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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12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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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 몇 개 남았어.
음, 4개?

오케이. 앞으로 주어진 기회는 네 번 정도인가. 한국인은 삼세판이라지만, 이번만은 예외로 친다. 과하게 솔직한 쾨니히를 감당하지 못하고 내쫓으려던 충동을 참아낸 호랑이는 그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고, 쾨니히는 계약이라기엔 조금 가볍고, 약속이라기엔 어딘가 간지러운 내용을 들은 후 고개를 끄덕였음. 남은 맥주를 다 마시게 되는 그날까지 둘 중 한 명이라도 서로에게 확신이 들지 않으면, 이 모든 걸 없던 일로 묻고 각자 갈 길 가기로 합의하는 둘.


“그럼 오늘부터 시작인 거야?”


쾨니히의 말에 호랑이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음. 까짓거. 가보자. 시작은 가볍게, 대화가 잘 되는지부터. 쪽지로는 나름 재밌었고 가끔 쾨니히의 유머에 웃기도 했으니 큰 걱정은 없지만, 현실의 커뮤니케이션은 조금 다를 수도 있다. 자고로 원활한 의사소통이란 연인으로 가는 첫단계이니 확실히 하고 가야 나중에 말 안통한다고 싸울 일이 없겠지.


“그때 무슨 생각했어?”


한 번씩 막히기는 하지만, 나름 나쁘지 않게 흘러가던 대화의 주제는 어느새 이 모든 사건의 발단인 최초의 그날, 호랑이가 쾨니히의 맥주를 실수로 마셨던 그 순간으로 넘어갔음. 호랑이는 그 맥주가 당시 쾨니히의 수중에 있던 마지막 맥주였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날 유달리 지쳐 맥주가 간절했다던 쾨니히에게 본인이 그걸 마시는 걸 봤을 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물었음.


“... 그거 맛없는데.”


엥? 기분이 안좋았다, 짜증났다 따위의 예상했던 범주의 답이 아니라서 호랑이는 의문을 표했음. 그게 무슨 뜻이야?


“그건 나한테 최후의 선택지 같은 놈이었거든. 뭐랄까. 나는 좋아하는 걸 먼저 먹는 타입이라, 그 맥주는 더이상 가진게 없을 때 마지막에 선택하는 그런 거였지.”

“그러니까 내가 네 쓰레기를 처리해준거네?”

“쓰레기라기보단..!! 그냥, 덜 선호한다는 거지.”

“알아. 이해했어. 농담한 거야.”


침대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있던 호랑이는 여전히 의자에 구겨진 채 손사레를 치는 쾨니히에 피식 웃으며 등을 기대고 시계를 확인했음. 마냥 동료라기엔 그 선을 넘은 것 같고, 친구라기엔 어색하고, 썸이라기엔 뭣도 없는 이 모호한 관계를 결판짓기 위해 쾨니히를 부른지 어느새 몇시간이 훌쩍 지나있었지.

호랑이는 이 상황이 꼭 소개팅 같다고 생각할 거임. 적당히 떨어져 앉아 있고, 서로에 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많고, 아직 모든 걸 오픈할 만큼 신뢰는 없어서 의식적인 불편함이 느껴지는, 하지만 꽤나 하하호호 순조롭게 이어지는 분위기는 마치 입대하기 전 마지막으로 했던 소개팅을 떠올리게 했음. 비록 본인이 개털 된 후라 좋았던 흐름에도 불구하고 밥만 먹고 헤어져야 했지만, 나쁘지 않았거든. 호랑이는 전생처럼 느껴지는 과거를 회상하며 과연 앞으로 얼마의 시간이 지나야 쾨니히에게 자신의 과거를 말하게 될지 생각해보았음. 그리고는 그날이 빨리 오진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했겠지.

계속 쾨니히의 손에 들려있던 두 번째 맥주가 미지근하다 못해 따뜻해졌을 때쯤 호랑이는 쾨니히를 방으로 돌려보냈음. 잘 자. 호랑이의 말을 빌려 명명한 둘의 ‘첫 소개팅'은 그렇게 무난하게 끝났겠지. 진작 김이 다 빠진 맥주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제 방으로 향한 쾨니히는 들어가자마자 온몸에 긴장이 풀려 침대 위로 쓰러졌음. 호랑이와의 시간은 고양되고 최근 들어 가장 즐거웠지만, 그만큼 사회성 에너지가 쪽 빨린 바람에 그대로 지쳐 잠들어버림. 그리곤 아침에 일어나서 어제의 일이 혹시나 꿈은 아닌지 기억을 더듬는데 얘기하는 동안 너무 만지작대서 군데군데 찌그러져 있는 맥주캔을 발견하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쾨니히가 ㅂㄱㅅㄷ





[맥주 먹자 -H]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어느날, 호랑이의 쪽지를 보고 쾨니히는 남아있는 세 번째 맥주이자, 데이트의 기준으로는 두 번째인 캔을 들고 호랑이의 방으로 향했음. 쾨니히는 마치 작전지에 들어가는 기분으로 문을 두드렸음. 열려 있어! 안에서 우렁차게 들려오는 목소리를 출발 신호 삼아 조심히 안으로 들어가는 쾨니히. 여름이 오고 있는 터라 방안의 공기는 답답했고 호랑이는 막 창문을 열고 있었음. 좁은 창문 너머 들어오는 미적지근한 바람을 느끼며 쾨니히는 호랑이에게 방금 냉장고에서 꺼내와 여전히 냉기를 뿜는 맥주를 건넸지.


“크허어–, 하... 살 것 같다.”


목구멍을 타고 온몸으로 퍼지는 시원함에 호랑이는 단전에서 올라오는 개운함을 내뱉었음. 쾨니히가 침대 위에 달린 에어컨을 가리키자 호랑이는 고장났다고 짧게 대답했지.


“수리 요청했는데 아직 연락이 없어.”


진작 창문 좀 열어놓을걸 그랬나, 별생각 없이 누워서 핸드폰을 보다가 쾨니히가 오는 소리에 부랴부랴 일어났던 호랑이는 땀이 나 찜찜한 티셔츠를 새 걸로 갈아입으려 했음.


“왜, 너무 더우면 네 방으로 갈까?”


입고있던 걸 훌렁 벗으며 호랑이가 묻는데, 돌아오는 반응이 없어서 쳐다보니 쾨니히의 시선이 제 상체에 꽂혀있는 거지. 호랑이는 제 가슴 근육을 내려다보며 속으로 뿌듯함을 느꼈음. 요즘 무게 좀 올린 보람이 있네. 은근히 자랑하듯 숨을 들이켜 흉근을 더 부풀린 호랑이는 마저 티셔츠 구멍에 머리를 끼워넣었음.


“새꺄, 그만 봐. 빵꾸나겠다.”


지는 더 좋은 몸 가지고 있으면서. 멋쩍게 딴청을 피우는 쾨니히에 호랑이는 속으로 웃었음. 참 순수한 놈이야. 찌르면 찌르는대로 반응하는게. 비록 시작은 순수하게 갈아입으려고 벗었던 거였지만, 솔직히 볼테면 보라는 심산도 있긴 했음. 하지만 같은 남자고, 본인 거랑 비슷한 우락부락한 몸 봐봐야 뭐 흥미가 있겠나 싶었는데 기대보다 큰 반응이 있자 뇌리에 무언가 스친 호랑이의 눈이 반짝였음.





스몰톡을 주고받던 둘은 이내 나란히 침대 위에 앉아 랩탑으로 영화를 보기 시작했음. 영화는 그냥 아무거나 튼 평범한 외국 코미디였는데, 녀석의 취향을 직격한 건지 이게 나름의 데이트라는 것도 잊고 정말 영화에 푹 빠져버린 쾨니히를 보며 호랑이도 다시 집중하려다 3초 만에 포기했음. 양놈새끼들, 이게 뭐가 재밌다는 거야. 자신의 정서와 문화적 배경으로는 도저히 웃음이 나지 않는데 옆에서 아주 박장대소를 하고 있는 쾨니히에 호랑이는 국제 커플의 힘든 점 따위를 소개하던 어느 쇼츠를 떠올렸음. 말 안통해서 힘들고, 개그코드 안맞아서 힘들고, 음식 취향 안맞아서 힘들고 이래저래 힘들다던데. 정작 그 영상을 찍어 올린 국제 커플 유튜버는 오래 전 결혼까지 해서 이미 애가 둘이었지만.

이미 영화엔 흥이 떨어졌고, 그렇다고 핸드폰 하기엔 매너가 아닌 것 같아 지루함에 하품을 하던 호랑이는 아예 몸을 사선으로 돌려 쾨니히를 쳐다보았음. 곧 있으면 울겠다 울겠어, 아주. 얼마나 재밌는건지 눈꼬리에 눈물까지 매달고 힉힉 웃고 있는 쾨니히는 옆에서 대놓고 자길 관찰하는 줄도 모르고 영화에 정신이 팔려 있겠지.

한참 실실대던 쾨니히는 목이 말라 맥주를 한모금 마셨음. 그리고 그때 하필 호랑이가 쾨니히의 손을 잡았지. 푸학-, 콜록, 컥, 맥주가 쏟아졌고 사레가 걸려 기침하던 쾨니히의 고개가 스르륵 옆으로 돌아갔음. 그 황당한 눈빛을 마주한 호랑이 역시 난데없이 펼쳐진 워터밤에 당황스런 눈길로 받아쳤지. ... 내 매트리스… 호랑이는 시트를 흥건히 적신 맥주를 보았음. 둘 사이에 내린 정적은 영화 속 캐릭터가 깔깔 웃는 소리에 겨우 깨졌을 거임.


“가, 가, 갑자기 왜,”

“아니 그냥, 난, 근데 뭐 이렇게까지 놀라?”


귀가 벌겋게 달아오른 쾨니히가 여전히 겹쳐있는 제 손을 내려다봤고 호랑이는 그제야 손을 뗐음. 쾨니히를 관찰하던 호랑이의 눈길이 꽁꽁 감춰져있는 얼굴을 지나쳐, 딱 맞는 핏의 트레이닝 셔츠 위로 웃을 때마다 들썩이는 가슴에 머물렀다가, 그 아래로 뻗은 두꺼운 팔에서 멈췄었음. 자기 팔뚝도 나름 굵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서양인은 골격이 다르구나. 탄탄함을 넘어 딱딱해보이는 팔뚝 위로 불룩 솟아있는 핏줄을 따라 향한 시선의 종착지는 손이었겠지.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본인도 어디 가서 꿀리지 않는 피지컬이라 자부하는데 이건 뭐, 종족값이 다르네. 문자 그대로 솥뚜껑만한 손을 신기하게 보며 호랑이는 제 손을 그 위로 펼쳐보다가 아무생각 없이 그대로 겹쳐 잡은 거였음. 저렇게 두꺼운 손은 어떤 느낌인가 싶어서.


“노, 놀라는 게 당연하잖아…”


마치 희롱당하기라도 한 것마냥 제 손을 가슴 위로 꼭 모으고 중얼거리는 쾨니히에 호랑이는 다 큰놈이 뭐하는 건가 얼척없어 하다 무언가를 깨달은듯 고개를 기울였음. 쾨니히는 영화를 보느라 선글라스를 벗어둬 고스란히 드러난 호랑이의 눈매가 장난기로 접히는 걸 보며 묘한 불길함을 느끼겠지.





맥주 워터밤 사건 이후 매트리스 세탁이 끝나기 전까지 호랑이의 방에서 단둘이 만나기는 힘들어졌겠지. 하지만 호랑이는 아쉽지 않았음. 요즘 다른 일로 너무 재밌었거든. 호랑이는 먹잇감을 노리는 진짜 호랑이처럼 눈을 빛내며 쾨니히가 지나가기만을 기다렸음. 그리고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는 맹수처럼 달려가 쾨니히의 엉덩이를 찰싹 때리겠지. 쾨니히는 보통 두 가지의 반응을 돌려가며 보였음. 지금처럼 놀라 펄쩍 뛰며 눈밑을 붉힌다든가, 놀라다못해 꽁꽁 얼어버린다든가. 이 무슨 순진한 공주님 같은 반응이란 말인가. 쾨니히의 순수한 반응을 보고 있자니 그 공주님마저 이것보단 발랑 까졌을 거라 생각하는 호랑이였음.


‘근데 너. 혹시 스킨십 처음이야?’
‘그럼 키스도 안해봤어?’


호랑이는 작정하고 녀석을 놀리기 위해 던진 미끼에 대어처럼 낚여 팔딱이는 쾨니히를 보고 저도 모르게 푸하하! 터져버리고 말았음. 호랑이가 너무 즐거워하자 쾨니히는 이 나이 먹도록 흔한 성적 접촉 경험 하나 없는 자신을 비웃는 건가 싶어 삐지는데 호랑이는 그 모습마저 그냥 풋풋한 애새끼 같아서 귀여운 거임. 아, 귀여워보이면 끝이라던데. 아무튼 이러한 이유로 호랑이는 요즘 가벼운 스킨십으로 이메다문짝 놀리는 거에 맛들려 있겠지.

그리고 그날 놀림당한 순진한 베이비걸아기덤보문어는 방에 돌아와서 부랴부랴 하우투키스 검색함ㅜ 글로 읽다가 현타와서 때려치우는데 뭐 하나에 꽂히면 끝까지 파고드는 찐따답게 밤새 온갖 키스신 영상 섭렵해서 머릿속으로 이미지 트레이닝 존나게 하다 밤에 호랑이랑 실컷 키스하는 꿈꾸는 쾨니히가 ㅂㄱㅅㄷ






쾨니히호랑이 쾨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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