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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23 01:29
그 누구도 승리하지 못한 전쟁으로 인해 지구는 급격하게 황폐화되었음. 마일스는 어린 나이에 징병되어 전쟁을 겪고 종전 후 PTSD를 앓다가 존 글렌을 만나서 많이 호전되었지. 하지만 그때 같이 얻었던 폐병은 나아질 조짐이 없었고, 점점 안좋아지는 지구의 공기에 마일스는 늘 쌕쌕거리는 목소리와 기침을 달고 살았어. 그렇지만 둘은 행복했음. 마일스에게 존은 과거 따스한 햇빛과 같았고 존에게 마일스는 갈증을 달래주는 맑은 물과 같았지. 그러던 어느날 존은 나사에서 인류의 새 거주행성을 탐사하기 위한 지원자들을 모집한다는 기약을 알 수 없는 공고문을 보았어. 예전 같았으면 가장 먼저 지원했겠지만 마일스가 싫어할게 분명해서 존은 답지않게 가만히 있었음. 그런데 그 날 밤 마일스가 수줍게 존에게 말했어.
"존, 우리에게 아이가, 생겼어요.."
그 짧은 말도 기침 없이 할 수 없는 마일스를 보고 존의 심경은 바뀌었어. 밤새 뒤척이던 존은 출근하자마자 탐사 지원서를 제출했지. 그 사실을 알게 된 마일스는 울며불며 가지 말라고 애원했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우는 마일스를 달래고, 쌕쌕거리며 잠든 그의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존은 다시 한 번 마음을 다 잡았음. 존이 번복하지 않을걸 깨달은 마일스는 냉담하게 존을 대하기 시작했지. 하지만 정성스레 끄적인 산모수첩을 늘 보란듯이 식탁 위에 올려놨어. 훈련으로 늦게 퇴근한 존은 수첩에 마일스가 써놓은걸 보며 먹고 싶어하는 음식을 냉장고에 채워넣고, 곧 태어날 아이 방을 정성스레 꾸미고, 잠든척 하는 마일스의 배를 조심스레 문지르며 사랑한다고 속삭였어. 시간이 흘러 탐사 날짜가 당장 다음날로 다가왔고, 가족들과의 시간을 보내라는 의미로 그 날은 일찍 소집해제되었지. 존은 조립 장난감을 사서 아이의 방으로 갔어. 방 안에는 마일스가 아이 침대를 보며 서있었어.
"마일스"
이제 제법 임산부 태가 나는 마일스를 이끌어 의자에 앉혔음. 마일스는 존이 사온 장난감을 보다가 다시 존의 얼굴을 봤어.
"아이 혼자서 만들지도 못할 장난감을 뭐하러 사와요?"
"마일스..."
"나랑, 나랑 아이를 두고 떠날거면서 그런건 왜, 뭐하러 사온 거에요."
참으려 했지만 존을 더 이상 볼 수 없을 거라는 크나큰 불안과 두려움은 결국 마일스의 눈을 타고 흘렀어. 존 역시 울먹이며 마일스의 눈물을 닦아주다가 그를 껴안았지.
"우리 아이가 이걸 가지고 놀 나이가 되기 전에 돌아올게요. 약속해요, 마일스. 돌아와서 나랑 같이 조립하면 돼요."
"거짓말.. 거짓말이잖아요."
"마일스. 나는 우리 아이가 모래가 아니라 잔디를 밟으면서 자랐으면 좋겠어요. 컴컴한 구름이 아니라 파란 하늘을 보면서 살길 바래요."
"......"
"우리는 천둥벌거숭이처럼 뛰어노는 아이를 보고 행복할거에요. 아이가 장난을 치는걸 보면서 당신은 웃을때 고통스러워하지 않고, 나는 그런 당신을 보고 너무 사랑스러워서 아이 앞에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당신한테 입 맞출거야."
"존 나는,"
"내가 그렇게 만들어줄게요. 마일스. 내가 그렇게 할거에요. 약속해요."
마일스는 존의 내면처럼 올바르고 곧은 그 눈빛을 사랑했었어.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런 그가 원망스러웠지. 조금만 덜 올바른 사람이었으면. 조금만 덜 이타적인 사람이었으면.. 하지만 그랬으면 그건 존 글렌이 아니었겠지. 마일스는 그저 꼭 돌아오라고, 약속을 지키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어.
존이 떠나는 날 존과 마일스는 울지 않았어. 존이 떠난 후에도 마일스는 울지 않았지. 마일스는 검진을 받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노트를 사와서 일기를 쓰듯이 존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적기 시작했어. 몸이 안좋아서 걱정했는데 아이가 잘 크고 있다던가, 옆집 할머니가 귀한 과일을 챙겨주셔서 오랜만에 호강했다던가 하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적었지. 시간이 흘러 건강하게 출산하고 존이 만든 침대에 아이를 눕힌 날처럼 눈물을 참을 수 없을 때가 있었지만 마일스는 주변의 걱정에 비하면 잘 버티었어. 존과 마일스의 아이는 자라고, 결혼하고, 또 아이를 낳았지. 그 아이가 다 자랄 때까지도 존은 돌아오지 않았어. 마일스는 이제 기계없이는 숨을 쉴 수 없었고, 앉아있는 것도 버거워 병원 침대에서 간신히 생명을 유지하는 상태였지. 자신을 닮은 어린 손자가 애인이라며 누군가 데려온 날, 도란도란 말을 붙이는 그들의 손을 잡고 웃으며 마일스는 눈을 감았어.
존의 탐사대가 지구를 떠나고나서 꼬박 2년만에 지구와 비슷한 환경의 행성을 발견하게 되었어. 그 동안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동료도 있었고 어려움이 많았지만 감히 그 모든걸 뛰어넘을 만한 결과물이라고 말할 수 있었어. 인류가 생존할수 있는 행성인지 확인하는 1차 탐사를 마치고 계획대로 탐사원들 중 절반 정도는 행성에 남고 남은 절반이 지구로 돌아가 소식을 알리기로 했어. 존은 당연히 지구로 향하는걸 택했지. 정해진 시간에 따라 잠들때마다 그리워하던 마일스와 얼굴도 모르는 아이가 너무 보고싶었거든. 목적지가 정해진 항로여서 그런지 지구로 가는 여정은 더 빠르게 끝낼 수 있었어. 존은 자신이 마지막으로 아이에게 사준 장난감을 떠올렸어. 거봐요 마일스, 내가 같이 조립해줄 수 있다고 했잖아요. 눈물을 흘릴 마일스를 달래며 이 말을 해주기를 얼마나 기대하고 있었는지. 통신이 연결되고 몇 시간 후 존의 우주선은 무사히 지구에 착륙했어. 기본적인 신체검사를 마치고, 중력에 적응이 안되어 휠체어에 앉은 존 앞에 한 군인이 다가와 경례했어.
"VFA-151 소속 제이크 세러신 소령입니다. 이제부터는 제가 모시겠습니다."
제이크는 존의 휠체어를 끌어주던 사람에게 말하고 존의 뒤로 갔지. 자신만 데리고 가는게 의아해 뒤돌아 그를 바라보자 설명해주었어.
"아직 이주 준비가 다 완료되지 않아 정식보고는 내일 진행해주셔도 됩니다. 사실, 절차상 정밀검진을 더 받으셔야 하지만 당신을 꼭 뵙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어서 이렇게 따로 모시게 됐습니다."
납득이 안됐지만 존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어. 뭐가 됐든 간에 빨리 끝내고 마일스를 만나러 가고 싶었지. 제이크가 회의실 문을 열어주고, 회의실 창가에는 제이크와 같이 군복을 입은 남자가 서성이고 있었어. 제이크가 문을 닫으며 인기척을 내자 남자가 뒤돌아봤고 존의 눈은 놀라움으로 가득찼어.
"마일스..?"
무심결에 일어나다가 넘어질 뻔한 존을 제이크가 붙잡아주었어. 마일스 역시 놀라서 옆으로 다가와 그를 부축했지. 아니, 그 사람은 마일스가 아니었어. 마일스는 시력이 좋아 안경을 쓰지도 않았고, 부드러운 머리칼을 포마드로 고정시키는걸 어색해했지. 무엇보다도 마일스는 두 번 다시는 군복을 입을 수 없었어. 하지만 그의 눈은, 바다같이 푸른 눈은 존이 늘 사랑한 마일스의 눈이었어.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로버트 존 플로이드 대위입니다."
"대체.. 당신은 대체 누구십니까? 마일스의 친척인가요?"
"존..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당신이 지구를 떠난지 70년이 흘렀습니다. 저는 마일스 글렌과 당신의 손자입니다."
"그게 무슨.. 마일스, 마일스는 어디 있죠?"
로버트는 질문에 답하지 못하고 어느새 떨고있는 존의 손을 잡아주었어.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의 눈에 차오르는 슬픔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존은 알 수 있었지. 로버트가 바라보는 존의 눈도 마찬가지로 슬픔으로 금방 물들었어. 내가 너무 늦었구나. 마일스. 내가 당신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어. 내가 당신 곁에 있어주지 못했어. 내가.. 내가... 로버트의 손을 붙잡고 울부짖던 존이 정신을 잃고 의무실로 옮겨진 후에야 로버트도 제이크의 품에 안겨 울 수 있었어.
다음 날 로버트는 양손에 큰 박스들을 들고 존의 병실을 찾아왔어. 그 안엔 마일스의 수많은 일기와 가족들의 사진이 담긴 앨범이 있었어. 그리고 성치않은 비행기 장난감이 들어있었지. 존은 그 장난감을 알아보았어. 장난감을 꺼내고 아무 말 없이 비행기의 캐노피 부분을 쓰다듬고 있자 로버트가 말했어.
"엄마가 아끼던 장난감인데 제가 어릴 때 블록 몇개를 잃어버려서 모양이 좀 볼품없어졌어요. 엄마는 다 큰 어른인데 왜 장난감을 갖고있냐고 칭얼거리면서 빼앗아갔었거든요."
"......"
"존.. 당신이 이주하지 않을거라 했다고 들었어요."
"......"
"원래는 무게제한때문에 안되지만.. 제이크가 힘써줘서 원한다면 마일스 할아버지나 부모님 관도 같이 옮길 수 있을 거에요. 저는 이주한 행성에서 당신이 제 곁에 있어줬으면 좋겠어요. 저랑 제이크하고 같이 살아요."
저랑 제이크는 1차 이주함선을 탈거에요. 준비는 저희가 다 해놓을게요. 이것저것 말하는 로버트의 눈을 빤히 바라보기만 하다가 한마디 했어.
"마일스하고 눈이 똑같군요."
"...우린 가족이니깐요."
희미하게 웃은 밥이 내일도 오겠다며 병실을 나섰어. 존은 다시 장난감을 바라보다가 박스 안에 담겨있는 노트를 몇개 꺼내보았지. 그 안에는 아이가 혼자서 장난감을 조립한 이야기, 두꺼운 안경을 썼지만 다정한 남편을 만나 결혼한 이야기, 로버트가 학생일 무렵 유행하던 전염병에 걸려 그의 부모를 잃은 이야기 등 그 동안의 마일스와 아이의 삶이 적혀있었어. 존은 자신의 눈물이 마일스의 흔적을 지울까봐 몇번이고 노트를 덮었다 폈다 했지. 마일스의 마지막 글은 항상 같았어. 당신이 너무 보고 싶어요. 사랑해요, 존. 마일스.. 마일스.. 이제는 닿을 수 없는 이름을 밤새 목놓아 불렀어.
로버트가 찾아갔을 때 존의 침대 위에는 마일스의 일기들로 어지러웠지만 존은 없었어. 대신 협탁 위에 존의 쪽지가 있었지. 그 쪽지엔 자신을 찾지 말아달라는 내용과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이 써있었어. 함께 온 제이크가 마일스의 묘지에 갔을 거라며 당장 찾으러 가자고 했지만 펼쳐져있던 마일스의 일기를 본 로버트가 말렸어. 묘지로 가지 않았을 거야.
"제이크, 나는 그 분들의 사랑을 지켜보면서 컸어. 이렇게까지 한다면 존은 절대 우리를 따라가지 않을 거야. 그냥.. 그 분이 하고 싶은대로 하게 두자."
"베이비.. 정말 괜찮겠어?"
"예상하긴 했었지만 조금 슬프긴 하네."
덤덤한 척 하려는 로버트의 말에 제이크가 꽉 끌어안아줬어. 슬픈 한숨을 쉬며 로버트도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지. 존의 침대에는 로버트가 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의 일기가 펼쳐져 있었어.
존.
오늘은 날씨도 화창하고 몸상태도 괜찮아서 아이들과 함께 바다로 갔어요. 대서양의 마지막 바다라고들 하던데, 이름은 그럴듯 하지만 우리가 어릴 때 보던 바다만큼 아름답진 않아요. 하지만 밥은 그마저도 신기한지 많이 신나하더라구요. 아빠하고 물장구를 치며 노는 모습을 보니까 예전에 당신이 했던 말이 생각났어요.
푸른 잔디는 아니지만 아이는 파란 물 위에서 뛰놀고, 기기의 힘을 빌렸지만 나는 그런 아이를 보고 고통없이 웃을 수 있었어요. 내 곁에서 입맞춰주는 당신은 없지만 이제 할아버지 이름도 쓸 줄 안다면서 모래 위에 손가락으로 JOHN GLEN을 잔뜩 쓰고 칭찬해달라고 쳐다보는 우리 딸의 아이가 옆에 있어요.
아이가 장난감을 조립하기 전에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지만 당신이 바랬던 미래는 이것보다도 아름답고 행복했을테니 저는 당신을 이해해요. 하지만 역시.. 파도가 지나가면 사라지는 당신의 이름들 보다 진짜 당신이 너무 보고 싶어요.
당신도 여기 있었다면 정말 좋았을텐데...
약간씩 단어들 수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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