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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03 21:03
진정령, 난백 ㅅㅍ
이번 편엔 섭회상 안 나옴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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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뒤 섭회상이 부정세를 떠났다. 생각해 보니 섭회상 없는 부정세는 나와 아무런 연이 없었다. 사실 연이 없다못해 험하다고 봐야겠지. 어쨌든 섭회상이 없으니 시간이 말 그대로 남아돌았다. 물론 지난번 운몽 갔을 때도 널널하게 지냈고 그간 다른 가문에서 일할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이번엔 어쩐지 느낌이 달랐다. 그게 허전함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지만, 나는 모른 척 바삐 움직였다.

바삐 움직였다는 건 당연히 내 본업에 충실했다는 뜻이다. 사실 본업에 충실했다고 말하기는 어려우려나. 어차피 내가 금광요에게 특별히 전할 정보가 없다는 건 진작에 다 파악했다. 그래서 난 이제 내가 더 알고 싶은 정보를 캐볼 생각이었다. 내가 섭씨 사람이 된다면 알려주겠다고 부사가 이야기했던, 행로령. 사람을 먹고 피 토해 죽게도 하는 그곳이 왜 아직까지 남아있을까 하는 게 내 의문이었다. 내가 섭씨 종주였다면 당장 그곳을 깨끗하게 밀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이유가 있겠지.

섭씨 가문의 주화입마는 도 때문에 생기는 것이고, 도 주인이 주화입마에 다다를 정도로 흉악해진 도령은 상대를 가리지 않고 그 피를 탐한다. 그러니 아마도 도령과 관련 있는 장소이리라는 것 외에 행로령이 어떤 곳인지에 대해서는 도무지 더 알 수가 없었다. 그건 아무래도 가문 직계나 아주 오래된 심복 정도만 알고 있는 극비 정보인 듯했다. 그렇다면 관련 문서들도 밀실이나 그 비슷한 장소에 보관되어있으리라.

이전에 다른 가문의 밀실을 찾아내 염탐한 적은 몇 번 있었다. 물론 대부분 중소세가여서 가능한 일이었다. 백정의 후손이 더 이상 천대받지 않게 될 때까지의 긴 역사를 가진 청하 섭씨 밀실은 나 따위가 발 들일 수 없게 경계가 촘촘한 곳일 확률이 높다. 하지만 밀실에도 공식이 있다. 보통은 장서각이나 종주실, 흔치 않게는 무기고에 딸려있지. 아예 선부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짓는 경우도 있지만, 그건 정말 어디 전설에나 나올 법한 문파의 일이다. 대부분은 등잔 밑이 어둡다 수법을 쓴다. 심지어 내가 아는 어떤 가문은 정자 밑에 밀실을 만들어두기도 했다.

그런 경우의 수들을 종합해서, 나는 마음을 다잡고 한 번 부정세의 구조와 동선을 머릿속으로 계산해 보았다. 부정세는 말 그대로 요새같은 곳이었다. 낭아박과 쇠뇌처럼 우리 성벽에 가까이 오면 그대로 대가리를 뽀개주겠다는 결심이 매우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무기부터 활과 화살, 창과 극 등 수사들이 평소에 쓰는 도, 검 외의 참 다양하게 살벌한 무기들이 대문을 들어서면서부터 좁은 흙길 옆으로 펼쳐져 있다. 이 길에 섭명결이 온욱을 짓이겨 바르기도 했다지. 씨발. 문득 생각하자 속이 울렁거렸다. 하필 또 머리 위에서 태양이 쨍하니 내리쬐고 있었다.

아무튼 부정세는 나가기를 준비하는 곳이 아니라 들어오는 자들에 대비하는 곳이었다. 무기도 공성전에 최적화된 것들이며, 성 내부를 지키기 위한 것들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살벌하냐고 물으면, 뭐 공격이 최선의 방어 아니겠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무기고에 밀실이 있을 수는 없다. 그러기엔 부정세 무기고가 너무 허벌이다. 물론, 법보 수준의 무기들은 따로 보관되고 있겠지만 법보 반입 반출 관련 서류를 훔쳐본 바로 법보들은 무기든 아니든 그냥 다 한 군데 모아놓은 것 같았다. 거기 들어가려면 부사가 가지고 있는 열쇠가 필요한데, 일단 일반 수사들이 다 들어갈 수는 있는 곳이니까......

-밀.

익숙한 목소리가 발목을 잡아챘다. 느릿느릿 고개를 돌리자 거기엔 총령이 기다렸다는 듯 서 있었다.

총령은 옷을 벗어도 수진계 사람들이 아 저 사람 섭씨 수사구나 할 만한 그런...... 사람이었다. 알 만한 사람들은 다 무슨 말인지 알 것이다. 그 있잖은가. 섭명결과 호형호제할 것 같은. 그런. 아무튼 그도 섭명결처럼 도를 수련하니, 한계까지 수련을 하면 주화입마가 찾아오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여태 살아있는 걸 보면 분명 생긴 것처럼 뇌 대신 근육을 쓰는 그런 인간은 아닌 게 분명했다.

그건 그렇고, 기분이 안 좋은가?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총령의 시선은 제법 살벌했다. 사실 그런 지 좀 되었다. 멀뚱히 그를 마주보던 나는 그동안 못한 수련을 보충하라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뒤를 따랐다.

사실 내가 그동안 수련을 빠지지는 않았었다. 좀 줄였던 것뿐이지. 그런데도 확실히 연무장에 들어서자 조금 어색했다. 나는 대충 내 등 뒤로 콕콕 박히는 시선을 무시하고 몸을 풀었다. 그리고 다른 수사들과 함께 훈련에 참여했다.

하늘에 뜬 해가 서쪽으로 약간 기울고, 이제 훈련이 거의 끝나갈 때쯤이었다. 저기 도를 수련하는 수사들 사이에서 뭔가 소란이 이는 것 같았다. 뭔가 해서 봤더니 저번에 나와 한 판 붙었던 그 자식이 총령에게 뭐라고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내용을 대충 들어보니 총령이 그에게 당분간 도 수련을 쉬라고 이야기했고, 그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쉬라면 아이고 감사합니다 하고 쉬지 왜 저럴까...... 그런 생각을 하며 그쪽을 바라보는데, 하필이면 분하고 억울하다는 듯 씩씩거리던 그쪽과 눈이 마주쳤다.

총령이 그에게 수련을 쉬라고 말한 이유는 명백했다. 그의 눈엔 핏발이 서 있었고, 그건 단순히 잠을 못 잤다거나 열이 나서 그렇게 된 게 아니었다. 나는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아예 도망치듯 연무장을 나와버렸다.

내 방에 도착하고 난 뒤에도 어쩐지 심장은 계속 쿵쿵 뛰고 있었다. 나는 지나가던 시녀에게 목욕물을 부탁한 뒤 욕조가 채워질 때까지 열린 창 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금광요가 생각이 났다. 그가 창기의 자식이라는 말을 못 견디는 것처럼, 나에게도, 섭회상에게도, 아마 그 누구에게든 일종의 방아쇠 같은 것이 있을 것이다. 그게 언제 어떻게 당겨지느냐가 다를 뿐이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마음을 가다듬자 좀 나아졌지만, 어쨌든 나는 당분간 계속 이 관련된 문제로 골몰할 게 분명했다. 침의로 갈아입은 뒤 장포를 하나 걸친 채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내 방을 나섰다.

주인 없이 비어있는 섭회상의 방은 마치 그 자체로 잠들어있는 듯이 고요했다. 그 주인이 있을 때 자주 드나들던 곳이지만, 나 혼자 들어오자 어쩐지 느낌이 달랐다. 나는 잘 정리된 침대를 한 번 쓸어보았고, 그동안 손댈 수 없었던 것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시작은 간단하게 침대 옆 서랍장부터였다. 이쯤 되면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 정확히 뭘 찾는 것인지도 헷갈렸다. 확실한 건 지금 내가 보고 또 만지는 모든 게 섭회상의 것이라는 점이었다. 나야 몇 년, 빠르게는 몇 달 주기로 거처가 바뀌고 집에 가는 일도 거의 없으니 내 방이라는 게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주인이 십 년 넘게 사용해왔고 앞으로도 한평생 사용할 이 방은 달랐다. 꼭 이 방 자체가 섭회상이고, 내가 그 안에 들어와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기계적으로 움직이던 손을 멈췄다.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원래 뭘 하다가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다면 그 일은 그냥 이미 망한 법이다. 알면서도 나는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뭔가를 궁금해하는 건 나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그게 내 특기이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지금 왜 섭회상의 책장에서 책을 하나하나씩 꺼내보고 있는 것인가. 책들은 대부분이 그가 나에게 보여준 적 있는 시집과 화첩들이었다. 물론 그 외에도 다양한 책들이 많았다. 병법서? 이건 의외네. 병법서가 또 여러권, 주술에 관한 책들도 여러 권, 그리고......

어두운 방 안에서도 혼자 새빨간 책 표지를 나는 빤히 바라보았다. 이거 내가 생각하는 그거 맞나. 천천히 표지를 넘기자, 응. 내가 생각하는 그게 맞았다. 물론 섭회상도 나이 서른 넘은 남자니 춘화집을 가지고 있는 게 이상하지는 않은데, 그래도 그 작고 귀여운 얼굴에 이런 춘화집이라니. 갑자기 섭회상의 손길이라든지 입술이라든지 머릿속이 어지러워져 나는 뜨거워진 얼굴로 책을 덮었다. 그리고 탐색을 재개하려는데. 종이 두어 장이 춘화집 뒤편에서 팔랑거리며 떨어졌다. 별 생각 없이 그것을 주워든 나는 그게 곧 복잡한 주술공식이 적힌 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무슨 주술인가 자세히 살펴보는데......

내용물을 깨달은 순간, 등골이 그대로 싸해졌다.

흔히들 사술이라고도 부르는 사마외도의 술법은, 알음알음 이릉노조 추종자들 사이에서 쓰인다고는 하나 기본적으로 수진계에서 거의 절대악 취급을 받았다. 정도와 사도가 양립할 수는 없다는 것이 수진계의 기조였기 때문이다.

물론 말만 그렇게 하지 다 더러운 새끼들이었다. 대표적으로 금광선은 설양을 데려와 사도를 더 연구했다.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이릉노조 위무선이 만들었던 음호부를 금씨네 자기들도 만들어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금광요도 그와 무관하지 않았고, 섭명결이 기를 쓰고 금광요를 잡던 것도 그와 어느 정도 연관이 있었다. 그런데 섭회상이 사도에 손을 댔다면...... 갑자기 머릿속에 그간 부정세에서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섭명결이 자기를 경멸할 것이라는 섭회상의 말이나, 자기가 악인이 되면 섭명결이 어떻게 행동할 것 같냐는 질문이나...... 다 이것 때문이었던 걸까? 아마 지금 누군가 내 얼굴을 보면 거의 유령인 줄 알 수도 있다. 그만큼 나는 하얗게 질려 있을 게 분명했다. 그도 그럴게 내 손에 들린 종이는 단순한 사술이 아니라, 자기 혼백을 희생해 죽은 자를 되살리는 것에 관한 것이었다. 음호부가 연관 있음은 물론이다.

대체 왜? 그렇게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사대세가 종주인 섭회상이 대체 무엇 때문에 사술에 관심을 가진단 말인가? 낮은 수련경지 때문인가? 하지만 내가 아는 섭회상은 그런 데 연연해할 인간이 아니다. 내가 아는 섭회상. 문득 나는 그 표현 자체가 굉장히 우습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생각해보면, 내가 섭회상을 알아봤자 얼마나 알겠나. 내 손에 들려있는 이 종이가 그 증거였다. 다만 내가 지금까지 보아온 섭회상은 특별한 이유 없이 사도에 손댈 만한 사람이 아니었고, 그에게 동력이 될 만한 이름은 단 하나였다.

섭명결을 되살리고 싶은 걸까? 자기를 희생해서라도.

말도 안 된다. 말도 안 된다는 걸 알지만, 나는 섭회상의 심정을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섭회상에게 섭명결은 거의 유일한 가족에 가까운 것 같았고, 섭명결도 섭회상 대신 주화입마라는 짐을 질 정도로 동생을 아꼈다. 그러니 섭명결 시신도 못 찾은 지금 같은 상황에서, 섭회상이야 당연히 사도에 손 대면서라도 섭명결을 찾고 싶겠지. 형 대신 자기가 죽고 싶다는 마음도 나는 백 번 이해했다. 그러나 동생이 자기 혼백을 찢어가며 자기를 되살린다면, 그러면 섭명결이 살아난다고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섭회상은 내내 이런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걸까. 모른다. 영원히 알 수 없을 거다. 이건 죽을 때까지, 아니, 죽은 뒤에도 절대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거다. 그러지 못한다고 보는 게 나았다. 나는 종이를 다시 접어 원래 있던 자리에 넣었고, 들고 있던 책도 마찬가지로 정리했다. 그러자 서가는 아무도 손 대지 않은 것처럼 원래대로 정갈해졌다. 그 앞에 서서 나는 무겁게 침을 삼켰다.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마음이 너무 무거웠다.

종주실 근처에 기척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빠져나온 나는 곧장 방으로 향하는 대신 좀 걸었다. 이제 밀실이나 행로령이 문제가 아니었다. 아니지. 어쩌면 행로령이 죽은 자를 되살리는 그 사술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음호부의 위력을 눈 앞에서 보았던 나로서는 그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진짜 음호부라면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금광요가 나를 부정세에 보낸 이유가 혹시 이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자 심란했다. 정말이지 심란해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바람을 쐰다고 나아질 것 같진 않았으나 안 쐬는 것보다는 그나마 나을 것 같았다.

그렇게 정처 없이 걷다가 연무장에 다다랐을 때였다. 저 멀리, 혼자 연습 중인 누군가가 있었다. 달빛 아래 검은 옷 입고 도를 휘두르는 모습이 꼭 이미 죽은 사람 같아서, 불행하게도 나는 그 얼굴을 알아보았다. 어떻게 할까. 나는 잠시 망설였다. 그냥 모른 척 지나가는 게 최선이라고 머리로는 알았지만, 저러다가 진짜 주화입마로 죽을 지도 모른다.

내가 망설이는 사이, 상대방이 먼저 나를 발견한 듯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다짜고짜 와서 한다는 소리가 이거였다.

-뭘 봐.

이러니 걱정이고 뭐고, 말이 곱게 나갈 수 있겠는가? 나는 귀신이라고 해도 믿을 법한 그의 몰골을 피해 눈을 돌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죽고 싶어 환장한 것 같아서, 신기해서 좀 봤어.

상대방은 대답하지 않고 여전히 나를 노려보고만 있었다. 느낌이 영 좋지 않은데...... 그냥 이대로 뒤 돌아 갈까 하는데,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요즘도 문하생들 가르친다지.

내가 대답하지 않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가르쳐줘. 나도.

-싫어.

나는 대답했다.

-총령님이 너더러 쉬라고 하신 이유가 있겠지. 이야기 못 들었어? 너 이대로면 주화입마 낙점이야. 주화입마 걸리면 어떻게 죽는지 알아?

-알아.

예상 못했던 대답이라, 나는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말했다.

-부정세 수사라면 몇 년에 한 번씩, 야렵을 나가서나 연무장에서나 종종 보게 되니까.

-그럼 너도 알겠네. 너만 죽으면 다행이지, 근처에 있던 사람들도 휘말려 죽기 십상이야. 너 때문에 죽는 사람들은 무슨 죄야?

-난 안 죽어.

-지랄 좀 마.

최대한 마음을 가라앉혀서 나온 말이 그거였다. 나는 땀에 젖은 얼굴을 노려보았다. 자존심 문제는 혼자 해결하라고, 다른 사람 목숨 위협하지 말고.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어딘가 석연찮은 부분이 있어, 나는 그에게 물었다.

-너 얼마 전만 해도 상태가 이 정도 아니었잖아? 갑자기 왜 이렇게 된 거야?

그 말에, 그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그 순간 든 위화감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분명 눈 앞의 남자는 싸가지가 없긴 해도 이렇게 살의에 차 있지는 않았다. 나는 본능적으로 발걸음을 물렸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도가 내 쪽으로 날아왔다.

시발. 나는 내 몸 정중앙을 직격으로 노린 도를 피해 몸을 틀면서,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미친 새끼. 너 미쳤냐는 질문이 의미 없을 정도로 이미 상대방은 눈이 돌아있었다. 나는 최대한 검등으로 그의 뒷목을 노렸다. 상대방은 반대로 내 목 앞쪽을 노리는 게 분명했다. 망할.

싸움이라는 것은 이상하게도 상대방을 죽이려고 맘 먹었을 때보다 다치지 않게 하려는 때가 몇 곱절은 더 힘들었다. 내가 뭐 천하의 이름난 고수라면 모를까, 그 정도는 아니라. 검 손잡이로 관자놀이를 몇 번 찍고 뒷목도 여러 번 찍었는데도 버티는 걸 보면 뭐에 씌였든지 정신력이 원래 대단하든지 둘 중 하나였다. 세로로 가르고 들어오는 도를 검집으로 막으며, 나는 지난 번과 똑같은 방법을 썼다. 영력을 실어 담은 발차기를 맞고 저 멀리 날아가 쓰러진 몸을 보자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러나 먼저 덤빈 쪽이 저쪽인데 어쩌겠는가. 나는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천천히 다가갔다. 쓰러진 것 같은데 이걸 어디로 따로 옮겨야 하나. 아직 가쁜 숨을 고르며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데, 쓰러진 줄 알았던 놈의 눈이 번쩍 뜨이더니 내 발목을 잡아챘다.

씨발. 순식간에 내 위에 올라온 몸 때문에 검을 놓치고 말았다. 눈 앞에 바싹 다가온 얼굴은 지독한 땀냄새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차치하고서라도, 충혈된 바로 그 눈 때문에 인간의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눈 앞의 입술이 뭐라 뭐라 움직였지만 그게 무슨 말인지도 잘 들리지 않고 귓가가 먹먹했다. 몇 번이고 눈을 깜박인 뒤에야 그나마 발음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지금은 종주도 없잖아.

그 말을 알아들은 순간, 더 생각도 할 것 없이 나는 상대방의 머리를 내 머리로 힘껏 들이받았다. 뇌진탕이 오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머리 앞쪽이 깨질 것처럼 아팠지만, 나는 상대방을 내 몸 위에서 밀치고 일어나 검을 집었다. 그리고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 검은 몸을 바라보다가, 달렸다.

어디로 달렸는지 모른다. 그저 달렸다. 차가운 밤바람이 마치 손처럼 땀에 젖은 내 얼굴을 쓸었다. 아, 제발. 누군가 내 어깨를 잡아챘을 때, 나는 하마터면 그를 검으로 벨 뻔했다.

-진정하게.

총령의 얼굴을 확인한 뒤, 나는 거의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가 나를 부축했다. 착잡한 얼굴로 나를 보더니,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다친 곳은 없나?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총령이 어디서부터 보고 있었던 거지? 욱신거리는 머리를 짚는데, 총령의 목소리가 들여왔다.

-미안하네. 내가 제때 개입하지 못했어.

-뭘 이제 와서 그러십니까?

나는 나도 모르게 빈정거렸다. 총령이 대답하지 않는 것을 보고 떨리는 헛웃음도 함께 흘렸다.

-옛날에 부정세에 있던 친구한테 듣기로 부정세는 수사 관리 개같이 한다던데, 사실이었습니다.

-내 그 자에게는 징계를 내리겠네.

그렇게 넘기겠다고. 그래라 개새끼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까지 맨살에 소름이 돋아 있었다.

-그나저나 아까 그 인간은 상태 갑자기 왜 그렇게 된 겁니까?

-종종 저런 수사들이 있다네. 수련에 정진하는 대신 영약에 의지하다가, 그 기운을 못 이기고 주화입마에 드는 치들 말일세. 그건 그렇고 자네, 주화입마에 대해 잘 알고 있던 모양이군.

대화도 다 들었다는 거지? 말소리가 다 들릴 정도로 가까이 있었으면서 진작에 안 끼어들었다는 거였다. 나는 건조하게 웃었다.

-부정세 오기 전에 예습했지 않겠습니까.

그러면서 떨리는 손으로 담뱃불을 붙이는데, 총령이 뜬금없이 물었다.

-섭씨에서 도 외에 검까지 다루게 된 연유를 알고 있나?

-아니요. 모릅니다.

-섭씨의 육대 종주께서는 영민한 분이셨네. 섭씨 도령을 제어할 방법을 고안해내셨고, 아직 세력이 크지 않던 청하 섭씨를 번영시킬 방법도 고민하셨지. 그중 하나가 검을 쓰는 수사들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네.

총령의 시선은 생각에 잠긴 듯 먼 곳을 향해 있었다. 나는 담배를 문 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검을 쓰는 수사들은 부정세의 인원을 충당했고, 도를 쓰는 수사들은 부정세의 전통을 이어나간 셈이지.

-애매한데요.

-도를 수련하는 수사들에게 요직이 돌아가지만, 검을 쓰는 자들에게 출세의 길을 막아둔 건 아니었네. 그때부터 섭씨는 오대 세가의 반열에 들어섰고.

-파벌이 심하게 생겼겠습니다.

-그러진 않았네.

그게 어떻게 안 그럴 수 있지? 그런 생각을 하며 총령을 빤히 바라보는데, 총령이 말했다.

-육대 종주는 섭씨 종주 중 유일하게 천수를 누린 장본인이시기도 하네. 그 분이 어떤 분인지는 모르나, 나는 종주께서 그 분과 닮지 않으셨을까 생각해.

섭회상이 그런 대단한 인물을 닮았다고?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입 밖에 낼 수는 없었다. 행로령이 아마 그 육대 종주와 관련이 있겠네요 하는 말도 꺼낼 순 없었다. 그래서 나는 물었다.

-저한테 이런 이야기를 왜 해주십니까?

-글쎄. 나도 모르겠네.

총령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나도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침묵 속에서 밤공기를 들이마시고 또 내쉬다가, 나는 문득 나도 모르게 입을 뗐다.

-적봉존께서 살아계실 적 부정세는 지금보다 훨씬 살 만한 곳이었겠죠? 어떠셨습니까? 그분께선......

-좋은 종주셨냐고? 몰라서 묻는 겐가.

-아뇨. 그게 아니라. 총령님이 보시기에 좋은 형이셨습니까? 동생이 자기 목숨을 걸 만큼?

총령은 한 대 맞은 것처럼 두 눈을 깜박이더니, 곧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문득 나는 그가 섭회상이 음호부에 손 댔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마찬가지일세. 몰라서 묻나?

그러더니 총령은 늦은 밤 돌아다니지 말고 그만 방으로 돌아가라며 먼저 등을 돌렸다. 나는 그가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다가 마찬가지 방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