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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30 22:54

눈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그 눈빛에 이끌려 윈란이 다가가면 어째서인지 션웨이는 한발짝 물러서서 곤란하단 표정을 지었다. 마치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요괴의 유혹을 이겨내려는 삼장법사처럼.

자오 윈란은 살면서 이런 타입을 만나본적이 없었다. 품위있고 온화하며 누구에게나 다정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다툼을 일으키지않는 사람. 고전 문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아니라 그 책에서 튀어나온 선비님인게 아닐까 싶을 때도있었다.

 

 

먼저 작업을 거는건 처음이었지만 생각보다 어렵지않았다. 나이에 비해 높은 직급에 오를 수 있었던건 실력만큼 출중한 화술과 사교성 덕분이었다. 그는 필요하다면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었고, 피를 나누지 않은 형님 동생 누님의 연락처가 휴대폰에 가득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자오윈란은 연애 또한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비싸게 주고 구입한 고서로 물량공세도 해보고, 의도했던건 아니지만 우연히 불량배들에게 둘러싸인 션웨이를 구해주기도했다. 보상으로 맛있는 식사를 대접받았고, 보상에 보상을 하겠다며 다시 식사약속을 잡았다가 술을 마셨고 집에 걸어오는 길엔 밤 산책까지 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이 정도면 세간에서 말하는 ‘썸’ 정도는 되지 않을까?  자오윈란은 제 코트 옆에서 흔들리는 션웨이의 손을 슬쩍 쳐다보며 생각했다. 잡을까? 잡아볼까? 기분이 좋아서 평소보다 많이 마신 윈란은 술 기운에 들떴고 션웨이가 더 예뻐보였다.

 

망설이던 새에 야속하게도 손은 코트 주머니 속으로 사라졌다. 윈란은 부드럽게 마주치는 시선에 여유로운 웃음을 보이며 농담을 건넸다. 션웨이는 늘 그렇듯이 눈을 내리깔고 수줍게 웃으며 응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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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흩날리는 눈발에 뿌연 하늘을 올려다보며 내일 아침 출근길에 대한 걱정을 늘어놓았다. 션웨이는 한겨울에도 맨발에 슬리퍼로 돌아다니는 윈란을 걱정했고, 내일 아침은 따뜻하게 입을 것을 권유했다. 그렇게 하염없이 걷고 웃으며 어느새 집 앞까지 도착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해온 잡담처럼 가볍게 션웨이가 말했다.

 

“올 해는 조처장님도 좋은 분을 만나셨으면 좋겠네요”

“네?”

“나이도 있고 성격도 좋으시고 안정된 직장도 있으시잖아요. 결혼도 하시고 아이도....”

 

윈란은 계단 아래에서 션웨이를 올려다보았다. 따라오던 이가 멈추자 앞서가던 이도 말을 끊고 돌아보았다. 정말 가까이에서 내려다보고 있는데도 뒤로 비치는 조명 때문에 어떤 표정인지 알 수 없었다. 윈란은 잠시 망설였다가 아마도 그의 눈이 있을 곳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션웨이씨, 설마 제가 당신을 쫒아다니는걸 모르고 있었다는 건 아니죠?”

 

윈란은 웃고싶었다. 여느 때처럼 능숙하게 웃으며 가벼운 농담처럼 그 말을 건네고 싶었다. 션웨이가 언제나처럼 수줍게 웃어주길 바랐다. 어떤 표정이지. 어떤 얼굴로 날 보고있는거야?

 

잠깐의 침묵은 복도 조명이 꺼질때까지 이어졌다. 윈란이 딱딱하게 굳은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션웨이 옆에 오르자 전구에 다시 불이 들어왔다. 션웨이는 혹여나 어두운 계단에서 취한 윈란이 넘어질까 팔을 잡아 주었다. 다시 드러난 션웨이의 얼굴은 평온했고 그를 보는 윈란은 절망했다.

 

“오늘 어울려줘서 고마웠어요. 시간이 늦었네요.”

 

윈란이 먼저 웃으며 작별인사를 건넸다. 션웨이는 침묵했지만 답변을 들을 생각으로 한 말도 아니었다. 윈란은 장난스럽게 핑그르 돌아 현관문을 열었다.

 

유일한 빛을 복도에 남겨두고 윈란은 어둠 속으로 걸어갔다. 두꺼운 커튼은 달빛을 가득 머금었고, 창 너머로 한 방울도 흘려보내지 않을 것이다. 열린 문 사이로 들어온 바람이 방 안을 한바퀴 돌아 커피 테이블 위에 내려앉았고, 아침에 함께 마셨던 커피 봉지가 차갑게 식은 컵 옆에서 사그락 거렸다.

윈란은 신발을 벗으려고 한 발을 들었다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눈물이 났다. 부딪힌 무릎은 아픈지도 않은데.

 

들키고 싶지 않아 고개를 떨구자 가지런하게 정돈된 션웨이의 하얀 소매가 따라 내려왔다. 윈란은 그걸 붙잡고싶었다. 날 여기 두고 가지말라고. 날 봐달라고. 날 좋아하는게 아니었냐고 묻고싶었다.

 

션웨이는 그 눈물을 닦아주고싶었다. 어둠 속에서도 참혼사의 시야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선명했고, 기어이 방울방울 떨어지는 눈물이 나무바닥을 적시는걸 보았다.

당신 앞에 나타나면 안되는데. 저 예쁜 얼굴을 만지면 안되는데. 가엾은 내 사람. 부정한 나의 존재가, 오늘의 만남이 당신의 수명을 얼마나 깎아먹었을지 가늠해본다.


진혼 룡백 웨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