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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03 04:15
알오AUㅈㅇ 연반ㅈㅇ
노부가 잠시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고 있자, 마치다는 창틀에 올리고 있던 팔을 내려 다시 단정하게 앉더니 사르르 웃었다.
"이런 사정을 알았는데도, 그 사람을 만나러 가실 겁니까?"
노부는 한숨을 내쉬었다. 믿고 싶지 않지만, 마치다의 말이 사실이란 걸 알고 있었다. 노부에게 마음이 있었다면, 그저 제멋대로인 황태자에게 휘둘린 것뿐이라면 그렇게 냉정하게 노부를 외면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 사람이 노부를 신분상승의 사다리로 이용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노부가 그를 좋아한다고 해도 스즈키 공작가에서 지방의 작은 자작가문 출신의 그를 소공작의 배우자로 받아주는 게 순탄치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기존에 이미 자작가의 자제를 후궁으로 들인 적 있던 황태자를 노리기로 한 거겠지.
노부의 어머니는 노부에게 뒤늦게 첫사랑에 빠진 거냐고 했지만. 이런 가슴의 간질거림은 처음 겪는 노부도 첫사랑인가보다 했지만, 그건 어쩌면 집착에 가까웠다.
그 사람을 만날 때마다 귓가를 간질이는 빗소리가...
"황태자 전하는 정말로 튤립궁에 그 사람을 들일 생각이 없답니까?"
"그럴 리가요. 그 사람은 튤립궁에 들어갈 겁니다. 우리의 전하께서 자기 고집을 꺾을 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들어간다 해도..."
"쉽지 않겠지요. 백합궁은 겉으로는 조용하고 얌전한 편이라고 하지만 심계가 결코 얕은 이가 아니고... 이번에 엄하게 처벌받은 히스궁이 튤립궁을 가만히 두지 않을 겁니다. 황실에 들어갔으면서 후궁 하나 느는 걸 못 견디고 기어이 일을 치고만 본인의 자업자득이지만. 본인은 궁 밖 출입이 금지된 상태라고 해도 수족이 한둘이 아니니. 게다가 장미궁은 장미궁입니다. 태자비와 후궁의 신분과 처지는 천지차이죠. 태자비의 성정은 부드럽고 온화한 편이라 알려져 있지만 그 독한 백합궁과 히스궁이 장미궁 앞에서 말 한 마디 편히 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태자비가 정말로 소문처럼 그저 부드러운 이겠습니까? 집안의 혼기 찬 언니들의 데뷔탄트 연회까지 막아가며 황태자의 후궁을 차지한 백합궁이나 기어이 튤립궁에 배설물을 퍼붓고 불을 지를 정도의 히스궁도 장미궁 앞에서 입도 뻥긋 못하는데 튤립궁이라고 가능하겠습니까. 그래도 뭐... 소공작과 황태자를 이용해 신분을 상승하려고 마음 먹었을 때야 그만한 각오도 돼 있었겠지요."
"..."
"그 사람이 튤립궁에서 어떻게 살아갈지는 훗날의 일이고 일단은 어떻게든 튤립궁에 들어갈 겁니다. 그런데도 그 사람을 만나러 가실 겁니까?"
마치다 케이타는 그렇게만 물었지만, 노부에게는 그 질문이 그는 노부와 황태자를 이용하려고 마음먹었을 때 닥칠 모든 시련도 각오했겠지만, 너는 코 앞에 결혼식이 닥친 지금 황실 사람들은 물론이고 많은 귀족이 있을 오페라 극장에 가서 그 사람을 만나는 일이 불러올 후폭풍을 감당할 각오가 돼 있느냐고 묻는 것 같았다. 어차피 그 사람은 또 다시 노부를 이용해 튤립궁에 보다 쉽게 들어가려 할 뿐인 걸 알면서, 결혼식을 앞둔 입장이면서 기어이 황태자의 후궁이 될 이를 공개적으로 만날 각오가 돼 있느냐고. 자신의 가문과 자신의 결혼, 그리고 자신의 반려가 될 마치다 케이타에게 덮어씌워질 오명과 비웃음을 기어이 감수하면서 또 다시 그의 사다리가 돼 주려 하느냐고.
잠시 마차 안에는 말발굽이 수도 전역에 깔려 있는 돌바닥을 딛는 소리만이 울렸다. 그렇게 얼마쯤 더 갔을 때, 마치다가 손을 뻗어서 허벅지 위에 올리고 있던 노부의 손을 잡았다. 내내 냉철하고 서늘하게 굴던 사람답지 않게 손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따뜻했다. 마치다는 검을 쥐어서 손에 굳은 살이 박힌 따뜻한 손으로 노부의 손을 감싸쥐며 차분하게 말했다.
"다시 저택으로 모셔다 드려도 되겠습니까?"
노부는 마치다의 따뜻하고 단단한 손에 그저 맡겨만 두고 있던 손에 힘을 줘 손을 빼 내고 노부의 다리 위로 힘없이 떨어지는 마치다의 손을 잡았다. 노부가 손을 뺏을 때 잠시 흐려졌던 마치다의 눈빛에 다시 빛이 돌아오는 걸 보며 노부는 힘겹게, 그러나 확실하게 말했다.
"공작저로 돌아가 공작저의 마차로 갈아탑시다."
"... 갈아타고요?"
"오페라 좋아하십니까?"
그 말 한 마디로 노부는 마치다를 만난 이래로 가장 신나게 웃는 마치다를 볼 수 있었다. 장난을 꾸미는 아이처럼 신나게 웃는 마치다를 보는 순간 어째서인지 귓가에 빗소리가 아스라히 들렸다.
두 사람이 오페라 극장에 도착한 시간은 인터미션 직전이었고 곧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노부는 오페라 공연을 딱히 즐기진 않았지만 어머니인 공작부인은 오페라를 좋아했기 때문에 사교 시즌이 되면 수도의 유명 오페라 극장들에 스즈키 가문의 이름으로 로열박스석을 장기임대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번 공연에도 물론 스즈키 가문의 로열박스석이 준비돼 있었지만, 오늘의 목표는 공연 관람이 아니라 마치다와 함께 온 모습을 보이는 것이었기에 그 사람을 데리고 공연 관람을 온 다른 가문의 공작부인에게 다가가 인사를 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공작 부인."
노부가 팔꿈치 위까지 올라오는 긴 장갑을 낀 공작부인의 손에 입을 맞추며 인사하자, 공작부인은 노부와 나란히 선 마치다를 번갈아 보더니 곧 화사하게 웃었다.
"스즈키 소공작과 마치다가 영식의 약혼 연회에 다녀온 딸이 두 사람이 정말 그림처럼 잘 어울린다고 하더니, 그 말 그대로군요. 두 공자의 약혼 연회는 일이 있어 참석하지 못해서 아쉬웠어요. 두 사람의 결혼식을 기대하고 있답니다."
황싱은 대대로 공작가와는 결코 인척 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비가 아닌 후궁이라도 공작 가문에서 나오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 역사를 깨고 자신의 양아들을 황태자의 후궁으로 들여보낼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니 이 공작가가 얼마나 설렜겠는가. 게다가 이 공작 가문은 변방에 있는 영지를 직접 다스리고 있는 스즈키 공작가와 달리 가주가 재정대신을 맡아서 수도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영지를 관리인에게 맡기고 있는 가문이라 더더욱 이 기회를 이용해 황실과 가까워질 욕심에 두근거리고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지금은 정비 아래 고개 숙여야 하는 후궁의 입장이지만, 별 일이 없는 한 황태자는 황제가 될 테고, 황태자의 자식 중 누가 황위를 잇게 될지는 가 봐야 아는 일이다. 꼭 정비의 자식이 황제가 되리란 법도 없지 않은가. 정비가 자식을 낳을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판에. 그러니, 황실과 공작가를 이어줄 고리가 될 그 사람을 마음에 품고 있는 노부가 거슬렸는지, 이번 사교 시즌 내내 노부를 눈엣가시처럼 보던 사람인데. 노부가 약혼하고 나자 공작 부인은 언제 그랬냐는 듯 친절하고 다정하게 노부를 대했다.
"공작부인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멋진 결혼식을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어머. 무슨 소리람. 결혼식의 주인공들이 이렇게 멋지고 아름다운데 당연히 제국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결혼식이 될 텐데."
그렇게 노부와 공작부인이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는 동안 당연히 공작부인의 옆에 서 있던 그의 얼굴은 시시각각 창백해져 가고 있었다. 노부는 여전히 그가 왜 노부를 만나려 했는지 알 수 없었다. 마치다의 말처럼 튤립궁에 들어가기 위해서 노부를 이용해 황태자의 마음을 움직이려 한 건지, 아니면 혹시 황태자를 포기하고 노부에게 돌아오려 한 건지. 하지만 어느 경우라도 노부에게 진심으로 마음이 있는 건 아니었을 것이다.
정말로 노부에 대한 애정 때문에 노부를 만나려 한 거라면.
이렇게 관심이 집중될 장소에서 노부를 따로 만나려 했을 리가 없었다. 황태자의 후궁이 될 이와 공개적으로 만남을 가진다면 노부는 황태자의 적의와 집안의 분노를 마주하게 될 것이고, 안 그래도 늘 공작 가문을 경계하는 황실은 노부가 추문에 휩싸인 틈에 공작가를 공격할 것이다. 노부의 부모님은 결코 노부를 내치지 않겠지만... 노부를 내치지 않기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해야겠지.
당신은 당신의 신분상승을 위해 나와 우리 집안이 그 정도 희생까지 해 줘야 한다고 믿는 것인가.
그렇다면 유감이지만...
"오랜만입니다."
어머니의 말처럼 당신이 내 첫사랑이었는지, 아니면 그저 그날 떠오르려다 사라져 버린 기억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내 집착이었는지 모르지만.
당신에겐 난 그저 소모품이었던 듯하니.
"이 분은 제 약혼자인 마치다 케이타입니다."
실시간으로 눈에서 초점이 사라지는 그를 보는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그런데.
세상을 잃은 것 같은 표정으로 서 있던 그가 갑자기 노부의 팔짱을 끼려고 했다.
노부의 바로 옆에 약혼자라고 소개한 마치다가 있는데도.
노부가 여전히 의아한 상태로도 몸을 빼려고 한 순간, 마치다가 재빨리 강한 힘으로 노부를 제 쪽으로 끌어당기며 거의 끌어안듯이 바짝 팔짱을 꼈다. 그리고 그 순간, 노부의 뒤에서 황태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에 다들 모여 있었군."
그가 왜 갑자기 무리하게 노부의 팔짱을 끼려 했는지 깨달은 노부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지는 게 노부 자신에게도 느껴졌다. 마치다가 제때 노부를 끌어당기지 않아서 노부가 진짜로 황태자의 후궁이 될 자와 팔짱을 꼈다? 그리고 그걸 황태자 본인과 많은 귀족에게 들켰다? 그건 노부의 목숨만으로도 해결되지 않을 일이었다. 노부가 목숨을 내놓아도 스즈키 공작가에서는 더 많은 걸 내놓아야 할 것이었다. 공작 작위를 지키지 못할 수도, 영지를 지키지 못할 수도 있었다.
고작 저의 인생에 꽃길 따위나 깔기 위해서 노부와 스즈키 공작가가 모든 것을 다 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노부가 지나치게 큰 충격과 분노에 굳어 있자, 마치다는 노부와 팔짱을 끼고 있던 손을 조금 풀어 노부의 팔을 토닥이면서 황태자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황태자 전하."
황태자는 마치다를 향해 고개를 살짝 까딱해주고 이 자리에서 제일 윗사람인 공작 부인을 향해 고개를 살짝 까딱였다.
"공작 부인, 오랜만이오."
그리고 공작 부인의 옆에 선 그를 바라보는 황태자의 시선이 조금 차가운 걸 보며, 노부는 어쩌면 마치다의 생각이 틀렸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원하는 건 뭐든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의 이 비뚤어진 황태자 전하에게 그는 이미 '원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겠다고.
그게 노부가 이 오페라 극장에 불려왔어야만 했던 이유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노부가 이제 얼굴도 보기 싫은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 마치다를 돌아보자, 마치다는 여전히 노부의 팔을 토닥이고 있다가 노부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마치다의 입술이 열리는 걸 보며 살짝 고개를 숙이자 귓가에 약간 낮지만 그래서 더 부드럽게 들리는 목소리가 작게 들렸다.
"내가 있으니까 괜찮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 네."
"아시잖아요."
"...?"
"내가 있으니까 괜찮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무슨 말이냐고 물으려는 찰나, 마치다의 목소리보다 한참 어린, 아직 변성기도 맞지 않은 어린 소년의 목소리가 문득 떠올랐다.
'내가 있으니까 괜찮을 거예요. 걱정마세요.'
노부보다 한참 작아서 노부를 올려다보고 있던 소년의 말간 얼굴을 적신 빗물을 닦아주던 노부 자신의 손과.... 눈을 반짝이며 노부를 올려다보던 소년의 눈이 반짝...
노부의 귓가에 다시 빗소리가 들렸다. 다만, 이 빗소리는 환청이 아니었다. 창밖에 번개가 번쩍거리며 우뢰가 하늘을 울리고 있었다. 뇌우 소리가 가까스로 떠올랐던 기억을 다시 저 아래로 묻어버렸다.
#노부마치
#첫사랑과두번째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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