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연갤 - 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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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1
호열이 일러주는 대로 차를 돌려 도착한 곳은 놀랍게도 호열이 사는 맨션 앞이었다. 이 자식이 설마 나를 진짜 대리기사로 써먹은 건가, 의구심이 강하게 들 때 즈음 호열이 안전벨트를 풀며 여즉 핸들을 붙들고 있는 대만에게 물었다. 안 내려요? 쾅, 소리를 내며 호열이 문을 닫았다. 대만은 핸들 위로 머리를 박은 채 잠시 되뇌는 시간을 가졌다. 이상한 생각 말자. 이상한 생각 말자.
"시, 실례합니다."
대만이 쭈뼛대며 호열을 따라 현관에 들어섰다.
"나 혼자 산다니까요. 겉옷 벗어서 줘요. 방에 걸어 두게."
으응. 대만이 꼼지락거리며 코트를 벗었다. 그러면서도 눈은 낯선 공간을 탐색하느라 휙휙 날아다니기 바빴다. 식탁에 기대어 그 모습을 가만 지켜보던 호열이 큭, 웃음을 터트렸다. 서른이 넘은 나이에 하는 짓은 꼭 같은 반 친구 집에 처음 놀러 온 초등학생 그 짝이었다.
"저녁은 아직이죠?"
집에 재료가 남아있던가. 냉장고 쪽으로 걸어가던 호열을 대만이 저지했다.
"됐고 술이나 한잔 하자."
거실에 서서 베란다를 내다보던 대만이 주방으로 걸어와 식탁에 앉았다. 호열이 느물느물 웃으며 대꾸했다.
"선수들이 속상하게 해요?"
그런 거 아니다. 단지 맨 정신으로 그날 일을 꺼낼 자신이 없었다.
호열은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을 가만 보다가 가스레인지에 불을 올렸다. 안주 거리만 간단히 할게요, 그럼. 대만은 아무래도 좋은 얼굴로 대충 손을 휘적였다.
술자리 분위기는 생각한 것만큼 어색했고 생각한 것보다 그리 나쁘지 않았다. 처음 한두 번 잔을 부딪혔을 때만 해도 아까부터 무슨 생각을 그리 하는지 입을 꾹 닫고서 호열이 하는 말에 고개만 끄덕이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호열이 묻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술술 불기 시작했다. 가령, 지난 일주일 간 대만을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한 사정에 대해서라던가.
"선수끼리 불화가 있었어. 다들 알면서도 쉬쉬하고 있었는데 나 없는 새에 일이 터졌고. 한 놈이 다른 놈 얼굴을 완전 묵사발로 만들어놨는데 문제는 맞은 쪽보다 때린 놈 손이 죄 망가진 거야. 그걸 보니까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더라고. 농구한다는 녀석이 손을 그렇게 만들어서 뭐 어떡하겠다는 건지."
포크로 얇게 썬 토마토를 쿡 찌르며 호열이 말했다.
"아. 예전에 대만 군처럼?"
"야."
대만이 벌겋게 익은 얼굴로 호열을 향해 휴지 조각을 던졌다.
"그나저나 넌 나를 언제까지 그렇게 부를 거냐?"
"대만 군이요?"
"그래, 그거!"
아무리 내가 동안이어도 그렇지, 인마. 내 나이가 벌써 서른이 넘었는데... 취기가 도는지 두어 번 고개를 털어낸 대만이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나이 많아서 좋으시겠어요."
"시비 거냐."
호열은 식탁 쪽으로 당겨 앉았던 몸을 바로 했다. 의자가 끼익, 우는 소리를 냈다. 그래서 나이 많은 대만 군은,
"어쩌다 이혼했을까?"
훅 들어온 질문이었다. 알딸딸한 취기가 정수리를 타고 스멀스멀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호열의 시선은 잔을 만지작거리는 대만의 왼손 약지에 머물러있었다. 대만은 마른침을 삼켰다. 대답하기가 마뜩잖은 듯이 양미간에 힘을 주고 끙, 앓는 소리를 냈다. 상관없었다. 어차피 호열이 묻고 싶은 건 따로 있었다.
"질문을 바꿀게요."
호열이 말을 잇기도 전에 대만이 잔에 남은 술을 들이켰다.
"왜 아직도 끼고 있어요?"
호열은 쥐치포를 뻗어 대만의 반지를 가리키며 물었다. 대만은 그제야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너무 소중하여 손에 닿는 것만으로 닳아버릴까 그 주변만 쓰다듬고 마는 꼴에 헛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미련이 남을 정도면 붙잡지 그랬어요."
"그런 거 아냐."
고개를 내저은 대만이 빈 잔에 술을 따르고 한번에 털어 넣었다.
"이건 그냥…. 속죄 같은 거야. 내가 죄인인 걸 잊지 않으려고."
"되게 나쁜 남편이었나 봐요?"
"그랬지."
식탁 위에 팔을 얹고 대만이 고개를 푹 숙였다. 어엉, 맞아. 엄청 등신이었어 내가. 한 마디 중얼거릴 때마다 흔들거리는 머리통을 호열은 말없이 바라봤다.
선수로서 삶이 끝났다고 해서 정대만의 삶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죽는 날까지 코트 위에 있고 싶다는 치기 어린 생각은 이미 옛적에 접었다. 그저 농구와 어느 한 면이 닿아있는 삶이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만족스럽지는 못해도 절망스러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였다. 은퇴식에 참여한 팬들도 울고, 심지어는 잠시 짬을 내어 보러 온 송태섭과 권준호도 울었는데 정작 본인은 초연하게 웃어 보일 수 있었다.
그게 오만이었다는 걸 알게 된 건, 감독으로 부임한 뒤 첫 예선 경기를 치를 때였다. 손에 감기는 농구공의 감촉, 언제나 자신을 밀어 올리던 코트의 바닥, 눈부심이 덜한 조명 아래 공을 뒤쫓아 가던 열기. 그 모든 것이 생생한데 대만은 코트 안이 아닌 바깥에 존재했다. 관중석의 함성소리와 끽끽, 경기장 안에 울리는 운동화의 마찰 소리가 대만을 늪에 빠뜨려 놓았다. 아주 깊고 헤어 나오기 힘든 절망이라는 늪으로. 그곳에서 대만은 철저한 이방인이었다. 이런 걸 농구와 닿아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그날 이후로 대만은 경기가 있던 날이면 좀처럼 잠에 들 수 없었다. 온몸이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것 같았다. 빠져나가지 못한 열기가 어서 자신을 내보내 달라며 시위를 벌이는 것 같았다. 눈을 감고 잠을 청하려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 숨을 헐떡였다. 찬물로 샤워를 하고 온 집안에 문이란 문은 죄다 열어놔도 소용이 없는 날엔 차라리 옷을 주워 입고 나가 정처 없이 달렸다. 손 하나 까딱 할 힘도 없이 집에 돌아와 소파 위로 뻗으면 가끔씩 대만의 무릎을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느릿느릿하고 차가운 손길이었다. 눈물이 날 만큼 그리운 손길이었다.
만에 하나, 진짜 만에 하나 말이야. 내가 농구 그만두고 정신 못 차리고 있으면 네가 좀 잡아주라. 한 대 갈겨도 용서할게. 한쪽 눈썹을 찡그린 채 입은 웃고 있는 묘한 얼굴로 호열이 그를 본다. 대만 군이 때릴 데가 어딨어요. 그러자 크하학, 대만이 웃음을 터트린다. 와, 방금 거 좀 웃겼다. 진짠데. 호열이 픽 웃으며 말한다. 대만 군은 단단한 사람이잖아요. 분명 가볍게 던진 말일 텐데. 대수롭지 않게 꺼낸 말일 텐데. 조금이라도 글썽인다면 두고두고 놀릴 게 뻔한데. 대만은 눈물이 날 것 같다.
그러니까 다 괜찮을 거예요.
아내와는 그즈음 만났다. 흑단처럼 검은 머리에 서늘한 광채가 어른대는 눈을 가진. 신비로운 사람이었다. 그 모습이 대만이 기억하는 누군가의 옛 모습과 꼭 닮아있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타인의 모습을 투영하는 건 나쁜 습관이라는 걸 알면서도.
"내가 다 망친 거야."
대만이 딸꾹질을 하며 마른세수를 했다. 눈을 가리고선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이어지는 말이 없었다.
"울어요?"
대답이 없다. 호열은 설마 하는 심정으로 대만의 귓가에 손가락을 튕겼다. 설마가 역시가 되는 순간이었다.
"하."
호열은 의자에 축 늘어져 도롱도롱 소리를 내며 잠이 든 대만을 바라봤다. 집에 처음 들어왔을 때만 해도 경계하느라 어깨도 움츠리고 있던 양반이 이제는 완전히 허물어져서 잠이나 퍼질러 자고. 같잖은 구실로 정비소를 제 집처럼 드나드는 것이, 호열을 마주할 때마다 하고 싶은 말을 꾹 참는 모습이 영 보기가 껄끄러워서 집으로 데려온 거였다. 카페나 음식점 같은 다른 선택지도 있었지만 배제했다. 집이야말로 대화를 나누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대화가 꼭 말로만 이루어지는 건 아니니까.
그런데 정대만은 정작 하고 싶은 말은 하지도 못한 채 술에 취해 잠이 들었다. 그러니 웃음이 나오지 않을 리 없다. 식탁 위로 쿵, 머리를 찧으며 호열이 조소했다.
"줘도 못 먹네. 정 대만."
대만을 부축해 방으로 들어갔다. 이불을 걷어 눕히고 허리 위에 올라와 앉았다. 가만히 대만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호열이 허리를 숙였다.
쪽, 쪽. 아이가 장난치듯 양호열이 목에 키스했다. 점점 입술이 올라갔다. 흉터가 남은 턱을 지나 자잘한 키스가 이어졌다. 뺨에, 눈가에, 콧등에. 입술을 제외한 곳곳에 도장을 찍듯 입술을 내린 호열이 지척에서 고개를 들었다. 대만이 눈을 끔뻑이고 있었다.
"깼어…."
"호열아."
대만이 호열의 말을 가로챘다.
"옛날에 말이야. 네가 나한테… 헤어지자고 했을 때."
호열이 숙이고 있던 허리를 폈다. 가슴 위에 놓인 손바닥이 그가 말할 때마다 웅웅거렸다.
"네가 그랬었잖아."
진눈깨비가 내리는 오후였다. 호열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쉰다. 감정을 읽어낼 수 없는 표정만큼은 여전하다. 그는 질척이는 바닥을 한번, 대만을 한번, 번갈아 보다가 입을 연다. 대만 군이…….
"망칠 거예요."
흐흐. 기억하네? 대만이 얼간이처럼 실실거렸다. 손을 들어 호열의 볼을 문질렀다. 따듯하고, 축축했다.
"어쩌면 네 말이 맞았는지도 모르겠어. 결국 우리 관계도 망쳤을 거야, 내가."
스르륵 팔에 힘이 빠져나갔다. 고르게 숨을 내쉰다. 대만은 다시 잠이 든 것 같았다.
호열은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고개를 돌려 귀를 기울였다. 눈을 감고, 대만의 심장 소리를 듣는다.
아뇨, 틀렸어요. 선배.
심장의 박동 소리 가운데 끼익 끼익, 흔들리는 소음이 변주처럼 끼어들었다. 눈을 뜨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호열의 아주 가까이에 와 있었다. 습지를 떠도는 바람 소리처럼 어둡고 음울한 목소리로 호열의 귓가에 속삭였다.
'호열아, 넌 나와 같아.'
너도 나처럼 될 거야. 목소리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당신은 나를 망칠 거예요."
쿵쿵, 심장 소리가 화답하듯 울려 퍼졌다.
호열대만
슬램덩크
3/14 호열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