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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28 19:05
진정령, 난백 ㅅㅍ
청하 섭씨 관련해선 거의 다 뇌피셜임 원작 설정 모름 ㅈ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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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내가 부정세 수사 옷을 걸치고 섭회상을 대면하게 된 것이다. 청하는 진짜 가기 싫었고 부정세는 진짜 진짜 존나 가기 싫었는데 금광요에게 그렇게 말 안 한 건 여러 이유에서였다. 마지막 임무라는데 굳이 거절하는 게 웃기기도 했고, 그동안 내가 꾸준히 청하 섭씨 싫다는 티를 냈는데 그 인간이 내 호불호를 눈치 못 챘을 리가 없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래. 어차피 이거 끝나고 수진계 뜰 건데. 그런 생각으로 나는 길게 담배 연기를 뿜었다. 회색 연기가 흩어지자 마찬가지로 잿빛인 성벽이 모습을 드러냈다.
청하라는 이름이 웃길 정도로 청하는 척박하기 그지없는 땅이었다. 그나마 끝자락에 다다라야 개천이 좀 보이지, 중심부에는 산밖에 없다. 그런데 왜 청하가 그렇게 번성한 도시가 되었고 청하 섭씨는 존나 부자냐, 왜겠어. 부정세 뒷산에선 금이 나고 은이 나고 철이 나니 그렇지. 조상이 백정이었다는데 어찌어찌 짐승 뼈 바르는 기술을 땅에서 금맥 발라내는 기술로 바꿔서 잘 써먹었나보다. 근데 그걸 지금의 일문삼부지가 다 까먹고 있으니 어째.
뭐 부자는 망해도 삼 대는 간다니 나 살아있는 동안 부정세가 망하는 일은 없을 거였고, 망해도 내 알 바는 아니었다. 아니, 생각해 보면 나 때문에 망하려나. 금광요는 청하 섭씨를 어떻게 구워먹을 생각일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성벽에 부조로 새겨진 수두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당장이라도 뒤돌아 떠나고 싶었지만,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눈이 떼어지지도 않았다. 그때, 문 앞에 긴장감 없이 멍 때리며 서있던 병위가 나를 발견하곤 용건을 물었다. 그제야 나는 주박에서 풀려난 듯 참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장죽을 입에 물었다.
부정세 수사가 되고 싶어 찾아왔다는 내 말에, 병위들은 어리버리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보았다. 얘네도 들어온 지 얼마 안 됐군. 딱 보이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쨍하니 내리쬐는 햇빛을 손으로 가렸다.
오기 전에 알아보니, 청하 섭씨는 상시로 신입 수사를 모집 중이었다. 선문세가는 몇 년 단위로 수사를 끊어 받는 것이 보통이다. 이런 식으로 수사를 쉬이 받아들이는 가문들은 돈이 썩어넘치거나 아니면 아직 힘이 약해 몸집을 더 불려야 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탈주자가 많거나 셋 중 하나다. 청하 섭씨는 아무래도 셋 다인 듯했다. 사일지정에서 제일 큰 공을 세우고 명성이 대단했던 청하 섭씨가 이 지경이라니, 섭명결 죽은 게 당연하지. 죽었다가 어찌 되살아나도 이 꼴 보면 다시 주화입마 올 것이다.
아무튼 나야 파릇파릇한 신입 수사가 아니니 햇병아리 문하생들 사이에 섞여 잠입할 수는 없었다. 튀는 건 딱 질색이지만 어쩌겠는가. 직접 부정세 문을 두드릴 수밖에. 부정세 병위들은 자기들끼리 더 수군수군하다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부정세 문을 열어주었다.
금광요 말이 사실인지, 부정세는 사대 세가 중 하나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한적했다. 물론 규모 크고 사람이야 많지만, 초상집 특유의 분위기랄 게 있었다. 이건 뭐 금린대랑 완전 정반대네. 그래도 사대 세가 이름이 헛되진 않은지, 여전히 어느 정도 기강은 잡혀있었다. 성장에 대한 관심이나 의욕 같은 것 없이, 그저 관성에 가깝게 지탱되고 있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말하자면 한 때는 바위성이었던 모래성 같았다. 금광요가 톡 치면 무너질.
부정세 정문에서 연무장까지 거리는 그리 길지 않았다. 수사들을 훈련시키던 총령이라는 인간이 흙먼지를 헤치며 나에게 다가왔다. 섭종주 후사도 없이 쓰러졌다는 소식 퍼진 게 얼마 전인데, 그거 듣고 빠져나가는 놈은 그러려니 하겠으나 들어오는 놈은 수상하다는 듯 그는 험상궂은 얼굴로 나를 여기저기 살펴보았다. 나잇대가 제법 있어 보이는 것이, 아무래도 섭명결 때부터 계속 있던 사람이겠거니 싶었다. 그가 물었다.
-검 잡는 법이 특이하군. 어디서 수련했나?
-객경으로 전전하며 스무 해 가까이 살았는데 뭐 출신 가문 같은 것 있겠습니까? 그냥 여기 저기 돌아다니면서 익혔습니다.
-도를 수련해본 적은 있고?
-아뇨. 주화입마는 사절이어서요.
그 말에 순간적으로 분위기가 싸해졌다. 나는 안 그래도 험악한 총령 얼굴이 더 구겨지는 것을 보면서 입을 꾹 다물었다. 첫 단추부터 이렇게 잘못 꿰다니. 역시 청하 섭씨랑 나는 합이 안 맞아. 그런 생각을 하는데, 총령이 말했다.
-청하 섭씨 수사들이 모두 도를 수련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나, 도는 섭씨의 중심일세. 검을 수련하겠다면 청하 섭씨는 썩 좋은 선택지가 못 돼.
-상관 없습니다.
-보아하니 연차도 적지 않은 것 같은데, 굳이 검을 들고 다른 가문이 아닌 섭씨에 들어오려는 이유가 뭔가?
빡세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최대한 태연한 얼굴을 했다.
-제 고향이 청하입니다. 여기 저기 떠돌다가 청하로 돌아온 거예요. 제가 막 금단을 맺었을 때에는 청하 섭씨 문턱이 너무 높았지요. 하여 여기 저기 쏘다니며 실력 쌓다가 이제 고향에 맘 붙여 살아보려고 돌아온 겁니다.
총령이 수사가 되겠다고 찾아온 이에게 바란 건 섭씨를 위해 언제든 목숨을 바치겠다는 열정, 의리 뭐 요따위였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 같은 세상에 일면식도 없는 상대에게 헌신할 그런 순진한 인사가 어디 있나. 있다고 해도 파릇파릇한 십대면 모를까, 대충 세상 돌아가는 꼴 파악 마친 삼십대 후반이 그런 식의 각오 다지기를 하고 있겠냐.
총령도 생각이 같았는지, 탐탁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주먹을 말아쥐었다. 나는 그런 그에게 말했다.
-제가 섭씨에 뭐 커다란 은혜를 입어 그걸 갚아야 할 입장은 아니지만, 제 주인 섬기는 법도는 압니다. 그리고......
내가 품에서 추천장을 꺼내자, 총령은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니 왜 처음부터 그걸 보여주지 않았나?
-선후관계가 뭐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동영으로 떠나기 전에 일했던 가문으로부터 추천서를 받은 건 혹시나 해서였다. 항상 가문을 떠날 때 좋게 좋게 떠났었고 그쪽은 내가 금광요 사람이라는 걸 모르니 대부분은 아쉬워 하며 잘 보내줬었다. 추천서 받기도 어렵지 않았다.
사실 이럴 게 아니라 아예 생 신입인 양 부정세에 들어갈까도 진지하게 생각해봤지만, 그러면 종주 근처에 갈 수가 없을 거라 접었다. 전에는 이렇게까지 종주 가까이에서 일해본 적은 없지만...... 괜찮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혼자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총령이 추천서를 들여다보더니 말했다.
-이름이...... 밀이라고.
그건 내가 몇 개 정해두고 돌려쓰던 이름 중 하나였다. 지난번에도 그 이름을 썼던 것이 기억나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추천서를 받은 이상 자기가 내 처우를 결정하긴 어렵다고 총령은 나를 섭 종주에게 데려갔다. 그러면서 종주가 한 달 내내 자리보전 하다가 이제 겨우 일상에 복귀했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다 알고 온 사실이라 감흥은 없었다. 진짜 주화입마 왔던 거냐고 물어볼까 하는 생각이 일 초 들었지만 그것도 참았다.
연무장을 지나 본격적으로 진입하게 된 부정세 내부는 광활하고 척박한 듯 하면서도 나름대로 옹골찬 구석이 있었다. 경치 감상하듯 이리 저리 둘러보는데, 이상하게 수사와 가복들 시선이 나에게 꽂혔다. 부정세 들어오면서야 그렇다고 치겠는데, 이 안쪽에서까지 시선이 느껴지는 건 분명 이상한 일이었다. 옷도 평범하게 입고 왔는데, 뭔가 잘못된 게 있나. 나는 고민하다가 앞서가는 총령에게 물었다.
-제가 이상하게 생겼습니까?
총령이 잠시 멈춰서서 나를 돌아보다가, 다시 걸어나갔다.
-그건 아니고...... 그냥, 부정세에는 워낙 여수사가 없다 보니 그런 걸세.
아하. 나는 이마를 짚었다. 종주한테 눈에 안 띄기는 실패군. 좆됐네.
그래. 사실 그 때부터 일이 뭔가 안 풀려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일문삼부지가 있다는 후원에 들어선 순간 나는 내 인생이 또 한 차례 어그러졌음을 알았다.
일문삼부지, 섭회상은 멀리 커다란 소나무 그늘 아래 서 있었다. 그늘과 대비된 상앗빛 도포 때문에 그는 이상할 정도로 가까워보였다. 적어도 그 순간 내 눈에는 그 무엇보다도 또렷했다. 밑으로 늘어진 그의 오른손에는 흰 색 접선이 쥐여있었고, 살짝 든 그의 왼손 위에는 알록달록한 앵무새가 앉아있었다. 상앗빛 도포가 새까만 머리카락과 함께 바람에 흩날렸다. 그 뒷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기도, 또 잘 만들어진 인형 같기도 했다. 그가 인기척을 느꼈는지 돌아보았고, 그렇게 보게 된 희고 조그만 얼굴엔 병색이 완연했다. 그가 나를 발견하곤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아니.
아니 씨발 진짜로. 아무도 나한테 섭회상이 저렇게 생겼다는 걸 말 안 해줬잖아. 고소쌍벽이 잘생겼니 누가 또 미남이니 하는 이야기만 했지 섭회상이 이런 병약한 귀공자라곤 말 안 해줬잖아. 특히 금광요. 내 취향 누구보다 잘 알면서 한 마디도 안 해주다니. 섭회상이 앵무새를 여전히 손에 얹은 채로 하늘하늘 다가오는 동안 나는 입 안을 꽉 깨문 채 머릿속 소란을 진정시켰다. 가까이 다가온 섭회상이 내 얼굴을 살피더니, 시선을 내려 내 손에 여즉 들려있던 장죽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렇게 안 생겨선 흡연가인가? 아니면 반대로 혐연가인가? 후자로 추측하는 게 더 안전했기에, 나는 장죽을 등 뒤로 숨기려 했다. 그러나 섭회상이 나를 제지하듯 부채를 팔랑이더니, 가느다란 목소리로 총령에게 물었다.
-장유, 이 분은 누구셔?
-임장 양씨의 추천서를 가져온 주밀인데......
-밀? 꿀 밀 자야?
섭회상이 총령의 말을 끊더니 내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마른 입술을 핥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
-이름 정말 근사하다. 그리고 연죽도 정말 멋있는걸. 이건 분명히......
분명히 뭐? 나는 내 장죽을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미소 짓는 섭회상을 어리둥절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이어진 그의 말은 더 황당했다.
-좋아. 부정세에 이렇게 풍류를 잘 아는 수사가 생기다니. 마음에 들어.
-네?
풍류는 무슨 놈의 풍류? 난 돈 주고 음악 연주 한 번 들어본 적 없는 인간이다. 그러나 섭회상이 눈을 빛내며 아이처럼 박수를 쳤다. 그의 손 위에 앉아있던 새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아주 잘 훈련된 새인 듯 소나무 가지에 걸린 자기 새장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 멍하니 그 새를 바라보는 사이 섭회상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양 종주께 감사 인사를 보내야겠어. 오늘부터 밀이는 내 전속 수사다. 전속...... 직속...... 모르겠네. 아무튼 그거야.
-종주, 아무리 그래도 이렇듯 갑자기 곁에 두시는 건......
총령이 당황한 얼굴로 섭회상을 설득했으나, 섭회상은 고집스런 아이처럼 고개를 저었다. 나는 총령 편을 들려고 했다. 금광요는 나보고 섭회상을 관찰하랬지 시중 들라고 하진 않았으니까. 하지만 섭회상이 말했다.
-얼마 전이 내 생일이었잖아. 형님께서 나에게 보내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하려는데, 안 되겠느냐?
그러면서 쓰게 웃는 섭회상은 정원의 분위기를 무겁게 가라앉혔다. 총령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고, 내 입에서는 탄식이 흘렀다.
그래. 어쩌겠나. 나는 빠르게 상황을 받아들였다. 어차피 섭회상 눈에 든 이상 수습은 불가능하고, 금광요한테 편지 쓰면 뭔가 대책을 일러주겠지. 비 맞은 강아지 같은 섭회상의 얼굴을 바라보며 금광요를 생각하자니 양심이 따끔거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난처한 얼굴의 총령을 힐끗 바라본 뒤, 나는 섭회상에게 고개 숙여 깊이 공수해보였다.
-성심껏 모시겠습니다. 종주.
*
살면서 이 정도로 계획이 틀어진 적은 없었다. 대충 섭회상을 지켜보며 소식만 전해주고 꿀빨면 될 줄 알았던 나는 이제 낮에는 팔자에도 없는 섭씨 진법을 수련하고 저녁에는 섭회상 시중을 들어야 했다. 일반 수사들이 머무는 곳 대신 종주 방 근처에 따로 내 숙소가 배정된 건 그 때문이었다. 나에게 부정세를 소개해주겠다면서 비틀거리는 섭회상을 방으로 안내한 뒤, 총령이 나에게 부정세 지리를 간단히 알려주었다. 그는 대놓고 심기가 불편해보였다.
-이미 결정된 바 자네 처우에 대해 내가 더 뭐라 말을 얹을 순 없지만, 이렇게 된 이상 섭씨 수사로서 수련에 정진해야 할 것이야.
이 나이에 그렇게 빡세게 굴러야 할까...... 내가 이러려고 그동안 열심히 산 게 아닌데. 그렇게 토 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부정세를 한 바퀴 돈 채 숙소에 들러 수사복을 입고 나오니 벌써 오후였다. 연무장에 나가보니, 여자가 거의 없다는 총령 말이 사실이었다. 게다가 섭회상이 나를 자기 옆에 두기로 했다는 게 벌써 소문이 났는지 다들 나를 호기심 넘치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참 좆같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그동안 어떻게 지켜온 익명성인데...... 진짜 이 일 끝나면 수진계 떠나라고 하늘이 밀어주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살벌하게 몸을 풀었다.
체력 단련을 마치고 말을 걸어오는 수사들을 무시한 채 난 숙소로 곧장 돌아갔다. 뒤에서 수군거리는 목소리들이 들렸지만 뭐라고 뒷얘기를 하든 내 알 바는 아니고, 급한 일이 있었다. 내 진짜 주인에게 상황을 알려야 했으니까.
그렇게 금광요와 그날 밤 연락을 주고 받았다. 섭회상 얘 그냥 이상해...... 그렇게 서두를 떼어 보내자, 웃겨 죽는 기색이 역력한 답이 되돌아왔다. 내가 걱정했던 것과 달리, 금광요는 섭회상이 나를 자기 옆에 두기로 한 데 만족하는 듯싶었다. 참 독한 놈이라고 나는 새삼 생각했다. 돈도 많고 권력도 그 누구보다 강하면서 청하 섭씨까지 먹으려고 하다니. 인생 그렇게 살면 그게 사는 건가. 안 피곤한가. 그러면서 속으로 씹다가도, 낮에 만난 섭회상을 생각하면 어쩐지 머리가 멍해졌다. 섭명결 동생이 그런 미소년일 거라고 누가 생각했겠어. 아니, 생각해보니까 미소년은 아니구나. 서른다섯 넘었댔지. 그 얼굴이 서른다섯 넘은 얼굴이라니 그럼 더 사기 아닌가.
아무튼 수염 난 모지랭이 생각하다가 뒷통수를 얻어맞은 격이니, 내 머리통은 당연히 얼얼할 수밖에 없었다. 그냥 허접한 찌질이일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조실부모형한 비운의 귀공자였잖아. 은은히 흔들리던 상아색 소매가 눈 앞에 어른거렸다. 백정의 후손, 짐승 머리를 내건 부정세의 주인이 그렇듯 여리여리하다니. 나는 투박하게 생겨선 부드럽기 그지없는 재색 침상을 쓰다듬다가 자리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처음으로 섭명결이 불쌍해졌다. 저런 동생 두고 어떻게 눈을 감았냐. 그런 생각을 하며 잠들었던 나는 방 밖에 자꾸 느껴지는 인기척 때문에 잠을 깼다.
축 시쯤 됐으려나. 아직 방 안은 깜깜했다. 복도 쪽이 아닌 정원 쪽에서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나는 머리를 긁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고민했다. 처음 온 놈이 밤에 종주 방 근처를 돌아다니면 의심을 살 게 분명한데, 괜히 못 들은 척 하고 다시 잤다가 종주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그것도 문제였다. 결국 나는 침상 옆에 놓여있던 장죽으로 시선을 옮겼다. 뒤집혀 있으면 자고 안 뒤집혀 있으면 나가야지 했는데 담배통이 위를 향해 있었다.
-이렇게 된 거 하나 태우고 들어와야지.
그렇게 중얼거리며 나는 중의 위에 대충 도포를 걸치고 나섰다. 정원 쪽으로 나갔더니 과연 보름달 아래 선 인영이 하나 보였다. 바둑돌처럼 군데군데 깔린 흰 자갈 위에 선 저 사람이 누구인지, 얼굴을 보지 않아도 벌써 알았다.
-종주?
안절부절 못 하고 걸어다니던 섭회상이 내 목소리를 듣곤 우뚝 멈췄다. 달빛 아래 휙 뒤를 돌아보는 모습이, 겁 먹은 처녀 귀신이라고 해도 믿을 법 했다.
-밀? 밀이야?
따지자면 만난 지 하루도 안 된 나를 그런 식으로 부르는 게 이해 안 가긴 했지만, 파드득 떨며 나에게 달려오는 섭회상이 어색하진 않았다. 나는 그에게 대강 공수해보였다.
-종주. 밤바람이 찬데 여기서 무엇하고 계십니까?
-밀아......
부채를 두 손에 쥔 채 우물쭈물하던 섭회상이 나에게 말했다.
-나랑 좀 앉아있을래?
-네?
얘 진짜 뭐지. 난 살면서 맹요와 내 첫 만남만큼 기막힌 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아닌가보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섭회상에게서 한 발짝 물러섰다.
-종주. 낮이면 몰라도 지금은 삼경이 넘었습니다. 남녀유별 모르세요?
-엥? 밀이 너 여자였어?
한 삼 초 동안 나는 아무런 반응을 못 했다. 그리고 삼 초 뒤 생각했다. 금광요한테 이 이야기 해주면 엄청 웃겠지. 시발. 나는 담뱃대에 불을 붙이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남자 맞습니다.
진짜 남장이라도 하고 올 걸. 그랬으면 일이 훨씬 더 수월했을지도. 그런 생각을 하던 나는 내 팔을 때리는 섭회상 때문에 놀라 두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럼 내가 여자라는 거야? 너무해.
-그럼 종주께선 사내셨던 건가요? 전혀 몰랐네요.
재밌네. 나는 섭회상이 입술을 삐죽거리는 것을 보며 좀 웃다가, 입 안의 쓴 맛을 없애려 장죽을 입에 물었다. 섭회상이 내 입에서 연기가 흘러나오는 것을 빤히 바라보아서 조금 낯간지럽긴 했다. 그러나 나는 티내지 않고 섭회상에게 물었다.
-저를 여기서 기다리신 건 아닐 테고, 뭘 하고 계시던 겁니까?
-그게......
잠시 우물거리던 섭회상이 종종걸음으로 걸어가더니 연못 옆 돌의자에 주저앉았다. 나는 어쩔까 하다가 다가가서 그 옆자리에 앉았다. 연못에 비친 보름달은 요사스러울 정도로 크고 둥글었다. 이상하네. 아무리 일문삼부지가 허수아비 종주라곤 해도, 주화입마 올 것을 염려해 혼인도 안 하고 자기 동생을 소종주 삼았던 섭명결이 자기 죽은 뒤를 대비 안 해놓았을 리가 없다. 유서 깊은 가문이니 섭명결이 대비 안 해놓았더라도 섭회상에게 충성하는 가신 수가 적지 않을 텐데 종주가 한밤중에 혼자 이렇게 끙끙 앓고 있다니.
-악몽을 꿨어.
갑자기 돌아온 대답에, 나는 퍼뜩 정신이 들어 섭회상을 바라보았다. 이제 보니 얇은 중의 차림인 채로,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발장난을 하고 있었다. 손에서는 검은색 부채가 달랑거렸다.
-보름달이 뜬 날이면 늘 악몽을 꿔. 그 날도 보름달이 떴거든. 밀이 넌 우리 형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알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겠지?
섭회상이 어색하게 웃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담배를 빨았다. 어째 입맛이 더 써졌다.
-장사를 못 지내드린 것 때문일까?
-예?
되묻고 나서 기억이 났다. 섭명결 시체 아직 못 찾았댔지. 나는 시무룩한 섭회상의 옆얼굴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적봉존께서 자기 동생을 얼마나 아꼈는지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걸요. 제가 적봉존이라면 도련...... 아니 종주께서 이렇게 악몽 때문에 잠 못 드시는 걸 보고 더 화가 날 걸요.
도련님이라고 할 뻔했네. 근데 진짜 누가 봐도 도련님처럼 생겼잖아. 눈엔 눈물이 맺힌 채로 내 말을 듣고 작게 키득거리는 게 영락없는 작은 도련님이었다.
-있지, 밀아. 내가 왜 처음 보는 너한테 이러는지 아니?
-모르죠.
-나도 잘 몰랐는데, 방금 네 대답 들으니까 알겠어. 널 보면 형님이 생각 나.
뭐?
자다가 뺨 맞은 기분이 되어 나는 기가 막힌 얼굴로 섭회상을 바라보았다. 여자한테 적봉존 닮았다는 쌍욕을 해놓고선 순한 얼굴로 헤헤 웃고 있는 저걸...... 진짜 어쩌지? 저 얼굴 아니었으면 한 대 쳤을 텐데. 근데 뭐, 애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닐 테고. 어쩌겠나. 내가 이리 생긴 걸. 하긴 어렸을 때부터 너는 남자로 태어났어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듣긴 했다. 나는 담배를 좀 더 깊게 빼물었다.
-이거 참 영광이네요. 종주.
섭명결 닮았다는 김에 나는 섭회상에게 어서 들어가서 자라고 잔소리를 했지만, 섭회상은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나는 혀를 차며 내 도포를 벗어 섭회상에게 덮어주었다. 섭회상은 얌전히 도포를 두른 채 앉아있었다. 내가 중의 차림인 거 보고 좀 민망해할 만도 한데 안 그러는 거 보면 얘 진짜 나 남자인 줄 아나? 그런 생각을 하던 차, 섭회상이 나에게 물었다.
-그런데 밀아. 너는 어디서 왔어?
그렇게 시작된 호구조사에 나는 익숙하게 답했다. 청하 끝자락에서 태어나 선문세가 이곳 저곳을 전전하며 실력을 쌓아왔다는 내 말에, 섭회상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듣다가 물었다.
-그런데 왜 하필 우리 가문에 왔니? 형님 살아계실 때면 몰라도 지금은 우리 뭐 없는데.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나는 그냥 절반의 솔직함을 선택했다.
-전 한산한 가문이 좋아요. 명색은 사대세가인데 할 일 없고 조용하니 얼마나 좋아요?
-그런데 그런 것 치곤 여기 굉장히 오기 싫었다는 얼굴인걸.
그게 보여? 내가 경악한 사이 섭회상은 나를 빤히 보다가 웃었다.
-너 영 거짓말은 못 하는구나. 재밌네.
-그게 아니라 그냥...... 일하기 싫은 겁니다. 일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하긴 그건 그래.
말을 마친 섭회상이 부채를 펼치더니 달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그런 그를 바라보다가 마침 생각난 것을 물었다.
-종주님, 그런데 몸은 정말 괜찮으세요? 소문을 들어보니 지난 달에 앓아누우셨었다던데.
-나야 뭐, 어릴 때부터 항상 몸이 약했으니까. 어릴 적엔 더 자주 쓰러졌었어. 지난 달 그건...... 형님 기일과 내 생일이 얼마 차이 안 나서 일어난 일일 뿐이야. 이맘때쯤엔 난 원래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거든.
주화입마 전조 증상은 아니었다는 건가. 그런데 왜 그럼 그리 소문이 난 거지? 각혈하며 피눈물이라도 쏟았나? 궁금하긴 했으나 저런 심약한 인간한테 너 주화입마 오고 있냐고 직구를 날릴 수는 없었다. 원래도 일문삼부지의 띨빵함에 관해선 좀 과할 정도로 소문이 나곤 했으니 이번 일도 그 일환인지 모른다.
섭명결도 서른 살 겨우 넘기고 죽었으니, 이번 사건이 사람들의 은밀한 기대 같은 것을 부추긴 걸지도 모르지. 세상은 참 잔인한 곳이다.
야밤에 그런 생각에 젖어들면 한도 끝도 없으니, 나는 고개를 저어 심란함을 쳐냈다. 일 하자, 일. 일단 섭회상 주화입마는 아니다. 섭명결 부른 것도 그냥 환각.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던 찰나, 섭회상이 말했다.
-있지. 내 옆에 있으려면 앞으로 네가 고생 많을 거야. 그래도 앞으로 잘 부탁해?
그러면서 말갛게 웃는 얼굴을 나는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잔인하게도. 잠시 동안 섭회상을 말없이 마주보고 있다가,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앞으로 천천히 절 괴롭히시고, 오늘은 이만 들어가시죠. 새벽바람은 밤바람보다 더 차요. 또 쓰러지시면 안 되지 않습니까.
섭회상은 웬일로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 머리를 쓰다듬을 뻔했으나 겨우 참았다.
침묵 속에서 나는 섭회상을 방까지 데려다주었다. 방에 들어가던 섭회상이 갑자기 멈칫하고 나를 돌아보았다. 복도 윗편에 매달린 종이등의 그림자가 그의 얼굴 위에 일렁거렸다. 그 모습이 지독할 정도로 음울해, 달빛 아래 보던 것과는 사뭇 다른 인상을 주었다.
-참, 밀아. 밤에 혼자서는 오랫동안 돌아다니지 않는 게 좋아. 주인을 잃은 뒤로 부정세는 밤만 되면 술렁거리거든. 게다가 내달이 귀월이니...... 조심해.
부정세의 주인은 당신 아니냐고 물을 새 없이, 방문이 소리내며 닫혔다.
청하 섭씨 관련해선 거의 다 뇌피셜임 원작 설정 모름 ㅈ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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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내가 부정세 수사 옷을 걸치고 섭회상을 대면하게 된 것이다. 청하는 진짜 가기 싫었고 부정세는 진짜 진짜 존나 가기 싫었는데 금광요에게 그렇게 말 안 한 건 여러 이유에서였다. 마지막 임무라는데 굳이 거절하는 게 웃기기도 했고, 그동안 내가 꾸준히 청하 섭씨 싫다는 티를 냈는데 그 인간이 내 호불호를 눈치 못 챘을 리가 없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래. 어차피 이거 끝나고 수진계 뜰 건데. 그런 생각으로 나는 길게 담배 연기를 뿜었다. 회색 연기가 흩어지자 마찬가지로 잿빛인 성벽이 모습을 드러냈다.
청하라는 이름이 웃길 정도로 청하는 척박하기 그지없는 땅이었다. 그나마 끝자락에 다다라야 개천이 좀 보이지, 중심부에는 산밖에 없다. 그런데 왜 청하가 그렇게 번성한 도시가 되었고 청하 섭씨는 존나 부자냐, 왜겠어. 부정세 뒷산에선 금이 나고 은이 나고 철이 나니 그렇지. 조상이 백정이었다는데 어찌어찌 짐승 뼈 바르는 기술을 땅에서 금맥 발라내는 기술로 바꿔서 잘 써먹었나보다. 근데 그걸 지금의 일문삼부지가 다 까먹고 있으니 어째.
뭐 부자는 망해도 삼 대는 간다니 나 살아있는 동안 부정세가 망하는 일은 없을 거였고, 망해도 내 알 바는 아니었다. 아니, 생각해 보면 나 때문에 망하려나. 금광요는 청하 섭씨를 어떻게 구워먹을 생각일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성벽에 부조로 새겨진 수두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당장이라도 뒤돌아 떠나고 싶었지만,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눈이 떼어지지도 않았다. 그때, 문 앞에 긴장감 없이 멍 때리며 서있던 병위가 나를 발견하곤 용건을 물었다. 그제야 나는 주박에서 풀려난 듯 참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장죽을 입에 물었다.
부정세 수사가 되고 싶어 찾아왔다는 내 말에, 병위들은 어리버리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보았다. 얘네도 들어온 지 얼마 안 됐군. 딱 보이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쨍하니 내리쬐는 햇빛을 손으로 가렸다.
오기 전에 알아보니, 청하 섭씨는 상시로 신입 수사를 모집 중이었다. 선문세가는 몇 년 단위로 수사를 끊어 받는 것이 보통이다. 이런 식으로 수사를 쉬이 받아들이는 가문들은 돈이 썩어넘치거나 아니면 아직 힘이 약해 몸집을 더 불려야 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탈주자가 많거나 셋 중 하나다. 청하 섭씨는 아무래도 셋 다인 듯했다. 사일지정에서 제일 큰 공을 세우고 명성이 대단했던 청하 섭씨가 이 지경이라니, 섭명결 죽은 게 당연하지. 죽었다가 어찌 되살아나도 이 꼴 보면 다시 주화입마 올 것이다.
아무튼 나야 파릇파릇한 신입 수사가 아니니 햇병아리 문하생들 사이에 섞여 잠입할 수는 없었다. 튀는 건 딱 질색이지만 어쩌겠는가. 직접 부정세 문을 두드릴 수밖에. 부정세 병위들은 자기들끼리 더 수군수군하다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부정세 문을 열어주었다.
금광요 말이 사실인지, 부정세는 사대 세가 중 하나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한적했다. 물론 규모 크고 사람이야 많지만, 초상집 특유의 분위기랄 게 있었다. 이건 뭐 금린대랑 완전 정반대네. 그래도 사대 세가 이름이 헛되진 않은지, 여전히 어느 정도 기강은 잡혀있었다. 성장에 대한 관심이나 의욕 같은 것 없이, 그저 관성에 가깝게 지탱되고 있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말하자면 한 때는 바위성이었던 모래성 같았다. 금광요가 톡 치면 무너질.
부정세 정문에서 연무장까지 거리는 그리 길지 않았다. 수사들을 훈련시키던 총령이라는 인간이 흙먼지를 헤치며 나에게 다가왔다. 섭종주 후사도 없이 쓰러졌다는 소식 퍼진 게 얼마 전인데, 그거 듣고 빠져나가는 놈은 그러려니 하겠으나 들어오는 놈은 수상하다는 듯 그는 험상궂은 얼굴로 나를 여기저기 살펴보았다. 나잇대가 제법 있어 보이는 것이, 아무래도 섭명결 때부터 계속 있던 사람이겠거니 싶었다. 그가 물었다.
-검 잡는 법이 특이하군. 어디서 수련했나?
-객경으로 전전하며 스무 해 가까이 살았는데 뭐 출신 가문 같은 것 있겠습니까? 그냥 여기 저기 돌아다니면서 익혔습니다.
-도를 수련해본 적은 있고?
-아뇨. 주화입마는 사절이어서요.
그 말에 순간적으로 분위기가 싸해졌다. 나는 안 그래도 험악한 총령 얼굴이 더 구겨지는 것을 보면서 입을 꾹 다물었다. 첫 단추부터 이렇게 잘못 꿰다니. 역시 청하 섭씨랑 나는 합이 안 맞아. 그런 생각을 하는데, 총령이 말했다.
-청하 섭씨 수사들이 모두 도를 수련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나, 도는 섭씨의 중심일세. 검을 수련하겠다면 청하 섭씨는 썩 좋은 선택지가 못 돼.
-상관 없습니다.
-보아하니 연차도 적지 않은 것 같은데, 굳이 검을 들고 다른 가문이 아닌 섭씨에 들어오려는 이유가 뭔가?
빡세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최대한 태연한 얼굴을 했다.
-제 고향이 청하입니다. 여기 저기 떠돌다가 청하로 돌아온 거예요. 제가 막 금단을 맺었을 때에는 청하 섭씨 문턱이 너무 높았지요. 하여 여기 저기 쏘다니며 실력 쌓다가 이제 고향에 맘 붙여 살아보려고 돌아온 겁니다.
총령이 수사가 되겠다고 찾아온 이에게 바란 건 섭씨를 위해 언제든 목숨을 바치겠다는 열정, 의리 뭐 요따위였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 같은 세상에 일면식도 없는 상대에게 헌신할 그런 순진한 인사가 어디 있나. 있다고 해도 파릇파릇한 십대면 모를까, 대충 세상 돌아가는 꼴 파악 마친 삼십대 후반이 그런 식의 각오 다지기를 하고 있겠냐.
총령도 생각이 같았는지, 탐탁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주먹을 말아쥐었다. 나는 그런 그에게 말했다.
-제가 섭씨에 뭐 커다란 은혜를 입어 그걸 갚아야 할 입장은 아니지만, 제 주인 섬기는 법도는 압니다. 그리고......
내가 품에서 추천장을 꺼내자, 총령은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니 왜 처음부터 그걸 보여주지 않았나?
-선후관계가 뭐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동영으로 떠나기 전에 일했던 가문으로부터 추천서를 받은 건 혹시나 해서였다. 항상 가문을 떠날 때 좋게 좋게 떠났었고 그쪽은 내가 금광요 사람이라는 걸 모르니 대부분은 아쉬워 하며 잘 보내줬었다. 추천서 받기도 어렵지 않았다.
사실 이럴 게 아니라 아예 생 신입인 양 부정세에 들어갈까도 진지하게 생각해봤지만, 그러면 종주 근처에 갈 수가 없을 거라 접었다. 전에는 이렇게까지 종주 가까이에서 일해본 적은 없지만...... 괜찮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혼자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총령이 추천서를 들여다보더니 말했다.
-이름이...... 밀이라고.
그건 내가 몇 개 정해두고 돌려쓰던 이름 중 하나였다. 지난번에도 그 이름을 썼던 것이 기억나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추천서를 받은 이상 자기가 내 처우를 결정하긴 어렵다고 총령은 나를 섭 종주에게 데려갔다. 그러면서 종주가 한 달 내내 자리보전 하다가 이제 겨우 일상에 복귀했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다 알고 온 사실이라 감흥은 없었다. 진짜 주화입마 왔던 거냐고 물어볼까 하는 생각이 일 초 들었지만 그것도 참았다.
연무장을 지나 본격적으로 진입하게 된 부정세 내부는 광활하고 척박한 듯 하면서도 나름대로 옹골찬 구석이 있었다. 경치 감상하듯 이리 저리 둘러보는데, 이상하게 수사와 가복들 시선이 나에게 꽂혔다. 부정세 들어오면서야 그렇다고 치겠는데, 이 안쪽에서까지 시선이 느껴지는 건 분명 이상한 일이었다. 옷도 평범하게 입고 왔는데, 뭔가 잘못된 게 있나. 나는 고민하다가 앞서가는 총령에게 물었다.
-제가 이상하게 생겼습니까?
총령이 잠시 멈춰서서 나를 돌아보다가, 다시 걸어나갔다.
-그건 아니고...... 그냥, 부정세에는 워낙 여수사가 없다 보니 그런 걸세.
아하. 나는 이마를 짚었다. 종주한테 눈에 안 띄기는 실패군. 좆됐네.
그래. 사실 그 때부터 일이 뭔가 안 풀려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일문삼부지가 있다는 후원에 들어선 순간 나는 내 인생이 또 한 차례 어그러졌음을 알았다.
일문삼부지, 섭회상은 멀리 커다란 소나무 그늘 아래 서 있었다. 그늘과 대비된 상앗빛 도포 때문에 그는 이상할 정도로 가까워보였다. 적어도 그 순간 내 눈에는 그 무엇보다도 또렷했다. 밑으로 늘어진 그의 오른손에는 흰 색 접선이 쥐여있었고, 살짝 든 그의 왼손 위에는 알록달록한 앵무새가 앉아있었다. 상앗빛 도포가 새까만 머리카락과 함께 바람에 흩날렸다. 그 뒷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기도, 또 잘 만들어진 인형 같기도 했다. 그가 인기척을 느꼈는지 돌아보았고, 그렇게 보게 된 희고 조그만 얼굴엔 병색이 완연했다. 그가 나를 발견하곤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아니.
아니 씨발 진짜로. 아무도 나한테 섭회상이 저렇게 생겼다는 걸 말 안 해줬잖아. 고소쌍벽이 잘생겼니 누가 또 미남이니 하는 이야기만 했지 섭회상이 이런 병약한 귀공자라곤 말 안 해줬잖아. 특히 금광요. 내 취향 누구보다 잘 알면서 한 마디도 안 해주다니. 섭회상이 앵무새를 여전히 손에 얹은 채로 하늘하늘 다가오는 동안 나는 입 안을 꽉 깨문 채 머릿속 소란을 진정시켰다. 가까이 다가온 섭회상이 내 얼굴을 살피더니, 시선을 내려 내 손에 여즉 들려있던 장죽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렇게 안 생겨선 흡연가인가? 아니면 반대로 혐연가인가? 후자로 추측하는 게 더 안전했기에, 나는 장죽을 등 뒤로 숨기려 했다. 그러나 섭회상이 나를 제지하듯 부채를 팔랑이더니, 가느다란 목소리로 총령에게 물었다.
-장유, 이 분은 누구셔?
-임장 양씨의 추천서를 가져온 주밀인데......
-밀? 꿀 밀 자야?
섭회상이 총령의 말을 끊더니 내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마른 입술을 핥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
-이름 정말 근사하다. 그리고 연죽도 정말 멋있는걸. 이건 분명히......
분명히 뭐? 나는 내 장죽을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미소 짓는 섭회상을 어리둥절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이어진 그의 말은 더 황당했다.
-좋아. 부정세에 이렇게 풍류를 잘 아는 수사가 생기다니. 마음에 들어.
-네?
풍류는 무슨 놈의 풍류? 난 돈 주고 음악 연주 한 번 들어본 적 없는 인간이다. 그러나 섭회상이 눈을 빛내며 아이처럼 박수를 쳤다. 그의 손 위에 앉아있던 새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아주 잘 훈련된 새인 듯 소나무 가지에 걸린 자기 새장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 멍하니 그 새를 바라보는 사이 섭회상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양 종주께 감사 인사를 보내야겠어. 오늘부터 밀이는 내 전속 수사다. 전속...... 직속...... 모르겠네. 아무튼 그거야.
-종주, 아무리 그래도 이렇듯 갑자기 곁에 두시는 건......
총령이 당황한 얼굴로 섭회상을 설득했으나, 섭회상은 고집스런 아이처럼 고개를 저었다. 나는 총령 편을 들려고 했다. 금광요는 나보고 섭회상을 관찰하랬지 시중 들라고 하진 않았으니까. 하지만 섭회상이 말했다.
-얼마 전이 내 생일이었잖아. 형님께서 나에게 보내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하려는데, 안 되겠느냐?
그러면서 쓰게 웃는 섭회상은 정원의 분위기를 무겁게 가라앉혔다. 총령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고, 내 입에서는 탄식이 흘렀다.
그래. 어쩌겠나. 나는 빠르게 상황을 받아들였다. 어차피 섭회상 눈에 든 이상 수습은 불가능하고, 금광요한테 편지 쓰면 뭔가 대책을 일러주겠지. 비 맞은 강아지 같은 섭회상의 얼굴을 바라보며 금광요를 생각하자니 양심이 따끔거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난처한 얼굴의 총령을 힐끗 바라본 뒤, 나는 섭회상에게 고개 숙여 깊이 공수해보였다.
-성심껏 모시겠습니다. 종주.
*
살면서 이 정도로 계획이 틀어진 적은 없었다. 대충 섭회상을 지켜보며 소식만 전해주고 꿀빨면 될 줄 알았던 나는 이제 낮에는 팔자에도 없는 섭씨 진법을 수련하고 저녁에는 섭회상 시중을 들어야 했다. 일반 수사들이 머무는 곳 대신 종주 방 근처에 따로 내 숙소가 배정된 건 그 때문이었다. 나에게 부정세를 소개해주겠다면서 비틀거리는 섭회상을 방으로 안내한 뒤, 총령이 나에게 부정세 지리를 간단히 알려주었다. 그는 대놓고 심기가 불편해보였다.
-이미 결정된 바 자네 처우에 대해 내가 더 뭐라 말을 얹을 순 없지만, 이렇게 된 이상 섭씨 수사로서 수련에 정진해야 할 것이야.
이 나이에 그렇게 빡세게 굴러야 할까...... 내가 이러려고 그동안 열심히 산 게 아닌데. 그렇게 토 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부정세를 한 바퀴 돈 채 숙소에 들러 수사복을 입고 나오니 벌써 오후였다. 연무장에 나가보니, 여자가 거의 없다는 총령 말이 사실이었다. 게다가 섭회상이 나를 자기 옆에 두기로 했다는 게 벌써 소문이 났는지 다들 나를 호기심 넘치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참 좆같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그동안 어떻게 지켜온 익명성인데...... 진짜 이 일 끝나면 수진계 떠나라고 하늘이 밀어주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살벌하게 몸을 풀었다.
체력 단련을 마치고 말을 걸어오는 수사들을 무시한 채 난 숙소로 곧장 돌아갔다. 뒤에서 수군거리는 목소리들이 들렸지만 뭐라고 뒷얘기를 하든 내 알 바는 아니고, 급한 일이 있었다. 내 진짜 주인에게 상황을 알려야 했으니까.
그렇게 금광요와 그날 밤 연락을 주고 받았다. 섭회상 얘 그냥 이상해...... 그렇게 서두를 떼어 보내자, 웃겨 죽는 기색이 역력한 답이 되돌아왔다. 내가 걱정했던 것과 달리, 금광요는 섭회상이 나를 자기 옆에 두기로 한 데 만족하는 듯싶었다. 참 독한 놈이라고 나는 새삼 생각했다. 돈도 많고 권력도 그 누구보다 강하면서 청하 섭씨까지 먹으려고 하다니. 인생 그렇게 살면 그게 사는 건가. 안 피곤한가. 그러면서 속으로 씹다가도, 낮에 만난 섭회상을 생각하면 어쩐지 머리가 멍해졌다. 섭명결 동생이 그런 미소년일 거라고 누가 생각했겠어. 아니, 생각해보니까 미소년은 아니구나. 서른다섯 넘었댔지. 그 얼굴이 서른다섯 넘은 얼굴이라니 그럼 더 사기 아닌가.
아무튼 수염 난 모지랭이 생각하다가 뒷통수를 얻어맞은 격이니, 내 머리통은 당연히 얼얼할 수밖에 없었다. 그냥 허접한 찌질이일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조실부모형한 비운의 귀공자였잖아. 은은히 흔들리던 상아색 소매가 눈 앞에 어른거렸다. 백정의 후손, 짐승 머리를 내건 부정세의 주인이 그렇듯 여리여리하다니. 나는 투박하게 생겨선 부드럽기 그지없는 재색 침상을 쓰다듬다가 자리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처음으로 섭명결이 불쌍해졌다. 저런 동생 두고 어떻게 눈을 감았냐. 그런 생각을 하며 잠들었던 나는 방 밖에 자꾸 느껴지는 인기척 때문에 잠을 깼다.
축 시쯤 됐으려나. 아직 방 안은 깜깜했다. 복도 쪽이 아닌 정원 쪽에서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나는 머리를 긁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고민했다. 처음 온 놈이 밤에 종주 방 근처를 돌아다니면 의심을 살 게 분명한데, 괜히 못 들은 척 하고 다시 잤다가 종주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그것도 문제였다. 결국 나는 침상 옆에 놓여있던 장죽으로 시선을 옮겼다. 뒤집혀 있으면 자고 안 뒤집혀 있으면 나가야지 했는데 담배통이 위를 향해 있었다.
-이렇게 된 거 하나 태우고 들어와야지.
그렇게 중얼거리며 나는 중의 위에 대충 도포를 걸치고 나섰다. 정원 쪽으로 나갔더니 과연 보름달 아래 선 인영이 하나 보였다. 바둑돌처럼 군데군데 깔린 흰 자갈 위에 선 저 사람이 누구인지, 얼굴을 보지 않아도 벌써 알았다.
-종주?
안절부절 못 하고 걸어다니던 섭회상이 내 목소리를 듣곤 우뚝 멈췄다. 달빛 아래 휙 뒤를 돌아보는 모습이, 겁 먹은 처녀 귀신이라고 해도 믿을 법 했다.
-밀? 밀이야?
따지자면 만난 지 하루도 안 된 나를 그런 식으로 부르는 게 이해 안 가긴 했지만, 파드득 떨며 나에게 달려오는 섭회상이 어색하진 않았다. 나는 그에게 대강 공수해보였다.
-종주. 밤바람이 찬데 여기서 무엇하고 계십니까?
-밀아......
부채를 두 손에 쥔 채 우물쭈물하던 섭회상이 나에게 말했다.
-나랑 좀 앉아있을래?
-네?
얘 진짜 뭐지. 난 살면서 맹요와 내 첫 만남만큼 기막힌 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아닌가보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섭회상에게서 한 발짝 물러섰다.
-종주. 낮이면 몰라도 지금은 삼경이 넘었습니다. 남녀유별 모르세요?
-엥? 밀이 너 여자였어?
한 삼 초 동안 나는 아무런 반응을 못 했다. 그리고 삼 초 뒤 생각했다. 금광요한테 이 이야기 해주면 엄청 웃겠지. 시발. 나는 담뱃대에 불을 붙이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남자 맞습니다.
진짜 남장이라도 하고 올 걸. 그랬으면 일이 훨씬 더 수월했을지도. 그런 생각을 하던 나는 내 팔을 때리는 섭회상 때문에 놀라 두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럼 내가 여자라는 거야? 너무해.
-그럼 종주께선 사내셨던 건가요? 전혀 몰랐네요.
재밌네. 나는 섭회상이 입술을 삐죽거리는 것을 보며 좀 웃다가, 입 안의 쓴 맛을 없애려 장죽을 입에 물었다. 섭회상이 내 입에서 연기가 흘러나오는 것을 빤히 바라보아서 조금 낯간지럽긴 했다. 그러나 나는 티내지 않고 섭회상에게 물었다.
-저를 여기서 기다리신 건 아닐 테고, 뭘 하고 계시던 겁니까?
-그게......
잠시 우물거리던 섭회상이 종종걸음으로 걸어가더니 연못 옆 돌의자에 주저앉았다. 나는 어쩔까 하다가 다가가서 그 옆자리에 앉았다. 연못에 비친 보름달은 요사스러울 정도로 크고 둥글었다. 이상하네. 아무리 일문삼부지가 허수아비 종주라곤 해도, 주화입마 올 것을 염려해 혼인도 안 하고 자기 동생을 소종주 삼았던 섭명결이 자기 죽은 뒤를 대비 안 해놓았을 리가 없다. 유서 깊은 가문이니 섭명결이 대비 안 해놓았더라도 섭회상에게 충성하는 가신 수가 적지 않을 텐데 종주가 한밤중에 혼자 이렇게 끙끙 앓고 있다니.
-악몽을 꿨어.
갑자기 돌아온 대답에, 나는 퍼뜩 정신이 들어 섭회상을 바라보았다. 이제 보니 얇은 중의 차림인 채로,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발장난을 하고 있었다. 손에서는 검은색 부채가 달랑거렸다.
-보름달이 뜬 날이면 늘 악몽을 꿔. 그 날도 보름달이 떴거든. 밀이 넌 우리 형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알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겠지?
섭회상이 어색하게 웃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담배를 빨았다. 어째 입맛이 더 써졌다.
-장사를 못 지내드린 것 때문일까?
-예?
되묻고 나서 기억이 났다. 섭명결 시체 아직 못 찾았댔지. 나는 시무룩한 섭회상의 옆얼굴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적봉존께서 자기 동생을 얼마나 아꼈는지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걸요. 제가 적봉존이라면 도련...... 아니 종주께서 이렇게 악몽 때문에 잠 못 드시는 걸 보고 더 화가 날 걸요.
도련님이라고 할 뻔했네. 근데 진짜 누가 봐도 도련님처럼 생겼잖아. 눈엔 눈물이 맺힌 채로 내 말을 듣고 작게 키득거리는 게 영락없는 작은 도련님이었다.
-있지, 밀아. 내가 왜 처음 보는 너한테 이러는지 아니?
-모르죠.
-나도 잘 몰랐는데, 방금 네 대답 들으니까 알겠어. 널 보면 형님이 생각 나.
뭐?
자다가 뺨 맞은 기분이 되어 나는 기가 막힌 얼굴로 섭회상을 바라보았다. 여자한테 적봉존 닮았다는 쌍욕을 해놓고선 순한 얼굴로 헤헤 웃고 있는 저걸...... 진짜 어쩌지? 저 얼굴 아니었으면 한 대 쳤을 텐데. 근데 뭐, 애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닐 테고. 어쩌겠나. 내가 이리 생긴 걸. 하긴 어렸을 때부터 너는 남자로 태어났어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듣긴 했다. 나는 담배를 좀 더 깊게 빼물었다.
-이거 참 영광이네요. 종주.
섭명결 닮았다는 김에 나는 섭회상에게 어서 들어가서 자라고 잔소리를 했지만, 섭회상은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나는 혀를 차며 내 도포를 벗어 섭회상에게 덮어주었다. 섭회상은 얌전히 도포를 두른 채 앉아있었다. 내가 중의 차림인 거 보고 좀 민망해할 만도 한데 안 그러는 거 보면 얘 진짜 나 남자인 줄 아나? 그런 생각을 하던 차, 섭회상이 나에게 물었다.
-그런데 밀아. 너는 어디서 왔어?
그렇게 시작된 호구조사에 나는 익숙하게 답했다. 청하 끝자락에서 태어나 선문세가 이곳 저곳을 전전하며 실력을 쌓아왔다는 내 말에, 섭회상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듣다가 물었다.
-그런데 왜 하필 우리 가문에 왔니? 형님 살아계실 때면 몰라도 지금은 우리 뭐 없는데.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나는 그냥 절반의 솔직함을 선택했다.
-전 한산한 가문이 좋아요. 명색은 사대세가인데 할 일 없고 조용하니 얼마나 좋아요?
-그런데 그런 것 치곤 여기 굉장히 오기 싫었다는 얼굴인걸.
그게 보여? 내가 경악한 사이 섭회상은 나를 빤히 보다가 웃었다.
-너 영 거짓말은 못 하는구나. 재밌네.
-그게 아니라 그냥...... 일하기 싫은 겁니다. 일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하긴 그건 그래.
말을 마친 섭회상이 부채를 펼치더니 달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그런 그를 바라보다가 마침 생각난 것을 물었다.
-종주님, 그런데 몸은 정말 괜찮으세요? 소문을 들어보니 지난 달에 앓아누우셨었다던데.
-나야 뭐, 어릴 때부터 항상 몸이 약했으니까. 어릴 적엔 더 자주 쓰러졌었어. 지난 달 그건...... 형님 기일과 내 생일이 얼마 차이 안 나서 일어난 일일 뿐이야. 이맘때쯤엔 난 원래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거든.
주화입마 전조 증상은 아니었다는 건가. 그런데 왜 그럼 그리 소문이 난 거지? 각혈하며 피눈물이라도 쏟았나? 궁금하긴 했으나 저런 심약한 인간한테 너 주화입마 오고 있냐고 직구를 날릴 수는 없었다. 원래도 일문삼부지의 띨빵함에 관해선 좀 과할 정도로 소문이 나곤 했으니 이번 일도 그 일환인지 모른다.
섭명결도 서른 살 겨우 넘기고 죽었으니, 이번 사건이 사람들의 은밀한 기대 같은 것을 부추긴 걸지도 모르지. 세상은 참 잔인한 곳이다.
야밤에 그런 생각에 젖어들면 한도 끝도 없으니, 나는 고개를 저어 심란함을 쳐냈다. 일 하자, 일. 일단 섭회상 주화입마는 아니다. 섭명결 부른 것도 그냥 환각.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던 찰나, 섭회상이 말했다.
-있지. 내 옆에 있으려면 앞으로 네가 고생 많을 거야. 그래도 앞으로 잘 부탁해?
그러면서 말갛게 웃는 얼굴을 나는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잔인하게도. 잠시 동안 섭회상을 말없이 마주보고 있다가,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앞으로 천천히 절 괴롭히시고, 오늘은 이만 들어가시죠. 새벽바람은 밤바람보다 더 차요. 또 쓰러지시면 안 되지 않습니까.
섭회상은 웬일로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 머리를 쓰다듬을 뻔했으나 겨우 참았다.
침묵 속에서 나는 섭회상을 방까지 데려다주었다. 방에 들어가던 섭회상이 갑자기 멈칫하고 나를 돌아보았다. 복도 윗편에 매달린 종이등의 그림자가 그의 얼굴 위에 일렁거렸다. 그 모습이 지독할 정도로 음울해, 달빛 아래 보던 것과는 사뭇 다른 인상을 주었다.
-참, 밀아. 밤에 혼자서는 오랫동안 돌아다니지 않는 게 좋아. 주인을 잃은 뒤로 부정세는 밤만 되면 술렁거리거든. 게다가 내달이 귀월이니...... 조심해.
부정세의 주인은 당신 아니냐고 물을 새 없이, 방문이 소리내며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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