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옵 크루거 옛날 약혼자가 크루거 찾으러 전쟁터 가는 거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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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냄새랑 화약냄새로 가득한 이 공간과 세상에서 가장 안 어울리는 여자를 보면서, 크루거는 속이 뒤집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음. 이 여자가 여기, 자기 눈앞에 있다는 걸 참을 수 없었음.


 

"조셉 도스 씨."


 

여자가 크루거의 가명을 말했음. 독일로 옮겨가면서 쓰기 시작한 의미없는 가명이었음. 그런데 저 여자가 입에 담을 때면 이상하게 찝찝해졌음. 거짓말 같은 건 정말 아무것도 아닌데. 살아남기 위해서 못할 게 뭐가 있다고. 나는 사람까지 죽였어. 그런데도 저 여자의 눈을 보면 거짓말을 하는 스스로가 역겹게 느껴짐.


 

"그건 가명이야."


이제야 크루거는 여자한테 진실을 밝힘. 빈정거리는 목소리로.


"아직도 모르겠어? 난 너한테 한 번도 진실을 말한 적 없어."
"왜요?


 크루거는 헛웃음을 흘렸음. 저 여자는 그때도 저랬음. 터무니없을 정도로 순진해서 매순간 한껏 경계하고 있던 크루거를 김빠지게 만들었음.


 

"나는 살인자야. 독일에서만 사람을 죽인 게 아니라 오스트리아에서도 사람을 죽였다고. 그러니 가명을 썼겠지."


순진한 부잣집 아가씨의 얼굴이 일그러졌음. 그런데 혐오스러운 걸 보는 거라기보단 괴로운 듯한 표정이었음.


"하지만...방금은 날 살려줬잖아요."


 

비웃음을 흘리려고 했는데 그렇게 되지는 않았음. 그게 사실이었고, 크루거로서도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했었거든.

 

크루거는 저 여자를 보면 죽이려고 했었음.

 

이번에야말로 죽이려고 했었음. 하루 이틀이어야지, 꿈인지 환상인지 알 수 없게 하루에도 몇 번이고 끝도 없이 나타나는 걸 볼 때마다 돌아버릴 것만 같았음.

죽여야지.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죽여야지. 그런데 크루거는 한 번도 그 여자를 죽이지 못했고, 총을 들고도 여자의 환상이 눈앞까지 다가올 때까지도 쏘지 못했음. 손가락 하나만 움직이면 되는데. 여자가 눈앞으로 다가오면 크루거는 총을 떨어뜨렸고 여자한테 손을 뻗음. 그런데 닿기 직전이면 여자는 사라져 있었음.

 

죽여야지. ...죽여야 하는데. 이번에는 그 여자를 죽이려는 개새끼를 죽였음. 그리고 여자를 붙잡았는데도 사라지지 않았어. 게다가 말까지 함. 진짜 허니비라는 말이었음.


 

"널 구한 게 아니라 저 새끼를 죽인 거다."
"다쳤어요?"


여자가 겁도 없이 크루거한테 손을 뻗음.

크루거는 반사적으로 쳐내려고 했음. 크루거는 누가 자기한테 손을 뻗는 걸 몹시 경계했음. 그런데 여자 손을 치려던 순간 멈춤. 그랬다간 팔이라도 부러뜨릴 것 같아서. 혹은 다시 건드린다면 사라져 버릴까 봐. 아니, 크루거는 그 이전, 충분히 만져도 되는 순간에도 만지지 못했었음.

 

그런데 여자 쪽에서 크루거 팔을 만짐. 별것도 아닌 상처를 가지고 소독을 해주겠다고 드레싱을 해주겠다고 끌고 감. 사실 끌고 간 건 아니고 크루거가 걸어가줌. 진짜 사소한 상처인데, 핀셋이랑 거즈를 들고 조심조심 닦아내는 꼴을 보자니 헛웃음이 나옴. 한참 그러는 걸 보고 있다가 크루거가 말함.


 

"돌아가."
"야전병원으로요? 다들 철수하고 있으니 가야 하긴 해요. 당신도 같이...."
"슈트르가르트로 돌아가라는 말이야."


조금 베인 상처에 거즈 올리고 테이프까지 붙이던 허니비가 문득 굳음. 그랬다가 테이프 마저 붙이면서 말함.


"저 이제 그곳에 안 살아요."
"콘라트 슈타인이랑 어디에서 살림을 차렸든 거기로 돌아가란 말이야."
 

 

허니비가 움찔 놀라면서 고개를 듦. 눈을 막 깜빡이는 게 무슨 의미인가 싶음. 데이트 몇 번 한 남자 입에서 남편 이름이 나오는 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얼굴이 달아오르는데 부끄러워서는 아닌 것 같았음. 어찌 보면 화난 표정 같기도 함. 저 여자가 화난 표정을 짓는 건 또 새롭긴 했음.


 

"그 사람이랑 저랑은 아무런 관계도 없어요."
"그 새낄 따라온 게 아니면 여기서 대체 뭘 하는 건데?"
"나는.....!"


허니비가 뭐라고 언성을 높이려다가 흠칫 멈추더니, 이렇게 말함.


"간호사예요. 그러니까 여기에 있는 거라고요. 당신이 군인이라서 이곳에 있는 것처럼요."

"결혼하고 삼 년만 하겠다는 간호사."


크루거가 빈정거리면서 말하니까 여자가 조금 전까지 조심조심 드레싱해준 상처를 확 누름. 크루거는 아파서가 아니라 놀라서 인상을 찌푸림. 성격이 어떻게 변한 건지 모르겠음. 그런데 다시 눈 내리깔더니 그 조용하고 유순한 허니비처럼 말함.


"작은 상처라도 이런 식으로 방치하는 건 안 좋아요. 이런 환경에서는 더욱이요."


간호사가 군인한테 할 법한 잔소리였음. 그런데도 크루거는 또 속이 뒤집힘.

자길 걱정하는 것처럼 들리게 만든다는 게 마뜩잖았음. 너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목이라도 조르고 싶었음. 저 가늘고 무방비한 목은 5초면 비틀어 부러뜨릴 수 있을 거임. 여자는 컥컥거리면서 버둥거릴 거고, 어쩌면 크루거를 올려다볼지도 모름. 그리고 그 커다란 검은 눈으로 크루거를 쳐다보겠지. 그러면... 그러면, 젠장.

크루거가 머릿속에서 그런 상상을 하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허니비는 말함.


"같이 야전 병원으로 가요. 여긴 다 정리가 된 거잖아요. 이 밤에 기지까지 가기도 어려울 거고, 부상병을 도운 거라고 말하면 부대에서도 눈감아......"


크루거는 여자 목에서 시선을 떼고 허니비한테서 팔을 조금 거칠게 빼내면서 말함.


"안 가."


허니비가 움찔하면서 올려다봄. 크루거 팔 붙들고 있던 손은 뭔가 중요한 걸 놓치기라도 한듯 허공에 머물러 있음.


"그리고 난 이제 군인이 아니야. 그런 일을 저지른 걸 받아줄 군대가 어디에 있겠어? 용병이야. 여기에 있는 것도 그냥 연합군을 돕기 위해서가 아니야. 난 돈을 주면 사람을 죽여. 죽이고 싶은 사람 있어? 너한텐 특별히 만달러면 목 하나를 갖다줄게."


허니비 너무 놀라고 충격받아서 새까만 눈으로 자기 올려다보는 거 지켜봄. 아니나 다를까 겁에 질려서 눈을 피함. 크루거는 가만히 바라보다가 돌아섬. 그렇게 끝이었음.

허니비를 직접 마주한 다음부터는 꿈에서도 환상에서도 허니비가 안 나옴. 정말 잘 된 일임. 저 여자가 여기 있는 게 미치도록 거슬렸는데, 적어도 이 거지같은 환상을 멈춰 줬으니 용서해줄 만함. 이제 허니비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함.

그런데 그 결심은 오래 가지 못하고... 크루거는 이주도 못돼서 허니비가 일하고 있는 야전 병원을 감시하기 시작함.

그리고 여자가 일하는 모습 보는 내내 진짜 모든 게 마음에 안 듦. 차가운 수돗물에 손 적셔 가면서 빨래 빠는 모습하며, 겁도 없이 더러운 남자들 간호하고 보살피는 거 하며, 최전선에 나갈 일 생기면 기다렸다는 듯이 뛰어드는 꼴하며. 미친 게 틀림없음. 그 좋은 집에서 미래 창창한 약혼자랑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왜 이런 곳에서 이 개고생을 하는 거임.

어느 날은 허니 뒷모습 쳐다보는 꼬라지가 마음에 안들던 폐급군인이 허니비 빨래하는 곳으로 쫓아가는 걸 봄. 크루거는 바로 칼 꺼내서 폐급군인 밀어붙임. 목 아래에 갖다붙이고 피날 때까지 누름. 폐급군인 왜 이러는 거냐고 반항하다가 결국 살려달라고 함. 크루거는 들은 척도 안하고 폐급군인 소지품 뒤지는데 무기 같은 거랑 콘돔이 있음. 그거 보고 바로 목 그어서 죽여버릴 듯.

그날 이후로 더 눈에 불켜고 감시할 것 같음. 허니비 저 겁도 없는 게 전선 근처로 갈 때마다 저격총 들고 허니비 근처만 바라봄. 혹시 누구 가까이오면 쏴버리려고.

그렇게 지내다가 자기도 임무하러 가야 했는데, 대체 허니비를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안잡힘. 임무 시작일이 다가오니까 점점 신경이 닳아감. 저 빌어먹을 여자를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대체 어떻게. 그러다 결국 억지로 어딘가에 가둔다는 해결책에 닿음. 사실 여태 떠올려본적이 없는 건 아니었음. 하지만 몇 번이나 지웠음. 그냥 이상한 거부감이 들었음.

그래도 결국 허니비 납치하려고 감. 방안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딱 납치하려고 하는데, 허니비가 먼저 부산스럽게 움직임.


"잠깐, 잠깐만요 도..."


도스씨라고 부르려다가 멈춘 것 같았음.


"그, 뭐라고...."
"크루거."
"크루거."


허니비는 잠시 멍하게 크루거 이름 곱씹고있다가 침대 아래 뒤져서 뭔갈 꺼냄. 꾸깃꾸깃한 지폐들임.


"만 달러요."


크루거는 눈살을 찌푸림. 이게 또 대체 뭔 수작인가 싶음. 그러다가 문득 자기가 만 달러면 사람 죽여주겠다고 했던 게 떠오름. 헛웃음 흘리는데 뭐 하나쯤 못해줄 것도 없을 것 같음. 이제 이 여자를 또 가두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듯한 눈을 하게 만들어야 함. 그렇게나 뜯어고치고 싶었던 눈인데. 이제 좀 바뀐 거 같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눈인데.


"누구? 인적사항을 정확히 말해."
"당신."


크루거가 코웃음 치는데 허니비가 얼굴 붉히면서도 당당하게 말함


"살인 같은 거 말고, 당신 하루를 줘요."


그러면서 자기 눈 똑바로 올려다보는데 크루거는 머리 아득해질 것 같음. 이 빌어먹을 여자. 빌어먹을 허니비.

콜옵 크루거가 전 약혼자랑 전쟁터에서 데이트하는 게 보고 싶다

콜옵 크루거너붕붕

[Code: ca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