안쓰러운 표정을 짓고 강징의 목을 살살 쓰다듬었음. 강징이 몸을 움츠리며 벗어나려 하자 아예 고개를 숙여 목에 얼굴을 묻고 귓가에 속삭였지.

 

빨리 낫게 핥아줄까?

 

강징은 소스라치며 남희신을 밀치고 자리에서 일어났음. 온몸에 소름이 돋고 얼굴에 열이 올라 빨개진 게 느껴졌음. 강징은 지끈거리를 고개를 붙잡고 눈을 꼭 감고 말을 꺼냈음.

 

선배! , 정도껏 하세요. 단도입적으로 말할게요. 저 선배랑 아무 사이도 아니잖아요, 대학 졸업하고서는 연락하고 지내지도 않았고, 애초에 친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나타나서 이러시면 저 되게 곤란해요....그러니깐.....

 

차가운 시선이 느껴져 눈을 흘겨 바라본 남희신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어 강징은 말을 잇지 못했음. 틀린 말을 한 건 아닌데 남희신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려 화를 나게 한 것 같았음. 솔직히 어이가 없었음. 화가 나야 하는 건 자신 아닌가? 경찰서에 신고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뭘 믿고 저리 뻔뻔하게 구는 건가 싶었지. 강징은 한참을 망설이다 정적 끝에 말을 꺼냈음.

 

경찰서에는 신고 안 할게요. 어디 가서 말하지도 않을 거고요. 그러니깐 이만 돌아가 주실래요?
 

언제 매서운 표정을 지었느냐는 듯 남희신은 다시 사람 좋은 표정에 날도 어두워졌고,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 그건 좀 어렵겠다고 했음. 남희신이 못 미더운 것과는 별개로 전라의 모습을 봤기 때문인가 정말로 돌아갈 방법 없이 난처해 보이긴 했어. 강징은 병원 전화기를 툭툭 건드렸음.

 

전화 빌려드릴 테니 지인분께 데리러 오라고 하세요.

 

남희신은 고맙다며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음. 누군가 곧장 전화를 받았음. 상대가 뭐라는지 잘 들리지 않았지만, 남희신이 말하는 걸 보니 상대는 아무리 빨라도 내일 새벽에나 도착할 것 같았음. 통화를 마친 남희신은 상황이 이러니 하루만 재워달라고 했지. 난처하긴 했지만, 근방에는 모텔이나 여관조차 없었기에 강징은 남희신과 함께 집으로 갔음. 한껏 긴정하다 집으로 돌아오니 강징은 그제야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음. 남희신에게는 먼저 목욕하라고 욕실을 내어주고 금새 요리했지. 허리에 수건만 두른 채 머리에는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채로 욕실에서 나온 남희신은 밥상을 보고 짧게 웃었음.

 

여전하네.

 

주방을 정돈하느라 남희신이 뭐라는지 제대로 듣지 못한 강징은 뭐라 말했냐고 되물으려다 또다시 거의 헐벗고 있는 남희신의 모습에 빠르게 옷을 가져다주고 식사하라고 했음. 분명 강징에게는 넉넉한 옷들이었는데 남희신이 입으면 짜리몽땅 해지는 게 어이없었지만, 남희신은 군말없이 옷을 입고 밥도 남기지 않고 먹었음. 막상 차리고 나니 위무선과 강징이 아니면 다들 엄청 매워하는 반찬들이어서 걱정했는데 별 탈 없이 잘 먹는 남희신이 강징은 내심 신기했어.

 

선배 매운거 잘 드시네요?

 

남희신은 살짝 웃더니 강징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음.

 

그래서 좋아?

? 아니 그건 아닌데. , 못 먹는 것보다는 낫죠.

 

훅 들어오는 말에 강징은 남희신이 왜 학교 다닐 때 경영대 남신이라는 남사스러운 별명이 있었는지 이해됐어. 강징이 좀 더 어렸고, 마음이 허전했다면 매료될 것 같았어. 물론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기에 강징은 남희신이 이 사람이 왜 이러나 싶고 좀 부담스러웠음. 그보다도 아주 큰 문제가 있었음. 강징이 사는 집은 방이 두 개였지만, 딱히 초대할 손님이 없었기에 집안에는 여분의 배게와 요가 전혀 없었고 강징 혼자 눕기 딱 좋은 싱글사이즈 침대 하나뿐이었음. 강징은 이를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남희신 보고 침대가 방에 가서 자라고 하고 자신은 옷과 짐을 둔 짐방으로 갔음. 살다살다 자신의 집인데도 불구하고 옷가지를 배게와 요 삼아 자게 될 줄은 몰랐지. 어이도 없고 짜증도 났지만, 남희신은 아침만 되면 떠날거고 일단 너무 피곤했기에 강징은 둘둘만 옷가지에 얼굴을 파묻고 잠에 빠졌음.

강징이 한참 잠에 빠져 있을 깊은 새벽 방문이 조용히 열리더니 남희신이 방 안으로 들어왔음. 티를 팍팍 내면서 불편해하고 경계하면서도 이렇게나 무방비하고 정이 많은 강징이 내심 웃겼음. 잠자리가 불편한지 인상을 팍 찌푸린 강징의 이마를 살살 쓸어내리면서 품에 안아들고 침실로 데리고 갔지. 침대 위에 강징을 눕히고 남희신은 아까 물었던 목을 어루만졌음. 남희신이 강징에 목덜미에 박아 넣은 건 독이라면 독이고 아니라면 아닐 것이었어. 남희신은 다소 씁슬한 표정을 짓고 흉이 난 강징의 목에 짧게 입을 맞췄어. 강징이 더는 저를 혼자 두고 도망가게 둘 수는 없었지.

 

아징, 제가 어찌해야 하나요무엇을 해야 절 용서해주실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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