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hygall.com/505578549
view 2141
2022.11.03 22:26

1.

언젠가 삼류 영화를 보다가 네가 내게 질문한 적이 있었다. “있잖아. 떠나는 사람이 있으면 남겨지는 사람도 있을 거 아니야. 그러면 누가 더 슬플까?”

 

2.

엉뚱한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떠나는 사람이 슬플 거라 대답했다.

 

3.

너는 남겨지는 데 익숙한 사람이었고, 그래서 내 대답을 이해하지 못했다. 남겨지는 사람은 이미 떠나버린 사람의 흔적을 쥐고 살아야 하는데 어떻게 떠나는 사람이 더 슬프냐고 화를 내다 이내 울어버렸지.

 

4.

내 생각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네 말이 내겐 맞는 말이었으니. 그래서 우는 너를 달래기 바빴지. 그런데 진급을 거듭하며 네 말이 어렴풋이 이해 가기 시작했다.

 

5.

매버릭. 매브. 미첼. 피트. 네가 창공을 가르고 하늘에서 자유롭게 날개를 펼치는 동안 나는 늘 너를 기다렸어야 했어. 지상에 남은 네 작은 조각들과 우리 사랑의 증거들을 껴안고 버텨야 했어.

 

6.

너를 탓하는 건 아니야. 너를 사랑하기로 마음먹은 걸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어.

 

7.

나는 네게 한 번도 0순위인 적이 없었다. 나는 브래들리가 미웠어. 내게는 그 무엇보다 귀하고 소중한 네 사랑 한 조각이 그 아이에게는 무제한으로 쏟아부어지는 게 부럽고 질투 났어.

 

8.

그래서 네 사랑을 거절하고 버려버린 그 녀석을 용서할 수 없었지.

 

9.

그런데 매버릭. 내 말이 맞았던 것 같아.

 

10.

너를 두고 어떻게 떠나지. 나는 이렇게 슬픈데, 네가 나보다 더 슬퍼야 한다면 내 말이 맞았으면 좋겠어.

 

11.

남겨지는 사람은 떠나버린 사람의 흔적을 쥐고 살아야 한다고 했지. 그러면 나는 네가 날 떠올리지도 못하게 흔적을 지워야 하나, 혹은 네가 추억할 거리가 부족하지 않도록 온 곳에 내 흔적을 남겨야 하나.

 

12.

그런데, 내 사랑이 추악해졌나 봐. 네가 나 없이도 잘 살았으면 좋겠으면서도 떠난 내 흔적을 부여잡고 울어줬으면 좋겠어. 그런데 네가 우는 걸 내가 어떻게 보겠어. 너는 그냥 어느 날 문득 내가 떠올라도 슬프지 않을 정도로 잘 지냈으면 좋겠어.

 

13.

미첼. 내 사랑.

 

14.

너는 36년간 내게 그 아이였고, 여전히 인 걸.

 

15.

벌써 그렇게 울면 어떡해. 그러면 내가 어떻게 눈을 감아. 뭐가 그렇게 서글프고 미안해. 너는 충분히 잘 해줬어. 내게 미안해하지 마. 나는 네가 돌아올 수 있는 곳이 될 수 있어서 기뻤어.

 

16.

그런데 이제 나는 네가 돌아갈 곳이 아니야. 정확히는 아직 돌아와도 되는 곳이 아니야. 무슨 말인지 알지?




아이스매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