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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9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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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니는 눈을 길게 깜빡였다. 정작 제대로 한 일은 하나도 없는데 지독한 피로감이 온 몸을 짓누르는 기분이었다. 네이트의 상견례는 그대로 엉망이 되어버렸고 테리와의 대화 같지 않은 대화도 그게 끝이었다. 시간을 끌다간 무슨 말을 할지 모르겠어서 대충 마무리하고 도망치듯 나와버렸다. 이대로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3일 내내 자고 싶었지만, 걱정하고 있을 가족들이 뻔해서 그러지도 못했다.
집에 들어서는 순간 랜스가 시끄럽게 해댈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조용히 케니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네이트 역시 별 말 없이 오늘은 이만 들어가 쉬라는 말 뿐이었다. 케니는 침대에 파묻히는 대신 정원으로 나와 흔들 그네에 앉았다. 의미 없이 몸을 앞뒤로 움직이는데 그네의 옆쪽에 새겨진 낙서들이 눈에 들어왔다. 삐뚤빼뚤한 이름들. 네이트, 랜스, 케니, 버드. 그리고 그보단 훨씬 깔끔한 솜씨로 새겨진 이름, 브랫.
그네는 어느 날엔가 브랫이 나무며 공구들을 잔뜩 가져오더니 뒷마당에서 한참을 재고 자르고 두들겨 손수 만든 것이었다. 그다지 손재주가 없는 형제들은 브랫이 부탁하는 대로 옆에서 잡아주거나 치수를 재어주거나 땀을 닦아주는 정도가 전부였으나 그네가 완성되는 날엔 다들 신나서 작게 완공 파티까지 열었다. 브랫이 쥐여주는 대로 송곳을 들고 직접 이름을 새겨넣은 게 파티의 마무리였다.
'고마워요, 브랫. 버드가 너무 좋아하겠다.'
그렇게 말하는 케니를 돌아보던 남자는 눈썹 한쪽을 비쭉 올리며, 넌? 하고 물었다. 무슨 말인지 몰라 눈을 꿈벅이는데
'케니 너도 그네 타는 거 좋아하잖아. 둘이 타라고 만든 거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는 저를 찾아대는 버드에게 향하던 뒷모습이 눈에 선했다. 처음이었다. 케니가 그네를 좋아하는걸 알아준 사람은.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등쌀에 못 이겨 놀이터에서 제대로 놀아보지도 못 한 케니의 눈엔 그네를 타고 훌훌 날아오르는 아이들이 세상 제일 부러웠다. 그래서 아직도 아무도 없는 밤이면 몰래 그네를 타보곤 했었는데.
상념에 빠진 사이 옆에 와 털썩 주저앉는 무게감에 그네가 삐그덕댔다. 케니는 괜히 밤하늘을 보는 척하는 남자를 힐끔 바라보았다. 그날부터 한 순간도 빠짐없이 그의 가족이었던 브랫 콜버트를.
"케니. 너 없는 동안 형이랑 얘기를 좀 해봤는데 말이야."
그는 돌려 말하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다. 지금은 오히려 그런 게 편안했다.
"결혼식이랄 거 없이 그냥 서류만 합치는 건 어떤가 싶어."
"싫어."
생각할 것도 없는 즉답이었다. 케니는 어쩌면 집에 오는 내내 형이든 브랫이든 저 말을 꺼낼 것이라고 예상 중이었는지도 몰랐다.
"괜히 나 때문에 그러는 거 싫어요."
"케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이건 더 이상 너랑 테리 둘만의 문제가 될 수 없어. 형들한테도 간단하게나마 사정을 얘기해야 할거고."
"둘이 결혼식 한다고 나랑 테리가 얼굴 볼 일이 몇 번이나 있겠어? 기껏해야 본식 당일이겠지. 그거 피하자고 결혼식을 엎어?"
케니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지만 브랫은 여전히 침착한 얼굴이었다. 그 역시, 케니의 이런 반발쯤은 예상했을 것이다.
"그래 그 하루. 케니, 나랑 네 형은 그 하루도 네가 상처받는 게 싫어. 이건 우리 욕심이야."
이번엔 케니가 별을 보는 척 고개를 돌렸다. 괜히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진 않았다.
괜찮은줄 알았는데. 이제 정말 테리를 생각해도 아주 잠시 슬퍼하고 말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테리 먼로는 여전히 케니의 깊은 곳을 건드렸다. 고작 한다는 게 왜 헤어진 거냔 질문이고, 도망치듯 일어서는 케니를 잡지도 않은 그 남자가 여전히 케니의 속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무너진 적 없는 척 허접하게 세워둔 벽을 완전히 부수는 건 이런 다정함이었다. 누군가 케니를 꾸준히 돌봐주고 염려해준다는 감각.
"나 많이 걱정하는 거 알아요. 근데... 나 진짜 형이랑 형부 결혼하는 거 보고 싶어. 화려하게, 성대하게, 엄청 축하받으면서. 그걸 못 보는 게 더 슬플 것 같아."
칭얼대며 움츠러드는 어깨 위로 따뜻한 손이 올라왔다. 어느샌가 밖으로 나온 네이트가 뒤에서 케니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우리도 네 맘 알지. 천천히 생각해보자. 급한 일이 아니니까."
케니는 고개를 젖혀 형의 목에 얼굴을 기대었다. 가끔은 무너져도 옆에서 함께 기다리고 손을 내밀어줄 사람들이 있다는 믿음은 이만치도 든든한 것이었다. 그건 언젠가, 케니가 테리에게 주고 싶었던 마음이기도 했었다.
*
테리는 빈 도화지 같은 남자였다. 아무도 케니의 생각에 동의해주진 않겠지만 그건 케니만큼 테리를 잘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테리의 집만 봐도 그랬다. 넓고 큰 집은 딱 그만큼 비어있었다. 그나마 채워져 있는 건 드레스룸 정도였다. 케니가 그 도화지를 펼치고 케니만의 색으로 물들이기 시작할 때 까지, 둘은 지난한 싸움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케니의 노력과 눈물과 가끔의 주먹으로 겨우 제 마음을 인정한 못난 남자와의 연애다운 연애를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수사를 나갔던 테리가 미아 아이를 발견하고 서에 데려온 적이 있었다.
아이를 데려온 건 테리였는데 아이는 케니 껌딱지가 되었다. 테리는 그것에 불평하면서도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살살 달래는 케니의 모습을 보며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웃어댔다. 다행히 아이가 차고 있던 목걸이 덕에 보호자들과도 금방 연락이 되었다.
아이는 쉼 없이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환경에 불안해했고 케니가 순찰 겸 아이를 안고 근처를 한 바퀴 돌았다. 슬슬 케니의 팔이 아파질 때쯤 테리가 아이를 훌쩍 들어 어깨 위에 얹었다. 아이는 놀랐다가도 쑥 높아진 시야에 신이 난 듯 웃었고, 이번엔 케니가 그런 둘의 모습을 찍었다.
셋이 다시 서로 돌아올 쯤 그들은 어린 아들과 나들이를 나온 젊은 부부쯤으로 보였다. 케니는 자연스레 테리에게서 아이를 받아 안아 소파에 앉혀두고 테리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었다. 곁을 지나던 경관이 흘리듯 한마디를 던졌다.
'먼로 또 가족 놀이 시작이네.'
그땐 가족이란 단어에 꽂히기도 했고, 그제야 그들이 어떻게 보일지 자각이 되었던 터라 민망한 마음에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갔었다. 그 아무것도 아닌 줄 알았던 말이 심장에 콱 날아와 박힌 건 한 달이나 지나서였다.
그날따라 테리는 야근에 발목이 붙잡혔었다. 케니는 홀로 소파에 앉아 새삼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처음 왔을 때만 해도 모델하우스마냥 비어 있던 집이 이젠 꽤나 케니의 색채에 물들어 있었다. 부엌에는 아기자기한 식기와 시리얼, 과자,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주전부리들이 널려있었고 겨우 술이나 몇 병 놓였던 서랍장에는 케니가 가져다둔 소품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결벽적일 정도로 깔끔한 성격이다 싶어 그의 집을 드나들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부스러기 하나 흘리고 가지 않기 위해 노력했는데 테리는 오히려 집에 케니의 짐이 늘어가는 것을 더 기뻐했다. 테리는 이미 전용 슬리퍼가 있었기에 케니가 따로 제가 쓸 털슬리퍼를 사 왔을 땐 커플로 사 오지 않았다고 진심으로 토라져 한참이나 달래주어야 했다. 그렇게 원래라면 집에 두지 않고 차에 들고 다니려던 그 슬리퍼가 자연스레 테리의 현관에 자리한 것을 시작으로 텅 비어있던 공간이 하나씩 채워졌다.
딴생각에 빠져있느라 손에 들린 아이스크림 스푼을 떨어트렸고, 케니는 그걸 찾으려 소파 밑으로 몸을 옹송그렸다. 어디로 미끄러졌는지 영 보이지가 않아 팔을 깊숙이 집어넣었을 때 손에 잡힌 건 스푼이 아니라 폴라로이드 사진이었다. 웬 사진이지? 아무 생각 없이 사진을 들여다본 케니의 몸이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었다.
한세트인듯 폴라로이드 사진 다발이 끈으로 묶여있었고, 첫 번째 사진은 모자를 쓰고 침대에 누워있는 여자였다. 케니에게도 익숙한 모자는 여전히 테리의 드레스룸에 걸려있을 것이다.
테리같은 남자에게 여자친구가 없었다는 게 더 이상하단 것 쯤은 알고 있었다. 뉴욕서로 발령받아 오고도 그는 꾸준히 누군가를 만났었고 케니가 아는 것만 해도 두 명은 되었다. 그래도 생각하는 것과 직접 눈으로 보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케니는 바쁘게 화닥대는 가슴께를 꾹 눌렀다. 더 이상 볼 필요 없이 사진 뭉치를 다시 소파 밑으로 밀어 넣으라는 머리의 외침과는 달리 손은 끈을 풀어내고 있었다.
앞장에서 본 여자의 사진이 몇장 더, 여자가 찍어준 듯한 테리의 사진도 몇장. 테리가 어떤 표정인지 들여다볼 자신이 없어 빠르게 넘기던 손이 멈추었다. 여자와, 테리와, 어떤 남자아이. 셋이 찍은 사진이 많았다. 케니의 눈에도 익은 어떤 레스토랑이기도 했고, 여행지처럼 보이는 곳이기도 했다. 셋은 짜 맞춘 퍼즐처럼 한 가족 같은 모습이었다. 테리는 여자의 어깨를 감싸고, 가운데 낀 아이가 양옆 두사람의 허리를 감싸 안고 있었다. 집에서 찍은 사진들도 있었다. 셋이 맞춰 입은 옷들은 외출복 이기도 했고 파자마이기도 했다.
사진 속 장소가 낯설어 보였는데 다시 보니 테리의 집이 맞았다. 다만 전처럼 텅 비어있지 않았고, 케니가 꾸며놓은 것처럼 어수선하지도 않았다. 여자의 취향인 듯 비비드한 색감의 가구와 소품들이 집을 채우고 있었고 테리의 얼굴은 편해 보였다.
순식간에 눈 뒤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 나이에 애인의 전 여자친구 같은 문제로 우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건 케니가 조절할 수 없는 문제였다. 다시 찬찬히 집을 둘러보았다. 테리는 빈 도화지 같은 남자였다. 텅 빈 채로 존재하다가 누군가 색을 채워 넣으면 그대로 물들어주었다. 그리고 끝나면, 그 페이지를 찢어버리면 그만이었다. 케니는 지금 집을 채운 물건들이 다 빠져나가고 다시 텅 비어버리는 모습을 상상했다. 테리에게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닐 것 같았다.
'먼로 또 가족 놀이 시작이네.'
무슨 뜻인지도 몰랐던 말이 아프게 박혔다. 케니에겐 순간 미래를 꿈꾸게 했던 그 말이 누군가에겐 그저 평소 행실을 조롱하는 말이었고, 테리는 반박하지도 않았다. 조용한 집에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비참하리만치 외로웠다.
슼탘 테리케니 약브랫네잇
케니는 눈을 길게 깜빡였다. 정작 제대로 한 일은 하나도 없는데 지독한 피로감이 온 몸을 짓누르는 기분이었다. 네이트의 상견례는 그대로 엉망이 되어버렸고 테리와의 대화 같지 않은 대화도 그게 끝이었다. 시간을 끌다간 무슨 말을 할지 모르겠어서 대충 마무리하고 도망치듯 나와버렸다. 이대로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3일 내내 자고 싶었지만, 걱정하고 있을 가족들이 뻔해서 그러지도 못했다.
집에 들어서는 순간 랜스가 시끄럽게 해댈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조용히 케니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네이트 역시 별 말 없이 오늘은 이만 들어가 쉬라는 말 뿐이었다. 케니는 침대에 파묻히는 대신 정원으로 나와 흔들 그네에 앉았다. 의미 없이 몸을 앞뒤로 움직이는데 그네의 옆쪽에 새겨진 낙서들이 눈에 들어왔다. 삐뚤빼뚤한 이름들. 네이트, 랜스, 케니, 버드. 그리고 그보단 훨씬 깔끔한 솜씨로 새겨진 이름, 브랫.
그네는 어느 날엔가 브랫이 나무며 공구들을 잔뜩 가져오더니 뒷마당에서 한참을 재고 자르고 두들겨 손수 만든 것이었다. 그다지 손재주가 없는 형제들은 브랫이 부탁하는 대로 옆에서 잡아주거나 치수를 재어주거나 땀을 닦아주는 정도가 전부였으나 그네가 완성되는 날엔 다들 신나서 작게 완공 파티까지 열었다. 브랫이 쥐여주는 대로 송곳을 들고 직접 이름을 새겨넣은 게 파티의 마무리였다.
'고마워요, 브랫. 버드가 너무 좋아하겠다.'
그렇게 말하는 케니를 돌아보던 남자는 눈썹 한쪽을 비쭉 올리며, 넌? 하고 물었다. 무슨 말인지 몰라 눈을 꿈벅이는데
'케니 너도 그네 타는 거 좋아하잖아. 둘이 타라고 만든 거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는 저를 찾아대는 버드에게 향하던 뒷모습이 눈에 선했다. 처음이었다. 케니가 그네를 좋아하는걸 알아준 사람은.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등쌀에 못 이겨 놀이터에서 제대로 놀아보지도 못 한 케니의 눈엔 그네를 타고 훌훌 날아오르는 아이들이 세상 제일 부러웠다. 그래서 아직도 아무도 없는 밤이면 몰래 그네를 타보곤 했었는데.
상념에 빠진 사이 옆에 와 털썩 주저앉는 무게감에 그네가 삐그덕댔다. 케니는 괜히 밤하늘을 보는 척하는 남자를 힐끔 바라보았다. 그날부터 한 순간도 빠짐없이 그의 가족이었던 브랫 콜버트를.
"케니. 너 없는 동안 형이랑 얘기를 좀 해봤는데 말이야."
그는 돌려 말하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다. 지금은 오히려 그런 게 편안했다.
"결혼식이랄 거 없이 그냥 서류만 합치는 건 어떤가 싶어."
"싫어."
생각할 것도 없는 즉답이었다. 케니는 어쩌면 집에 오는 내내 형이든 브랫이든 저 말을 꺼낼 것이라고 예상 중이었는지도 몰랐다.
"괜히 나 때문에 그러는 거 싫어요."
"케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이건 더 이상 너랑 테리 둘만의 문제가 될 수 없어. 형들한테도 간단하게나마 사정을 얘기해야 할거고."
"둘이 결혼식 한다고 나랑 테리가 얼굴 볼 일이 몇 번이나 있겠어? 기껏해야 본식 당일이겠지. 그거 피하자고 결혼식을 엎어?"
케니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지만 브랫은 여전히 침착한 얼굴이었다. 그 역시, 케니의 이런 반발쯤은 예상했을 것이다.
"그래 그 하루. 케니, 나랑 네 형은 그 하루도 네가 상처받는 게 싫어. 이건 우리 욕심이야."
이번엔 케니가 별을 보는 척 고개를 돌렸다. 괜히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진 않았다.
괜찮은줄 알았는데. 이제 정말 테리를 생각해도 아주 잠시 슬퍼하고 말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테리 먼로는 여전히 케니의 깊은 곳을 건드렸다. 고작 한다는 게 왜 헤어진 거냔 질문이고, 도망치듯 일어서는 케니를 잡지도 않은 그 남자가 여전히 케니의 속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무너진 적 없는 척 허접하게 세워둔 벽을 완전히 부수는 건 이런 다정함이었다. 누군가 케니를 꾸준히 돌봐주고 염려해준다는 감각.
"나 많이 걱정하는 거 알아요. 근데... 나 진짜 형이랑 형부 결혼하는 거 보고 싶어. 화려하게, 성대하게, 엄청 축하받으면서. 그걸 못 보는 게 더 슬플 것 같아."
칭얼대며 움츠러드는 어깨 위로 따뜻한 손이 올라왔다. 어느샌가 밖으로 나온 네이트가 뒤에서 케니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우리도 네 맘 알지. 천천히 생각해보자. 급한 일이 아니니까."
케니는 고개를 젖혀 형의 목에 얼굴을 기대었다. 가끔은 무너져도 옆에서 함께 기다리고 손을 내밀어줄 사람들이 있다는 믿음은 이만치도 든든한 것이었다. 그건 언젠가, 케니가 테리에게 주고 싶었던 마음이기도 했었다.
*
테리는 빈 도화지 같은 남자였다. 아무도 케니의 생각에 동의해주진 않겠지만 그건 케니만큼 테리를 잘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테리의 집만 봐도 그랬다. 넓고 큰 집은 딱 그만큼 비어있었다. 그나마 채워져 있는 건 드레스룸 정도였다. 케니가 그 도화지를 펼치고 케니만의 색으로 물들이기 시작할 때 까지, 둘은 지난한 싸움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케니의 노력과 눈물과 가끔의 주먹으로 겨우 제 마음을 인정한 못난 남자와의 연애다운 연애를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수사를 나갔던 테리가 미아 아이를 발견하고 서에 데려온 적이 있었다.
아이를 데려온 건 테리였는데 아이는 케니 껌딱지가 되었다. 테리는 그것에 불평하면서도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살살 달래는 케니의 모습을 보며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웃어댔다. 다행히 아이가 차고 있던 목걸이 덕에 보호자들과도 금방 연락이 되었다.
아이는 쉼 없이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환경에 불안해했고 케니가 순찰 겸 아이를 안고 근처를 한 바퀴 돌았다. 슬슬 케니의 팔이 아파질 때쯤 테리가 아이를 훌쩍 들어 어깨 위에 얹었다. 아이는 놀랐다가도 쑥 높아진 시야에 신이 난 듯 웃었고, 이번엔 케니가 그런 둘의 모습을 찍었다.
셋이 다시 서로 돌아올 쯤 그들은 어린 아들과 나들이를 나온 젊은 부부쯤으로 보였다. 케니는 자연스레 테리에게서 아이를 받아 안아 소파에 앉혀두고 테리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었다. 곁을 지나던 경관이 흘리듯 한마디를 던졌다.
'먼로 또 가족 놀이 시작이네.'
그땐 가족이란 단어에 꽂히기도 했고, 그제야 그들이 어떻게 보일지 자각이 되었던 터라 민망한 마음에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갔었다. 그 아무것도 아닌 줄 알았던 말이 심장에 콱 날아와 박힌 건 한 달이나 지나서였다.
그날따라 테리는 야근에 발목이 붙잡혔었다. 케니는 홀로 소파에 앉아 새삼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처음 왔을 때만 해도 모델하우스마냥 비어 있던 집이 이젠 꽤나 케니의 색채에 물들어 있었다. 부엌에는 아기자기한 식기와 시리얼, 과자,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주전부리들이 널려있었고 겨우 술이나 몇 병 놓였던 서랍장에는 케니가 가져다둔 소품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결벽적일 정도로 깔끔한 성격이다 싶어 그의 집을 드나들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부스러기 하나 흘리고 가지 않기 위해 노력했는데 테리는 오히려 집에 케니의 짐이 늘어가는 것을 더 기뻐했다. 테리는 이미 전용 슬리퍼가 있었기에 케니가 따로 제가 쓸 털슬리퍼를 사 왔을 땐 커플로 사 오지 않았다고 진심으로 토라져 한참이나 달래주어야 했다. 그렇게 원래라면 집에 두지 않고 차에 들고 다니려던 그 슬리퍼가 자연스레 테리의 현관에 자리한 것을 시작으로 텅 비어있던 공간이 하나씩 채워졌다.
딴생각에 빠져있느라 손에 들린 아이스크림 스푼을 떨어트렸고, 케니는 그걸 찾으려 소파 밑으로 몸을 옹송그렸다. 어디로 미끄러졌는지 영 보이지가 않아 팔을 깊숙이 집어넣었을 때 손에 잡힌 건 스푼이 아니라 폴라로이드 사진이었다. 웬 사진이지? 아무 생각 없이 사진을 들여다본 케니의 몸이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었다.
한세트인듯 폴라로이드 사진 다발이 끈으로 묶여있었고, 첫 번째 사진은 모자를 쓰고 침대에 누워있는 여자였다. 케니에게도 익숙한 모자는 여전히 테리의 드레스룸에 걸려있을 것이다.
테리같은 남자에게 여자친구가 없었다는 게 더 이상하단 것 쯤은 알고 있었다. 뉴욕서로 발령받아 오고도 그는 꾸준히 누군가를 만났었고 케니가 아는 것만 해도 두 명은 되었다. 그래도 생각하는 것과 직접 눈으로 보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케니는 바쁘게 화닥대는 가슴께를 꾹 눌렀다. 더 이상 볼 필요 없이 사진 뭉치를 다시 소파 밑으로 밀어 넣으라는 머리의 외침과는 달리 손은 끈을 풀어내고 있었다.
앞장에서 본 여자의 사진이 몇장 더, 여자가 찍어준 듯한 테리의 사진도 몇장. 테리가 어떤 표정인지 들여다볼 자신이 없어 빠르게 넘기던 손이 멈추었다. 여자와, 테리와, 어떤 남자아이. 셋이 찍은 사진이 많았다. 케니의 눈에도 익은 어떤 레스토랑이기도 했고, 여행지처럼 보이는 곳이기도 했다. 셋은 짜 맞춘 퍼즐처럼 한 가족 같은 모습이었다. 테리는 여자의 어깨를 감싸고, 가운데 낀 아이가 양옆 두사람의 허리를 감싸 안고 있었다. 집에서 찍은 사진들도 있었다. 셋이 맞춰 입은 옷들은 외출복 이기도 했고 파자마이기도 했다.
사진 속 장소가 낯설어 보였는데 다시 보니 테리의 집이 맞았다. 다만 전처럼 텅 비어있지 않았고, 케니가 꾸며놓은 것처럼 어수선하지도 않았다. 여자의 취향인 듯 비비드한 색감의 가구와 소품들이 집을 채우고 있었고 테리의 얼굴은 편해 보였다.
순식간에 눈 뒤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 나이에 애인의 전 여자친구 같은 문제로 우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건 케니가 조절할 수 없는 문제였다. 다시 찬찬히 집을 둘러보았다. 테리는 빈 도화지 같은 남자였다. 텅 빈 채로 존재하다가 누군가 색을 채워 넣으면 그대로 물들어주었다. 그리고 끝나면, 그 페이지를 찢어버리면 그만이었다. 케니는 지금 집을 채운 물건들이 다 빠져나가고 다시 텅 비어버리는 모습을 상상했다. 테리에게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닐 것 같았다.
'먼로 또 가족 놀이 시작이네.'
무슨 뜻인지도 몰랐던 말이 아프게 박혔다. 케니에겐 순간 미래를 꿈꾸게 했던 그 말이 누군가에겐 그저 평소 행실을 조롱하는 말이었고, 테리는 반박하지도 않았다. 조용한 집에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비참하리만치 외로웠다.
슼탘 테리케니 약브랫네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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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11 02:09
ㅇㅇ
하 진짜 마음 찢어질 거 같은데 센세 글 읽으니 또 너무 좋아서ㅠㅠㅠㅠㅠㅠㅠ 도화지같은 사람이어서 물들었다가 찢어내버리면 그만이라니... 네가 마지막 장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왜 안 하고ㅠㅠㅠㅠㅠ 가치없는 무례한 말이어서 테리가 대응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왜 안 하고ㅠㅠㅠㅠㅠ케니야.....
브랫네잇이 케니 너무 아끼고 소중히 해서 내가 다 위로받는 것 같고ㅜㅜㅜ 테리는......하 오해가 쌓이고 타이밍이 좋지 않았을 것 같단 예감인데 모르겠어ㅠㅠㅠㅠㅠㅠ적어도 마지막 도화지 펼쳐놓고 있는 건 확실해보이니까 용기내보자 테리햐ㅜㅜㅜㅜㅜ
브랫네잇이 케니 너무 아끼고 소중히 해서 내가 다 위로받는 것 같고ㅜㅜㅜ 테리는......하 오해가 쌓이고 타이밍이 좋지 않았을 것 같단 예감인데 모르겠어ㅠㅠㅠㅠㅠㅠ적어도 마지막 도화지 펼쳐놓고 있는 건 확실해보이니까 용기내보자 테리햐ㅜㅜㅜ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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