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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06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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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종합해보면 지금 넌 나 몰래 다시 파병을 신청했고.“
“나 진짜 말하려고 했어, 진짜야..!“
”출국은 일주일 뒤고. 넌 지금 그걸 나한테 그냥 통보하는 거고. 뭐, 틀린거 있으면 말해주고.“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하퍼와 네이트는 각자 취향의 맥주를 한 캔씩 꺼내어 쥐고 있었지만 이제 그마저도 열기에 다 냉기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네이트는 캔을 쥔 하퍼의 손에 미약하게 힘이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좆됐다, 시발...진짜 존나 화났네.
“나 진짜 말하려고 했는데...”
“언제. 가기 전날쯤? 내가 그 오지랖 넓은 대위 통해서 듣지 않았으면 말도 안하고 쪽지나 하나 써놓고 갔겠지. 아니다, 거기가서 편지 한 줄이라도 보냈다면 다행이겠네.“
”빈정대지마. 나도 고민 많이 한 결정이야.”
“그걸 왜 너 혼자 결정해.”
“아 제발, 스톤 하퍼! 그만 좀 해라. 왜 매번 나는 너한테 모든걸 허락받아야해?“
”누가 허락받으래? 한마디 상의는 했어야 하는거 아냐? 너 이라크가기 전에 뭐라고 했어. 이번이 마지막이랬지.“
”사람 일이 어떻게 매번 계획대로 돼.“
”어, 안되지. 근데 네이트, 이건 니가 선택한거잖아. 내가 그렇게 싫어하고 걱정하는거 알면서 너는-.“
됐다. 그만하자.
하퍼는 반이나 남은 캔을 집어던지듯 쓰레기통에 쳐박았다. 형편없이 구겨지는 쓰레기통 속 쓰레기가 딱 제 기분같았다. 내가 그렇게 싫어하는 거 알면서, 그 이유가 저를 걱정해서 그런거라는거 다 알면서. 기어이 또 사지로 스스로 뛰어드는 네이트를 이해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게다가 본격적으로 결혼준비도 해야했다. 이쯤되니 저 어린 피앙세가 제게 마음이 식어 결혼을 무르고 싶은 마음에 이 핑계 저 핑계로 이런 짓을 벌이나 말도 안되는 상상까지 하게 되었다.
”이렇게 싫어하는데 내가 어떻게 말을 꺼내. 분명 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안된다고 했을거 아냐. 봐, 지금 내 이야기 듣지도 않잖아.“
”세상에, 네이트. 너 진심이야 그거? 내가 왜 화났는지 몰라? 그래, 니 말대로 내가 그렇게 싫어하는거 잘 알고 있네. 알고서 숨긴거야. 그럼 넌 앞으로도 그러겠지.“
네이트가 놀란 눈으로 하퍼를 올려다보았다. 마치 지금 그 말 진심이냐는듯 믿기지 않는 얼굴이었다.
”내가 네 파병소식을 왜 남한테서 들어야해.“
”미안해 그건...이번이 정말, 정말 마지막-“
”그래. 마음대로해. 마지막이든, 또 못참고 전쟁터로 기어가든. 이제 나 상관안할테니까.“
하퍼는 불안한듯 저를 집요하게 좇는 그 눈동자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치만 그 불안함을 달래주고 싶지는 않았다. 네가 날 사랑한다면 그런 식으로 하지는 않았겠지, 자꾸만 유치하고 어리숙한 원망만 피어났다.
“확실한건 우리도 이제 끝이라는거야.”
“스톤 하퍼. 너 진심이야?”
“내가 묻고 싶네. 내가 널 어떻게 믿어. 앞으로도 우리가 함께하면서 넌 또 내게 불편한건 감추고 숨기고 미루겠지. 게다가 네 멋대로 결정하는건 어떻고. 넌 내 생각을 하기는 해? 어떻게 매번 나만!”
벽을 내리치는 주먹이 채 잠재우지 못한 분노에 떨리는게 보였다. 고개를 숙인 하퍼의 입술 사이로 무거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넌 내가 좆도 안중에도 없어 네이트.”
이 공기에 생채기를 낼수 있다면 아마 집안은 피투성이가 되었을 터였다. 한마디 한마디 서운함과 분노를 토해내면서도 스스로에게 제동을 걸 수가 없었다. 네이트가 상처받을 것을 알면서도 한 편으로는 내가 아픈 만큼 너도 충격 좀 받아봤으면 하는 억하심정이 하퍼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한참 어린 애인을 상대로 충분히 한심해졌다는걸 아는데, 마음은 여전히 서운함이 가시질 않았다. 이렇게까지 강수를 두는데 끝까지 안가겠단 말은 꺼내지 않는 네이트가 미웠다.
“말 그딴 식으로 하지마 시발 알지도 못하면서.”
“네가 뭘 말하기는 했고?”
“잘난 중령 커리어만 중요해? 시발 중위 따위가 파병가는 건 존나 우습지, 어. 내 진급은 좆도 아니지 너한텐.”
“끝까지 넌 니 생각만 하네.”
“파병간다고 약혼깨자는 중령님은 뭐 잘한거고요?“
한껏 빈정대는 네이트의 목소리에 하퍼는 대꾸할 말을 잃었다. 대신 선반에서 차키를 집어들었다.
“그래. 너 마음대로 해. 이제 잔소리하는 애인도 없겠다 잘됐네.”
”너 지금 나가면 진짜 끝이야.“
”바라던 바야. 짐은 너 출국하고나서 뺄거니까 여기서 지내든지.“
하퍼는 제 키홀더 꾸러미에서 무언가를 빼내어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반지도 함께. 네이트가 하퍼에게 프로포즈하며 선물한 차와 반지였다. 네이트는 아연한 얼굴로 하퍼가 하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진짜, 진짜 이렇게...그만두겠다고...?”
“몸조심해. 아, 이것도 잔소리려나.“
진짜로, 하퍼가 떠나버렸다. 하퍼는 도무지 정리가 되지 않는 머릿속을 그대로 둔 채 도로를 따라 아무렇게나 계속해서 달렸다. 허름한 모텔이 딸린 펍에서 뻗을때까지 술을 먹고는 아무 방이나 잡아 반나절 넘게 잠에 빠졌다. 그리고 또 어스름히 저녁이 내리면 내려와 펍에서 술을 퍼마시고, 바에 엎드려 잠이 들었다가 겨우 또 모텔방에 늘어져 잠을 자거나 사온 술들을 퍼마셨다. 항상 반듯하고 칼같던 하퍼는 마음껏 무너지고, 망가져갔다.
시발, 그 파병이 뭐라고. 한 번을 붙잡지도 연락하지도 않아.
하퍼는 그 괘씸함에 사진이며, 메시지며 모조리 다 지워버렸다.
너 없어도 나 살아. 살아져.
하퍼가 중얼거리는 말과는 전혀 다른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그렇게 이틀, 삼일, 사일째. 숙취에 술은 커녕 죽은듯 잠만 자던 하퍼는 끊임없이 울리는 제 핸드폰 벨소리에 깨고 말았다. 모조리 흔적을 지운 탓에 주인없는 번호만 화면에 떠 있었지만 하퍼는 그 번호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벌써 세 번째였다. 평소 네이트 같지 않은 짓이었지만 뭐, 이별도 처음이니 이쯤에서 받아주기로 했다. 화명엔 통화 시각이 계속해서 흘러가고 있었다. 전화를 받은 하퍼도, 전화를 건 네이트도 그저 침묵할 뿐이었다. 참다못한 정적을 깬 것은 하퍼였다.
”왜. 전화했으면 말을 해.“
적막이 깔린 좁은 방에선 전화기에서 흘러나오는 숨소리마저 확연히 들려왔다. 네잇, 듣고 있어? 하퍼가 계속해서 부르는데 끊어지지도 않은 전화기에서는 점점 불규칙하게 빨라지고 거칠어지는 숨소리만 들려왔다. 전혀 좋은 소리가 아님을 단번에 감지한 하퍼가 일어나 앉아 신발을 신으며 차키를 찾았다.
”네잇, 네이트. 듣고 있어? 무슨 일이야.“
”형, 나-“
허억, 끅, 하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보이지 않는 밧줄에 목이 졸리듯 숨을 몰아쉬는 네이트의 처절한 숨소리가.
”숨이, 숨이 안-“
둔탁한 소음과 함께 전화가 끊어졌다. 내리 사일동안 흐려졌던 의식이 한 번에 또렷해지면서 온 몸에 피가 얼음장처럼 얼어붙는 것 같았다. 족히 두 시간을 달려온것으로 기억한 거리를 단 사십분만에 밟아 돌아왔다. 엑셀을 밟으면서 덜덜 떨리는 손으로 무슨 정신인지도 모르는 채 119에 신고를 하고, 차분히 네이트가 있을 집 주소를 불렀다. 이름과 신분을 밝히고 증상을 읊으며 그가 무슨 상황인지 말했다. 정기적인 상담을 받은 뒤로는 한참동안 찾아오지 않았던 증상이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떨고 있었을까. 이게 처음이었을까, 내가 떠난 4일동안 몇 번이고 증상이 찾아온 것은 아닐까 하퍼는 미칠것 같았다. 진정제를 맞고 잠든 네이트의 얼굴은 너무 어렸다. 온몸이 땀에 젖어 떨고 있던 탓에 체온도 내려가 있었다.
그렇게 꼬박 20시간을 잔 네이트가 힘겹게 눈을 떴다. 제 손을 꼭 붙잡고 잠든 하퍼의 등을 보고는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제 손을 쥐어오는 온기에 선잠을 깬 하퍼가 놀라 네이트를 안아달랬다. 미안해, 미안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다시 집에 오면 안돼? 내가 잘할게. 나 안갈게. 그러니까 형도 가지마.“
울음소리에 잔뜩 뭉개진 발음으로 제게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네이트가 가슴을 미어지게 만들었다. 정말 하퍼가 사라지기라도 할것 같은 지 그 등을 끌어안고 네이트는 연신 빌고, 울었다. 하퍼는 딱, 죽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씨발 그 자존심이 뭐라고, 서운한게 뭐라고 얘를 이렇게 몰아붙였나 싶어 정말 제 자신을 패버리고 싶었다. 나 버리지만 말라는 말에, 하퍼도 기어이 눈물이 터졌다.
한차례 눈물바람이 지나간 후 네이트는 퉁퉁 불고 발간 눈으로 하퍼만 계속 보고 있었다. 손은 하퍼의 옷자락을 놓지도 않은 채로.
”나가서 뭐 먹을거라도 사올게.“
”나 안먹어.“
”너 또,“
”아니, 아니 그게 아니고. 나 안먹어도 돼. 아무것도 필요없어. 그러니까 가지마.“
진짜, 나가죽자 스톤 하퍼. 제 팔을 끌어안고 놓아줄 생각이 없는 네이트를 보며 정말 숨쉬듯 죽고 싶어지는 하퍼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퇴원할수 있었지만 네이트의 불안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파병 취소를 하느라고 그 행정 절차에 꽤나 애를 먹었지만 전역까지 생각보다 빠르게 처리되었다.
결혼이라는 사유에 별달리 사족이 따라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퍼도 최대한 지상직으로 머무르려했지만 슬슬 대령을 바라보아야 했다. 줄이고 피한 해상 훈련이었건만, 합동 훈련만큼은 빠질 수 없었다. 죄인처럼 꺼낸 훈련 이야기에 네이트는 생각보다 흔쾌히 받아들였다.
”나 진짜 이제 입아픈데, 나 애 아니야 좀.“
”너라면 걱정안되겠어?”
“걱정한다고 훈련이 취소가 돼?”
“진짜 누가 훈련나가는 건지 모르겠네.”
“열심히 하란 말이야. 대령 사모님 소리 듣게.”
“너 생각보다 허세가 좀 있네.”
“형이 해병대에 대해서 뭘 알아. 해병은 존나 가오빼면 시체야.“
네이트가 애써 장난스레 대꾸해보지만 본인이라고 불안하지 않을치 없었다. 훈련보다는 그 때 이후로 하퍼와 오래 떨어져 있는건 처음이었으니까.
나름 약도 잘 받아놓고, 응급 시 연락처, 병원, 모두 꼼꼼히 하퍼에게 검사를 받고나서야 둘은 떨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미래는 항상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었다. 위기는 네이트가 아닌, 바다에 찾아와버렸으니까.
아마 그 일은 네이트가 처음으로 하퍼가 왜그렇게 화를 냈었는지, 뼈저리게 깨닫게 된 일이기도 했다.
슼탘 하퍼네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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