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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02 04:06
출처: http://timothyquigley.net/vcs/sacks-seeing.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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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곶ㅈㅇ 오역ㅈㅇ 의역ㅈㅇ 의학적오류ㅈㅇ 철학알못ㅈㅇ 맞춤법개판ㅈㅇ 고전문학알못ㅈㅇ 그냥 다 ㅈㅇ
읽기 편한 말투로 번역했고 이전 번역본은 위에 링크로 올려놓음
의학, 문학 및 철학적 레퍼런스들이 다수 등장하기 때문에 (찾아보면서 번역했지만) 오역 있을 수 있음 (댓글로 달아주면 수정함 미리 ㅋㅁㅋ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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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질이 자신의 방을 탐험하며 세상의 *시공간적 구성을 탐구하는 모습을 보고 저는 눈 앞에서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머리를 흔들고, 이리저리 돌리며 새로운 세상을 인지하는 유아를 떠올렸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하루에도 수천 번씩 무의식적으로 이를 완벽하게 수행하기에 이러한 구성능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기를 위한 것도 아니고, 버질을 위한 것도 아니며, 세상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하고자 하는 예술가를 위한 것도 아닙니다. Cézanne는 "다른 각도에서 본 하나의 물체는 다양한 탐구 거리를 제공하기 때문에 (서 있거나 앉아있는) 위치를 바꾸지 않은 채 단순히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몸을 기울이기만 해도 몇 달은 그냥 지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쓰기도 했습니다.
* Visuospatial construction로 대체 번역
우리는 생후 첫 몇 달 동안 각기 다른 물체들의 상관관계와 대상을 지각하기 쉬운 방식으로 (위치, 크기, 혹은 방향 등의)변형시키는 지각적 불변성을 달성합니다. 이것은 그 대단한 슈퍼컴퓨터라 해도 쉽게 도전할 수 없는 대단히 어려운 과제이지만 너무나 순조롭고 무의식적으로 성취되기 때문에 그 과정의 어려움이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반세기 동안 자신이 구축한 시각적 *기억흔적을 잊어버린 버질은 이러한 변형을 새로 배우거나 다시 일깨우기 위해 매일 몇 시간씩 의식적이고 체계적인 탐구를 해야 했습니다. 버질은 (수술 이후) 한 달 동안 과일, 야채, 병, 캔, 칼 붙이, 꽃, 벽난로 위의 장식품 등 집안의 모든 작은 것들을 시각과 촉각으로 체계적으로 탐색했습니다. (하나의 물체를 골라) 이리저리 굴리거나 돌려보고, 눈 앞에 가까이 가져다가 관찰하고, 팔을 쭉 뻗으면 닫는 거리에 놓은 뒤 관찰했던 것을 바탕으로 여러 모습들을 하나의 단일 객체로 합치려고 노력했습니다.
*Engram “physical trace of a single memory” 혹은 “memory trace”. 뉴런의 연결이 강화되면 생겨나는 것으로 하나의 특징을 한 대상과 연결하고 결합하면서 생겨난다. 예) 발킬머=내아내
모든 동물의 뇌(신경) 시스템은 벅찬 자극이나 임계점을 지난 자극을 다 수용하지 못한 채 *갑작스럽게 인지능력을 잃은 것처럼 반응할 수 있습니다. 이런 반응은 개인이나 그의 동기와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그것들은 순전히 국부적이고 생리적이며 대뇌 피질의 고립된 조각에서도 발생할 수 있는 신경 과부하에 대한 생물학적 방어입니다.
*sudden shutdown 외부 자극으로 마치 뇌가 멈춘 것처럼 들어오는 정보를 다 수용하지 못하는 것. 놀라서 멍 때리는 것처럼 보이거나 얼이 나가 보이거나 등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각-인지 과정은 개인이 받아들이거나 만들어가는게 아닌 한 사람의 세계이기에 생리적이지만 개인적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과정은 개개인의 의지와 (지향하는) 방향, 그리고 고유한 스타일을 가진 지각적 자아로 이어지고 연결됩니다. 이런 지각적 자아는 지각 체계의 붕괴와 함께 붕괴되어 한 개인의 (지향하는) 방향과 고유의 정체성 자체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이 발생하면 개인은 앞을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시각적 존재로서의 행동을 중단하고, 내면 상태의 변화에 대해 알리지 않으며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거나 완전히 잊게 됩니다. 뇌의 시각 부분에 뇌졸중과 같은 막대한 손상이 있는 경우 완전한 정신 실명의 상태(*안톤 증후군으로 알려짐)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런 증상이 때때로 버질에게 발생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럴 때 그는 자신이 무언가를 “본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그 어떤 시각적 자극에도 반응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버질의 시각적 인식과 정체성의 기반이 아직 미약해 과부하나 피로한 상태에서 잠시 육체적 실명을 겪는 것이 아닌 안톤 증후군과 같은 정신적 실명을 겪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해야 했습니다.
*Anton’s syndrome 시력 상실 이후 앞을 볼 수 없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보는 것에 대한 설명을 만들어 낼 때
아이는 그저 배울 뿐입니다. 이것은 거대하고 끝이 없는 작업이지만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로 가득 차 있는 작업은 아닙니다. 그러나 새로 시력을 가지게 된 성인은 *순차적 모드에서 시공간적 모드로 급진적인 전환을 해야 하며, 그러한 전환은 (시력을 찾기 전) **평생 겪었던 경험과 정반대되는 일 입니다. 그레고리우스는 이것을 강조하면서 "평생의 지각 습관과 전략"을 바꾸려면 고난과 위기를 겪는게 불가피하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러한 어려움은 신경계 자체에 내재되어 있고, 어릴 적부터 평생 자신의 뇌를 적응시키고 특화 시킨 성인 시각장애인은 이제 이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 합니다. 게다가 성인의 뇌는 (전두엽이 발달해)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언어나 새로운 기술을 배우는 것이 더 어려워집니다. 그러나 이전에 시각장애를 가지고 있던 사람의 경우, Diderot가 말했듯, (전환을 한다는 것은)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게 아닌 처음으로 언어를 배우는 것과 같습니다. [...]
*버질이 영화에서 캔을 잡는다 -> 더듬어서 물체를 확인한다 -> 글자를 읽는다 -> 콜라 이런 식으로 단계를 밞으며 사물을 인지했던 것을 뜻하는 듯
새로 시력을 가진 사람이 보는 법을 배우려면 신경 기능의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며, 이와 함께 *심리적 기능, 자아, 정체성의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합니다. 변화는 말 그대로 삶과 죽음의 관점에서 경험할 수 있습니다. Valvo는 그의 환자들 중 하나의 말을 인용하여 "볼 수 있는 사람이 죽어야 보-지 못하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라고 말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것은 불확실하고 **언제가 끝인지 모르는 터널을 방황하는 것 같으며 – ***"하나는 죽어버리고, 다른 하나는 힘이 없어 태어나지도 못하는 두 세계 사이에서 방황한다."라는 구절과 같이 – 끔찍합니다. 시력을 잃는다는 것은 처음에는 끔찍한 결핍과 상실일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상황에 적응 또는 삶의 재정립이 일어나기 때문에 세계를 비시각적 용어로 재구성하고 재전유합니다. 그러면 그것은 다른 상태, 다른 형태의 존재, 고유한 감수성과 일관성과 느낌을 가진 존재가 됩니다. John Hull은 이것을 ****"무한한 실명"이라고 부르며 "*****인간질서 중 하나"로 봅니다.
*Psychological Functioning “the ability to achieve his or her goals within him or herself and the external environment”으로 어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능력 등임.
**Limbo 여기서는 원문의 느낌을 강조하기 위해 살짝 바꿈
***Mathew Arnold의 Stanzas from the Grande Chartreuse의 한 구절 “Wandering between two worlds, one dead / The other powerless to be born”로 양분화 된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의 혼란과 어려움을 보여줌.
****Deep blindness “gradual attenuation of visual imagery and memory, and finally a virtual extinction of them”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Hull이라는 사람이 자신의 책에서 정의한 개념) 여기서는 그냥 무한한 실명으로 번역함
*****철학 레퍼런스… 궁금하다면 칸트부터 읽어보는 것도 좋을 듯
이것은 버질의 이야기, 어느 시각장애인의 "기적적인" 시력 회복의 이야기이며, 1728년 *Cheselden의 젊은 환자나 지난 3세기 동안의 극소수의 사람들의 이야기와 유사하지만 마지막에 기괴하고 아이러니한 반전이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레고리의 한 환자는 시력 회복 수술 직후에는 보는 것만으로도 기뻐했으나 견딜 수 없는 스트레스와 어려움에 직면했고, 시력이라는 "선물"이 저주로 변한 듯 깊은 우울증에 시달리다 사망했습니다. 버질 이전의 거의 모든 환자들은 수술 직후 (볼 수 있다는) 엄청난 행복을 느꼈지만, 새로운 감각에 적응해야 하는 엄청난 어려움에 압도당했고 아주 소수만이 이에 적응하고 잘 해냈습니다. 버질은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본다는 것에 적응할 수 있었을까요?
*1728년에 13세의 소년이 수술을 통해 시력을 완전히 되찾은 최초의 케이스
우리는 결코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새로운 삶에 적응하던 도중 운명의 장난으로 이 모든 것을 잃게 되었으니까요. 단 한번에 그에게서 직업, 집 (혹은 가정), 건강, 자립을 앗아가고 스스로를 돌볼 수 없는 중병에 걸린 한 사람만 남겨두었을 뿐입니다. 수술을 하자고 말을 꺼내고, 버질이 시력을 찾을 수 있도록 열정적으로 노력했던 에이미에게 이 사건은 실패한 기적이며 재난이었습니다. 버질은 그저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며 침착하게 대응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사건으로 산산조각이 났고 내면에서는 분노가 들끓고 있었습니다. 그의 무력함과 질병에 대한 분노,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이 깨진 것에 대한 분노, 그리고 그 밑에는 거의 처음부터 그에게 있었던 포기할 수도 승리할 수도 없는 전투에 휘말리는 것에 대한 분노도 있었습니다. 분명한것은, 처음에는 놀라움과 경의로움, 때때로 기쁨이 가득했습니다. 물론 대단한 용기도 있었고요. 그것은 소수에게만 허락된 모험이며 새로운 세계로 가는 소풍 과도 같았습니다. 그러나 곧 문제가 생겼고, 갈등이 찾아왔으며, 볼 수 있으나 보-지 못하고, 시각적 세계를 구상하지 못하며, 동시에 자신의 세계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들이 생겼습니다. 그는 두개의 세계 사이에 갇힌 채 그 어디에도 있을 수 없고 탈출할 수 조차 없이 고통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에게 선물로 두 번째이자 최종 실명이라는 석방이 주어졌습니다. 이제 버질은 더 이상 *보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되고, 눈이 아리게 타오르고 혼란스러운 시각과 공간의 세계에서 벗어나 거의 50년동안 자신의 진정한 존재, 그의 고향이었던 **다른 감각의 친밀하고 집중된 세계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Virgil is allowed to not see 보-지 않아도 되는 권리를 부여 받은 느낌이긴 한데 위에서 버질이 이런저런 노력을 했던 것들이 있어서 그냥 보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번역함.
**시력을 제외한 다른 것들로 이루어진 세계
발킬머 내아내
#발킬머 #사머풍 #사랑이머무는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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