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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05 22:19
진정령, 난백 ㅅ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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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방으로 돌아가 그대로 잠이 들었다. 사실 그대로 잠이 들었다고 하기는 어렵다.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오랫동안 뒤척거렸으니까. 예컨대, 육 년 전 도무덤이 뭔가 어긋났던 게 음호부 때문이었을까? 음호부라 하면 위무선의 작품이었고 위무선 사후 음철로 장난친 건 내가 알기로 설양 뿐이었다. 그러고보니 설양이 부정세에 갇힌 적이 있댔지. 설양에 대해 전해들었던 이야기를 생각하면 청하 터뜨리겠다고 그런 짓을 하는 것도 그리 개연성 없는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그나저나 설양은 어떻게 되었더라? 금광요가 결국 그를 처리했다는 소식을 저잣거리에서 듣기는 했는데 정작 금광요에게 물은 적이 없었다.
섭회상이 음호부에 관심을 가진 게 섭명결을 되살리겠다는 마음 때문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도무덤에서 그런 일을 겪고 그에 대해 더 조사하고자 한 거라면, 음호부에 관한 문서를 가지고 있는 게 이해가 갔다. 생각해보면 도무덤 속에 있는 악귀들이 음호부보다 덜하리라는 법도 딱히 없었다. 솔직히 나는 섭회상이 정도를 쓰든 사도를 쓰든 뭘하든 상관 없었지만, 그게 혹시라도 그의 몸을 상하게 할까봐 걱정이 되었다. 그가 정말 주화입마라도 오는 날엔...... 부정세 터뜨리고 자살하련다. 정말로.
주화입마 하니 또 생각나는 얼굴이 있었다. 그...... 그. 나는 여전히 그의 이름을 몰랐다. 섭회상은 아니라고 했지만, 그는 분명 나에게 가슴팍을 걷어차이기 전까지는 멀쩡했다. 얼마 전만 해도 상태가 괜찮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단시간 빠르게 주화입마가 올 수 있었던 거지? 수사 봉급 생각하면 효과가 그리 단기간에 올 정도로 엄청 비싼 약을 사먹진 못했을 텐데, 분명 조금 이상한 일이었다.
타고난 기질이나 수련 경지 외에 따로 주화입마를 앞당기는 요인 같은 것이라도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눈을 깜박이던 나는, 어느 순간 아침 해가 뜨는 것을 느끼며 뻑뻑한 눈을 비볐다. 서둘러 준비를 마치고 방을 나서야 했다. 아침 일찍 가서 일을 마무리하고 청하 시내를 잠시 거쳤다가 부정세로 돌아오는 게 섭회상의 계획이었기에, 해가 막 뜬 시간임에도 이미 모든 것이 다 준비되어 있었다.
행로령은 부정세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어 어검을 하면 금방이었다. 분명 부정세를 출발할 때만 해도 화창하던 하늘이 난장강이라도 온 것마냥 어둡고 침침한 건 따라서 여기 정말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말이었다. 섭씨에 오래 있던 수사와 그렇지 않은 수사가 여기서 바로 티가 났는데, 전자는 아무렇지 않아보이는 반면 후자는 척 보기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도 섭회상이 태평한 것을 보곤 어느 정도 마음을 놓는 듯했다.
어느덧 일행이 안개 자욱한 가운데 멈춰서 있는데, 섭회상은 매우 숙련된 태도로 부적을 꺼내어 뭔가를 읊었다. 이윽고 안개가 빠르게 걷히고, 풀이 무성하긴 하지만 분명 주변과 구별된 흙길이 하나 나타났다.
-미진이야. 섭씨 사람이 아니면 이 진을 깰 수 없어. 아주 경지 높은 수련자라면 예외겠지만.
섭회상이 부채로 얼굴을 가리며 설명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수사들과 함께 길을 걸어나가려는데, 갑자기 섭회상이 내 손을 잡았다. 이젠 진짜 숨기지도 않냐고. 괜히 먼저 걸어나가는 수사들의 눈치를 보는데, 섭회상은 눈치가 없는 것도 아니면서 꿋꿋이 내 손을 붙잡았다.
내 손을 붙잡은 희고 고운 손을 보다 보면, 섭회상이 여자였다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랬다면 이러는 게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그랬다면 금광요가 나에게 웬 놈팽이를 데려다 섭회상과 결혼시키라고 했을 거고 그럼 나는 진작에 때려치울 수밖에 없었겠지. 섭회상 데리고 튀었을 지도.
함께 도망이라.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섭회상을 따라 걸으며 나는 무성한 잡초들을, 그리고 나무들을 둘러보았다. 겨울이 다 되어가는 가을, 나무 대부분은 갈색으로 말라 비틀어져 있었고 그다지 색이 예쁘지는 않은 낙엽을 발치에 떨구고 있었다. 그걸 보며 나는 섭회상의 혼인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부정세에 보내진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모른 척 한 적은 있어도, 한 번도 잊은 적 없었다. 그건 꼭 목에 걸린 가시 같아서 잊을 만하면 따끔거렸다. 섭회상은 아마도 가남 성씨 낭자와 혼인할 것이다. 금광요가 그렇게 마음을 먹은 이상 다른 결과가 나오기는 힘들었다. 꼭 그 낭자가 아니더라도, 나는 섭회상이 좋은 사람을 만나 잘 살았으면 하고 진심으로 바랐다. 나와의 관계야 사실 뭐, 내가 떠나면 끝 아니겠는가. 섭회상도 그 사실에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다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괜히 저 어디야, 연화오 전대 종주 꼴 나기 전에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질 자신도 내게 충분히 있었고.
발치에 밟히는 낙엽이 유독 버석하게 느껴졌다. 내 예상대로라면 다음달 쯤 섭회상은 그 낭자와 한 번 더 선을 볼 거다. 별일 없으면 내년 중으로 둘은 정혼할 테고, 섭회상의 나이가 적은 편은 아니니 아마 곧바로 혼인하겠지. 그리고 나는 섭회상이 그 전에 여기를 떠난다. 흠 잡을 데 없는 계획이다.
산작약은 보고 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하지만 나는 내가 이미 충분히 욕심을 부렸다는 걸 알고 있었다.
문득 금광요에게 미안해졌다. 그에게 소식을 전하지 않은 지 벌써 꽤 되었던 것이다. 저번에 동굴에서 겨우 죽고 살아났을 때 금광요가 어떻게 알고선 괜찮냐고 연락을 했었고, 나는 나도 괜찮고 섭회상의 건강도 당분간 신경쓰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답장을 했다. 그게 벌써 한 달 전이니, 이제 또 슬슬 연락을 해야 했다. 행로령에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해도 좋을까? 저번에 금광요는 분명 행로령에 더 관심 갖지 말라고 했었다.
왜? 정말 음호부가 엮인 문제일까? 음호부하니 다시 또 생각이 났다.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이릉노조의 주술. 섭회상은 섭명결을 정말 되살리고 싶은 걸까?
그럴 수 있다고 믿나?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햇빛을 피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자 갑자기 머리 위로 그늘이 생겼다. 내 이마 위에 드리운 것은 다름 아닌 섭회상의 부채였다. 고개를 돌리자 섭회상이 말없이 웃고 있었다. 부채 밑에서 본 그의 얼굴은 어쩐지 조금 창백했다. 자기나 햇빛을 가릴 것이지, 무슨 나를 가려주겠다고. 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손에서 부채를 뺏어 그의 얼굴쪽으로 부쳐주었다. 섭회상이 웃었다.
-거의 다 왔어.
섭회상이 내 손을 다시 한 번 꼭 쥐었다. 나는 그저 맞잡은 손을 의아한 얼굴로 내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이 사람은 오늘 또 왜 이러지. 생각하는 사이 부채를 뺏기고, 나는 저 멀리 버티고 선 바위덩어리로 시선을 옮겼다.
행로령의 식인 보루. 사람들은 분명 그렇게 말했었고 그게 틀린 말은 아닌 듯싶었다. 원래 보루라 하면 부정세 같은 요새 그 자체를 일컫는 말인데, 저기 보이는 저 건축물은 정말 부정세를 그대로 축소해 놓은 듯한 생김새였다. 아니면 반대로 부정세가 저 무덤의 확대판일지도 모르지. 부정세 뒷편의 묘지를 생각하자 어쩐지 마음 한 켠이 서늘해졌다. 언젠가 섭회상의 몸은 그곳에, 도는 이곳에 묻힐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말 그대로 질렸지만, 동시에 이곳이 말 못하게 애틋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나야 죽어서 어디 무덤도 없을 거고...... 아니다. 금광요가 만들어줄 수도 있겠구나. 하여튼 흔적 없이 이 세상을 뜰 거지만 섭회상은 이변이 생기지 않는 이상 언제까지고 여기 있을 것이다.
-다 왔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며 멈춰 섰다. 정말 어느새 보루가 가까워져서 내 머리 위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섭회상이 부채를 흔들거리며 수사들에게 명령했다.
-다들 주위를 한 바퀴 돌면서 뭔가 이상한 점 없는지 한 번 살펴 보거라. 무덤을 건드리지 않게 조심들 하고.
수사들은 슬슬 움직이면서 어쩐지 다들 나를 한 두번씩 흘깃거렸다. 왜 그러나 해서 봤더니, 시발. 까먹고 있었네. 아직 나는 섭회상에게 손이 붙잡힌 채였다. 얼굴이 벌개진 채로 섭회상의 손을 놓으려는데, 섭회상이 놓아주지 않았다. 나는 결국 최대한 복화술을 구사했다.
-또 왜 이러세요?
-뭐가?
-저도 일을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나를 지키는 게 오늘 네 업무야. 어차피 너는 여기가 처음이라 봐도 모르잖니.
쟤네들 중 절반 이상이 여기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인데요? 그런 말을 하려다가 나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다른 수사들 보기엔 꼴불견일 것이다. 그래서 그냥 섭회상에게 손을 내어준 채, 수사들이 뿔뿔이 흩어질 때까지 그냥 가만히 있었다.
-마흔 네 번째야.
-네?
오늘따라 섭회상은 뜻모를 말을 많이도 했다. 살짝 걱정이 될 정도였다.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섭회상은 파리한 얼굴로 웃어보였다.
-섭씨 종주들은 삼 개월마다 한 번씩 여기 와 보게 되어있거든. 그러니까 내가 종주가 된 뒤로 이런 식으로 오게 된 건 오늘이 딱 마흔 네 번째야.
그리 반가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섭명결이 죽은 지 십 년 넘게 지났다는 사실이 내포된 건 둘째 치고, 하필이면 4가 두 번이니, 미신에 별로 관심은 없는 나라고 해도 굳이 들어서 기쁠 리도 없었다.
무엇보다 섭회상이 전혀 기뻐 보이지 않았다. 그는 계속 물끄러미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무 그늘이 드리운 그의 얼굴을 마주보며, 나는 그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그때는 무더운 여름이었지만, 가을 바람이 차갑게 불어와 그의 머리카락이 흩날리자 나는 마치 그를 다시 또 처음 만나는 것만 같았다. 겨울에도 봄에도 그를 계속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하던 차, 멀리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더 생각할 겨를 없이 나는 검집에 손을 댄 채 섭회상의 앞을 막아섰다. 비명이 이어지지도, 쇠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나지도 않는 것을 보면 수사들이 공격당했다기보다는 그들이 뭔가를 발견했다는 게 더 이치에 맞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나는 경계를 풀지 않았다. 섭회상이 내 뒤에서 기웃대는 게 느껴졌다.
-무슨 일이지?
-글쎄요. 기다리죠.
심각한 일이든 아니든, 누군가는 섭회상에게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올 것이었다. 내 생각대로, 얼마 안 가 수사들이 우르르 몰려와 섭회상에게 보고를 올렸다.
-보고 올립니다, 종주. 보루는 지난 번 수리한 그대로입니다. 잠시 소란이 있었던 건 어린 수사들이 지난 번 처리한 시체를 보고 비명을 지른 것뿐이니, 심려치 않으셔도 됩니다.
보고의 앞 부분은 나도 알아들었지만, 뒷부분은 아니었다. 일단 지난 번 처리한 시체라는 표현 자체가 이해가 안 갔고, 애들이 그걸 어떻게 발견하곤 비명을 지른 건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걸 왜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는지도. 혼란스러움이 얼굴에 다 드러났는지, 아니면 어차피 자기가 한 번 더 살펴볼 심산이었는지 섭회상이 소리나게 부채를 펴들며 말했다.
-그렇구나. 그러면 나와 밀이가 마지막으로 한 번 둘러보고 올 테니 너희는 여기 있거라.
나는 수사들의 시선을 피하며 섭회상을 따라나섰다. 이젠 진짜 수진계 떠야 한다. 비록 본명이 아니래도 이름이고 얼굴이고 다 팔렸으니 방법이 없다. 그런 쓰잘데기 없는 생각을 할 때쯤. 오래된 시체 특유의 매캐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나도 보고만 들었지 눈으로 확인은 못 했는데, 저기 있네.
섭회상의 부채 끝이 무심히 가리킨 곳에는 스무 구 정도의 백골이 널부러져 있었다. 방치된 지 족히 두 달은 되었을 시체들은 시체라고 부르기가 무색할 정도였다. 스무 구가 전부 이렇게 백골이 되어 있다는 건 그들이 독 같은 것에 일제히 당했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 독이 그들을 단번에 녹인 게 분명했다. 본래대로라면 시체에 벌레가 꼬여 참혹한 몰골이었어야 했는데, 벌레가 근처에 조금도 없었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가끔 도무덤을 잘못 건드리면 이렇게 독으로 죽게 되거든. 경고용으로 둔 거야.
섭회상의 설명을 들으며 나는 그저 끈적한 검은 액체에 젖은 백골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햇빛을 받은 건예자들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으리라. 용케 녹지 않은 저 검푸른 옷만 아니라면.
저 옷을 나는 알았다. 빤히 천조각을 바라보는 사이 내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물에 빠진 사람의 귀에 들리는 것처럼 내 목소리는 어슴푸레하게 들렸다.
-저들이 누구인지는 파악하셨습니까?
-아니. 아마 전문 도굴꾼이겠지, 뭐.
원래였다면 지금쯤, 아니 진작에 내가 섭회상의 눈을 가렸겠지. 그는 피를 보고 기절한 경력이 있으니까. 하지만 그 순간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섭회상은 상한 음식 냄새에는 헛구역질을 해도 시체 냄새에는 멀쩡한 수진계 윗사람들 중 하나였다. 피를 보면 쓰러지는 겁쟁이, 그건 적어도 오늘의 섭회상은 아니었다. 나는 왜 그러냐는 듯 나를 빤히 바라보는 섭회상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입 안에 모래가 가득 찬 것만 같았다. 섭회상이 내 손을 더 꼭 쥐어왔지만 거기에 반응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저기 있는 저 시체들. 저 시체들의 주인은 금광요였기 때문이다.
금광요가 저들을 여기로 보냈다.
*
금광요는 나에게 좋은 사람이었지만, 나에게만 좋은 사람이었다. 우리의 관계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라면 아마 그렇게 될 것이다. 달리 말해 나는 그를 위해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으며 그에게는 그런 일을 할 사람이 필요했다. 나처럼 정체를 숨길 것이 아니라, 아예 그 존재조차 드러나선 안 되는 자들이. 그렇게 하여 구성된 자객단이랄까, 결사대랄까 하는 이들을 나는 아주 가끔 마주쳤었다. 당연히 그들은 주인을 특정할 수 없게 평범한 살수처럼 얼굴을 가리고 검은 옷을 입었지만, 나는 그들을 구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금씨 바깥에서는 거의 나만 그들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었다. 섭회상만 봐도 그들을 도굴꾼 취급하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금광요가 저질렀을 악행이 몇 개인데 잠잠한 걸 보면 금광요의 사람들이 꼬리 잡혀준 적이 아직 없다는 거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들의 정체 그 자체가 아니다. 중요한 건 그들이 왜 여기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금광요가 왜 청하 섭씨의 도무덤에 그들을 보냈단 말인가? 내가 알기로 금광요는 정말 중요한 일이 아니고선 이들을 부리지 않았다. 스무 명이나 여기 보냈다는 건 금광요가 정말 절대 들켜서는 안 될 무언가가 다름 아닌 이 곳에 있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건 음호부와 관련 있을 확률이 높았다.
사실 금광요가 음호부로 뭘 하든 보통은 나와 상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건 다르지. 나는 이미 섭회상이 음호부와 뭔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금광요도 그걸 알까? 그래서 여기로 저들을 보낸 걸까? 가슴이 아플 정도로 빠르게 쿵쿵 뛰었다. 섭회상이 음호부에 손 댔다는 걸 금광요가 알면 그 사실을 가만히 묵혀둘 리가 없다. 언젠가는 사용할 것이다. 섭회상은 자기 목숨이 벼랑끝에 걸렸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까부터 자꾸 옆에서 뭐라고 종알거리고 있었다. 굳어버린 고막을 풀고 그의 말을 듣기 위해 나는 입 안의 살을 악물었다. 그러자 시큰거리는 고통이 번지면서 웅웅거림에 지나지 않던 섭회상의 말소리가 다시금 또렷해졌다.
-그래서, 들어가 볼래?
-예?
-제도당보다 더 깊숙하게는 나도 다시 들어갈 자신 없지만, 제도당까지는 괜찮아.
애초에 제도당이 정확히 뭐 하는 곳인데? 알 방도가 없었지만, 나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는 편을 택했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조금 더...... 알아야 했다. 나는 반쯤 넋이 나간 채 섭회상이 이끄는 대로 걸었다. 그러자 어느새 무덤이 입을 벌리고 섭회상과 나를 맞아주고 있었다. 섭회상이 무덤 안에 한 발짝 걸치고 나를 돌아보았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입술을 꾹 깨물었다. 섭회상이 말했다.
-괜찮기를 바라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조심해. 예민한 사람은 여기를 못 견뎌하거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섭회상을 따라 어둠 속으로 발을 들였다.
섭회상이 손가락을 튕기자 내 머리 위를 시작으로 복도에 있던 촛대들에 주루룩 불이 밝았다. 복도는 길지 않았다. 바로 저기 제도당이라는 현판이 보였다. 무덤 안의 공기는 습하고 차가웠고, 희미한 흙 냄새와 이끼 냄새가 풍길 뿐 보통 무덤에 기대할 법한 퀘퀘한 냄새가 없어 어쩐지 기묘한 느낌을 주었다. 사실 지하로 들어온 것도 아닌데, 지난 번 추락했던 폐광산 밑바닥보다 더 아래까지 내려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걷다 보면 발소리뿐 아니라 숨소리까지 사방에 울려서, 들어온 사람을 저절로 숨막히게 했다. 나보다 몇 발짝 앞서 걷던 섭회상이 제도당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별 건 없어. 다 관일 뿐이라. 하지만 여기는 청하 섭씨의 심장과도 같은 곳이니, 너에게 한 번쯤은 보여주고 싶었어.
크고 둥그렇게 뚫려있는 공간은 무덤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동굴 같았다. 나는 예민한 사람은 이곳을 견디지 못한다는 섭회상의 말을 문득 알 것 같았다. 분명 텅 비어있는 곳인데, 사람이 너무 많았다. 마치 지옥을 밑에 두고 얼음판 위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죽어도 죽지 못한 혼백들 위에 얇게 한 겹 덮어씌운 고요와 평화는 기묘했고 또 동시에 살 떨리게 연약했다. 어지러웠지만 차마 벽을 짚을 수도 없었다. 허공에 매달린 관들을 피해 숨을 고르고 있는데, 섭회상이 갑작스레 물었다.
-이제 내가 싫니?
-아니요?
나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차라리 해가 서쪽에서 뜨라지, 내가 섭회상을 싫어하게 될 일은 없었다. 나는 그냥 본능적으로 그걸 알았다. 정신이 확 든 채로 섭회상을 바라보는데, 그는 그저 미소만 짓고 있었다. 어슴푸레한 빛이 창백한 얼굴에 비쳐 묘한 광택을 빚어냈다. 나는 섭회상이 나에게 보내는 시선의 의미를 이해했다. 그는 순백의 순진한 도련님이 아니다. 하지만 뭐 어쩌란 말인가? 섭회상은 섭회상이었고 내게는 그것만으로도 과분했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섭회상이 말했다.
-여기 역대 모든 종주의 도가 다 안장되어있는 건 아니야. 내가 오래 전에 했던 말 기억해? 부정세의 주인이 사라져서 돌아오지 않는다고. 형님은 여기에도 청하 섭씨의 선산에도 안 계시거든. 그러니 엄밀한 의미에서 전대 종주라고 할 수는 없지 않니?
나는 그 말을 잠시동안 곱씹었다.
그리곤 불현듯 깨달았다. 섭명결이 지금 어디 있을지.
도무덤 앞의 시체들과, 금린대에서 사라진 섭명결의 시체와, 그의 도와, 음호부. 거기 이어진 실들이 다 어디로 향하는지. 눈을 깜박이는 사이 마치 벼락이 내리치는 것만 같았다. 나는 내 눈 앞에 있는 흰 얼굴을 그저 바라보았다. 그 얼굴이 가까이 다가와 내 귓가에 숨결이 스칠 때까지.
-하지만 형님이 아직 부정세의 주인이시라면...... 그러면 나는 뭘까?
나를 끌어안는 이에게,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 뒤로 내가 어떻게 도무덤에서 나와 행로령을 벗어났는지는 기억 속에 흐릿하다. 쨍하니 내려쬐는 햇빛에 머리가 한 번 핑하니 돌았고, 정신이 조금 들었을 때에는 이미 사람이 북적거리는 대낮의 길거리였다. 섭회상이 이제 청하를 유람하자며 나를 끌어당겼을 때, 나는 그에게 붙잡힌 옷깃을 당겨 뺐다.
-저는 먼저 부정세로 돌아가겠습니다.
-뭐?
-몸이 좋지 않아요.
-그럼 나도 같이 가. 아니면 혹시 모르니 다른 수사들이라도......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목소리만은 단호하게 나왔다.
-저만 먼저 돌아가 보겠습니다. 종주께서는 계획하신 대로 하루 보내세요.
섭회상은 머뭇거리며 나를 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부채로 얼굴을 반쯤 가리며 물었다.
-그럼 부정세에서 보는 거지? 밀아.
그 목소리가 조금 떨렸던 것도 같다.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잠시 동안 섭회상의 얼굴을 눈에 담았고, 그에게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밝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가 미적미적 다른 수사들과 사람들 사이로 사라지는 걸 지켜보다가 곧장 몸을 돌렸다.
난릉은 청하와 가까이 있어 어검을 하면 금방이었다. 그게 금광요가 남희신 대신 섭명결에게 금을 타주겠다며 부정세에 뻔질나게 드나들던 이유였다. 검에 올라탄 뒤로는 주위의 아무것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뺨에 스치는 바람 외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생각을 해야 했다.
그러나 막상 금린대에 도착했을 때, 내 머리는 차라리 더 과포화 상태가 되었다면 되었지 아무것도 정리된 게 없었다. 나는 내가 늘 들어가던 금린대의 작은 문 안으로 발을 들였고, 나를 알아본 가복이 금광요가 마침 금린대에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나는 항상 금광요와 독대하던 그 방으로 가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그 방의 주인을 기다렸다.
방은 작았지만 늘 그렇듯 채광이 좋았고, 먼지 한 톨 없이 정갈했다. 광택이 도는 나무 탁상 위에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찻주전자와 찻잎, 그리고 찻잔이 놓였다. 나는 희뿌연 김을 뿜는 찻주전자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금광요를 알고 지낸 게 벌써 스무 해가 넘어가지만, 나는 금광요가 나를 만나지 않을 때 이 방을 어떤 용도로 쓰는지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알려고 한 적이 없었다. 고개를 돌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다 보면, 어느 순간 가까워지는 발소리와 함께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릉이 대뜸 대범산에 가겠대서 이야기를 나누느라 조금 늦었네. 미안. 그나저나 무슨 일이야? 네가 직접 나를 다 찾아오고. 몸은 좀 괜찮아?
나는 고개를 돌려 내가 아주 잘 아는 그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단사를 찍은 것 외엔 처음 만났을 때와 크게 달라진 것 없는 흰 얼굴이 거기 있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항상 기민하게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를 나는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내 침묵이 이어지자 그의 눈매가 서서히 긴장으로 굳어졌다. 그러나 그의 입꼬리는 여전히 예쁘게도 올라가 있었다. 평소 같았다면 나는 그가 그 표정을 짓게 내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무슨 말이라도 해서, 평온한 분위기를 유지하려는 그의 노력에 부응했을 것이다. 그러나 더는 그럴 여력이 없었기에, 나는 입을 열어 그의 모든 노력을 단번에 진창에 처박아 버렸다.
-섭명결. 네가 죽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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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방으로 돌아가 그대로 잠이 들었다. 사실 그대로 잠이 들었다고 하기는 어렵다.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오랫동안 뒤척거렸으니까. 예컨대, 육 년 전 도무덤이 뭔가 어긋났던 게 음호부 때문이었을까? 음호부라 하면 위무선의 작품이었고 위무선 사후 음철로 장난친 건 내가 알기로 설양 뿐이었다. 그러고보니 설양이 부정세에 갇힌 적이 있댔지. 설양에 대해 전해들었던 이야기를 생각하면 청하 터뜨리겠다고 그런 짓을 하는 것도 그리 개연성 없는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그나저나 설양은 어떻게 되었더라? 금광요가 결국 그를 처리했다는 소식을 저잣거리에서 듣기는 했는데 정작 금광요에게 물은 적이 없었다.
섭회상이 음호부에 관심을 가진 게 섭명결을 되살리겠다는 마음 때문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도무덤에서 그런 일을 겪고 그에 대해 더 조사하고자 한 거라면, 음호부에 관한 문서를 가지고 있는 게 이해가 갔다. 생각해보면 도무덤 속에 있는 악귀들이 음호부보다 덜하리라는 법도 딱히 없었다. 솔직히 나는 섭회상이 정도를 쓰든 사도를 쓰든 뭘하든 상관 없었지만, 그게 혹시라도 그의 몸을 상하게 할까봐 걱정이 되었다. 그가 정말 주화입마라도 오는 날엔...... 부정세 터뜨리고 자살하련다. 정말로.
주화입마 하니 또 생각나는 얼굴이 있었다. 그...... 그. 나는 여전히 그의 이름을 몰랐다. 섭회상은 아니라고 했지만, 그는 분명 나에게 가슴팍을 걷어차이기 전까지는 멀쩡했다. 얼마 전만 해도 상태가 괜찮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단시간 빠르게 주화입마가 올 수 있었던 거지? 수사 봉급 생각하면 효과가 그리 단기간에 올 정도로 엄청 비싼 약을 사먹진 못했을 텐데, 분명 조금 이상한 일이었다.
타고난 기질이나 수련 경지 외에 따로 주화입마를 앞당기는 요인 같은 것이라도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눈을 깜박이던 나는, 어느 순간 아침 해가 뜨는 것을 느끼며 뻑뻑한 눈을 비볐다. 서둘러 준비를 마치고 방을 나서야 했다. 아침 일찍 가서 일을 마무리하고 청하 시내를 잠시 거쳤다가 부정세로 돌아오는 게 섭회상의 계획이었기에, 해가 막 뜬 시간임에도 이미 모든 것이 다 준비되어 있었다.
행로령은 부정세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어 어검을 하면 금방이었다. 분명 부정세를 출발할 때만 해도 화창하던 하늘이 난장강이라도 온 것마냥 어둡고 침침한 건 따라서 여기 정말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말이었다. 섭씨에 오래 있던 수사와 그렇지 않은 수사가 여기서 바로 티가 났는데, 전자는 아무렇지 않아보이는 반면 후자는 척 보기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도 섭회상이 태평한 것을 보곤 어느 정도 마음을 놓는 듯했다.
어느덧 일행이 안개 자욱한 가운데 멈춰서 있는데, 섭회상은 매우 숙련된 태도로 부적을 꺼내어 뭔가를 읊었다. 이윽고 안개가 빠르게 걷히고, 풀이 무성하긴 하지만 분명 주변과 구별된 흙길이 하나 나타났다.
-미진이야. 섭씨 사람이 아니면 이 진을 깰 수 없어. 아주 경지 높은 수련자라면 예외겠지만.
섭회상이 부채로 얼굴을 가리며 설명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수사들과 함께 길을 걸어나가려는데, 갑자기 섭회상이 내 손을 잡았다. 이젠 진짜 숨기지도 않냐고. 괜히 먼저 걸어나가는 수사들의 눈치를 보는데, 섭회상은 눈치가 없는 것도 아니면서 꿋꿋이 내 손을 붙잡았다.
내 손을 붙잡은 희고 고운 손을 보다 보면, 섭회상이 여자였다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랬다면 이러는 게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그랬다면 금광요가 나에게 웬 놈팽이를 데려다 섭회상과 결혼시키라고 했을 거고 그럼 나는 진작에 때려치울 수밖에 없었겠지. 섭회상 데리고 튀었을 지도.
함께 도망이라.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섭회상을 따라 걸으며 나는 무성한 잡초들을, 그리고 나무들을 둘러보았다. 겨울이 다 되어가는 가을, 나무 대부분은 갈색으로 말라 비틀어져 있었고 그다지 색이 예쁘지는 않은 낙엽을 발치에 떨구고 있었다. 그걸 보며 나는 섭회상의 혼인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부정세에 보내진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모른 척 한 적은 있어도, 한 번도 잊은 적 없었다. 그건 꼭 목에 걸린 가시 같아서 잊을 만하면 따끔거렸다. 섭회상은 아마도 가남 성씨 낭자와 혼인할 것이다. 금광요가 그렇게 마음을 먹은 이상 다른 결과가 나오기는 힘들었다. 꼭 그 낭자가 아니더라도, 나는 섭회상이 좋은 사람을 만나 잘 살았으면 하고 진심으로 바랐다. 나와의 관계야 사실 뭐, 내가 떠나면 끝 아니겠는가. 섭회상도 그 사실에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다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괜히 저 어디야, 연화오 전대 종주 꼴 나기 전에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질 자신도 내게 충분히 있었고.
발치에 밟히는 낙엽이 유독 버석하게 느껴졌다. 내 예상대로라면 다음달 쯤 섭회상은 그 낭자와 한 번 더 선을 볼 거다. 별일 없으면 내년 중으로 둘은 정혼할 테고, 섭회상의 나이가 적은 편은 아니니 아마 곧바로 혼인하겠지. 그리고 나는 섭회상이 그 전에 여기를 떠난다. 흠 잡을 데 없는 계획이다.
산작약은 보고 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하지만 나는 내가 이미 충분히 욕심을 부렸다는 걸 알고 있었다.
문득 금광요에게 미안해졌다. 그에게 소식을 전하지 않은 지 벌써 꽤 되었던 것이다. 저번에 동굴에서 겨우 죽고 살아났을 때 금광요가 어떻게 알고선 괜찮냐고 연락을 했었고, 나는 나도 괜찮고 섭회상의 건강도 당분간 신경쓰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답장을 했다. 그게 벌써 한 달 전이니, 이제 또 슬슬 연락을 해야 했다. 행로령에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해도 좋을까? 저번에 금광요는 분명 행로령에 더 관심 갖지 말라고 했었다.
왜? 정말 음호부가 엮인 문제일까? 음호부하니 다시 또 생각이 났다.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이릉노조의 주술. 섭회상은 섭명결을 정말 되살리고 싶은 걸까?
그럴 수 있다고 믿나?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햇빛을 피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자 갑자기 머리 위로 그늘이 생겼다. 내 이마 위에 드리운 것은 다름 아닌 섭회상의 부채였다. 고개를 돌리자 섭회상이 말없이 웃고 있었다. 부채 밑에서 본 그의 얼굴은 어쩐지 조금 창백했다. 자기나 햇빛을 가릴 것이지, 무슨 나를 가려주겠다고. 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손에서 부채를 뺏어 그의 얼굴쪽으로 부쳐주었다. 섭회상이 웃었다.
-거의 다 왔어.
섭회상이 내 손을 다시 한 번 꼭 쥐었다. 나는 그저 맞잡은 손을 의아한 얼굴로 내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이 사람은 오늘 또 왜 이러지. 생각하는 사이 부채를 뺏기고, 나는 저 멀리 버티고 선 바위덩어리로 시선을 옮겼다.
행로령의 식인 보루. 사람들은 분명 그렇게 말했었고 그게 틀린 말은 아닌 듯싶었다. 원래 보루라 하면 부정세 같은 요새 그 자체를 일컫는 말인데, 저기 보이는 저 건축물은 정말 부정세를 그대로 축소해 놓은 듯한 생김새였다. 아니면 반대로 부정세가 저 무덤의 확대판일지도 모르지. 부정세 뒷편의 묘지를 생각하자 어쩐지 마음 한 켠이 서늘해졌다. 언젠가 섭회상의 몸은 그곳에, 도는 이곳에 묻힐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말 그대로 질렸지만, 동시에 이곳이 말 못하게 애틋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나야 죽어서 어디 무덤도 없을 거고...... 아니다. 금광요가 만들어줄 수도 있겠구나. 하여튼 흔적 없이 이 세상을 뜰 거지만 섭회상은 이변이 생기지 않는 이상 언제까지고 여기 있을 것이다.
-다 왔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며 멈춰 섰다. 정말 어느새 보루가 가까워져서 내 머리 위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섭회상이 부채를 흔들거리며 수사들에게 명령했다.
-다들 주위를 한 바퀴 돌면서 뭔가 이상한 점 없는지 한 번 살펴 보거라. 무덤을 건드리지 않게 조심들 하고.
수사들은 슬슬 움직이면서 어쩐지 다들 나를 한 두번씩 흘깃거렸다. 왜 그러나 해서 봤더니, 시발. 까먹고 있었네. 아직 나는 섭회상에게 손이 붙잡힌 채였다. 얼굴이 벌개진 채로 섭회상의 손을 놓으려는데, 섭회상이 놓아주지 않았다. 나는 결국 최대한 복화술을 구사했다.
-또 왜 이러세요?
-뭐가?
-저도 일을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나를 지키는 게 오늘 네 업무야. 어차피 너는 여기가 처음이라 봐도 모르잖니.
쟤네들 중 절반 이상이 여기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인데요? 그런 말을 하려다가 나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다른 수사들 보기엔 꼴불견일 것이다. 그래서 그냥 섭회상에게 손을 내어준 채, 수사들이 뿔뿔이 흩어질 때까지 그냥 가만히 있었다.
-마흔 네 번째야.
-네?
오늘따라 섭회상은 뜻모를 말을 많이도 했다. 살짝 걱정이 될 정도였다.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섭회상은 파리한 얼굴로 웃어보였다.
-섭씨 종주들은 삼 개월마다 한 번씩 여기 와 보게 되어있거든. 그러니까 내가 종주가 된 뒤로 이런 식으로 오게 된 건 오늘이 딱 마흔 네 번째야.
그리 반가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섭명결이 죽은 지 십 년 넘게 지났다는 사실이 내포된 건 둘째 치고, 하필이면 4가 두 번이니, 미신에 별로 관심은 없는 나라고 해도 굳이 들어서 기쁠 리도 없었다.
무엇보다 섭회상이 전혀 기뻐 보이지 않았다. 그는 계속 물끄러미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무 그늘이 드리운 그의 얼굴을 마주보며, 나는 그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그때는 무더운 여름이었지만, 가을 바람이 차갑게 불어와 그의 머리카락이 흩날리자 나는 마치 그를 다시 또 처음 만나는 것만 같았다. 겨울에도 봄에도 그를 계속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하던 차, 멀리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더 생각할 겨를 없이 나는 검집에 손을 댄 채 섭회상의 앞을 막아섰다. 비명이 이어지지도, 쇠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나지도 않는 것을 보면 수사들이 공격당했다기보다는 그들이 뭔가를 발견했다는 게 더 이치에 맞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나는 경계를 풀지 않았다. 섭회상이 내 뒤에서 기웃대는 게 느껴졌다.
-무슨 일이지?
-글쎄요. 기다리죠.
심각한 일이든 아니든, 누군가는 섭회상에게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올 것이었다. 내 생각대로, 얼마 안 가 수사들이 우르르 몰려와 섭회상에게 보고를 올렸다.
-보고 올립니다, 종주. 보루는 지난 번 수리한 그대로입니다. 잠시 소란이 있었던 건 어린 수사들이 지난 번 처리한 시체를 보고 비명을 지른 것뿐이니, 심려치 않으셔도 됩니다.
보고의 앞 부분은 나도 알아들었지만, 뒷부분은 아니었다. 일단 지난 번 처리한 시체라는 표현 자체가 이해가 안 갔고, 애들이 그걸 어떻게 발견하곤 비명을 지른 건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걸 왜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는지도. 혼란스러움이 얼굴에 다 드러났는지, 아니면 어차피 자기가 한 번 더 살펴볼 심산이었는지 섭회상이 소리나게 부채를 펴들며 말했다.
-그렇구나. 그러면 나와 밀이가 마지막으로 한 번 둘러보고 올 테니 너희는 여기 있거라.
나는 수사들의 시선을 피하며 섭회상을 따라나섰다. 이젠 진짜 수진계 떠야 한다. 비록 본명이 아니래도 이름이고 얼굴이고 다 팔렸으니 방법이 없다. 그런 쓰잘데기 없는 생각을 할 때쯤. 오래된 시체 특유의 매캐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나도 보고만 들었지 눈으로 확인은 못 했는데, 저기 있네.
섭회상의 부채 끝이 무심히 가리킨 곳에는 스무 구 정도의 백골이 널부러져 있었다. 방치된 지 족히 두 달은 되었을 시체들은 시체라고 부르기가 무색할 정도였다. 스무 구가 전부 이렇게 백골이 되어 있다는 건 그들이 독 같은 것에 일제히 당했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 독이 그들을 단번에 녹인 게 분명했다. 본래대로라면 시체에 벌레가 꼬여 참혹한 몰골이었어야 했는데, 벌레가 근처에 조금도 없었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가끔 도무덤을 잘못 건드리면 이렇게 독으로 죽게 되거든. 경고용으로 둔 거야.
섭회상의 설명을 들으며 나는 그저 끈적한 검은 액체에 젖은 백골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햇빛을 받은 건예자들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으리라. 용케 녹지 않은 저 검푸른 옷만 아니라면.
저 옷을 나는 알았다. 빤히 천조각을 바라보는 사이 내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물에 빠진 사람의 귀에 들리는 것처럼 내 목소리는 어슴푸레하게 들렸다.
-저들이 누구인지는 파악하셨습니까?
-아니. 아마 전문 도굴꾼이겠지, 뭐.
원래였다면 지금쯤, 아니 진작에 내가 섭회상의 눈을 가렸겠지. 그는 피를 보고 기절한 경력이 있으니까. 하지만 그 순간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섭회상은 상한 음식 냄새에는 헛구역질을 해도 시체 냄새에는 멀쩡한 수진계 윗사람들 중 하나였다. 피를 보면 쓰러지는 겁쟁이, 그건 적어도 오늘의 섭회상은 아니었다. 나는 왜 그러냐는 듯 나를 빤히 바라보는 섭회상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입 안에 모래가 가득 찬 것만 같았다. 섭회상이 내 손을 더 꼭 쥐어왔지만 거기에 반응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저기 있는 저 시체들. 저 시체들의 주인은 금광요였기 때문이다.
금광요가 저들을 여기로 보냈다.
*
금광요는 나에게 좋은 사람이었지만, 나에게만 좋은 사람이었다. 우리의 관계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라면 아마 그렇게 될 것이다. 달리 말해 나는 그를 위해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으며 그에게는 그런 일을 할 사람이 필요했다. 나처럼 정체를 숨길 것이 아니라, 아예 그 존재조차 드러나선 안 되는 자들이. 그렇게 하여 구성된 자객단이랄까, 결사대랄까 하는 이들을 나는 아주 가끔 마주쳤었다. 당연히 그들은 주인을 특정할 수 없게 평범한 살수처럼 얼굴을 가리고 검은 옷을 입었지만, 나는 그들을 구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금씨 바깥에서는 거의 나만 그들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었다. 섭회상만 봐도 그들을 도굴꾼 취급하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금광요가 저질렀을 악행이 몇 개인데 잠잠한 걸 보면 금광요의 사람들이 꼬리 잡혀준 적이 아직 없다는 거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들의 정체 그 자체가 아니다. 중요한 건 그들이 왜 여기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금광요가 왜 청하 섭씨의 도무덤에 그들을 보냈단 말인가? 내가 알기로 금광요는 정말 중요한 일이 아니고선 이들을 부리지 않았다. 스무 명이나 여기 보냈다는 건 금광요가 정말 절대 들켜서는 안 될 무언가가 다름 아닌 이 곳에 있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건 음호부와 관련 있을 확률이 높았다.
사실 금광요가 음호부로 뭘 하든 보통은 나와 상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건 다르지. 나는 이미 섭회상이 음호부와 뭔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금광요도 그걸 알까? 그래서 여기로 저들을 보낸 걸까? 가슴이 아플 정도로 빠르게 쿵쿵 뛰었다. 섭회상이 음호부에 손 댔다는 걸 금광요가 알면 그 사실을 가만히 묵혀둘 리가 없다. 언젠가는 사용할 것이다. 섭회상은 자기 목숨이 벼랑끝에 걸렸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까부터 자꾸 옆에서 뭐라고 종알거리고 있었다. 굳어버린 고막을 풀고 그의 말을 듣기 위해 나는 입 안의 살을 악물었다. 그러자 시큰거리는 고통이 번지면서 웅웅거림에 지나지 않던 섭회상의 말소리가 다시금 또렷해졌다.
-그래서, 들어가 볼래?
-예?
-제도당보다 더 깊숙하게는 나도 다시 들어갈 자신 없지만, 제도당까지는 괜찮아.
애초에 제도당이 정확히 뭐 하는 곳인데? 알 방도가 없었지만, 나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는 편을 택했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조금 더...... 알아야 했다. 나는 반쯤 넋이 나간 채 섭회상이 이끄는 대로 걸었다. 그러자 어느새 무덤이 입을 벌리고 섭회상과 나를 맞아주고 있었다. 섭회상이 무덤 안에 한 발짝 걸치고 나를 돌아보았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입술을 꾹 깨물었다. 섭회상이 말했다.
-괜찮기를 바라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조심해. 예민한 사람은 여기를 못 견뎌하거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섭회상을 따라 어둠 속으로 발을 들였다.
섭회상이 손가락을 튕기자 내 머리 위를 시작으로 복도에 있던 촛대들에 주루룩 불이 밝았다. 복도는 길지 않았다. 바로 저기 제도당이라는 현판이 보였다. 무덤 안의 공기는 습하고 차가웠고, 희미한 흙 냄새와 이끼 냄새가 풍길 뿐 보통 무덤에 기대할 법한 퀘퀘한 냄새가 없어 어쩐지 기묘한 느낌을 주었다. 사실 지하로 들어온 것도 아닌데, 지난 번 추락했던 폐광산 밑바닥보다 더 아래까지 내려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걷다 보면 발소리뿐 아니라 숨소리까지 사방에 울려서, 들어온 사람을 저절로 숨막히게 했다. 나보다 몇 발짝 앞서 걷던 섭회상이 제도당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별 건 없어. 다 관일 뿐이라. 하지만 여기는 청하 섭씨의 심장과도 같은 곳이니, 너에게 한 번쯤은 보여주고 싶었어.
크고 둥그렇게 뚫려있는 공간은 무덤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동굴 같았다. 나는 예민한 사람은 이곳을 견디지 못한다는 섭회상의 말을 문득 알 것 같았다. 분명 텅 비어있는 곳인데, 사람이 너무 많았다. 마치 지옥을 밑에 두고 얼음판 위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죽어도 죽지 못한 혼백들 위에 얇게 한 겹 덮어씌운 고요와 평화는 기묘했고 또 동시에 살 떨리게 연약했다. 어지러웠지만 차마 벽을 짚을 수도 없었다. 허공에 매달린 관들을 피해 숨을 고르고 있는데, 섭회상이 갑작스레 물었다.
-이제 내가 싫니?
-아니요?
나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차라리 해가 서쪽에서 뜨라지, 내가 섭회상을 싫어하게 될 일은 없었다. 나는 그냥 본능적으로 그걸 알았다. 정신이 확 든 채로 섭회상을 바라보는데, 그는 그저 미소만 짓고 있었다. 어슴푸레한 빛이 창백한 얼굴에 비쳐 묘한 광택을 빚어냈다. 나는 섭회상이 나에게 보내는 시선의 의미를 이해했다. 그는 순백의 순진한 도련님이 아니다. 하지만 뭐 어쩌란 말인가? 섭회상은 섭회상이었고 내게는 그것만으로도 과분했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섭회상이 말했다.
-여기 역대 모든 종주의 도가 다 안장되어있는 건 아니야. 내가 오래 전에 했던 말 기억해? 부정세의 주인이 사라져서 돌아오지 않는다고. 형님은 여기에도 청하 섭씨의 선산에도 안 계시거든. 그러니 엄밀한 의미에서 전대 종주라고 할 수는 없지 않니?
나는 그 말을 잠시동안 곱씹었다.
그리곤 불현듯 깨달았다. 섭명결이 지금 어디 있을지.
도무덤 앞의 시체들과, 금린대에서 사라진 섭명결의 시체와, 그의 도와, 음호부. 거기 이어진 실들이 다 어디로 향하는지. 눈을 깜박이는 사이 마치 벼락이 내리치는 것만 같았다. 나는 내 눈 앞에 있는 흰 얼굴을 그저 바라보았다. 그 얼굴이 가까이 다가와 내 귓가에 숨결이 스칠 때까지.
-하지만 형님이 아직 부정세의 주인이시라면...... 그러면 나는 뭘까?
나를 끌어안는 이에게,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 뒤로 내가 어떻게 도무덤에서 나와 행로령을 벗어났는지는 기억 속에 흐릿하다. 쨍하니 내려쬐는 햇빛에 머리가 한 번 핑하니 돌았고, 정신이 조금 들었을 때에는 이미 사람이 북적거리는 대낮의 길거리였다. 섭회상이 이제 청하를 유람하자며 나를 끌어당겼을 때, 나는 그에게 붙잡힌 옷깃을 당겨 뺐다.
-저는 먼저 부정세로 돌아가겠습니다.
-뭐?
-몸이 좋지 않아요.
-그럼 나도 같이 가. 아니면 혹시 모르니 다른 수사들이라도......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목소리만은 단호하게 나왔다.
-저만 먼저 돌아가 보겠습니다. 종주께서는 계획하신 대로 하루 보내세요.
섭회상은 머뭇거리며 나를 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부채로 얼굴을 반쯤 가리며 물었다.
-그럼 부정세에서 보는 거지? 밀아.
그 목소리가 조금 떨렸던 것도 같다.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잠시 동안 섭회상의 얼굴을 눈에 담았고, 그에게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밝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가 미적미적 다른 수사들과 사람들 사이로 사라지는 걸 지켜보다가 곧장 몸을 돌렸다.
난릉은 청하와 가까이 있어 어검을 하면 금방이었다. 그게 금광요가 남희신 대신 섭명결에게 금을 타주겠다며 부정세에 뻔질나게 드나들던 이유였다. 검에 올라탄 뒤로는 주위의 아무것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뺨에 스치는 바람 외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생각을 해야 했다.
그러나 막상 금린대에 도착했을 때, 내 머리는 차라리 더 과포화 상태가 되었다면 되었지 아무것도 정리된 게 없었다. 나는 내가 늘 들어가던 금린대의 작은 문 안으로 발을 들였고, 나를 알아본 가복이 금광요가 마침 금린대에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나는 항상 금광요와 독대하던 그 방으로 가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그 방의 주인을 기다렸다.
방은 작았지만 늘 그렇듯 채광이 좋았고, 먼지 한 톨 없이 정갈했다. 광택이 도는 나무 탁상 위에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찻주전자와 찻잎, 그리고 찻잔이 놓였다. 나는 희뿌연 김을 뿜는 찻주전자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금광요를 알고 지낸 게 벌써 스무 해가 넘어가지만, 나는 금광요가 나를 만나지 않을 때 이 방을 어떤 용도로 쓰는지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알려고 한 적이 없었다. 고개를 돌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다 보면, 어느 순간 가까워지는 발소리와 함께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릉이 대뜸 대범산에 가겠대서 이야기를 나누느라 조금 늦었네. 미안. 그나저나 무슨 일이야? 네가 직접 나를 다 찾아오고. 몸은 좀 괜찮아?
나는 고개를 돌려 내가 아주 잘 아는 그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단사를 찍은 것 외엔 처음 만났을 때와 크게 달라진 것 없는 흰 얼굴이 거기 있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항상 기민하게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를 나는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내 침묵이 이어지자 그의 눈매가 서서히 긴장으로 굳어졌다. 그러나 그의 입꼬리는 여전히 예쁘게도 올라가 있었다. 평소 같았다면 나는 그가 그 표정을 짓게 내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무슨 말이라도 해서, 평온한 분위기를 유지하려는 그의 노력에 부응했을 것이다. 그러나 더는 그럴 여력이 없었기에, 나는 입을 열어 그의 모든 노력을 단번에 진창에 처박아 버렸다.
-섭명결. 네가 죽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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