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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27 21:53
내용 완전 달라져서 압해라고 하기도 힘든 bgsd: https://hygall.com/290048706
줖 닫힌 동안 진정령 다시 보고 옛날에 썼던 무순 복습하다가 압해하고 싶어져서 압해했는데, 쓴 김에 그냥 끝까지 다 쓰고 올리자 해서 쓰다보니까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됨
ㄱㅇ이랑도 내용 거의 다르지만 대사나 장면 오마주 있음
섭회상너붕붕인데 다음편까지는 금광요만 나옴 ㅈㅇ......
내가 일문삼부지 섭회상을 만난 데 대해 이야기하려면 금광요를 먼저 이야기해야 한다.
내가 금광요를 처음 만난 건 금린대에서였다. 생각해보면 그 때가 내 전성기였다. 십대 초반에 금단을 맺은 뒤, 나는 늘 돈을 좇아 이 가문 저 가문의 외성수사로 전전해오며 가문당 일 년을 채 채우지 못했다. 그러다가 나름 오대 세가 중 하나라는 난릉 금씨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오대 세가는 괜히 오대 세가가 아니라 봉급도 이전과 비교 안 될 만큼 두둑했고, 한 한 달 정도는 어깨에 힘 좀 들어가고 좋았다. 이번에는 꼭 뼈를 묻으리라 다짐했었다. 오대세가의 수사가 되는 것은 모든 수련자들의 꿈이고, 그래서 내 목표이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세상사 호락호락한 법이 없는지라, 돈 많이 주는 덴 다 이유가 있었다. 금씨 성 가진 것들은 높은 확률로 대부분 싸가지가 없었고, 수사와 문하생이 차고 넘치다보니 개중에 개새끼들도 존나 많았다. 특히 종주라는 놈은 아랫도리 함부로 놀린다고 온 수진계에 다 소문이 났는데 쪽팔리지도 않은지 일주일에 한 번씩 투연청에 여자들을 불러와 별 지랄을 다 해댔다. 그 꼴을 볼 때마다 흐린 눈을 한 채 나는 겨우 반 년을 버텼다.
나야 군대로 따지면 일개 졸에 불과했으니 종주나 그 가족을 마주칠 일은 많지 않았지만, 그 날은 소종주였던 금자헌의 열 몇 번째 생일이었고 돈이 썩어나는 난릉 금씨 아니랄까봐 생일 축하연 규모도 장난이 아니었다. 각 가문의 높으신 분들이 금린대 계단을 오르는 동안 나는 그 맨 밑에서 다른 수사들과 함께 정자세로 석상처럼 서 있었다. 한겨울이어서 존나 추웠는데 금씨 가오 살리겠다고 피풍의도 못 입게 했다. 이거 한다고 돈 더 주지도 않으면서 별 개같은...... 아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때였다.
-뭐야.
뭔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는 걸 보고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순간 난 또 종주 새끼가 자기 아들 생일이라고 뭐 신개념 공연이라도 하는 줄 알았다. 생각해보면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군. 어쨌든, 옆자리에 서 있던 수사가 귓속말로 사정을 일러주었다.
-종주님 사생아야. 아까부터 계속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종주님 뵙겠다고 기다리고 있었잖아. 날을 잘못 잡았지.
나는 그제야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게 물체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그것도 아직 어린 남자애. 힐끔 뒤를 돌아보자, 저 위에 금색 소매를 떨치며 돌아서는 금광선의 뒷모습이 보였다. 다시 고개를 돌리자 계단 밑에 엎어져 있는 남자애 머리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당연하지. 금린대 계단 높이를 생각할 때, 머리만 깨졌으면 다행이었다. 입김이 나오는 걸 보면 살아있긴 한 것 같은데...... 그땐 나도 추위로 머리가 굳어있던 터라, 상황을 받아들이는 데까지 잠시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그 찰나의 순간에, 나대기 좋아하는 금씨 아니랄까봐 또 웬 잡놈이 나섰다.
-천한 것이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와서 소란이야! 금 공자님 생신에 재뿌리지 말고 썩 꺼져!
내 무수히 많은 단점 중 하나가 생각하기 전에 행동한다는 것인데, 그 날도 그랬다. 나는 더 생각할 것 없이 앞으로 걸어가 바닥에 쓰러진 남자애를 등에 업었다. 그러자 나에게 넌 또 뭐냐며 주먹이 날아왔지만, 그걸 막는 건 쉬운 일이었다. 고개를 들자 어제까지만 해도 같이 금광선 뒷담을 까던 수사들은 나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더럽다, 진짜.
내 또 다른 단점은 생각하기 전에 말하곤 한다는 것이었다. 육성으로 내뱉은 뒤, 나는 등에 커다란 혹을 단 채 그대로 금린대를 걸어 나왔다.
금린대 입구까지 한 절반쯤 왔을까, 얌전히 업혀있던 남자애가 갑자기 몸을 비틀었다. 솔직히 나도 그때까지 체구가 크지 않았던지라, 나랑 비슷한 키의 남자를 업고 있는 게 꽤 버거웠다. 나는 최대한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자 지금 머리에서 피나는 거 알죠? 제때 의원 안 만나면 어디 한 군데 영영 못 쓸 수도 있으니까 그냥 얌전히 있어요. 데려다줄게.
그 말에 잠시 몸을 굳혔던 남자애가 아예 힘을 풀었다. 그리고 모기만한 목소리로 감사하다고 중얼거렸다. 어깨가 축축한 게 피 때문인지 눈물 때문인진 몰라도 어차피 버릴 옷이었으니 상관 없었다. 존나 비싼 옷이긴 했는데, 어쩌겠나. 잠옷으로 입을 것도 아니고.
그런 생각을 했다.
그게 훗날 사일지정에서 큰 공을 세우고 염방존이 되신 금광요와 나의 첫만남이었다. 그때는 아직 맹요였지. 대충 근처 의원에 가서 보여주니 다리와 팔, 갈비에 공평하게 금이 가고 다행히도 뇌진탕은 없다고 했다. 자세히 보니 비단옷을 입혀놨다면 충분히 한 세가의 공자라 여길 수 있을 정도로 얼굴이 고왔지만, 한창 때 소년 치곤 몸집이 너무 작았다. 조그만 얼굴에 서린 감정도 보통 그 나이대 소년들이 가질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나도 그때는 아직 십대였지만.
-맹요가 감사 인사 올립니다. 이 은혜는 꼭 잊지 않겠습니다.
그러면서 공수하는 소년을 보자니 속에서 뭔가 치밀어 올랐다. 금광선의 거기를 자르면 선계에서도 잘 참작해서 등선에 점수를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데, 맹요가 커다란 눈을 굴리며 물었다.
-저, 수사님의 성함은......
-그냥 헌이라고 불러요.
잊지 않겠다는 듯 꾸벅 절한 맹요가 진찰받은 값을 치르려는데 허름하고 홀쭉한 그의 돈 주머니를 차마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애비라는 인간한테 채이고 자기 약값을 손수 계산하는 그 심정이 어떨지 생각하자 너무 고통스러워서, 비록 나는 일 년에 은자 한 두 개 쓰고 살지만 인생 한 번 살면서 이런 사치도 저질러 보는 거지 하는 마음으로 진찰비도 약값도 치르고 데려다가 밥도 먹였다. 그게 거의 내 석 달치 생활비였다. 밥 먹이면서 나이를 물어보니 오늘 열 여섯이 됐다길래...... 쟤는 전생에 뭐 나라라도 팔아먹었나 눈물을 삼키며 국수도 한 그릇 먹였다. 자기랑 생년월일이 똑같은 이복형제는 투연청에서 온갖 좋은 것들을 다 먹고 있을 텐데. 진짜 금광선 더러운 놈, 하는 욕이 목끝까지 차올랐지만...... 그래도 자기 아버지라고 기분 나빠할까봐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았다.
밥을 다 먹인 뒤에는 술도 먹였다. 기어이 눈물을 보이는 맹요에게 술 한 잔 따라주며 우리 한 살 차이니 말 놓으라고 하자, 자기도 술이 고프긴 했는지 잔을 비우며 나에게 사과했다.
-미안해. 나 때문에 금린대를 떠나게 되었으니......
-됐어. 난 어차피 돈 많이 줘서 난릉 금씨 간 거였지, 출세에는 관심 없거든. 높으신 분들이랑 엮이면 골 아파.
-그래도......
-진짜야. 난 돈만 주면 다른 세가 어디든 상관 없고, 지금 당장 돈이 궁하진 않으니까 괜찮아. 나보다는 네가 문제 아냐? 어디로 가려고?
내 질문에 두 눈을 내리깐 채로 잠시 말이 없던 맹요는 청하로 갈 건데 함께 갈 생각 없냐고 물었고, 나는 단박에 고개를 저었다. 내 단호한 반응에 놀란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던 맹요는 내 대답을 듣더니 이내 애매하게 웃었다.
-거긴 힘들기로 유명한 곳이잖아. 수사들도 많이 죽고. 나는 그냥 편하게 돈 벌면서 살고 싶다.
-넌 돈을 정말 좋아하는구나. 그런데 왜 나를 도왔어?
-짐승이 돈 밝히는 거 봤어? 난 인간이니까 돈 밝히는 거야. 그리고 그 자리에서 가만히 있으면 그게 인간이냐?
내 딴에는 나름 논리적이라고 생각해서 한 말이었는데, 맹요가 자기가 평생 들은 말 중에서 가장 웃기다는 듯 눈에 눈물을 매단 채로 소리내어 웃었다. 그날 우리는 밤을 새워가며 이야기를 나눴고, 다음날 아침에 헤어졌다. 맹요는 은혜를 잊지 않겠다는 말을 거듭한 뒤 멀어져갔다. 그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의리로 남아 바라보던 나는 이윽고 반대 방향으로 걸어나갔다.
만약 그때 내가 그냥 맹요와 함께 걸었다면, 나는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조그만 얼굴을 십 년쯤 더 일찍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씨발.
내가 이런 탄식을 내뱉게 된 경위를 밝히기 위해선 아무래도 과거 이야기를 조금 더 해야겠다. 삼 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두 번째로 만나게 되었을 때에도 맹요는 여전히 맹요였다. 맹요를 청하로 보낸 뒤, 나는 곧장 난릉을 떠나 기산 근처 어느 중소세가에 들어갔었다. 당연히 봉급은 적었다. 그래도 난릉 금씨 생활에선 없었던, 뭐랄까, 여유랄까 하는 것이 있었다. 위렵 준비니 청담회니 뭐니 하며 새빠질 필요 없이, 그냥 수련하고 야렵 좀 하다 보면 시간이 쑥쑥 갔다. 그러는 사이 기산 온씨를 중심으로 수진계 분위기가 험악해졌고, 가문의 직계 공자가 끌려갔다가 시체가 되어 돌아왔다. 하나 뿐인 아들이 죽어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몸을 사리는 종주를 보자니 가슴이 답답해져서 좀 쉴까 하는 생각으로 긴 휴가를 낸 참이었다.
-아헌.
정말 뜬금없이 기산 길거리에서 만난 맹요가 나를 불렀을 때 나는 대답 못하고 눈만 깜박였다. 삼 년 만에 만난 맹요는 어쩐지 분위기가 확 달라져 있었다. 길거리에서 간단히 안부를 나누는 동안 맹요는 불안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런 맹요가 신경쓰여 나는 객잔에 들어가는 대신 그냥 그를 내 숙소로 데려갔다. 따지자면 태어나서 이제 두 번 만난 사이였던 건데, 이상하게 맹요가 별로 어색하지 않았다. 아마 맹요는 여자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고왔고, 난 항상 예쁘고 귀여운 것들에 무방비했으니까 그래서 그랬던 건지도.
얼른 가 봐야 한다던 맹요는 막상 내가 식사를 하고 가라고 붙잡자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대충 상을 차려 앉으니 꼭 죽마고우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전혀 어색함이 없었다. 다행히 그건 상대방도 마찬가지인 듯 했다. 용무가 있는 거냐 묻자 그냥 네 얼굴이 보고 싶었다며 고개를 저었기 때문이다. 나도 종종 그가 생각났던 것이 사실이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술병을 기울였다.
-그런데 너 청하로 간다더니 왜 옷에 수두문이 없냐? 때려치웠어?
-그렇게 됐네.
-왜, 적봉존이 너 갈궜어?
-응. 그러더라.
한 박자 늦게 대답하는 맹요가 울 것 같은 얼굴이라, 나는 괜히 담담하게 그 어깨를 두드렸다.
-내가 뭐랬냐. 청하 섭씨 별로라니까. 잘 관뒀어. 안 그래도 얼마 전에 부정세가 난장판 됐다는 이야기 듣고 네 생각 났는데, 무사해서 다행이야. 적봉존은 뭐...... 죽든지 살든지.
내 말에 맹요는 기어이 눈물을 흘렸다. 그러면서도 웃었다. 뭔 일이 있었는진 몰라도 기어이 정신이 나갔구나 싶었으나 입 다물고 묵묵히 술을 따라주자, 그는 곧 자기가 나를 수소문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외에 청하에서의 이야기는 전혀 없었다.
그리고 다음날, 맹요는 나를 찾아와 웬 보따리 같은 것을 바리바리 안겨주며 부탁할 게 나밖에 없다고, 그걸 부디 잘 숨겨달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냥 그렇게 했다. 뭔지 별로 궁금하지도 않아서 열어보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날 맹요가 다시 나를 찾아와 그것들을 받아갔다. 그리고 그렇게 끝이었다.
그때 내가 맡아주었던 보따리가 무려 그 운심부지처의 몇 백 년 된 고서들이었다는 걸 나는 사일지정이 끝난 뒤에야 알았다. 맹요가 고소 남씨의 종주이자 택무군으로 이름난 남희신을 숨겨주고 있었다는 것도, 섭명결에게 쫓겨나 기산 온씨의 첩자로 활동하고 있었다는 것도, 그 온약한의 심장을 찌르고 화려하게 염방존 금광요가 되어 수진계 모두의 앞에 섰다는 것도 나는 진짜 몰랐다.
사일지정에 당연히 참가는 했었다. 정의로운 성격은 전혀 못 되지만 그래도 금단 있는 수사인데 아예 튀었다간 다시 수진계에 발들이기 쪽팔릴 것 같아서...... 그리고 그냥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서.
열심히 싸우다가 사람들이 나를 조금 알아본다 싶으면 다른 곳으로 옮겨가 싸웠다. 나는 나 같은 신분으로 수진계 바닥에서 살아남으려면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게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차로는 온씨 눈에 안 띄는 게 중요했고, 이차로는 수진계에서 이름 안 팔리는 게 중요했다. 유명세 그거야말로 목숨값이었다. 적어도 그때 내가 생각하기로는 그랬다. 아예 어디 가문 직계손인 게 아닌 이상 유명해봐야 화살받이밖에 더 되겠는가.
바꿔 말하면, 살아남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정도로 험한 시대였다. 불야천으로 모두가 모인 뒤에는 상대적으로 덜했지만.
아무튼 그렇게 싸우다 보면 이릉노조 위무선이 내가 찌른 온씨 시체를 흉시로 만들어 쓰는 꼴도 보고, 금자헌이 운몽 강씨 장녀를 면박 줬다가 위무선한테 주먹으로 면상을 맞았다는 이야기도 듣고, 하여튼 사건이 하도 많고 내 목숨 부지하는 게 일이라 맹요에게 관심 가질 새가 없었다. 가끔 생각날 때마다 그의 안녕을 바라보는 게 다였다.
그러다가 불야천성을 공격한지 딱 열흘째 되던 아침이었다. 나는 팔에 생긴 상처에 지혈제를 뿌리고 있었다. 다음은 목일 수도 있었다. 심란해 하던 찰나, 저 멀리서부터 웅성거림이 퍼지더니 갑자기 우리가 이겼다는 것이다. 옆에 있던 얼굴도 모르는 사람과 얼싸안고 좋아하던 나는 온약한을 죽인 게 적봉존이 아닌 맹요라는 이야기를 듣곤 얼이 터졌고, 그에 대해 줄줄이 알게 된 사실들에 또 잠시 넋이 나가 있었다.
이걸 축하한다고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염방존이라는 근사한 호도 생기고 택무군, 적봉존 같은 명사들과 의형제도 맺고...... 그런 건 당연히 축하할 일이었다. 그러나 그게 금광선 아들 되기를 전제한 거라면 과연 축하할 일인지 알 수 없었다. 물론 맹요는 자기 어머니가 자기에게 어떤 당부를 했는지 첫 만남 때 술에 취한 채 내게 말했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무슨 수를 써서든 금광선에게 인정받고 싶어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금광선 아들 되기를 목표로 삼고 인생을 사는 건 소중한 생을 낭비하는 것이었지만, 그거 하나 이루려고 독기 가득하게 살아보겠다는 애한테 그런 말을 할 수는 없던 기억이 있다.
그러니 축하해 줘야겠지. 내 축하는 필요 없겠지만. 전쟁이 끝나 더 척박한 불야천 성, 멀리서도 화려한 금씨 일가를 바라보며 나는 잠시 감상에 젖었다. 가족. 가족이라. 핏줄이라는 게 뭐길래 누구는 신경쓰지도 않고 걷어차고, 죽이고…… 또 누구는 거기에 목을 매는지.
사일지정이 다 마무리된 뒤, 적당히 두둑한 보상을 챙겨 나는 고향으로 내려갔다. 사실 고향이 무척 가까워서 내려간다고 하기도 뭐했다. 기산은 청하 바로 옆이었는데, 내 고향은 저기 청하 끝자락인 하동 촌구석이었다. 그래서 내가 처음 몸 담은 곳도 하동 부씨였다. 거기서 수사로 좀 지내다가 세상 구경도 할 겸 돈도 더 벌 겸 객경으로 빠져 이곳 저곳 떠돌게 되었던 것이다.
즉 내가 고향에 발을 댄 건 거의 십 년만이었다. 내가 그동안 부친 돈이 헛되지 않은지, 할머니는 닭도 기르고 채마밭도 가꾸며 정정히 잘 살아있었다. 금단도 없이 일흔 살 넘은 노인 치곤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거의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어언 십 년만에 얼굴을 보는 건데도, 할머니는 내게 잘 돌아왔다는 인사 따위 없었다. 나도 할머니에게 굳이 인사를 할 기분은 아니었다. 나는 할머니가 다듬고 있는 고사리를 집어들며 말했다.
-나 일 년만 여기 있을 거야.
할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도 대답을 기대하지 않고 고사리를 다듬었다. 간헐적으로 이어지는 할머니의 기침 소리만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아무튼, 일 년 동안 나는 수련 외에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쉬었다. 그동안 모아놓은 돈이 꽤 있었고 돈 나갈 일도 거의 없어서, 돈 걱정 없이고도 살 만 했다. 말 그대로 수련에만 집중할 수 있는 것도 좋았다. 하지만 일 년 이상은 주머니가 넉넉하대도 마음이 좀 힘들었다.
그리고, 계속 귀에 따라붙는 할머니의 기침소리도 슬슬 거슬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일 년이 좀 안 된 어느날 밤이었다. 평소처럼 수련을 끝내고 돌아온 뒤, 할머니와 좀 떨어져 앉아 장죽에 담뱃잎을 채워넣고 있었다. 이제 슬슬 또 일을 구해 봐야지 생각하다가, 창 밖의 귀뚜라미 우는 소리를 끊으며 문득 입을 열었다.
-곧 떠날 거니까, 내가 와 봐야 되면 빈 종이라도 보내. 장례는 제때 치러야 될 것 아냐.
그때, 밖에서 갑자기 인기척이 느껴졌다. 할머니를 등 뒤에 두고 침착하게 검을 챙겨 문을 열자, 이제는 진짜 이마에 단사를 찍고 오사모까지 쓴 맹요, 아니. 금광요가 있었다.
-아니 왜 이런 누추한 곳까지 오셨어?
반가움보다 얼떨떨함이 더 커서 그렇게 묻자, 금광요는 곱게 보조개 패인 얼굴로 환히 웃어보였다.
차라고 대접할 것도 우습고, 할머니한테 설명하기도 귀찮아 난 아예 방을 나와 뒷마루에 앉았다. 금광요는 선뜻 내 옆에 앉았다.
반짝이는 금성설랑포를 입은 염방존과 그렇게 초가집 뒷마당에서 독대를 하자니 이게 꿈인지 뭔지 알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그새 큰 것 같긴 해도, 여전히 나와 키가 엇비슷한 그의 머리 위 오사모가 가을 달빛 아래 새까만 광택을 냈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계속 담배연기만 뿜었더니, 상대쪽에서 먼저 입을 열었다.
-고맙다는 말을 하러 왔어, 아헌.
-고마울 게 뭐가......
-전부. 어떻게 해야 너한테 이 고마움을 표현할 수 있을까 생각해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네가 좋아할 만한 건 하나더라고.
금광요는 아무렇지도 않게,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네가 여생을 보내는 데 필요한 자금을 내가 전부 대주겠다고. 너무 선선히 그렇게 말하는 그 얼굴을 나는 입을 떡 벌린 채 쳐다만 봤다. 채 못 들이마신 담배연기가 얼굴을 훅 덮었다. 그 꼴이 여간 웃기지 않았는지, 금광요가 소리내어 웃었다. 가슴이 뻥 뚫린 듯 시원한 웃음소리였다.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저었다. 금광요는 물론 맞게 봤다. 난 세상에서 돈이 제일 좋았다. 하지만 내가 벌지도 않았는데 들어온 돈은 아니었다. 그런 돈은 나중에 저승길 노잣돈 되기 십상인 걸 나는 알고 있었다. 내 말에 금광요는 더 크게 웃었다.
-하지만 너는 돈이 필요하잖아. 여유롭게 조모님을 부양하고 싶지 않아?
-그건......
-내 말 들어. 하나뿐인 가족의 마지막은 꼭 네가 직접 배웅해야 해. 그러지 않으면 후회가 남아.
그렇게 말하며 금광요는 시선을 떨궜다. 오똑한 콧망울에 달빛이 창백하게 맺혀 꼭 눈물 같았다. 그 순간 한숨이 나온 건 정말 불가항력이었다. 나와 할머니의 관계는 너와 네 어머니와의 관계와는 다르다고,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사실 돈이 그렇게 궁하지는 않았다. 중요한 건 금광요가 나를 여기까지 찾아와줬다는 그 사실이었고, 나는 그를 그냥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결국 담배를 뻑뻑 피우며 염방존의 자비를 받아들였다.
조건부로.
-돈을 주는 게 아니라 빌려주는 걸로 해. 나중에 장례 치르고 나면 일해서 갚을게.
내 말을 듣고 잠시 내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던 금광요가 물었다.
-후회 안 하겠어?
나는 힘차게도 고개를 끄덕였다. 금광요도 그에 대답하듯 작게 고갯짓을 했다.
-좋아. 네 몸값은 후하게 쳐줄게.
그렇게 금광요와 나 사이 고용계약이 체결된 셈이었다. 나는 장죽을 한 손에 쥔 채 넙죽 내 고용주에게 공수했다.
-감사합니다, 염방존. 베푸신 바에 꼭 보답하겠습니다.
감사 인사를 마친 뒤 힐끔 고개를 들자, 묘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는 금광요가 보였다. 그가 마찬가지 묘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어울리지 않게 존댓말을 하고 그래.
-전 저한테 돈 주는 사람한텐 항상 존댓말이 기본이라.
그 말에 금광요는 다시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이번엔 너무 웃어서 눈물이 나는지, 손끝으로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 그날 그는 나에게 원할 때 금린대로 와서 자기를 찾으라며 붓대롱 하나를 주었다. 그리곤 한생이라 이름 붙은 자기 검 위에 올라타 저기 남쪽 하늘로 사라졌다.
그날 밤, 나는 할머니에게 물었다.
-무슨 생각해?
할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라고 악쓰는 대신, 나는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그리고 금광요의 얼굴을 천장에 그렸다. 그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줖 닫힌 동안 진정령 다시 보고 옛날에 썼던 무순 복습하다가 압해하고 싶어져서 압해했는데, 쓴 김에 그냥 끝까지 다 쓰고 올리자 해서 쓰다보니까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됨
ㄱㅇ이랑도 내용 거의 다르지만 대사나 장면 오마주 있음
섭회상너붕붕인데 다음편까지는 금광요만 나옴 ㅈㅇ......
내가 일문삼부지 섭회상을 만난 데 대해 이야기하려면 금광요를 먼저 이야기해야 한다.
내가 금광요를 처음 만난 건 금린대에서였다. 생각해보면 그 때가 내 전성기였다. 십대 초반에 금단을 맺은 뒤, 나는 늘 돈을 좇아 이 가문 저 가문의 외성수사로 전전해오며 가문당 일 년을 채 채우지 못했다. 그러다가 나름 오대 세가 중 하나라는 난릉 금씨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오대 세가는 괜히 오대 세가가 아니라 봉급도 이전과 비교 안 될 만큼 두둑했고, 한 한 달 정도는 어깨에 힘 좀 들어가고 좋았다. 이번에는 꼭 뼈를 묻으리라 다짐했었다. 오대세가의 수사가 되는 것은 모든 수련자들의 꿈이고, 그래서 내 목표이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세상사 호락호락한 법이 없는지라, 돈 많이 주는 덴 다 이유가 있었다. 금씨 성 가진 것들은 높은 확률로 대부분 싸가지가 없었고, 수사와 문하생이 차고 넘치다보니 개중에 개새끼들도 존나 많았다. 특히 종주라는 놈은 아랫도리 함부로 놀린다고 온 수진계에 다 소문이 났는데 쪽팔리지도 않은지 일주일에 한 번씩 투연청에 여자들을 불러와 별 지랄을 다 해댔다. 그 꼴을 볼 때마다 흐린 눈을 한 채 나는 겨우 반 년을 버텼다.
나야 군대로 따지면 일개 졸에 불과했으니 종주나 그 가족을 마주칠 일은 많지 않았지만, 그 날은 소종주였던 금자헌의 열 몇 번째 생일이었고 돈이 썩어나는 난릉 금씨 아니랄까봐 생일 축하연 규모도 장난이 아니었다. 각 가문의 높으신 분들이 금린대 계단을 오르는 동안 나는 그 맨 밑에서 다른 수사들과 함께 정자세로 석상처럼 서 있었다. 한겨울이어서 존나 추웠는데 금씨 가오 살리겠다고 피풍의도 못 입게 했다. 이거 한다고 돈 더 주지도 않으면서 별 개같은...... 아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때였다.
-뭐야.
뭔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는 걸 보고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순간 난 또 종주 새끼가 자기 아들 생일이라고 뭐 신개념 공연이라도 하는 줄 알았다. 생각해보면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군. 어쨌든, 옆자리에 서 있던 수사가 귓속말로 사정을 일러주었다.
-종주님 사생아야. 아까부터 계속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종주님 뵙겠다고 기다리고 있었잖아. 날을 잘못 잡았지.
나는 그제야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게 물체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그것도 아직 어린 남자애. 힐끔 뒤를 돌아보자, 저 위에 금색 소매를 떨치며 돌아서는 금광선의 뒷모습이 보였다. 다시 고개를 돌리자 계단 밑에 엎어져 있는 남자애 머리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당연하지. 금린대 계단 높이를 생각할 때, 머리만 깨졌으면 다행이었다. 입김이 나오는 걸 보면 살아있긴 한 것 같은데...... 그땐 나도 추위로 머리가 굳어있던 터라, 상황을 받아들이는 데까지 잠시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그 찰나의 순간에, 나대기 좋아하는 금씨 아니랄까봐 또 웬 잡놈이 나섰다.
-천한 것이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와서 소란이야! 금 공자님 생신에 재뿌리지 말고 썩 꺼져!
내 무수히 많은 단점 중 하나가 생각하기 전에 행동한다는 것인데, 그 날도 그랬다. 나는 더 생각할 것 없이 앞으로 걸어가 바닥에 쓰러진 남자애를 등에 업었다. 그러자 나에게 넌 또 뭐냐며 주먹이 날아왔지만, 그걸 막는 건 쉬운 일이었다. 고개를 들자 어제까지만 해도 같이 금광선 뒷담을 까던 수사들은 나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더럽다, 진짜.
내 또 다른 단점은 생각하기 전에 말하곤 한다는 것이었다. 육성으로 내뱉은 뒤, 나는 등에 커다란 혹을 단 채 그대로 금린대를 걸어 나왔다.
금린대 입구까지 한 절반쯤 왔을까, 얌전히 업혀있던 남자애가 갑자기 몸을 비틀었다. 솔직히 나도 그때까지 체구가 크지 않았던지라, 나랑 비슷한 키의 남자를 업고 있는 게 꽤 버거웠다. 나는 최대한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자 지금 머리에서 피나는 거 알죠? 제때 의원 안 만나면 어디 한 군데 영영 못 쓸 수도 있으니까 그냥 얌전히 있어요. 데려다줄게.
그 말에 잠시 몸을 굳혔던 남자애가 아예 힘을 풀었다. 그리고 모기만한 목소리로 감사하다고 중얼거렸다. 어깨가 축축한 게 피 때문인지 눈물 때문인진 몰라도 어차피 버릴 옷이었으니 상관 없었다. 존나 비싼 옷이긴 했는데, 어쩌겠나. 잠옷으로 입을 것도 아니고.
그런 생각을 했다.
그게 훗날 사일지정에서 큰 공을 세우고 염방존이 되신 금광요와 나의 첫만남이었다. 그때는 아직 맹요였지. 대충 근처 의원에 가서 보여주니 다리와 팔, 갈비에 공평하게 금이 가고 다행히도 뇌진탕은 없다고 했다. 자세히 보니 비단옷을 입혀놨다면 충분히 한 세가의 공자라 여길 수 있을 정도로 얼굴이 고왔지만, 한창 때 소년 치곤 몸집이 너무 작았다. 조그만 얼굴에 서린 감정도 보통 그 나이대 소년들이 가질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나도 그때는 아직 십대였지만.
-맹요가 감사 인사 올립니다. 이 은혜는 꼭 잊지 않겠습니다.
그러면서 공수하는 소년을 보자니 속에서 뭔가 치밀어 올랐다. 금광선의 거기를 자르면 선계에서도 잘 참작해서 등선에 점수를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데, 맹요가 커다란 눈을 굴리며 물었다.
-저, 수사님의 성함은......
-그냥 헌이라고 불러요.
잊지 않겠다는 듯 꾸벅 절한 맹요가 진찰받은 값을 치르려는데 허름하고 홀쭉한 그의 돈 주머니를 차마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애비라는 인간한테 채이고 자기 약값을 손수 계산하는 그 심정이 어떨지 생각하자 너무 고통스러워서, 비록 나는 일 년에 은자 한 두 개 쓰고 살지만 인생 한 번 살면서 이런 사치도 저질러 보는 거지 하는 마음으로 진찰비도 약값도 치르고 데려다가 밥도 먹였다. 그게 거의 내 석 달치 생활비였다. 밥 먹이면서 나이를 물어보니 오늘 열 여섯이 됐다길래...... 쟤는 전생에 뭐 나라라도 팔아먹었나 눈물을 삼키며 국수도 한 그릇 먹였다. 자기랑 생년월일이 똑같은 이복형제는 투연청에서 온갖 좋은 것들을 다 먹고 있을 텐데. 진짜 금광선 더러운 놈, 하는 욕이 목끝까지 차올랐지만...... 그래도 자기 아버지라고 기분 나빠할까봐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았다.
밥을 다 먹인 뒤에는 술도 먹였다. 기어이 눈물을 보이는 맹요에게 술 한 잔 따라주며 우리 한 살 차이니 말 놓으라고 하자, 자기도 술이 고프긴 했는지 잔을 비우며 나에게 사과했다.
-미안해. 나 때문에 금린대를 떠나게 되었으니......
-됐어. 난 어차피 돈 많이 줘서 난릉 금씨 간 거였지, 출세에는 관심 없거든. 높으신 분들이랑 엮이면 골 아파.
-그래도......
-진짜야. 난 돈만 주면 다른 세가 어디든 상관 없고, 지금 당장 돈이 궁하진 않으니까 괜찮아. 나보다는 네가 문제 아냐? 어디로 가려고?
내 질문에 두 눈을 내리깐 채로 잠시 말이 없던 맹요는 청하로 갈 건데 함께 갈 생각 없냐고 물었고, 나는 단박에 고개를 저었다. 내 단호한 반응에 놀란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던 맹요는 내 대답을 듣더니 이내 애매하게 웃었다.
-거긴 힘들기로 유명한 곳이잖아. 수사들도 많이 죽고. 나는 그냥 편하게 돈 벌면서 살고 싶다.
-넌 돈을 정말 좋아하는구나. 그런데 왜 나를 도왔어?
-짐승이 돈 밝히는 거 봤어? 난 인간이니까 돈 밝히는 거야. 그리고 그 자리에서 가만히 있으면 그게 인간이냐?
내 딴에는 나름 논리적이라고 생각해서 한 말이었는데, 맹요가 자기가 평생 들은 말 중에서 가장 웃기다는 듯 눈에 눈물을 매단 채로 소리내어 웃었다. 그날 우리는 밤을 새워가며 이야기를 나눴고, 다음날 아침에 헤어졌다. 맹요는 은혜를 잊지 않겠다는 말을 거듭한 뒤 멀어져갔다. 그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의리로 남아 바라보던 나는 이윽고 반대 방향으로 걸어나갔다.
만약 그때 내가 그냥 맹요와 함께 걸었다면, 나는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조그만 얼굴을 십 년쯤 더 일찍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씨발.
내가 이런 탄식을 내뱉게 된 경위를 밝히기 위해선 아무래도 과거 이야기를 조금 더 해야겠다. 삼 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두 번째로 만나게 되었을 때에도 맹요는 여전히 맹요였다. 맹요를 청하로 보낸 뒤, 나는 곧장 난릉을 떠나 기산 근처 어느 중소세가에 들어갔었다. 당연히 봉급은 적었다. 그래도 난릉 금씨 생활에선 없었던, 뭐랄까, 여유랄까 하는 것이 있었다. 위렵 준비니 청담회니 뭐니 하며 새빠질 필요 없이, 그냥 수련하고 야렵 좀 하다 보면 시간이 쑥쑥 갔다. 그러는 사이 기산 온씨를 중심으로 수진계 분위기가 험악해졌고, 가문의 직계 공자가 끌려갔다가 시체가 되어 돌아왔다. 하나 뿐인 아들이 죽어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몸을 사리는 종주를 보자니 가슴이 답답해져서 좀 쉴까 하는 생각으로 긴 휴가를 낸 참이었다.
-아헌.
정말 뜬금없이 기산 길거리에서 만난 맹요가 나를 불렀을 때 나는 대답 못하고 눈만 깜박였다. 삼 년 만에 만난 맹요는 어쩐지 분위기가 확 달라져 있었다. 길거리에서 간단히 안부를 나누는 동안 맹요는 불안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런 맹요가 신경쓰여 나는 객잔에 들어가는 대신 그냥 그를 내 숙소로 데려갔다. 따지자면 태어나서 이제 두 번 만난 사이였던 건데, 이상하게 맹요가 별로 어색하지 않았다. 아마 맹요는 여자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고왔고, 난 항상 예쁘고 귀여운 것들에 무방비했으니까 그래서 그랬던 건지도.
얼른 가 봐야 한다던 맹요는 막상 내가 식사를 하고 가라고 붙잡자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대충 상을 차려 앉으니 꼭 죽마고우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전혀 어색함이 없었다. 다행히 그건 상대방도 마찬가지인 듯 했다. 용무가 있는 거냐 묻자 그냥 네 얼굴이 보고 싶었다며 고개를 저었기 때문이다. 나도 종종 그가 생각났던 것이 사실이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술병을 기울였다.
-그런데 너 청하로 간다더니 왜 옷에 수두문이 없냐? 때려치웠어?
-그렇게 됐네.
-왜, 적봉존이 너 갈궜어?
-응. 그러더라.
한 박자 늦게 대답하는 맹요가 울 것 같은 얼굴이라, 나는 괜히 담담하게 그 어깨를 두드렸다.
-내가 뭐랬냐. 청하 섭씨 별로라니까. 잘 관뒀어. 안 그래도 얼마 전에 부정세가 난장판 됐다는 이야기 듣고 네 생각 났는데, 무사해서 다행이야. 적봉존은 뭐...... 죽든지 살든지.
내 말에 맹요는 기어이 눈물을 흘렸다. 그러면서도 웃었다. 뭔 일이 있었는진 몰라도 기어이 정신이 나갔구나 싶었으나 입 다물고 묵묵히 술을 따라주자, 그는 곧 자기가 나를 수소문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외에 청하에서의 이야기는 전혀 없었다.
그리고 다음날, 맹요는 나를 찾아와 웬 보따리 같은 것을 바리바리 안겨주며 부탁할 게 나밖에 없다고, 그걸 부디 잘 숨겨달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냥 그렇게 했다. 뭔지 별로 궁금하지도 않아서 열어보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날 맹요가 다시 나를 찾아와 그것들을 받아갔다. 그리고 그렇게 끝이었다.
그때 내가 맡아주었던 보따리가 무려 그 운심부지처의 몇 백 년 된 고서들이었다는 걸 나는 사일지정이 끝난 뒤에야 알았다. 맹요가 고소 남씨의 종주이자 택무군으로 이름난 남희신을 숨겨주고 있었다는 것도, 섭명결에게 쫓겨나 기산 온씨의 첩자로 활동하고 있었다는 것도, 그 온약한의 심장을 찌르고 화려하게 염방존 금광요가 되어 수진계 모두의 앞에 섰다는 것도 나는 진짜 몰랐다.
사일지정에 당연히 참가는 했었다. 정의로운 성격은 전혀 못 되지만 그래도 금단 있는 수사인데 아예 튀었다간 다시 수진계에 발들이기 쪽팔릴 것 같아서...... 그리고 그냥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서.
열심히 싸우다가 사람들이 나를 조금 알아본다 싶으면 다른 곳으로 옮겨가 싸웠다. 나는 나 같은 신분으로 수진계 바닥에서 살아남으려면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게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차로는 온씨 눈에 안 띄는 게 중요했고, 이차로는 수진계에서 이름 안 팔리는 게 중요했다. 유명세 그거야말로 목숨값이었다. 적어도 그때 내가 생각하기로는 그랬다. 아예 어디 가문 직계손인 게 아닌 이상 유명해봐야 화살받이밖에 더 되겠는가.
바꿔 말하면, 살아남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정도로 험한 시대였다. 불야천으로 모두가 모인 뒤에는 상대적으로 덜했지만.
아무튼 그렇게 싸우다 보면 이릉노조 위무선이 내가 찌른 온씨 시체를 흉시로 만들어 쓰는 꼴도 보고, 금자헌이 운몽 강씨 장녀를 면박 줬다가 위무선한테 주먹으로 면상을 맞았다는 이야기도 듣고, 하여튼 사건이 하도 많고 내 목숨 부지하는 게 일이라 맹요에게 관심 가질 새가 없었다. 가끔 생각날 때마다 그의 안녕을 바라보는 게 다였다.
그러다가 불야천성을 공격한지 딱 열흘째 되던 아침이었다. 나는 팔에 생긴 상처에 지혈제를 뿌리고 있었다. 다음은 목일 수도 있었다. 심란해 하던 찰나, 저 멀리서부터 웅성거림이 퍼지더니 갑자기 우리가 이겼다는 것이다. 옆에 있던 얼굴도 모르는 사람과 얼싸안고 좋아하던 나는 온약한을 죽인 게 적봉존이 아닌 맹요라는 이야기를 듣곤 얼이 터졌고, 그에 대해 줄줄이 알게 된 사실들에 또 잠시 넋이 나가 있었다.
이걸 축하한다고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염방존이라는 근사한 호도 생기고 택무군, 적봉존 같은 명사들과 의형제도 맺고...... 그런 건 당연히 축하할 일이었다. 그러나 그게 금광선 아들 되기를 전제한 거라면 과연 축하할 일인지 알 수 없었다. 물론 맹요는 자기 어머니가 자기에게 어떤 당부를 했는지 첫 만남 때 술에 취한 채 내게 말했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무슨 수를 써서든 금광선에게 인정받고 싶어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금광선 아들 되기를 목표로 삼고 인생을 사는 건 소중한 생을 낭비하는 것이었지만, 그거 하나 이루려고 독기 가득하게 살아보겠다는 애한테 그런 말을 할 수는 없던 기억이 있다.
그러니 축하해 줘야겠지. 내 축하는 필요 없겠지만. 전쟁이 끝나 더 척박한 불야천 성, 멀리서도 화려한 금씨 일가를 바라보며 나는 잠시 감상에 젖었다. 가족. 가족이라. 핏줄이라는 게 뭐길래 누구는 신경쓰지도 않고 걷어차고, 죽이고…… 또 누구는 거기에 목을 매는지.
사일지정이 다 마무리된 뒤, 적당히 두둑한 보상을 챙겨 나는 고향으로 내려갔다. 사실 고향이 무척 가까워서 내려간다고 하기도 뭐했다. 기산은 청하 바로 옆이었는데, 내 고향은 저기 청하 끝자락인 하동 촌구석이었다. 그래서 내가 처음 몸 담은 곳도 하동 부씨였다. 거기서 수사로 좀 지내다가 세상 구경도 할 겸 돈도 더 벌 겸 객경으로 빠져 이곳 저곳 떠돌게 되었던 것이다.
즉 내가 고향에 발을 댄 건 거의 십 년만이었다. 내가 그동안 부친 돈이 헛되지 않은지, 할머니는 닭도 기르고 채마밭도 가꾸며 정정히 잘 살아있었다. 금단도 없이 일흔 살 넘은 노인 치곤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거의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어언 십 년만에 얼굴을 보는 건데도, 할머니는 내게 잘 돌아왔다는 인사 따위 없었다. 나도 할머니에게 굳이 인사를 할 기분은 아니었다. 나는 할머니가 다듬고 있는 고사리를 집어들며 말했다.
-나 일 년만 여기 있을 거야.
할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도 대답을 기대하지 않고 고사리를 다듬었다. 간헐적으로 이어지는 할머니의 기침 소리만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아무튼, 일 년 동안 나는 수련 외에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쉬었다. 그동안 모아놓은 돈이 꽤 있었고 돈 나갈 일도 거의 없어서, 돈 걱정 없이고도 살 만 했다. 말 그대로 수련에만 집중할 수 있는 것도 좋았다. 하지만 일 년 이상은 주머니가 넉넉하대도 마음이 좀 힘들었다.
그리고, 계속 귀에 따라붙는 할머니의 기침소리도 슬슬 거슬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일 년이 좀 안 된 어느날 밤이었다. 평소처럼 수련을 끝내고 돌아온 뒤, 할머니와 좀 떨어져 앉아 장죽에 담뱃잎을 채워넣고 있었다. 이제 슬슬 또 일을 구해 봐야지 생각하다가, 창 밖의 귀뚜라미 우는 소리를 끊으며 문득 입을 열었다.
-곧 떠날 거니까, 내가 와 봐야 되면 빈 종이라도 보내. 장례는 제때 치러야 될 것 아냐.
그때, 밖에서 갑자기 인기척이 느껴졌다. 할머니를 등 뒤에 두고 침착하게 검을 챙겨 문을 열자, 이제는 진짜 이마에 단사를 찍고 오사모까지 쓴 맹요, 아니. 금광요가 있었다.
-아니 왜 이런 누추한 곳까지 오셨어?
반가움보다 얼떨떨함이 더 커서 그렇게 묻자, 금광요는 곱게 보조개 패인 얼굴로 환히 웃어보였다.
차라고 대접할 것도 우습고, 할머니한테 설명하기도 귀찮아 난 아예 방을 나와 뒷마루에 앉았다. 금광요는 선뜻 내 옆에 앉았다.
반짝이는 금성설랑포를 입은 염방존과 그렇게 초가집 뒷마당에서 독대를 하자니 이게 꿈인지 뭔지 알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그새 큰 것 같긴 해도, 여전히 나와 키가 엇비슷한 그의 머리 위 오사모가 가을 달빛 아래 새까만 광택을 냈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계속 담배연기만 뿜었더니, 상대쪽에서 먼저 입을 열었다.
-고맙다는 말을 하러 왔어, 아헌.
-고마울 게 뭐가......
-전부. 어떻게 해야 너한테 이 고마움을 표현할 수 있을까 생각해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네가 좋아할 만한 건 하나더라고.
금광요는 아무렇지도 않게,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네가 여생을 보내는 데 필요한 자금을 내가 전부 대주겠다고. 너무 선선히 그렇게 말하는 그 얼굴을 나는 입을 떡 벌린 채 쳐다만 봤다. 채 못 들이마신 담배연기가 얼굴을 훅 덮었다. 그 꼴이 여간 웃기지 않았는지, 금광요가 소리내어 웃었다. 가슴이 뻥 뚫린 듯 시원한 웃음소리였다.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저었다. 금광요는 물론 맞게 봤다. 난 세상에서 돈이 제일 좋았다. 하지만 내가 벌지도 않았는데 들어온 돈은 아니었다. 그런 돈은 나중에 저승길 노잣돈 되기 십상인 걸 나는 알고 있었다. 내 말에 금광요는 더 크게 웃었다.
-하지만 너는 돈이 필요하잖아. 여유롭게 조모님을 부양하고 싶지 않아?
-그건......
-내 말 들어. 하나뿐인 가족의 마지막은 꼭 네가 직접 배웅해야 해. 그러지 않으면 후회가 남아.
그렇게 말하며 금광요는 시선을 떨궜다. 오똑한 콧망울에 달빛이 창백하게 맺혀 꼭 눈물 같았다. 그 순간 한숨이 나온 건 정말 불가항력이었다. 나와 할머니의 관계는 너와 네 어머니와의 관계와는 다르다고,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사실 돈이 그렇게 궁하지는 않았다. 중요한 건 금광요가 나를 여기까지 찾아와줬다는 그 사실이었고, 나는 그를 그냥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결국 담배를 뻑뻑 피우며 염방존의 자비를 받아들였다.
조건부로.
-돈을 주는 게 아니라 빌려주는 걸로 해. 나중에 장례 치르고 나면 일해서 갚을게.
내 말을 듣고 잠시 내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던 금광요가 물었다.
-후회 안 하겠어?
나는 힘차게도 고개를 끄덕였다. 금광요도 그에 대답하듯 작게 고갯짓을 했다.
-좋아. 네 몸값은 후하게 쳐줄게.
그렇게 금광요와 나 사이 고용계약이 체결된 셈이었다. 나는 장죽을 한 손에 쥔 채 넙죽 내 고용주에게 공수했다.
-감사합니다, 염방존. 베푸신 바에 꼭 보답하겠습니다.
감사 인사를 마친 뒤 힐끔 고개를 들자, 묘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는 금광요가 보였다. 그가 마찬가지 묘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어울리지 않게 존댓말을 하고 그래.
-전 저한테 돈 주는 사람한텐 항상 존댓말이 기본이라.
그 말에 금광요는 다시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이번엔 너무 웃어서 눈물이 나는지, 손끝으로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 그날 그는 나에게 원할 때 금린대로 와서 자기를 찾으라며 붓대롱 하나를 주었다. 그리곤 한생이라 이름 붙은 자기 검 위에 올라타 저기 남쪽 하늘로 사라졌다.
그날 밤, 나는 할머니에게 물었다.
-무슨 생각해?
할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라고 악쓰는 대신, 나는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그리고 금광요의 얼굴을 천장에 그렸다. 그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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