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연갤 - 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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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보닛을 열어 엔진룸을 살펴보던 양호열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양호열이 근무하고 있는 정비소 업체의 사장이었다. 그는 양호열을 향해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있었다. 일명 '네 손님 왔다' 라는 암묵적인 신호였다. 눈만 들어 올려 그를 바라보던 호열이 숙이고 있던 허리를 폈다. 사장은 호열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고는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하, 씨발……. 꽉 막힌 천장을 보며 호열은 애꿎은 볼 안 쪽을 잘근 씹어댔다.
탕.
보닛이 제법 큰 소리를 내며 닫혔다. 정비소 한 가운데 사장이 일러둔 양호열의 '손님' 이 있었다. 그는 멋쩍은 얼굴로 호열이 있는 쪽을 살피다가 보닛이 내려가자마자 티가 나게 고개를 돌렸다. 호열은 기름때가 묻은 장갑을 벗어던지고 저벅저벅 그를 향해 걸어갔다.
'호열아, 사람은 사랑 없이 살 수 있을까?'
양호열의 얼굴에 잘 꾸며진 미소가 떠올랐다.
"이쯤되면 굿 한 번 해야겠는데."
장난기 섞인 핀잔으로 인사를 대신한 호열이 그의 옆에 나란히 주차된 차를 살폈다. 차체 옆면이 거나하게 긁혀있었다. 눈대중으로 상태를 파악한 양호열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남자를 마주했다. 한쪽 눈썹을 슬몃 올리고 자신의 오래된 흉터를 버릇처럼 만지작대는 그를, 그러니까
"대만 군."
정대만을.
십여 년 전 헤어진 연인이자, 수상할 정도로 자주 망가지는 차를 가진.
"아니면 일부러 그러는 건가?"
작열하는 태양 빛 아래 상반된 두 사람의 얼굴이 비쳤다. 대만은 끝끝내 웃지 않았다.
자그마치 십 년이었다. 십 년은 예사말로 강산도 변할 시간이었고 그동안 양호열은, 또는 그의 주변은 크고 작은 변화를 통과해 왔다.
자칭 농구천재 강백호는 풋내기 초짜 시절을 벗어나 이제는 걸출한 프로 선수가 되어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이용팔과 김대남은 의기투합하여 역에서 조금 떨어진 변두리 지역에 작은 이자카야를 차렸다. 고정 매출이 없어 속앓이를 하던 초반에 비하면 단골손님이 꽤 늘었는지 최근 들어선 종종 연장 근무를 하기도 했다. 가장 마지막까지 방황하던 노구식은 놀랍게도 이 중 가장 먼저 가정을 꾸렸다. 노구식을 손가락 하나로 휘어잡을 수 있는 멋진 아내와 웨딩 마치를 울린 뒤, 일 년도 채 되지 않아 아버지가 되었다. 무려 허니문 베이비였다. 성인 남자 넷이서 초음파 사진 하나를 두고 서로 보겠다며 아웅다웅하던 때를 기억한다.
그즈음 양호열은 두 번째 직장을 맞이한 참이었다. 그곳은 호열이 지금까지도 몸 담고 있는 자동차 정비소였다. 고등학교 시절 취미로 몰던 바이크가 어쩌다 자동차까지 진화해 왔는지 모를 일이지만. 남의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했던 정비복도 이제는 꼭 제 피부처럼 익숙하게 느껴졌다. 친구들은 근무지 밖에서 호열을 볼 때마다 사복을 입은 모습이 어색하다고 입 모아 말했다. 호열도 그 말에 동의했다.
그러니까,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는 양호열과 그의 주변이 이러한 변화를 겪었듯이 다른 이들 또한 별반 다를 바 없다는 거였다. 누군가는 그렇게나 하고 싶어하던 농구를 계속해왔을 것이고, 어린 나이에 입었던 부상으로 인해 조금은 이른 은퇴를 했을 것이며, 젊은 나이에 감독 자리를 꿰찬 그가 난데없이 결혼 기사 속 장본인이 되어도, 심지어는 다음 해 파경 소식을 전해와도, 그 모든 변화가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니라는 거다. 십 년의 간극이란 원래 그런 식으로 사람을 초연하게 만드는 법이다.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건데."
말없이 체크 리스트를 작성하던 호열이 넌지시 말했다.
"무면허는 아니죠?"
"뭐?"
대만이 황당하다는 듯 입을 벌렸다. 이내 주머니를 뒤져 지갑을 꺼내 들더니 호열의 눈앞에 면허증을 들이댔다. 호열이 씩 웃으며 대만의 팔을 잡아 내렸다.
"농담이었는데. 사진 잘 나왔네요."
대만이 지갑을 도로 넣으며 툴툴거렸다.
"너는 무슨 그런 농담을..."
"할 만해서 했겠죠? 한 달 동안 정비소에 방문한 것만 총 네 번이고, 그중 무려 세 번을 긁어서 온 양반이 억울할 게 뭐가 있다고?"
그러자 툭 튀어나와 있던 대만의 입술이 안으로 말려 들어갔다. 그는 슬그머니 호열의 눈치를 살폈다.
정대만이 아는 양호열은 셔터 내린 창처럼 제 속은 꽁꽁 감춰두고선 남의 속은 기민하게 파헤치길 좋아하던, 좀 많이 얄미운 녀석이었다. 도통 감추는 법을 모르는 저 같은 놈들의 수법이야 이미 진작에 알아차리고도 남았을 거였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유 없이 호열을 만나러 오는 건 정대만에게 턱없이 많은 용기를 요구했다. 왜 왔냐고 물어보면 뭐라 할 건데? 보고 싶어서 왔다고? 실은,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왔다고?
"지금 대기 차량이 많아서 오늘 중으론 불가능해요."
대만은 쾌재를 불렀다. 아니, 거의 그럴 뻔했다. 체크 리스트 판을 옆구리에 끼우고, 자신을 빤히 보고 있는 호열이 없었다면 그랬으리라. 내일도 양호열을 볼 수 있다. 억지로 구실을 만들지 않아도 되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그동안 자신의 소중한 애마에게 자행해 왔던 고문들이 보상처럼 느껴졌다.
"내일 오전에 찾으러 와요."
"엑."
오전에 일 있는데. 대만이 앓는 소리를 내며 뒷머리를 북북 헤집었다. 그리곤 스르륵 제자리로 돌아가는 대만의 손에 호열의 시선이 홀리듯이 따라갔다. 정확히 말하자면 왼손 약지에. 짝을 잃었을 게 분명한 반지 하나가 여즉 대만의 손가락에 남아있었다.
하하, 웃음이 터졌다. 미련한 건지, 멍청한 건지. 혹은 둘 다 거나. 난데없이 웃음을 터트린 호열에 대만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봤다.
"왜 웃냐?"
호열은 별 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일 끝나면 몇 신데요?"
"오전 중에는 끝나."
아마 여기 오면 한 시쯤. 호열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됐네요.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손을 흔들었다.
"내일 봐요."
내일도 봐요, 우리. 속을 꿰뚫는 눈빛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 정대만은 입을 두어 번 달싹거리더니, 마지못해 등을 돌렸다. 아쉽지만 내일도 기회가 있으니까.
우습게도 그 기회는 다음 날 오지 않았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정대만 스스로 놓쳐버린 것이라고 해야 맞았다. 내일 보자는 말에 가는 걸음마다 아쉬움을 뚝뚝 흘리고 돌아갔던 대만은 일주일째 감감무소식이었다. 호열은 정비소 마당 한편에 놓인 벤치에 주저앉아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이지 않은 채, 필터 끝을 씹었다. 마당 건너편에는 수리가 끝난 차량들이 일렬로 주차되어 있었다. 정대만의 차도 물론 그곳에 있었다. 소리도 없이 존재감도 없이. 그저 제 주인이 자신을 찾아가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면서.
퉤, 잇자국으로 엉망이 된 담배가 시멘트 바닥을 나뒹굴었다.
기분이 더러웠다. 호열은 이런 종류의 감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어두운 주방에 호열은 혼자였다. 따분한 표정으로 팔을 괴고선, 다 식은 음식을 내려보다가 나머지 손으로 그릇을 툭 건드려본다. 오늘은 안 오는 거겠지. 쓸데없다는 걸 알면서도 흘긋 눈을 들어 시계를 확인한다. 이미 대만과 약속한 암묵적인 시간은 지난 지 한참이었다. 퉁퉁 불은 면발을 개수대에 쏟아붓고 방으로 돌아와 눕는다.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천장을 향해 돌아눕는다. 그리고 생각한다. 보고 싶네. 아니다. 그건 생각을 한 게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비명 같은 것이다. 호열은 입 안에서 그 말을 한참 굴려본다. 보고 싶다. 보고 싶어.
토할 것 같아.
그는 튕기듯 일어나 화장실로 뛰쳐 들어간다. 변기통에 머리를 처박고 헛구역질을 했다. 숨이 막혔다. 산불처럼 번지는 흉통을 눈을 감고 흘려보낸다. 잦아들기를 기다린다.
호열아, 사람은 사랑 없이 살 수 있을까?
지척에서 누군가 속삭였다. 끼익 끼익, 무언가의 하중을 지탱하며 흔들리는 소리가 점차 크게 들려왔다. 호열은 귀를 막고 소리쳤다.
오지 마. 나한테 오지 마.
"……열."
아득한 곳에서 대만의 목소리가 들렸다.
"양호열!"
호열의 팔목이 덥석 붙들렸다. 동시에 호열의 고개가 강한 힘에 의해 쳐 들렸다. 대만이 걱정을 품은 눈으로 호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디 아파? 왜 이러고 있어."
세상에, 땀 좀 봐. 대만이 중얼거리며 호열의 뺨을 문질렀다. 멍하니 손길을 받아들이던 호열이 벌떡 일어나 고개를 털었다. 됐으니 떨어지라는 의미였다. 대만은 그렇게 했다.
잠시 고요가 찾아왔다. 꽤 길고 어색한 침묵이었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호열이었다.
"늦었네요."
그러나 내뱉자마자 후회했다. 호열의 말은 꼭 대만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들렸다.
"아……. 미안. 사정이 생겨서 도저히 찾으러 올 짬이 안 나더라고."
호열은 별다른 대꾸 없이 대만을 지나쳐 걸었다. 사무실에 들어와 차키를 건네주곤 대만이 무어라 말을 걸 틈도 주지 않고 빠져나갔다. 불투명한 유리로 둘러싸인 사무실 안은 외부를 떠나 작업 공간 또한 볼 수 없었다. 식은땀을 흘리던 호열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디가 아픈 걸까. 아프면 아프다고, 솔직하게 말해주면 좀 좋은가. 예나 지금이나 저 좋을 대로 행동하는 데는 도가 튼 놈이었다. 지갑을 꺼내는 대만의 손길이 다급해졌다. 이대로 호열을 보낼 수 없었다.
"정대만 선수, 아니다. 이젠 감독님이지. 아무튼 맞죠?"
카운터에 앉아있던 사장이 지폐를 받아 들며 물었다. 아, 예. 대만은 예의상 웃어 보였다.
"그렇죠? 그럴 줄 알았어. 내가 정대만 선, 아니 감독님 프로 데뷔했을 때부터 팬이었거든. 그래서 우리 정비소에 처음 왔을 때 어찌나 놀랬는지. 호열이랑은 어떻게 아는 사이예요?"
"고등학교 선후배였습니다."
"그것 참 기막힌 우연이네. 아니다. 이 정도면 운명인가?"
사장은 말이 길었다. 손은 믿을 수 없이 느렸다. 거스름을 그렇게 세다가는 지나가던 나무늘보도 혀를 찰 것이 분명했다. 그럴수록 대만의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갔다. 저도 모르게 손톱으로 카운터 위를 두들겼다. 탁탁, 탁, 탁.
"근데, 혹시 호열이랑 싸웠어요?"
탁. 대만의 움직임이 멎었다. 방금 호열의 이름 뒤로 붙으면 안 되는 단어를 들은 것 같은데.
"저요?"
양호열과 싸움이라니. 일방적으로 자신이 당하는 거면 모를까. 얼떨떨한 심정으로 사장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니, 감독님이 마지막으로 다녀간 뒤로 얘가 완전 이상해졌다니까요. 일하다 말고 툭하면 멍을 때리질 않나, 난데없이 한숨을 푹푹 내쉬질 않나. 담배도 끊겠다던 놈이 작업실에 안 보인다 싶으면 나가서 줄담배나 피우고 있고. 어제는 생전 안 하던 실수까지 하더라고요. 초짜도 안 하는 실수인데 잘못하면 다칠 수도 있거든요. 근데 이 놈이 정신 좀 차리라고 마당에 내다 놨더니 글쎄, 허공을 빤히 노려보고 있는 거야. 나는 눈에서 송곳이 튀어나오는 줄 알았어요. 어찌나 서슬이 퍼런지 등골이 다 오싹할 정도였는데. 근데 가만 보니까 그냥 허공을 보는 게 아니더라고. 그거요, 그거.
사장이 턱짓으로 대만의 차키를 가리켰다.
"그래서 난 또 둘이 싸웠나 했지."
대만은 자신의 손바닥을 들여다보다가 이내 꽉 쥐어 보였다.
"사장님. 저 가야 할 것 같아요."
"응? 아직 거스름돈……."
대만이 우당탕 소리를 내며 사무실을 나섰다. 나서려고 했다. 문 밖에 양호열이 서 있었다. 언제 옷을 갈아입었는지 그는 정비복 대신 사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가는 거예요?"
"...어? 어."
너한테. 뒷말은 굳이 전하지 않았다. 대만이 하려고 했던 말을 호열이 가로챘기 때문이었다.
"그럼 나 좀 태워줘요."
고개를 살짝 기울인 호열이 소리 없이 웃었다. 그 얼굴 위로 정비소 사장이 말했던 서슬 퍼런 얼굴이 겹쳐졌다. 눈앞에 서 있는 이 말고 그 너머를 노려보던 눈. 화난 것 같기도 하고 서글픈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두려워하는 것 같기도 했던 그 빙벽 같은 눈을. 내가 언제 봤더라.
"그래. 그러자."
호열이 빙글 몸을 돌려 앞장섰다. 두어 발짝 거리를 두고 대만이 따라갔다.
호열대만
슬램덩크
미토데이 기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