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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05 22:13
진정령, 난백 ㅅㅍ 특히 난백 ㄱㅅㅍㅈ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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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자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고 섭회상은 다음날 아침 나에게 말해주었다.

-흔한 일은 아니야. 격리 공간은 분명 보안이 철저하거든. 하지만 이제 와서 이런 이야기 해봐야 소용 없겠지.내가 예상 못 한 게 맞아. 내 잘못이야.

아니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잘못이라고 말하고 싶지도 않아서 조심스럽게 그의 팔 위에 손을 얹었다. 섭회상이 말없이 내 손을 붙들었다.

침묵 속에서, 나는 문득 묻고 싶었다. 주화입마가 올 게 뻔한 인간을 왜 부정세에 남겨두는 거냐고. 하지만 생각해보니 그들이 그렇게 된 게 도를 수련한다는 청하 섭씨 기조 때문인데, 그들을 내쫓으면 수진계 가문이 아니라 그냥 살인 집단 되는 거였다.

애초에 왜 이런 자살 집단이 버젓이 존재하는 걸까? 거의 수동 자살 공동체에 더 가깝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나는 어제는 미처 느낄 수 없었던 석연찮음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었다.

-저 때문은 아닐까요?

내일 행로령에 가는 일로 이것 저것 책을 뒤적이던 섭회상이 멈칫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제가 걷어찬 다음부터 이상해진 거잖아요. 그 전까지는 분명 멀쩡했습니다. 총령님 말씀은 약 때문이라고 하는데...... 뭐 얼마나 대단한 영약을 먹어야 이렇게 단기간에 심해집니까?

섭회상은 잠깐동안 말이 없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주화입마란 건 몸의 기혈이 한 번 흐트러졌다고 오는 게 아니야.

-하지만......

-네 잘못이 아니야. 잘못이 있다면 자기가 잘못하고선 턱없는 복수심과 욕심을 품은 그 자에게 있겠지.

그러더니 그는 잠시 동안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약이 유통되는 걸 막지 않은 나에게 있거나.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종주님이 그걸 어떻게 아시고 막습니까.

물론 종주라면 그런 거 알아서 막아야 하는 게 맞긴 하지만...... 그건 섭회상에게 너무 많은 걸 기대하는 거였다. 그리고 그런 거 막아도 먹을 놈은 다 찾아 먹는다.

좀 억지이려나. 그래도.

-알았다면 막으셨을 거잖아요. 그게 중요하죠.

내 말에, 섭회상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쓰러지듯 몸을 숙였다. 나는 생각하던 걸 다 멈추고 그를 부축할 수밖에 없었다. 어제 너무 무리했던 걸까? 기겁한 나는 그의 낯빛을 살피려 했지만 그의 손이 얼굴을 가리고 있는 터라 볼 수가 없었다.

-왜 그러세요? 어디가 아프세요?

-그냥...... 속이 안 좋아.

나는 그를 조심조심 의자에 앉혔다. 그가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아래로 늘어진 그의 머리카락을 바라보면서 나는 입술을 씹었다. 요즈음 그는 회색 옷을 즐겨입었다. 옷이야 당연히 흠잡을 데 없지만, 옷 색이 진해질수록 섭회상의 얼굴이 창백해보이니 그게 문제였다. 섭회상은 비리비리한 게 기본 상태였기에, 그가 진짜 몸이 더 안 좋아져서 창백해진 것인지 아니면 내가 막눈이라 착각하는 것인지 알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뭣보다도, 어제 그 일을 겪었는데 내가 섭회상을 걱정 안 할 수 없잖은가. 나는 그가 마침내 고개를 들 때까지 그의 옆에 그대로 굳어있었다. 반쯤 초점이 나간 눈으로 나를 올려다본 섭회상이 픽 웃었다.

-입술 그만 깨물라니까.

그의 손가락이 내 입술을 가볍게 스쳤다. 그 손길을 따라 내내 깨물고 있던 아랫입술을 뱉었지만, 가슴 속 걱정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나는 말없이 섭회상의 안색만 살폈다. 섭회상은 내게서 시선을 돌려 허공을 바라보았다. 오전 햇빛이 투명하게 그의 얼굴을 비췄다.

-알고도 안 막았을 거라면, 너는 내가 싫어질까?

내가 잘못 들었나 싶어 미처 대답 못하고 눈만 깜박이는 사이, 섭회상이 여전히 허공에 시선을 둔 채 나를 불렀다.

-밀아.

-네?

-사람을 죽여본 적 있니?

갑작스런 질문에 잠시 굳었던 나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사일지정 이후로는 거의 없지만, 없진 않죠.

-사람을 죽이고 나면 기분이 어떻니? 아무렇지도 않아?

나는 아주 대략적으로 이 대화의 흐름을 파악했다.

-아뇨. 당연히 힘듭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그때로 다시 돌아가도 저는 똑같은 선택을 할 텐데요.

-정말? 사람을 죽이고 나서 한 번도 후회해본 적 없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종주님은 사일지정이든 전쟁이든 참가한 적 없으시죠? 그런 데 나가면 제 의지로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거든요. 그냥 날아오는 검을 막다 보면 제 검 끝이 상대편 살을 가르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후회고 뭐고 할 겨를조차 없어요. 백 번 돌아가도 백 번 저는 거기서 검을 틀었을 거니까. 마찬가지 거기서 제가 죽었대도 별로 억울할 건 없습니다. 전쟁이란 게 그런 거니까.

잠시 침묵하던 섭회상이 물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넌 한 번도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 죽여본 적 없다는 거구나.

말이 그렇게 되나 싶어 나는 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섭회상이 시선을 내려 나를 보았다.

-인과응보를 믿니?

왜 자꾸 이런 질문을 할까. 그의 마음이 괴로운 게 느껴졌다. 그러나 내가 그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답이나 성실히 하기로 했다.

-네. 믿습니다. 그건 확률이니까요.

-무슨 뜻이야?

-그냥...... 말 그대로인데요? 내가 사람들을 건드리고 다녔다면 복수당할 확률이 높겠죠. 사람들에게 이것저것 뿌리고 다녔다면 보답받는 확률이 높을 거고요. 하지만 어디까지나 확률은 확률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착한 사람은 일찍 죽고, 오히려 인간 말종일수록 오래 산다는 믿음이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금광선이다. 금광선은 쉰 살 좀 넘어서 복상사로 죽었는데, 쉰 살이 오래 산 거냐고 물으면 그건 좀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수진계 종주 평균 나이를 생각하면 오래산 거 맞다. 심지어 색사에 환장한 놈이었으니, 복상사로 뒤진 게 나름 호상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금광선은 죽으면서 종주로서의 명성만은 확실히 날렸다. 살아서 뭐 얼마나 애썼든, 결국 꼴사납게 복상사 당한 인간으로 남은 것이다. 그걸 생각하면 세상이 좀 공평한 것 같기도 하다.

금광선이 그렇게 죽고, 그 부인마저 수치를 못 견디고 얼마 안 가 홧병으로 죽었다. 그리고 금광요는 그 여자의 폭력으로부터 해방되었다. 금광선의 부인은 금광요를 지속적으로 때리고 괴롭혀서, 내가 종종 그의 손등에서 푸른 멍을 발견할 정도였다. 손등이 그 정도면 옷 밑은 어떻겠나.

물론 하나뿐인 아들이 죽었으니, 그리고 남편이 사생아라고 데려온 놈이 자기 아들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세상 사람의 칭송을 받으니 당연히 속이 뒤틀리기야 했겠지. 하지만 그걸 왜 아랫도리 맘대로 놀린 자기 남편이 아니라 태어난 죄밖에 없는 사생아에게 푼단 말인가. 솔직히 그녀의 부고를 접했을 때 나는 안도했다. 적어도 금광요를 위해서는.

하지만 동시에 아주 살짝 의문이 들기도 했다. 그 홧병이 정말 홧병이었을까 하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쯤, 섭회상이 갑자기 나를 뒤에서 끌어당겼다. 그가 그럴 것을 전혀 예상치 못했던 나는 꼭 그의 무릎 위에 앉은 꼴이 되고 말았다. 말 그대로 얼음이 되어 있는데, 등에 섭회상의 이마가 닿아왔다.

-왜, 왜 이러세요?

-그냥.

섭회상의 한숨이 등 뒤로 느껴졌다. 그가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그냥.

섭회상이 두 팔로 내 허리를 안아오는 동안, 나는 숨조차 못 쉬고 뻣뻣이 굳어있었다. 누군가와 이런 식으로 몸이 밀착되어본 적이 없었다. 격하게 싸울 때 빼고는.

왜 이러느냐고 다시 한 번 묻고 싶었는데, 도무지 말이 안 나왔다.

이제 섭회상은 아예 내 날개뼈 위에 자기 뺨을 부비고 있었다. 심장이 조금 많이 아팠다. 심장은 빨리 뛰고 숨은 쉬어지지 않고 그러니 심장은 더 빨리 뛰고 악순환이었다. 섭회상이 키득거리며 나를 아예 한 번 더 꽉 끌어안았을 때에야 나는 그의 무릎에서 일어날 용기를 얻었다.

화닥닥 섭회상에게서 멀어진 나는 화가 난 건 아니나 기쁘다고만은 할 수 없는 감정을 담아 그를 뒤돌아보았다. 그는 의자에 앉아 고요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그가 이겼고, 내가 졌다. 그게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다. 저 얼굴에 대고 화를 낼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테니까.

섭회상이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내게 다가오는 동안 나는 멍청히 서 있다가, 그가 아주 가까이 다가왔다는 걸 깨닫곤 퍼뜩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그의 손이 곧 내 두 뺨을 감쌌기에 별로 의미 없는 일이었다. 그가 내 얼굴을 들어올리는 것을 느끼며 나는 두 눈을 감았다. 잠시 뒤 그의 코 끝이 내 코 옆을 스쳤고, 그의 숨결이 입술 위에 닿았다. 평소보다 더 짙어진 소나무향과 함께 그가 물었다.

-입맞춰도 돼?

나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섭회상이 속삭였다.

-그래도 좋다고 대답해 줘.

나는 얼굴을 잔뜩 구긴 채로 입술을 몇 번 씹다가 대답했다.

-네.

-뭐가 네, 인데?

나는 나도 모르게 눈을 떴다가, 섭회상의 눈을 마주볼 자신이 없어 다시 감았다. 차라리 죽고 싶다. 하지만 섭회상의 숨결이 멀어지는 건 싫었다. 그래서 나는 입을 여는 대신 턱을 들었다. 그의 서늘한 입술이 내 입술에 가볍게 닿았다.

동시에 그가 갑자기 나를 당겨안았다. 본능적으로 숨을 들이마시는 사이 입맞춤이 더 깊어졌다. 그의 몸이 내게 단단히 밀착했고, 허리 뒤에 나무 탁상이 닿았다.

지금껏 그와 몇 번 입을 맞췄더라. 잘은 모르지만 열 손가락 안에 들 테고 그게 내 경험 전부이니 내가 그에게 속절없이 떠밀리는 건 당연했다. 여전히 내게 입술이 맞닿은 채로, 그가 내 등에 있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뒷목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다른 곳에도 더 입맞춰도 돼?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목소리에, 나는 대답 대신 신음했다. 섭회상이 나직히 웃으며 내 입술을 베어물었다.

-그래도 될까?

-그런 거 자꾸 물어보지 좀 마세요.

내 목소리는 형편 없이 떨리고 있었다. 섭회상이 멈칫하더니 내게서 입술을 뗄 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냐고? 당연히 내가 이 나이에 대체 왜 이러나 생각했다. 내 생각을 정확히 읽기라도 한 듯 섭회상이 말했다.

-너는 참, 이럴 때면 정말 어린애 같니.

그러면서 섭회상은 흐트러진 내 머리를 정리해주었다. 머리를 귀 뒤로 꽂아준 뒤로도 그의 손은 멀어지지 않고 내 귓바퀴를 만지작거렸다.

-네가 싫은 건 나도 싫어.

뭐래?

-너무 좋아서 이러는 거잖아요.

난 뭐 생각하기도 전에 항변했다. 섭회상은 얼빠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뭔가 크게 충격을 받은 듯한 얼굴이었다. 갑자기 왜 그러나 했던 나는 그의 질문을 듣고서야 내 말이 그의 귀에 어떻게 들렸는지 알아차렸다.

-좋아? 내가?

그리고 그가 이해한 바가 그렇게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그랬다간 그가 또 나에게 어떤 부탁 겸 명령을 할지가 뻔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걸 이제 아셨습니까?

-내가 좋니? 정말로?

기어이 되묻는 섭회상이 얄미웠고 차이가 대체 무엇인지도 알 수 없었지만, 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기에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을 좋아한다는 말까지 내차 내놓을 수 없었던 이유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난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었고, 사람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일문삼부지라 비웃는 섭회상은 이 상황에서 나를 더 다그칠 정도로 멍청하진 않았다. 오히려 지나치게 똑똑했다. 더 생각할 새도 주지 않고 급히 입을 맞춰왔으니까.

입맞춤은 지금까지 했던 것과는...... 달랐다. 그냥, 달랐다. 나는 감히 그를 쫓아갈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받아들였다. 버겁다는 생각마저 들지 않았다. 숨을 쉬어야 한다는 것도 잊을 정도였다.

어느 순간 나는 탁상 위에 반쯤 눕혀져 있었다. 몸 위로 천천히 실리는 무게감에, 그제야 번쩍 정신이 들었다. 그러나 그다지 달라지는 건 없었다. 섭회상이 내 손에 천천히 깍지를 껴왔고, 다른 손으로는 내 입술을 쓰다듬었다. 그의 긴 머리카락이 주렴처럼 내 위로 드리웠다. 코끝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진 그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그의 숨소리가 그 어느때보다도 크게 내 귓가에 울렸다. 그가 숨을 쉴 때마다 맞닿은 가슴팍이 들썩였다. 그 모든 게 너무나 자극적이어서, 나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입술을 쓰다듬던 그의 손이 올라와 내 눈가를 쓸었다. 이미 더 줄일 거리도 없는 몸을 더 바싹 붙여오며 그가 속삭였다.

-정말 좋아해. 밀아.

갈라진 그의 목소리에, 나는 대답도 못 하고 입술만 달싹였다. 일련의 행위로 열이 올라서인지 우는 것도 아닌데 눈 앞이 조금 흐렸다. 섭회상은 내가 피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느리게 고개를 기울였다. 피하는 대신, 나는 오히려 조금 고개를 들어 그의 입술을 찾았다.

맨살에 닿은 그의 손은 여전히 처음처럼 차가워서 나는 나도 모르게 몸을 뒤틀었다. 사실 그의 입술이 목선을 따라 미끄러진 뒤로 나는 몸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계속 움찔거려야 했다. 이건 정말 이상하다는 말로밖엔 설명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고통에는 면역이 있었지만 이런...... 이상한 감각엔 전혀 면역이 없었다. 혼자 하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나는 어째야 할지 몰라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별 말도 안 되는 신음이 자꾸만 튀어나와서 결국 내가 제일 잘하는 걸 했다.

미약하지만 혈향이 번지자, 내 맨어깨를 쓰다듬던 섭회상의 손이 그대로 멈췄다. 나는 입 안에 도는 피맛을 삼켰다. 섭회상이 꿈에서 깨어난 듯 두 눈을 깜박이더니, 혀를 차며 내 얼굴을 살폈다.

-어디 봐.

그는 내 입 안에 검지손가락을 넣어 점막을 조심스레 훑었다. 왼뺨 안쪽의 상처부위에 그의 손이 닿자 따끔함에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깊은 상처는 아닌 것을 알았는지, 섭회상은 한숨을 쉬며 손가락을 거두어들였다.

-속상해.

나로선 피 묻은 손가락을 아무렇지 않게 자기 입으로 가져가는 섭회상 때문에 혼이 나갈 지경이었지만, 섭회상은 진심으로 속상한 듯했다. 나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라도 그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하긴, 그런 말 하지 마. 하지만 자꾸 피를 보고 마는 네 버릇에 대해서는 고민을 좀 해봐야할 것 같아.

그러면서 그는 다정하기도 한 손길로 내 가슴 앞섶을 여며주었다. 나는 옷을 여며쥔 채 책상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그동안 섭회상은 여기 저기 떨어져 있던 서류와 책들을 주워들었다. 나는 평소보다 흐트러진 그의 옷차림을 그저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렇게 앉아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나 다리에 힘이 풀려서 일어설 수가 없었다. 곧 두 뼘 정도 높이의 종이뭉치를 안은 채 나를 바라보던 섭회상은, 무언가 눈치챈 듯 내 나를 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널 어쩌면 좋니.

순 어린애를 귀여워하는 말투라, 나는 내가 분명 그보다 연상이라는 사실을 상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입 밖으로 그 이야기를 꺼냈다간 더 꼴이 우스워질 것 같아 잠자코 앞섶을 다시 한 번 정돈하고 허리띠나 졸라맸다. 그러고도 여전히 어지러워 시선을 돌렸다. 창 밖으론 겨울이 되어가는 밝고 파란 하늘이 보였다. 섭회상의 기분이 나아진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을 때, 아주 잠시 동안 나는 고민했다.

-종주님.

-응?

물끄러미 나를 돌아보는 섭회상의 얼굴은 순수하기로 치자면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 나는 말했다.

-안 싫어집니다.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던 그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떨리는 것을 나는 바라보았다. 그도 마찬가지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기울인 그와 시선을 맞추고 있자니 꼭 내 발밑이 기울기라도 하듯 어지러웠다. 그때 섭회상이 입을 열어 내 발밑의 균형을 원래대로 되돌려놓았다.

-너는 왜 항상 그런 눈으로 나를 봐?

-예?

-꼭 이 세상에 나밖에 안 남은 것처럼 나를 보잖아.

나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그저 입만 뻐끔거리고 있는데, 그가 말했다.

-네가 그런 눈으로 나를 볼 때면 나는 너무 좋은데, 너무 좋아서 무서워.

-뭐가 무서우신데요?

-네가 더 이상 그런 눈으로 나를 보지 않게 되면, 내가 정말 이 세상에 혼자 남겨질 것 같아서.

그 말이 참 징그럽게 간질거리면서도 씁쓸했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눈 뽑아드릴 테니까 가져가서 두고 두고 보세요.

-뭐? 싫어!

그러더니 갑자기 소리내어 웃는 섭회상을 따라 나는 작게 웃었다. 섭회상이 이런 걸 재미있어 하는구나, 알아둬야겠다 생각하면서.

*

행로령으로 떠나는 게 내일이었으니, 섭회상도 나도 낮에 농땡이친 만큼 저녁까지 바빴다. 저녁이 다 되어 약속하기라도 한 듯 정원에서 만났을 때, 섭회상은 나에게 행로령과 그 곳의 도무덤에 대해 자세히 들려주었다.

-육대 종주 되시는 분께서 지으셨어. 도령을 억제해 후손에게 화가 미치는 걸 막겠다는 목적으로. 사실 나야 그 효과가 잘 체감이 안 되는데, 아마 초대 종주부터 오대 종주님들 때까지는 지금보다 훨씬 심했던 거겠지?

지금보다 심했다면 그게 사람 사는 건가? 내가 생각하는 동안 섭회상은 자기 손 위에 앉은 앵무새를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나는 노을빛으로 물든 연못을 향해 시선을 내렸다. 그 붉은 빛은 어제와는 분명히 달랐다.

-도굴꾼이 들어서 벽이 허물어진 건 사실 별 문제가 안 되지만, 언젠가 한 번 도무덤 안의 진법이 어긋난 적 있었어. 우리 형님이 살아계실 때 말이야. 형님께선 도무덤이 잘못 되면 청하 전체에 문제가 생길 거라면서...... 내가 도무덤 안에 뭐가 있는지 이야기했던가?

-예. 도령과 싸울 악귀들을 가둬놓는다고요?

-맞아. 일종의 부장품이라고 생각하면 돼. 처음 도무덤이 생긴 뒤로 지금 벌써 십 대 넘게 청하 섭씨가 존속해왔으니, 무덤에 안장된 도가 늘어날수록 거기 묻힌 요마귀괴 수도 늘었을 것 아냐. 그러니 그 안이 얼마나 지옥이겠니.

생각해보니 그렇다. 나는 붉게 물든 연못에서 시선을 돌려 섭회상을 바라보았다. 섭회상은 이미 나를 보고 있었다.

-가본 적 있어.

그 말을 이해하는 데에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도무덤 안을요?

-도무덤 안의 가장 깊은 곳을. 형님과 둘이서.

그러면서 섭회상은 미소지었으나, 그건 빈말로도 유쾌하다고 할 수 없는 미소였다.

-사실 둘은 아니구나. 처음에 부정세에서 출발할 땐 스물이 넘었는데, 돌아올 땐 둘이었어.

-어떤 일이 있었기에......

-설명하자면 너무 길어. 사실 다 정확히 기억나지도 않고. 중요한 건 내 눈 앞에서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거고, 그 넋이 아직까지 도무덤에 갇혀있다는 걸 알면서 내가 아무것도 하지 못 한다는 거지.

말을 마친 섭회상이 작게 중얼거렸다.

-새삼 보고 싶다. 종휘.

-네?

-우리 방계 친척이자 형님의 부사였어. 그런데 도무덤에 함께 갔다가...... 죽었지. 나 때문에.

-종주님.

-괜찮아. 그게 벌써 십 년도 더 된 일인걸. 하지만 곧 종휘 기일이 다가오고 있어서...... 요즘 부정세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는 건 아마 그때문일거야. 하필이면 이맘때 또 누군가 도무덤을 건드렸고, 얼마 전 그런 일도 있었으니 다들 우울한 걸 테지.

섭회상이 나에게 맑은 얼굴로 웃어보였다. 나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만 했다.

-총령님한테 듣기로 종주님이 육대 종주님과 닮으셨대요.

불쑥 말을 꺼내자, 섭회상이 놀란 듯 두 눈을 깜박였다.

-내가?

-네.

-그 옛날 분을 어떻게 알고 그런 말을 했대?

그야 나도 모르지. 하지만 나는 총령이 그 날 밤 어떤 뜻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섭회상이 바보같은 건 사실이고, 수련 경지도 낮고 우유부단하다고는 하나...... 뭔가. 그에게는 뭔가가 있었다.

-종주님께선 특별하시니, 분명 뭔가 해내실 겁니다.

-거짓말.

-네?

-안 믿어.

뭐를...... 아.

-형님께서 종주로 계실 때가 우리 가문의 전성기였어. 하지만 형님과 나는 그야말로 극과 극인걸? 형님이 계셨다면......

-안 계시잖아요.

아니 그러니까 패륜을 저지르려던 건 아니고 내 말은.

-적봉존이 훌륭한 분이신 건 모두가 알지만, 그렇다고 종주님께서도 적봉존처럼 되셔야 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종주님은 다른 방식으로......

-밀아.

-네?

-너는 무슨 어린 애 대하듯 그런 말을 하니. 아무리 내가 좋아도 그렇지, 좀 객관성을 가져 봐.

나는 멋쩍게 입을 다물었다. 사실 그렇긴 했다. 잠재력 운운하기엔, 섭회상이나 나나 다 살 만큼 살긴 했지. 섭회상이 종주가 된 지도 십 년이 넘었고, 명성 자자한 옆동네 남희신도 강만음도 다 어린 나이에 종주가 되었다. 십 년 전 그 둘이 지금의 섭회상보다 더 유능하다는 데 세상 사람 전부가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뭐 어쩌라고. 섭회상이 뭐 어때서. 사람 죽이고 패악질 부리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가문을 정말 자 말아먹은 것도 아닌데 뭐가 문제인가. 사실 청하 섭씨는 좀 이렇게 식을 필요도 있기는 했다. 종주들이 툭하면 다 삼십대에 죽는 게 말이 되나. 뭐가 됐든 나는 섭회상 편을 들 의욕이 충만했다. 내 생각을 읽은 듯 섭회상이 웃었다.

-고마워.

곱게 자라서일까? 섭회상에게는 이렇게 사람을 간질간질하게 만드는 솔직함이 있었다. 내가 별말 못하고 뒷목만 긁적이자, 섭회상은 아예 내쪽으로 가까이 몸을 기댔다.

-네가 있어서 정말 좋아.

이건 좀 너무 간지러웠다. 내가 못 참고 벌떡 일어서자, 섭회상은 작게 소리내어 웃었다. 나는 혹시라도 낮에 있었던 일의 연장선을 여기서 겪게 될까 두려워 그대로 내 방에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섭회상이 나를 붙잡았다.

-조금만 더 있다가 가. 이야기만 할게. 응?

그러니, 뭐. 내가 섭회상을 거절할 위인인가? 결국엔 다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섭회상은 그런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입가에 서린 미소는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그는 어쩐지 나를 애달파 하는 것 같았다. 왜일까? 다친 데도 다 나았고, 얼마 전 그 일도...... 난 이제 괜찮은데.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최대한 태연하게 물었다.

-그럼 내일은 별 문제 없을 거라 생각해도 되죠?

-응. 무너진 벽만 수리하면 될 거야, 아마.

섭회상의 손에서 앵무새가 날아올랐다. 다리가 이젠 아프지 않은지 제법 힘차게 날아간 앵무새가 저기 소나무 가지 위에 앉아있었다. 앵무새가 고개를 까닥이는 것을 바라보다가 나는 물었다.

-그런데 종주님, 적봉존과 함께 행로령에 가셨을 때 말입니다. 그때는 대체 도무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그러게. 무슨 일이었을까?

밝혀내지 못했다는 건가? 의아해서 내가 고개만 갸웃거리는데, 섭회상이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이건 너한테만 알려주는 건데...... 섭씨의 도무덤 제일 밑에는 종주들이 살아서 가는 곳이 있다?

-그게 무슨......

-너도 봐서 알겠지만, 주화입마가 가까운 사람은 광증을 보이거든. 수련 경지가 높을수록 더 심해. 그래서 죽지 않았는데도 미리 무덤에 들어가는 거야. 그리고 거기서 발광해 죽는 거지. 쇠사슬에 자기를 칭칭 묶은 채로 말이야. 주화입마 위험이 있는 수사들을 격리해두는 것과 비슷하달까. 우리 아버지도...... 거기 계셔.

섭회상은 담담히 말했지만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물론 세상은 넓었다. 나는 지금 들은 것보다 더 기막힌 이야기들을 들었고 또 내 눈으로 직접 보기도 했다. 그러나 섭회상의 목소리는 사람을 끝없이 착잡하게 하는 데가 있었다. 그가 가볍게 웃는 얼굴이어서 더 그랬다.

-형님의 마지막은 분명 끔찍했지만, 그래도 그렇게 홀로 돌아가시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나는.

저렇게 웃게 되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이 필요했을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잠시 머뭇거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뻣뻣한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를 어색하게 내 품에 안았다. 잠시 굳어있던 섭회상이 내 품에 더 깊숙히 얼굴을 묻으며 웃었다.

-위로해주는 거야?

-모릅니다.

-그건 내 대사여야 하는데?

그러면서 섭회상은 아예 팔을 뻗어 나를 더 꼭 끌어안았다. 그가 한숨을 쉬듯 중얼거렸다.

-너는 참, 형님 같다가도 또 이럴 땐 어머니 같니.

어머니라는 그 단어에 나는 두 눈을 깜박였다. 그러고 보니 섭회상에게 그의 어머니에 대해 묻고 싶었는데, 기회가 없어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내 침묵에서 뭔가 느끼기라도 했는지 섭회상이 말했다.

-물어보고 싶은 것 있으면 뭐든 물어봐도 돼.

-사실 종주님의 모친 되시는 분은 어떤 분이셨는지 조금 궁금했습니다. 형님과 아버님에 대해서는 여러 번 말씀해주셨는데, 어머님에 관해서는 들은 적이 없어서.

말을 마치자 섭회상이 내 품에서 벗어났다. 나도 그를 선선히 놓아주었다. 그는 내 옷소매를 붙잡더니 몇 번 매만진 뒤에야 입을 열었다.

-글쎄. 어머니께서는 내가 열두 살 때 돌아가셨어. 그래서 기억이 또렷하진 않지만...... 어떨 것 같아?

-뭐가요?

-어떤 분이셨을 것 같냐고.

그렇게 묻는 섭회상의 눈에는 분명한 장난기와 함께 슬픔이 묻어났다. 나는 그가 어머니를 닮았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천천히 말했다.

-아름다운 분이셨겠죠? 상냥하셨을 테고요.

-반은 맞아. 무척 아름다운 분이셨지. 그리고 몸이 많이 약하셨어. 성격은...... 아버지보다 무서웠지.

잘 상상이 안 가서 인상을 찌푸리는데, 섭회상이 작게 웃었다.

-돌아가시기 전에 어머니께서 나에게 하신 말씀이 뭔지 알아?

-글쎄요.

섭회상은 잠시동안 나를 말없이 응시했다. 그러더니 부러 밝게 꾸며낸 듯 웃었다.

-맞춰 봐. 너라면 마지막 순간에 네 아이에게 뭐라고 말할 것 같니?

-사랑한다고요.

나는 생각하기도 전에 답했다. 너무 빨리 대답해서, 질문이 뭔지 다시 생각해봐야 할 정도였다. 하지만 답을 번복할 생각은 없었다. 나는 잠시동안 내가 할 법한, 또는 평범한 어머니가 할 법한 말을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먼저 가서 미안하다고, 하지만 정말 사랑한다고 할 겁니다. 살면서 무슨 일을 겪든 아무것도 무서워할 필요 없다고, 내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도망쳐 오라고요.

내 어머니가 마지막에 하고 싶었던 말도 그것이리라 나는 의심치 않았다. 어머니는 바빴고 우리는 평소에 대화라는 것을 나눌 일도 별로 없었지만, 그래도 나는 어머니에게 그 정도의 신뢰와 애착은 있었다. 그녀는 내 어머니였고 나는 그녀의 딸이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섭회상은 말없이 나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응, 우리 어머니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어. 그래도 부럽다.

-뭐가......

-그냥, 너를 어머니로 둘 미래의 네 아이가.

나는 하마터면 혀를 씹을 뻔 했지만 티내지 않고 말했다.

-부럽긴요. 저야말로 종주님 같은 아들 하나 갖고 싶은데요.

어린 섭회상...... 지금보다 몇 배는 더 사랑스러웠겠지. 적봉존도 그렇고 섭회상 모친도 그렇고, 정말 어떻게 그를 두고 눈을 감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던 차, 섭회상이 번쩍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어쩐지 얼빠진 얼굴이었는데, 나는 그가 입을 열 때까지 그 연유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나 닮은 아들을 가지고 싶다고?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나는 그대로 굳었다.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

등신 같다는 걸 알지만 계속 그렇게 더듬거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 아니라고. 아니라고! 섭회상 같은 아들이라고, 닮은 아들이 아니라! 같은 거랑 닮은 거랑은 다르잖아. 다르다. 아무튼 그렇다. 얼굴이 뜨겁다 못해 익을 것 같았다.

-종주님은 왜 사람 말을 왜곡하세요?

-내가 뭘......

나는 섭회상에게서 몇 걸음 물러섰다. 섭회상이 그런 나를 보더니 과장되게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렇게 싫어할 것까지는 없잖아.

-싫은 게 아니라......

아니. 더 말을 안 하는 게 낫겠다. 그런 생각으로 나는 고개를 돌렸다. 차가운 바람이 스치자 두 뺨이 뜨겁다 못해 아팠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이 상황이 너무 우스웠고, 바보 같았고, 그래서 슬프기까지 했다.

-하기야 아들은 나보다는 널 닮는 편이 더 듬직하겠다.

그 말에 내가 헛웃음을 지을 때였다.

-내일 갈 거니? 행로령.

갑작스런 질문에, 나는 인상을 쓴 채로 고개를 돌려 섭회상을 바라보았다. 그는 어쩐지 힘없이 웃고 있었다.

-왜요? 뭔가 지체될 일이 생겼습니까?

-아니. 그건 아니야. 그냥 시간이 참 빠르다 싶어서...... 궁금해서 그래. 가려는 이유가 있어?

-저도, 궁금해서요.

-뭐가 궁금한데?

나는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 내가 굳이 행로령을 가야만 할 이유는 없었다. 그냥 그곳이 청하 섭씨의 중요한 곳이고 섭회상이 청하 섭씨니까. 그래서 궁금할 뿐이다. 나는 솔직히 물었다.

-가지 말까요?

그가 원하지 않는다면 안 가도 좋았다. 섭회상은 대답 대신 뭔가 고민하더니 갑자기 앵무새를 불렀다. 앵무새가 포르르 날아와 그의 손 위에 앉았다. 그러자 섭회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바로 날아오면 널 데려가고, 아니면 데려가지 않으려고 했어.

-제가 안 갔으면 하는 이유가 있으세요?

-그냥 내 욕심이야.

섭회상이 대답했다.

-생각해 보면 네 몸이 나은 지도 얼마 안 됐고, 혹시 또 다칠까봐 걱정돼서. 왜? 새삼스럽니?

-조금요.

-그냥, 가끔씩 네가 나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할 때가 있거든. 그러면 또 덜컥 겁이 나네.

섭회상이 자기 손 위에 앉은 앵무새를 내려다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은 일찍 자는 게 좋겠다. 내일 아침 일찍 떠나야 하니까.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섭회상을 그의 방까지 배웅한 뒤, 나는 내 방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그가 등 뒤에서 나를 불렀다.

-밀아.

뒤를 돌아보자 방문 밖으로 빼꼼 고개를 빼낸 섭회상이 있었다. 그는 어쩐지 할 말이 있는 듯해보였다. 나는 오늘 밤도 그의 옆에 있어주어야 하나 잠시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생각에 잠긴 동안 섭회상이 내게 손을 뻗었다. 그의 차가운 손끝이 내 뺨을 스쳤다.

-아무것도 아니야. 잘 자고, 내일 봐.

눈 깜박이는 사이, 그의 방문이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