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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20 02:10
피어스의 목소리.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맨 몸에 공기가 차갑게 와닿는 감각. 시끄러운 음악소리. 시선들. 제멋대로 자신을 더듬는 손길들. 쫓기는 것 같은 불안감. 두려움과 초조함에 숨이 막힐 것 같은 얼마간이 지나 겨우 잠이 조금 옅어졌을 즈음에야 럼로우는 제가 악몽을 꾸던 중이라는 걸 알았다. 여전히 잠은 완전히 걷히지 않았지만, 그래도 저 멀리서 메아리처럼 울리는 불안감이 꿈 때문이라는 걸 인지할 정도는 되었다. 아직 반쯤은 잠결이었지만, 그래도 현실도 몽롱하게나마 느껴졌다. 숨을 쉴 때마다 가슴 속에 번지는 통증. 소독약 냄새 너머로 흐릿하게 존재하는 빗물 냄새. 누구의 목소리인지까지는 알아듣지 못하겠지만, 누군가가 자신을 브록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관자놀이 부근에 닿은 상대방의 손은 왠지 모르게 익숙해서 안심이 되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겨우 잠이 온전히 깨었을 때에도 럼로우는 한동안 몽롱함에 눈만 느리게 깜빡였다.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야 제 코앞에 있는 따스한 것이 잭의 손이라는 걸 알았다. 잠결에 잭의 손등을 제 이마에 댄 채, 그 손가락을 붙들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시야에는 그저 손등 뿐이었지만, 손가락 끝에 만져지는 익숙한 굳은살 자국들은 분명 잭이었다. 잭은 군에서 지급하는 규격 나이프를 별로 선호하지 않았다. 그는 늘 제 나이프를 따로 갖고 다녔고, 칼날이 매의 발톱처럼 휘어있는 탈론 나이프를 좋아했다. 하지만 통상적인 탈론 나이프와 다르게 손가락 고리가 칼굽에 붙어있는 걸 사용했고, 그래서 그는 늘 약지와 소지 사이, 그리고 검지에 굳은 살이 배기곤 했다. 럼로우는 한동안 반쯤은 잠결인 채 손가락 끝으로 잭의 손을 쓰다듬듯이 어루만지다가 천천히 손을 내렸다. 시선을 약간 위로 옮기자 잭이 스툴에 앉아 제 침대 오른편에 기대 있는 게 보였다. 스툴 자체도 편한 의자일 리가 없거니와, 침대와 높이가 거의 비슷해서 기대 있는 모양새는 전혀 편해 보이지 않았다. 잭은 방탄조끼 같은 것만 없을 뿐이지 임무지에서 병실로 곧장 온 게 분명한 무장 유니폼 차림새에다가 머리카락은 젖었다가 마른 티가 역력했다. 잭 뿐만 아니라 그와 침대 사이에 한껏 구겨져 있는 타올에서도 약한 비 냄새가 나는 걸 보면 아마 어디 정글 같은 데에서 푹 젖은 채 돌아와서 저 조그만 스툴에서 대충 구겨 잔 게 분명했다. 그러면 몸이 상하는데. 대체 언제부터 여기 있었던 걸까? 병실 불은 켜져있지 않았지만, 아침 시간인지 창문에서 햇빛이 들어오고 있어 충분히 밝았다. 얼마 전에 온 걸까? 하지만 그러기엔 비 냄새가 묻어나는 저 타올은 바싹 마른 채였다. 잭의 옷도.

"언제 왔어?"

"어제 밤에요."

목소리는 잔뜩 잠기고 갈라지다 못해 건조함에 기침이 나올 정도였다. 잭이 바로 앉는 걸 도와준 뒤 물잔을 내밀었지만 럼로우는 여전히 잔기침을 하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갈증은 분명 있었지만 입에 뭘 넣거나 삼키는 게 더 끔찍한 일처럼 느껴졌다. 바로 방금 전까지도 제게 들러붙어 있던 악몽과 애써 잊어가고 있었던 기억들이 다리가 잔뜩 달린 벌레처럼 등을 타고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럼로우는 일어나 앉은 뒤에야 자신의 마스크와 긴팔 티셔츠가 벗겨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플정도로 버석하게 말라있던 화상 자국들이 더 이상 쓰리지 않은 걸 보면 잭이 돌봐준 모양이었다. 그래도 왼쪽 얼굴은 움직이면 입가와 눈썹 부근이 여전히 조금 아렸다. 럼로우는 제 오른팔목 안쪽의 IV라인을 따라 수액팩을 올려다보았다. 지금 자신이 맞고 있는 게 희석 혈청인지 호르몬제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만일 희석 혈청이었다면 잭이 온 게 어젯밤이라니까 마스크 때문에 얼굴이 쓰린 것도 전부 나았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어쩌면 지금은 둘 다 맞고 있지 않고 그냥 수액만 들어가고 있을지도 몰랐다.

"아침에 로저스가 다녀갔어요."

잭의 볼멘소리에 럼로우는 비어있는 왼편의 일인용 소파를 돌아보았다. 어제는 약기운에 거의 잠들어 있었지만 (깨어 있으려면 좀더 깨어 있을 수 있었겠지만 캡틴과 단 둘이 병실에 있는 어색함 때문에 일부러 잠을 선택한 것도 있었다) 초저녁 즈음에는 캡틴이 있었는데, 아침에 다녀갔다는 걸 보니 다행히도 저녁에는 집에 돌아갔었고, 지금도 다른 일을 하러 간 것 같았다. 럼로우는 여전히 코에 걸려있는 산소줄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잭을 달래듯이 손등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러고보니 잭은 이 상황을 뭐라고 알고 있는 걸까. 쉴드가 면회를 금지하지 않은 건 다행이지만... 아직 캡틴이 이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도 확실치 않았다. 아무리 봐도 자신이 죽으려 한 걸로 생각하고 있을 것 같지만... 그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잭에게도 그렇게 알려졌을 거였다. 하지만 잭은 평소처럼 차분해보였다. 캡틴이 잭에게 그런 얘기는 안 한 건가? 하지만 대놓고 뭐라고 들었냐고 물을 수는 없었다. 그냥 몸 상태가 나빠진 정도로만 알고 있다면 괜히 긁어부스럼이 될 수 있으니까.

"내가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

"바튼이 알려줬어요. 임무 다 끝나고 퀸젯에서 내리면서."

어투로 봐서는 자신이 여기에 있는 것 보단, 바튼이 '늦게' 알려준 것에 더 부루퉁해 있는 것 같았다. 그냥 상태가 나빠진 걸로 알고 있는 건가. 그럼 다행인데. 하지만 바튼? 바튼은 분명 후발대로 잭과 같은 임무에 투입되었는데, 퀸젯에서 내리면서 말을 해줘? 그렇다면 그는 임무에 투입되기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단 얘기였다. 왜 바튼까지? 럼로우는 반쯤은 무의식적으로 잭을 달래듯이 그의 손등을 다시 쓰다듬으며 왼쪽 테이블에 충전 선이 연결되어 있는 제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혹시나 법무팀에서 연락이 온 게 있나 해서 확인해봤지만 그런 건 없었다. 문자 목록 맨 위에는 캡틴의 문자가 있었고, 화요일 날짜였다.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캡틴은 매주 아이의 세션을 알려주는 문자를 보내왔으니까. 하지만 미리보기로 보이는 내용이 평소와 너무나 달라서 럼로우는 잠시 굳어섰다. 미리보기로 보이는 내용은 언제나처럼 캡틴이 보내던 세션 요일과 시간이 아니라 '네'라는 한 단어였다.

뭐야? '네'라니? 이게 뭐야? 왜 이런 내용이... 캡틴이 이런 문자를 보냈던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문자를 눌러 내용을 확인해보자 충격은 배가 될 뿐이었다. '네'라고 보낸 건 자신이었다. 아무리 스크롤을 위 아래로 움직여보아도 캡틴이 세션 요일과 시간을 알리며 보낸 회색 말풍선만 즐비한 가운데 가장 마지막에 찍혀 있는 건 자신이 보낸 파란색 말풍선이었다. '네' 라고 적힌 한 마디. 화요일 오전 7시 9분. 머릿속에는 온갖 가능성들이 스쳐지나갔지만 (이를테면 쉴드가 제 휴대폰을 해킹했다거나) 아무래도 전부 말이 되지 않았다. 시간과 정황 상 아마도.... 아마도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제정신이 아니었던 자신이 보낸 답장일 거라는 게 제일 그럴듯했다. 설마 또 누구 다른 사람에게 이런 황당한 짓을 한 건 아니겠지 싶어 다른 문자 내역과 통화 내역을 뒤져봤지만 다행히 그런 건 없었다. 다만 화요일 오후 4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캡틴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하나 와 있었고, 거의 곧바로 다른 번호로도 부재중 기록이 있었다. 저장된 번호는 아니었지만 럼로우는 그 번호가 낯이 익어 곧장 알아볼 수 있었다. 바튼의 번호였다. 아직도 같은 번호를 쓰는구나.

그래서 캡틴이 알고 있었구나 싶었다. 바튼도. 세션에 가겠다는 듯이 답장해놓고 나타나지 않으니까 전화해봤겠지. 그리고 받지 않으니까... ...그냥 무시할 수도 있었을텐데 굳이 와봐줬구나. 아니지. 이상해서 그랬겠지. 설마 나를 걱정했을리가. 아마 화가 났거나, 너무 이상하다고 생각해서 그랬을 거야. 캡틴이 자신을 걱정해서 그랬을 리는 없었다. 이젠 그럴 사이가 전혀 아니니까. 그래도 캡틴과 바튼이 그때 들여다봐주지 않았으면 잭이 제 시체를 발견하게 됐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니까 어찌되었든 간에 다행이었다. 잭도 이 상황을 자신의 상태가 그냥 나빠진 정도로만 알고 있는 것 같고...

"로저스가 개소리를 하더라고요."

휴대폰을 내려놓던 럼로우의 손이 멈칫했다. 잭이 선택한 어휘 때문이 아니라, 그게 시사하는 바 때문이었다. 캡틴이 잭에게 했을 법한 말은 여러 가지가 떠올랐지만, 역시 그 중 제일 가능성이 높은 건...

"사령관님이 죽으려고 했다고요."

그냥 실수로 수면제를 많이 먹은 것 뿐이라고. 작은 실수였을 뿐이라고 뻔뻔하게 받아넘겨야 하는데. 하지만 죄책감에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자해하고 있는 것도 사실 잭과 윈터는 진작에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모른척 해줬는데. 자신이 정말로 죽을 생각이었는지, 그냥 단순 착오였는지는 알 수 없겠지만 적어도 잭이 그렇게 생각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그를 실망시키고 배반한 것 같아서 도저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우릴 두고 그럴리가 없는데."

목구멍은 여전히 꽉 닫혀서 아무런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을 것만 같았기에 럼로우는 그냥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어쩌면 잭이 현실을 부정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임무가 끝난 뒤 곧장 이리로 와선 저런 말을 하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햇빛을 받아 유독 유리알처럼 투명하게 빛나는 잭이 녹색 눈동자에는 그런 불안감은 비치지 않았다. 사실 자신은 잭과 윈터를 두고 죽어버릴 생각을 하는 사람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잭이 저렇게 아니라고 생각해준다면, 정말로 그냥 착오였다고 믿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응... 그냥 실수였어."

설사 잭이 다른 말을 하고 싶은 게 있었더라도 어차피 이 병실에는 쉴드의 도청기나 아니면 카메라까지도 달려있을테니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얘기는 아니었다. 럼로우는 다시 잭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잭에게서는 비와 화약 냄새가 날 뿐 피 냄새는 나지 않았고, 겉보기에도 다친 곳은 없어보였다. 물론 그에게 괜찮냐고 묻는 게 가장 간단하고 확실한 방법이었겠지만, 쉴드가 듣고 있을 게 분명한데 그런 대화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자신에게 잭과 윈터가 약점이라는 걸 퓨리는 이미 잘 알고 있지만 굳이 거듭 확인시켜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잭은 잠자코 시선을 받고 있다가 곧 그게 무슨 뜻인지를 깨닫고는 씩 웃기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병동 직원이 점심 식사를 가져다줬지만 럼로우는 지금은 별로 생각이 없으니 나중에 먹겠다는 빈약한 핑계를 대며 식사에 손을 대지 않았다. 허기가 느껴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묽은 수프와 햄 샌드위치, 주스 같은 것을 입에 넣을 자신은 없었다. 지난 주에 잭이 자신을 마지막으로 봤을 때까지는 그래도 음식 다운 걸 조금 먹을 수 있었는데. 자신이 물도, 식사도 먹지 않는 걸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그래도 다행히 잭은 캡틴과 달리 별다른 실랑이 없이 곧장 쟁반을 옆으로 치워주었다. 캡틴이 있었을 때에는 형편없는 핑계를 대면서 나중에 먹겠다고 미루고는 그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에 음식을 조금 화장실에 버리고 있었는데. 적어도 그런 건 하지 않아도 될 거라는 게 조금 마음이 놓였다. 이제는 허기를 넘어서 어지러울 정도라는 건 문제였지만, 그래도 억지로 넘기고 토하는 것도 썩 하고 싶은 일은 아니었다.

"차 드실래요?"

잭이 불쑥 던진 질문에 럼로우는 거의 자동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아파트에 있을 때면 잭이 종종 묻던 것이었으니까. 차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티백은 향만 날 정도로 조금 우렸을 뿐이고 그냥 입안이 데일 정도로 뜨거운 물에 설탕 잔뜩과 가루낸 비타민제를 녹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아파트에 있었을 때 얘기고 여기서 그런 건 없을 텐데. 하지만 잭은 금방 오겠다고 하면서 병실을 훌쩍 나가더니 몇 분 지나지 않아 뜨거운 레몬차가 담긴 머그잔을 갖고 돌아왔다. 복도에 자판기 같은게 있었다 해도 잭이 가져온 게 일회용 종이컵이 아니라 머그잔이라는 건 좀 이상한 일이었지만... 하지만 럼로우는 굳이 묻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자신이 먹을 수 있는 뭔가가 주어졌다는 게 반갑고 다행스러운 게 더 컸다. 차는 입안은 물론이고 식도도 데이는 것 같이 뜨거웠고, 설탕의 단 맛이 강렬했지만 그래도 먹을 수 있었다. 한동안 베개에 등을 기대고 앉아 천천히 머그잔을 비우고 나자 더 이상 입과 혀에 아무런 감각도 남지 않은 것 같았지만, 그래도 허기는 가셨고 속이 따뜻해진 느낌이 들었다. 그제야 잭이 계속 여기에 이러고 있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가서 쉬어. 씻고 자야지."

하지만 잭은 곧장 대답하지 않고 시선을 약간 왼쪽으로 기울였다. 럼로우는 잭의 그런 반응이 무슨 뜻인지 잘 알았다. 하기 싫은 일을 지시받았을 때 합당한 변명거리를 찾느라 머리를 굴리는 때면 잭은 늘 시선이 왼쪽으로 기울었으니까.

"윈터가... 집을 어질러놔서 가기 싫어요."

럼로우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야 윈터가 정말로 집을 어질러놨을 수도 있긴 했지만 (있음직한 일이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잭이 제 곁에 붙어있을 핑곗거리로 생각해낸 게 고작 그거라는 게 왠지 베슬대는 어린아이 같아서였다.

"그럼 샤워실에서 씻고 옷이라도 갈아입고 와. 감기 걸린다."

잭의 시선이 다시 왼편으로 기우는 걸 보고 있자니 머릿속에서 무슨 생각들이 굴러가고 있는지 빤히 보이는 것 같았다. 쉴드는 바로 옆건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오며가며 걸리는 시간도 있으니, 못해도 20-30분은 걸릴 것이고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 거겠지. 하지만 딱히 거기에 반박할만한 합당한 변명도 없을 것이다. 윈터가 집을 어질러놔서 가기 싫다는 것도 대단히 합당한 핑계는 아니었지만.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할게."

"...네."

잭은 마지못해 대답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화장실에 벗어뒀던 제 부츠와 양말과 방탄조끼와 벨트 따위를 들고 나와서도 괜히 미적대었다. 부츠끈을 아주 천천히 맨다든가 하는 식으로. 아직 물기가 여전한 것들을 캡틴이 앉아있던 일인용 소파에 올려둬서 소파도 젖어들었지만 그게 잭 나름의 불만의 표현이라는 걸 잘 알았기 때문에 럼로우는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마지막 벨트도 채웠고, 더 이상 미적거릴 게 없어지자 잭은 조금 부루퉁한 얼굴로 '금방 올게요'하고는 병실을 떠났다.

아니나다를까 잭이 자리를 비우자마자, 그러니까, 럼로우가 처음으로 이 병실에서 의식이 있는 채 혼자 있게 되자 곧장 쉴드 요원 셋이 들이닥쳤다. 도청기는 물론이고 카메라도 있는 게 분명했다. 전부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럼로우는 오랜 경험으로 그들 중 가장 왼쪽의 사람이 제일 직급이 높다는 걸 곧장 알아보았고 먼저 그에게 말을 건넸다. 이런 만남은 되도록이면 짧게 하고 싶었으니까.

"그냥 사고였습니다."

예상과는 다른 흐름에 당황했는지 쉴드 요원은 잠시 멈칫했고, 나머지 둘도 지시를 기다리듯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럼로우는 상대방의 짙은 밤색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다시 반복했다.

"그렇게 보고해주시면 됩니다. 그냥 사고였다고요."

자신의 것과 비슷한 색의 눈. 걸음걸이로 봐서는 그도 군인 출신인 게 분명했다. 해봐야 이제 서른 남짓 되었을까. 젊은데다가, 짧은 순간이나마 당혹감을 내비칠 정도로 아직 미숙함이 남아있으니 제대로 된 정황은 알지 못하고 단순히 지시만 받고 온 거겠지. 럼로우는 이 모든게 피곤했고, 되도록이면 빨리 끝내고 싶었다. 다행히 상대방은 자신의 말이 충분하다 여겼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앞으로 일정은 따로 연락이 갈 겁니다."

짧은 대화를 끝으로 쉴드 요원들이 병실을 떠나고 다시 혼자 남겨진 럼로우는 증언 남겨두는 걸 진작에 끝내둬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침대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짐 가방에 남아있던 반팔 티셔츠를 챙겨 산소 탱크를 끌고 화장실로 가 적당히 씻고, 잭이 가져다둔 걸로 보이는 연고와 크림을 바르고 옷을 입고 나자 휴지통에 생체 마스크가 조각난 채 버려진 게 보였다. 럼로우는 잠시 그 부서진 조각들을 내려다보다가 짐가방에 아직 남아있던 마스크 상자를 가져다가 조각들을 주워 넣었다. 이젠 이 마스크를 쓸 일이 없겠지만, 그래도 이걸 수리한다는 핑계로 상자 째로 돌려보내면... 상자 안에 아이의 사진첩을 숨겨서 조 박사에게 돌려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스크의 실제 소유주는 스타크일 것이고, 수리를 하더라도 스타크가 하게 되겠지만 어쨌든 자신은 캡틴에게 받았으니까. 수리든 반납이든 무슨 핑계든 간에 캡틴에게 전해달라고 조 박사가 받게 하면 다른 이들이 딱히 이상하게 여기진 않을 거였다. 자신의 몸 상태로 봐서는 쉴드가 시간을 많이 줄 것 같지 않으니 하루라도 빨리 돌려줘야했다. 어차피 자신이 갖고 있는다고 해서 좋을 것도 없는 일이고 위험하기만 하니까.

가방 안에 상자를 다시 잘 넣어두고 럼로우는 왠지 갑갑한 느낌에 창가로 향했다. vip용 병동이라 병실이 꽤 크기가 넉넉하기도 하고, 산소 탱크를 끌고 가는 것도 지치는 일이기도 해서 한동안 창가에 기대 멍하니 서 있는데, 이번에는 병동 직원이 병실에 들어왔다. 지난 며칠간 익숙해져서인지 그는 손도 대지 않고 옆으로 치워져 있는 식사를 보고 머뭇대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쟁반을 들고 돌아섰다. 어차피 잭에게는 식사를 먹은 척 할 필요가 없지만 그래도 병실에서 식사가 치워지는 게 한결 마음이 놓여서 그 뒷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는데, 병실을 나가던 직원과 캡틴이 마주쳤다. 캡틴은 자신과 부딪힐뻔 했던, 손을 하나도 대지 않은 식사 쟁반을 보며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가 직원이 목례를 하며 떠나자 맞은편 창가에 서 있는 럼로우에게로 시선이 향했다.

럼로우는 잠시 그대로 멍하니 서 있다가 자신이 캡틴과 눈을 마주치고 있다는 걸 깨닫고는 시선을 곧장 옮겼다. 마찬가지로 스티브도 여전히 병실 문고리를 잡은 채 서 있다가 어색하게 안으로 들어오며 문을 닫았다. 럼로우는 캡틴이 어제와는 다른 옷차림이라는 게 눈에 들어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어제는 집에 갔다는 뜻이었으니까. 약간의 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에야 인사할 타이밍을 놓쳤다는 걸 깨달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캡틴에게 뭐라고 인사를 건네야 하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오셨어요? ...예전엔 2년이나 만났었고, 그 중 1년은 거의 같이 살다시피 했었지만 (서로의 집에서 자고 간 적은 없었지만) 이제는 캡틴의 근처에서는 숨을 어떻게 쉬어야 하고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하는지조차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나아보이네."

"...네. 이제 괜찮습니다."

캡틴의 시선이 제 화상 자국을 보고 있다는 건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마스크도, 긴팔 티셔츠도 없으니 가릴 수 있는 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대놓고 변명하는 것도 왠지 이상한 것 같고... 조금 덜 보이게 고개라도 돌릴까. 아니, 차라리 침대로 가면 아예 왼쪽이 그에게 덜 보이게 앉으면 되니까...

"미안해. 마스크가... 널 아프게 하는 지 몰랐어."

"아뇨. 괜찮았어요."

반사적으로 뻔한 거짓말이 대답이랍시고 튀어나갔다. 팔은 몰라도 얼굴에는 아직도 연고를 발라야 했으니까 캡틴이 모를 리가 없는 거짓말이었고, 그것보단 괜찮은 변명거리가 있었을 것 같은데. 하지만 캡틴의 앞에서는 뇌의 회로라도 고장난 것 같이 그런 요령 좋은 말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예전에는 어떻게 하면 그의 마음에 드는 말을 할 수 있는 지 잘 알았던 것 같은데. 항상은 아니어도 대체로는 그랬는데. 캡틴이 2년이나 자신을 만나줄 정도로 꽤 잘 할 수 있었는데. 다시금 흐른 어색한 침묵에 럼로우는 겨우 할 말을 찾아내었다.

"...잭이 돌아와서요. 바쁘실텐데 이젠 안 계셔주셔도 됩니다."

"바쁘지 않아."

그게 무슨 소리지. 캡틴 아메리카가 바쁘지 않을 리가 없는데. 예의상 하는 말인가. 그렇지. 캡틴은 친절하고 도의적이라서 그런 말을 잘 하는 사람이니까.

"아뇨, 중요한 일도 많으신데-"

"이거 말곤 없어."

다시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어쩐지 이 병실에 있는 게 중요한 일이라고 말한 것처럼 들렸지만, 그건 그냥 말을 하다보니 그렇게 나왔을 뿐이거나 제가 잘못 들은 거겠지 싶었다. 그게 아니라면 너무 터무니없는 얘기니까. 럼로우는 애써 작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조금 오래 서 있었더니 다시금 어지러워지기 시작해서 이런 어색한, 예의상 주고 받는 대화는 빨리 마무리하고 캡틴을 병실에서 내보낸 뒤 누워서 쉬고 싶었다.

"캡틴 아메리카인데 그럴리가요-"

"지금은 어벤져스 일 없어. 오늘 아침 회의가 다였어. 일요일이니까 다른 것도 없고."

...일요일이니까 다른 것도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람. 멀쩡한 가족도 있는 알파가 심지어 휴일에 왜 이런데서... 하지만 그 '가족'이 자신 때문에 껄끄러운 입장이 된 조 박사와, 자신 때문에 치료를 받고 있는 아이라는 걸 생각하면 그런 말을 입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그리고 아까부터 다리에 힘도 점점 빠지고 있어서 럼로우는 별다른 대꾸 없이 천천히 침대로 향했다. 어쩌면 침대로 도망친다는 말이 더 맞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스티브가 성큼 다가와서 산소탱크를 대신 끌어주는 바람에 별로 의미는 없게 되었다.

"제가 해도 되는데요..."

고작 그 정도 걷는데도 벽을 짚고 가면서 그런 말을 하는건 설득력이 없겠지만 럼로우로서는 별달리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차마 캡틴의 표정을 쳐다볼 용기는 없어서 여전히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한 채였다.

"알아."

스티브는 자신이 앉아있던 일인용 소파가 젖어있는 걸 보고는 반대편의 스툴에 앉았다. 럼로우는 그가 자신의 화상이 잘 보이지 않는 쪽에 앉았다는 건 다행스러웠지만, 그의 시선이 협탁에 놓여있던 빈 머그잔으로 향하는 걸 보고는 어색함에 도망이라도 치고 싶다는 생각이 한가득이었다.

"롤린스는 돌아갔나?"

"아뇨. 그냥 잠깐..."

차라리 잭에게 문자라도 보내서 집에 가게 할까. 캡틴과, 심지어 자신에게 갑자기 친절한 캡틴과 병실에 았는 건 그것대로 숨막히게 어색했지만 잭과 캡틴이 마주치는건 상상만 해도 감당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뭐라 한들 잭이 아스토리아의 제 집으로 돌아갈리는 없었다. 차라리 헌터스포인트의 아파트에서 뭐라도 가져다 달라고 할까. 하지만 그건 시간을 지연시키는 것 정도 밖에는 되지 않을 거였다. 그 동안에 캡틴을 병실에서 나가게 할 수 없다면 의미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잭을 더 자극하는 일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거라도 해보는게...

똑똑.

이미 늦었군. 이 병실에 노크를 하는 건 잭 뿐이었다. 다들 그냥 불쑥 들어왔다가 나갔으니까. 침대에 앉아 있는데도 또 어지러움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잭과 캡틴이 마주하는 건 어떻게든 피했으면 했는데-

"캡틴-"

럼로우가 막아서려했지만 소용 없었다. 스티브는 성큼성큼 문가로 가서 문을 열었고 럼로우는 '캡틴이 병실 문을 열어줬다'는 것에 잭이 빈정상해서 삐딱하게 나올 것이 너무나 뻔히 보여서 눈을 질끈 감았다. 군인으로 살면서 온갖 돌발 상황은 전부 겪어봤다고 생각했고, 나름대로 잘 대처하는 편이라고 생각했지만 이 두 사람이 충돌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묘수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도 캡틴이 잭을 자극하는 말까지는 안 하지 않을까? 그래도 캡틴이니까?

"간 줄 알았는데 아니었군."

...아니군. 굳이 하는구나. 캡틴이라도 하는구나. 심지어 문가를 거의 가로막듯이 서서 잭을 향해 '왜 또 왔냐'는 듯한 말을 건네자 럼로우는 한숨을 삼켰다. ...하기사, 할만 했다. 캡틴이 헌터스 포인트에 왔을 때 잭이 거의... 당연히 되돌려주겠지.

"넌 또 여기 죽치고 있네. 영웅 주제에 할 일도 없냐?"

"지금은 없는데."

"비키기나 해."

캡틴에게 가려서 잭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만으로도 그가 10점 척도 중에 8점 정도로 화가 나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캡틴이 마지못해 길을 비켜주고, 잭이 병실에 들어선 뒤로는 그나마 상황이 좀 나아지려나 싶었다. 일단 자신이 멀쩡히 침대에 앉아있는 걸 보자 잭은 조금 기분이 풀린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잭은 캡틴이 자기 스툴에 앉는 걸 보고는 다시금 인상을 찌푸렸고, 럼로우는 그의 주의를 돌릴 필요가 있다는 판단이 들어 급하게 입을 열었다.

"잭, 차 한 잔만 가져다 줄래?"

캡틴이 자신을 의아하게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럼로우는 그걸 애써 무시했다. 예상대로 잭은 곧장 인상을 풀고 자신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차를 가지러 (대체 어디서 어떻게 가져오는 진 모르겠지만) 병실을 떠났다. 병실에는 다시 또 침묵이 흘렀다. 럼로우는 제 손만 내려다보며 캡틴의 시선을 피했다. 지금껏 식사는 전부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건너뛰어놓고 잭에게는 차를 갖다달라고 하는 게 캡틴에게 매우 이상해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그냥 두면 잭과 캡틴이 충돌할 건 불보듯 뻔했다. 다시금 허기가 슬슬 올라오고 있기도 했고.

잭은 이번에도 몇 분 지나지 않아 뜨거운 (그리고 설탕이 잔뜩 들어간) 레몬차가 담긴 머그잔을 들고 돌아왔다. 다만 이번에는 머그잔 뿐만 아니라 의자도 하나 들고 있었다. 그건 또 어디서 났는진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일인용 소파도 아니고 스툴도 아닌, 그냥 등받이가 있는 평범한 의자였다. 잭은 럼로우에게 머그잔을 건네고선 아직도 시트가 젖어있는 일인용 소파를 발로 구석에 밀어놓고는 럼로우의 오른편에 의자를 내려놓고 앉았다. 로저스와 달리 자신은 럼로우가 뭘 필요로 하는지 잘 알고 있다는 게 그의 기분을 약간 나아지게 했다.

럼로우는 캡틴의 시선이나, 방 안에 팽팽한 잭과 캡틴의 긴장감을 최대한 무시한 채 다시금 천천히 레몬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어떻게 생각해도 이 둘이 한 공간에 있는 한 충돌은 시간 문제였다. 결국 물리적으로 이 병실에서 둘을 나가게 하거나 (한쪽만 나가게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혹은 자신이 퇴원하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쉴드가 듣고 보고 있는 이 병실 안에서 둘이 충돌했다가는 잭이 곤란해지기 딱 좋았다. 잭이 이 병실을 자유롭게 드나드는 것도 그렇고, 아까 쉴드 요원들의 태도도 그렇고, 자신이 여기에 갇힌 건 아닌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냥 퇴원할 수 있냐고 묻는게 제일 빠르겠지. 럼로우는 반쯤 마신 머그잔을 내려놓고 침대 옆 리모콘의 의료진 호출 버튼을 눌렀다. vip 병실이니 당연히 있는 거였지만, 지금까지는 쓸 생각조차 없었던 버튼이었다. 그냥 이 병실 침대에 매여있는 인형처럼 누가 오면 오는대로, 의료진이 자신을 이리저리 찔러보고 들여다보면 그러는대로 있기만 했지. 하지만 이젠 그러지 않을 이유가 있었다.

호출을 받고 온 간호사에게 럼로우가 '오늘 퇴원할 수 있나 해서요'라는 말에 그가 의사를 데리러 다시 돌아가자, 그렇잖아도 병실에 흐르던 긴장감은 더욱 팽팽해졌다.

"럼로우, 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의사가 알아서 판단할거야."

캡틴의 걱정어린 목소리가 왠지 진심인 것 같아서 럼로우가 대답을 멈칫한 사이, 잭이 퉁명스럽게 받아쳤다. 두 사람이 충돌하지 않게 하는 게 목적이었으므로 럼로우는 잠시 기다렸다가 덧붙였다.

"많이 나아졌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의료진이 들어오고, 캡틴은 여전히 퇴원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은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그들이 이것저것 체크하는 동안 물러서 있을 뿐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잭은 이곳을 벗어날 수 있다면 환영이었으니 훨씬 표정이 나았지만, 그래도 무리해서 퇴원하는 걸 원하는 건 아니었으므로 마찬가지로 잠자코 뒤로 물러나 있었다. 럼로우는 의료진의 질문에 통증 수준이 2 정도라든가 하는 등의 몇 가지 거짓을 섞어 대답했고, 의료진은 산소 수치를 이리저리 조절하면서 한참 더 확인하더니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차지를 맡고 있는 걸로 보이는 의사는 자연스럽게 스티브를 쳐다보며 말했다.

"퇴원해도 문제는 없겠네요. 하지만 집에서도 보호자가 있는 게 좋겠고요-"

마치 그 '보호자'가 당연히 캡틴일거라고 생각하는 듯이 의사가 그를 향해 처방될 약과 몇몇 주의사항들에 대해 설명하는 동안 럼로우는 혹시 일이 더 나쁘게 꼬인걸까 하는 생각에 한숨을 삼켰다. 캡틴이 제 집에 오겠다고 하면... 잭도 분명 올 거였다. 그럼 이 상황은 해결될리도 없을 뿐더러... 일주일이나 집을 비웠으니 도청기 같은 걸 다시 샅샅이 확인해야 하는데 캡틴 앞에선 할 수 없을 거였다. 게다가 자신의 아파트는 침실이 하나 뿐이었고, 거실 소파에서 잘 수 있는 건 한 명 뿐이었다. 어떻게 두 사람이 충돌하지 않고 잠자리도 적당히 해결된다 한들 윈터가 돌아와서 보면 이 모든 상황을 다 알게 될 거고... 적어도 윈터는 이걸 모르고 넘어갔으면 하는데.

그래서 설명을 마친 의료진이 병실을 떠났을 때, 럼로우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캡틴을 보며 말했다.

"보호자는 잭이면 충분해요."

어차피 캡틴도 자신이 자살하려고 했다고 오해해서 신경쓰고 있는 것 뿐이지 사실은 자신과 엮이는 게 좋을 리도 없고 편할 리도 없으니까, 그도 이러는 편이 내심 좋겠지. 그는 올곧은 사람인데다가 자신이 자살시도한 걸 발견한 입장이기도 해서 이렇게 신경쓰는 것일 뿐이니까. 그러니까 내가 확실하게 말해서 이 모든 상황을 정돈하는게 제일이겠지 해서 그렇게 말한 거였는데. 하지만 그 말을 듣고 자신을 보는 캡틴의 표정이... 럼로우는 평생 남의 안색을 잘 살펴야 하는 입장으로 살았던지라 표정은 꽤 잘 읽는다고 생각해왔지만 이 때만큼은 캡틴이 자신을 보는 표정의 의미를 알기가 어려웠다. 얼핏 봐서는 비 오는 날에 길거리에 쫓겨난 강아지처럼 보였지만, 그건 표면만 그렇게 보이는 걸테고 실제 감정은 다른 것들일텐데. 혹은 아예 자신이 잘못 봤거나. 하지만 그걸 달리 뭐라 해석했어야 하는지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럼 데려다줄게."

"...네"

그래서 데려다주겠다는 캡틴의 말을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들였다. 여러 처방약을 지급받고 몇 가지 더 확인하고, 서류작업 등을 하느라 실제로는 거의 2시간 뒤에야 건물을 나설 수 있었지만 그러는 내내 캡틴과는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아 더더욱 그의 생각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아마 그냥 도의적인 책무감 같은 것이었겠거니 짐작할 뿐이었다.

그렇게 캡틴의 SUV 뒷좌석에 잭과 나란히 올라탔을 때, 럼로우는 별 뜻 없이 잭이 앉은 쪽 시트에 뭔가 눌린 자국을 쳐다보았다. 처음에는 뭔가가 네모낳게 눌린 자국인 거라고만 생각해서 플라스틱 컨테이너 같은 거라도 실었었나보다 했지만, 이어진 자국을 보다보니 아예 뭔가를 시트에 고정시켰던 것 같았다. 트렁크에 짐가방을 실은 캡틴이 운전석으로 향하는 동안, 럼로우는 거의 습관적으로 트렁크 쪽을 돌아보았다. 쉴드의 주차장이니 위험요인도 없을 것이고, 게다가 캡틴과 잭과 있으니 자신이 그런 역할을 해야 할 상황은 아니었지만 몸에 익은 오랜 습관이라 아직 반쯤 닫히고 있는 트렁크 쪽을 쳐다본 거였다. 자신이 이럴 필요는 없지 싶어서 거의 곧장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리려는데, 트렁크 한켠에 놓인 유아용 카시트가 보였다. 알록달록한 담요에 반쯤 가려져있는 카시트에는 이런저런 장난감과 인형이 달려있었다. 운전석 문이 열리는 소리에 럼로우는 급하게 몸을 앞으로 다시 돌렸지만 이미 충분히 본 뒤였다. 잭이 앉은 쪽의 눌린 자국은 카시트 흔적이었다. 자신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급하게 치우는 캡틴의 모습을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헌터스 포인트로 향하는 차 안에서는 아무런 대화도 오고가지 않았다. 스티브는 차가 거의 흔들리지 않도록 유독 천천히 운전했고, 잭은 거의 가운데 자리까지 걸쳐 앉아서 럼로우가 제게 기대기 쉽게 했다. 럼로우는 차가 회전을 할 적마다 운전석 아래에서 가볍게 흔들리는, 캡틴이 미처 보지 못해 치우지 못한 게 분명한 비눗방울 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비눗물은 거의 비어있었고, 알록달록한 캐릭터가 그려진 장식 스티커는 모서리가 약간 일어나 있었다. 여러 번 갖고 논 게 분명했다. 백미러에 대롱대롱 달려있는 자그마한 토끼 인형은 아마 너무 익숙해서 치울 생각도 못한 것 같았다. 당근을 물고 있는 토끼는 차선을 바꾸거나 할 때마다 줄이 빙그르르 돌며 몸만큼 커단 귀가 펄럭였고, 줄의 상태를 보건대 백미러에 달린 지 그래도 꽤 된 것 같았다.

자신은 아이에게 결코 줄 수 없었을, 평범하고 안전하며 행복한 삶이 엿보이는 모습에 럼로우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그 일부가 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상실감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다행이라는 안도감 뿐이었다. 숨을 쉴 적마다 느껴지던 통증도 잊어버릴만큼. 아이는 안전하고 행복할 것이다. 재판이 끝나고 나면 잭과 윈터도 안전할 수 있겠지. 잭은 화를 낼 것이고 윈터는 슬퍼하겠지만 그래도 시간이 조금 지나면 금방 그들도 행복해질 것이다. 쫓기지 않는 안전한 삶이 있으면 금방 행복해질 수 있을테니까. 항상 뭔가를 망치고 망가트리기만 했던 제 삶이 그나마 마지막에는 뭔가 쓸모 있는 일을 할 수 있으니 다행이었다.

아파트에 도착해 내린 뒤, 캡틴이 트렁크에서 짐을 꺼내주는 잠깐 동안 럼로우는 자신도 모르게 다시 유리창 너머의 카시트를 쳐다보았다. 금방 그만뒀어야 하는데, 잠깐 멍하니 있는 사이 자신이 보고 있었던 걸 캡틴도 보고 말았다. 캡틴은 멈칫하다가 뭔가 말하려는 듯했지만, 럼로우는 그걸 들을 자신이 없어서 작별인사로 덮어버렸다.

"감사합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보면 데려다준 걸 감사해하는 말로 들었겠지만, 실제로는 그 뜻 뿐만이 아니었다는 건 셋 모두 알았다. 하지만 그 외에 별다른 말은 오고가지 않았다. 그저 잭이 짐가방을 받아드는 동안 럼로우가 가방은 다음 주에 보내겠다고 말하는 게 전부였다.









럼로우텀 스팁럼로우 버키럼로우 롤린스럼로우

+잭이 가져온 차는 vip병동 리셉션 직원들을 반협박해서 얻어낸 것임. 잭은 자신이 나름 예의바르게 요청했다고 생각하지만 리셉션 직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음 ㅎㅎㅎ
2024.05.20 02:4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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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씨발 센세 흑흑흑흑 센세 기다렸어요ㅠㅠ 너무 좋아.. 행복해... 센세가 세상에 존재해서... 럼로우텀을 파줘서... 이런 무순을 써줘서... 진심으로 행복해요♡
[Code: e0b7]
2024.05.20 02:46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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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시발 일단 전방에 행복한 비명 발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센세 사랑해!!!!!!!!!!!!!!!!
[Code: e0b7]
2024.05.20 02:47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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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릴 두고 그럴리가 없는데.""우릴 두고 그럴리가 없는데.""우릴 두고 그럴리가 없는데.""우릴 두고 그럴리가 없는데.""우릴 두고 그럴리가 없는데.""우릴 두고 그럴리가 없는데.""우릴 두고 그럴리가 없는데.""우릴 두고 그럴리가 없는데.""우릴 두고 그럴리가 없는데.""우릴 두고 그럴리가 없는데.""우릴 두고 그럴리가 없는데.""우릴 두고 그럴리가 없는데.""우릴 두고 그럴리가 없는데.""우릴 두고 그럴리가 없는데."
[Code: e0b7]
2024.05.20 02:5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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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진짜 롤린스의 럼로우에 대한 믿음...집착... 사랑...♡ 미치겠다 진짜 존나 좋다 진짜 아니 "우릴 두고 그럴리가 없는데."<- 완전 신뢰 200퍼 늠름 댕댕이 같음.... 진짜 개좋다...
[Code: e0b7]
2024.05.20 02:5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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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하는 행동도 완전 아기강아지같음 하기싫은 일 변명거리 찾으면서 눈 굴리는거나 미적거리는거나ㅠㅠㅜㅜㅜㅜ 넘귀여워ㅠㅠㅜㅜㅜㅜㅜㅠ
[Code: e0b7]
2024.05.20 03:10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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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의바르게ㅋㅋ협박ㅋㅋ해서 럼로우가 마실 차 가져오는 롤린스.... 최고입니다...진심..개좋다 진짜..
[Code: ac6c]
2024.05.20 02:53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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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미친 그리고 스티브 자기 마음 자각한거냐고ㅠㅠㅜㅜㅡㅜㅜㅜㅜ 럼로우가 자꾸 부정은 하지만 자길 걱정하는 것처럼 느낀다는게... 스팁 이제 닦개되는건가???? 아 미친 진짜 설렌다ㅠㅜㅜㅜㅜㅜㅜㅜㅜ
[Code: e0b7]
2024.05.20 03:0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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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팁이 롤린스 경계하고 받은거 되돌려주고 하는거 보면 스팁도 평범하게 질투를 느끼는 알파같은데 그런거 보면 스팁이 럼로우를 믿어줬더라면 스팁럼로 같이 평범하게는 아니더라도 행복하게 살 수 있지않았을까 상상해보게된다... 럼로우가 엿볼 수 있었던, 그래서 안도했던 평범한 가정의 증거들 있잖아... 아기 카시트나 아이 장난감이나 이런것들.. 럼로우는 상실감이나 서글픔은 하나 없이 그냥 안도감뿐이였다고 하는데 시발 붕키는 너무 슬퍼요ㅠㅠ센세ㅠㅜㅜ 그 삶 안에 럼로우도 들어갈수 있었을텐데..
[Code: ac6c]
2024.05.20 03:09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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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다고 하는게... 아이한테 평범하고 안전하고 행복한 삶을 제공해줘서 감사하다고 말하는게 꼭 자기한테서 떼어나줘서 고맙다고 하는걸로 들려...시발 진짜 가슴이 찢어진다ㅠㅜㅜㅜㅜ
[Code: ac6c]
2024.05.20 03:07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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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니 근데 스팁하고 롤린스하고 충돌하는거 막으려고 괜찮다고 하고 억지로 퇴원한것 같은데 럼로우 괜찮으려나ㅠㅠ 괜히 몸 더 안좋아져서 나중에 쉴드병동에 감금되는거 아니냐고ㅠㅠㅠㅠ 럼로야ㅠㅠㅜㅠ
[Code: ac6c]
2024.05.20 03:1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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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돌아와줘서 고마워... 사랑해...♡
[Code: ac6c]
2024.05.20 05:4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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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기다렸어... 금광 발견한 광부처럼 달러왔어... 너무재밋어...
[Code: 3977]
2024.05.20 06:06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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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관련해서는 모든 걸 하찮게 생각하는 럼로우 ㅠㅠ
터무니없는 생각이라고 일축하다니 ㅠㅠ
캡틴이랑 잭 사이에 껴서 눈 질끈 감으면서 왜 자기랑 관련된 건 다 그렇게 하찮게 생각하냐 ㅠㅠ
[Code: 7e48]
2024.05.20 07:5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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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캡틴의 근처에서는 숨을 어떻게 쉬어야 하고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하는지조차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ㅠㅜ 캡틴 제발 가정으로 돌아가시죠 전애인한테 질척이지마시고. 잭이 돌아와서 다행인데 안다행인거같지만 암튼 다행이야ㅠ 윈터는 언제올까ㅠ 센세 사랑해
[Code: 7f88]
2024.05.20 08:23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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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린스 럼로우 앞에서만 애처럼 구는게 너무 너무 너무 귀엽고 좋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윈터가 어지러놓아서 집에 들어가기싫다니 ㅜㅜ흑흑... 럼로우나 잭이나 서로서로 알면서도 그냥 넘어가주는게.... 너무... 오래 사귄 연인들의 바이브라... 좋아요.... 근데 스팁은 진짜 ㅜㅜ 운명이 얄궂은것같고..... 첫 단추를 잘 끼웠으면 그래도 럼로우랑 스팁도 행복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해서... 마음이 아파요..... 그냥 넷이서 혐관이든 뭐든 오래오래같이 살았으면 좋겠다
[Code: 8b8a]
2024.05.20 08:58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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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넘 재밌어 센세ㅠㅠㅠㅠㅠ개존잼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7fd1]
2024.05.20 09:29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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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Code: 34ea]
2024.05.20 09:30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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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읽을 때마다 느끼는거지만 진짜 센세 디테일장인.. 어떻게 이렇게 세세한 것까지 다 생각하고 쓰는거야 내센세 천재만재
[Code: 34ea]
2024.05.20 10:3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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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기다리고있었어 하...재주행의 시기가 도래했다 센세 항상 사랑하고 고맙고 ㅠㅠㅠㅠㅠ
[Code: 45d2]
2024.05.20 23:30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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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보고 속으로 고함질렀어요 행복해서 . .
[Code: 9db8]
2024.05.21 00:5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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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영원하자 사랑해 너무 감동적이에요 진짜 붕키를 행복하게 만듦 햎 들어오는 이유: 센세
[Code: bef9]
2024.05.21 00:56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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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이랑 브록 너무 좋아
[Code: bef9]
2024.05.21 08:09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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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존나 재밌다 센세가 꾸준히 연재해주셔서 넘 행복함 ㅠ
[Code: 4715]
2024.05.23 11:5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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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이제야 알고 읽은게 슬프면서 이제라도 알고 읽어서 다행이고ㅠㅠ 인물들이 다 너무 매력적이라 한번도 안 쉬고 쭉 읽었다ㅜㅠㅜ 긴 기간 놓지 않고 연재해줘서 고마워ㅜㅜ!!!!
[Code: c645]
2024.05.24 17:36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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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고마워ㅠㅠ
[Code: 50d0]
2024.05.24 19:23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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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섬이 너덜너덜해져도 너무 조아 센세 ( ᵕ̩̩ㅅᵕ̩̩ )
[Code: 8fbd]
2024.05.24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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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센세 고맙고 억장이 무너지고 흐으으으윽ㅜㅠㅠㅠㅠㅜㅜㅠㅠㅜㅜㅠㅠ이 살아도 사는건지 하 미치겠다 별들아
[Code: 1192]
2024.05.25 09:48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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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천만번째 정주행중인데 볼때마다 감탄하는중 센세는 천재만재야
[Code: 5da0]
2024.05.26 11:19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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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미친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 매 화 개존잼ㅠㅠ
[Code: cf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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